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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畏敬의 대상이었던 동해는 줄곧 내 곁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한때 질풍노도가 내 삶의
열망이었던 적이 있다
월송정 아래 갈기 휘날리며 달려오는
달려오다 엎어지는 겨울 파도를 보면
어째서 제자리를 지키는 일이 부끄러움이며
떠밀려 부서져도 필생의 그 길인지
어떤 파도는 왜 핏빛 노을 아래 흥건한 거품인지
희망과 의욕을 뭉쳐놓지만 되는 일이 없는
억장 노여움이 저 파도의 막무가낼까?
한 치 앞가림도 긁어내지 못하면서
바위에 몸 부딪혀 스스로를 망가뜨리며
파도는 그래서 여한 없이 홀가분해지는 걸까?
한꺼번에 꺾어버리는 일수처럼 운명처럼
매운 실패가 생살을 저며 내는 동안에 파도는
부서진 제 조각들 시리게 끌어안는다
다 털린 뒤에도 다시 시작하려고
시렁에 얹힌 먼지를 털어내고
비싼 일수를 찍으며 구멍가게 유리창
밖을 하루 종일 내다보지만
이제는 갈기 세워 몰고 갈 바람도 세간 속으로
들이닥칠 기력조차 쇠잔해진
한때 질풍노도가 -'파도'전문
나는 자주 찾지는 않지만 가끔씩 고향 근처를 둘러보곤 한다. 요즘 들어 이 벽지의 한촌도 변화의 바람으로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 인심이야 세월 따라 흘러간다지만, 무심한 자연조차 예스럽지가 않으니, 고향을 추억하는 마음이 때로 무거워진다. '삼율'만 하더라도 어릴 때, 붕어며 미꾸라지를 잡던 앞뜰은 어느새 주택지로 바뀌었고, 은어나 숭어가 떼 지어 올라오던 '햇냇거랑'은 상류가 저수지로 가로막혀 실낱같은 물줄기만 겨우 내비치고 있을 뿐이다.
등대를 우뚝 세운 '등기산'에서 내려다보면, 예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후포항도 이제는 많이 변했다. 짧은 축항으로 둘러싸여 아늑했던 항구는 까마득하게 잇댄 방파제 덕분에 폭을 넓힌 물양장까지 제대로 갖춘 제법 큰 규모의 항구가 되어 있다. 긴 석축의 방파제가 열 배나 더 길게 바다 가운데로 뻗어 있고, 그 끝에는 새로이 큰 등대를 세워 놓았다. 지나는 길에 둘러본 내가 다녔던 중·고등학교도 몰라보게 변했고, 낚싯대를 드리웠던 마을 앞의 크고 작은 해안바위들은 어느새 매립이 되어 흔적조차 없다. 예전의 통통배들도 수십t씩의 철선으로 탈바꿈해 이물을 가지런히 출렁대고 있으니, 저 상전벽해를 두고 여기가 내 고향이라고 말 못하겠다. 다만 동해의 수심 속으로 깊숙이 발부리를 드리우고 늘어선 태백준령이나 그 위치에서 아직도 한가로운 수평선만이 잊었던 지리를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 귓전에 부딪치는 해조음에 놀라 잠에서 깨어보면, 그 시간에도 캄캄한 밤바다로 어로를 떠나는 부지런한 발동선의 원동기 소리가 들려오고, 제철에 맞추어 어구를 준비하는 늙은 어부의 노역이 가물거리는 호얏불 밑에서 새하얗게 밤을 밝히던 곳. 무섭게 다가왔던 가난에는 언제나 속수무책으로 방기되었던 사람들의 마을. 한낱 생존의 싸움에서조차 무기력하게 마침내 체념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던 소박한 이웃들의 터전이 나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후포항에서 바라볼 때 휘어진 만곡(彎曲)을 따라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옛 도계(道界)였던 지경이 나온다. 그리고 영덕 땅인 병곡, 백석, 송천, 대진의 가물거리는 백사장이 긴 띠처럼 펼쳐져 있어, 희게 굽이치는 해안선과 아득하게 내닫는 산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 가물거리는 능선이 굴곡진 만을 이루어 다시 심해 쪽으로 곶을 만들어놓은 곳이 축산이다. 후포에서 보면 축산곶은 마치 작은 섬처럼 돌출해 있다. 산맥과는 끊어질 듯 연결되어 있지만, 겨울날의 추위 속에선 덩그렇게 물위에 뜬 섬으로 비치기도 하는 것이다. 후포에서 북쪽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솔숲 사이로 해당화가 만개하는 거일과 직산이 나온다. 해송들이 빽빽한 솔밭으로 이어선 해안선이 푸른 바다와 조화되어 절경을 이루고 있는 거기, 백암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내를 이룬 남대천이 바다와 만나는 하구가 있다. 그 하구 건너편 솔숲에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유명한 월송정(越松亭)이 솟아, 멀리 창랑을 조망한다.
이 같은 지형 탓으로 후포는 해돋이나 일몰의 노을이 장관을 이룬다. 바다 속에서 해가 뜨고 일찍 박모(薄暮)가 찾아드는 까닭에 노을이 곱기도 하거니와 어느 곳보다도 오래 지속된다. 물결에 반사되는 노을을 보노라면 헤아릴 수 없는 은침 금침들이 낱낱이 바다에 꽂혀 순간순간 파동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후포 인근에는 천혜의 관광지가 많다. 평해 남대천의 근원인 백암산 아래에는 백암온천이 있어서, 전국의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동해안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국도7호선을 따라 더 북상하면 망양정이며 불영계곡, 성류굴, 덕구온천 등이 사오십 리 거리에 자리잡고 있으니, 이 일대는 가히 일급 관광코스라고 할 만하다.
이십여 년 저쪽 나는 울진군 북면에서 한창 개발 중인 덕구온천을 다녀온 적이 있다. 예전엔 노천온천이었는데 어느새 옛 자취를 뭉개고 몇 동인가, 웅장한 온천장들을 세우고 있었다. 대충 몸을 닦은 뒤, 태백산맥의 한 자락에 깔개를 펴고 누워 장엄하게 저무는 산골짜기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겹겹의 능선들은 짙은 연무에 막 흐려지고 있었다. 일몰에 비끼는 그 경치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압도해 왔었다. 세속과 절연된 저 까마득한 곳 어디 '두천'인가 하는 골짜기에는 그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화전에 붙여진 너와집들이 있었다. 세간에 들지 못한 적막한 삶을 바람병풍으로 접으며, 지금도 거기서 누군가 저녁을 맞고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런 처소에 나무처럼 붙박여 필생을 이울기도 했을 것이다. 그 느낌으로 쓴 시가 '너와집 한 채'라는 작품이었다.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 넣고서
…(후략)… - '너와집 한 채' 중 일부
시에 등장하는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은 지도에도 없는 지명이다. 나의 고향인 울진군은 오랫동안 고구려 옛 땅이었고, 통일신라 이래로는 관동의 끝자락에 복속되어 왔다. 1963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경계가 바뀌고 말았으니, 그때 나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등졌으므로, 지금껏 나의 정서의 바탕에는 강원도 울진군이 뿌리내린 채 살아 있는 것이다. 마음의 지경(地境)을 돌려놓지 못한 사정을 시로 표현했다고 해서 한 몽상가의 망상을 나무랄 것인가.
얼마 전에 울진군을 둘러보니, 이곳저곳 볼 만한 관광시설들을 공들여서 건설해놓고 있었다. 연어가 회유해 올라오는 아름다운 '왕피천' 곁의 '망양정'에는 해돋이 공원까지 조성해 종각을 세우고, 경주의 에밀레종을 본뜬 '울진대종'을 걸어놓았다. 그리고 보니 몇 해 전, 그 종의 명문(銘文)을 나에게 의뢰해서 흔쾌히 써준 적이 있었다. 울진을 고향으로 둔 내가 그곳을 기리며 떠올린 여덟 줄의 글귀였다.
글은 비천상(飛天像)을 아로새긴 종신(鐘身)에 단아한 글씨로 새겨져 있었지만, 나는 정작 종을 본 뒤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종각의 어디에도 글귀의 주인을 밝혀놓은 기록이 없었던 것이다. 하다못해 팻말이라도 세워 지은이가 누구인가를 밝혀야 도리가 아닌가. 울진군의 문화수준과 마주친 것 같아서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해와 달 첫 수레로 실어 나르는
천지가 열려 광대무변한
동해와 마주 서느니
벅찬 삶 끝없이 굽이쳐
길이 번성할 터전 서슬 푸른 영원이여!
여기에 살아 이 누리에 마음 붙인
사람들 정성을 바쳐 쇠북 울려 보내느니
환한 염원 창랑 갈피갈피 사무치리라
- '울진대종 명문(銘文)' 전문
나의 시에는 바다를 제재로 한 작품이 많다. 바다가 내 시의 상상세계를 관류하는 바탕에는 성장의 자연환경이 음영처럼 드리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는 평온한 듯 보여도 어느 순간에 돌변하는 광포한 힘을 간직하고 있다. 물은 물이되 마실 수 없는 물, 바다! 그 광활함으로 늘 외경의 대상이 되었던 동해는 깊이 모를 심연을 동반하고서 줄곧 내 곁에 있었던 것이다. 내 고향의 물과 산은 넘어서고 건널 수 없다는 점에서 무의식 속의 사막처럼 각인되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향을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심층 어두운 곳에 바다와 산을 잠재시키고, 동시에 모래사막을 포개놓았던 것일까.
이제는 아득한 그리움이 되어버렸지만, 그 동해 가에서의 세월은 아직도 내게 살아서 출렁거린다. 기억의 사금파리에 살이 베인 듯 여전히 쓰라리다면, 고향은 적당이 탈색되거나 마모되는 추억의 공간이 아니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면서 오히려 날을 세우고 더 날카로워지는 시간들, 그 바닷가에서의 어린 시절은 내게 허기와 외로움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시를 쓰게 되면서도 나는 삶의 변경을 헤맸고, 미래가 없었고, 그다지도 막막했었다. 내 문학의 부정성은 그런 뿌리에서 솟아났을 것이다. 상한 뿌리로도 어쩔 수 없이 피워 올린 잎들이 나의 시였던 것이다. 바닷가에서의 장엄한 일몰을 노래한 아래의 시는 그와 같은 정서가 담긴 작품이라 하겠다.
장례에 모인 사람들 저마다 섬 하나를
떠메고 왔다 뭍으로 닿는 순간
바람에 벗겨지는 연기를 보고 장례식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만
우리에게 장례 말고 더 큰 축제가
일찍이 있었던가
…(중략)…
죽음은 때로 섬을 집어삼키려 파도치며 밀려온다
석 자 세 치 물고기들 섬 가까이
배회할 것이다 물밑을
아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다
물속으로 가라앉는 사자의 어록을 들추려고
더 이상 애쓰지 말자 다만 해안선 가득 부서지는
황홀한 파도의 띠를 두르고
서천 저편으로 옮겨진다는 질펀한
석양으로 깎여서 천천히 비워지는
- '바닷가의 장례' 중 일부
나는 고향을 등지고서 몇 십 년을 도시에서 살았다. 그 시간들은 때로 빠르게 흐르기도 했고, 더디게 지나가기도 했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까마득하게 고향을 잊은 적도 있었고, 너무 예민하게 의식되어 그리움으로 몸서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고향이 언제나 거기 있을 거라는 안심으로 내 문학의 수구지심(首丘之心)을 잠재우곤 했다. 내 고향 바다의, 성난 짐승처럼 갈기를 날리며 달려드는 파도는 예나 다름없을 것이며, 그 포말에 부서지는 해안선에는 겨울을 나기 위해 찾아드는 청둥오리 떼의 쓸쓸한 물자멱은 여전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가고 없어도 자연은 변함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인 김명인은
1946년 울진군 후포면 삼율리에서 태어났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해, <反詩>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집으로 『동두천』『물 건너는 사람』『바닷가의 장례』『길의 침묵』『파문』『꽃차례』등이 있다. 시선집으로는 『따뜻한 적막』『아버지의 고기잡이』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이산문학상' '지훈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글=김명인(시인)
| 후포항의 어선. 늙은 어부의 노역이 가물거리는 호얏불 밑에서 새하얗게 밤을 밝히던 곳. 시인의 고향이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많이 변했지만, 부지런한 발동선의 원동기 소리는 아직도 여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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