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달,일주향] 남 男(3권) 19. 피는 흐르고…

[ㅎHㅅiㅅi]

제3권
 
       사마달·일주향



- 차례 -


제 19 장   피는 흐르고……  
제 20 장   전음도양(顚陰倒陽)
제 21 장   미리빙옥수(彌離氷玉手) 
제 22 장   도화수파(桃花隨派) 야소랑(野素 )
제 23 장   성골탄생 (聖骨誕生)
제 24 장   포로(捕虜)
제 25 장   인간침대(人間寢臺)의 자원(自願)
제 26 장   살인침대(殺人寢臺)
제 27 장   천외천랑(天外千狼)
제 28 장   복수(復讐)
終    章







제 19 장   피는 흐르고…


1

정룡현은 기가 막혔다.
이게 웬 귀신 놀음인가. 어떻게 이렇게 간단할 수가 있는가. 완전히 걸려 들었다고 판단한 순간 간단하게 달아나 버리는 마고의 경공술에 그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전각과 담장 사이사이에서 군인들이 우르르 우르르 몰려 다녔지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물론 그들 하나하나가 무공이 높고 경공술도 남못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처음부터 마고인 것을 알았으면 이렇게 어이없이 놓치지는 않을 것을 비선과가 날고 나서야 그녀임을 알았으니 자신의 무능함을 탓할 수밖에.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힘차게 허공을 날아서 부하들과는 달리 홀로 다른 방향으로 신형을 쏘아갔다.
그는 마고가 마냥 전각에서 전각으로 허공을 날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제 주변의 하늘은 대낮보다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파리가 날아도 눈에 보일 지경이다.
그렇다면……,
정룡현은 전각과 담장 사이의 지면에 내려앉아서 숨을 죽이고 빠르게 지면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곧 성곽의 서문 밖으로 통하는 수로 위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자신의 독문절기인 흑광도(黑光刀)를 쥐고 수로 옆의 풀숲에 반듯이 누웠다.
생각하기에는 엎드려 있는 것이 기습에 쉬울 것 같지만 그것은 기습을 해보지 않은 자들의 헛망상에 불과하다.
노루목에서 목표가 오기를 기다려서 기습하려는 생각이라면 누워서 기다리는 것이 좋다.
만일 엎어져 있다면 고개를 들거나 돌리지 않고는 절대 목표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오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반듯이 누워서 적을 기다린다면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적을 바라보고 있을 수가 있다.
물론 어둠 속에서 엄폐물 속에 있는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스스스…… 전각들이 끝나고 담장이 길게 늘어선 자리에 검은 그림자가 날렵하게 내려섰다.
횃불이 번잡하게 오가고 있었지만 그 검은 인영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유연한 동작으로 수로를 향해 다가왔다.
수로의 위쪽 성벽이나 망루에서는 횃불을 밝혀든 군인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지만 이곳 수로는 아직 완벽하게 봉쇄되지 않아서 조용한 편이었다.
휙-!
한 순간 그 검은 인영은 수로를 향해 몸을 날렵하게 굴리더니 그대로 풀숲으로 미끄러져 오기 시작했다. 
활사유영(活蛇遊泳).
마치 뱀처럼 지면을 쓸면서 나아가는 수법으로 누구나 그 기초는 쉽게 터득할 수 있지만 누구나 다 쓸 수 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간단한 신법일 수록 잘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나타난 인영은 그야말로 초절정 고수임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부드럽게 움직여 나갔다.
풀잎 하나 흔들지 않고 마치 풀 위에 엎어져서 오되 풀 위를 나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룡현은 긴장한 채 흑광도를 꽉 쥐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파파파파!
갑자기 은빛 광채가 풀숲 위를 빠르게 격타하고 지나갔다.
그 섬광은 너무나 빠르고 강렬해서 정룡현은 미처 안력을 높힐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은빛 물체의 정체를 몰랐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보았을 때는 이미 은빛 물체가 자신이 누운 바로 이 장 정도 앞에서 나무와 풀들을 태우고 지나친 뒤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우뚝 검은 인영이 몸을 세우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그는 안력을 높이고 그 검은 인영의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 저건.'


2

돌연 조운성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십여 장 떨어져 있던 빙요화를 비롯하여 빙녀들이 어느덧 오 장 밖까지 다가와 있었다.
처음에는 착각이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안력이 떨어졌어도 그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들은 귀신같이 다가왔던 것이다.
이때였다. 자허신니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뭣들 하느냐? 십이선녀는 백화토예(百花吐霓)를 펼치고 열 두 장로는 잔풍비화(殘風飛花)를 시전하라!"
그러나 자허신니의 호통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빙요화의 하얀 손이 번쩍였고 빙녀들이 빗줄기를 뚫고 모산의 제자들에게 쏘아져 갔다.
"으악!"
펑!
"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리며 모산의 십이선녀 중에 네 명이 순식간에 죽어 나자빠졌다. 그녀들이 진법을 발동하기 전에 빙녀들이 쾌속무비하게 들이닥친 것이다.
따라서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모산파는 혼란 속에 일 대 일로 빙녀들을 상대하기 시작했고 그 싸움의 결과는 불을 보듯이 빤한 일이었다.
"선녀들은 뒤로 빠져라!"
자허신니는 일갈하며 빙녀들을 향하여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그녀의 장력(杖力)이 빙요화의 하얀 손에 막히고 말았다.
꽈릉!
"허억!"
빙요화가 발출한 한빙장의 반탄력에 자허신니가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내고 말았다.
"문주!"
십이장로가 대경실색하며 지팡이를 휘두르며 빙요화에게 덮쳐갔다. 그러나 빙요화는 이미 예견했다는 듯이 내상을 입은 자허신니를 놔두고 오히려 자신에게 쏘아져오는 열 두 장로 속으로 파고들었다.
십이장로는 그때서야 빙요화의 의도를 알았다. 잔풍비화의 진법을 형성하고 있었던 그들이 마침 진형을 무너뜨리며 빙요화에게 달려드니 그녀로서는 불감청고소원이었다.
십이장로는 아차 싶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빠각!
빙요화와 첫 번째로 맞닥뜨린 청목장로의 지팡이가 그녀의 강수(鋼手)에 의하여 부러지는가 싶더니 그녀의 수도(手刀)가 그대로 청목장로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으헉!"
청목장로의 가슴이 깊게 찢어졌다. 그러나 그의 가슴엔 피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빙요화의 빙수도(氷手刀)에 베어 상처가 순식간에 얼어 붙었기 때문이다. 
쩌쩌쩍-! 
이어서 청목의 찢어진 가슴이 균열되면서 죽어갔다. 마치 얼음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듯이.
말이 그렇지 그런 기괴한 무공을 듣도 보지도 못한 모산의 장로들은 전의를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그런 사태를 보고있던 천조육검이 검화를 뿌리며 빙요화에게 짓쳐갔다. 그리고 악성을 터뜨렸다.
"모산의 장로들은 뒤로 물러나시오!"
그때서야 모산의 장로들이 정신을 차렸고, 내상을 입은 자허신니를 부축하고 뒤로 물러났다.
한편, 모산의 선녀들은 빙녀들과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비록 상처를 입고 위태위태하게 싸우고 있었으나 그녀들의 사기는 당당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녀들도 곧 죽음을 피할 수는 없어 보였다.
그랬다. 
빙녀들이 기나긴 휘파람을 불면서 일시에 선녀들을 향하여 흉하게 몰아쳐 갔다.
이때였다.
"멈춰라!"
폭갈과 함께 백의의 한 청년이 검을 치켜들고 빙녀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어 그의 검이 일도양단했다.
"아아악!"
빙녀 하나가 두 동강이 났고 피안개가 백의 청년의 옷에 뿌려졌다. 
게다가 쏟아지는 빗물에 그의 옷은 금세 핏물로 얼룩이 졌다.
빙녀들은 불시에 나타난 청년의 기세에 그녀들은 기가 죽었다. 
마치 혈목신장처럼 검을 치켜들고 우뚝 서있는 그 풍모는 보는 사람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3

주사판관 사이룡!
일명 미초서생이라 일컫는 사나이. 오늘 따라 그의 성정은 많이 변해 있었다.
짧은 인생이나마 결코 살인을 해본 적이 없었던 그가 이제는 살인을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살인을 하지 않으면 모를까 했다 하면 적의 기세를 끊어놓아야만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병가(兵家)의 기본이었다. 
이때 천조육검의 공격에 잠시 손속을 늦추게 되었던 빙요화가 사이룡의 등장에 아연실색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빙천개열(氷天開裂)을 펼쳐라!"
그녀의 날카로운 외침에 빙녀들은 그때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어 그녀들은 진법을 펼치기 위하여 산개하였다. 
허나, 빙녀들이 진법을 갖추기도 전에 사이룡이 돌진했다. 그의 검이 쾌속무비하게 빙녀 하나를 도륙했다.
"아악!"
빙녀 하나가 두 동강이가 났고 사이룡의 검은 멈추지 않고 연이어 다른 빙녀를 향했다.
순간,     
위이잉……!
돌연 칼날같은 빙설(氷雪)이 사이룡의 측면을 파고 들었다. 빙요화의 한빙지(寒氷指)였다.
"허엇!"
사이룡은 신형을 틀며 횡소천근 수법으로 검을 휘둘렀다.
투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이룡의 검풍이 쏘아오던 한빙지를 때렸다. 
아니, 갈랐다는 표현이 맞았다. 
일순 사이룡은 그 타격으로 주르륵 뒤로 밀려갔고 빙요화의 한빙지는 검풍에 갈라져 계속 사이룡에게 쏘아져 갔다.
사이룡은 다급히 검파(劍波)를 발출했으나 빙요화의 한빙지는 검파를 뚫고 들어왔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때, 빙요화를 공격하던 천조육검이 일제히 검기를 쏘아냈다. 그리고 그 검기는 빙요화의 한빙지를 격타했다.
팟츠-!
빙요화의 한빙지가 소멸하고 사이룡은 위기에서 구명되었다. 
"고맙소!"
사이룡은 천조육검에게 사의를 표명하고 검을 치켜 올렸다. 천조육검은 미소를 지으며 사이룡 옆에 섰다. 무언중에 합공을 하겠다는 표시였다.
사이룡은 때가 때인 만큼 천조육검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은 다시 변하고 있었다. 어느새 빙요화 주위에 빙녀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는 대지를 뚫듯 계속 퍼부었다. 그리고 대지에 박히던 빗방울이 터지며 하얀 포말을 일으켰다. 그 포말은 그들의 발밑의 시야를 가릴 정도로 미세한 안개로 변하고 있었다.
사이룡은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러한 자연현상은 빙요화와 빙녀들에게 가장 이상적이었다. 
그녀들이 펼치는 한빙공은 사위를 온통 얼리기 좋은 조건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이룡과 천조육검에게 이미 한 수 앞서 나가는 것이다.
자고로 전투에는 기세(氣勢)가 백에서 칠십이면 지세(地勢)는 삼십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동등한 실력일 경우이다.
헌데, 실력이 한 수 위인 빙요화와 빙녀들을 상대하는 데 이런 조건으로 싸움을 할 수는 없었다.
사이룡은 자신과 천조육검이 일곱 명이라는 사실에 조운성에게 전음으로 제의했다.
'북두칠성보법(北斗七星步法)을 시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조운성은 사이룡의 의도를 재빨리 읽었다.
'칠성이두전(七星移斗轉)의 진식을 펼치자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머리가 되겠습니다.'
사이룡은 조운성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검을 들고 한 발 나섰다. 
순간, 천조육검이 이미 약속을 한 듯이 북두칠성의 위치에 해당하는 자리에 포진했다.
이때 또 다른 빙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자허신니를 비롯한 모산파가 일정한 진법을 형성하며 뒤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약속을 한 듯이 사이룡 쪽으로 이동을 했다.
이상한 것은 모산파와 사이룡의 그런 행동을 빙요화가 보며 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룡은 빙요화의 그런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리 초절의 무공을 가진 빙요화라고는 하지만 자허신니와 사이룡, 그리고 천조육검을 상대하면서 잠시나마 진력이 고갈 되었다고 본 것이다. 물론 그건 사이룡이나 천조육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사이룡은 만약을 생각해서 천조육검과 함께 진법을 펼친 것이다. 
한편 빙요화도 연이어 공격을 한다는 것에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야 전력을 다해서 공격을 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빙녀들이 치명상을 입을 게 뻔했고, 또한 사이룡을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닌 것이다. 
사이룡에겐 자신이 철천지 원수다. 그러나 그는 사생결단을 하자고 덤비지 않는다. 한마디로 냉정하고 무서운 놈이다.   
만약에 자신이 전력을 다해 사이룡을 처치한다고 하더라도 자신도 극심한 타격을 받을 게 뻔했고, 그 뒤에 나머지 적들이 사생결단을 하자고 하면 자신 역시도 무사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빙요화는 어둠을 뚫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올려다 보았다. 오만하던 그녀도 이 비가 그치기 전에 사천당가의 고수들이 오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었다. 
중원 각지에 퍼져있는 개방의 제자들의 숫자는 어림잡아 십만 명이 넘는다. 물론 삼 년 동안 의결(衣結)이 없는 제자들까지 포함된 숫자이다.
일결, 또는 개목( 目)이라는 이결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삼결의 분타주(分舵主)부터 개방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숫자가 삼백 육십 오 명이 된다. 
헌데 그 서열을 무시하고 개방의 오결제자이자 장안분타주인 타봉신개가 갑자기 중원십삼성(中原十三省) 총타주(總舵主)의 신분으로 변하여 소림사에 등장한 것이다.
하기는 오결제자라면 총타주의 신분이다. 그러나 일개 분타주라는 신분에서 하루 아침에 십삼성의 총타주로 변하였으니 타봉신개의 위상은 개방에서 아주 특이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사이룡이 관림에서 빙요화와 빙녀들을 상대할 동안 타봉신개는 삼백여 명의 개방의 제자들을 이끌고 소림을 침입한 사천당가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헌데, 소림과 합세하여 사천당가를 막판으로 몰아갈 때 도화보(挑花堡)의 요물들이 등장하여 판세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도화보,
이름 그대로 휘어진 꽃들이 모인 무림방파다. 다시 말해서 버림받은 여인들의 집단인 것이다. 
자고로 여자란 천성이 상냥하고 목소리가 아름다우며, 머리칼은 가늘면서 칠흑같이 검고, 부드러운 살결과 가는 골격의 소유자가 미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녀들은 하나같이 그 반대였다. 또한 키들은 비정상적으로 크거나 작았으며 비루먹은 모습이 아니면 거대한 뚱보들이었다.
올바른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서 나온다고 하던가. 그녀들은 자신들의 비정상인 육체로 인하여 하나같이 괴퍅하고 이상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건강한 육체를 갖고 있지 않다고 성격상의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개중엔 극히 아름다운 여인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도화보에 절색의 미녀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의 육체는 아주 정상인보다도 완벽하였다. 
문제는 정상인보다도 뛰어난 육체를 갖고서도 극히 비정상적인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화수파(桃花隨派) 야소랑(野素 ). 도화보의 제 칠대 보주인 그녀가 바로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름다운 얼굴에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 그러한 그녀가 사람을 죽일 때는 더욱 요염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죽는 자에게 애절하게 유혹을 하는 듯했다. 
그리고 상대가 잠시 혼란에 빠지면 상대의 심장을 뽑아내었고, 상대가 죽어 나자빠지는 것을 보면서 자기와 살인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한 얼굴이 되는 것이다. 
한 손에 방금 뽑아낸 심장을 먹다 버리는 고깃덩어리를 팽개치듯 하는 거였다.
타봉신개는 대노했다.
무림인들의 삶과 죽음은 손 안팎과도 같다고는 하지만 살인을 하면서 이렇듯 희노애락을 정반대로 표출하는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하기는 수양이 깊은 소림의 불승마저도 분노의 불호를 터뜨리고 있었다.
"아미타불, 여시주들의 손속이 너무 잔인하구려."
"어머나, 민대가리 아저씨가 화가 나셨나봐?"
"호호호호호……."
야소랑의 빈정거림에 도화보의 백화녀들이 교소를 터뜨렸다.
"이 못된 계집애들! 아가리 닥쳐라!"
타봉신개가 타구봉을 치켜들며 호통을 쳤다. 그러나 그는 도화보의 여인들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비록 위기에 몰렸던 사천당가의 무리들이지만 그들이 또다시 공격을 감행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야소랑은 타봉신개의 호통소리에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에구머니나! 옷에서만 냄새가 나는줄 알았더니 이제보니 욕하는 입에서도 구정물 냄새가 나네?"
"뭣이 어째? 사타구니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계집애들이 어디다 대고 흰소리냐?"
타봉신개의 걸죽한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말을 되받는 야소랑의 입담이 기가 찼다.
"사타구니에서 쉰 냄새가 나는 것보다야 흥분되고 좋지 뭘그래?"
"아미타불!"
소림승들이 민망하여 불호를 외웠고, 타봉신개는 분노로 얼굴이 벌개졌다. 
"이 찢어 죽일 년들!"
기어코 타봉신개의 분노가 폭발했고, 그의 타구봉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개방의 제자들이 타구십팔초의 하나인 규화타구(叫花打狗)를 펼치며 도화보의 여인들을 향하여 짓쳐갔다.
퍽!
"아악!"
찌이익-!
"으아아……."
타구봉에 골이 깨지고 여인의 긴 손톱에 가슴이 갈라지며 심장이 꺼내졌다. 
실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피와 살이 튀고 남녀의 비명이 끊임없이 울려퍼지면서 지옥도를 연출하고 있었다.
개방은 명문정파로서 이제까지 이렇게 크게 피를 흘리며 싸워 본 일이 일찍이 없었다.
이제 무림이 양분되어 가면서 마치 사부들에게 전설에서만 흘려듣던 정사대전의 대혈전을 현세에서 다시 재현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사천당가는 그 싸움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일부분이 슬그머니 그 싸움터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3

마고는 어둠 속에서 상대를 노려보며 비선과를 흔들었다.
대단한 상대를 만났다는 걸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자신이 유영하듯 나아갈 때 전신을 덮쳤던 그 은빛 광채는 웬만한 내가상승의 무공을 닦지 않은 자라면 그 정체도 모를 정도로 빠르고 강렬했다.
그러나 그녀는 정확하게 그 광채의 정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광채의 공격을 봄과 동시에 몸을 피하면서 암습자의 모습까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풀 숲 위에 서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북어처럼 깡마른 체구에 전신이 시커멓고 쭉 찢어진 두 눈의 콩알 같은 눈동자는 예리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붉은 빛이 감도는 짙은 경장은 몸에 착 달라붙어서 어디든 은신하기 좋도록 되어있었다.
그 모습으로 보아서 상대는 어딘가에 항상 은신해서 활동하는 자임이 틀림없었다.
은빛 광채는 상대의 소매에서 쏘아져 나왔었고 날카로운 비도를 천잠사에 매단 것이었다.
천잠사에 매달린 비도.
비도추(飛刀錐) 왕조(王曺). 
그가 동창의 개였던가. 한때 비도추라는 특이한 절기를 들고 강호에 나타나서 위명을 떨치다가 어느 때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던 바로 그가 동창에서 밥을 먹으며 은거해 있었던가.
슥-!
마고의 작은 발이 풀 위에서 움직였다.
은빛 광채를 본 위사들이 달려 오기 전에 해치우고 뜬다. 상대가 대단한 고수일 수록 단번에 끝내야 한다.
말은 필요없다. 
죽이면 된다. 그가 여기 어떻게 해서 나타났는지 그런 건 물을 필요도 없다.
죽으면 그런 건 과거가 되니까.
'비혼무(飛魂舞).'
그녀는 비혼무를 시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웬만해서는 비혼무를 쓰지 않는다.
공력이 너무 낭비되고 그것을 써야할 만큼 강한 상대를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개방과의 혈전처럼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런 때에는 더욱 쓰지 않는다. 
그만큼 공력을 필요로 하는 절예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비선과의 진정한 값어치는 바로 이 비혼무에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허리가 서서히 뒤로 꺾여져 넘어갔다. 마치 철판교를 시전하기라도 하는 듯이 보였지만 철판교보다는 허리가 많이 꺾이는 형상이었다.
쉬이익-!
동시에 비선과가 그녀의 머리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허공에서 빠르게 이리저리 춤을 추듯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조 역시 일합을 기대하고 비도추를 다시 날려보냈다.
파파파파-!
은빛 광망이 주변을 어지럽게 난비했다.
왕조는 왕조대로 자신의 평생을 명예롭게 해준 최상의 비기를 시전했다.
그의 비도추를 지탱하고 있는 천잠사는 공력에 힘입어 팽팽하게 버티면서 비선과와 허공에서 어지럽게 엇갈리고 교차하면서 부딪치고 있었다.
팡-!
한순간 쇠북 터지는 소리가 났다.
어떤 초식이든 그 극점이 있기 마련이다.
수많은 허초들 중에 진초가 숨어있는 게 보편적이지만 비도추는 초식마다 많은 진초가 엇갈려 있었다.
그러나 비선과로 시전하는 비혼무는 단 하나의 진초를 감추고 있는 너무나 간단한 초식이다.
그 진초와 진초가 부딪치면서 쇠북 터지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허공에서 얽혔던 비선과의 천잠사와 비도추의 천잠사가 검화를 피워올리며 하늘로 솟았다.
그리고 이어서 서서히 비도추가 하늘에서 줄 끊긴 연처럼 맥없이 지면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컥-!
비도추가 미처 풀숲에 떨어지기도 먼저 왕조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토해졌다.
그는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면서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너무나 어리석은 행동을 했던 것이다.
비도추는 많은 진초를 지니고 있었다. 진초를 많이 감춘 초식이라면 일반인들에게는 무서운 초식이 된다. 
그러나 그만큼 각각의 변화마다 있는 진초에 십성의 공력을 밀어넣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비혼무는 다르다.
한 번의 진초를 위해 시전된다. 그러니 당연히 십성의 공력을 밀어 넣을 수가 있다. 
왕조는 절대로 맞부딪치지 말았어야 했지만 그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서로 꼬여버린 천잠사 사이에는 서로의 공력이 대항하는 힘이 생기게 되었고 서로 그것을 주고 받았다. 
당연히 비도추의 천잠사는 마디마디 끊어져 버리고, 왕조 자신의 기혈까지 뒤집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더니 뒤로 벌렁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마고는 그가 넘어가는 순간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미 위사들이 횃불과 창을 들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휘익-! 
그녀의 검은 신형이 수로 옆의 풀숲에서 나무 그림자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4

정룡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위사들이 달려 와서 그에게 창 끝을 내밀었지만 그는 본체도 않고 마고가 사라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위사들은 그가 비사대의 참모인 것을 알고 서둘러 다른쪽으로 몰려가 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입궁했는지 위군교두 현종숙이 그의 뒤에 와 서서 말을 건넸다.
"자객을 보았소?"
정룡현은 먼 어둠 속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았습니다."
"자객의 정체는 파악했소?"
정룡현은 시선은 그대로 둔 채 다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말 마고가 맞소?"
"맞습니다."
현종숙이 수로 아래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이 수로로 달아났소?"
정룡현은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수로를 내려다 보았다.
"난 이 수로를 지키고 있었는데 수로로는 결국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보았소?"
"지척에서 싸움이 있었으니 보았지요."
정룡현은 말하면서 손으로 풀 숲 한 가운데를 가리켰다.
의아한 표정이 되어 풀 숲을 바라보던 현종숙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비도추!"
"그렇습니다. 왕조가 제 눈 앞에서 죽었습니다."
"이, 이런……!"
현종숙은 정신없이 달려가고 정룡현도 천천히 그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왕조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전신에서 오로지 피를 토한 곳은 한 군데 입 뿐이었는데도 그 쏟은 양이 어찌나 많은지 주변이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이, 이럴 수가…… 왕조가 어떻게……."
"단 일합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일합에?"
믿기지 않는지 현종숙이 정룡현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일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왕조가 암습을 했으나 그 암습에 놀란 것은 나였고 마고는 너무나 간단하게 피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곧 반격을 했지요. 그 반격에 대항하다가 이렇게 즉사한 것입니다."
"……!"
현종숙은 기가 막히는지 그대로 내려다 보며 한동안 할말을 잊었다.
"수로를 통해 달아나려 한 것 같은데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저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정룡현이 어둠 속을 가리키자 현종숙이 의아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아니? 저 숲속으로 갔다면 더욱 깊숙이 들어 갔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소?"
"분명히 그랬습니다. 저는 이곳에 숨어서 암습을 할 요량이었는데 제 근처로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태감께서……."
정룡현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다시 그곳에 재침입을 시도할 리는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수가 몰려들었고 태감의 숙소에는 인의 장막이 쳐져 있을 것인데 그냥 무모하게 들어갈 리가 있습니까? 아마도 다른 기회를 엿보겠지요."
"그 마고라는 자객을 직접 보았으면 이제 용모도 알겠구려?"
"아니, 모르겠습니다."
정룡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나 겁에 질린 나머지 저는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 있었습니다. 제게 다가오면 어쩌나 겁도 났습니다. 아까 부하들이 많을 때에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정룡현의 말에 현종숙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비사대의 참모. 비사대의 이인자였지만 실상 사이룡이 오기 전까지는 오도인이 비사대를 맡고 있었으니 일인자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공포에 질리는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옳은가.
"기가 막힙니다. 비선과라는 흉기는 정말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내공의 심후함이 거의 선인지로의 단계였습니다."
"그렇게 강했소?"
"그랬습니다. 우리 비사대가 총출동을 해서 오로지 태감의 숙소만 지켜야 할 것 같습니다."
"……!"
현종숙은 믿기지 않는 정룡현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두운 풀숲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 자가 혹시……?"
그는 정룡현을 슬쩍 바라보았다.
정룡현은 여전히 마고가 사라졌다는 방향만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이 자가 헛수작을 하는 건 아닌가. 은근히 속으로는 눈에 가시같은…… 누구나 동창과 관계를 맺지 않은 관리들은 동창을 싫어하니까…… 동창의 우두머리가 죽도록 버려두려는 건 아닐까?
그래서 일부러 그때를 대비해서 마고가 강하다는 것을 과장되게 전달하는 건 아닐까.'
그는 수로를 내려다 보았다.
'수로를 통해서 안전하게 빠져 나가는 것을 방치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평소의 그의 성격이라면 절대 두려워서 피할 리는 만무하다. 일부러 피해준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방향을 쫓게 하는 건 아닐까.
여하튼 태감께 빨리 알려야 할 일이다.'
현종숙은 정룡현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정룡현은 현종숙이 그렇게 가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았다.
이제 그의 머리 속에서는 어떻게 하면 마고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만으로 꽉 차있었다.
'대장이 자신에게 이곳을 맡기고 갔으니 자신은 이곳을 무슨 수를 써서든 지켜야만 한다.
비록 동창의 환관 놈들이나 그 수하들이나 재수없는 작자들이지만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상대가 너무 강하지 않은가?'


5

황당함 그 자체였다.
현종숙의 보고를 들으면서 곽영명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신변을 항상 그림자처럼 보호하도록 하기 위해서 왕조를 데리고 있었다.
그는 웬만한 일에는 모습조차 나타내지 않고 항상 곽영명의 주변에 은거해 있었다.
정말 위급할 때 단 한 번 써먹으려는 생각에서 많은 재물을 주고 데려다 둔 수하인지라 평소에는 그저 비밀스러운 연락원 정도로나 쓰고 그 외에는 항상 옆에 두었었다.
그러다가 오늘은 자객을 사로잡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그를 내보냈다. 
물론 이길 것을 확신했고 그래서 사로잡아서 데려오라고 했다.
그런데 데려오기는 커녕 거꾸로 죽어버렸다는 말인가.
그는 참으로 심란한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어서 실내를 자꾸만 빙빙 돌아다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현종숙은 현종숙 대로 불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태감, 마고라는 그 자객이 그토록 대단하다면 어째서 옛날 사독패에게는 그렇게 쉽게 잡혔을까요?"
"쉽게?"
곽영명이 무슨 헛소리냐는 듯이 현종숙을 돌아보았다.
"사독패가 직접 잡으러 나서서 혼자 잡은 것도 아니고 수 없이 많은 고수들을 희생시켜서 겨우 잡은 것이 쉽게 잡은 것인가? 그것도 실력으로 잡은 것이 아니고 순전히 함정에 빠뜨려서 잡은 것인데 쉬워?"
"그, 그렇습니까?"
곽영명은 다시 실내를 빙빙 돌았다.
"그래, 그 자객이 어디로 달아났다더냐?"
"그게…… 비사대의 정장군 말로는…… 다시 이쪽으로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뭐야?"
곽영명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현종숙이 곽영명의 눈치를 보면서 계속 말했다.
"그러니 태감께서도 조심하셔서…… 당분간은 숙소에 계시면서 관망을 하시는 것이……."
"뭐라구?"
곽영명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현종숙은 죄송스러워서 고개를 팍 숙였다.
"지금 나더러 자객이 무서워서 꼼짝도 말고 틀어박혀 있으라고 하는 것이냐?"
곽영명의 두 눈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나왔다.
조심해야 한다고는 생각해서 모두에게 그렇게 말해 두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하들이 당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자객 때문에 숙소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못한다면 얼마나 우스울 것인가. 
"허튼 소리 말아라. 계집애 하나가 칼을 들고 숨어 들었다고 해서 내가 움직이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현종숙은 고개를 숙이고 더 말하지 못했다.
지켜 줄 자신은 없었지만 자기가 생각해도 황당한 말인 건 사실이다.
"호들갑들 떨지 말고 아침에는 조용히 업무를 보아야 한다. 그게 옳다."
곽영명은 그렇게 말은 했지만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빌어먹을……."
그는 무림인이라는 것들에 대해서 새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덕산]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