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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대도] 2권 제9장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寀)의 멸망(滅亡) ① 인간들이야 지지든 볶든 예외 없이 밤은 찾아왔다. 위이잉! 불어오는 바람에는 피냄새와 시체 썩는 냄새가 잔뜩 배어 있다. 산 자가 죽은 자인지, 죽은 자가 산 자인지 모를 정도로. 그 하늘 아래 대낮같이 훤하게 밝혀져 있는 녹림칠십이채 광장에 두 사람이 마주서 있었다. 거구의 흑염노인과 사방평창건을 쓴 백의노인. 흑과 백을 나타내듯 옷차림 또한 완벽하게 다른 이 두 사람은 바 로 현 강남무림의 대부 격인 녹림대제 냉공소와 숨겨진 신화를 연 출한 장백검유 왕도연이었다. 그들 뒤에는 녹림칠십이채의 무사들과 칠파일방을 주축으로 구성 된 정도인(正道人)들이 살벌한 기세로 대치하고 있었다. 번쩍이는 창칼, 핏발 선 눈동자는 마치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 수를 보는 양 살기만이 그득했다. 문득 상대의 무게를 달아보듯 노려보던 냉공소의 입이 열렸다. "이렇게 만나 영광이오, 맹주."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냉공소는 허리를 굽히지도, 존 경의 눈빛도 보이지 않았다. "노부 역시도……." 왕도연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대제의 결정에 감사드리는 바요." 순간 냉공소의 눈이 반짝 빛났다. 신선(神仙) 같은 풍모도 뜻밖이었거니와 말씨 또한 물 흐르듯 지 극히 유유하지 않은가. 게다가 저 정도의 배분을 가진 사람이 새 까만 후배에게 깍듯한 존칭이라니.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인간이었다, 왕도연은. 허나 그는 이런 마음을 숨기고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엇이 감사하다는 거요? 후배가 죽음이 두려워 항복을 한 줄 아 시오?" 말을 하는 도중 자신도 모르게 분노를 느꼈음인가. 그의 음성이 약간 격앙되었다. 왕도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대제께서 잘 아시지 않소. 노부는 다만 더 이상의 피를 흘리지 않게 한 대제의 결정이 고마울 따름이외 다." "누가 그 피를 흘리게 만들었소?" 냉공소는 손가락으로 왕도연을 가리켰다. "바로 당신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소!" 순간, "저런 발칙한!" "감히 어느 분에게 삿대질이야! 그래서 마도 놈들은 할 수 없다니 까!" "정중하게 대해 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정도인들이 저마다 한마디씩하며 웅성거렸다. 이에 질세라 녹림칠 십이채의 무사들도 창칼을 꼬나 쥐고 엉덩이를 들썩거리기 시작했 다. 기실 녹림칠십채의 무사들은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여덟 개의 관문이 무너지자 냉공소가 철 군을 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항복'이라는 말까지 서슴 지 않고 있다. 그때다. "갈!!" 왕도연의 입에서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십 장 밖에 있는 전 각(殿閣)의 기왓장이 들썩일 정도로 큰소리였다. 무공이 약한 사람들은 귀를 막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괴로운 신음 을 토했다. '단지 내공만으로 소리를 쳤는데도 이 정도라니!' 은연중에 기혈이 격탕하자 냉공소는 내심 경악했다. 주위의 소란이 가라앉자 왕도연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담담하게 말 했다. "그것은 노부의 잘못이 아니라, 노부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대제의 잘못이라고는 왜 생각지 못하시오?"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소리!" 냉공소는 발끈했다. 왜인지 그는 평소의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왕도연의 기도(氣道)에 위압감을 느낀 것일까. 아니면 형제들의 죽음에 마음이 흔들린 것일까.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어째서 후배의 잘못이라 하시 오. 평화로운 강호무림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킨 것은 맹주가 아니시오니까!" 그에 반해 왕도연의 표정이나 음성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허허, 어리석구려. 어째서 강호무림이 평화로웠다고 말할 수가 있소. 대제같이 악한 일을 일삼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거늘. 그런 데도 평화라는 말이 나온단 말이오." "세상에는 음(陰)이 있으면 양(陽)이 있고, 밝음이 있으면 어둠 또한 있는 법이오. 이 모두가 자연의 조화이외다. 설사 우리 마도 인이 잘못을 저질렀으면 얼마나 저질렀소이까? 그리고 소위 정파 입네 하는 자들은 얼마나 선한 일을 했는지 궁금하외다!" 절규(絶叫)! 열변이라는 말로 수용할 수 없는 피 끓는 절규였다. 끝까지 그의 말을 경청한 왕도연은 내심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 다. "대제의 말도 일리는 있소. 하지만 세상은 악인(惡人)이 적으면 적을수록 평화로운 법이오. 힘없는 사람들이 마음놓고 거리를 활 보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만 평화라는 말을 쓸 수 있지 않겠소. 그리고… 노부의 말을 끝까지 들으시오." 냉공소가 뭐라고 하려는 것을 손을 저어 만류한 그는 조용한 음성 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무공을 잃는다는 것이 뭐가 그리 대수외까. 천하에는 무 인들 보다 그렇지 않은 범인(凡人)들이 수백 배로 많은데……. 그 들처럼 살면 안될 일이라도 있소.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 이 렇게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이오?" "!" 냉공소의 눈이 커졌다. 이렇게 놀라운 말이 어디 있겠나. 무릇 무인이라면 무공을 잃는다 는 것을 제일 두려워한다. 젊음을 바쳐 이룩한 모든 것을 잃는 것 과 마찬가지니까. 거기다가 무인들만이 할 수 있는 그 호쾌함과 야망. 언젠가는 천하를 오시(傲視)해 이름을 남기겠다는 야망을 접으라 는 말이 어찌 저리 수월하게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②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맹주는 그럼 무공을 버릴 수 있소?" 물음을 던지면서도 그는 자신이 너무 멍청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천하의 왕도연이 어떻게? 한데 다음 순간, 냉공소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여야만 했다. 왕도 연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기꺼이! 그것이 천하에 평화를 가져오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소이다." 찰나, 터엉……! 냉공소는 머릿속에서 비파(琵琶)의 현(絃)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 었다. 일언(一言)에 정도무인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고, 일보(一步)에 산천초목을 떨게 만드는 저 위대한 무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이것은 녹림칠십이채가 붕괴되는 것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냉공소의 동공이 점차 확대되었다. 애초 무림맹이 만들어졌다는 소문과 함께 첩지를 받았을 때 그는 강호무림을 뒤엎고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러다 처음 왕도연을 보는 순간에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 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한데 지금은 어떠한가.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地獄)에 가겠느냐 하는 불경(佛經)의 한 구절이 떠오를 만큼 숭고하게 보였다. '진정으로 원하고 있어. 어쩌면 종일명에게 복수를 부탁한 것이 실수일지도…….' 원래 그가 관문을 철폐하고 무림맹의 사람들을 이곳에 끌어들인 내면에는 종일명이 이끈 백혈녹대(白血錄隊)가 빠져 나갈 길을 터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지금 냉공소의 염원을 안은 백혈녹대는 은밀하게 빠져 나 가고 있는 중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이 끊어지는 듯한 허전한 마음이 들어 내심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럴 자신이 있소이까, 맹주?" "무얼?" 되묻는 왕도연을 보던 냉공소는 내심 아차 하고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알았다. 덮어놓고 자신 있느냐고 물었으니. "그런 세상을 만들 자신 말이외다."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린 왕도연은 힘껏 머리를 끄덕였다. "자신 있네!" 대답을 들은 냉공소는 잠시 왕도연의 눈을 깊숙이 응시했다. 저렇게 신념에 찬 눈을 가진 사람은 결코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은 어떤 어려운 난관이 있더라도 꼭 이루고 말 사람이었다. 그러나 왠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과연 그런 이상향(理想鄕)의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한 인간 의 힘으로 말이다. 천하만민의 어버이라는 황제(皇帝)조차 하지 못했고, 이름난 현자(賢者)들과 불타(佛陀)조차 못한 일을 왕도연 이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왕도연 혼자만의 욕심이 아닐까? 하지만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것은 역사는 한 개인의 힘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스스로에게 숱한 자문(自問)을 던진 냉공소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정도무림을 재정비해야 할 것 같소만… …." 이 말은 아픈 데를 꼬집는 말이었다. 기실 작금의 칠파일방 장문들은 과거의 장문들보다 무공이 두 배 이상은 뛰어났다. 왜냐면 칠십 년 전에는 천마교에, 또 오십 년 전에는 장백검유 왕 도연에게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입은 칠파일방은 비로소 힘의 필요 성을 절감하게 되어 제자를 뽑을 때 과거와는 달리 인품(人品) 우 선이 아니라 무공 자질이 뛰어난 사람만 제자로 받아들였다. 장문 또한 무공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장문직을 계승했다. 그 결 과 칠파일방은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되었지만 부작용 도 적지 않았다. 자질만으로 무작위로 제자들을 받아들이다 보니 개중에는 못된 놈 들도 있기 마련이었고, 머리에 든 것은 없고 힘만 센 놈들이 으레 그렇듯이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설치고 다녔다. 하지만 단속해 야 할 자파(自派)가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하는데 누가 그들을 징 계하겠는가. 그래서 칠파일방이 서로가 잘났다고 떠들고 다니며 보이지 않는 암투(暗鬪)를 벌이고 있을 때 왕도연이 무림맹을 만들었던 것이 다. 왕도연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좋은 지적! 그렇잖아도 이번 일이 끝나면 대수술을 하려던 참이 었소." '괜한 기우(杞憂)였군.' 내심으로 중얼거린 냉공소는 돌연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한 가지 더 알고 싶은 게 있소." "말씀해 보시오." "본채의 형제들은 어떻게 하실 참이오? 무공을 전폐시킬 것이오, 아니면 전부 죽일 것이오?" 그 말에, "노부는 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지……." 혼자말처럼 읊조린 왕도연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둘 다 아니오. 허나 일단은 감금을 시켜야겠지요. 그런 연후에, 그러니까 강호에 평화가 찾아오면 정당한 절차에 의해 옥석(玉石) 을 가릴 작정이오. 어떻소, 이 정도면 만족하시오?" 왕도연은 만족하느냐고 물어왔고, 냉공소는 자신을 만족시키려면 원래의 모습대로 돌려놔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③ 당대(當代)와 전대(前代)의 영웅이 마주섰다. 냉공소 뒤에는 자신들이 던진 병장기를 앞에 두고 오열하는 녹림 칠십이채의 무사들이 있었고, 왕도연 뒤에는 불 구경하듯 마른침 을 삼키는 정도의 무사들이 서 있었다. 위이이잉! 두 사람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다. 문득, "꼭 이래야만 하겠소?" 왕도연의 물음에 냉공소는 잔잔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후배가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면 진정한 적수를 만나지 못 했다는 것이오. 아니, 꼭 한 사람이 있었지요." "……." "그는 천하제일검 사하립이지요." 사질의 이름이었다. 가문의 숙원(宿怨)으로 고민하다가 청심거를 뛰쳐나가 죽음의 검 을 완성하고 돌아왔던……. 생각지도 않은 이름을 들어서인지 왕도연의 얼굴이 처음으로 약간 변했다. "맹주께서도 그 이름을 들으신 모양이구려." 표정 변화를 달리 해석한 냉공소의 말에 왕도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냉공소의 음성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사하립은 검수업자! 한 쌍의 육장을 사용하는 후배와는 만날 일이 없었지요. 그렇다고 후배가 찾아갈 수도 없는 일! 이런 와중에 맹주 같으신 분이 나타나셨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가 있겠소. 정(正)과 사(邪)를 떠나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그는 허리를 가볍게 굽혔다. "한 수 가르침을!" 이렇게 나오는 데야 거절할 명분도 이유도 없다. 왕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그럼."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냉공소의 두 손이 서서히 가슴 어림으 로 들어올려지는 순간, 우우웅! 주위의 공기가 파동 치면서 냉공소의 흑의장삼이 터질 듯이 부풀 어올랐다. 그러다 일순, 냉공소의 모습이 사라졌다. 둥실 떠 있는 두 개의 손바닥만이 남아 있었다. 빠지찍! 하늘의 섬뇌(閃雷)가 인 듯, 손바닥은 뇌전을 담고 푸른빛으로 일 렁거렸다. 불어오는 바람조차 전율하며 되퉁겨 나갔다. 왕도연의 무심한 눈에 언뜻 놀람이 스쳤다. "뜻밖이군. 취뢰마장(翠雷魔掌)을 익히고 있을 줄이야!" 마도(魔道)를 대표하는 몇 가지 마공절학(魔功絶學)이 있었다. 이 름하여 칠대마공(七大魔功)이라 불리는. 그 중 취뢰마장은 마공이되 마공이 아니었다. 비록 그 패도적인 위력으로 마공에 들어 있지만 여타 마공과는 달리 사람의 심성을 변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지 패도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마공으로 분류된 취뢰마장을 대하 는 왕도연은 감히 방심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은 옥대(玉帶)가 손에 들려졌다. 옥대는 그냥 고운 비단으로 만든 헝겊이었다. 한데 왕도연의 손에 들려진 순간에 옥대는 더 이상 평범하지가 않았다. 휘류류! 검날같이 뻣뻣해짐과 동시에 희뿌연 기체가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 랐다가 곧 투명하게 변하며 불쑥 일 장은 더 길어진 것같이 보였 다. 누군가가 경악하며 부르짖었다. "아! 무형검강(無形劍 )이다!!" 일전에 단호삼이 펼친 무형기검보다 한 단계 위인, 검을 잡은 검 사라면 몽매에도 이루고 싶어하는 초상승의 검도지예(劍道之藝)! 탄성은 곧 사라졌다. 단 일초로 승부가 결정날 것이기 때문이었 다. 군웅들도 숨을 죽이고, 하늘의 달도 별도 숨을 죽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심!" 웅후한 음성과 함께 냉공소는 두 손을 벼락같이 내밀었다. 빠찌… 찍!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이러한가. 푸른 번개가 방사형으로 쫙 퍼졌 다가 한곳으로 모아졌다. 번쩍! 하나의 점으로 변한 푸른 번개가 송곳처럼 예리한 광채를 뿜으며 왕도연의 가슴팍, 옥당혈(玉堂穴)로 쏘아졌다. 마침내 냉공소가 움직인 것이다. "좋은 수법!"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는 법인가. 진심 어린 탄성을 발한 왕도연은 느릿하게 옥대를 내밀었다. 세월 을 밀어내듯, 자신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을 밀어내듯 그렇게 천천 히 떨쳤다. 귀청을 찢는 파공성도,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검광도 보이지 않 았다. 그러나 장내의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머리카락같이 가늘게 변한 푸른 번개가 서서히 갈라지고 있음을. ④ 밤하늘은 청명했다. 짙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이 희게 보일 정도로 맑고 깨끗하였 다. 그러나 이런 밤하늘이 몹시도 어두워 보이는 까닭은 보는 사람들 의 마음이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녹림칠십이채가 내려다보이는 능선. 한결같이 삼십 밑을 도는 나이에 똑같은 흑의무복을 차려 입은 사 내들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그 수는 정확히 백(百)이었다. 한데 단 한 사람. 홍일점(紅一點)인가. 붉은 홍의무복에 사순은 지남직한 중년의 사 내는 그들과 달리 밤하늘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가 보는 곳은 화 염(火焰)에 싸인 녹림칠십이채였다. 그는 바로 패검철담 종일명이었다. 사방 십 리(十里)에 달하는 녹림칠십이채의 전각들을 태우는 화마 (火魔)가 종일명의 동공 속으로 따갑게 파고들 무렵, 그의 전신이 '부르르' 떨린 것은 산 속의 바람에 한기를 느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불끈 움켜쥔 두 주먹 사이로 진득한 핏방울이 방울져 떨어졌다. 손톱이 피부를 파고 들어갔기 때문이리라. 그런데도 그는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흐르는 것은 억겁처럼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허나 그 침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일명에 의해 깨어졌다. "보아라, 이놈들아! 두 눈 똑똑히 뜨고 형제들의 죽음을! 형제들 이 흘린 피를 보고… 귀로 들어라. 원한에 사무친 통곡(痛哭)을 들으란 말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고개를 돌려보지 않았다. 아마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청춘을 받쳐 온 녹림칠십이채가 무너 지는 소리를 듣는 것이……. 하지만 그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원한의 불길은 녹림칠십이채를 태우는 불길보다 더욱 뜨거웠다. 그것을 느꼈음인가. 돌연 종일명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높이 들어올렸다. 푸르스름하 게 빛나는 검신을 노려보며 그는 한 자 한 자 끊듯이 입을 열었 다. "나, 종일명은 이 자리에서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맹세하나니… …." 번쩍! 검광이 번뜩였다. 툭! 손가락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 종일명의 새끼손가락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입에 넣어 으적으적 씹으며 말을 끝맺었다. "죽어 원귀(寃鬼)가 되더라도 형제들의 원한을 갚고 말 것임을 맹 세하노라!" 그의 행위가 시작이었다. 망부석처럼 서 있던 백 인의 사내들, 즉 백혈녹대들은 누가 먼저 라 할 것 없이 손가락을 잘라 씹어 먹기 시작했다. 피의 맹세! 이것은 왕도연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말하 는 것이었다. 과연 피는 피를 부르는 강호무림의 율법은 영원히 종식될 수 없는 것일까? 한천애의 동굴 안은 상스러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 기운은 바로 결가부좌를 틀고 있는 단호삼의 머리 위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 다. 백색 투명한 광채에 싸여 있는 다섯 개의 둥근 환(環)! 그것은 놀랍게도 등봉조극에 달한 절대고수에게만 볼 수 있다는 오기조원(五氣朝元)의 현상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오기조원을 이룬 다섯 개의 환이 급속도로 작아진다 싶은 순 간 이내 연기처럼 변해 단호삼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번쩍! 한 줄기 하얀 번갯불이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진 그의 깊숙 한 눈은 무욕(無慾)의 선인(仙人)에게서나 볼 수 있음직한 담담한 서기가 어려 있었다. 허나 서기(瑞氣)는 너무 은밀해 없는 듯도 하였다. "그분 덕택에 조화선공이 십 성에 달했다." 신비선옹을 말함이리라. "한데 왜 그분은 사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회피했을까?" 느낌이었다. 그것은 곧 불길한 생각을 만들었다. '설마……? 아닐 거야. 절대로…….' 스스로의 생각을 부정하듯 고개를 흔든 단호삼은 '다음에 왕도연 을 만나보면 알리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많은 날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동굴 안이 거짓말처럼 훤하게 보였 다. 빛이 들어와서가 아니었다. 오기조원을 이룬 내공으로 눈이 밝아 진 것이다. 퐁퐁… 퐁……! 종유석에서 떨어지며 내는 물방울 소리가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 조화롭게 들려왔다. 자연이 만든 신비로운 음률 속에 그는 두 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 리고 섰다. 더도 덜도 아닌 너비로 벌린 그의 모습은 너무나 평온 해 보였다. 그런 상태로 그는 손가락은 움직였다. '오도독' 하는 소리가 동굴 을 울렸다. 관절이 풀리며 내는 소리였다. 그 소리의 여운이 아직 허공에 맴돌고 있을 때 불현듯, 단호삼의 손이 움직였다. 슈웅… 파팟! 허리춤에서 한 줄기 빛이 솟구쳤다. 빛은 곧 수천 갈래로 갈라졌 다가 사라졌다. 흡사 환영을 본 듯 그렇게 사라졌다. 허나 그 찰 나지간에 자연이 만든 음률 또한 일순간 끊어졌음을 알 수 있었 다. ⑤ 수천 개의 물방울을, 그것도 시간과 일정한 규칙도 없이 떨어지는 수적(水滴)을 가르고도 아쉬움이 있는지 단호삼의 미간이 찌푸려 졌다. "아직도 살기가 남아 있어. 살기를 없애야만 살혼검을 완성할 수 있는데……." 살기가 없는 살혼검이라니? 사하립이 들었다면 단호삼을 잘못 가르쳤다고 땅을 치며 통곡할 일이었다. 기실 단호삼은 육합검법의 연환식이나 단해일검, 그리고 살혼검을 펼칠 때 자신도 모르게 살심에 빠져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 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하립이 완성한 것은 피를 보아야만 멈 추는 살검지도였으니까. 아무리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지만 살혼검을 펼치고도 복마신 검 곽여송에게 연거푸 패하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곽여송의 분광검법을 충분히 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졌다는 것 은 자신에게 사하립만한 원(怨)과 한(恨)이 없음이라는 것을. 그 사실은 곧 살검지도를 이룰 수 없음이 아니겠는가. 또한 유불도(儒佛道)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도리를 담은 조화선 공으로 살검을 연성한다는 것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현상 이랄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조화선공에는 오히려 광명정대한 만천검결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그는 지금 살혼검을 달리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과 혼(魂)이 담긴 검으로. "살기를 완전히 없애야만 나만의 검, 즉 활검(活劍)을 완성할 수 가 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사용하는 살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 해 죽이는 활검을! 활검을 완성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 말을 하다보니 풀썩 웃음이 났다. 대책 없는 사내들만 모인 녹산영웅문. 그들과 어울리면 어찌 된 판국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결코 싫지 않았다. 입은 거칠지만 마음은 따뜻한 사람들이니까. "후후후, 모두들 눈 빠지겠군. 특히 문주님이……. 후후, 하지만 할 수 없다. 같이 있다가는 활검을 완성할 수 없을 테니까." 낮게 중얼거린 단호삼은 백혼검을 휘릭! 한 바퀴 회전시킨 후 허 리춤에 철커덩 꽂으며 결가부좌를 틀었다. 검도란 마음이며, 마음을 닦기 위해서는 정(精)과 기(氣)를 먼저 이룩해야 함이니. 소림사(少林寺). 오악(五嶽)의 하나인 숭산(崇山)을 더욱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바 로 사백 년 동안 정도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가 있기 때문이다. 숭산은 태실봉(太室峰)과 소실봉(小室峰)으로 나누어져 있는 바, 그 중 소실봉에 소림사가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 소실봉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다. 한데 푸른 대나무 속에 둘러싸여 있는 정실(淨室)에 참으로 해괴 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옥분로(玉紛爐)가 있어야 할 불단에 두 남녀가 벌거벗은 채로 질 퍽한 육체의 향연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사내 등을 잡고 있는 여인은 대략 삼십 전후로 보이는 미부. 용모 는 그야말로 달빛도 부끄러워 숨는다는 화용월태(花容月態)라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절세미녀였다. 반쯤 감긴 몽롱한 눈에선 철석간담의 사내를 한순간에 녹일 듯한 정염의 빛이 흘러 넘쳤고,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는 박속같이 깨 끗한 치아가 무척이나 고와 보였다. 그런 미부의 은린어처럼 빛나는 두 다리에 허리가 감겨 있는 사내 는 뜻밖으로 머리가 번들거리는 중이었다. 그것도 장로급에 해당 하는 열 개의 계인이 찍혀 있는. 허나 우람한 체구하며 팽팽한 근육질은 나이가 많은 장로가 아닌 젊은 사람이 분명했다. 광무승(光无僧)! 그는 바로 후기지수 중 으뜸이라는 사룡 가운데 천룡으로 불리는 불승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차기 소림방장으로 내정되어 있는 광무승이, 경건해야 할 소림사에서 여인과 운우지락을 나누다니. "헉헉!" 여인을 처음 안아 그런지 광무승의 움직임은 너무나 격렬했다. 보 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피부와 피부가 맞 닿는 기괴한 음향이 들렸다. 그런데 바지런히 허리를 놀리는 광무승의 눈동자가 마치 백치처럼 흐리멍덩하지 않은가. 신지(神知)를 잃은 사람처럼 말이다. 일다경의 시간이 지나자, 광무승의 움직임이 눈이 띄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미부의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광무승이 진저리치며 축 처진 후 꼼짝달싹도 하 지 않았다. 문득 미부의 고운 아미에 주름이 잡혔다. 웃고 있는 것이다. 허나 눈은 여전히 차가운 한광을 뿌리고 있었다. "뜻밖의 수확이야. 이놈이 백년에 가까운 내공을 가지고 있다니… …." 낮게 중얼거린 그녀는 광무승의 몸을 밀었다. 힘없이 옆으로 나뒹 구는 광무승은 놀랍게도 칠공에서 시커먼 피를 흘리고 죽어 있었 다. 섭음채양보술(攝陰採陽保術)에 정력이 고갈돼 죽은 것이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은 미부는 문을 향해 짤막하게 입을 열었 다. "들어와라." 문이 낡아 그런지 삐꺽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들어왔다. 한 데 그의 얼굴은 바로 광무승과 똑같지 않은가. 옆에 죽어 있는 광 무승이 진짜라면 변용(變容)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감쪽같 은 모습으로. 한 발짝 들어오는 순간 감히 미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듯 그는 오체복지를 했다. "속하, 대령했습니다." 쓱 몸을 일으킨 미부가 가볍게 소매를 흔들자 뭉클 흑무(黑霧) 피 어 올라 죽은 광무승의 몸을 감싸고, 시신은 물처럼 흐물흐물 녹 아버렸다. 미부는 그것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네가 할 일이 뭔지 알겠지?" 가짜 광무승의 얼굴이 바닥을 파고 들어가듯 처박혔다. "알고 있습니다." "실패는 죽음이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미부의 모습이 연기처럼 꺼져 버렸다. 바로 앞에서 두 눈을 뜨고 쳐다보고 있어도 모를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가짜 광무승은 '명심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고도 한참만에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
첫댓글 즐독 ㄳ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