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 第 二十 章 남궁사의 재기 연해월은 시녀 애향(愛香)이 탁자에 여러 가지 꽃을 늘어놓은 채 가위로 다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무척 쾌활한 성격의 애향은 한시도 입을 다물고 있질 않았다. 나이는 열여섯으로 아직은 덜 익은 풋과일 같은 소녀였으나 얼굴은 인형처럼 동그스름한 것이 매우 어여쁜 모습이었다. "이름은 수음희예요, 별호는 염서시이구요." 애향은 꽃가지를 잘라내며 조잘거렸다. 연해월은 찻잔을 들어 괜스레 바짝 타오르는 입 안을 축였다. "남극벌의 꽃으로 불릴 만큼 미모도 천하절색이지만 일신에 지닌 무공도 굉장한 수준이라고 들었어요." 애향은 다 다듬은 꽃들을 화병에다 조심스럽게 꽂았다. 그리고 매우 만족한 듯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아름답게 장식된 꽃들을 어루만졌다. "원래는 노천주님의 수양딸인데 지금은 남극벌의 이인자나 다름없어요. 그분 말씀이라면 모두 꼼짝도 못하거든요." 애향의 말을 들은 연해월은 위지강과 나란히 말을 타고 가던 염서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위지강을 바라보던 염서시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 것이다. '어쩐지……!' 애향은 갑자기 생각난 듯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의문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셨어요?" 연해월의 내심을 알 리 없는 애향의 갑작스런 질문에 그녀는 일순 당황하고 말았다. 연해월은 얼른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응? 아… 아니… 그냥 좀 궁금해서……." 애향은 별다른 의심 없이 손으로 턱을 괸 채 장식된 화병을 감상하였다. "어때요, 좀 서툴긴 해도 그런 대로 괜찮죠?" 연해월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모처럼 꽃구경을 해서 그런지 답답했던 마음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구나." 연해월의 말에 애향은 생글생글 밝은 웃음을 지었다. "마님 마음에 드신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연해월은 애향의 웃음이 너무나 밝고 싱그럽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웃음을 지어본 적이 잠깐 동안이나마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물론 그것은 위지강과의 만남에서였다. "참!" 애향이 문득 생각난 듯 손뼉을 치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아무도 없지?" 이윽고 애향은 손으로 입을 가린 뒤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는 것처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아까 말씀드리려다 말았는데… 제가 보기엔 그 여자보다 마님께서 훨씬 더 아름다우세요." 연해월은 애향의 밉지 않은 칭찬에 짐짓 눈을 흘기는 시늉을 해보였다. "아무렴 그렇기야 하려구?" 그러나 애향은 정색을 하고 천진스럽게 말했다. "진짜예요! 이건 저뿐만이 아니라 제 친구들도 모두 인정한 사실이라구요." 연해월은 애향의 주장에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밉지 않게 봤다니 고맙구나. 늦게까지 수고했다. 어서 가서 그만 쉬……." 연해월은 말을 하다 말고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라는 표정이었다. 애향은 그런 연해월을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갑자기 뭘 보셨기에……." 애향은 연해월의 눈길을 쫓아 막사의 입구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녀는 막사 입구에 우뚝 서 있는 위지강을 발견하곤 기겁을 하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저… 전 아무 말도……!" 애향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연해월은 차가운 시선을 위지강에게 고정시킨 채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 일 없을 테니 걱정 말고 그만 나가보아라." 연해월의 말이 조금은 위안이 되는 듯 애향은 쭈뼛쭈뼛 위지강의 눈치를 살피며 입구 쪽으로 게걸음쳐갔다. "그… 그럼 소녀는 이만……." 애향은 막사 밖으로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쏜살같이 도망쳤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위지강은 막사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연해월은 입가에 엷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영광이군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신 분께서 이런 누추한 곳을 다 찾아주시다니……." 말끝을 흐린 연해월은 문득 실수를 깨달은 듯 수려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참, 이런 실례를 하다니……."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볼모로 잡혀 있는 주제에 귀빈을 맞이하는 태도가 불손했군요." 연해월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직 익숙지 못한 탓이에요. 부디 하해와 같은 도량으로 용서하시면 고맙겠군요." 그녀의 말속엔 날카로운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이때 위지강이 연해월의 두 팔을 턱 잡았다. 갑작스런 위지강의 행동에 연해월은 흠칫했다. 위지강은 우수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보름달 봤소?" 연해월의 눈이 치켜 떠지며 안색도 굳어졌다. "약속을 지키러 내가왔소, 연해월!" 위지강과 연해월의 시선이 허공에서 복잡하게 뒤엉켰다. 잠시 후, 시선을 거둔 연해월이 차갑게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술 냄새가 역겹군요. 한잔 술에 취흥이 도도해지니까 문득 전리품 생각이 나던가요?" 그녀의 냉정한 말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위지강의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위지강은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연해월을 응시했다. "해월." 연해월은 위지강의 손을 홱 뿌리치며 날카롭게 외쳤다. "됐어요, 그만 나가주세요." "어째서 내겐 한마디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요?" 위지강의 동공에 회색 빛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디서 어떤 삶을 살던 단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는 그대이거늘……." 위지강은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며 또박또박 말했다. 위지강이 한 뜻밖의 말에 연해월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고 마침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마구 혼란스러워했다. "한걸음, 한걸음 그대에게 다가가기 위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왜 한마디도 물어주지도 않는 거요?" 연해월은 귀를 틀어막고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만! 제발 그만해!" 그녀는 홍수 같은 눈물을 쏟아내며 절규하듯 외쳤다. "그래서 날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이제 와서 뭘 어떡하란 말이야!" 위지강은 우울한 시선으로 연해월을 응시했다. "당신이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나도 사랑했던 가족들의 시체 위에서 당신을 껴안고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리라는 거야?" 연해월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콱 깨물며 차갑게 말했다. "웃기지 마, 이젠 다 끝났어. 아버지가 당신 손에 죽고 당신이 살인귀로 변해 돌아오던 날 우리 사이는 깨끗이 끝난 거란 말이야!" 연해월의 비수같이 심장을 쑤시는 날카로운 외침에 위지강은 흠칫하며 괴로운 심정이 되었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연해월과 자신은 결코 결합이 될 수 없는 원수지간이 아닌가! "이젠 애비를 원수로 믿고 있는 자식이 복수의 칼을 갈아 애비의 심장을 찌르는 마지막 볼거리만 남았을 뿐이야!" 연해월은 얼굴 가득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어때?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힌 구경거리……." 짜악! 연해월의 빈정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위지강의 손이 그녀의 따귀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얼굴이 한쪽으로 홱 돌아간 연해월은 눈앞에서 별들이 오락가락 하는 것을 느끼며 침상 위로 나가떨어졌다. 위지강은 무섭게 굳은 얼굴로 손을 치켜든 채 서 있었다. 졸지에 따귀를 맞은 연해월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침상에 비스듬히 쓰러진 채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위지강은 그런 연해월을 우울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손을 내렸다. "다… 내 잘못이오." 힘겹게 입을 여는 위지강의 얼굴 위로 죽음처럼 우울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 모습은 흡사 세상의 종말을 고하고 삶을 포기한 자의 무기력한 태도였다. "하늘 아래 내 핏줄이 살아 숨쉬는 줄 알았더라면 그냥 유황굴에 처박혀 있는 건데 말이오." 위지강은 쓸쓸하게 돌아섰다. 고독이 철철 넘쳐나는 위지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해월은 흠칫했다. 그녀는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위지강을 향해 뭔가 할말이 있는 듯 상체를 일으키며 다급히 손을 내뻗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위지강이 사라지자 치켜든 연해월의 손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힘없이 손을 축 늘어뜨리는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옥루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흐우욱!" 연해월은 두 손으로 얼굴을 와락 감싸쥐고 마침내 목메인 울음을 터트렸다. 침상 위에 비스듬히 쓰러져서 하염없이 흐느끼는 연해월. "우우… 흐흐윽!" 막사 밖에서 연해월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위지강은 우울한 시선을 들어 달빛을 응시했다. '그렇소, 연해월? 그대도 나처럼 이 개 같은 현실에 가슴이 찢어지고 내장이 모두 타버릴 것만 같은 거요?' 위지강은 비틀비틀 걸음을 떼어놓았다. 군데군데 초소에서 경비를 서던 무사들이 의아한 얼굴로 위지강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막사와 막사 사이의 어둠 속으로 위지강의 신형이 사라져 버렸다. 이때 어느 막사 뒤의 어둠 속에서 위지강을 지켜보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월광에 비추어진 가녀린 교구와 돌처럼 차갑게 굳어진 얼굴, 그녀는 바로 염서시였다. * * * 크고 작은 암석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 거칠고 험악한 만장절벽 사이로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무산(巫山) 귀곡하(鬼谷河). 때는 일륜이 중천에 떠 있는 한낮이었다. 끼익! 끼익! 강 저쪽에서 한 대의 뗏목이 물살을 가르며 떠내려오고 있었다. 장대로 뗏목을 젓고 있는 인물은 바로 뇌광이었다. 그의 뒤에는 챙이 넓은 은립을 쓴 채 남궁사가 정좌해 있었다. 끼익! 끼익! 들려오는 것이라곤 노 젓는 소리와 강 양쪽의 빽빽한 수림 속에서 지저귀는 수많은 새들의 노랫소리뿐이었다. 휘이이잉! 문득 불어닥치는 스산한 바람에 뇌광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흠칫했다. "갑자기 웬 바람이……?"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쪽빛 강물뿐이었다. 휘이이잉! 한 줄기 스산한 바람이 재차 불어왔다. 그제야 뇌광은 무엇인가 감을 잡은 듯 눈빛을 빛냈다. 살기, 바람 속에는 살기가 묻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이건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피 냄새를 실은 살기로군요." 비로소 남궁사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뭔가 나타날 때도 됐지. 지난 며칠간은 지나칠 정도로 잠잠했으니까." 남궁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푸확! 푸확! 돌연 물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솟구쳐 올랐다. 그들은 허공으로 비산하며 폭갈을 터트렸다. "눈치가 제법이구나, 애송이!" 눈부신 태양 속에서 두 사람은 멋있는 폼으로 공중회전을 한 뒤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쉬쉬쉬쉿! 두 사람 중 하나가 뗏목과는 조금 떨어진 앞쪽으로 사뿐히 날아 내렸다. 척! 수면을 딛고 서 있는 주름살투성이의 노인은 사악한 몰골에 울긋불긋한 색동옷 차림이었다. 그 노인의 어깨를 딛고 척 내려선 노파 역시 울긋불긋한 꽃신을 신고 색동옷 차림을 했으며 화상을 입은 듯한 울퉁불퉁한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두 사람의 차림새는 보기만 해도 역겨운 그런 꼴불견이었다. 그러나 수면 위를 마치 평지처럼 딛고 서 있는 것을 보면 무공은 초절정에 이른 고수들이 분명했다. 수면 위에 우뚝 서 있는 두 노인의 주위로는 사악한 기운이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뇌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천지쌍흉(天地雙兇)의 혈노(血老)와 귀파(鬼婆)로군요." 뇌광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남궁사는 무심한 침묵만 지켰다. "남북이괴(南北二怪)와 더불어 무적검맹을 떠받치는 네 개의 기둥이라 하여 동천사앙신(東天四仰神)이라 불리는 전대의 거마(巨魔)들입니다." 그는 설명을 하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만큼 천지쌍흉은 부담을 안겨주는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궁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이때 유난히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간 혈노가 음침한 눈빛으로 비아냥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감히 무적검맹을 통째 접수하겠노라고 공갈을 치고 다니는 놈이 있다기에 낯짝이나 좀 볼까해서 나왔더니 이게 웬걸…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아닌가?" 귀파도 사이한 미소를 입술 가에 흘려내었다. "흘흘흘, 그래도 반반한 낯짝은 마음에 쏙 드는구먼." 귀파는 남궁사를 쳐다보며 갈라진 음성으로 은근히 말했다. "어떠냐? 귀여운 아이야, 지금이라도 꿈을 깨고 아홉 번 절을 올린다면 너를 기꺼이 우리 부부의 공동제자로 맞아들일 용의가 있다만." 남궁사는 조용한 음색으로 귀파의 제의를 무시했다. "천하의 어느 누구도 나를 막을 순 없소." 이어서 그는 강한 어조로 귀파의 요구에 쐐기를 박았다. "그 사실을 믿지 않는 자는 모두 죽게 될 것이오." 혈노가 귀파를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할망구도 들었지?" 귀파도 덩달아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를 죽여준다니 정말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짐짓 탄식 섞인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아아, 그 동안 우리는 우리 부부를 죽여줄 사람을 찾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중원천하를 이 잡듯 뒤지고 다녔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소원을 이루게 되었군요." 귀파는 짐짓 슬픈 표정으로 남궁사를 바라보았다. "너는 모른단다, 아이야! 때가 되도 죽지 않고 살아가야만 하는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고 권태로운 것인지……." 남궁사의 은립 아래서 무쇠도 꿰뚫어버릴 듯한 지독한 안광이 폭사되었다. 그는 차가운 음성으로 광오하게 말했다. "그 한마디로 당신들의 목숨은 지옥명부에 올랐소!" 푸화확! 앉은 자세 그대로 남궁사는 휘돌면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혈노는 눈부신 태양 속에서 몸을 뒤집는 남궁사를 올려다보며 클클거렸다. "킬킬킬……. 어린놈이 제법 재롱을 부린다만……." 귀파 역시 매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귀여운 아이를 우리 손으로 죽여야 하다니……. 이건 정말 슬픈 일이로군요." 허공에서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물구나무 자세를 한 남궁사는 검을 쥔 듯한 형태의 오른손을 맹렬히 내뻗었다. "천의무상검결(天衣無相劍訣) 제일로(第一路) 뇌뢰교굉(雷雷交轟)!" 촹! 그러자 맑은 검명과 함께 그의 빈손엔 어느새 검이 쥐어져 있었다. 쿠쿠쿠쿠쿠! 검 끝에서는 용수철 형태의 검기가 마치 소용돌이치듯 급속히 확산되며 뿜어져 나왔다. 천지쌍흉은 자신들에게 밀려오는 검기를 쳐다보며 눈이 확 불거진 채 기겁을 했다. "천의무상검!" "천마검법과 더불어 우내쌍절검(宇內雙絶劍)으로 손꼽히는 남궁세가의 비전검학(秘傳劍學)을 저놈이 어떻게……?" 그러나 놀라고 있을 수만도 없는 터! 슈아악! 혈노의 노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이제 보니 남북이괴가 당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구나! 조심해, 할망구!" 쿠콰콰쾅! 검기가 작렬하면서 수면이 어마어마한 기세로 뒤집혔다. 자욱한 물보라는 허공을 가득 메웠다. 해일처럼 솟구치는 물기둥 위쪽 높은 곳에서 혈노와 귀파는 몸을 뒤집었다. 뇌광은 허공을 올려다보며 매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똑같은 검법, 똑같은 초식이지만 그 위력은 예전에 비하면 반딧불과 월광의 차이다!" 남궁사는 두 손으로 모아 쥔 검을 강력한 기세로 끌어당겼다. ― 하늘 밖의 하늘……! 마음속의 우주……! 남궁사는 전신에서 장엄한 기운을 뿜어내며 눈빛을 강렬하게 빛냈다. ― 그 무한대의 공간 속을 자유롭게 훨훨 떠다닐 수 있을 때 비로소 최고의 무예는 완성되는 것! "천의무상검결 제이로 벽력도전(霹靂到轉)!" 우렁찬 사자후를 터트린 남궁사의 신형이 팽이처럼 맹렬히 휘돌아갔다. 빠른 회오리바람 속에서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실타래가 풀리듯 장엄한 검기만 휘돌면서 뿜어져 나왔다. 쿠콰콰콰콰! 혈노는 기겁을 하며 안색이 대변했다. "맙소사! 저런 검세라는 건 도대체가……!" 귀파의 다급한 음성이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우물쭈물할 겨를이 없어요! 빨리 천지합벽공(天地合劈功)을……." 파팡! 흡사 자석에 이끌린 듯 허공에서 두 사람의 손이 강력하게 합쳐졌다. 콰우우우우! 천지쌍흉은 허공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천지의 기운은 음양(陰陽)으로 나뉘어지매!" "합격의 요결로 이루어진 일원(一元)의 기운은 천지간의 으뜸이다." 꽈드드드등! 두 사람은 한 손은 마주잡고 다른 한 손은 맹렬히 떨쳐내며 광구(光球) 형태의 강기를 뿜어내었다. "천지합벽일기공(天地合劈一奇功)!" 쿠쿠쿠쿠쿠! 허공을 온통 뒤덮으면서 덮쳐오는 검기를 향해 광구는 정면으로 부딪쳐갔다. 퍼퍼퍼퍼퍽! 벌집처럼 쑤셔 박히는 검기에 광구는 마구 금이 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쾅! 마침내 거대한 광구가 산산조각 나면서 박살이 나고 말았다. 콰쾅! 푸아아악! 해일을 만난 듯 거대한 물기둥이 수면 위로 마구 솟구쳐 올랐다. 그 광경은 차라리 경이, 그 자체였다. 천지쌍흉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맙소사!" "천지합벽일기공이 이토록 간단하게 깨지다니……!" 퍼퍼퍼퍼퍽! 그들이 경악하는 사이 검기는 천지쌍흉의 전신을 벌집처럼 꿰뚫어 버렸다. 그들의 신형이 멀찌감치 뒤쪽에 떨어져 있는 절벽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는 그대로 절벽에 쑤셔 박혀 버렸다. 콰쾅! 쾅! 허공에서 한차례 몸을 뒤집은 남궁사는 다시 뗏목 위로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섰다. 자욱한 낙진 속에서 천지쌍흉은 처참한 몰골로 절벽에 쑤셔 박혀 있었다. 혈노가 전신을 경련하며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이… 이제 보니 네놈은… 잠영공 남궁 늙은이의……." 철컥! 남궁사는 옆구리의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미리 알았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요." 혈노는 옆에 쑤셔 박혀 죽어 있는 귀파를 곁눈질했다. "빌어먹을 할망구… 어쩐지… 아침부터 꿈 타령에… 방정을 떨더라니만……." 눈을 까뒤집은 채 최후의 경련을 일으킨 혈노는 마침내 고개를 툭 떨구고 말았다. 휘이이이잉! 무심한 강바람이 죽어 있는 천지쌍흉을 한차례 훑고 지났다. 남궁사는 멀리 앞쪽 운무에 가려진 채 장엄하게 솟아 있는 수려한 산세를 쳐다보며 무심한 음성으로 물었다. "저 산 속에 동궁이 있다고 했나?" 뇌광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소문주!" 남궁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운무 속의 거산을 응시했다. "모처럼 만찬을 즐기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곳이로군!" 절벽에 쑤셔 박혀 있는 천지쌍흉의 시신을 뒤로한 채 뗏목은 석양 속으로 멀리 사라져갔다. * * * 소주(蘇州). 향락의 고장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소주의 중앙을 관통하고 있는 일자대로(一字大路) 옆으로는 각종 상점과 객잔, 주루 등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각 상점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댔고,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한낮의 대로는 오가는 사람들로 매우 붐볐다.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등, 웅성거리며 시끌벅적한 어느 객잔 안이다. 한쪽의 탁자에 둘러앉아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는 네 명의 중년사내가 있었다. 사내들은 모두 병장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온 그들의 차림새를 보아하니 무림인들이 분명했다. 그들 중 남의(藍衣)를 입은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궁사가 무적검맹의 정예를 이끌고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 다 뭔가 이 사람아! 북파무림맹이 무너지면서 남극벌 쪽으로 빌붙었던 예전의 휘하 문파들을 아예 추풍낙엽처럼 휩쓸면서 몰려오고 있다는 말도 못 들었어?"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흑의(黑衣) 차림의 사내가 대답했다. "걸리는 건 인정사정없이 모조리 짓밟아 버린다더군.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의 말에 의하면 마치 지옥을 뛰쳐나온 악마를 방불케 한다는 거야."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본가와 처가가 졸지에 잿더미로 변했으니 눈이 뒤집힐 만도 하지. 거기다 예전에는 한솥밥을 먹던 문파들이 원수의 수족 노릇을 하고 있으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이번에는 회색 빛 장삼을 차려입은 사내가 말했다. "내가 장본인이라도 미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걸세." 백의(白衣) 차림의 사내가 동조를 했다. 그들은 술잔을 채워가며 서로 주거니받거니 하였다. 흑의를 입은 사내가 술잔을 비운 뒤 다시 입을 열었다. "하루에 거의 일천 리를 주파하며 몰려오는 중이라니까 아마 이곳에도 곧 당도할 걸세." "젠장, 다른 데는 다 멀쩡한데 이놈의 남부 쪽은 하루도 바람잘 날이 없군그래!" 남의인은 자못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 이때 점소이의 안내를 받으며 낡은 죽립을 깊숙이 눌러쓴 흑의인이 실내로 들어섰다. 죽립을 눌러쓴 관계로 흑의인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이 사람아! 자네는 소문도 못 들었는가?" 회색 빛 장삼을 입은 사내가 남의인을 향해 면박성 발언을 했다. "아니면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있단 말인가?" 남의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회색 빛 장삼의 사내는 자세한 설명을 했다. "그 옛날 강호칠겁에 가담했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살인첩을 받고 저승 문턱을 넘었다는 소문이 은밀히 퍼지고 있네. 그래서 나머지 인물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군그래!" "아니, 그게 사실인가? 허면 살인첩을 발부한 그자가 누구라던가?" "놀라지 말게! 살인첩을 발부한 인물은 바로 검존무적 위지백의 일점혈육인 위지강이라는 거야." 이번에는 흑의인이 놀라서 소리쳤다. "뭣이라고? 그렇다면 위지백의 자식이 살아 있다는 풍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렇네. 더구나 위지강은 천마검법을 익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네. 그러니 위지강의 가문을 멸문시키는 데 가담했던 자들이 밤잠을 설치는 것은 무리가 아니지." 회색 빛 장삼의 사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고금무적이라는 천마검법을 익혔다고……? 한바탕 피바람이 강호를 휩쓸겠구만!" 이때 맨 처음 입을 열었던 남의인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나저나 무슨 도깨비놀음을 하는 건지 도대체가 모를 일이군." 흑의인이 반문했다. "누구 말인가?" 이때 흑의죽립인은 한쪽에 마련된 탁자에 앉아 점소이에게 음식을 주문하고 있었다. "누구긴 누구야, 남궁사 그 친구지!" 남의인은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북파무림맹과 남궁세가가 남극벌의 말발굽에 짓밟힐 땐 어디서 뭘 했는지 코빼기도 안보이다가 이제 와서 불쑥 나타나 동궁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도깨비도 이런 도깨비가 어디 있겠나?" 이때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흑의죽립인의 전신이 한차례 흠칫했다. 회색 빛 장삼의 사내가 남의인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그거야 우리가 알 바 없는 거고… 그나저나 생사교(生死橋)에 갔던 얘기나 어서 털어놔 보게." 흑의인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생사교라면 무산에 있다는 죽음의 다리가 아닌가?" 남의인은 우쭐해져서 어깨에 잔뜩 무게를 실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또한 천하사세 중 무적검맹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관문이기도 하지." 회색 빛 장삼의 사내가 흥미진진한 얼굴을 했다. "거기선 누가 나왔나? 무적검맹의 노른자위로 손꼽혔던 칠협팔의(七俠八義)를 비롯해서 동천사앙신으로 불리던 남북이괴와 천지쌍흉조차 무너졌으니 당연히 맹주가 직접 나왔겠지?" 남의인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좀 의외였어. 구경간 사람들도 대부분 그렇게 예상을 했었는데 막상 남궁사를 기다리고 있던 인물은 맹주인 팔비신검(八臂神劍) 궁모백이 아니라 팔왕검(八王劍) 사마풍(司馬風)이었단 말일세." 흑의인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팔왕검 사마풍이라면 무적검맹의 차기 맹주로 내정되어 있는… 팔비신검 궁모백의 대제자가 아닌가?" 회색 빛 장삼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는군." 이때 흑의죽립인은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헌데, 술병을 든 그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질 않은가! "팔비신검 궁모백이라면 과거 무림칠대공포로 불렸던 강호칠겁의 일 인인데 명분도 없는 그런 싸움에 직접 나설 리가 없지. 무림에서 차지하고 있는 배분이나 명성을 놓고 볼 때 이겨봐야 본전이고 지면 개망신이라고 판단했을 테니까." 흑의인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두 사람의 승부는 어떻게 됐나?" 남의인은 술잔을 들어 쭈욱 들이킨 뒤 손등으로 입가를 쓰윽 훔쳤다. 그는 고의로 시간을 끌어 잔뜩 궁금증을 유발시킨 뒤 비로소 입을 열었다. "결과는 남궁사의 승리로 끝났지만 어쨌든 싸움은 정말 볼 만했지." 남의인은 절벽과 절벽 사이를 연결하는 나무다리 위 허공에서 격렬하게 격돌하던 남궁사와 여러 자루의 검을 옆구리에 꿰어찬 팔왕검 사마풍의 모습을 떠올렸다. 세 사람은 모두 긴장한 기색으로 남의인의 입만 쳐다보았다. "팔비신검 궁모백의 진전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사마풍이, 여덟 자루 검으로 펼쳐내는 팔왕검학(八王劍學)과 무적검맹을 통째로 접수하겠노라 공언한 뒤 승승장구를 거듭해온 천외천무쌍가(天外天武雙家)의 후계자가 신들린 듯 유감없이 쏟아내는 천의무상검결(天衣無相劍訣)은 한마디로 무학의 극치였지!" 남의인은 치열했던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입 안이 타는지 술잔을 들어 한 모금의 술로 입 안을 적셨다. "미친 듯이 난무하는 검광 속에서 두 사람은 눈부시게 격돌했고, 한치의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한나절 동안이나 팽팽하게 이어졌던 균형이 한순간에 허물어진 것은 먼동이 뿌옇게 밝아올 무렵이었지." 남의인의 두 눈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일각에서는 남궁사가 팔왕검결을 모조리 도둑질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어쨌든 사태는 눈 깜빡할 사이에 끝나고 말았지." 동료들이 숨을 죽이고 자신의 말에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자 그는 더욱 더 신바람이 나서 떠들어댔다. "아무튼 남궁사의 부챗살 같은 수천 줄기의 검기가 사마풍을 강타하자 사마풍의 전신은 양손에 움켜쥔 쌍검과 함께 산산조각 나면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지." 세 사람은 그만 입을 딱 벌린 채 남의인을 쳐다보았다. 동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의인은 흐뭇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신의 얘기에 푹 빠져 있는 동료들을 보니 매우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목소리에는 한층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제자의 죽음으로 충격에 잠겨 있던 궁모백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네. 궁모백은 직접 생사교를 걸어가 웃으면서 남궁사의 손을 잡아주었지. 그걸 보니 과연 거물은 거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회색 빛 장삼의 사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살기등등했던 분위기가 대번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확 바뀌었겠군그래." 남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치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고개를 뻣뻣하게 세웠다. "그 바람에 우리 같은 잔챙이들까지 그날 밤 무적검맹 한복판에서 코가 삐뚤어지게 한잔 제꼈다는 것 아니겠어?" 그는 입맛을 다셔가며 부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는 동료들을 휘둘러보았다. "자, 다음은 그날 밤 그 자리에서 우연히 눈이 맞은 절세미인과 아예 배꼽까지 맞춰버린 얘기를 털어놓을 차례인데 누구 술 한잔 더 살 사람 없나?" 퍽! 이때였다. 문득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에 그들은 일제히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눈에 손아귀에 움켜쥔 술잔을 박살낸 채 덜덜덜 떨고 있는 흑의죽립인이 보였다. 네 사람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 친구 왜 저래?" "어디 아프면 얼른 가서 발 닦고 자든지 하지 왜 저러고 있는 거야?" 흑의죽립인은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무섭게 굳은 얼굴로 계속 경련하고 있을 뿐이었다. 흑의죽립인, 그는 바로 사마군이었다. * * * 싱그러운 햇살이 한창인 오후. 남궁진성은 산기슭의 언덕 끝자락에 쭈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그는 언덕 아래의 모옥을 아무 생각 없이 바로 보고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이때 쟁반 위로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옥음이 들려왔다. 남궁진성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화가 언덕을 올라오며 숨이 가쁜 듯 헥헥거리고 있었다. "아유, 힘들어." 이화는 남궁진성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뭘 해? 아직 찬바람을 쐬면 안 좋을 텐데……." 남궁진성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냥 있었어. 집 구경도 하고……." 이화는 남궁진성 옆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피, 아무리 봐야 그게 그건데 구경할 게 뭐 있다구." 남궁진성은 고개를 돌려 이화를 쳐다보았다. "넌 여기 오래 살았니?" 이화는 손가락을 헤아렸다. "세 살 때부터 살았으니까… 넷… 다섯… 여섯……." 그녀는 남궁진성을 향해 손가락 셋을 펴 보였다. "올해가 꼭 삼 년째야." "사람도 아무도 없는 이런 산 속에서 삼 년이나 살았단 말야?" 이화는 또렷한 눈망울로 모옥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여섯째 오빠만 남아 있지만 내가 처음 저 집에 왔을 땐 오빠들이 여러 명 살고 있었어." 남궁진성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화의 말이 매우 뜻밖으로 들리는 것이다. "여러 명? 오빠들이 그렇게 많아?" 이화는 아주 밝게 웃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싱그럽게 해주는 매우 깜찍하고 귀여운 웃음이었다. "응, 하지만 친오빠들은 아니야. 난 원래 고아거든!" 남궁진성은 망연한 표정이 되었다. "하마터면 길거리에서 얼어죽을 뻔했는데 둘째 오빠가 시장에 내려왔다가 나를 발견하곤 이리로 데려왔데." "그랬… 었구나……!" 남궁진성은 어린 마음에도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처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밝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화가 한편으론 대견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그런 남궁진성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이화는 각자 특기에 맞는 무공을 수련하는 잠송 등, 혈랑팔겁의 모습을 떠올렸다. "처음엔 무서워서 말도 못 붙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 착하고 좋은 오빠들이었어." 남궁진성은 의아해했다. "그럼 그분들은 지금 어디 가신 거야?" "그건 나도 몰라." 이화는 턱짓으로 모옥을 가리켰다. "오빠들은 저 집에서 먹고 자면서 눈만 뜨면 무공수련만 하는 게 하루일과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대장오빠가 오셔서 모두 데리고 산을 내려가 버렸어." 남궁진성의 두 눈에 호기심이 가득 담겼다. "대장오빠……?" 이화는 생글생글 웃으며 작고 도톰한 입술로 쫑알거렸다. "제일 큰오빠야." 이화의 뇌리에 흑립을 눌러쓴 위지강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긴 것도 오빠들 중에서 제일 잘생겼지만 무공도 제일 강해서 다른 오빠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거야." 남궁진성이 눈빛을 강하게 빛냈다. "그럼 혹시 날 구해주신 분이……?" 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 바로 대장오빠야." 순간 남궁진성은 이화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말해줘, 이화야!" 이화는 갑작스런 남궁진성의 행동에 흠칫했다. 남궁진성은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난 그분을 꼭 만나야 돼! 어딜 가면 그분을 만날 수 있지?" 이화는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그… 그건……!" 남궁진성의 간절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분을 만나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있어서 그래. 알고 있으면 제발 가르쳐줘, 이화!" 너무도 간절한 남궁진성의 애원에 이화는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집 뒤로 돌아가면… 절벽 가운데 동굴 하나가 있어." 남궁진성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대장오빠가 가끔 오면 자고 가는 곳인데 아까 여섯째 오빠가 그리로 가는 걸 봤어." 앉아 있던 남궁진성의 몸집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는 반색을 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고마워, 이화!" 타타타탁! 바삐 언덕을 뛰어내려가는 남궁진성을 이화는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득 시선을 돌려 남궁진성에게 잡혀서 퉁퉁 부어오른 손을 쳐다보았다. 앙증맞도록 희고 고운 손에 그제야 아련한 통증이 전해져왔다. 이화는 부어오른 손에 입김을 불어대며 쫑알거렸다. "아파서 죽는 줄 알았네! 쬐끄만 게 밥 먹고 손 힘만 키웠나 보지?" 울퉁불퉁한 바윗덩이로 뭉쳐져 높다랗게 치솟아 있는 암산. 바라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암산이었다. 암산의 중간엔 목책문으로 막혀 있는 동굴 입구가 있었다. 동굴 안에는 유등이 걸려 있었고 나무탁자에는 위지강과 제중인이 마주앉아 있었다. 위지강은 흑립을 벗은 상태였다. 제중인은 위지강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기왕 오신 김에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지 그럽니까?" 위지강은 술잔을 집어들었다. "본 것도 모자라 이렇게 술잔까지 나누고 있는데 뭘 더 보라는 거냐?" 제중인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들으면 절 보려고 오신 줄 알겠군요." 위지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친구,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제중인의 눈빛이 야릇해졌다. 그리고 목소리마저 은근해지고 있었다. "이러지 마십쇼 형님, 귀신은 속여도 이 제중인은 못 속입니다." 그는 얼굴을 위지강에게 바싹 들이밀었다. "그 녀석… 형님 아들 맞죠?" 술잔을 들어올리던 위지강이 흠칫했다. 그러나 그는 단숨에 술을 쭉 들이킨 뒤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실없는 소리 말고 술이나 마셔." 제중인은 짐짓 얼굴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이런 식으로 자꾸 오리발 내밀면 그 녀석한테 확 까발려 버릴 거요. 한번 한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는 내 성격 잘 아시잖소!" 위지강은 술병을 들어 잔을 채우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입 다물고 문이나 열어줘." 제중인은 목책문을 돌아보며 흠칫했다. 이어 그는 일어나서 문 쪽으로 다가가며 투덜거렸다. "이화 이 녀석, 여긴 위험하니까 함부로 얼씬거릴 생각도 하지 말라고 입이 닳도록 타일렀거늘……." 쾅! 제중인은 거칠게 문을 열어 젖혔다. 순간 그의 눈이 흠칫하며 크게 벌어졌다. 활짝 열린 문밖에 서 있는 것은 이화가 아니라 남궁진성이었던 것이다. "헉… 헉!" 잔뜩 더럽혀진 몸으로 남궁진성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제중인은 목을 길게 뽑아 제법 높은 벼랑 아래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연후 그는 남궁진성을 쳐다보며 벼랑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지금… 성치도 않은 그 몸으로 여길 기어올라 온 거냐?" 남궁진성은 제중인을 쳐다보며 야무지고 똑부러진 음성으로 부탁했다. "은공께서 와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해주십시오." 제중인은 순간적으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녀석이……?' 제중인이 아무런 말이 없자 남궁진성은 재차 간언했다.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남궁진성의 요구가 하도 진지하자 제중인은 동굴 안쪽의 눈치를 살피며 궁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임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들여보내라." 이때 동굴 안에서 위지강의 음성이 흘러 나와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제중인은 흠칫하며 남궁진성을 쳐다보았다. "험, 험!" 제중인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입구에서 비켜섰다. '하기야 뭐 짐승도 제 핏줄 귀한 줄은 안다는 데 어련하려구!' 엉거주춤 비켜선 제중인을 지나 남궁진성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으로 들어선 남궁진성은 흠칫하고 말았다. 탁자에는 한 명의 괴인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발목까지 치렁치렁하게 내려온 검은 장포, 사자갈기 같은 은발은 허리까지 늘어졌으며, 얼굴엔 무수한 칼자국이 나 있는 파면괴인의, 인피면구를 뒤집어쓴 위지강이 탁자에 앉아 있었다. 제중인은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어선 채 콧구멍을 후비적거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젠장, 동작 한번 빨라서 좋군! 하기사 원래부터 번갯불에 콩 아니라 멧돼지라도 구워먹고 남을 양반이긴 하지만……!' 터턱! 남궁진성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못 엄숙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남궁진성이라 합니다, 대협!" 위지강은 술잔에 술을 따르며 무감동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그래서?" 순간 남궁진성이 고개를 발딱 쳐들었다. 그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는 백골난망이오나 감히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 남궁진성은 강렬한 눈빛을 토해내었다. "저를 문하로 거두어주십시오!" 위지강의 술을 따르던 손길이 뚝 멈추어졌다. 제중인은 팔짱을 낀 채 문가에 서서 두 사람을 흥미 있게 쳐다보고 있었다. 남궁진성은 강렬한 어조로 울분을 토해냈다. "마도수란 살인마와 더불어 결코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 멸문의 철천지한이 있습니다." 남궁진성은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바닥에 쿵 찧었다. "부디 복수의 길을 열어주십시오, 대협!" 위지강은 야릇한 충격에 휩싸이며 눈빛이 파랑 치듯 거세게 흔들렸다. 자신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결코 아들이라 부를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그였다. 허지만 남궁진성은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아비인 자신을 죽이겠다고 무공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 아닌가! 이 얼마나 모순되고 비극적인 만남이란 말인가! 이것이 운명이라면 너무나 가혹한 신의 농간이 아닌가! 위지강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킨 뒤 소리가 나도록 힘주어 탁자에 놓았다. 착잡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는 행동이었다. "따라오너라." 위지강은 짧게 말한 뒤 동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궁진성은 격정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제중인을 쳐다보았다. 제중인은 씨익 웃으며 악의 없는 일침을 가했다. "우리 대빵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따라가지 않고 나는 왜 쳐다봐, 임마!" 그때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는 듯 남궁진성은 저만큼 앞서가고 있는 위지강을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동굴 끝은 꽉 막혀버린 막다른 석벽이었다. 위지강은 가로막힌 석벽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석벽의 중앙을 향해 중지를 살짝 퉁겼다. 쉭!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지풍은 석벽에 작렬했다. 그그그긍! 그러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굉음과 함께 석벽이 양쪽으로 서서히 밀려나며 석실 하나가 나타났다. 무표정한 위지강의 뒤에 서 있던 남궁진성은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석실 바닥의 중앙에는 팔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벽 쪽으로는 각종 서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서가가, 한쪽 옆으로는 탁자와 나무 침상이 갖춰져 있는 전형적인 연공실이었다. 흠칫 놀라는 남궁진성을 향해 위지강은 오른손을 척 내뻗었다. 후우우우웅! 우수에서 강력한 흡인력이 뻗어 나와 남궁진성을 휘어 감았다. 남궁진성이 놀랄 사이도 없이 위지강은 오른손을 스윽 들어올렸다. "어… 어……?" 무형의 기운에 휩싸인 채 남궁진성은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며 할말을 잊고 말았다. 위지강의 손이 팔괘가 그려진 중앙으로 향하자 남궁진성도 따라서 둥둥 뜬 채로 그쪽으로 이동했다. 남궁진성의 몸이 팔괘 문양의 허공으로 이동되고 나자 위지강은 손바닥을 곧장 수평으로 내뻗었다. 스르르르! 남궁진성의 몸이 팔괘 문양의 중앙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는 혼이 반쯤은 달아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무공이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면 허공을 격하고 사물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겪어보게 될 줄은……!' 이때 무릎 앞에 툭 떨어지는 낡은 책자 때문에 남궁진성은 사념에서 깨어나며 흠칫하고 말았다. 그는 두 손으로 책자를 집어들었다. 순간 남궁진성의 두 눈이 더할 수 없이 치켜 떠졌다. 책자를 바라보는 그의 전신은 벼락을 맞은 듯한 거센 충격으로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남궁진성은 격동이 넘치는 표정으로 내심 외쳤다. '천마비록……! 이것이 바로 무공비급이라는 것인 모양이구나.' 아직 천마비록의 가치에 대해서 문외한인 남궁진성은 천마비록이 그저 단순한 무공비급인 줄 알고 있었다. "네 인생은 네가 주인공이다, 남궁진성!" 위지강의 무감정인 음성에 남궁진성은 흠칫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여전히 무심한 음성이 연달아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명문세가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무예와 학문의 기초는 익혔을 터." 남궁진성은 단 한 자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격동 어린 표정으로 위지강의 입만 쳐다보았다. "어차피 가시밭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면 어떤 최악의 상황에 처하더라도 스스로 포기하는 비겁한 사내는 되지 않도록 해라." 이 말을 끝으로 위지강은 휙 냉정하게 돌아섰다. 남궁진성은 뒤돌아서 나가는 위지강을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순간 석문을 나서려던 위지강이 흠칫하며 멈추어 섰다. 위지강은 천천히 신형을 돌려세웠다. "사… 부……?" 남궁진성은 고개를 쳐든 채 감격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다. "예, 사부님! 하늘을 두고 맹세하건대,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위지강은 남궁진성을 묵묵히 주시했다. 잠시 그렇게 쳐다만 보던 위지강은 이내 신형을 돌려 석문을 나섰다. 그그그긍! 석문이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궁진성은 석문이 다 닫힐 때까지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마침내 석문이 닫히고 석실에는 남궁진성 혼자만 남게 되었다. 위지강은 석문을 등진 채 우울한 눈빛을 발하며 그대로 서 있었다. 제중인은 그런 위지강을 망연자실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도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대형!" 그러나 위지강은 묵묵히 탁자로 가 앉았다. 제중인은 위지강에게 다가가며 따지듯이 물었다. "어째서 하필이면 천마비록입니까?" 그러나 위지강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제중인은 열불이 터지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는 석벽을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재수 없는 소리지만 만에 하나 저 녀석의 자질이 뛰어나서 대형을 넘어서는 날엔 어떡할 거요? 그 결과를 생각해 보셨소?" 위지강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발이 붙어 있는 인피면구를 머리 위로 쓱 잡아당겼다. 비로소 진면목을 회복한 위지강은 인피면구를 탁자에 놓으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내 마음속에 이런 욕심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제중인은 망연한 표정이 되었다. "핏줄이란 게 다 그런 모양이야." 위지강은 술병을 집어들었다. "그 녀석에게 뭐든 하나라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가슴이 벅차 오르고 흥분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위지강은 술병째 꿀꺽꿀꺽 마셔댔다. 그런 위지강의 모습을 바라보며 제중인은 가슴 한구석이 찡해오는 그 무엇을 느꼈다. 병째로 술을 들이키고 있는 위지강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3권으로 이어집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