이 순간에도 직업은 늘어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급변하는 직업세계를 체계적으로 조사·분석해 국민들의 진로 선택을 지원하고 일자리 정책에 활용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한국직업사전>을 발간하고 있다. 매년 직군별로 발간하고 있으며 2019년 한국 직업사전에는 16,891개의 직업이 등재 되어 있다. 이를 보면 직업이 많기도 하려니와 생성과 소멸이 수시로 반복됨을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업을 통하여 의식주를 해결하고 인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긍지와 생의 보람을 느끼며 살아 간다.
직업도 유효기간이 있는 듯 생겨났는가 하면 어느 새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다시 생겨나는 주기를 반복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정말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 무척이나 고민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어렵게 구한 직업도 사양길을 걷거나 직업을 바꿔야 할 경우도 생긴다. 이는 학문 세계의 교과 과목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들 세대가 직업을 구하던 1980년대 전 후의 시기는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의 가속 폐달을 밟던 시절이어서 일자리가 많았으며 쉽게 직장을 구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크게 분류하면 공무원을 포함한 공공기간 근무자와 기업체 근무자로 대별되던 시기였다.
요즘은 대기업에 입사하려면 고시공부 하는 만큼의 어려운 관문이지만 당시는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인문계나 이공계 구분 없이 시·군마다 대기업에서 조차 모집책을 두고 스카웃 아닌 스카웃 경쟁이 벌어지던 시절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우조선, 현대조선, 현대자동차, 포항제철 같은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에서 한 해 동안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의 산업 역군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해외 수주까지 활발하니 그야말로 우리나라 경제규모의 성장속도는 기적이라 할 만큼 공장 기계음이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던 시기였다.
지금과 다른 또 하나의 특징은 이직률이 적어서 입사하면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정년퇴임 까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주 5일 근무제가 아니어서 작장동료와 보내는 시간이 가족보다 많았음은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내가 출산을 하여도 회사일이 먼저라는 인식이 심겨져 있어 출산일에 출근 하는 남편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아내 혼자 이사를 하여 퇴근하는 남편이 동료들과 밤늦도록 술잔을 나누다가 집을 찾지 못하였다는 일화도 전설처럼 전하여 졌다.
나의 첫 직장은 대학이었지만 대학 가운데서도 학술정보를 담당하는 부서이다 보니 업무 특성상 교내에서도 부서 이동이 전혀 없는 곳이었다. 그러니 몇 십 년씩을 동료와 함께 생활하다보니 미운 정 고운정도 정이려니와 동료직원들이 서로의 가정 대소사를 훤하게 꿰뚫고 있어 자연스럽게 함께 걱정하고 함께 의논하기가 일쑤였다. 흔히하는 말로 숟가락 몽댕이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고 갑 질 하는 상사로 낙인 찍혀 신문에 보도될 일이지만 그때 그 시절엔 직장 상사가 이사하는 날이면 이삿짐을 함께 싸고 나르던 동료는 어엿한 가족 이었다. 이사를 마치고는 전 직원을 초대하여 ‘집들이’라는 것을 하면서 밤을 지새우며 술잔을 나누던 정감 어리고 살 맛 나던 시절이 우리에겐 있었다.
퇴직 후 혼사 등에서 가끔 후배들을 만나 그 시절을 회상하면 일 년이 되어도 술 한 잔 나누고 밥 한 끼 함께 먹기가 어렵다고 했다. 주 5일 근무가 되면서 금요일 오후만 되면 주말 분위기가 되어 동료 보다는 철저하게 가족중심으로 변화된 문화가 된지 오래 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나쁜 문화라고 단정하고자 함이 아니다.
어쩌다보니 딸애가 대학에서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흔히들 사람들은 우리 회사는 가족 같은 회사라고 종종 말한다. 딸아이에게 틈만 나면 정감어린 옛날이야기를 들려 줬다. 어느 날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젖어있었다. 동료 때문에 너무 힘이 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이제 가족 같은 직장은 없다.
철저히 시험과 면접을 준비하여 업무에 적합성을 자로 잰듯하며 경쟁구도 속에 사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가족 같은 직장일 수 있을까? 설령 가족일지라도 문화가 핵가족화 되어서 자기 밖에 모르는데 동료와의 우정 관계를 우선 시 할 수 있을까? 이제 동료는 가족이 아니라 단지 경쟁 상대일 뿐이다. 이삿짐은커녕 급한 일이 생겨 휴일 날 동료에게 전화를 걸면 몰상식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세상이 되었다. 흐느끼는 딸아이에게 “지금이 고비야 잘 참아" 라고 자신이 없는 목소리로 타이르는 것이 고작 이었다.
“지금 네가 있는 그곳을 가족 같은 직장으로 만들어야 해” 라고 하면서도 왠지 마음 한켠이 공허하다.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 된 직장 생활에서 가족에게는 말 못할 이야기 끼지 나누며 살았던 우리들 세대는 두 가족이 한 가족 같은 모습으로 살아왔음이 참으로 행복했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