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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장 배신(背信) 금강대수인! 그 무공이었다. 무무대사를 이어 나머지 구파일방의 장문인들도 일제히 공격에 가담했다. 사지를 탈출하기 위한 필사의 공격이니 그 위력이 어떠할 것인가? 기습을 감행한 마도십삼자가 오히려 당황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장문인들의 공격은 무섭게 작렬했다. "대사! 어서 연못으로!" 정신을 차린 주약란이 핏기가 가신 얼굴로 무무대사를 재촉했다. "아미타불! 나를 따르시오!" * * * 만금장의 후원. 커다란 연못이 보였다. 무무대사를 비롯한 일행들은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풍덩, 선두에 선 몇 사람이 연못에 빠져들어 물방울이 사방으로 튈 때! 꽈꽈꽈꽈꽝-! 천지멸절(天地滅折)의 폭발음이 터지며 땅거죽이 일제히 뒤집어졌다. 자욱한 먼지가 일고 만금장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전각들은 산산조각 부서져 날아가고, 화염(火焰)과 열풍(熱風)은 주위 백 장을 단숨에 초토화 시켰다. 화염보의 벽력탄이 무서운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무무대사가 연못에 당도했을 때 태산을 태울 듯한 열기와 폭발로 인해 발생한 폭풍은 벌써 그의 등까지 밀려와 있었다. 무무대사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태어나서 가장 빠른 속도로 연못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막 연못에 빠지는 것과 동시에 화라라락-! 굉음과 함께 불꽃이 거대한 연못 위를 뒤덮어 버렸다. 연못의 수면이 열기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설명은 길었으나 이 일련의 동작은 모두 일수유(一須臾), 눈 깜짝할 사이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주약란의 몸을 돌보지 않는 살신성인의 자세와, 중인들의 신속한 행동으로 사지를 벗어난 것이다. 무무대사는 물 속에서도 품 안을 뒤져 무가지보인 대환단을 꺼내 주약란에게 복용시켰다. 주약란은 곧 정신을 차렸다. 아울러 대환단의 위대한 효능은 물 속이지만 그녀의 상처를 아물게 했다. * * * 연못은 굉장히 깊었다. 수십 길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주약란은 이미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무무대사에게 나아갈 방향을 지시했다. 무공의 고수들이지만 숨이 막혀 답답해질 무렵 중인들은 마침내 연못의 맨 밑바닥에 당도했다. 주약란이 바닥에 튀어나온 작은 고리를 당겼다. 순간 그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급격한 소용돌이가 일어 중인들은 소용돌이와 함께 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곧 문은 다시 잠겼다. 정교한 기관장치에 정교한 건물이었다. 일단 물과 같이 유입된 그 공간은 천장이 까마득히 높았고,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이 천장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정녕 놀랍군! 이 거렁뱅이는 수많은 곳을 다녀 봤지만 이렇게 정교한 건물은 처음이네!" 궁개의 말에 창백한 안색의 주약란이 생긋 웃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비상공간입니다. 만들 때는 설마했는데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계단을 다 오르자 거대한 지하대전이 나타났다. 대전 안은 수백 명이 한꺼번에 들어서고도 남을 만큼 크고 넓었다. 그리고 대전의 한쪽으로는 같은 크기의 석실들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대전 바닥의 중앙에 중원을 축소시켜 놓은 조형물(造形物)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중원 뿐 아니라 변황무림(邊荒武林)과 서역(西域)의 문파들까지 총 망라되어 있었다. "오… 이럴 수가!" 궁개는 이제 말조차 잊은 듯 감탄사를 연발했다. "무량수불! 문주께서는 언제 이런 조형물을 제작해 놓으셨는지요?" 현진자가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 조형물은 비상시에 신비각의 지휘본부가 될 곳으로 중원의 형세를 나타내기 위해 특별히 만든 거예요." 그렇게 설명한 주약란은 중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피곤하실 텐데 편히 쉬세요. 그 후 차분히 다음 일을 생각해 보기로 하죠." 중인들은 모두 의자에 앉았다. 안타깝게도 칠십이천강검수 가운데 이십여 명이 희생을 당했다. 그 외에 경미한 부상을 당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사했다. 주약란은 먼저 자신이 생각했던 의문점을 말했다. 즉, 오늘의 회동을 누설한 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들은 중인들의 안색이 대변했다. 궁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문주는 우리가 이곳에서 회합을 가지는 것을 누군가 누설했다는 뜻이오?" 그의 질문에 이어 현진자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미타불, 빈도의 생각에도 이 일에는 어떤 흑막(黑幕)이 있을 듯싶소이다. 저들이 이렇듯 치밀하게 공격을 해 온 것은 그만큼 사전에 알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오." 무무대사도 동감을 표시했다. "아미타불! 남을 의심하는 것은 괴롭지만 소승의 생각도 그러하오이다. 혹시 문주께서는 의심 가는 인물이 있는지요?" 주약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확실히 드러난 인물이 없어요." 무무대사가 침울한 안색으로 말했다. "아미타불! 일단 모두 자파에 파견된 혈궁의 첩자들부터 알아내는 것이 급하구려." 화산장문 조양명이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이다. 난 지금이라도 화산으로 돌아가겠소." 무무대사가 그를 말렸다. "조장문인, 아직은 위험하오이다. 몇 시진 더 기다렸다가 이곳을 나섭시다." "그렇게 하시지요!" 일행이 모두 말리자 화산장문인 조양명은 별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종내 불안했다. 적이 공격을 한 이상 이쪽도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 이쪽은 드러난 상태이고 저들의 세력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자칫 시간을 낭비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당하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진 것이다. 조양명이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할 때였다. 쿠-웅-! 둔중한 굉음이 저 멀리서 들려 왔다. "이건 우리가 지나온 비상구가 폐쇄되는 소리 같습니다." 황충산이 놀라 외쳤다. 그러자 곧 음산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 왔다. "흐흐흐흐! 힘들게 이곳까지 오셨는데 어딜 급히 돌아가려는 것이오? 기왕에 온 김에 저승 구경을 하시지?" 괴인의 목소리를 들은 황충산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 목소리는 너무도 귀에 익었던 것이다. "넌…!" 순간, "카하하핫! 황충산, 이제야 내 정체를 깨달았나?" 황충산은 부르르 몸을 떨다가 무슨 생각인지 재빨리 주약란의 앞을 가로막으며 대갈일성을 날렸다. "막총관, 정녕 너냐?" 막총관! 황충산이 이렇게 부를 사람은 단 하나다. 바로 만금장의 총관인 막세기다. "카하하핫! 총관이라니? 너는 아직도 나를 총관이라 칭하느냐?" 황충산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왜 아니겠는가! 그가 가장 믿고 신뢰한 만금장의 총관인 막세기가 배반자였으니 말이다. 현진자가 허탈한 음성을 토했다. "허허! 이런 변이 있나. 만금장의 총관이 첩자일 줄이야!" 주약란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 비밀대전은 몇 년 전 그녀의 지시로 황충산이 극비리에 만든 비밀장소였다. 공사를 도맡아 진행한 사람은 막세기였다. "막세기, 네 이놈… 내가 너에게 섭섭히 한 일이 있더냐?" 황충산의 노갈이 대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만일 막세기가 눈 앞에 있다면 당장 박살을 낼 기세였다. 하지만 막세기는 몸을 숨겨 보이지도 않았다. "흐흐흐흐! 물론 잘 대해 주었소. 그러나 그것은 모두 내가 당신의 충실한 종노릇을 잘한 탓이오. 나 막세기가 언제까지나 당신의 시중만 들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 "그렇다면 네놈은 내 자리를 노리고 저들의 악행(惡行)을 도왔단 말이냐?" "그렇소. 난 당신이 물러나면 만금장이 내 소유가 될줄 알았소. 그런데 당신은 단궁비에게 이 만금장을 물려 주려 하고 있소이다. 이왕 어차피 한 번 뿐인 인생, 나라고 최고를 노리지 말란 법은 없지 않소?" 이렇게 되자 황충산은 기가 막혀 말조차 하지 못했다. "아미타불… 물욕에 눈이 멀었구려." 무무대사의 탄식소리! 황충산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막세기, 넌 착각한 것이다. 지금은 비록 정파가 일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사필귀정(事必歸正)에 마도필패(魔道必敗)라 했다. 지금이라도 돌아와라." "흐흐흐, 고마우신 말씀이나 당신만 죽으면 만금장과 모든 상권(商圈)은 내 것이오. 그런데 내가 왜 당신에게 다시 굴복한단 말이오?" 황충산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네 선택이 그러하다면 별 수 없지. 나중에 나를 잡고 후회하지 말도록!" 이때 주약란이 낮은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막총관! 저들은 당신을 이용하기 위해 달콤한 조건을 내세웠겠지만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즉시 죽일 거예요. 당신은 단지 그들의 이용물에 불과해요." 그때였다.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호호호, 그런 걱정은 네가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막총관을 이미 혈궁의 만금전주로 내정해 두었으니까." 염후의 목소리다. 방향은 전면,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무량수불! 악녀, 아직도 살아 있더냐?" 현진자다. 벼락치듯 검을 뽑은 그가 목소리가 난 곳을 향해 몸을 날릴 순간! 그그긍! 굉음이 울리며 그의 앞을 차단하는 것이 있었다. 챙! 현진자의 보검이 맥없이 부러졌다. 철문이다. 묵직해 보이는 철문에는 사과만한 구멍이 아홉 개가 숭숭 뚫려 있어 안을 살필 수 있는 구조였다. "호호호! 영락없이 독에 갇힌 쥐로구나!" 염후의 요염한 웃음소리가 울리고, 그 뒤를 따라 막세기가 등장했다. 그는 염치없게도 염후의 풍만한 유방을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흐흐흐! 고맙소이다. 소생의 성공은 모두가 누님의 공(功)이오. 내 이 은혜는 필히 갚겠소이다." 두 사람의 수작은 뚫린 구멍을 통해 중인들에게 고스란히 보였다. 염후가 몸을 배배꼬며 중인들을 향해 말했다. "호호호! 한 달 후면 천하를 웅패(雄覇)할 혈궁의 개파대전이 열린다. 우린 혈궁의 위력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오늘을 계획한 것이다. 구파일방 장문인들과 신비문주 주약란의 죽음, 호호호! 그 사실이 알려지면 누가 감히 혈궁에 대항하겠느냐?" 말을 하던 염후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몸이 달아오른 막세기가 두툼한 손가락을 그곳에 꽂은 것이다. "호호! 동생도 짓궂긴… 저들이 질투하면 어쩌려고 그래?" 염후의 말에 막세기가 끈적거리는 눈길로 주약란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그녀 앞에서 뭔가를 보여 주고 싶은 눈빛이다. 그러나 뒤가 캥기는 듯 그는 눈길을 돌렸다. "후후! 그럼 우린 바빠서… 크하하하하!" 막세기와 염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 저런 벼락을 떨어지는 순서대로 맞을 놈 같으니." 황충산은 발연대노해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두 사람은 벌써 사라진 뒤였다. 무거운 침묵! 황충산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자신의 수하로 인해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황충산이 부복했다. 그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문주님! 그리고 여러 장로님들! 뵐 면목이 없습니다. 모두 소신이 미거한 탓이니… 소신을 죽여주십시오." 주약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막총관의 배신은 뜻밖이에요. 그러나 지금은 이 위기를 돌파하는 것이 더 급합니다. 일단 이곳을 탈출한 후 각파에 기생할 첩자들을 색출한 후 혈궁과 일전을 벌이도록 해요!" 주약란의 말을 현진자가 받았다. "무량수불…! 그렇소이다. 이는 황단주의 불찰만도 아닌 것이오. 어서 일어나시오." 현진자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황충산은 부복자세를 풀지 않았다. 주약란이 그에게 다가갔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어요. 황단주가 자책할수록 제 마음도 편치 않아요!" 주약란이 일으키자 황충산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렀다. "소신의 죄 한 팔을 잘라 속죄하겠습니다." 황충산이 번개같이 오른손으로 왼팔을 내리쳤다. 찰나 주약란이 지풍을 날려 황충산의 견정혈을 제압했다. "황단주! 어리석은 죽음은 적들을 더욱 이롭게 해줄 뿐, 우리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요. 도리어 전력의 손실만 초래할 뿐이에요." 맞는 말이다. 한 사람의 고수라도 더 절실히 필요한 판국에 자해를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문주!" "정 죽고 싶다면 적들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하세요. 황단주는 남아대장부입니다. 그것이 천하를 위하는 일이고 황단주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예요." 주약란의 말은 비수가 되어 황충산의 심장을 찔렀다. 그는 이내 자신이 감정에 치우친 나머지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깨우쳤다. "크흐흐흑……! 소신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각주의 말씀대로 이 한 몸 분신쇄골(分身碎骨)되도록 신명을 바치겠습니다." 현진자가 분위기를 일신하려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이곳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그것을 연구합시다." 주약란이 고개를 저었다. "쉽진 않아요. 이 대전은 출구를 비롯해 모두가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되어 있어요." 궁개가 흠칫 놀라 입을 열었다. "만년한철? 염병, 하늘이 우릴 외면하는구먼!" 궁개의 탄식에 중인들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만년한철이라면 이곳을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단궁비가 당한 어려움을 이곳의 군웅들도 고스란히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순 없소이다. 내가 한번 시도해 보겠소." 화산장문 조양명이 검을 뽑아 들고 입구 쪽으로 나섰다. 무쇠도 두부처럼 잘라 낸다는 유성비검, 비록 간장과 막사에 비견될 수는 없지만 천고기병(千古奇兵)중 하나였다. "매화토염(梅花吐艶)!" 검법은 화산파가 자랑하는 비전절예(秘傳絶藝)인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의 최강절초. 파아앗-! 검극에서 시퍼런 섬광(閃光)이 일었다. 화산파 절대신공인 태청강기(太淸 氣)를 검법에 실은 것이다. 일파의 지존으로서 손색없는 무공이었다. 허나…! 까가가강---! 쇠가 쇠를 긁는 듯한 듣기 거북한 마찰음이 울렸을 뿐 만년한철로 된 철문은 요지부동이다. "으음!" 조양명은 신음을 흘렸다. 손바닥이 터져 흐르는 피. 반탄력에 오히려 부상을 당한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한꺼번에 장력을 날려 봅시다. 모두의 힘이라면 철문을 부수지는 못할망정 미세한 틈새라도 생길지 모르는 일이잖소?" "일단 그 방법이라도 한번 시도해 봅시다." 구파일방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다. "타앗!"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 화산, 무당, 청성은 검을! 소림, 개방, 곤륜은 장법으로! 일세를 진동시키는 초절정의 고수들이 무생물인 철문을 향해 사투를 벌이는 것이다. 쿠우우우웅……꽈쾅-! 천지개벽(天地開闢)의 굉음과 함께 대전이 지진을 만난 듯 심하게 흔들렸다. 중인들은 기대감을 담고 철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말짱했다. 백만 근의 거력이 담긴 그들의 장력이 후려친 곳은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채 말짱했던 것이다. 이때였다. "크크크! 이거 시끄러워서 어디 마음대로 운우지락의 흥취를 맛볼 수 있나? 모두 한 번에 저승길로 보내야 하겠군!" 막세기의 음성에 뒤이어 뿌연 연기가 대전 안으로 스며 들어오고 있었다. "조심하세요. 오독신무(五毒神霧)예요." 주약란의 경고에 중인들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오독신무. 중독된 후 반 각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치명적인 독이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란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만년한철이 철옹성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오독신무까지 펼쳐졌으니 이제는 꼼짝없이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오독신무는 점점 짙어지며 이들 가까이 퍼져 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군웅들은 급히 한 자리에 모여 의논을 벌였다. 기관장치에 관해서, 진법에 관해서 중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이 총동원되었다. 하지만 어느 방법도 소용없었다. 만년한철은 죽음을 부르는 철문이었다. "이대로 이곳에서 주저앉아야 한단 말인가?" 궁개가 낮은 탄식을 토했다. 그의 말을 들은 중인들의 가슴에도 짙은 먹구름이 깔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벽에서 뿌연 안개 같은 기류가 뿜어지며 오독신무와 엉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독신무가 치지직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은 이 돌연한 상황에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누군가 우리를 돕고 있소이다." "그런 것 같소!" 중인들이 일제히 철문쪽을 바라보는데, 그 철문 너머에서 지극히 차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안에 사람이 있습니까?" 젊은 청년의 목소리다. "그렇소이다." 궁개가 대답하며 재빨리 철문으로 다가가 구멍에 눈을 들이댔다. 젊고 준수한 청년이 철문 앞에 서 있었다. 육척을 상회하는 후리후리한 키에 남색의 장포를 입은 그는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귀하는?" 궁개의 물음에 청년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무명소졸이외다. 근방을 지나다가 폭음소리에 놀라 들렸지요. 저 밖에서 두 음적들의 대화를 듣다가 여러 영웅들이 고난을 겪는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년놈들은 어찌 되었소?" 궁개가 다급히 물었다. "따끔하게 혼을 내주었더니 발가벗은 채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청년을 궁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십 후반, 반안 송옥을 능가하는 미남에 학자같이 고고한 풍모를 풍긴다. 이렇게 단아한 선비에게 천하의 염후를 제압할 무공이 있을 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때, 스릉 소리와 함께 청년이 검을 뽑았다. 평범한 청강검이었다. 그러나 청년의 손에 들리자 그 평범한 청강검이 간장 막사를 능가하는 보검으로 보임은 왜일까? "중앙으로 물러서십시오!" "소협, 설마 그 검으로 이 철문을 부수겠단 말이오?" 궁개의 물음에 청년은 싱긋 웃었다. "못할 것도 없지요!" 우우웅! 청강검이 마치 보검인양 검명을 터뜨리고 백색 검신에서 서기가 뿜어졌다. 이 모두가 청년이 내공을 주입하자 일어난 현상이었다. "평범한 인물이 아닌 듯하오이다. 어서 뒤로 물러서시오!" 궁개의 말에 사람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그때 청년의 몸에서 갑자기 황금빛의 서기가 뿜어졌다. 동시에 눈을 파열시킬 것 같은 강렬한 빛이 백렬하더니 청강검이 비쾌한 속도로 만년한철의 철문에 작렬했다. 꽈가강! 철문이 우르릉 울렸다. 그러나 별반 효과가 없었다. 한순간 청년이 형형한 눈빛으로 철문을 노려보았다. 마치 자신에게 대항하는 만년한철에 분노라도 한 듯! "안된단 말이지? 건방진 물건이로다!" 청년이 둥실 떠올랐다. 허공에 일 장 가량 뜬 그가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는 관우처럼 가공할 속도로 철문을 향해 검신합일해 날아들었다. 쾅---! 꽈지지직! 굉음이 울렸다. 중인들은 멍한 눈으로 그들의 눈 앞에서 반으로 갈라지는 철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의 무공이 아냐! 저 사람은 신이다." * * * "카카카! 헛소리 말아! 천하에 담자무(潭紫霧)를 능가할 청년고수는 없어. 단궁비인지, 싸리비인지 그 자식은 절대로 담자무를 능가하지 못해!" 궁개의 입에서 침이 튀었다. 사람들은 그의 파편을 맞으면서도 누구 하나 언짢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는 정말 올바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무무대사를 비롯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한 번도 단궁비를 본 적이 없다. 다만 그들은 풍문으로 창해일룡이란 명호와 단궁비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담자무는 그들이 직접 보았다. 무공?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한 수 접어야 할 정도로 뛰어나다. 뿐인가! 이십 중반의 나이에 도저히 그 나이에 오를 수 없는 지고한 학문의 경지와, 몸에 밴 위엄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타고난 위엄이었다. 더욱이 그렇게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도 겸손하기 그지없었다. 궁개가 입에 침을 튀기는 건 당연하고도 당연했다. "반드시 성사시켜야 해! 담자무와 문주가 백년가약을 맺게 해야 한단 말이야!" 무무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허허! 방주, 침착하시오. 문주와 창해일룡 단소협은 벌써 부부지연을 맺었소이다. 우리는 담자무 소협을 설득 그를 신비각에 가입토록 하는 게 최선이외다!" 무무대사의 말에 궁개가 버럭 화를 냈다. "담자무 소협이 싫다고 하잖소? 자신은 그저 평범한 무인으로 평생을 살고 싶다고 하잖소?" "아미타불! 그 자신이 싫다면 방법이 없지요." 쾅, 궁개가 책상을 내리치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방장, 방장께서는 남녀간의 미묘한 심리를 알고나 하는 말이오? 담자무가 왜 신비각의 가입을 거부하겠소? 그는 주약란 문주를 마음에 두고 있소이다. 그런데 만일 신비각에 가입하면 주종간이 되는 거 아니오?" "말인즉 담자무 소협이 주종간의 관계는 거부한다?" "정답이오. 지난 여정을 한 번 되짚어 보시오. 주약란 문주도 담소협이 싫은 눈치는 아닌 것 같소이다! 여러분들이 정 싫다면 내가 나서서 일을 성사시킬테니 그대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도록 하시오!" 궁개가 기세당당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머지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미타불! 정해의 심연은 깊고 깊거늘…!" 현진자가 그런 무무대사를 보며 껄껄 웃었다. "방장께서는 정해를 겪어 보신 것 같소이다. 빈도는 아직 경험을 해 보지 못해 무엇이 고행인 줄을 모르는데 말이외다." 무무대사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그가 보는 담자무는 정말 다시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창해일룡 단궁비란 인물만 없다면 그 자신이 나서서 주약란과 맺어 주고 싶을 정도로! "아미타불!" 무무대사는 불호를 외우며 주약란의 숙소로 향했다. * * * 같은 시간! "이……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단궁비와 불패괴옹을 선두로 만금장에 도착한 군웅들은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 폐허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만금장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 웅장하고 거대한 전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여기저기 검게 그을리고 타다 만 잔재만이 흉측한 몰골로 남아 있었다. 단궁비가 불패괴옹을 보며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비각에 사고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불패괴옹의 안색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이번 회합은 극비리에 이루어진 것을 자네도 알고 있질 않은가?" 단궁비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배신자가 있었겠죠!" 단궁비의 음성은 대못을 박듯 확신에 차 있었다. 그동안 겪은 바에 의하면 상대의 지략은 거의 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 그들을 목전에 두고 한 자리에 모였으니 날 죽여주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문제는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다가 결과를 보니 유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배신자?" "그렇습니다. 평범한 자가 아니라 주문주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음!" 불패괴옹은 침음성을 흘렸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 천 년을 이어온 신비각이지만 어찌 변심할 인간이 없을 것인가? 그간 자신이 너무 나태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불패괴옹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런데 이 놈아, 넌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담담하구나. 너 신비각의 총령이 맞아?" 단궁비가 그를 확 째려보았다. "쓰! 웬 날립니까? 여편네를 잃은 나도 꾹 화를 눌러 참고 있는데…!" "뭐?" "일단 생각을 정리하잔 말입니다. 혹시 문주가 만일의 경우 제 이의 집합장소로 정해 놓은 곳은 없습니까?" 불패괴옹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침울하게 변했다. "있긴 있어. 안탕산의 귀왕곡이야. 그러나 이렇게 철저히 멸망했는데 살아나 있을지…!" 단궁비가 불패괴옹의 입을 막았다. "화는 입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제발 그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쇼! 갑시다." 퉤퉤! 침을 뱉는 불패괴옹. "하여간 나이도 어린놈이 행동에 절제가 없어요. 뇌종원, 그렇지 않…?" 누구도 그의 곁에는 없었다. 군웅들은 단궁비를 따라 몸을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쓰! 세상 인심이 조석변이라더니… 불과 사흘 만에 놈의 혓바닥에 군웅들이 다 녹아 버렸어!" 투덜거리며 몸을 날리는 불패괴옹! 하지만 번개처럼 날아가는 그의 얼굴에는 흡족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제기랄… 내가 어쩌다 저놈에게 푹 빠져 버렸담.' * * * 같은 시간! 주약란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폭풍처럼 다가와 단번에 그녀의 정신을 헝클어 놓은 사내! 그는 그저 담담하다. 자신에게 선망의 눈길을 보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녀의 화려한 미모를 보며 감탄하지도 않는다. 그는 깊은 심해처럼 고요하고, 만근거암처럼 묵직하다. 허나 이 사내의 지략은 하늘이 놀랄 정도요, 안목은 자신조차 따를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강호의 정세에 대한 제반 설명을 다 들은 그는 단 한 마디를 언급한 것이다. 이독제독(以毒制毒)! 독으로써 독을 물리친다는 말이다. 즉, 변방무림을 일통한 사율과 혈궁과 대결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뇌리에는 수많은 계략들이 샘솟듯 솟고 있었다. 담자무와 일반인들의 차이점! 그건 명확했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심신이 차분히 가라앉는다는 점이다. 사람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유도한다. 그의 특이한 기질 때문이다. "협상자로는 누가 적당할까요?" 담자무는 빙긋이 웃으며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다. 절강성 안탕산의 수려한 경관을 보는 그의 눈빛은 매우 맑았다. "사율이 안심할 수 있는 인물이 적당하외다!" 주약란은 총명한 여인, 담자무의 말에 담긴 속뜻을 충분히 파악했다. 주약란이 직접 나서라는 뜻이다. 사율은 신비각의 문주가 여자라면 얕보는 경향도 있을 것이고, 아울러 자신이 능히 주약란을 이길 자신이 있다는 확신이 서면 일단 신비각을 이용할 생각에 협상에 응하리라는 속뜻을 담은 말이다. "제가 직접 사율을 만나 보는 게 좋겠군요!" 담자무는 빙긋이 웃었다. "급하게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일단 사율이란 인물에 대한 파악이 끝나야 하고, 그를 추후 어떻게 제압할 것인가 계획이 서 있어야 하지요. 그렇지 않다면 양떼에 대호 한 마리를 더 풀어놓은 것 뿐이지요!" 주약란은 담자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사람, 보면 볼수록 사람을 놀라게 한다. "담대협의 말씀을 듣자하니 무슨 방도가 있는 듯하군요!" 담자무가 고개를 돌려 주약란을 바라보았다. 그 깊은 눈길을 접하다 주약란은 마치 깊은 늪에 빠지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하하! 문주, 소생이 중원 정세를 들은 것은 불과 반각 전입니다. 이 아둔한 머리로 어찌 단숨에 신산지략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주약란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멍청하구나! 스스로를 자책해 본다. 왜 왜 이 사람에게 자꾸 의지하고 싶은지 그녀 자신도 모른다. 그때 담자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생에게 급한 일이 있습니다. 사실 제게는 매우 중요한 일인데 지금까지 지체케 된 것입니다. 그럼 소생은 이만…!" 담자무는 그녀에게 정중히 포권한 후 돌아섰다. "잠시만요! 추후 담대협께 연락할 방법을 알려 주세요. 담대협의 도움을 받고 싶어요!" 담자무가 천천히 돌아섰다. "저는 주거지가 없는 강호의 떠돌이에 불과합니다. 연락할 방법이 없지요." 주약란의 눈에 실망이 역력했다. 담자무, 천하를 논할 자격이 충분한 기인이다. 신비각의 치명적인 약점 중에 하나가 대세를 파악하고 그에 대비하는 군사(軍師)가 없다는 점이다. 주약란은 담자무를 그 적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은연중에 거절한 것이다. "하하! 문주께서 오해를 하신 모양이군요. 좋습니다. 급한 일이 있으면 백 개의 연을 날리십시오. 무슨 일이 있든 삼 일 안에 방문토록 하겠습니다." "잠깐, 담대협은 신비각의 본거지를 모르시는데…?" 담자무가 천천히 돌아서서 주약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문주, 신비각이 천 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문파의 명 그대로 그 거처가 신비에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찮은 저 같은 인물에게조차 신비각의 거점을 발설한다면…!" 주약란은 아차 싶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담자무의 말은 한 치 어긋남이 없던 것이다. "그럼 소생은 이만…!" 담자무는 그렇게 떠났다. 그가 시야에서 멀어지고 난 후에야 궁개를 비롯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그녀의 거처로 들어섰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것인가? 그들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궁개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그녀의 거처를 울렸다. "당장 백 개의 연을 띄워! 담자무 같은 인물은 절대 놓쳐선 안 된단 말이야!" 주약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일단 철수해요. 그분의 말을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 * * 안탕산( 湯山). 절강성(浙江省)의 남단에 있는 산이다. 산세가 너무 방대해 남안탕과 북안탕으로 나뉜다. 기암절봉은 하늘 끝에 닿았고 절봉의 끝은 언제나 자욱한 운무(雲霧)에 뒤덮여 있다. 기봉(奇峰)과 폭포 담(潭)이 많아 예로부터 삼절이라 불렸다. 더욱이 산이 높은 곳은 담이, 낮은 곳은 호(湖)가 많은 곳이다. 이 산의 북쪽 끝에 천하이대절지 중 하나인 귀왕곡(鬼王谷)이 있다. 귀왕곡(鬼王谷). 입구는 있으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곡 입구엔 언제나 자욱한 운무가 피어오르고 한쪽으로는 맑은 계류가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일견 평범해 보이는 곡 안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까지 곡 안에 진입을 해본 자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왕곡을 무형곡(無形谷)이라 부르기도 했다. 휘이이익-! 일단의 무리들이 귀왕곡 입구에 날아 내렸다. 불패괴옹을 선두에 세운 단궁비와 군웅들이다. "귀왕곡에는 천고의 절진이 펼쳐져 있네. 모두 신중히 내 발자국을 잘 보고 그곳을 밟도록 하게. 자칫 실수하는 날에는 목숨을 보장할 수 없네." 불패괴옹은 모두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가 긴장할 정도로 귀왕곡 입구에 펼쳐진 진은 난해했다. 진법의 출구를 모르면 애초에 들어설 수 없다. 혹시라도 사냥꾼들이 해를 입을까 염려해 그런 조치를 취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일단 진에 들어서면 천변만화(千變萬化)가 일어나고 진의 묘옹을 모르는 상태에선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천변만화환상진(千變萬化幻想陣)! 천칠백 년 전, 천기수사(天機修士)라는 천재가 창안한 희대의 절진이었다. 일단 펼쳐지면 하늘 아래 그 무엇도 가둘 수 있으며 지상의 어떤 물체도 침범을 불허하는 진법이다. 불패괴옹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단궁비가, 단궁비의 뒤를 군웅들이 따랐다. 중인들의 가장 후미에 서 있던 뇌종원이 무언가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이구, 이거 되게 어지럽네. 대취한 것 같네!"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앞에서 벼락치는 듯한 불패괴옹의 목소리가 울렸다. "시끄러! 지금부터 진짜 위험해. 전진 삼보(三步)…. 다시 좌(左)로 오보(五步)… 역(逆)으로 십칠보(十七步)! 명심해!" 뒤를 쫓게 하면서도 진법에 대해 미리 말을 해 줄 정도로 불패괴옹은 긴장하고 있었다. 풍경만변! 그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변 경관은 눈이 팽팽 돌 지경이다. 하늘을 뚫을 듯한 절벽이 수백 개 등장하더니, 이내 뜨거운 열사(熱沙)의 사막이 나타난다. 땀이 몇 방울 흘러나오면 다시 일변,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며 함박눈이 내린다. 빙원은 다시 대해로, 대해는 다시 늪지대로! 시간이 무한정 흘렀다. "풍경은 정말 죽이는데 한 가지가 빠졌네. 여자!"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소리난 곳을 바라보았다. 누구였을까? 냉소였다. "에라이 이 미친놈아, 천향루에서 그 고생을 하고도 아직 여자가 생각나냐?" 쾅! 냉소의 비명이 울렸다. 그리고 중인들은 진법을 벗어날 수 있었다. * * * 한 폭의 풍경화였다. 파란 청남빛 하늘 아래 융단(絨緞)을 깔아 놓은 듯 초록빛 초원이 펼쳐져 있고, 깎아지른 단애(斷崖)는 병풍처럼 초원을 감싸고 있었다. 그 아래,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가 만발한 초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며 초원을 가로지르는 시냇물! 벌과 나비는 꽃과 나무를 넘나들고 토끼와 노루는 초원을 거닐었다. "아……!" "아름다운 곳이다." 중인들은 모두 넋을 놓았다. 세외선경(世外仙景),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이곳을 두고 일컬음이리라! 초원 위에는 웅대한 전각이 질서정연하게 지어져 있었다. 중인들이 풍경에 도취되어 감탄사를 연발할 때 스스슥 소리와 함께 그들을 포위하는 수십 명의 무사들이 있었다. 백의를 입은 그들은 허리에 백색 수실이 달린 백색 장검을 차고 있었다. 형형한 안광이 잘 갈무리되어 있는 고수들이었다. "정체를 밝히시오." 무사들의 앞에 선 이십 후반의 청년무사가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칠십이천강검수로군. 문주께서는 무사하신 모양이다." 불패괴옹의 낮은 중얼거림에 백의검사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들은 이 작달막한 노인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데 노인은 그들의 정체를 한 번에 파악한 것이다. "노인장은 뉘시오?" "이런 건방진 놈을 보았나. 이 불패괴옹을 모른단 말이냐? 천향루의 음모를 분쇄하고 귀환하신 영웅이란 말이다. 당장 길을 열어라." * * * 보무 당당하게 걷는다. 어깨를 쫙 펴고 선두에 서서 걷는 단궁비로 인해서 그의 뒤에 선 불패괴옹은 보이지도 않았다. 거대한 대문을 넘어서서 대전을 향해 걸어갈 때만 해도 단궁비의 기분은 하늘을 날을 듯했다. 그러나 막상 대전에 들어선 단궁비의 얼굴이 썰렁하게 일그러졌다. 일대의 영웅을 맞이하듯 떠들썩한 환영식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리 썰렁하단 말인가? 단궁비는 주변을 살폈다. 예상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선풍도골의 도사들과 보기만 해도 불심이 팍팍 솟게 만드는 인자한 노승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일당백의 고수들! 짐작컨대 그들이 구파일방의 수뇌들일 것이고, 대전을 가득 메운 수많은 인물들은 신비각의 고수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 표정은 극히 담담했다. 천향루의 음모를 분쇄하고 수많은 무림의 인사들을 구한 영웅을 맞이하는 태도가 아니다. 더욱 실망인 것은 주약란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매불망 그녀의 안위가 걱정되어 달려온 그를 마중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단궁비는 불패괴옹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왜 이러죠?" 불패괴옹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이내 이유를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네놈 때문이다." "예?" "저들이 네놈을 첩자로 판단한 모양이다. 걱정마라.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불패괴옹이 앞으로 나섰다. 그제야 그를 본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서로 상견례를 하고 노고를 치하하자 비로소 분위기가 제대로 잡혔다. 특히 불패괴옹은 단궁비의 활약에 대해 침이 튀기도록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이때다 싶은 단궁비는 전면으로 나섰다. 불패괴옹이 그 정도로 분위기를 띄웠으니 열렬한 환영을 기대하며…! 그런데 단궁비가 나서자 분위기는 다시 삽시간에 냉각되어 버렸다. 단궁비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영락없이 탐색의 눈빛이었다. 특히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치고 머리는 봉두난발한 노인네의 눈빛은 은근히 경멸하는 기색까지 담고 있었다. "저 청년이 창해일룡 단궁비란 말인가? 별 것도 없구먼. 다만 기생오라비같이 얼굴이 허여멀금한 게 계집들 깨나 후렸을까…!" 단궁비의 얼굴이 완전히 무참히 박살났다. 특히 단궁비를 믿고 신비각에 들어 온 뇌종원을 비롯한 군중들의 안색은 썩은 돼지간처럼 일그러졌다. 그들은 불안한 얼굴로 술렁거렸다. 이 모욕을 어찌 단궁비가 참을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득달같이 궁개 앞에 섰다. "늙탱이, 당신 뭐야? 당신이 뭔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모욕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거야?" 궁개의 두 눈에 차가운 경멸의 빛이 스쳤다. "늙탱이라! 그렇지. 늙은이보고 늙탱이라 하는 것도 잘못은 아니지만, 개방 방주에 즉위한 후 처음으로 그런 말을 들어보는군!" 단궁비의 얼굴이 다시 무참하게 박살나고 말았다. 개방 방주! 천하제일방의 방주. 아울러 천하제일의 정보력을 지녔음은 물론 수백만의 거지들의 입을 이용해 한 사람을 영웅으로, 혹은 마두로 만들 수도 있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인물! 단궁비는 그제야 놀라 궁개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소생이 존장을 몰라뵈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궁개가 고개를 돌려 싸늘히 외면했다. "사람을 외모로 보고 판단하는 것을 보니 밴댕이 소갈머리구먼. 일없네." 싸늘하게 일갈을 날린 궁개가 홱 돌아섰다. 단궁비는 무무대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무대사의 눈빛이 그래도 좀 나았다. 그는 단궁비를 향해 인자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단소협이 이해하게. 궁방주는 물론 우리는 생사존멸의 위기를 막 벗어나 신경이 날카롭다네." 누구는? 그런 반발심이 생겼지만 단궁비는 꾹 참았다. "만금장의 일을 말씀하십니까? 그 참사는 저도 보았습니다." "아미타불! 사실 천향루는 혈궁에서 중인들의 시선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었네. 그들은 불패괴옹을 비롯한 신비각의 고수들을 그쪽으로 끌어 놓고는 혈궁의 주력은 만금장을 친 것이네!" 순간 단궁비의 안색이 일변하고 말았다. 주력? 그럼 그들은 지금 자신의 활약상은 그저 발톱의 때로 생각한단 말이 아닌가? 사방을 빙 둘러본 단궁비, 이번에는 단궁비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대사께서는 생사존망의 위기를 겪으셨다 하는데, 부상을 당한 사람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사실 묻지 않으려 했다. 천향루의 사람들을 구한 것은 칭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순수한 마음에서 그들을 구하고 싶었다. 인간의 목숨을 대신할 그 무엇도 없기에. 그러나 그들의 언사를 생각하니 울화가 치민다. "흥! 방장, 말을 말구려. 말귀도 못 알아듣는 자 하고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거요? 저 청년에 비하면 담자무는 인중지룡이요." 궁개가 다시 한 번 일침을 날렸다. '담자무? 이건 또 무슨 이름이야?' 의아한 단궁비를 본 무무대사가 그간의 정황을 다 설명했다. 무무대사의 말을 듣는 단궁비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오…!" 불패괴옹도 감탄했다. 뇌종원을 비롯해 단궁비를 쫓아 신비각에 든 인물들도 넋을 놓고 무무대사를 비롯한 구파일방 장문인들의 말을 들었다. 그들은 곧 풀이 죽어 신비각을 떠났다. 오랜 동안 정기를 빨린 그들은 스스로 신비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누구도 그들을 잡지 않았다. 단궁비는 기가 죽어 푹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들이 떠나는 걸 보지 못했다. 창피하다. 그 생각 뿐이다. 담자무가 그런 활약을 펼친 동안 자신은 조그만 성취에 만족해 스스로 기고만장하고 있었으니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 것인가! 그러나, "중원무림이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담자무 대협과 주약란 문주가 결합해야 해. 그 두 분이 힘을 합쳐야 한단 말이오!" 단궁비의 눈에서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다. 철부지라고 모욕을 주어도 참을 수 있다. 미련 곰탱이라고 욕해도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내 여자를 다른 자에게 양보하란 말은 절대로 참을 수 없다. 내 인생, 내가 살아왔다. 그대들 구파일방의 존귀한 존재들이 내 인생에 손톱만큼도 무얼 준 적이 없단 말이다. 그런데 내 여인을 양보하라고? 그녀는 오지 않는다. 내가 돌아온 것을 알면서도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비정강호인가? 인간의 정이 통하지 않는 곳이 강호인가? 주약란, 네게 나란 존재는 그렇게 하찮았나? 내가 이들에게, 아니 너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천향루의 인물들을 구했다고 생각하나? 궁개를 노려보는 단궁비의 시선은 칼날 같았다. "궁개!" 궁개! 그 충격적인 발언! 개방 방주의 이름을 직접 부른 자 그 몇이나 될 것인가? 사람들이 놀라 일제히 단궁비를 바라보았다. 불패괴옹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단궁비를 막았다. "이놈, 이 무슨 무례냐?" 단궁비가 불패괴옹을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난 바다를 보고 살아왔다. 그곳은 한 점의 거짓도 없었다. 난 그런 놈이다. 내가 기분 좋으면 그 뿐, 난 내심을 속이지 않았다. 주약란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존심을 상하면서까지 그녀를 사랑하고 싶진 않다. 한 판 붙자! 화끈하게!" 카하하핫! 궁개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건방진 놈! 구천 중 몇을 죽였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강룡십팔장! 그 무서운 무공, 전 중원의 무림인들이 장법을 논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그 무공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수십 번 단궁비를 강타했지만 단궁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입에서 피를 뿜으며, 강룡십팔장에 강타당한 몸에서 피가 솟구쳤지만 단궁비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전진할 뿐이었다. 십팔로타구봉법! 천하이대곤법으로 꼽히는 봉법도 통하지 않았다. 단궁비는 그저 피를 머금은 듯한 시뻘건 눈으로 궁개를 향해 전진할 뿐이었다. 정수리에서 피가 튀어도 그는 마찬가지였다. ---내 의형 때문에 수백 번이라도 맞아 준다. 한 팔을 자르고라도 중원을 구하려던 그 분의 의기에 감동해 신비각에 몸을 담은 후 내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했다. 이제 버렸다. 모든 것을. 내 마지막 원수를 벤 후 난 중원을 은퇴할 것이다! 말이 끝났을 때 단궁비는 궁개의 바로 코 앞에 당도해 있었다. 궁개는 질린 눈으로 단궁비를 보았다. 강자였다. 껄렁껄렁한 행동 뒤에 진정한 강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는 녀석이었다. 고통을 아는 눈빛이었고, 고통을 인내할 줄 아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 뒤에 서린 슬픔을 궁개는 보았다. "궁방주, 한 가지 묻자. 만일 당신이 천향루에 있었다면, 그래서 내가 당신을 구했다면 오늘 나를 비웃을 수 있었을까?" 쿵! 궁개는 간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 감정을 말로 할 시간이 그에게는 없었다. 쾅! 단 한 방이었다. 쇳덩이처럼 말아 쥔 정권에 한 방 맞은 궁개의 몸이 추풍낙엽처럼 하공을 날았다. 무무대사가 몸을 날려 그를 안아들었을 때 궁개는 뭐라 말을 하려 했다. 그런데 입 안에 가득 고인 피로 인해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낙엽이 졌다. 단궁비는 그렇게 신비각을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군웅들은 무언가 묵직한 것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 날 하늘에는 백 개의 연이 띄워져 있었고, 주약란은 그곳에 없었다. 그녀는 담자무를 만나기 위해 신비각을 떠났던 것이다. "궁비야, 이 놈아, 돌아오너라!" 불패괴옹의 외침만이 산곡을 울리는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