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장 허허실실(虛虛實實)
①
일룡구공자(一龍九公子).
아니었다. 이제 산동 악씨세가의 소가주인 섬혼검(閃魂劍) 악진원(岳進元)이 빠지고 없는 일룡팔공자의 안색은 한결같이 굳어 있었다.
사풍객 한 사람 때문이었다.
사풍객에 의해 일룡구공자의 명예는 진흙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구대세가 중 사가(四家)가 흔적도 없이 멸망하지 않았는가?
쾅!
주먹이 자단목 탁자 위에 떨어졌다. 그 순간 단단하기가 철이나 다름없다는 자단목(紫檀木) 탁자에 구멍이 뚫렸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내려친 자. 그는 다름아닌 전궁세가의 소가주인 탈백신도(奪魄神刀) 팽무위(彭武韋)였다.
그의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분광이 쏟아져 나왔다.
"으으... 사풍객! 그 놈을 잡으면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겠다. 교활하고 잔혹무비한 놈!"
탈백신도 팽무위는 전신을 부르르 떨엇다. 그것은 바로 주체할 수 없는 복수심과 분노 때문이었다.
그가 출타했을 때 사풍객은 교묘히 자신으로 변장해 들어와 전궁가를 몰살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놈의 살가죽을 벗겨 이불을 삼고, 고깃살은 갈아서 개에게 먹이리라!"
수운세가(水運勢家)의 소가주(少家主)인 철수룡(鐵水龍) 수검악(水劍嶽)도 치를 떨며 외쳤다. 당가의 소가주 당백문(唐白文)도 눈썹을 떨며 분성을 토했다.
"음흉하고 잔혹한 놈! 이 천수비랑(千手飛郞) 당백문이 살아있는 한 네 놈의 몸을 본가의 삼천 육백 가지 암기로 고슴도치를 만들어주마!"
팔공자들은 다기가 놓인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치를 떨었다. 그리고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
다만 이런 팔공자의 분노에 어울리지 않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백삼을 입은 미공자였다. 영준하기가 천하제일남이라 할만한 청년이었다.
분노의 기미가 가라앉지 않는 장내를 담담히 둘러보는 미청년. 그는 바로 신주제일룡(神州第一龍) 사유성(査流星)이었다.
"......."
사유성의 눈이 비어있는 의자에 가 멎었다.
그 자리는 바로 섬혼검 악진원의 자리였다. 악진원은 이제 중원의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동안 빈 의자를 바라보던 사유성의 깊이를 모를 눈이 반짝였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형제들. 흥분만 할 게 아니라 대책을 논의해야 할 것이오. 놈은 아직도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있고, 우리는 아무런 방비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상태가 아니오?"
"......."
팔공자는 일제히 입을 다물며 사유성에게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유성은 구공자들의 중심 인물이었다. 결국 이번 회합도 바로 그가 주최한 것이다. 사유성은 유성이 흐르는 듯한 눈에 깊이 모를 혜지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사풍객은 신출귀몰할 뿐만 아니라 역용술(易容術)에도 귀신같은 재주가 있소. 그가 이제까지 벌인 일은 모두 완벽한 역용술을 이용하여 형제들의 모습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오."
"그... 그렇소!"
팽무위가 동의한다는 듯이 신음성을 토해내며 외쳤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기라도 하듯 사유성은 왼손에 쥔 백선(白扇)을 가볍게 저었다.
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놈은 역용만 능한 게 아니오. 놈의 무공은 더욱 가공할 경지에 이르러 있소. 어쩌면 우리들보다 우위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 말에 팽무위가 반박했다.
"사(査)형! 그것만큼은 승복할 수 없소! 놈은 비정한 암수를 썼을 뿐이오. 정면대결을 한다면 틀림없이 놈을 잡을 수 있소."
사유성의 음성이 그의 말을 끊었다.
"팽형, 암수를 썼다고는 하지만 그가 고수가 아니라면 어찌 하룻밤 사이에 전궁가의 백팔가신(百八家臣)을 죽일 수 있단 말이오? 설마하니 전궁세가 가신들의 무공이 수준 이하라는 뜻은 아닐 텐데......."
"으음!"
사유성의 말에는 조리가 있었다. 팽무위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붉그락푸르락했다. 그의 입에서는 신음이 토해졌다.
평소 쾌활하고 생각이 깊던 팽무위도 부친의 죽음과 가신의 전멸 앞에서는 이성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사유성은 말을 돌렸다.
"어쨌든 그 자는 희대의 대마인임에는 틀림없소. 어쩌면 과거 만마지존보다도 더한 대살성인지도 모른다는 것이요."
"그... 그럴 수가!"
"으으... 음!"
팔공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결코 잊지 않았다.
만마지존(萬魔至尊) 백무웅(白武雄).
정도무림인이라면 어찌하여 그 공포스런 이름을 잊을 수 있겠는가? 비록 대마성이 무너진 지 이십 년이 넘었으나 아직도 그때의 공포는 생생히 남아 있었다.
사유성은 담담히 말했다.
"어쨌든 그가 더 크기 전에 그를 제거해야 하오. 그리고 그 일은 우리 일룡구공자가 기필코 해야 하오."
"옳소!"
"물론이오!"
"이미 사가(四家)가 당했소. 그러나 사풍객은 마수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오."
사유성의 말은 단호했다.
팔공자는 자신도 모르게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분노성이 그들을 주체하지 못하게 뒤흔들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그 분노를 아무데서나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무림구대세가의 후예들로서 모두 자부심이 대단했다. 결코 남의 하수를 자처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주제일룡 사유성만은 예외였다.
그는 소림제일의 기재일 뿐만 아니라 천하제일인 천무대선사의 직계제자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었다. 그는 바로 명조의 대원수 사광천의 적자가 아니던가?
결국 신주제일룡 사유성은 모든 면에서 무림구공자들을 능가했다. 무공이나 인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용모도 물론이었다. 심지어는 타고 난 핏줄까지도 그랬다.
자연 일룡은 구공자의 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팔공자들의 시선이 자연히 사유성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사유성의 단아한 입이 열렸다. 이어 담담하면서도 무거운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사풍객에 대해서 그동안 면밀히 연구해 보았소."
팔공자의 얼굴에 기대감이 어렸다.
사유성은 석대세가(石大勢家)의 소가주 다지신호(多智神豪) 석장청(石長靑)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석제(石弟). 다지성(多智星)인 자네에게 식견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네. 어떤가?"
그 말에 석장청이 얼굴을 붉혔다.
석장청은 구공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이제 겨우 이십 세였다. 하지만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석대세가가 전통적으로 지사(智士)를 배출해냈기 때문이었다.
석장청도 뛰어난 지모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가 남의 이목을 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가냘프고 왜소한 체구에 여인처럼 섬세한 용모를 지녔다는 점 때문이었다.
만일 석장청이 여복을 입고 그 자리에서 절세미녀로 분신한다고 해도 감쪽같이 속아넘어갈 정도의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사유성의 질문에 석장청은 약간 얼굴을 붉혔다. 잠시 후 석장청은 입을 열었다.
"소제가 어찌 감히......."
"하하! 다지신호라는 아우의 머리를 인정치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서슴없이 말하게!"
"그럼......."
석장청은 먼저 싸늘하게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순간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차맛이 형편 없었기 때문이었다. 석장청은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여인처럼 붉은 입술이었다.
"소제의 소견으로는 이제까지의 행적으로 보아 사풍객은 남행(南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옳지!"
사유성이 맞장구쳤다.
석장청은 천하절세의 미장부인 사유성을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먼저 산동 악가장에서 시작하여 하북(河北)의 전궁가, 다음은 사천(四天)의 당문, 마지막이 호남(湖南)에 있는 수운보(水運堡)입니다."
"......."
중인들은 숨을 죽이며 석장청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은 예외였다. 그는 바로 남궁세가(南宮勢家)의 유성비천협(流星飛天俠) 남궁신효(南宮神梟)였다. 그의 눈에는 못마땅한 빛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구공자 중에서 가장 무공이 강했다. 뿐만 아니라 지략과 용모에 대한 자부심도 유난히 뛰어난 청년이었다.
석장청의 가냘프면서도 여인처럼 맑은 음성이 이어졌다.
"소제는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사풍객은 구대세가에 복수의 칼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석장청은 일부러 말을 끊었다. 이어 그는 팔공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피는 것이었다. 팔공자의 얼굴에 일말의 공포심이 떠올랐다.
수 년 전 낙양의 북망산에서 그들이 죽였던 한 여인을 불현듯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자의 복수는 완벽할 뿐 아니라 잔혹합니다. 그는 먼저 구대세가를 철저히 멸망시킨 후 마지막으로 우리 구공자를 죽이려 계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석장청의 말이 이어졌다.
"제일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가 다음 번 혈행을 일으킬 행선지를 맞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어디를......?"
중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혹을 풀지 못했다. 사유성이 담담히 웃으며 물었다.
"석제, 자네는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는 것 같군."
석장청은 미소지었다.
"그가 마지막 혈행을 마친 곳은 바로 수운보입니다. 의당 다음 차례는 수운보에서 가장 가까운......."
석장청은 말을 멈추었다. 그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홍의를 입고 있는 화신(火神) 사마고웅(司馬古雄)을 바라보았다.
"그... 그럼 바로 본 벽력장(霹歷莊)이?"
사마고웅은 안색이 시뻘개졌다. 석장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무창(武昌)은 수운보에서 가장 가깝기 때문에......."
"잠깐!"
그 순간 유성비천협 남궁신효가 나서며 석장청의 말을 끊었다. 그는 검미를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의문이 있네."
"......."
"사풍객이 남행했다면 의당 무창 벽력장을 먼저 거쳐야 했을 것이 아닌가?"
남궁신효의 못마땅한 질문에 입을 연 것은 석장청이 아니라 사유성이었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궁형의 말은 한 가지만 생각한 것이오. 비록 남행했다고는 하지만 사천(四川)에서 그는 육로를 택하지 않고 장강(長江)의 수로를 타고 왔을 가능성이 짙소. 그렇기 때문에 무창에 앞서 수운보를 친 것이오. 또 장강의 수로를 타면 가장 가까운 곳이 무창성이니 그의 다음 목표가 벽력장이라는 데에는 내 생각도 동감이오."
"그렇군!"
"옳은 말이오."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남궁신효의 준수한 얼굴이 붉어졌다.
"흥! 하지만 꼭 그렇게 되리란 법이 있소?"
석장청은 남궁신효의 말을 무시했다. 그는 중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는 최대한의 확률에 따라야만 그를 잡을 수가 있지요. 그리고 미리 함정을 파두면......."
"함정이라고?"
중인들의 얼굴에 궁금한 빛이 떠올랐다. 사유성이 불현듯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사유성은 말을 이었다.
"하하! 석제.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맞춰볼까?"
"하하.... 사형님이라면 소제는 손을 들지요."
사유성을 바라보는 석장청의 눈에 흠모의 빛이 역력했다.
사유성은 매력있는 웃음을 입가에 지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찻잔 속으로 뻗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찻물을 찍더니 탁자에 글을 썼다.
-불(火)을 감춘다.
"불을 감춘다고?"
"아니, 그게 무슨 말이요?"
중인들은 그 글을 보고 의혹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뜻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 과연!"
석장청이 사유성을 바라보며 탄성을 터뜨렸다.
"아니 대체 무슨 뜻이기에?"
"불(火)을 숨기다니 그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오?"
칠공자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씩 내뱉았다.
그 순간 사마고웅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도 사유성의 뜻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유성은 낭랑하게 말했다.
"석제, 자네가 말하게."
석장청은 가볍게 포권한 후 입을 열었다.
"불(火)은 바로 사마고웅 형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마형을 감춘다는 것은......."
그 순간 남궁신효가 나섰다.
"흠.... 사마소제를 감추고 사풍객이 사마소제로 화신해 나타났을 때 때려잡자는 것이군."
남궁신효의 느닷없는 설명에 석장청의 미간이 약간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풍객은 이번에도 틀림없이 사마형으로 화신하여 벽력장으로 잠입할 것입니다. 만일 사마형이 애당초 벽력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가면 그 기회에 사풍객은 유유히 벽력장에 들 것입니다. 그때에 그를 잡는 것입니다."
"과연!"
중인들은 탄성을 발했다.
사유성이 부언하듯 덧붙였다.
"우리들은 은밀히 벽력장으로 들어가 미리 준비해야 하오. 물론 극비리에.... 또한 사마형은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오. 사풍객은 치밀한 자이니 어쩌면 눈치챌지도 모르는 일이오. 이번 계책은 극히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오."
그는 말을 멈추었다가 석장청을 돌아보았다.
"석제가 상세한 계획을 세웠으리라 믿는데?"
"소제는 한 가지 방안을 세웠습니다. 사마형이 처음부터 벽력장을 비워둔다면 그 자는 분명 의심할 것입니다. 이번 계획은 우선 사마형이 벽력장으로 들어간 다음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방법은......."
"......?"
사마고웅은 의아해 했다. 자신을 바라보던 석장청이 문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었다.
석장청은 한동안 생각에 감긴 듯했다. 마침내 석장청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석장청은 여전히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사마고웅이 입을 열었다.
"어서 말해 보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잠시 머뭇거리던 석장청이 결심한 듯 붉은 입술을 열었다.
"이 일은 사마형님의 개인적인 사생활(私生活)이나... 일이 일인만큼 공개하겠습니다."
"......?"
석장청은 목이 아픈 듯 식어빠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얼굴을 찡그려야 했다.
식어버린 후아차( 兒茶)는 정말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얼굴을 찡그린 그가 입을 열었다.
"사풍객은 치밀하면서도 심계(心計)가 깊은 자입니다. 그는 일을 벌이기 전에 항상 철저한 조사를 했습니다. 그가 우리 구공자로 화신할 때를 보면 언제나 시간과 상황, 그리고 환경 등을 극히 세밀히 조사한 흔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감쪽같이 우리들 자신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입니다. 성격과 용모는 물론이거니와 음성과 대인관계까지도 말입니다."
그의 말은 유창했다.
"그가 벽력장을 노렸다면 벌써 사마형의 신변도 철저히 조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는 이미......."
약간 흥분한 듯 석장청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런 그의 용모는 어김없이 여인같아 보였다.
"소제도 지난 며칠 간 사풍객의 입장이 되어 사마형의 신변을 상세히 조사해 보았습니다."
"오오!"
중인들은 모두 탄복했다. 사마고웅은 어색한 낯빛으로 되물었다.
"어... 언제 그런 일을?"
석장청은 싱긋 웃었다.
"사마형님께선 약 십 개월 전부터 벽력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천화루(天花樓)라는 기루(妓樓)의 기녀 홍모란(紅牡蘭)과 가까와졌지요."
일순간 사마고웅의 얼굴이 모닥불을 뒤집어 쓴 듯 시뻘개졌다.
"그... 그걸 어떻게!"
"그 뿐만이 아닙니다. 형께서는 삼일에 한 번씩 이경쯤 되는 시각이면 벽력장을 떠나 홍모란을 찾는다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그... 그만 하게!"
"핫핫핫!"
"사마형의 풍류벽은 여전하구려!"
중인들은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석장청은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사풍객은 바로 그 점을 노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히려 그 점을 역(逆)으로 쓴다면 틀림없이 그 자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역으로?"
사마고웅은 눈을 크게 뜨고 석장청을 직시했다.
"사마형께서는 예정대로 홍모란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홍모란과 만리장성을 쌓으세요."
"예끼 이 사람!"
"푸핫핫!"
사마고웅이 손사레를 쳤다. 중인들은 또 한 번 폭소를 터뜨렸다. 조금 들떴으나 여전히 맑은 석장청의 음성이 계속되었다.
"만일 그날밤 사마형이 예상보다 일찍 벽력장으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그가 바로 사풍객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허!"
"그렇지!"
중인들은 무릎을 치며 탄성을 발했다.
사마고웅은 쑥스러운 듯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여보게들. 내가 홍모란과 운우지락을 나누는 동안 자네들은 그 놈을 때려 잡는단 말이지? 그렇게 되면 나만 손해가 아닌가? 그 놈과 고하(高下)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 말에 사유성이 묘하게 웃었다.
"후후.... 사마형의 화문십팔예(火門十八藝)와 벽력참혼강(霹靂斬魂 )이 천하제일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 아니오? 그러나 이번만은 사마형이 양보해야 겠소. 사마형은 그저 꽃 속에 묻혀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이거 왜 이러시오? 사형마저......."
사마고웅은 뒷머리를 긁으며 투정하듯 중얼거렸다. 다시 한 번 장내에는 폭소가 터졌다. 잠시 후 그들은 본격적으로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강호를 공포에 떨게 하고 무림구공자와 구대세가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린 희대의 살성 사풍객을 잡기 위한 완벽한 함정을 파기 시작한 것이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②
반 년 전.
대강남북의 유명한 기루가 일제히 문을 닫았을 때였다. 중원의 내노라 하는 풍류객들은 모두 개탄을 금치 못했다.
......왜 만인(萬人)의 꽃을 누군가 홀로 독점하려 하는가?
그들은 울분의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 불만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중원 각처에서 문을 닫았던 기루들이 다시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빠르면 일 개월 뒤에 늦으면 삼 개월 뒤에 다시 문을 열고 영업을 재개한 것이다.
기루에는 전보다 더욱 많은 손님들이 들끓었다. 기녀들의 솜씨가 세련되게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루들은 풍류객들의 비위를 한층 더 잘 맞추었다.
기녀들의 방중술은 더욱더 능수능란해졌다. 결과적으로 잠시 문을 닫았던 기루는 전보다 수배나 더 영업이 번창되었다.
따라서 자세한 내막을 알 리가 없는 풍류객들은 이렇게 지레짐작을 할 뿐이었다.
...... 새로 기루를 사들인 자는 기녀들을 훈련시켜 더욱 사업을 번창시키려고 일시간 문을 닫은 것이 틀림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즉 그들은 끝내 알지 못했다. 그 사건 속에 깊이 숨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음모를.
홍모란(紅牡蘭).
그녀는 천화루의 일급 기녀였다. 그녀의 몸값은 상상을 초월하리만치 비쌌다. 그녀와 하룻밤 자려면 적어도 황금 일만 냥쯤은 지불해야 했다.
그렇게 비싸기로 소문난 홍모란이 얼마 전부터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돈 많은 공자대부들을 뿌리치고 한 기인과 사랑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 행운아가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많은 풍류객들의 궁금증이었다. 그들은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라도 천화루를 찾았다.
밤이었다.
새삼덩굴 뜯으러
매마을로 갈거나
그 누구를 그리워 하는가
강(姜)씨네 집 큰아기라네
만나자고 한 곳은 뽕밭이라네
상궁(上宮)까지 나는 마중을 나갔네
올 때는 동구앞까지 바래다 주었지
보리를 뜯었네
매마을의 북쪽에서
그 누구를 그리워 하는가
익(翼)씨네 집 큰 따님이라네
만나자고 한 곳은 뽕밭이었네
상궁까지 나는 마중을 나갔지
올 때에는 동구앞까지 바래다 주었네
순무를 뽑았네
매마을의 동쪽에서
그 누구를 그리워 했던가
용(庸)씨네 집 큰 따님이었네
만나자고 한 곳은 뽕밭이라네
상궁까지 나는 마중을 나갔네
돌아올 때에는 동구까지 바래다 주었지
홍모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깔끔하게 정돈된 방으로 들어섰다.
"......!"
한순간 홍모란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이어 그녀는 교태로운 웃음과 함께 볼을 빨갛게 붉혔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웅랑(雄郞), 정말 오늘도 와주셨군요?"
홍모란의 그런 미소 하나만 해도 능히 사내의 넋을 송두리째 빼앗을 만했다. 정말이지 황금 십만 냥을 주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미소였다.
홍모란의 처소에는 한 인영이 있었다. 일신에 불같이 시뻘건 홍의를 입은 청년이었다. 준수하면서도 용맹하게 생긴 청년은 호탕하게 웃었다.
"핫핫핫! 모란아. 내 어찌 너를 놓칠 수 있겠느냐? 이 사마고웅은 결코 노류장화라는 눈으로 모란을 보지 않는다. 너는... 내가 사랑을 느낀 유일한 여인이다."
홍의청년은 바로 화신(火神) 사마고웅(司馬古雄)이었다. 그가 바로 홍모란의 마음을 빼앗은 행운아였던 것이다.
무림구공자 중의 하나인 사마고웅. 그는 홍모란과 삼 개월 전부터 깊은 관계에 빠졌다.
천화루는 삼 개월 전까지는 폐업 상태였다. 그런데 다시 문을 열자마자 사마고웅은 천화루를 찾았다. 그런 것을 가리켜 운명의 만남이라고 하는 것일까? 사마고웅과 홍모란은 첫눈에 서로 반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란. 사흘 동안 내내 너를 생각했다."
사마고웅이 입을 열었다. 부리부리한 그의 눈에는 열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정말?"
"정말이고 말고!"
사마고웅은 자신의 넓은 품으로 홍모란을 와락 끌어 안았다.
"으음!"
홍모란은 그의 품에 안기자 교태로운 신음을 흘렸다.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사흘 동안 밤마다 홀로 지낼 때 베갯잇을 적시며 오직 웅랑만 생각했어요."
"나도 그렇다."
사마고웅은 감동했다. 그는 두터운 입술로 홍모란의 이마며 뺨을 부비다가 작약꽃보다 붉은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으으음!"
홍모란의 몸이 급격히 뜨거워졌다. 그녀는 팔을 올려 사마고웅의 목을 끌어 안았다.
"으음... 침상으로."
홍모란이 재촉했다. 사마고웅은 번쩍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는 서슴없이 침상으로 걸어갔다.
사마고웅의 손은 어느새 홍모란의 옷섶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는 터질 듯이 부푼 그녀의 육봉을 움켜 쥐었다.
"흐응!"
홍모란은 뜨거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콧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그 순간 사마고웅의 뇌리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벽력장에 몸을 숨기고 있을 칠공자와 일룡이었다.
'지금쯤 그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으리라.'
사마고웅은 손을 더듬었다. 그는 터질 듯한 육봉 가운데 맺힌 열매를 손가락으로 비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홍모란의 열매는 어느새 단단해져 있었다.
"아아!"
홍모란이 입술을 벌리고 뜨거운 숨을 토했다. 그녀는 사마고웅의 목을 끌어 안으며 침상 위로 쓰러졌다.
'오늘밤 무슨 수단을 쓰든 이 분을 붙잡아 두어야 해!'
홍모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린 것은 까닭이 있었다.
아침 나절.
홍모란은 한 미공자로부터 뜻밖의 예방을 받았다. 그는 여인같이 가냘픈 체격의 청년이었다.
청년은 다짜고짜로 황금 오천 냥은 나가는 보주 한 알을 내놓았다. 그리고는 이런 부탁을 했다.
...... 사마공자를 오늘밤 낭자의 수단으로 묶어 두시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한 발자국도 낭자의 침소에서 나가지 못하게 해주시오.
미공자의 부탁은 그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그저 석(石)이라고만 말하고 돌아갔다.
'석공자란 분은 왜 그런 부탁을 했을까? 어쨌든 이 분을 붙잡아 두는 것은 쉬운 일이지.'
홍모란은 사마고웅의 애무를 받으며 그의 넓은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아침 나절에 찾아와 사마고웅을 붙잡아 두도록 부탁을 하고 간 여인같은 청년이 바로 무림구공자 중 일인인 석장청이었다는 것을.
사마고웅의 두툼한 입술이 홍모란의 젖가슴을 거칠게 애무했다.
"아아!"
홍모란은 잔뜩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옷섶이 풀어지며 젖가슴이 비어져 나왔다. 그녀는 눈을 감고 사마고웅이 더 적극적인 자세로 나와주기를 기다렸다.
바로 그때였다. 사마고웅의 뜨거운 입술이 젖가슴에서 떨어져 나갔다. 홍모란은 허전함을 느끼고는 눈을 떴다. 그녀의 눈 앞에 기묘한 표정을 지은 사마고웅의 얼굴이 있었다.
"모란. 혹시 오늘 아침 누군가 찾아와 나에 대해서 무엇인가 부탁하지 않았소?"
"......!"
그녀의 길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었다.
"그... 그걸 어떻게?"
엉겁결에 홍모란이 대꾸했다. 사마고웅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훗훗! 그 자는 분명 나를 오늘밤 묶어두라고 했을 테지, 안 그렇소?"
"아!"
홍모란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하며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바로 맞췄어요."
"후후! 과연 무림제일지답군, 석장청."
사마고웅의 두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 빛은 금방 사라졌다.
"비록 그가 내마음을 꿰뚫어 보았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지. 어찌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는가?"
사마고웅은 한 점 허공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두 눈에서는 투지가 반짝였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우... 웅랑. 어디로?"
"모란, 난 가야 해. 벽력장으로."
"왜... 하필?"
"나의 일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 자의 부탁 때문인가?"
사마고웅은 문득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 그것은."
홍모란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이미 사마고웅은 창 밖으로 몸을 날린 후였다.
"대... 대체."
홍모란은 넋을 잃은 채로 사마고웅이 사라져간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③
밤이었다.
벽력장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웬지 모를 긴장감이 질식할 듯한 느낌으로 벽력장을 뒤덮고 있었다.
삼경 무렵.
괴괴한 침묵에 싸여 있는 벽력장으로 날아드는 인영이 있었다. 인영은 유성추월(流星追月)의 신법을 구사하며 벽력장의 높은 담을 날아 넘었다.
스스스.......
인영은 벽력장 내부의 지리에 익숙한 듯했다. 그는 거침없이 몇 채의 전각을 지나서는 한 채의 별원으로 들어섰다.
휙!
별원 안에 내려서는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는 홍의인영. 그는 바로 화신 사마고웅이었다. 사마고웅은 만면에 초조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그는 긴장된 눈빛으로 자신의 처소를 둘러보았다.
"아... 아무 일도 없단 말인가?"
의아심으로 가득 찬 음성이었다. 잠시 멍청히 서 있던 그가 음성을 돋우었다.
"청향(淸香)! 청향! 있느냐?"
잠시 후 안쪽으로부터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한 명의 시비가 나왔다. 그녀는 사마고웅을 보더니 공손히 절을 했다.
"부르셨어요. 공자님?"
지극히 태연한 태도였다. 사마고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차를 끓여다오."
"네."
청향은 즉시 대답하고는 주방쪽으로 걸어갔다.
사마고웅은 긴장이 풀린 듯 의자에 털썩 기대 앉았다. 몹시 긴장된 그의 얼굴이 시간이 흐를 수록 침착한 모습을 되찾았다.
"정녕 아무 일도 없단 말인가?"
사마고웅은 새삼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별다른 낌새는 보이질 않았다.
잠시 후 청향이 두 손에 찻잔을 받쳐들고 사뿐사뿐 걸어왔다.
"드세요, 공자님."
그녀는 찻잔을 내려 놓고 돌아섰다.
"잠깐!"
그 순간 청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왜... 그러세요......?"
그녀의 음성이 약간 떨려 나왔다. 다짐이라도 받듯이 사마고웅의 음성이 굳어졌다.
"장내에 무슨 일이 없었느냐?"
청향은 고개를 숙였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찻잔을 집어드는 그의 눈에 안도의 빛이 흘렀다.
사마고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향을 음미하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는 한 모금 마셨다.
그때였다.
쨍그랑!
그의 손에서 찻잔이 떨어지며 박살이 났다.
"차... 차 속에 독이!"
그는 벌떡 일어나며 분노성을 발했다. 그 순간 청향은 이미 십여 장을 달아나고 있었다.
"청향! 감히 네가!"
그는 열화같은 분노를 일으키며 쌍장을 들었다. 사마고웅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어느새 그의 머리칼은 곤두서 있었다.
"으으!"
사마고웅은 이를 악물었다. 차에 탄 독은 매우 강력했다. 그의 입과 코로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 년을... 쳐 죽이겠다!"
우우웅.......
그의 쌍장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어 장심에서부터 시뻘건 화강(火 )이 뻗었다.
"아악!"
뜨거운 기운이 전신을 태울 듯이 덮은 것을 느끼며 청향은 비명을 질렀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한 가닥 인영이 나타나더니 장력을 쳐냈다.
꽈꽝!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우욱!"
사마고웅은 피를 울컥 토하며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상대방도 두 걸음 물러서고 있었다.
"아니... 남궁형이......?"
사마고웅은 상대를 확인하자 아연실색했다.
휘휙!
사방에서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은 삽시에 사마고웅을 에워쌌다. 사마고웅은 정신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타난 자들을 보는 순간 아연했다.
"사(査)형...! 팽형... 랑형... 수형......!"
그는 비틀거리면서 연신 부르짖었다.
나타난 자들은 바로 일룡과 칠공자였던 것이다. 다음 순간 남궁신효가 앞으로 나서며 싸늘하게 외쳤다.
"사풍객. 이제 너의 긴 꼬리가 잡혔다!"
"사... 사풍객?"
사마고웅의 눈이 휩떠지며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하... 함정이오!"
그는 넋잃은 듯이 중얼거리며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남궁신효가 다짜고짜로 일장을 뻗었다. 그는 사마고웅이 공격을 하리라고 짐작한 것이다.
"살인마! 본 공자의 장을 받아라!"
슈우우웅.......
가공할 장경이 수백 개의 그림자를 이루며 뻗어갔다.
"나... 나는......."
사마고웅은 뭐라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쾅!
"크악!"
사마고웅은 가슴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④
벽력고(霹靂庫).
그곳은 벽력장이 중원에 이름을 떨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벽력장의 독문비법으로 제작한 각종 화기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벽력탄(霹靂彈).
화린폭망전(火燐暴芒箭).
열화비망통(熱火飛芒筒).
염왕화산정(閻王火散釘).
화룡각(火龍角).
등등 일개 성(省)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다는 엄청난 화기들이 벽력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벽력고의 경비는 삼엄했다.
그곳은 오직 벽력장주인 벽력제(霹靂帝) 사마진(司馬塵)만이 임의로 드나들 수 있을 뿐 그 누구의 출입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칠십이열화통천대(七十李熱火通天隊).
그들은 벽력제 사마진이 직접 키운 벽력장의 절정고수들이었다. 그들은 벽력고를 물샐 틈도 없이 수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장주님께서 웬일이십니까?"
어둠 속을 노려보던 칠십이열화통천대의 통령 열화자(熱火子) 진대후(震大侯)는 급히 허리를 숙였다.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나타났다. 서서히 다가온 중년인은 바로 벽력장주인 벽력제 사마진이었다. 일신에 홍포를 차려입고 머리에 관을 쓴 벽력제는 수중에 벽력봉(霹靂棒)을 쥐고 있었다.
벽력봉은 오직 그만이 지니는 신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문에 의하면 벽력봉에는 백팔 가지의 가공할 화기가 숨겨져 있다고 했다.
"음, 아무 일도 없겠지?"
사마진은 침성으로 물었다.
"물론입니다!"
진대후는 힘차게 대답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벽력쌍동도 대동하시지 않으시고 이곳으로......?"
일순간 진대후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벽력쌍동(霹靂雙童).
그들은 사마진을 호위하는 심복이었다. 벽력쌍동은 난장이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일신에 각종 화기와 화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사마진이 가는 곳에는 항상 그들이 그림자같이 따랐다.
사마진은 담담히 말했다.
"그들은 할일이 있어 따르지 못했다."
"......?"
진대후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벽력고의 문을 열어라."
"무... 무슨 일이십니까?"
"꺼낼 것이 있다."
진대후는 웬지 소름이 오싹 끼침을 금치 못했다.
"그런 일이라면 어찌 장주님이 손수......?"
"열라 하지 않았느냐?"
사마진의 음성이 높아졌다.
"네!"
진대후는 찔끔하여 급히 몸을 돌렸다. 벽력고의 문은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그지없이 단단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벽력고 전체는 단단한 오철(烏鐵)로 이루어져 있었다.
파파파... 팟!
한철문 앞에 선 진대후가 십여 줄기의 지력(指力)을 날렸다.
한철문에는 구슬이 서른 여섯 알 박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문을 여는 장치였다. 그것도 매일 그 위치가 바뀌었다.
그 장치는 오직 장주와 진대후만이 열 수 있었다.
그르르릉.......
음산한 굉음을 내며 철문이 좌우로 열렸다.
"곧 나오겠다."
사마진은 차갑게 말하며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철문이 닫혔다. 잠시 후 진대후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예감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사마진이 들어간 지 반식경이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찾으시길래?'
의혹이 짙어진 진대후가 닫힌 철문을 노려보며 중얼거릴 때였다.
휘익!
파공성과 함께 세 가닥 인영이 어둠을 뚫고 떨어져내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들을 본 순간 진대후는 대경실색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장주님!"
그들이야말로 진짜 벽력제 사마진과 그의 수하들인 벽력쌍동이었던 것이다.
"진대후. 아무 일도 없느냐?"
"그... 그것이......"
진대후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사마진의 안색이 홱 변했다.
"설마 벽력고 안으로 누가 들어간 것이 아니냐?"
그는 벽력봉을 휘두르며 외쳤다.
"주 죽을 죄를 범했습니다!"
진대후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 이런 멍청한 것!"
사마진은 노성을 발하며 땅을 굴렀다.
그러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반 척 깊이의 족인(足印)이 찍혔다. 그로 인해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만한 일이었다.
"문을 열어라!"
사마진은 벽력같이 외쳤다.
"아... 알겠습니다!"
진대후는 벌벌 떨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철문 앞으로 다가서며 더듬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그 자가 장주님으로 변장했기에 들여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곧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마진은 분노로 눈썹을 곤두세우며 명령했다.
"벽력고 주위에 칠십이뇌화대진(七十二雷火大陣)을 펼쳐라! 놈이 나타나면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이어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사마진은 오늘따라 웬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직접 벽력장을 순찰하던 중 벽력고에 와본 것이었다. 그는 철문을 노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놈이 감히 내모습으로 변장했다니... 그러나 이제 놈은 독 안에 든 쥐다!'
그르르릉.......
철문이 열렸다.
사마진은 수중의 벽력봉을 움켜쥐며 전신의 공력을 극으로 끌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꽝... 꽈르르릉... 콰콰쾅!
하늘과 땅이 통째로 허물어지는 듯한 대폭음과 함께 열린 문으로부터 시뻘건 불기둥이 터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크아악!"
문 앞에 있던 사람들은 삽시에 불기둥에 휩싸이고 말았다.
꽈르르릉... 꽈꽈꽝!
엄청난 폭발이었다.
벽력고 내부에서 엄청난 대폭발이 연이어 일어났다. 시뻘건 불덩이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 위력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사방 오 리에 이르는 벽력장 전체가 벽력고의 폭발로 인해 모래탑 허물어지듯 무너져 내렸다.
흡사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대폭발이었다.
무림구대세가 중 화기제일세가인 벽력장은 한순간 불지옥으로 화해 멸망하고 있었다.
밤하늘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화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으윽! 저럴 수가!"
"믿을 수가 없다!"
잿더미가 된 벽력장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였다. 몇 명의 청년들이 넋을 잃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들의 모습은 참혹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전신의 옷자락이 갈갈이 찢겨 나갔다. 뿐만 아니라 불에 그슬린 몸의 일부분은 피투성이였다.
속수무책인 듯한 표정으로 불타고 있는 벽력장을 바라보는 청년들. 그들은 바로 신주제일룡 사유성을 비롯한 칠공자였다. 의식을 잃은 화신 사마고웅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벽력장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대폭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화기창고인 벽력고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구사일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사유성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혼절해 있는 사마고웅을 내려다 보았다.
사마고웅은 남궁신효의 장력으로 인해 가슴의 뼈가 드러날 정도의 중상을 입고 있었다.
사유성의 눈길이 석장청에게로 향해졌다.
"석아우, 대체 이게... 그렇다면 이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석장청의 안색은 창백했다. 회의에 찬 눈빛으로 사마고웅을 내려다보던 석장청이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 분은... 진짜 사마형일지도 모릅니다."
"뭣이?"
칠공자와 일룡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소제는... 이 분이 펼쳤던 장법이 벽력세가 독문의 벽력참혼강(霹靂斬魂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중인들은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사유성이 부르짖었다.
"맞네! 아까 펼친 장법은 바로 벽력참혼강이었네. 하지만 어째서 사마형이 도로 돌아왔단 말인가?"
그 말에 석장청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습니다.... 아아!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사유성은 급히 사마고웅의 맥을 짚어 보았다.
"기경칠맥(奇經七脈)이 막히고 늑골(肋骨)이 부러졌네."
그는 품 속에서 급히 하나의 약병을 꺼냈다. 사유성은 그 속에서 눈알만한 단약을 한 알 꺼냈다.
"소환단(小還丹)!"
칠공자는 모두 부르짖었다.
그것은 소림의 대환단과 더불어 무림성약으로 알려진 소환단이었다. 사유성은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마침 내게 소환단이 있었길래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사마형의 목숨은 영영 저승사자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사유성은 곧 소환단의 밀랍을 벗겨냈다. 그는 즉시 소환단을 사마고웅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어서 그는 진기를 끌어 올려 손바닥을 사마고웅의 백회혈(百會穴)에 갖다 붙였다.
우웅!
괴이한 음향과 함께 사유성의 몸이 은은한 서광에 감싸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그의 이마에는 세 개의 고리(環) 모양의 백색 기체가 떠올랐다.
"아! 천화지극신경(天花至極神境)!"
"오... 사형이 저런 경지에 이르렀을 줄이야!"
그 모습을 바라본 칠공자는 모두 탄성을 발했다.
사유성의 모습은 전설로나 볼 수 있는 천화지극신경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내공이 삼백 년은 넘어야 이를 수 있는 경지였다.
스스스.......
사유성과 사마고웅의 몸이 눈부신 서광에 가려졌다. 칠공자는 두 사람을 엄중히 호법했다.
그 와중에서 남궁신효의 일그러진 얼굴에 갈등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존심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다. 남궁신효는 자신이 구공자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룡에게도 양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는 어쩔 수 없이 일룡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석장청의 표정은 야릇했다. 그의 얼굴에는 존경과 흠모의 빛이 역력히 떠올랐다.
이윽고 서기가 걷히더니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유성이 약간 창백한 얼굴로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사마고웅의 등을 향해 부드러운 일장을 가했다.
"으웩!"
그 순간 사마고웅은 시커먼 핏덩이를 토해냈다. 이어 사마고웅은 몸을 부르르 떨다가 눈을 떴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사마고웅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안색이 변했다.
"여... 여보게들... 왜 이러는가? 왜 나를......?"
잠시 한숨을 내쉬던 석장청이 그를 향해 다가가며 물었다.
"사마형, 왜 천화루에 계시지 않고 돌아오셨습니까?"
"천화루라니?"
사마고웅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천화루라니 대체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는 것인가?"
사마고웅이 재차 반문했다. 그의 반문에 이번에는 중인들이 오히려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석장청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사마형은 그럼 홍모란을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호... 홍모란! 자네가 그녀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너무나도 뜻밖인 사마고웅의 말에 석장청은 고개를 흔들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럼 사마형은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그 말에 중인들은 모두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 점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사마고웅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통첩을 받고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악양루(岳陽樓)에 갔었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지. 대체 그대들은 왜 나타나지 않은 것인가?"
"......!"
그 순간 중인들은 모두 아연해지고 말았다.
"모임 장소가 악양루였다고?"
남궁신효가 물었다.
"그렇소! 바로 여기......."
사마고웅은 품 속에서 한 장의 천을 꺼냈다. 재빨리 그것을 받아 읽어본 남궁신효는 분노성을 질렀다.
"놈의 장난이야!"
그는 천을 홱 집어 던졌다.
중인들은 급히 천을 읽어 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악양루로 모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끝에는 일룡의 서명까지 날인되어 있었다.
사유성은 글씨를 보고 눈썹을 떨었다.
"으으... 감쪽같이 내 글씨를 흉내내다니......!"
중인들을 번갈아보던 사마고웅이 놀라 외쳤다.
"그렇다면 내가 속았단 말인가?"
석장청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사마형, 우리는 악양루가 아니라 악양의 천로잔(天路棧)이라는 객점에서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사풍객이!"
사마고웅은 안색이 창백해져 부르짖었다. 석장청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아...! 그 자는 사마형으로 변신하여 천로잔에서 우리들과 회합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사풍객을 잡기 위한 계책을 상의......."
그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그럼!"
사마고웅은 불길한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남궁신효가 침중하게 말했다.
"뒤를 보게."
그 말에 사마고웅은 비로소 자신이 있는 곳이 낯익은 장소임을 깨닫고 뒤로 돌아섰다.
찰나지간.
"으악!"
그는 처절하고 구슬픈 비명을 내지르며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럴 수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쿵!
끝내 사마고웅은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입과 코로는 검은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아 기혈이 역류해 혼절한 것이다.
"아아!"
장탄식을 토해내던 사유성이 떨리는 음성으로 뇌까렸다.
"간신히 맥을 터 놓았는데... 이젠 틀렸소. 역혈하여 주화입마(走火入魔)했으니... 폐인이나 다름없는 몸이 되었소."
"으으......!"
칠공자는 모두 절망적인 신음을 발했다.
화신 사마고웅.
무림구공자의 일인이자 앞날이 찬란했던 젊은 영웅 한 명은 그렇게하여 영원히 무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사유성과 칠공자는 모두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서서히 그 허탈감은 무서운 증오로 변해갔다.
"으으... 사풍객! 그 놈을 천참만륙하리라!"
"사풍객! 네 놈을 천 토막 내어 개먹이로 주겠다!"
"으드득! 교활한 놈! 죽을 때까지 네 놈을 괴롭히겠다. 잡아도 쉽게 죽이지는 않겠다!"
칠공자는 이를 갈며 통분을 금치 못했다. 한편 하늘을 올려다 보는 신주제일룡 사유성의 표정은 무척이나 괴이쩍었다.
'사풍객, 그 자는 잔혹할 뿐 아니라 교활무쌍하다. 어쩌면 과거의 만마지존 백무웅보다도 몇 배나 더 무서운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유성의 깊은 눈에서 번쩍 이채가 떠올랐다.
'놈이 강하면 강할 수록 나 사유성의 투지는 끓어오른다. 후후... 놈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유성의 야심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될테니까!'
사유성은 분노에 몸을 떠는 칠공자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들은 이제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구대세가는 기울어가고 있다. 남은 것은 저들을 이끌어들여 나 사유성이 얼마나 무림에 필요한 존재이며 태양인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내심 중얼거리는 사유성의 눈에서 엄청난 야심의 빛이 흘러나왔다.
신주제일룡 사유성.
그에게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位)를 가지고 있는 부친이 있었다. 뿐인가? 그는 천하제일인의 사부를 둔 당금 무림의 후기제일인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사유성은 고작 무림구공자를 이끄는 일만으로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일룡팔공자가 있는 언덕에서 일 마장쯤 떨어진 곳이었다.
파파팍.......
땅이 갈라지면서 흙덩이가 터져 올랐다. 이어 두더지처럼 움푹 튀어나오는 인영이 있었다. 그는 홍포를 입은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다름아닌 벽력장주 사마진이었다.
"후후후!"
사마진의 입에서 뜻밖에도 섬뜩한 괴소가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그의 얼굴이 변화를 일으켰다.
스스스.......
서서히 변해가는 얼굴. 그것은 바로 백천강의 얼굴이었다. 완전히 자신의 얼굴로 되돌아온 백천강은 중얼거렸다.
"잠종지행술(潛踪地行術)을 익혀둔 것이 이토록 요긴하게 쓰여질 줄은 몰랐군."
백천강은 사마진으로 분신하여 벽력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의 화기에 불을 지른 후 잠종지행술로 지하(地下)로 파고 들어 탈출한 것이었다.
그는 폐허가 된 벽력장을 내려보며 차디찬 미소를 지었다.
"다섯 번째. 이제 구대세가 중 다섯 번째가 무너졌다."
백천강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는 정녕 끔찍한 것이었다. 뒤이어 그의 냉혹한 음성이 이어졌다.
"구공자. 기다려라. 너희들의 차례는 아직 멀었다. 너희들의 뿌리를 철저히 끊어버린 후... 마지막으로 너희들을 철저히,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죽여 주리라."
백천강은 불꽃이 스러져가는 벽력장을 냉혹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눈에서 시퍼런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백천강의 뇌리에 환영처럼 떠오르는 여인이 있었다. 자신이 만든 아홉 자루의 검이 전신에 꽂힌 채 참혹하게 죽은 여인이었다.
시퍼런 백천강의 눈빛이 시뻘겋게 타오른 것은 그 직후였다.
"으아아악!"
백천강은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같은 장소를 터뜨리며 몸을 날렸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져갔다.
그가 사라진 직후였다.
스스스.......
그 자리에 한 가닥 인영이 흡사 유령처럼 내려섰다.
혈무(血霧). 그것은 한 덩이의 피안개와도 같았다. 나타난 인영은 핏빛 안개에 감싸여 있었다.
혈무가 나타나자 주위는 갑자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사악한 기운으로 물들었다. 뒤이어 혈무 속에서 하나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음성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궁량하고 음산한 음성이었다.
"백천강. 놈은 천고제일마(天古第一魔)임에 부끄럽지 않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온갖 마성까지도 갖고 있다. 비록 혈정단의 힘이 컸다고는 하지만... 후후후! 놈은 기대 이상으로 잘 해내고 있다."
스스스.......
또다시 혈무인의 등뒤에서 솟아나듯 사인의 혈영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중년쯤의 인물이었는데 눈빛이 핏빛이었고 전신에서 사기(邪氣)가 넘치고 있었다.
땅바닥에 부복한 사인의 혈영 중 하나가 괴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주상. 어이해 호환(虎患)을 기르십니까? 놈은... 상상 밖으로 강해졌습니다. 그대로 두면 놈은 거꾸로 물려 덤빌 것이옵니다."
그 말에 혈무인이 예의 으시시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희들은 모른다. 놈은 마의 화신이 되었다. 그러나 놈은 혜성(彗星)일 뿐이다. 혜성은 한 번 나타남으로 만인을 경악케 하지만 나타났다가는 곧 스러진다. 하지만......."
음산한 웃음이 흩어졌다.
"적미성(赤眉星)은 다르다. 적미성은 영원하다. 흣흣! 영원히 그 붉은 빛을 천중(天中)에 뿌리게 될 것이란 말이다. 흐흐흐... 흐하하하핫!"
혈무인의 음산한 웃음이 끊어질 듯 하다가 끝없이 이어졌다.
사풍객.
그 이름은 이제 하늘 아래 가장 무섭고, 잔혹하고 피비린내나는 공포의 이름이 되었다.
무림구대세가의 멸망(滅亡).
무림사 이래 다시 볼 수 없는 참혹한 혈사가 그의 이름 앞에서 이어졌기 때문이다.
수운세가(水運勢家), 전궁세가(電穹勢家), 악씨세가(岳氏勢家), 당문세가(唐門勢家), 벽력세가(霹靂勢家), 신창세가(神槍勢家), 진천세가(震天勢家), 남궁세가(南宮勢家).
혁혁한 이름으로 빛나던 팔대세가는 이제 무림에 그 존재를 찾을 길이 없었다. 무림구대세가에서 유일하게 남은 것은 석대세가 하나뿐이었다.
잔혹하고 공포스러운 이름인 사풍객이 팔대세가의 이름을 중원무림에서 말끔히 지워버린 때문이었다.
사풍객의 음험잔독한 계략과 치밀한 독계 그리고 무서운 살수에 의해 팔대세가는 차례로 무너진 것이다.
특히 구대세가 중 가장 강하다는 남궁세가는 더욱 철저히 궤멸되었다.
천의 얼굴을 가졌다는 사풍객이 하룻밤 사이에 무려 십인의 신분으로 변화하여 남궁세가의 가주와 가신들을 일거에 베어버린 것이다.
사풍객.
그 이름은 이제 하늘 아래 가장 공포스럽고 저주스런 이름이 되었다.
불혼애(佛魂崖).
소림제일의 금역 불혼애는 동풍(冬風)에 흔들리고 있었다.
휘이잉... 위잉......
불상(佛像).
새기다만 불상은 여전히 푸른 이끼에 덮여 있었다. 부처는 새겨졌으되 염화시중의 미소만은 새겨지지 않은 상태의 불상을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불상 아래에 한 인영이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장발에 낡을 대로 낡은 회색승포를 입은 인영. 그는 바로 천하제일인 천무대선사였다. 천무는 멍하니 바닥에 놓여 있는 정과 망치를 내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새기려 해도 되지 않는다. 아아! 내 마음에 아직도 떨치지 못한 연(緣)이 있음이리라."
참회하듯 중얼거리는 천무대선사는 부쩍 늙은 모습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긴 머리는 반백으로 물들어 있었다.
얼마나 심중의 고통과 번민이 컸으면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닌 그의 머리가 벌써 희어지겠는가?
"아미타불.... 내 마음에 아직 버리지 못한 념이 있음으로... 불상을 완성시키지 못했다. 속세의 티끌을 이토록 버리지 못해 연연하다니. 과거에는 살(殺)과 색(色)을 끊지 못해 법륜(法輪)을 얻지 못했거늘, 이제는 정(情)을 두고 이토록 시달릴 줄이야......."
중얼거리는 천무의 눈빛이 뽀얗게 흐려졌다.
뒤이어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인영이 있었다. 바로 냉혹한 눈빛을 지닌 아이였다.
시작과 끝이 없는 중얼거림이 천무의 입에서 끊이질 않고 계속되었다.
'천강.... 내 아들. 아들이라 부를 자격도 없건만 핏줄임이 분명한 아들아.... 같은 하늘을 이고 있음에도 유독 너의 하늘이 그토록 붉고... 못난 아비의 하늘이 회색임은 왜이더냐? 아아! 아미타불.... 부처님께서도 길을 일러 주시지 아니하시니 정녕코 이 천무는 영원히 업에서 헤어나지 못한단 말이냐? 천살(天殺)의 저주가 너에게 떨어졌음은 업보이런가? 이제 또 얼마나 많은 피로써 업을 씻을 것인가? 천강.... 아들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아들아.......'
천무대선사의 눈꼬리로부터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번져내렸다. 문득 그는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아아... 유성(流星), 그 아이는 욕(欲)이 너무 크다. 구중천이 무너지는데 그 아이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한꺼번에... 너무 한꺼번에 그 아이는 모든 것을 얻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얻게 해 주리라. 너의 뜻이 정녕 그럴진데 아무도 막을 수는 없으리라. 내 너에게 얻게 해 주리라. 아미타불......."
천무대선사는 눈을 감았다.
휘이윙!
겨울을 재촉하는 추풍이 반백의 머리칼과 낡은 승의를 어지럽게 휘날렸다.
- 다음 권에 계속 -
첫댓글 잼 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굿,,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