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양조장·선교사 기숙사·헌책방 …'추억 나들이' 코스로 딱이네
인천 골목 답사의 무대는 '배다리'이다. 경인선 전철이 지나는 배다리 철교 아래가 동구와 중구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6·25전쟁 후 60~70년대까지 장이 열리고 피란민이 북적이는 인천시민들의 생활중심지였다. 아직까지도 수많은 인천 서민들에게 '애환' '향수'를 상징하는 삶의 현장으로 각인돼 있다. 19세기 말까지 밀물 때면 이 구역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를 댈 수 있도록 만든 다리'가 있었는데, 그래서 이름도 '배다리'가 됐다.
배다리의 대표 골목은 단연 '헌책방 골목'이다. 과거의 동구 금곡동과 창영동의 경계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이 헌책방 골목은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거리에 리어카와 노점상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형성됐다. 한 때는 40여곳의 헌책방들이 옹기종기 모여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인천 먹물들의 단골코스 혹은 행인들의 추억만들기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지금은 아벨서점, 한미, 집현전 등 10여 곳만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중고 사진책만 특화해 모아 놓은 사진책도서관도 이 골목의 명물이다. 이곳 책방 주인들은 대부분 헌 책에 대한 낭만이 사라진 요즘 세태를 하루하루 절감한다. 이 거리가 한산해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 하지만 헌 책방들은 매일 오전 7시면 어김없이 문을 열고 새로운 헌 책을 들이고 있다.
아벨서점에서 우각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가장 먼저 인천양조주식회사와 맞닥뜨린다. 1920~30년대 막걸리 양조장이었던 이 건물에는 현재 문화·예술 대안공간 '스페이스 빔'이 보금자리를 텄다. 내부만 용도에 맞게 적절히 재구성했을 뿐 당시 건물양식에 손 하나 대지 않은 모습이다. 지난 10월 중순에는 배다리 역사사진전을 이곳에서 열었다. 인천 골목탐사, 옥상 영화제, 지역 연극인들의 연습공간 활용 등 각종 문화적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옛 양조장 냄새에 취한 듯 내려오다 왼쪽 사잇길로 접어들면 인천 '학교의 역사'를 만난다. 창영초등, 영화학교, 여선교사기숙사 등 서양식 교육의 시초가 됐던 장소들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창영초등은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로, 개항 당시 5세부터 24세까지의 다양한 연령층의 학생들이 이곳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현재는 학생들의 교육박물관으로 보존·활용되고 있다.
창영초등 바로 옆에는 영화학교가 붙어 있다. 인천 최초의 근대식 초등교육기관 '영화학당'이 출발한 곳이다. 1892년 존스 목사 내외가 개교한 이 학교는 유명 인물이 많이 배출됐다. 전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박사, 서은숙 문학박사, 탤런트 황정순씨가 이 학교 출신이다.
인천 기독교의 산실인 미 감리교회 여선교사기숙사도 배다리에 있다. 르네상스풍 빨간 벽돌의 규칙적인 조합을 통해 정제되고 보수적인 느낌을 주고, 한국 전통 양식인 용(用)자 창호살을 창문형태에 따온 것이 재밌다. 당시 여선교사들이 머문 이곳을 많은 한국사람들이 호기심과 동경의 장소로 여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잠깐 숨을 돌리며 정처없이 골목골목을 걷다보면 낯설지만 아기자기한 '골목 예술'이 또한 눈을 즐겁게 한다. 공사현장 한 귀퉁이를 채우고 있는 재활용품을 활용한 소담스러운 그림액자, 무가치한 듯 버려졌던 골목 후미진 곳의 친근한 벽화도 배다리의 빠질 수 없는 요소다.
하지만 배다리에는 불운의 그림자도 공존하고 있었다. 이 일대를 두 동강 낼 산업도로가 건설되기로 한 것. 배다리 주민들은 터전을 잃게 되고 몇 십년 지녀온 삶의 흔적도 고스란히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경제자유구역 송도에서 청라지구까지 직선으로 뚫리는 도로가 이곳까지 연결되기로 계획된 것이다. 장소성과 역사성을 무시하고, 원주민까지 몰아낼 행정당국의 도시재생 계획은 대세 아닌 대세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근 수도국산박물관은 이런 배다리의 안타까움을 위로한다. '달동네박물관'이란 명칭으로 더욱 서민들에게 친숙한 이 박물관은 1999년 7월 수도국산 달동네가 완전 철거되면서 이곳을 기억하기 위해 건립한 곳이다. 비록 아파트 재개발로 사라졌지만, 당시 서민들의 집과 생활용품, 추억거리 등을 완전하게 재현해 놓았다. 이런 역사적 자취를 보존하기 위해 동구청에서 직접 수도국산 물품 수집에 동분서주했다니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준다.
<다음회는 '수원화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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