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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 누군지 아시죠?"
"결국 해내고 마셨군."
20년 가까이 지속된 회장님과의 대결에서 아버지가 승리를 거둔 것이다.
영화에 대한 그 맹목적인 사랑과 염원에 대해 존경스러우면서도 씁쓸했다.
'그 정도면 편집증이 아닐까'
30년 이상을 곁에 없는 한 여자에 대한 사랑과 추억으로 살아가는 삶은 아무리 생각해도 숨막힌 절망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이미 알고 있지만, 그렇게 30년이나 지속된다면.........
"쉬잇!"
못마땅했다.
오늘 구경한 이곳 <씨네시대 영화제작센터> 내의 영화 박물관이나 촬영장은 엄청났다. 상상하기 힘든 거금이 밑없는 독에 물 붓기로 들어가고 앞으로도 더 들어가면 더 들어가지, 덜하지는 않을텐데, 회장님의 속이 얼마나 아렸을까 생각하면 웃음이 났다.
'자식 앞에 장사 있나.'
그런데 아직 반도 못 지었다면서 앞으로의 제작 방향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주는 아버지의 가슴 밑바닥에 고인 건 편집증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진단했다.
아버지가 경영 전반을 부사장에게 맡기고 간신히 회장님 재가를 얻어 영화 제작 센터 설립에만 2년 가까이 매달리고 한달에 열흘 이상을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날 강제로 귀국시킨 건가.'
곧게 뻗은 4차선 도로 좌우로 깊은 숲이 우거졌고, 10미터마다 유명 디자이너에게 의뢰해 만들었을 법한 가로등이 환히 밝혀진 이곳 자체가 영화의 한 장면같이 고적하고 분위기 있었다.
둥글게 우회전 해서 멀리 보이는 정문을 향해 가는데, 갑자기 흰 옷 입은 사람이 숲에서 뛰쳐 나와 10미터도 안되는 전방에 뛰어들었다. 정신없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기기기기---익"
찢어지는 바퀴의 마찰음과 함께 온 몸이 앞으로 왈칵 쏠렸다. 안전 벨트를 매지 않았다면 앞 유리를 들이받았을 것이다. 가슴이 쿵덕거리는데 숨도 못 쉬고 간신히 고개 들어 앞을 보았을 때, 아무 것도 없었다. 헛 것을 보기라도 한 듯, 가로등 아래 탄탄한 도로만 천연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순간 소름이 쪽 끼쳤다. 그러나 조수석 쪽 도어가 덜컥거려 휙 돌아봤더니 웬 여자가 미친 듯이 주먹으로 창문을 두들기며 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열어줘요, 열어줘요"
밀폐된 창밖에서 작게 들리는 소리가 다급했다.
급히 도어 잠금 장치를 풀었다. 풀자마자 차문이 왈칵 열리더니, 짧은 속옷 차림의 여자가 맨 발로 뛰어들어와 문이 부서져라 쳐닫았다.
"가요!"
숨찬 소리로 명령하곤 자신이 뛰쳐나온 숲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놀란 마음을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자 내게 고개를 돌리더니,
"빨리 가요!"
하고 화를 내듯 재촉했다. 얼른 엑셀을 밟았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다시 자신이 왔던 쪽을 온 몸이 돌아가도록 응시했다. 정문을 빠져나와 차가 정상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자 그제야 바로 몸을 돌리고
"휴우 ~ "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두 다리를 의자 위에 올리고, 무릎 위에 얼굴을 묻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나쁜 새끼"
하고 짜증스럽게 내뱉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발은 흙 투성이고, 지금 하고 있는 자세로는 흰 허벅지에 엉덩이 일부분이 드러났고, 거의 팬티까지 내보일 것 같다. 이 정도면 성폭행을 피해 도망나온 여자란 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영화 제작센터에서? 어떤 놈이? 아버지의 '성역'이 완성도 되기 전에 종기로 곪고 있군.'
10분을 달려도 잠이 들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길가에 차를 세웠다. 차가 서자마자 그 여자는 화들짝 고개를 들고 놀란 얼굴로 물었다.
"왜 서요?"
"어디에 내려주면 되요?'
"아!'
그제가 정신이 들기라도 한 듯한 감탄사였다.
"죄송해요. 일산까지 좀 데려다 주실 수 있으세요?"
세련된 화장 밑으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앳된 얼굴과 소녀티가 남아있는 목소리로 사정하듯 말했다. 잔 게 아니라 울고 있었는지 어둠 속에서 눈가가 반짝했다.
차가 다시 달리자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수습하고, 발을 내려 놓고 속옷을 최대한 끌어내려 다리를 가리려 했다.
"저, 핸드폰 있으시면 빌려 주세요."
주머니에서 꺼내 주었다. 급히 번호를 누르더니,
"엄마? 나야!"
하곤 그제야 설움이 북받친 듯 울먹이는 소리가 되었다. 통화감이 참 좋은 전화기를 통해,
"너, 우니?"
심상찮아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 부장 나쁜 새끼가, 그 감독이라는 사람 옆에 날 혼자 두고 가 버렸어. 그 놈이 갑자기 나한테 덤벼들어서 옷 벗기고......."
내가 듣는 것도 아랑곳 없이 그애는 울먹거리고 전화에선 금세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 너 그래서, 어디야? 무슨 일 있었니?"
"아냐, 괜찮아. 아빠가 가르쳐준 대로 발길로 그 자식 거길 후려차고 도망나와서 지금 어떤 분 차 얻어타고 집에 가고 있는 중이야."
나는 웃음이 나올 뻔 했다.
"너, 정말 아무 일 없지?"
"응, 엄마 안심해. 집 가까이 가서 다시 전화할게. 나, 속옷만 입었으니까 옷 좀 준비해 놓고 있어."
그리곤 끊었다.
"저기 뒤에 걸린 코트 입고 있어요."
그애는 뒤로 몸을 기울이고 팔을 뻗어 코트를 끌어내더니 입었다. 바바리라서 앉은 그애의 발까지 가리고도 남았다. 그리고 나는 운전을 계속 했고 그애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망설이듯 물었다.
"저, 누군지 아시죠?"
'아는 사람이었나?'
아까 봤을 때, 처음 보는 얼굴이었던 것 같아 확인하기 위해 그애의 숙인 옆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생각나지 않는다.
"글쎄요, 어디서 뵈었지요?"
그러자 그애는 고개를 들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 보았다. 내가 의당 알아야 할 사람을 못 알아본 모양이었다. 오늘 영화 제작 센터에서 보았을 텐데, 직원인가? 아버지를 따라다니다 만난 사람인 것 같은데, 아버지 외엔 누구에게도 신경쓰지 않았기에 기억이 없다.
"기억이 안 나네요. 아까 뵈었나요?"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애를 힐끗 보았다.
그 앤 어이없다는 빛이 되더니,
"아, 아니예요. 제가 잘 못 알았나봐요."
했다.
집 가까이 왔는지 다시 전화를 하곤 돌려주었다. 빌라 앞에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옷가지를 갖고 서 있었다. 딸이 무사한지부터 다급하게 확인하려는 부모에게 그애는 괜찮다고 말하고 옷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코트를 벗어 아까처럼 뒷편에 걸어두고 제 옷을 입고 신을 신었다.
"정말 감사했어요. 명함 한 장 주세요. 사례하고 싶어요."
"명함 없어요."
"그럼, 성함과 전화번호라도."
"괜찮아요."
차문을 열고 내리자 부모는 귀중한 보물이 돌아오기라도 한 듯 그애를 감싸안고 내게 연방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그 곳을 떠났다.
<세한도> 2.법률상 모녀지간
2. 법률상 모녀지간
관장님이 안 계신다고 하면서도 비서는 관장실의 문을 열고 안내했다. 무슨 차를 드시겠냐는 질문에 커피를 달라고 했다. 소파에 파묻혀 방을 둘러보니 한달 전 왔을 때하고 달라진 게 없다. 선배님이 수집한 진품 서양화들이 볼만하게 걸려 있지만 이 방에 들어오는 사람의 눈길을 가장 끄는 것은 아마도, 사무용 책걸상에 앉으면 마주 바라보이는 대형 <세한도(歲寒圖)> 모사품일 것이다. 수많은 진품, 명품들을 제쳐두고 예술을 사랑하신다는 내로라하는 미술관 관장님 방을 장식한 게 모사품이라니. 같은 크기도 아니고 버티칼용도 아닌, 정말 그림으로서 그린 몇배 크기의 <세한도>. 나는 한국의 전통이나 미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지만, <세한도>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선배님에게 무슨 저게 취미시냐고 웃으며 물어 보았었다. 그랬더니 짧게,
"진품 크기엔 내가 들어갈 수 없더라"
하고 대답했었다.
겉으로는 웃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선배님을 춥게하는 것.......'
막연히 그림을 바라보는데 비서가 커피와 비스킷을 가지고 들어왔다.
"관장님 곧 들어오신다고 하셨어요."
비서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크지 않은 키에 예쁘다기 보단, 지적인 매력이 있어 끌린다.
나도 마주 웃으며,
"고마워요, 나 기억하고 들여보내줘서."
했다.
친절한 미소를 띤 얼굴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갔다. 좀 더 얘기를 해도 괜찮으련만.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날 누구라고 알고 있을까.'
언뜻 생각하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기대어 <세한도>를 보았다.
'나도 저 그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 것도 견디는 것이 없으니까. 무엇에든 내 지조를 세우고 있는 게 없다. 그런 생각을 별로 심각하지 않게 하다 보니 졸음이 밀려 왔다. 하품을 하고 눈을 감았다. 온 사위가 고요하고 적당히 어두웠고 소파는 포근했다. 정신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기분좋게 오락가락하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정말 편안하게 잤다.
어느 정도 의식이 깨어났을 때, 선배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프랑스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뭉크의 그림 몇 점을 구입하는 결재를 올리라고 말하고, 그밖에 몇가지 지시 사항을 내리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대할 때완 다르게 결단력 있고 권위가 실린 목소리였다. 난 눈을 감은 채로 그 목소리를 즐겼다. 명을 받은 사람이 나가는 문소리가 나자, 눈을 뜨고 살며시 몸을 돌려 선배님을 바라보았다. 노트북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업무 중의 선배님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에 보던 것과 다르게 좀 날카롭고 단단한 이미지가 풍겼다.
"멋있다......, 선배님."
난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내 소리에 선배님은 얼른 눈길을 주었다.
"깼구나."
마주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이야, 진짜 권위있는 미술관장님 같아요,"
"새삼 멋있을 게 뭐가 있니?"
쑥스러운 표정으로 옆 소파에 앉았다.
"그냥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와 달라요."
"너도 직장 일 하면서 안 그래?"
"저야 뭐 사이비죠."
장난스레 말했지만 사실이다.
"그런데 너 지금 회사에 있어야 하지 않아?"
선배님이 시계를 보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시계를 보았다. 네시가 넘었다.
"두 시간이나 잤네."
"들어오니 자더라. 아주 편하게 자고 있어서 깨우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얘기하며 나를 보는 선배님의 눈길이 따뜻했다. 그래서 어리광을 좀 부려보고 싶었다.
"밤에 통 잠이 안 와요. 서울 온지 석달이나 됐는데, 시차 극복이 안되요. 밤에 맨정신으로 말똥말똥 있다가, 그러다가 술마시고, 취할 무렵이면 출근 시간이예요. 출근해서 졸다가 슬쩍 빠져나와 자고 그러면 또 밤 새우고...... 피곤해 죽겠어요. 어떡해요?"
"그거 심각하다. 사람이 밥하고 잠이 보약인데. 병원에 가 봤어?"
선배님은 내 의도대로 걱정하는 표정이다.
"싫어요, 병원 가긴."
"애기 같이, 내가 같이 가 줄까?"
"싫어요, 병원 안 가요."
"그댔쪄? 어이구 우리 홍주 젖 줘야겠다."
선배님은 갓난아이 어르듯 말하고 웃었다.
"언제 퇴근하세요?"
"여섯시에."
"관장님인데 좀 일찍 퇴근해도 되잖아요."
"너 회사 들어가야지."
"지금 퇴근 시간이라서 가 봤자 소용없어요. 혹시 회사나 회장님한테서 전화 안 왔어요?"
"응"
"오전 내내 머리 쥐나게 일 시켜 놓고, 오후에 경영 전반에 관한 임원 회의가 있는데, 저보고 참관인으로 참석하래요. 그래서 점심 먹는다고 나와서 여기로 도망온 거예요."
나는 의기양양한 악동처럼 고개를 까딱까딱했다.
"뭐? 또 얼마나 꾸중 들으려고?"
선배님은 곤란하다는 표정이다.
"저요, 그 조선 호텔 양식당의 스테이크 먹고 싶어요. 어차피 회장님한테 혼날 거 반성하는 표정 잡고 꿋꿋이 벌 받으려면 배가 든든해야 하는데, 아직 점심도 못 먹었어요. 지금 나가서 스테이크 사 주세요, 네?"
난 선배님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고 싱긋이 웃었다.
"안 돼, 얘. 근무 중에 여기 온 것도 안되는데, 안 들여보내고 다른 데 데리고 간 거 할아버지 아시면 나까지 꾸중들을텐데."
그녀는 내게서 멀어지면 거절했다.
"제가 이런 아쉬운 소리 할 수 있는 사람은 한국에 선배님 말고 없어요. 친구도 없고 외톨이예요. 게다가 대리 월급, 밑이 보여서 집세랑 차 유지비 하다 보면 이주일도 안 가요. 그래서 맨날 스테이크 생각하면서 선배님 만날 일만 별러 왔단 말예요, 네?"
나는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나를 강적이라는 듯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내 볼을 꼬집었다.
"그래 가자. 대신 너 여기 온 거 할아버지께 말씀드리면 안돼."
10년 넘게 미국에 있으며 본가에서 부쳐 주는 돈으로 흥청망청 잘 살았다. 그런데 6개월 전 갑자기 귀국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내가 불복하자 생활비를 뚝 끊어 버렸다. 내가 쪼들리는 걸 알고 선배님이 몰래 생활비를 보내 주었다. 그 돈으로, 나이가 들자 사치 향락에 허망함을 느껴 규모가 작아진 내 생활은 어느 정도 감당이 되었다. 그러나 수상하게 여긴 회장님의 조사로 발각이 되었고, 생활비가 완전히 뚝 끊기자 난 어쩔 수없이 한국에 끌려와야 했다.
귀국 후에도 선배님은 나의 물질적, 정신적 후원자였다. 물질적으론 신세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정신적으로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 생모에 관한 얘기 외엔 난 무엇이건 숨기지 않았다. 타인에게 최후까지 비밀이어야 할, 내가 이반이라는 사실조차 그녀는 알았고, 미국 시절 내 연인이었던 카미유를 만나 참 잘해 주었다. 그녀가 나를 보살펴 준 것은 어렸을 때 부터였지만, 내가 마음을 연 것은 미국에 있을 때 그녀가 자주 여행이나 출장을 빌미삼아 와서 내게 허물 없이 대해 주었을 때부터였다.
그녀는 내 고등학교 선배였기 때문에 선배님이라 부르지만, 법적으로 따지면 우린 모녀지간이었다. 아버지가 가족의 허락과 축복을 받고 정식 결혼한, 아버지의 법률상, 사실상의 아내였다. 하지만 나와 열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다, 어려서 처음 만났을 때 껄끄럽고 어색해서 '아줌마'라 부르다가 미국에서 친해지며 '선배'라고 부르겠다고 하자 그녀는 흔쾌히 동의했었다. 어쨌든, 매사에 무심하고 삐딱한 나는 선배님 앞에서만은 달라져 조카나 어린 동생이 된 듯 철없이 굴었다. 그런 나를 정말 조카나 동생처럼 받아 주는 선배님께 나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테이블에 날라져 온 스테이크를 말 한마디 없이 접시가 파이도록 칼질을 하고 삼분의 이쯤 허겁지겁 먹어치운 다음에야 숨을 돌렸다.
"맛있어요. 미국에선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먹었는데, 여기선 저번에 선배님이 사주신 뒤로 처음이예요."
"내 거 더 먹어."
하며 선배님은 썰어 놓고 아직 한 점도 먹지 않은 고기들을 반은 건네 주었다.
"넵."
나는 기꺼이 받았다.
"재현이랑 재우 잘 있죠?"
"응. 왜 집에 안 오니? 할아버지가 일요일마다 기다리시는데."
"회장님이 절 기다려요? 요즘 한국에서 허위 사실유포죄 그거 심각한 처벌 받던데요."
회장님이 날 얼마나 못마땅해하는지 난 익히 알았다. 일곱 살 때 아버지와 함께 본가에 살러 갔을 때 회장님은 한 달을 나를 보지 않았다. 자기가 데려오라 했으면서. 그리고 나의 존재를 비밀에 붙이고 싶어 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또 이번에 억지로 귀국시켜서 회사 업무를 맡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영화 센터에만 신경 쓰고 재현이 재우가 아직 어려도, 작은 아버지들이 둘이나 있고, 회장님 자신도 아직 정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늙으면 핏줄에 이끌린다더니, 그 때문인가 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나는 '닭갈비' 신세인 모양이었다.
"허위 사실 아냐. 왠만하면 일요일에라도 집에 와라."
"회사에서 회장님 보는 것만도 바위에 찍히는 것 같은데, 집에서까지 봐야 한다면 차라리 미국으로 돌아가 거지로 살겠어요. 아니, 뭐 M.B.A도 있으니, 당장은 어려워도 차차 취직하면 되죠."
"언제까지 할아버지 피하고 사니? 할아버지 밑에서 경영 수업 받고, 사업 물려 받으면 집안에서 네 몫도 다 하고 가족의 일원이 완전히 되는 건데. 너 아까 돈에 쪼들린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면 너 원하는대로 풍족하게 살 수도 있고."
"저, 돈 안 쪼들려요. 사실은 자동차하고 유지비는 회사에서 나오고, 오피스텔도 제 이름으로 되었더라구요. 그리고 월급 외에 미국에서 받던 생활비만큼 통장에 입금되고 있구요. 아까 죽는 시늉한 건 선배님하고 같이 있고 싶어서였어요."
내가 일부러 뻔뻔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자, 선배님은 어이없는지 웃어 버렸다.
"할아버지가 그만큼이나 배려해 주시는데......"
"그건 시대가문 핏줄이니까 품위 유지는 시켜야겠다는 의도시겠죠."
그러면서 속으로
'재현이나 재우에 대한 애정 표시와는 전적으로 다른 거예요.'
하고 덧붙였다.
"그리고 제 생활 아시잖아요."
그 말과 함께 지금까지 들떴던 표정을 지우자 그녀는 잔잔히 미소지었다.
"사귀는 사람 생겼어?"
"아뇨."
"그럼, 연락 와?"
씹고 있던 고기 맛이 싹 달아났다. 그러나 선배님이 미안해 할까봐 포크를 내려 놓진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결혼했어요, 저랑 헤어지게 만든 그 남자랑. 벌써 이년 넘었는데, 얘기 안 했죠? 그래서 제가 그 난리를 쳤던 거예요."
내가 의도적으로 바라본 선배님은 망연한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많이 잊었어요. 헤어졌을 때처럼 미치도록 그립거나, 밉지 않아요. 아직도 하루에 몇번씩 생각하지만 견딜만 해요. 죽을 듯이 영원히 사랑하고 고통스러울 것 같았는데, 시간이 해결해 주네요."
나는 씨익 웃고는 접시에 남은 고깃점들을 연속적으로 해치웠다. 그리고 포도주잔을 비우자 선배님은 한잔을 채워 주었다.
"아, 살 것 같아요."
나는 환해진 표정으로 매너없이 두 팔을 쫙 뻗어 기지개를 켰다.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선배님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는 얼른 선배님의 손에서 라이터를 빼서 불을 붙여 주었다. 연기를 반은 머금고, 반은 세차게 내뿜는 그 모습이 좋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내가 담배 피우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너 뿐이야. 그래서 네 앞에서 피우는 담배맛은 유난히 좋고 편해."
<세한도> 3.기억나네요.
3. "기억나네요."
내가 도착하자마자 아버진 이제 막 완성되었다며 <씨네시대 영화제작센터> 홍보 비디오를 보여 주었다. 정문부터 시작해서 제작소의 각 부분을 아마도 한국의 유명 배우인 듯 싶은 사람들이 안내, 설명하고 한 무리의 가수들이 부른 로고송에 문화부 장관의 축사까지 곁들인 20분이나 되는 필름이었다. 내내 매우 흡족한 듯, 저 사람이 흥행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영화 무엇을 만든 감독이고, 저 배우는 칸 영화제에서 무슨 상을 탔고, 저 가수들은 요즘 청소년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이고 하는 설명들을 아버지가 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특별 게스트로 출연한, 아버지와 안면이 조금 있다는 잭 니콜슨과, 카메론 디아즈가 전부였다.
필름이 끝나자 아버지는 몹시 피곤해 보였던 아까와 달리, 한껏 고무된 듯 나를 보았지만 난 무감동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아, 네가 한국 감독이나 배우들을 잘 모르겠구나. 뭐 할 수 없지."
하고 아버지는 나름대로 이해한다는 말을 했다.
"왜 부르셨어요?"
"이거 막 완성되어서 너한테 제일 먼저 보여 주려고."
나는 속으로 이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아버지는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식으로서 버릇없는 표현이겠지만 실없는 짓을 많이 했다.
"다음 주 토요일 <씨네시대 영화제작센터> 개막식 할 거야."
"아직 반도 못 지었다고 하셨잖아요."
저번에 여기 왔을 때 들은 말이 생각나서 물었다.
"세세한 부분이나 제작 세트나 창고를 몇 개 더 짓는 게 남았는데, 그건 차차 해도 되고 지금 여건만으로도 관광 상품으로 충분하고 영화도 찍을 수 있어. 나야 모두 완성한 다음에 세상에 내 놓고 싶지만 할아버지가 재촉을 많이 하셔서 급히 개막식 하기로 했다."
"회장님이 화폐 청소기 가동하고 싶어 안달을 하셨겠죠. "
나는 빈정거렸다.
"할아버지라고 부르라니까 말마다 회장님이구나. 그리고 청소기가 뭐냐? 버릇없이."
아버지는 훈계조로 얘기했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고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회장님에 대한 생각은 나와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 회사 여기로 옮기지 않을래? 한 일년 영화 산업에 관해 공부하고, 분위기 익히고나서 기획 이사를 네가 맡아라. 그리고 차츰 경영까지 맡아 주면 내가 좀 편하겠는데."
"싫어요."
난 아버지를 외면하고 단칼에 거절했다. 표정까지 쌀쌀맞게 변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쯧쯧 혀를 차더니,
"그 놈의 고집은 꼭......"
하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이쯤 되면 무슨 말이 나올 차례인지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을 막으려고 물었다.
"그럼, 제 볼일 끝난 거죠?"
"남의 입장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하는 것도 꼭 닮아......"
"그런 소리 듣는 거 싫다고 했잖아요."
나는 거의 짜증을 냈다.
그러자 아버지는 항복한다는 듯 두 손을 번쩍 들고,
"그래그래, 졌다. 아버지가 잘못했어."
하고 달래듯 했다. 그러나 철없는 자식이 귀여워서 져 준다는 투다.
"그런데 너 아직 할 일 남아 있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한숨을 쉬며 다시 앉았다.
"한시에 핀란드에서 온 휴대폰 회사 홍보 간부들한테 이번에 여기서 제작한 CF를 설명해야 하는데, 네가 통역 좀 해라."
"제가 그쪽 말을 어떻게 통역해요."
그쪽 사람들이 영어를 무척 잘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말했다.
"영어로 소통할 거야."
"그런 건 전문 통역사가 해야죠."
"통역사가 갑자기 못 온대. 그리 대단한 건 아냐. 여기 오늘 회의 내용이 있으니까, 미리 보고 익혀 두고 담당자한테 설명 좀 들으면 될 거다."
아버지는 A4지 몇장을 밀어 주었다. 씨네시대에 한 발짝이라도 끌어들이려는 계략 같아서 찜찜했다.
"그 정도면 아버지가 하세요. 그리고 이 회사엔 인재가 그렇게 없어요?"
"난 일정이 있어. 그리고 너 회사에 들어가고 싶니? 저번에 도망나왔다가 할아버지께 엄청 혼났으니, 안들어갈 수도 없고. 네가 원한다면 내가 회사에 연락해 줄께. 통역은 한 시간 정도면 끝나. 그리고 퇴근하면 되잖아. 회사엔 세시간쯤 걸린다고 얘기할께. 어때?"
아버진 네가 요건 거절 못할 거다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네에."
"너 오늘 아버지 덕택에 회사 하루 땡땡이 치는 거다."
아버진 내 어깨를 툭 쳤다.
"씨네 시대 개막식 때 너도 꼭 참석해야 한다."
"싫어요."
"다음 주 목, 금 토요일에 네가 여기 나와서 일한다고 내가 말해 놓을께, 목, 금요일은 너 하고 싶은 거 하다, 토요일만 잠깐 들러라, 응?"
"회사 출근할래요."
아버지와 이른 점심을 먹고 나서 회의 관계자를 만나 설명을 듣고 완성된 CF를 미리 보았다. 휴대폰 광고였는데, 엉덩이까지 간신히 가리는 밀착한 드레스를 입은 모델이 20초 내내 현란한 춤을 추었다. 카메라가 춤추는 모델에 근접해 종아리부터 얼굴까지 빙빙 돌아가며 훑듯이 촬영했고, 그것을 테크노 음악에 맞춰 느리게 빠르게 편집해 놓았다. 카메라 조작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모델인 여자 애가 근사했다. 긴 머리를 날리며 무척 잘 추는 춤에 몸매는 육감적인데, 카메라가 클로즈업한 청순한 얼굴은 춤에 도취한 듯 하다, 일순 오르가즘에 다다른 표정이 되었다. 관능적이고 상업적인 매력이 넘쳤다. T.V나 영화를 안 봐서 몰랐는데 저런 애도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휴대폰 광고라면서, 끝까지 휴대폰은 나오지 않았다. 저 CF의 뭘 보고 사람들이 전화기를 생각해 낼까 의아했는데, 담당자는 휴대폰을 많이 팔기보단 아시아 시장에 처음 진출한 그 회사의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기 위한 기획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속으로
'회사는 몰라도 모델은 엄청 광고 되겠군'
했다.
한 시 가까이 되자, 씨네시대 직원들이 외국인 세명을 안내해 들어오고, 곧 광고 제작진들도 따라들어왔다. 그들 중에 첫눈에 들어오는 늘씬한 여자애가 모델이었다. 그애는 들어오면서 여기저기 인사하느라고 바빴다. 설명서에는 '서미현'이란 이름이 나와 있다.
한시 정각에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 주관자인 조민호 팀장이 의례적인 인사말을 했고, 나는 통역했다. 팀장은 통역을 맡아줄 시대물산 유홍주 대리라고 나를 제일 먼저 소개했다. 그리고 핀란드 사람들, 광고 제작진에 대해 소개하고 담당자들과 자신에 대해 간략히 언급했다. 난 그대로 통역했다. 이후로 회의는 물 흐르듯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외국 회사 간부들은 CF를 보고 무척 흡족한 듯 원더풀, 엑설런트를 연발했다. 회의가 끝날 무렵 팀장은 나에게 외국의 CF와 비교해서 어떻냐고 친절하게 물었다. 다 만족하는데 무슨 칭찬을 더 들으려고 그러나 싶어, 통역사는 눈은 없고 귀와 입만 살은 사람이라고 영어로 말해 버렸다. 물론 그 정도의 말은 팀장도 알아들었겠지만, 외국인들이 내 말을 듣고 폭소를 터뜨리며 좋아했기 때문에 불쾌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복도로 나왔는데, 내게 CF에 대해 설명해 주었던 직원이 따라와, 통역비라며 봉투를 내밀었다. 받지 않고 얼마냐고 물었다. 삼십만원이라고 했다. 내 대리 월급 생각하면, 한 시간 수고료로 꽤 많았다.
나는 웃으며,
"사장님 드리세요. 제가 덕을 입은 게 있거든요."
하고 돌아서 걸어 나왔다. 두시도 안 되었다. 회사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이었지만, 뭘할지, 어디로 갈지 막막했다. 몇 안되는 친구들을 떠올렸지만 그들은 지금 일할 시간이었다. 게다가 미국 유학 시절 한 때 친했을 뿐인 그들은 귀국 후 몇 번 만났지만, 출세하는 일, 돈 버는 일만이 관심사였기에 만날수록 화제거리는 떨어지고 점점 괴리감만 더하는 느낌이었다. 쓸쓸해지려고 했다.
현관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유대리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CF 모델이 서 있었다. 이 애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걸까 하며 용건을 말하기를 기다렸다.
"저, 기억하세요?"
손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키며 꼭 기억해주길 바란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방금 본 CF의 모델이잖아요."
난 당연한 걸 묻느냐는 투로 대답했다.
"아니요, 열흘 전쯤 밤에 여기 정문 앞에서 절 태워 주셨거든요."
간절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 흔치 않은 일은 기억했다. 그런데 그애가 이앤가 싶어 얼굴을 유심히 보며, 어둠 속에서 보았던 기억과 비교해 보았다. 얼굴보단 흰 속옷만 걸친 반벌거숭이 모습만 떠올랐다. 그래도 노력해서 생각해 보니, 지금은 화장이 더 진하지만 앳된 얼굴과 여린 목소리가 거의 똑 같았다. 나는 한참만에,
"기억나네요."
했다. 그러자 그 애는 함박 웃음을 지으며,
"기억나셨어요? 그날 밤 정말 감사했어요. 그런데, 경황이 없어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드려 내내 죄송했어요."
했다. 내가 반응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저, 오늘 시간 있으세요?"
하고 물었다. 감사 인사를 하겠단 뜻이다.
"아뇨, 일이 많이 밀려서."
"그럼, 내일이나 모레라도......"
꽤 사례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매일 야근해요. 바빠요."
난 그애가 다시 묻지 않도록 좀 쌀쌀하게 말했다.
"꼭 사례하고 싶은데요."
엄청 예의바른 집안에서 교육받으며 자랐나 보았다.
"괜찮아요."
"오늘도 명함 없으세요?"
끈질긴 애다.
"없어요."
"그럼요 제 명함 드릴께요. 꼭 연락 주세요. 핸드폰으로 하면 늘 제가 받거든요."
핸드백에서 명함 한 장을 급히 꺼내 내밀며 말했다. 이걸 받아야 갈 수 있을 것 같다. 난 명함을 받아 들고
"그럼......"
하고 고개를 숙여보이고 돌아섰다. 돌아서는데, 그 애는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 내 뒤에 대고,
"저 꼭 감사드려야 해요."
하고 소리쳤다.
나는 차에 올라 타서,
"날 엘리트 사원으로 알겠군."
하고 중얼거리고 명함을 옆자리에 던졌다.
<세한도> 4. 씨네시대 개막식
4. 씨네시대 개막식
회장님이 직접 지시한 <2000년 상반기 국내외 영화 산업의 규모 및 경향 정리>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느라고, 목, 금요일 밤을 꼬박 새우고 토요일까지 내처 일해 오전에야 마쳤다. 일하느라고 이 정도로 밤을 새운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거의 탈진 지경에서 전자 문서로 보내고는 의자에 기대어 졸기 시작했다. 회장님이 읽어 보고 퇴근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려야 집에 가서 편히 잘 수 있었다. 연방 고개돌리기를 하는데 사원들은 주말을 잘 보내라는 인사를 하고 하나, 둘 떠났다.
크게 꾸우벅 하는 통에 눈을 떠서 시계를 봤더니, 한 시였다. 수백평은 될 넓은 사무실에 막막한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쉬잇트!"
감감무소식인 전화통에 화가 치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의 제의를 받아들일걸 하고 후회했다. 목, 금요일 어디서 놀다가, 오늘 개막식엔 안 가도 회장님처럼 꾸중을 하진 않을 것이었다. 그러면서 무역이 아닌 영화 산업에 관한 보고서를 올리라고 한 이유가 뭘까 하고 내내 궁금해 하던 것을 또 생각했다.
'나보고 <씨네시대> 일 하라는 건 아니겠지.'
내가 아무리 회장님 앞에선 뱀 만난 쥐 꼴이어도 그 일만큼은 단호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폰이 울렸다.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비서실인데, 회장님이 오란다고 전했다.
"제길......"
수화기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냥 가라고 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벌써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았다. 복장을 최대한 살피고 회장실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사업을 이것저것 벌이지 않고 알짜가 되는 몇가지 부문에만 창업을 해서 맵짜게 경영하고, 은행 돈도 빌려 쓰지 않아서 국내에서 가장 현금과 부동산이 많다는 <시대그룹>이었다. <시대>는 곧 회장님이었다. 부지런하고, 군더더기를 싫어하고, 일하는 것을, 일 중에도 육체 노동을 가장 정당하게 보는 노동 신성주의자였다. 그런 회장님에게 영화 산업을 하고 싶어하는 큰 아들은 허영 덩어리로 보였을테고, 사고를 덜컥 쳐서 낳아 논 그 딸년에게 들여야 하는 돈들은 얼마나 아까웠을까. 그래서 내가 6월에 귀국했을 때, 회장님이 한 말이 바로 '그 동안 너에게 들어간 돈은 네가 <시대>에서 일해서 갚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곱 살 때부터 이번에 한국에 올 때 타고 온 편도 비행기 표 값까지 내게 들어간 양육비, 용돈, 교육비, 생활비 등을 매년, 매월 별로 조목조목 적어 놓고 연리 8%의 이자까지 계산해 놓은 총액을 보여주며 날 순식간에 엄청난 빚을 가진 채무자로 만들었다. 내가 그동안 흥청망청 살았기 때문에 그 액수는 평생 일해도 평범한 사원 월급으로 갚기엔 택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생활비를 통장에 입금하는 건 뭔가 싶었다. 영원한 채권자가 되겠다는 건가.
비서가 문을 열어 주자 긴장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 보고서로 무슨 타박을 하실지 암담했지만,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했다. 표정으로까지 회장님께 지고 싶지 않았다. 인사를 하자, 뭔가 질타를 날릴 것만 같은 불그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 봤다. 항상 나를 못마땅해 하고, 못미더워하는 뜻을 강하게 내쏘는 눈이었다. 일곱 살 때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 눈에 기가 질려 있어 그 눈만 보면 저절로 몸이 오그라들고 말소리는 주눅이 들었다.
"오늘 네 애비 개막식이 여섯 신거 알지? 너도 참석해라."
보고서에 관한 얘긴 없이 대뜸 참석하라니. 집에서 쉴 생각만 했기에 나는 참지 못하고 약하게 항변을 했다.
"선약이 있습니다."
"취소해라. 애비가 일생일대의 사업을 시작하는데, 자식이 만사 제쳐 두고 가야지."
"네."
가래가 끓는 듯한 걸걸한 목소리가 커지자, 나는 얌전히 항복했다.
"난, 다섯시에 출발할 건데, 내 차 함께 타고 가거라."
숨이 막히는 명령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핑계를 대었다.
"저어, 이틀 동안 집에 못 들어가서 복장이 지저분합니다. 집에 가서 정리 좀 하고 여섯시까지 가겠습니다."
"그래라."
그렇게 한 마디 하고 책상으로 눈을 돌리곤 끝이었다. 나가야 할 시점인 것 같아 꾸벅 절하고 회장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서서야 겨우
"쉬잇!"
불만을 내뱉었다.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투덜거리며 집으로 갔다. 짜증이 나니까 졸음이 좀 가셔 운전엔 좋았다.
다리가 풀려 비틀거리고, 벽에 머리를 부딪히며 샤워를 간신히 마쳤다. 시계를 보니 세시였다. 한시간 반은 잘 수 있었다. 알람을 맟춰 놓고 침대에 쓰러졌다. 한 시간 반만 자고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하다, 잠에 빠졌다.
피곤했는지 끙끙 앓는 신음 소리가 귀에 들렸다. 늦으면 안된다는 걱정 때문에 반의식이 돌아왔다가 까무라치듯 자고, 또 깨었다가 까무라치듯 잠에 빨려 들고 하였다. 그러다 문득 섬찟한 느낌이 들어 퍼뜩 눈을 떴다. 사방이 깜깜했다. 시월 초의 오후 5시 즈음이 이렇게 어두웠던 경험이 없다는 생각이 스치며 손을 뻗어 시계를 들고 보았다. 눈을 의심했다. 불을 켜고 다시 보고, 눈을 깜짝거리고 봐도 여덟시가 다 되어 있었다.
"이 놈의 알람이......."
애꿎은 시계를 침대에 집어던지고 튀어 일어나 옷을 찾아 입었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심장이 뛰고, 울화가 뻗혔다.
목숨걸고 운전해서 <씨네시대 영화제작센터>에 도착한 건 아홉시였다. 마치 크리스마스라도 맞은 듯 색색의 불빛이 조화롭게 일렁거리고 복잡하고 떠들썩한 길을 헤치고 개막식이 열린다는 홀로 들어갔다. 개막 행사는 벌써 끝나고 연회가 무르익은 분위기였다. 이제라도 회장님을 찾아 눈도장을 찍는 일이 시급했다. 눈부신 빛 속에 연회복을 입은 남자들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가득 들어차 웃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회장님은 쉬이 보이지 않았다. 허겁지겁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데, 누군가 등을 쳤다. 돌아보니 선배님이었다.
"지금 왔구나. 와아, 드레스 잘 어울리는데, 근사하다."
내 아래 위를 훑어보며 감탄했다.
"회장님 어디 계세요?"
구세주라도 만난 기분으로 급히 물었다.
"저기 계시잖아."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더니 선배님 손끝 하나에 마술처럼 거기 있었다.
난 한숨을 푸욱 내쉬고,
"우선 갔다 올께요."
하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꾸중을 하진 않겠지. 무거운 마음으로 걸어가며 옷 매무새를 살폈다. 급한 와중에도 전에 몇번 입어서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받은 흰색 끈 드레스를 골라 입었다. 어깨가 많이 드러나지 않도록 숄을 추스리고 머리를 다듬었지만, 회장님 앞에선 뭔가가 잘못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이리 오너라."
내가 오는 걸 회장님이 보고는 손짓을 했다. 엄한 목소리였지만 꾸중할 태세는 아니었다. 나는 급히 걸어가 허리 굽혀 인사했다.
"이 분들께 인사드려라."
정신없이, 앞에 선, 나이 지긋해 보이는 신사들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했다.
"얘가 유사장 맏딸이예요. 이름은 홍주고, 미국에서 M.B.A하고 돌아와 지금은 물산에서 경영 공부를 하고 있지만, 장차 여길 맡길 생각입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회장님이 사람들 앞에서 나를 손녀로 인정하고 이 정도로 긍정적으로 언급한 건 처음이어서 놀라웠지만, '여길 맡길'거라는 그 말엔 더 놀랐다. 그러나 감히 항변할 순 없었다.
"너, 이 분들 잘 기억해라. 장차 네게 도움을 많이 주실 분들이니까."
문화부 장관, 국회 의장, 영화감독협회장 하며 나열했지만, 기억하기엔 경황이 없었다. 두 그룹에 더 끌려가 인사하고서야 놓여 났다. 그 와중에 아버지까지 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그웃음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뻗대더니, 할아버지 말씀 한 마디엔 너도 별 수 없구나.'
선배님에게로 돌아왔다. 외국인이 낀 아줌마 그룹에 있었다. 그들에게 나를 딸이라고 소개했다. 외국 여자는 함박 웃음을 지으며, 미세스 리에게 이렇게 큰 딸이 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나머지 한국인들도 웃으며 인사를 받았지만, 나를 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건 나의 자격지심 때문일까. 외국인은 주한 스웨덴 대사고 나머진 교수, 배우, 국회의원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배우는 제니 김을 알 것 같아, 불편해졌다. 다행히 선배님이 양해를 구하고 나를 한쪽으로 데려갔다. 그제서야 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러다 얼마 못살거예요. 이틀 밤 꼬박 새워 일하고 집에서 잠깐 눈 붙이고 일어난다는 게 깨어보니 여덟시잖아요. 늦었다고 회장님께 받을 타박 생각하며 스트레스 엄청 받고. 사흘 동안 열살은 더 먹은 것 같아요."
선배님은 내 어깨를 두드려주며,
"힘들었겠네."
하면서도,
"이제야 다른 사람들 사는 것처럼 사네, 우리 홍주가."
했다.
"아, 싫어요, 이렇게 사는 건. 진퇴영란이예요. 먹고 사는 게 이렇게 힘들어서야."
나는 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선배님은 웃으면서,
"진퇴양난이지"
하고는 지나가던 서버의 쟁반에서 물 한 컵을 집어 주었다.
"아, 진퇴양난, 유학온 친구 중에 영란이가 있었거든요."
머리와 속이 타들어가던 차에 반갑게 받아 비워 버렸다.
"저녁도 못 먹었겠네."
"참, 배고파요. 아침에 렌지에 데워 먹는 죽 한 그릇 먹고 끝이예요."
갑자기 공복감을 심하게 느꼈다.
"이리와."
선배님은 내 손을 잡고 음식이 잔뜩 차려진 테이블로 데려갔다.
"와아! 이렇게 많은 음식, 여기 와서 처음 봐요, 아, 초밥, 갈비, 춘권에 케밥까지......"
서둘러 한접시 가득 담아서 먹기 시작했다. 선배님이 물 한 컵을 옆에 놓아 주었다.
"허기졌다가 이렇게 갑자기 먹으면 체하거나, 체중 많이 늘어. 천천히 먹어. 물마시며."
선배님은 걱정하면서도 웃으며 바라보다가, 입가에 귀찮게 늘어진 머리카락들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내가 게걸스럽게 먹는 걸 지켜보다가,
"난 재우보다 네가 더 맘이 안 놓여."
한숨 쉬며 말했다. 난 그 말에 왠지 안심이 되어서, 우물거리며 비시시 웃었다.
"재현이, 재우는 안 왔어요?"
"재현인 공부하라고 못 오게 했고, 재우는 어디 있을거야. 무슨 가수, 배우들 직접 본다고 며칠 전부터 신났어. 지금 찾아다니며 구경하고 사인받느라 바쁠거야. 게다가 친구들한테 부탁 받은 사인하고 사진만도 수백장이래."
"아, 한 번 보긴 해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우물거리며 말했다.
"드레스 입은 모습은 사교계 숙년데, 그 먹는 모습은 영 선머슴이야."
"드레스 괜찮아요?"
"응. 너 이렇게 입은 거 처음 봐. 이러고 보니 너도 애들 유행어로 킹카다. 신경 안 쓴 듯한 머리하고, 화장하고 묘하게 어울려. 너 남자 원한다면 여기서도 몇 명은 쉽게 구하겠는데."
나는 빙긋 웃고,
"그럼 그만 먹어야지. 배나오면 흉해."
하고 포크를 내려 놓았다.
내려다 본 배는 힘을 주고 있어서 그렇지 조금만 방심하면 튀어 나올 것 같았다. 더 먹고 싶지 않을 정도로 원없이 먹었다.
"이제 뭐하죠? 집에 가면 회장님한테 혼날테고. "
멀리 보이는 회장님을 힐끗 보고 말했다.
"네가 앞으로 상대해야 할 모든 사람들이 오늘 여기 모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 아냐. 가자. 내가 소개시켜 줄게."
하고 선배님은 내 팔을 잡았다. 그러자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회장님이 아까, 제가 <씨네시대>에서 일할거라고 그러시는데, 정말이예요?"
"몰랐어? 너 곧 여기로 발령나고 차차 경영에 참여하게 될텐데."
선배님은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화가 왈칵 치밀었다.
"누가 이런 일 하고 싶대요? 맘대로 불러들이고, 억지로 일시키고, 이젠 영화까지 하라구요? 순 독재자, 히틀러. 오늘 여기 오는 것만도 싫은데, 영화와 관련된 건 끔찍히 싫어하는 거 아버진 알텐데."
내가 얼굴이 벌개져서 골을 내자 선배님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금방 선배님께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오늘 여기 오는 게 나보다 싫었을 사람은 선배님이 아니었을까.
"죄송해요. 버릇없이 굴어서."
선배님은 웃으며 내 한 손을 잡고 한 손으론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난 더 고개를 숙였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서였는지 피로하기도 했다.
"저, 어디 쉴 데 없을까요?"
"아버지 방에 가 있어. 거기 침대가 있을거야."
하고 방 잠금 장치의 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회장님이 찾으시면 핸드폰으로 연락해 달라고 부탁하고 연회장을 빠져 나왔다.
<세한도>5. 세일러 문 나셨네.
5. 세일러 문 나셨네.
아버지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갔다. 가는 길에 맨 살에 닿는 시월의 밤 공기가 시원했다. 북적거리고 시끄러웠던 홀 앞의 정원과 달리 고요하고 잔디 위에 빈 벤치까지 바라보였다. 잠깐 앉았다 들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그 벤치로 걸어갔다. 나만 있을 줄 알았는데, 저만치 젊은 애들이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는 게 가로등 빛으로 보였다. 조용조용 대화하고 있어 시끄럽지 않을 것 같아 벤치에 앉았다.
꽤 분위기 있는 곳이라서 한껏 맑은 공기를 들여마시고 쇼올의 앞을 여미며 하늘을 보았다. 별들이 기가 막히게 총총 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별들을 본 적이 있었다. 카미유와 놀러가 묵었던 뉴질랜드 목장의 밤 하늘이 이랬다. 그 땐 하늘에 별들이 너무 크고 많아서 그녀와 나 단 둘이 있는 벌판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었다.
'이런, 또 생각하네.'
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눈길을 돌렸다. 저만치의 젊은 애들을 보았다. 정장을 입은 남자 셋 가운데에 이브닝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서 있었다.
'어떤 앤지 인기 많은가 보다. 남자 복이 터졌네.'
그러나 부러운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제발 그냥 보내 주세요. 전 가기 싫다니까요."
하는 여자 목소리가 도드라졌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 쪽을 주시했다. 연애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 중의 한 남자가 여자의 팔장을 끼고 앞으로 끌었다. 여자는 안 가려고 몸을 뒤로 뺐다. 다른 한 남자가 다른 쪽 팔과 어깨를 잡고 앞으로 끌기 시작했다.
"놔요. 이러지 마세요. 놔,놔!"
여자는 이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소리질렀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들 앞으로 달려갔다.
"뭐하는 거예요.?"
그 앞에 버티고 서서 소리쳤다.
그들은 멈추었고 갑자기 나타난 나를 모두가, 여자조차 의외라는 듯 바라 보았다. 나는 키가 작지 않은 편인데다 하이힐까지 신어서 웬만한 키의 남자는 밑으로 내려다 봤는데, 이 사람들은 힘쓰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인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앞에 있던 대장 격인 듯한 남자가 나를 아래 위로 보더니, 피식 웃고는,
"자기 일 아니면 상관하지 맙시다."
하고 나직이 말했다.
"싫다는데, 놔요."
나도 덩달아 침착해져 말했다.
아까 <씨네시대>에서 일할 거란 말을 듣고 막 화를 냈으면서도, 지금은 여기가 내 건데 하는 엉뚱한 오기와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자 그는,
"나아 참."
하고 성가시다는 투로 나를 밀치고 한 걸음 옮겼다. 그러자 두 남자도 여자를 끌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어깨를 잡아당겨 다시 세우고 그 앞에 섰다.
"저 사람이 무슨 빚진 건 아닌 것 같고, 어디로 끌고 가서 못된 짓 할 모양인데, 그런 짓 하면 안되잖아요. 당하는 입장에 서 봐요."
얘기하면서 이런 고등학생한테 설교하는 듯한 말 말고 더 현실적인 설득을 해야 할텐데 하고 걱정했다.
"그리고 오늘은 <씨네시대 영화제작센터> 개막일인데, 이런 나쁜 짓을 여기서 하는 건 내가 용서 못해요."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며,
"세일러 문 나셨네"
했고 뒤의 남자들도 웃었다.
"난 선원이 아니라 여기 직원이라서 하는 말이예요."
"너도 만신창이 되고 싶지 않으면 비켜."
나는 이 사람들을 상대하다간 안되겠다 싶어, 뒤의 여자에게 물었다.
"누구한테 데려가는 거예요?"
"여기 현일수 이사래요."
그 여자가 급히 말했다.
그러자 잡고 있던 남자가 여자의 뺨을 갈겼다.
"조용히 햇!"
문득 그 여자의 모습과 목소리가 낯이 익어서 물었다.
"저번에 내가 통역한 CF의 모델 아니예요?"
"맞아요, 유홍주 대리님이시군요."
마치 구원자라도 만난 듯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또 쟨가 싶었다. 대화가 구체화되자 그 대장 격이 나를 밀치고,
"가자."
하며 급히 걷기 시작했다.
내가 또 어깨를 잡자, 그는 신경질을 내더니 휙 돌아서 내 숄을 우왁스럽게 잡고 내동댕이 쳐 버렸다. 그 엄청난 힘에 난 벌렁 나가 떨어졌다. 잔디 위였지만 워낙 거세게 밀려서 엉덩이가 아프고 특히 꼬리뻐가 눈 앞이 아뜩해질 정도로 시큰했다. 무지막지한 행동에 분이 치밀어서 벌떡 일어나 쫒아가며 소리쳤다.
"야, 그 애 안 놔 주면 현 일수 이사 낼 아침엔 해고야. 아니 사회적으로 매장시킬거야. 난 분명히 그럴 능력 있어. 이런 차림으로 여기 초대받은 거 보면 몰라? 내가 누군지나 확인하고 일 내라구."
하고 그 어깨를 다시 붙들어 잡자, 내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그러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진 않고 나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난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 들이밀었다. 유심히 들여다 보더니,
"겨우 대리 주제에."
하고 코웃음을 쳤다. 명함을 도로 뺏고는,
"단순한 대리가 아냐."
하고 여유있게 말했다. 귀에 가까이 대고,
"여기 사장이 유성희 씨잖아, 나는 유홍주고. 뭐 짚이는 거 없어? 난 삼년 내에 현 이사 상관이 된다구."
하고 속삭였다. 그러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나를 응시했다.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현이사한테 전화해서 나 바꿔 줘. 내가 얘기할게. 현 이사가 무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네가 아까 나 팽개친 거 용서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구."
그는 핸드폰을 받더니, 번호를 눌렀다.
"접니다....... 아직요........저, 장애가 생겨서요. 바꿔드리겠습니다."
하곤 내게 건네 주었다. 그러나 나도 현이사가 누군지 모르는데다, 현이사가 나를 알지 자신이 없었다. 난 드러나지 않은 자식이니까. 모른다고 하면 이 놈들에게 꽤 얻어 맞을 게 뻔했다. 그 애를 슬쩍 봤더니 나만을 구세주인양 바라보고 있었다.
'쟨 왜 또 걸려들어서 날 이렇게 만든거야.'
하고 그 애까지 원망스러웠다. 이사가 날 모른다고 하면 나에 대해 길게 설명할 참으로 무리에서 떨어진 곳으로 갔다.
"현일수 이사님이세요? 저 아시나요? 유홍주라고 하는데요."
다행히도 그는 나를 알았다. 감이 좋아 음악이 들리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직 연회장에 있는 모양이었다. 난 안도하며 핸드폰을 대장에게 넘겨 주었다. 그는 핸드폰을 받더니,
"네....... 네."
하고 폴더를 접더니 내게,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허리 굽혀 인사하고 핸드폰을 공손히 건네 주었다. 그리고 부하들을 데리고 가 버렸다.
첫댓글 홍주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