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는 반드시 ‘쓰이다’와 함께 쓰이는 짝말글입니다. 우리말 우리글=한글은 짝말글이기 때문입니다.
‘쓰다’ : 글을 쓰다, 잡은 것(도구,그릇)을 부리다, 쓰다(맛), 쓰이다, 쓰이게 되다.
‘나’는 ‘나’를 ‘무엇’으로 쓰는가”가 알맹이=핵심입니다. 또 어떻게 쓰고, 쓰이고 있는가를 물어봐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왜, 어째서, 누가 나를 쓰는가를 물어봐야 합니다.
쓰는 ‘나’와 쓰이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쓰는 만큼, 쓰이는 만큼 ‘나’는 값=가치가 생겨납니다. “언제 쓰는가-쓰이는가, 어떻게 쓰는가-쓰여지는가, 왜 나를 쓰는가-쓰이고 있는가”에 따라서 ‘나’는 ‘나’가 됩니다.
1)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다"의 명증. ‘나’는 ‘나’를 어떻게 보고 생각(여기고)하며, 얼마나 값진=무게 있는 존재(나)로 보고 있는가? ‘나’는 온누리(우주)에서 유일한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이 내려주신 바(ㄱ)로 스스로 존중하고, 스스로 존중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유일한-독생자입니다. 유아독존자로, 독생자(獨生子)로 회복되어야 할 ‘나’를 찾아서 ”오늘도 ‘나’는 이 길을 간다“여야 합니다. 나는 내가 나를 스스로 살아 있는 ‘나’인 우주=한울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천상천하유아독존자(天上天下唯我獨尊者)이자 하나님의 독생자로 써야 합니다. 티 묻지 않게, 또 하늘, 따앙,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한 점 부끄럼 없이 쓰고 쓰여야만 합니다.
다른 것이 ‘나’를 이런 존재다, 저런 존재다로 규정하는 그러한 짓거리(자격증-박사학위-교수, 과학자, 시인, 예술가, 사제, 목사, 스님, 기술자) 따위에 연연하지 아니하는 '나'를 찾아내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당당한 대답을 지어내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하는 만큼 나는 나를 그만큼 쓰고 쓰여지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나'를 찾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무엇을, 어떻게, 왜'에 대한 대답이 내려집니다.
누구나-내가 나를 나답게-당당하게, 언제나-나는 이제 나답게-당당하게, 어디서나-나는 여기에서 나답게-당당하게, 어떻게나-나는 나를 나답게-당당하게, 무엇이나-나는 나를 나답게-당당하게. 어째서나-왜나-나는 나이기에 나답게-당당하게
2)'쓰다'와 '쓰이다'의 얼과 뜻
'쓰다' : 'ㅅ+ㅅ+ㅡ+다'입니다.
'ㅅ' (시옷): 목숨, 숨, 살다+살리다=삶,생명을 뜻합니다.
'ㅆ'(겹시옷) : 나의 목숨+너의 목숨은 한 목숨이다.
'ㅡ'(으) : 되다, 되어지다, 쓰다, 쓰이다.
'쓰다'는 '나는 너가 되고, 나의 목숨은 곧 너의 목숨이고, 너와 나의 목숨은 우리의 목숨으로 쓰여지다, 그리되다'를 뜻합니다. '한 목숨'을 뜻합니다. '한울=우주의 목숨'을 뜻합니다.
'쓰이다'는 '남이 나를 쓰다, 나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 씀(쓰임)을 받는다'는 시킴꼴(사역)입니다.
'쓰이다'는 '쓰이게 되다'를 뜻합니다. '쓰다', '쓰이다'의 그 바탕=밑의 얼과 뜻은 "나의 목숨과 너의 목숨이 '한몸짓기'로 우리 목숨=온 목숨으로 한울=우주 목숨으로 쓰다, 쓰여지다를 뜻합니다.
'ㅅ(시옷)'은 '살다+살리다'의 알맹이 숨입니다. 살다와 살리다는 삶으로써 구원자와 구원받는 자를 한몸으로 짓는 세상 구원의 핵심적인 척도입니다.
나는 너를 살리다.
너는 나를 살리다.
너와 나는 우리를 살리다.
우리는 나와 너를 살리다.
위의 도식이 다름 아닌 한겨레의 구원관=메시아관, 그리스도관, 부처관, 도령관입니다. 우리 겨레의 구원관은 너와 나가 따로가 아니라 우리로 구원되어야 하는 한울구원관입니다.
"죄 지은 놈 옆에 있다가는 벼락 맞는다"입니다. 착한 사람 앞에 있으면 착하게 된다는 사실 증명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낫다'는 구원관입니다.
그래서 '살다'는 '살리다'의 짝말글입니다. "나만 잘살다"는 없고, "너만 잘살다"도 없는, "우리가 모두 잘 살다"만 있습니다. 그것이 '살리다'입니다. 그래서 쓰이기만을 바라는 사람은 '술=기술'에 빠지게 되고, '잘 쓰다'만을 바라는 사람은 홀로에 떨어집니다.
'쓰다'와 '쓰이다'는 짝말글이기 때문에, 나도 잘 쓰고, 너도 잘 쓰이는 우리 모두가 잘 쓰고 잘 쓰이는 누리를 지어 나가야 합니다. 때문에 '나'는 어디에서 쓰이고 있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앉을 자리와 누울 자리를 잘 보아가면서 몸을 부려 놓아야 합니다.
언제 나를 쓰이게 할 것인가? 때와 철의 문제입니다. 때도 모르고 철도 모르면 때이른 늦은 또는 때아닌 때가 되고 때늦은 일이 생깁니다. 철도 모르는 철없는 사람이 되어서도 아니 되겠지요.
나는 때에 따라서 알맞게 쓰여지고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철따라 때에 알맞게 피어나고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때와 철에 맞지 않는 과일-열매는 제 때와 제 철을 잊어-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는 옳게 쓰이지가 않을 것이 뻔한 일입니다. 어떻게, 왜 쓰이는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쓰이는 까닭말입니다.
돈도 그리하며, 때와 곳=철과 자리도 그러합니다. 몸도 그러하고 말도 글도 그러하며, 나도 그리하니 얼과 뜻도 그러합니다.
언제, 어디엥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를 물어야 합니다. 특히 나는 '나'를 뭉엇으로 쓰고 있는지? 다른 사람-이웃은 '나'를 무엇으로 쓰고 있는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그래서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ㅁ먹어봐야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3) '쓰다', '쓰이다'의 무게=갑어치(가치)
내가 '나'를 쓸 때 어떠한 무게=값어치=가치로 쓰고 있는가? 쓰이고 있는지 깊게 성찰해 봐야 합니다.
'나'는 가장 귀한 '우주=한울'의 값어치가 있습니다. 나를 그렇게 우주=한울의 값어치로 쓰고, 그렇게 쓰여야 합니다. 그만큼 한울 값어치를 두고 있지 않을 때, 거기에는 '나'를 부려 놓아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나를 쓸 때, 또는 쓰일 때는 내 자리매김, 내 몸의 값어치, 나의 때와 철매김, 우주=한울의 무게=값어치=가치매김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쓰다'와 '내가 쓰이다'는 바로 내가 대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 씀과 쓰임의 무게=값어치=가치매김에 대해서 스스로 대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무게는 내가 씀, 쓰임의 척도입니다. '나'를 우주의 한울 무게로 쓰고, 쓰일 때 텅 빈 넉넉함은 꽃처럼 피어나고, 알차게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나를 '쓰다, 쓰이다'는 내가 잘 살고 있는 주체이냐, 아니면 잘 살고 있지 못한 얼간이냐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또한 '나를 쓰다'와 '내가 쓰이다'는 내가 잘 살리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쓰다'와 '쓰이다'의 무게는 바로 '내가 잘 살고 있느냐, 내가 다른 나를 잘 살리고 있느냐'에 대한 대답입니다. '쓰다'와 '쓰이다'의 무게=값어치는 나의 '쓰다'와 '쓰이다'의 우주=한울 값어치입니다.
다사함 김명식의 따뜻한 혁명, 자연수행의 길 <텅 빈 넉넉함으로 > , 제4부 '텅 빈 넉넉함으로 : 몸의 아름다움' 중에서)
첫댓글 점점 어려워요.
일단 '쓰이다'는 내가 주체가 아닌 것.
그래서 인사가 만사라고 하지요.
사람을 잘 쓰고, 그 사람은 뜻에 따라 잘 쓰여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자꾸 불협화음이 나는가 봅니다.
그대의 수고 덕분에 도인이 되어 갑니다.ㅎ 감사합니다.
쓰다 쓰이다ㆍ결국 나와 너가 하나다ㆍ그릫게 이해하면 되는 거쥬 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