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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밝힐 수 없는 과거 뉘엿뉘엿 기우는 태양은 서산마루를 온통 붉게 물들였다. 드넓은 초원은 눈부신 저녁노을을 받아 황금빛으로 변하였고 허공에는 바람 한 점 없는 무척 평온만 정경이었다. 푸른 소나무가 총총히 들어선 어느 언덕 사이에서 도란도란 속삭이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말소리를 따라 산언덕에서 두 젊은 남녀가 나타났다. 그들은 바로 비류신과 홍부용이었다. 만화신검 홍부용은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비 공자, 저기 서산마루를 좀 보세요. 저 아름다운 노을을 말이에요… …” 비류신은 서산마루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탄식을 했다. “석양의 전경은 무한히 아름답구나. 하지만 애석하게도 저 아름다운 정경도 잠시 후면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홍부용은 비류신이 탄식하자 덩달아서 탄식하며 나직이 물었다. “비 공자는 저와 며칠간 같이 있는 동안 줄곧 울적한 기분에 잠겨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저와 함께 있기 싫어서 그러시는 게 아녜요?” 비류신은 홍부용의 아름다운 얼굴을 주시하면서 역시 나직이 말을 받았다. “홍 낭자는 그런 필요 없는 말은 절대 하지 마시오. 내가 어찌 홍 낭자와 함께 있는 것을 싫어하겠소? 거기에다가 나는 최근 며칠간 홍 낭자로부터 너무도 많은 은혜를 입었소.” 홍부용은 비류신을 흠모하는 정이 지극하였건만 비류신은 시종일관 얼음장같이 차갑게 그녀를 대하였다. 남녀 간의 정이란 묘한 것이어서 어느 한쪽이 냉담하면 할수록 더욱 깊은 정이 끌리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홍부용은 자기의 애틋한 연정을 알아주지 않는 남성에 대하여 때로 원망도 해보았고 자신을 저주하기도 했다. 홍부용은 안타까운 심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남 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마침내 그처럼 냉담한 비류신을 모른 척하고 그의 곁을 떠나 버릴까 하는 충동도 생겼으나 차마 그럴 수 없어서 고통과 번민의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침내 그녀는 중대한 결심을 내릴 각오로 내가 곁에 있는 것이 좋은지 싫은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던 것이다. 만약 싫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당장 비류신의 곁을 떠나 두 번 다시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행히 비류신은 그녀의 물음에 대하여 솔직히 대답을 하였다. 때문에 홍부용은 다소 마음을 놓기는 하였다. 홍부용은 돌연 실버들처럼 가느다란 허리를 비류신으로 하여금 끌어안게끔 그의 가슴팍을 파고들면서 교태를 부렸다. 그러나 비류신은 여전히 냉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 단 한마디도 애정 표시를 하지 않았다. 이때 홍부용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더니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맥없이 풀썩 쓰러지는 것이었다. “홍 낭자… 어인 일이오?” 비류신은 아연실색하여 두 팔을 황급히 내뻗쳐 쓰러지는 그녀를 잽싸게 붙들어서 허리께를 불끈 안아 땅바닥에 책상다리의 자세로 앉혔다. 홍부용은 여전히 수정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울먹였다. “비 공자… 흑흑… 당신은 너무도 무정하세요.” 비류신은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차렸으나 짐짓 시치미를 뚝 떼고 다시 물었다. “홍 낭자, 왜 그러는 거요?” 홍부용은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은 채 비류신에게 와락 덤벼들어 억센 사나이의 품속에 안겨 버렸다. 그녀는 무한한 행복감에 도취되었다. 비록 서산마루를 붉게 물들인 석양의 잔광(殘光)처럼 오래 지속할 수 없는 행복일지라도 평생을 통하여 영원히 기억에 남을 가슴 벅찬 환희의 순간이었다. 꽃다운 낭자를 품속에 안고 있는 비류신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비류신의 감정은 요란한 소용돌이를 치며 크게 흔들렸다. 아무리 여자에게 냉담한 비류신이라 하지만 이런 상황아래서 춘정(春情)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륜(亂倫)-- 그의 뇌리에 불현듯 난륜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바로 그 두 글자 때문에 비류신은 자기의 인생을 완전히 절망이라고 체념하였다. 비록 일생동안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 괴롭게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기어이 그 피맺히고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갚아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그 처절한 원한을 해결만 하고 나면 당장 죽은들 추호도 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비류신은 인간 세상을 살아가면서 떳떳이 낮을 들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 그런 까닭에 그는 그렇듯 아름답고 슬기로운 홍부용 같은 여자가 정을 바쳐도 절대로 같이 정을 주어선 안 된다고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내가 만약 그녀에게 정을 기울인다면 그녀는 내가 냉담하게 대하는 지금보다 몇 갑절 더 극심한 고통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 그는 이런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홍부용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갖가지 방법으로 애정을 표시해 왔지만 의식적으로 얼음장같이 차갑게 대해 온 것이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비류신인들 목석으로 만든 인간이 아닐 터인즉 어찌 아름답고 총명한 낭자 앞에서 사랑의 포로가 되지 않겠는가? 비류신은 자기에게 그토록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기구한 운명을 한탄할 따름이었다. 이 세상에서 자기처럼 비통하고 처참한 운명의 굴레 속에서 버둥거리는 사람은 다시없을 것 같았다. 쓰라린 과거사와 자신에게 주어진 기구한 운명이 한없이 원망스럽게만 여겨지는 비류신은 마침내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나이의 눈물, 정말 피보다 더 뜨거운 사나이의 눈물이었다. 홍부용은 비류신의 품에 안긴 채 무궁무진한 행복감에 도취되어 단꿈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목 줄기로 뜨뜻한 물방울이 떨어지자 고개를 홱 쳐들고 비류신을 바라보니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알고 황급히 물었다. “비 공자, 어이하여 우십니까?” 비류신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 재빨리 눈물을 거두고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일찍이 부모님께서 참사당한 일이 생각나니 나도 모르게 슬픔이 복받쳐 오르는구려.” 홍부용은 비류신의 얼굴에서 항상 걱정이 가시지 않는 점을 발견하고 그는 일찍이 누군가와 처절한 원한을 맺고 있으려니 하고 막연한 추측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녀는 좀 더 명확한 한 가지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의 원한은 단순한 원한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 사나이의 뼈에 사무친 원한은 누군가의 악랄하기 짝이 없는 계략에 의하여 냉철한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여 어떤 끔찍한 일을 벌이고야 말았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없었다. 홍부용은 앵두 같은 고운 입술을 들썩여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비 상공은 필시 말 못할 쓰라린 사연이 있으시지요? 어서 털어놓고 얘기해 보세요. 저는 비 공자의 괴로움을 나누어 갖고 싶어요.” 그녀는 비류신을 알게 된 이후 그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들어 보지 못하였다. 그것이 궁금하여 몇 차례나 물어 보았지만 비류신은 번번이 얼렁뚱땅 얼버무려 버릴 뿐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홍 소저, 우리가 알게 된 지도 벌써 십여 일이 지났소. 그동안 낭자는 내가 매우 무정한 사내라고 느꼈을 줄 알고 있었소.” 비류신은 이렇게 말하면서 홍부용의 윤기가 나는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얼마나 부드럽고 은밀한 거동인가? 홍부용은 가슴 벅찬 환희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비류신이 여태껏 그녀에게 그처럼 정겨운 거동을 취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터에 뜻밖에도 비류신이 적극적인 거동을 취했으니 홍부용의 희열이 얼마나 큰 것인지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크게 감격하여 두 팔을 뻗어 비류신의 가슴을 끌어안더니 애교가 가득 넘쳐흐르는 정겨운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하였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는 비 공자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비 공자는 감정이 매우 풍부한 남성이라고 느껴요.” 비류신은 그녀의 열정적인 말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크게 감격하였다. “홍 낭자, 나는… 낭자가 내게 쏟은 애정의 의미를 잘 아오. 나 역시 어찌 낭자에 대한 애정이 없겠소? 그러나 기구한 운명의 장난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은 이승에서 영원히 애정을 주고받을 수 없소… …” 홍부용은 더욱 격렬하게 비류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비류신이 방금 말한 뜻을 엉뚱한 각도로 곡해하였다. 이 세상에서 도저히 결합될 수 없다는 그의 말을 그에게 이미 사랑하는 부인이 있다는 뜻인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홍부용은 기왕에 맺어지지 못할 사랑, 비록 짧은 순간이나마 평생을 통하여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 정도로 열렬한 포옹이나 해 보자는 심산이었다. 비류신이 홍부용의 그런 태도를 보고 무슨 말인지 막 꺼내려는 찰나, 홍부용은 그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 “비 공자는 이제 제 앞에서 더 이상 아무 말씀도 마세요. 저는 비 공자를 독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리지 않겠어요. 다만 지극히 짧은 순간이라도 좋으니 당신을 소유하고 싶을 따름이에요. 저는 그 정도로 만족하겠어요. 아! 비 공자… …” 그녀는 더욱 격렬히 비류신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샛별처럼 반짝이는 새까만 눈동자에는 애정의 불꽃이 맹렬하였다. 애절하고 간곡한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느껴 그녀의 간절한 소원을 도저히 뿌리치지 못하게 하는 묘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비류신은 순간적으로 처녀 특유의 강력한 체취를 맡았다. 난향(蘭香) 같기도 하고 녹사향 (鹿射香) 같기도 한 그 신비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향기를 비류신은 일찍이 한 번 맛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냉정한 지식을 가진 지금보다 뚜렷한 무엇을 느끼지 못했었다. 이윽고 비류신의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강렬한 여자의 체취 앞에서 어지럽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건장한 젊은 사내의 피가 마구 끓어올랐다. 본래 흘러내리던 물보다도 장애물에 의하여 막혀 있던 물이 일단 장애물을 헤치고 터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법이다. 그는 쓰라린 과거지사 때문에 무조건 여자를 경원시하였고 의식적으로 여자 앞에서 냉담한 태도를 취해 왔다. 그러나 그처럼 굳게 닫혀 있던 감정의 문이 홍부용의 열렬한 사랑의 고백 앞에서 마침내 열렸으니, 거대한 저수지의 둑이 터져 흐르는 폭포수처럼 그동안 층층이 쌓여온 감정이 일시에 폭발한 셈이었다. 일순, 홍부용은 온몸의 뼈마디가 온통 녹아나는 듯 달콤한 희열을 느꼈다. 마치 뜬구름을 타고 하늘을 훨훨 나는 듯이 황홀한 기분이었다. 격렬한 감정이 폭발한 비류신은 품속에 안겨 있는 홍부용의 아름다운 얼굴을 두 손으로 바짝 쳐들더니 앵두같이 고운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입술을 덮쳤다. 그와 동시에 비류신의 우람한 팔뚝은 수양버들처럼 가느다란 그녀의 허리를 꽉 조였다. 홍부용은 구름을 타는 듯한 행복에 도취되어 알아듣지 못할 신음 같은 소리를 내었으나 그 소리는 곧 비류신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비류신은 그녀가 무슨 말인지 내뱉을 여유조차 주지 않고 그녀의 나긋나긋한 혓바닥을 빨아들여 맹렬히 핥으며 조심스레 깨물었다. 홍부용은 이게 만약 꿈이라면 영원히 깨어나지 말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온몸을 뒤틀면서 오랫동안 속으로만 썩히고 있던 열정을 발산하였다. 마침내 홍부용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하여 지금 당장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무아의 경지에 이르렀다. 바로 이때-- 비류신은 돌연 그녀를 확 밀어젖히더니 벌떡 일어서서 냉소를 머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똑같이 열화 같은 욕정의 유희에 몰두해 있던 그가 어떻게 그처럼 순식간에 얼음장같이 차갑게 돌변할 수 있는지 얼핏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꿀을 먹은 벙어리 모양 어리둥절한 채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 홍부용에게 차가운 소리로 내뱉듯 외쳤다. “홍 낭자, 지금까지 우리들끼리 주고받은 정분은 오늘로써 막을 내립시다.이후부터 영원히 만나지도 맙시다. 아무쪼록 홍 낭자가 안녕하기 바라오.” 그는 곧 추호의 미련도 두지 않고 총총히 걸음을 옮겨 그녀를 남겨둔 채 떠나갔다. 홍부용은 비류신이 일단 열렬한 애무를 시작한 이상 그도 역시 뼈가 녹아나는 듯한 희열을 만끽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그의 태도가 돌변하여 단 한마디 짧은 고별인사를 남기고 무정하게 떠나가 버리다니… … 비류신의 그런 행동은 홍부용의 자존심을 크게 손상시켰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로 비류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앙칼지게 외쳤다. “비 공자, 잠시 걸음을 멈추시오.” 비류신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얼음장같이 차가왔다. “낭자는 무슨 할 말이 있소?” 홍부용은 냉랭한 어조로 다그쳤다. “당신은 정말 철로 만든 심장을 가진 인간인가요? 나 홍부용은 뭇 사내들의 노리갯감 노릇이나 하는 가치 없는 계집은 아니에요!” 이렇게 따져드는 그녀의 음성은 흐느끼는 것도 같고 부르짖는 듯도 하여 매우 처량했다. 홍부용의 그 안타깝고 애절한 모습을 바라본 비류신은 곧 연민의 정이 고개를 쳐들었으나 자신의 기구한 처지가 다시 떠올라 더욱 독한 마음으로 결심을 굳혔다. ‘여하한 일이 있어도 나는 그녀와 결합할 수 없다. 피차간 괴로움을 덜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 독한 마음을 먹고 매정하게 뿌리쳐 버리는 게 상책이다. 그래야만 서로 불행해지지 않다… …’ 비류신은 이렇게 결심을 굳히고 더욱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낭자는 물론 천한 여인이 아니오. 하나 할 일이 많은 때에 남자를 쫓아다니는 따위의 행동은 삼가는 게 현명한 거요! 내 물론 낭자의 진정을 모르는 바 아니오. 하나 받아들일 수 없으니 그 점 깊이 양해하시오. 그럼 이만 작별을 고합시다.” 홍부용은 비류신이 끝내 그처럼 쌀쌀하게 나오자 치미는 울분을 주체할 수 없어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 공자, 나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기구하여 박명한 여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시인해요. 그런 까닭에 비 공자 같은 분을 감히 독차지할 생각은 하지 않아요. 다만 당신이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해 준다면 저는 그걸로 만족하겠어요. 내가 아무리 부족한 점이 많기로서니 설마 당신의 아내에 비하여 십 분지 일도 못 된단 말인가요?”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는 하지도 말아요. 나에겐 아내가 없소. 구구한 얘기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으니 나는 이만 떠나겠소.” 만화신검 홍부용은 비류신의 모욕적인 언사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챙 소리를 내며 매화검을 뽑아들었다. “무정한 사나이… 나는 당신을 죽이고 말 테에요.내 마음에 온통 파문을 일으켜 놓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기꾼… …” 그녀는 비류신이 처가 없다고 말한 의도는 그의 눈에 자기가 차지 않기 때문이리라 지레 짐작하고 노발대발 하였다. 그녀는 곧 한매토예 초식을 펼쳐 날카롭기 짝이 없는 기세로 비류신의 가슴팍 요혈을 향해 찔러 갔다. 비류신은 홍부용의 오해를 풀어줄 생각도 해 보았으나 문득 지난날의 그 몸서리치는 기억이 되살아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비류신은 싸늘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 한 바퀴 휙 도는가 싶더니 번개같이 빠른 동작으로 상대방의 일검을 가볍게 피해 버렸다. 홍부용은 노발대발하며 더욱 사납게 외쳤다. “이번에는 옥대위요(玉帶圍腰) 초식을 받으시오!” 그녀가 다시 일 검을 내뻗치자 싸늘한 검광이 사방으로 폭사되었고 날카로운 검기(劍氣)는 다시 비류신의 요혈을 향해 찔러 갔다. 비류신이 두 팔을 휘두르며 일 장 높이 치솟아 오르는 찰나 홍부용의 매화검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발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홍부용은 여세를 몰아 다시 천운적월(穿雲摘月)과 무험운수(霧險雲收) 두 초식을 펼쳐 속공을 가하였다. 비류신은 활처럼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그녀에게 돌진하다 말고 돌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으으흑… …” 비류신의 왼쪽 허벅지에 길이 한 치쯤 되는 칼자국이 생겼다. 검 끝에 반치 이상이나 찔렀는지라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홍부용의 장검은 반동에 의하여 그녀의 수중에서 튕겨나가더니 저만큼 떨어진 곳의 지면에 꽂혀 버렸다. 이때 비류신은 고개를 쳐들고 우렁찬 폭소를 터뜨리더니 쏜살처럼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홍부용의 수중에서 검이 튕겨 나간 것은 비류신이 부상을 각오하고 기묘한 초식으로 과감한 육박전을 시도하였기 때문이었다. 만화신검 홍부용은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당했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비류신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게 되자 허탈한 심정이 되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잠시 후에야 넋 빠진 사람처럼 일어서서 땅에 꽂힌 검을 뽑아들더니 허공을 향해 부르짖었다. “비류신! 이 애절한 여인의 심정을 몰라준 당신… 나는 훗날 기어이 당신을 괴롭히고 말 테요! 지긋지긋한 형벌을 당신에게 가하겠단 말이요… …” 그녀는 무심히 반짝이는 별빛을 바라보며 연신 땅이 꺼질 듯한 탄식을 하고 나서 곧 번개처럼 몸을 솟구쳐 어디론지 사라져 갔다. 이때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서 한 줄기 시퍼런 인명이 번뜩하더니 청의(靑衣) 여인이 나타나서 무거운 한숨과 함께 잠꼬대 같은 소리로 혼자 뇌까렸다. “으음… 사랑이 지극하면 한(恨)이 되고, 한이 극도에 달하게 되면 아… 정이란 모진 것… 불운한 사아(邪兒)야, 가련한 내 아들아! 네 정녕 죽는 한이 있다 한들 이처럼 박절하게 정을 끊을 수 있겠느냐?” 마치 귀신과 같은 청의괴녀는 연신 무겁고 애통한 한숨을 내뱉더니 이윽고 도깨비처럼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비류신은 홍부용의 꽃다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번개처럼 줄달음쳤다. 사실 그는 목적지가 어딘지 모른 채 무턱대고 달리고 있었다. 그는 홍부용과 과감한 입맞춤으로 인하여 정신이 혼란한 까닭에 혼란 속에서 한시바삐 해방되고 싶어서 마구 줄달음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상처 입은 넓적다리가 갑자기 쑤심을 느끼고 즉시 걸음을 멈추고 근처 바위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옷을 찢어 상처를 싸맸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 있던 비류신은 문득 홍부용에게 너무 지나치게 대했구나, 하는 후회가 생겼다. 사실 그는 홍부용에게 어떤 결점을 찾아내라면 단 한 가지도 딱 꼬집어 낼 수 없었다. 그만큼 홍부용이란 여자는 비류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기왕에 엎질러진 물이니 어찌 다른 방도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운명의 장난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홍 낭자, 용서하구려. 낭자는 아마 나의 고충이 어떠하리라는 점은 십 분지 일도 모를 거요. 나 역시 홍 낭자를 좋아하면서도 훗날 더 고통당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를 악물고 결단을 내렸던 것이오.’ 비류신이 이렇게 쓰디쓴 독백을 되씹고 있을 때 넓은 벌판 남쪽 끝에서부터 유난히 키가 큰 사나이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비류신 앞 사 장 거리까지 다가와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처럼 신속히 다가오는 점으로 보아 경공술이 탁월한 무림의 고수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비류신이 홱 고개를 돌리자 그 자는 담담히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혹시 비영이 아니시오?” 비류신은 그 자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탄성을 질렀다. “아니, 선우형이 아니시오?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이 깊은 밤중에 홀로 황야를 지나치는 거요?” 청풍검 선우철은 비류신 곁으로 천천히 다가오며 다시 말했다. “이렇게 또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소. 지난 번 비형이 손을 써서 이 몸을 보살펴 주신 점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이오. 그리고 제가 여기 온 목적은 한바탕 신나는 구경을 하기 위함이오.” 그는 비류신의 허벅지에 난 칼자국을 발견하자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비형, 어인 일이오? 비형은 벌써 강적을 만났소?” 비류신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머리를 스치자 즉시 반문하였다. “이 쪽에 무슨 사고라고 발생하였소?” 선우철은 비류신이 그런 반문을 하자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알고도 시치미를 떼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 만약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면 나는 훌륭한 조전자(助戰者)를 얻은 셈이군.… …’ 이런 생각을 한 그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비형은 최근 지령보에 강호를 온통 진동시킬 만한 대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모르시오?” 비류신은 신비의 고묘(古墓)를 떠난 후 홍부용과 함께 지령보 부근에서 풍운류랑인 고화룡을 찾으려고 칠일 간이나 기를 쓰고 헤맸지만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였다. 그 동안 그는 한 가지 심상치 않은 징조를 발견하였으니, 그것은 많은 무림 인물들이 무엇에 쫓긴 듯 바쁘게 설치고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점을 좀 더 유심히 관찰해 볼 때 그들 사이에 강호 천지를 격동시킬 피비린내 나는 원한관계가 얽혀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비류신은 자기 나름대로 생각나는 점이 있었으나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천연스럽게 반문하였다. “고묘에서 괴사(怪事)가 발생한 이후 이곳에서 또 다시 무슨 사건이 발생했단 말이오?” 선우철은 비류신이 그처럼 견문이 시원치 않은 점에 대하에 깊은 의혹을 품은 채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최근 지령보 부근에서 세 가지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가장 먼저 돌발한 사건은 현기현청(玄機玄淸) 고묘(古墓)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밝혀진 일이오. 그 사건으로 인하여 연쇄적으로 두 번째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괴상하기 짝이 없는 절세적인 무공을 지닌 한 고수가 나타난 것이오. 그런데 사건은 묘한 방향으로 자꾸만 빗나가고 있소. 그동안 우여곡절과 의외의 구경거리가 많았는데 세 번째 돌발사건은 더욱 흥미진진한 것이었소.” 비류신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선우형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나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겠소.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길 바라오.” “비형은 너무 성급한 것 같구려.제가 아는 대로 순차적으로 얘기할 테니 잠자코 귀를 기울이시구려.” “점점 모를 말씀만 하시는구려. 방금 선우형이 말하기를 처음 두 가지 사건보다 세 번째 발생한 사건이 훨씬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강호 인물들은 어이하여 그 세 번째 사건을 들먹이지 않고 순서대로 일을 진행하려 드는 것이오?” “무림 인물들은 이 소식을 전해 듣자 이미 삼 개월 전부터 이곳으로 몰려 왔었소. 수많은 무림 인물들이 혈안이 되어 보물을 찾으려고 설쳤지만 정작 보물이 숨겨진 곳을 아는 사람은 우리들 몇 사람에 불과했소. 결국 그들은 재미있는 구경을 하는데 그칠 뿐이었소.” “그럼 선우형은 세 가지 사건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 무슨 까닭에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은 포기하고 고묘의 일만 관여하시려는 겁니까?” 선우철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비형, 우리는 비록 사귄지 오래 되지 않았지만 십년지기 이상으로 정분이 두터워졌소. 나는 비형을 믿기 때문에 추호도 숨김없이 사실대로 이야기하리다.” 비류신은 즉시 예의를 갖추었다. “선우형께서 그처럼 우정 어린 말씀을 하시니 고맙기 짝이 없소. 사실 저는 강호에 나선지 오래되지 않기 때문에 견문이 넓지 못하니 아무쪼록 많은 가르침을 내려 주시기 바라오.” “무슨 겸손의 말씀을… 사실 저는 두 번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괴상한 고수의 출현에 대하여 여러 각도로 조사해 보았지만, 그는 지혜가 뛰어났고 무예 또한 초인적이라는 사실 이외, 그의 비밀은 도저히 알아낼 재간이 없었소. 그리하여 아버님께서 수완이 능란한 사람들을 시켜 그 비밀을 탐지하도록 하셨는데 저는 그때야 비로소 어렴풋이나마 내막을 알게 되었던 것이오. 그런데 우리 도장맹 사람 이외에 지령보와 무림사도들 중 몇몇 사람들은 물론 무림칠절 중 몇 고수들도 그 내막을 알고 달려왔으니 실로 두통거리가 아닐 수 없소.” 비류신은 깜짝 놀라서 흥분된 어조로 반문하였다. “뭐라고? 무림칠절이라 불리는 노 선배님들도 오셨다고요?” 선우철은 한결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렇소. 이곳에 달려온 사람들은 비단 무림칠절 뿐만 아니오.우리보다 두 세대(世代)나 앞선 옛 마두(魔頭)들 역시 혈안이 되어 달려올 가능성이 많소. 그들은 완전히 세 번째 일에만 집착하여 올 것이오.” 비류신은 갈수록 어리둥절하였다. “선우형, 궁금해서 못 견디겠으니 어서 그 세 번째 사건이 무엇인지 자세히 말해 주시오.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일이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달려오도록 흥분시켰단 말이오?” 선우철은 비류신을 찬찬히 응시하다가 반문하였다. “비형은 제가 파정(破亭)에서 잔금섭혼신편에 관한 얘기를 하던 일을 잊지 않았겠지요? 만일 그 일이 문제꺼리가 되는 날이면 무림 천하는 발칵 뒤집혀 영원히 끝장나고 말 것이오. 하나 다행히 그 채찍에 관하여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봅니다. 만약 흑룡강(黑龍江)일 파가 이 일 때문에 오지만 않는다면 그 세 번째 사건이 수습하기 힘들 정도까지 악화되지 않을 거요.” 비류신은 아직도 선우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였다. “선우형, 저는 우매한 탓에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구려.” “비형은 제가 직접 두 번째 사건을 들추지 않고 세 번째 일부터 꺼내는 진의를 모르겠단 말이오?” 비류신은 내심 섬뜩 놀랐다. ‘그렇다면…? 두 번째 사건은 아무래도 잔금섭혼신편과 관계된 모양이군. 그게 사실이라면 스승님과 소대호 간에 얽힌 십팔 년 전 은원이 밝게 해결될 전망이 혹 있는지 모른다.… …’ 비류신은 이런 생각을 했으나 좀 더 명확하게 알고 싶은 욕심으로 정색하고 다시 캐물었다. “비형 귀 스승님으로부터 삼백 년 전 천하 무림에 쟁쟁한 명성을 떨친 바 있는 절세적인 신의(神醫)인 애원석(哀怨惜)에 관한 일을 전혀 들어 본 적 없소?” 비류신은 선우철이 갑자기 삼백 년 전의 사건을 들추어 화제를 돌리는 저의가 무엇인지 아리송할 따름이었다. “저의 스승님께서는 이미 별세하셨습니다. 따라서 애원석 한원한에 관하여 저는 아는 바가 없소이다. 다만 그분의 의술이나 무예가 절대적이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따름이오. 그런데 선우형은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삼백 년 전의 일을 들추는 것인지 알 수 없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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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