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란다의 다르마팔라
다르마팔라(Dharmapāla, 1864-1933)는 실론(스리랑카) 출신의 인도불교 부흥운동의 선구자이다. 그의 본명은 데이비드 헤와위타르네(David Hewavitarne)였다.
그런데 출가자를 ‘집 없는 자’, ‘집 나온 자’라는 뜻의 ‘아나가리카(Anagarika)’라는 말을 이름 앞에 붙여서 불렀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출가수행자가 되기로 서약을 해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ārika Dharmapāla)라는 이름을 얻었다.
실론(스리랑카)은 16세기 이후 서구 열강들의 식민 지배를 받아왔다. 다르마팔라가 태어날 당시에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수세기에 걸친 기독교 국가들의 지배로 인해 실론은 전통종교와 문화를 상실해 가고 기독교화 돼가고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다르마팔라는 조국 실론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서구문명에 열등의식을 가졌던 전 세계의 불교국가들에게 하나의 밝은 등불 같은 존재가 됐다.
다르마팔라의 부모는 불심이 깊었다. 특히 어머니는 어린 다르마팔라와 함께 조석으로 예불을 모셨고, 어린 아들에게 오계(五戒)를 지킬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실론의 시대 상황 상 다르마팔라는 유년시절부터 다른 아이들처럼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그는 어릴 때부터 성경의 주요 구절들을 줄줄 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의 독선적인 교리와 기독교인들의 배타적이고 광신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결코 찬성하지 않았다.
여덟 살 때 그는 아버지를 따라 불교사원에 가서 브라마차리아(Bramacharya-금욕), ― 독신수행자의 서약을 했다.
그리고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ārika Dharmapāla)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래서 아무리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불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돼 있었다.
그는 기독교 학교를 오가는 길에 매일 코타헤나 사원을 지나다녔다. 그 사원의 주지 스님인 모히띠왓떼 구나난다(Mohotowatte Gunananda, 1823~1890)는 근대 실론(스리랑카)에서 가장 뛰어난 설법가였다. 그는 법회에서 논리적으로 기독교의 문제점들을 낱낱이 지적했다. 그의 명성이 자자해지고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기독교인들이 그의 콧대를 꺾어놓기 위해 콜롬보 근교의 파아나두라(Panadura)에서 대규모 공개 토론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 당시 영국인들의 식민지 지배는 과거 식민지배 국가들이 저질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불교를 말살하려 하고, 기독교를 적극 전파했다. 이는 정치ㆍ경제적 내지 사회적으로 실론을 쉽게 통치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리하여 영국인들은 도처에 기독교계 학교를 세워 기독교와 서양문명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에게는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다. 영국인들은 특히 불교를 보잘 것 없는 종교, 또는 미신, 우상숭배라고 떠들었다. 또한 영국인들은 정기적으로 간행물이나 책자 등을 발행해 기독교의 우수성을 선전하기에 혈안이었다.
이런 정책의 영향으로 실론 사회 내부에서 기독교를 따르는 새로운 계층들이 발생해 이들이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특권을 누리게 됐다.
그 결과 수도인 콜롬보 시내에서조차 불교도들은 자신들이 불교도인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없게 된 것은 물론 승려들에게도 탁발 행위가 금지됐다. 이것은 불교국가인 실론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최악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이 오히려 실론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고유종교에 대한 자부심과 민족적 긍지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할 기회를 주었다.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실론인들은 대중 논쟁, 포교기구의 구성, 활자 매체의 활용, 교육 등의 방법을 통해 불교 부흥을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불교계는 모히띠왓떼 그나난다(Mohittivatte Gunananda, 1823-1890) 스님, 히까두워 수망갈라(Sunangala) 스님 등이 주축이 돼 불교사상을 고양하고, 기독교 사상의 허구성을 알리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이후 수년간 불교와 기독교는 간행물을 통한 각자 자기 종교의 우수성과 상대 종교의 허구에 대해서 치열한 종교적 다툼을 벌였다.
1823년 실론 남부에서 태어난 구나난다 스님은 어렸을 때 기독교계학교에서 기독교에 관해 배워서 기독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한때는 가톨릭 성직자가 되고자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계기에 사원에서 온 스님을 만나고는 생각을 바꾸고 불교로 전환해, 드디어 승려의 길로 들어섰다.
그나난다 스님은 마을마다 일일이 방문하며 불교 포교에 신념을 바쳤으며, 또한 목사들과의 교리 논쟁도 서슴지 않았다.
구나난다 스님은 지속적으로 여러 지역의 대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하는 종교적인 논쟁을 벌였다.
이런 일을 하면서 구나난다 스님이 불교 재건을 위해 시도한 첫 번째 활동은 ‘불교 전파를 위한 협회’를 결성한 것이다.
이 협회는 1840년 이래 실론에서 맹위를 떨쳤던 기독교의 ‘복음 전파를 위한 협회’에 대항하기 위해 1862년에 결성한 것으로 기독교 전도사들에 대항해 불교를 표방한 첫 번째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그나난다 스님의 이러한 포교활동 및 저술, 그리고 간행물 발간 등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기독교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찌르는 스님의 논리 정연한 불교교리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계기가 돼 불교와 기독교간에 교리에 대한 대논쟁으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소위 파아나두라 논쟁(The Panadura Debate)이 벌어진 것이다. 파아나두라는 콜롬보에서 남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곳, 실론 남서부의 해안 소도시이다.
파아나두라 논쟁이 지금까지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당시 기독교와 불교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종교에 대해서 공개된 장소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사자 간에 직접 논쟁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물론 기독교 측은 자신이 있었기에 공개된 장소를 허용했던 것이다.
구나난다 스님은 네 차례에 걸쳐 기독교 목사와 대논쟁을 벌이게 된다.
세계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실론에서의 불교 부흥은 여러 가지 요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불교와 기독교 간의 파아나두라 종교 논쟁이었다.
이 논쟁들은 식민지 지배하의 불교도들의 위기의식과 식민정책과 결합한 기독교인들의 우월적 복음 전도의 사명감이 격돌한 것으로 불교도의 입장을 대신해서는 주로 구나난다 스님이 주도했다.
1873년 8월 23일부터 28일까지 벌어진 대논쟁은 수백 년 간 실론을 지배했던 서구의 기독교 문명과 교리, 그리고 2000년 이상 불교를 지켜 온 실론 불교도들 간의 논쟁을 총정리하고 결론짓는 중요한 논쟁이었다.
이 기간 중 총 4회에 걸쳐서 논쟁이 벌어졌다. 토론의 주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 영혼의 문제, • 육체와 정신, • 죽음, • 교주의 전지 전능성, • 교주의 지혜, • 교리상의 허점, • 수미산의 존재 여부, • 경전에 대한 신뢰성 등 … 폭 넓게 주어졌다.
또한, 논쟁의 시간과 방법에 관해 한 논쟁자의 연설 시간은 한 시간으로 하며, 처음 시간은 기독교 측에 부여하고 그 시간은 불교의 허위성을 제시하기 위해 사용하고, 다음 시간은 불교 측에서 불교의 허위성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에 대해 반드시 답변한 후에 기독교의 허위성에 대한 반론(反論)을 하게 된다. 이 밖에도, 각각의 논쟁자가 사용할 시간과 청중들에 대한 안전의 문제, 연단의 설치 등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
불교계에서는 그나난다 스님만이 혼자서 4회 연속 참여했으며,
기독교에서는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가 3회, 시리만나 전도사가 1회 참가했다.
논쟁 당일에는 실론 방방곡곡에서 논쟁을 보기 위해 올라온 불교와 기독교 양측의 참관인들이 약 5,000명 내지 7,000명에 이르렀다.
결과는 당연히 불교의 승리였다. 불교는 과학이고, 부처님 말씀에 틀린 데가 한군데도 없으니까 당연한 귀결이었다. 불교 말살을 획책하다가 도리어 불교에 참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고 말았다. 정연한 논리와 웅변으로 창조설과 영혼불멸론 등 기독교의 논조를 격파했다.
구나난다 스님의 대론이 끝나자 1만여 명의 불교 신자들은 일제히 사두, 사두(Sadhu, Sadhu-좋아! 좋아!)라고 소리 높여서 제창했다.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은 행동에 불쾌감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불교인들, 기독교인들 그 어느 쪽에서도 소동과 난동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고 평온했다.
구나난다 스님과 목사들이 청중들에게 ‘정숙해 주십시오’ 라고 하자 군중들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그때 불교 신자들은 대단한 기쁨에 차서 집회에서 해산했고, 기독교 신자들은 불만이 끓어올라 울분을 참지 못하는 듯한 기분으로 집회장을 떠났다고 한다.
불교가 승리함으로써 실론의 불교도들은 자신감과 활력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결국 이 논쟁으로 인해 실론의 불교가 극적으로 회생하는 계기가 됐는데, 이러 함은 미국인 박애주의자 ‘올코트(Henry Steele Olcott)’ 대령과 실론 출신의 젊은 승려 ‘다르마팔라(A. Dharmapāla, 1864-1933)’에게도 영향을 주어 실론 불교부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즉, 대토론회의 소식은 전국으로 펴져나갔고 국제무대로도 번져, 1875년 뉴욕에서 올코트 대령 등에 의해 신지학협회(Theosophical Society) 창립됐으며, 붓다를 공격하는 백인이 아니라 스님에게 무릎을 꿇고 삼귀의와 경을 염송하는 백인을 양산하게 됐고, 우리나라 만해 한용운(韓龍雲) 스님에게도 영향이 미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2-3년 후 구나난다는 저 멀리 미국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는 신지학회(神智學協會, Theosophical Society)의 창설자인 러시아 출신 미국인 블라바츠키(H. P. Blavatsky, 1831~1892)와 미국인 올코트(Henrys Olcott 1832-1907)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 편지에는 신지학회에 대한 소개의 글이 적혀 있었고, 블라바츠키가 쓴 <베일 벗은 이시스> 상권⋅하권이 같이 배달돼 왔다. 이 일을 계기로 구나난다는 블라바츠키, 올코트와 서신 교환을 하게 됐다.
※신지학회(神智學會, Theosophical Society)---신비주의적 종교관을 바탕으로 모든 종교의 통일을 주장하는 국제 종교단체다. 1875년 블라바츠키와 미국인 변호사 겸 언론인 올코트를 위시한 일단의 연사들이 뉴욕시에서 창립한 후 주로 인도에서 활동했다. 블라바츠키가 1891년까지 영적지도자로 이끌다 사망한 후 올코트가 그 뒤를 이었는데, 최근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코타헤나 사원에 자주 들리던 다르마팔라는 구나난다 스님으로부터 신지학회의 창설자인 블라바츠키와 올코트가 실론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뛸 듯이 기뻤다. 그는 이미 <신지학자(Theosophist>라는 신지학회 잡지를 읽고 신지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실론은 서구 기독교세력에 의해 전통종교와 문화가 말살돼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구원의 첫 빛은 신지학회로부터 왔다. 인도로 터전을 옮긴 신지학회의 창설자 블라바츠키와 올코트가 실론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1880년 5월, 마침내 신지학회의 두 창설자 블라바츠키와 올코트가 실론에 도착했다. 실론의 전통종교와 문화를 무시하고 탄압하던 서구인들만 봐오던 실론 국민들의 눈앞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서양인인 블라바츠키와 올코트가 정식으로 불교 수계를 받아 불교도가 되고, 실론의 곳곳을 돌며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찬탄하고 고무한 것이다.
다르마팔라는 아버지, 삼촌과 함께 블라바츠키와 올코트를 만났다. 어린 그는 블라바츠키에게 매료됐다. 그리고 1884년 1월, 다르마팔라는 신지학회에 가입했다. 그리고 그 해 그는(19세 때) 블라바츠키와 함께 신지학회 본부가 있는 인도 아디야르(Adyar)로 갔다.
당시 블라바츠키는 다르마팔라에게 신지학회 회원인 마스터 쿠트후미Kuthumi)가 같은 회원인 신네트(A. P. Sinnet)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종종 들려주곤 했다.
“궁극적인 완성을 열망하는 자가 귀의할 대상은 오직 부처님 한 분뿐이다.”
이 말은 그의 일생을 지배한 좌우명이 됐다. 어느 날 블라바츠키가 그를 방으로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네 운명은 신비주의를 공부하는데 있지 않아. 앞으로 빠알리어를 공부하도록 해. 너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 일하게 될 거야.”
바로 그 순간 그는 일생을 붓다의 법을 수호하고 인류의 행복을 위하는데 바치기로 결심했노라고 후일 그의 회상록에서 밝히고 있다.
한편 인도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블라바츠키와 올코트가 선교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고는 비열한 공작을 진행시켰다. 결국 블라바츠키 여사는 모함에 빠져 인도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녀를 태운 배가 콜롬보에 잠시 정박했을 때 다르마팔라는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갑판으로 올라갔다. 이것이 둘 사이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는 여사의 영적 능력과 인류를 향한 순수한 봉사정신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블라바츠키와의 만남은 다르마팔라의 삶에 일대 전환을 가져다주었기에 평생토록 그는 애정과 감사의 마음으로 그녀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했다.
몇 년 후 블라바츠키가 죽었을 때 그는 탄식을 하며 이런 글을 남겼다.
“참으로 크나큰 손실이다. 세계는 가장 소중한 인도자인 스승을 잃었다. 누가 그 분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빨리 가시다니…”
블라바츠키가 인도를 떠난 몇 달 후 20세의 다르마팔라는 아버지에게 신지학회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구도에 온전히 바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다. 그리하여 정식으로 브라흐마차리아(독신 수행자)가 됐다. 당시 실론에서는 불교 활동과 신지학회 활동이 거의 동일시 됐다.
실론의 신지학회 정식 명칭도 ‘불교 신지학회(Buddist Theosopical Society)’였다. 그렇게 해서 그는 불교 신지학회 본부에서 수년 동안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올코트 등과 함께 설법과 불교학교 설립과 불교 포교를 도왔다. 그리하여 불교 신지학회는 실론에서 유력한 단체로 자리 잡게 됐다.
그는 할아버지의 후원으로 올코트와 함께 불교출판사(The Buddist Press)를 설립해 불교 교리 문답집을 스리랑카어로 간행했다.
또 그는 불교 주간지 <산다레사(Sandaresa)>를 창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1892년 <마하 보디 저널Maha Bodhi Journal>을 발간해 범세계적인 불교 구심체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다르마팔라는 일제 강점기 1913년 한국 불교 상황을 살피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다르마팔라는 불교 최고의 성지인 보드가야에 이르러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대탑이 엉뚱하게도 힌두교 사제의 관리와 소유에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더 큰 충격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인도에서 불법의 횃불을 다시 점화시켜 성지를 회복하리라”라고 큰 원을 세워 보드가야는 물론 인도의 불교 성지들을 회복하고 인도에 불법을 널리 전파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실론(스리랑카) 콜롬보에 대보리회(大菩提會, 大覺會, 마하보디 소사이어티/Mahabodhi Society)를 설립하게 됐다.
그의 이러한 지속적이고 열정적인 그의 노력을 바탕으로 하여 결국 마하보디 사원을 비롯한 주요 불교 성지들을 마하보디 협회가 관리할 수 있게 됐다.
오늘날 인도의 불적들이 이런 정도나마 보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다르마팔라의 마하보디소사이어티의 노력이 크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도 대보리회를 중심으로 그의 정신은 계속이어지고 있다.
[출처] <다르마팔라(Anagārika Dharmapāla)의 불교 부흥운동>|
날란다 대승원(Nālandā mahavihara) 또는 나란타사(那爛陀寺)는 인도 비하르주의 고대 마하비하라(대승원; 큰절)이자 대학(교육기관)이다. 비하르 주의 파트나에서 남동쪽 55마일 거리에 위치한다. 서기 427년에서 1197년까지 팔라 제국 아래에서 불교의 학습 중심이었다. 세계사상 최초의 대학 중 하나였다.
굽타 제국의 제5대 마하라자디라자인 쿠마라굽타 1세(재위 414∼455?)가 오늘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날란다사를 건립한 이후 역대 왕조에 의해 증축, 확대되었다. 굽타 왕조 후반기인 5세기경부터 12세기에 걸쳐 불교교학의 중심지로 국외에까지 알려져서 아시아 각지 출신의 학승(學僧)이 운집했다. 중국의 승려인 현장(玄奬)·의정(義淨) 등도 여기에서 배웠다. 지금도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명칭
「날란다」는 '연꽃이 피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연꽃(날란)은 불교에서 지혜의 상징이기에 "지혜를 주는 곳, 지혜를 받는 곳"으로 해석되는 것이다(날란=연꽃, 다=주다). 또한 당의 승려로 날란다에서 유학했던 현장삼장은 그의 저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날란다라는 말을 '시무염'(施無厭)이라는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아낌없이 베푸는 곳, 끊임없이 주는 곳"으로 해석된다(나='없다'는 부정의 의미, 아란=충분함, 다=주다).
약사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 부처가 이곳을 방문하여 '파바리카'(Pavarika)라 불리는 망고나무 아래에서 설법을 행하였다고 한다.
이후 불교를 배우는 중요한 장소가 되어 최대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렀다(가장 오래된, 역사상 최대의 거주형 학교로 최대 1만 명의 학생과 1,500명의 교원들이 머물렀다. 높은 담에 문은 하나, 도서관은 9층 건물로 다양한 분야의 교과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티베트 기록에 따르면 인도의 승려인 용수(나가르주나)가 이곳에서 강의를 하였다고 하며, 굽타 왕조(427년 성립) 시대에에는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해 승원(僧院)이 세워졌다고 여겨진다.
날란다 대학의 승려들은 불교가 인도를 넘어 동쪽 특히 티베트와 중국으로 전파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45년 유식파(唯識派)의 지라바드라(한역명 계현戒賢)가 당에서 온 승려 현장삼장에게 유식을 전했고, 현장은 657부에 이르는 경전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761년에 중관파의 찬타라굿타(한역명 숙호寂護)가 티베트 불교를 일으키고, 774년에는 닝마파의 개조(開祖) 파드마삼바바(한역명 연화생蓮華生)가 밀교(密教)를 티베트 불교에 가져왔다. 쌈예 사 종론(792년 - 794년)에서는 인도 불교의 까말라쉴라와 중국 불교의 마하연(摩訶衍)이 종교 논쟁을 벌였고, 티베트 불교의 방향성을 결정지었다.
1193년에 쿠트브 알 딘 아이바크 휘하의 장군 악티바르 알 딘 무함마드 박티바르 칼지(Ikhtiyār al-Dīn Muḥammad Bakhtiyār Khaljī)가 이끄는 튀르크 - 이슬람 군대의 침략으로 날란다 대학이 파괴되었다. 인도 불교의 쇠퇴는 이미 굽타 시대부터 시작되고 있었기는 하지만, 이슬람 세력에 의한 날란타 파괴는 인도 불교의 멸망을 확실한 것으로서 기정지었다.
1957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저우언라이(周恩来) 총리가 인도 수상 자와할랄 네루에게 제안하여 날란다 대학에 현장의 사리가 분골(分骨)되었다.[1]
https://ko.wikipedia.org/wiki/%EB%82%A0%EB%9E%80%EB%8B%A4_%EB%8C%80%EC%8A%B9%EC%9B%90
팔라 왕조의 기원이나 초기 역사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역사학자들은 그들의 치세를 이해하기 위해 간접적인 증거에 의존하며, 그들의 조상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진다.[15] 칼림푸르 동판 명문에 따르면, 초대 팔라 왕 고팔라는 바파타라는 이름의 전사의 아들이었다. 라마차리탐은 바렌드라(북벵골)가 팔라의 조국(야나카부)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비록 나중에 기록에 따르면 고팔라는 크샤트리아이거나 전설적인 태양 왕조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지만,[16] 왕조의 민족적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발랄라-카리타에 따르면, 팔라인들은 크샤트리아였다고 하는데, 이 주장은 타라나타가 인도의 불교사에서, 그리고 가나람 차크라바티가 그의 다르마망갈라(둘 다 16세기에 쓰여졌다)에서 반복한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