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평면 자체로 공간을 말할 수는 없는 걸까? 이런 고민은 이탈리아 화가 폰타나와 나눌 수 있겠구나. 폰타나는 아르헨티나에서 출생했지만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화가이자 조각가였단다. 그는 공간주의(spatialism)의 창립자였지. 밝은 단색을 선호하고 평면에 대한 끝없는 도전의 방식을 통해 캔버스 자체로 공간을 창조한 거야. 폰타나에 의해 20세기 미술은 또 한 번의 혁신을 맞이하게 되었단다.
중세 이후 서구의 회화는 소실점과 원근법, 명암법을 통해 평면으로 3차원을 완성하려던 성과가 아니냐, 그런데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작가들은 현대의 회화양식이 과거와 이미 달라져 있었고,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한다고 믿었지, 폰타나 1940~1950년대에 붙어 닥친 예술계의 혁신적인 분위기 속에 있었단다. 많은 곳을 여행하며 다른 문화와의 지적 교류를 경험했는데 특히 1930년대의 추상미술과 미래주의에 큰 감화를 받았다는구나. 그리하여 1946년 공간주의의 이론적 기본을 정립하게 된 거야. 폰타나는 전통적 원근법으로 만든 환영의 공간에서 벗어나 캔버스에 직접 공간을 창조하는 작업을 시도한 것이지. 이를테면 캔버스 한가운데를 수직으로 1~2m가량 칼로 베어낸 자국을 만드는 거란다. 이 벌어진 틈을 통해 내부가 들여다보이면서 캔버스의 표면은 공간화되는 효과를 갖게 되거든, 폰타나는 공간뿐만 아니라.시간, 색채, 소리, 움직임까지도 모두 아울러 종합할 수 있는 새로운 미술양식을 원했단다.
그림을 보자. 팽팽한 긴장감에서 발생한 바이브레이션으로 떨리고 있는 듯한 화면 한가운데를 정말 칼로 베어버렸구나. 가상의 공간만을 보여주던 2차원 평면의 캔버스에게 '진짜 공간'을 보여 달라며 칼로 베어버린 거란다. 수직으로 갈라진 캔버스는 고요하기만 하고, 칼자국을 따라 안으로 캔버스가 말려 들어가 있구나 깊게 패인 검은 자국을 따라 관람자들은 뒤편에 가려진 공간을 느끼고 싶어지게 된단다. 평평하던 곳에서 깊이가 발생하고 궁금증이 생기는 것이지 2차원의 마술적 평면이 아니라 찢어진 현실의 캔버스로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게 아니냐, 폰타나의 칼은 이곳은 평면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구나 어쩌면 그가 그은 이 날카로운 자국을 위해서 캔버스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겠구나.
공간주의란 새로운 4차원적 예술의 창조가 목표였단다. 왜냐하면 매체는 나날이 진보하는데, 새로운 정신에 부응하지 못하는 기존 예술을 대신할 시공간이 필요했거든. 진정 역동적인 현대예술을 위해 3차원적인 색과 소리 그리고 동작이 어떻게 4차원적 공간 속에서 융화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지. 캔버스의 표면은 갈라지고 찢겨졌지만, 여기에 표현된 4차원의 세계는 과거의 속박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예술의 결실이구나. 전통적 캔버스의 환영을 거부하고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 이 움직임이야말로 폰타나가 창설한 전위적 공간주의의 전형이란다. 유럽의 전통 화가들이 점유하던 감정적 추상에서 벗어나 폰타나는 이지적으로 회화에 접근했던 거야. 이 방법이 개념미술의 길을 개척한 것이었지. 이 혁신적인 폰타나의 칼자국에서 현대예술의 진보를 느낄 수 있겠느냐? 그의 새로운 시도는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이나 앤디 워홀의 스크린 인쇄와 함께 전통주의자들에게 큰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이들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용인되어야 하나?" 라고 비판하면서 심지어는 미술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이 며 분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