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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로이드 존스/이태환 요약
[본서의 배경]
본서 “회개”는 1949년 10월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주일 저녁 강단에서 시편 51편을 가지고서 연속 4주에 걸쳐 설교한 내용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시편 51편을 통하여 죄인이 회개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특징들과 그러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결과들이 무엇인지를 철학이 아닌 성경을 중심으로 강해해 나아간다. 127page밖에 않되는 작은 책이나 독자는 성경을 강해해 나아가는 그의 성경해석과 적용 및 탁월한 복음제시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바라보는 이 시대의 가장 커다란 비극]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시대의 가장 커다란 비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0세기 커다란 비극 중 하나는, 기독교를 구성하는 체계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대해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라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그러한 까닭에 로이드 존스 목사의 시편 51편 강해는 중요하다라고 할 수 있겠다. 시편 51편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이 시편이 회개의 교리 전체에 대한 탁월한 고전적 진술일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여러 단계와 과정들을 대단히 명료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가장 커다란 비극에 대하여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대하여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들고 있다. 이것에 대한 치료제가 있는데 바로 본서에 담겨져 있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네 편의 설교이다.
[본서의 내용분해]
-제1장
제1장은 회개의 단계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네 가지 단계로 설명해 나아가고 있는데 첫째로,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인하는 단계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하던 일을 멈추고 사실을 직시하며 자신을 살피는 일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자신의 죄악된 행동을 인식하고 그러한 행동이 세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임을 시인하는 단계이다. 그 세 가지는 “죄과”, 와 “죄악”, 그리고 “죄”이다. “죄과”란 제멋대로 하려는 욕구이다. 자신이 원하는 일과 즐겨 하는 일만 하려는 욕구를 말하는 것으로서 권위에 대한 의지적 반항이다. “죄악”은 일그러지거나 어긋난 행위, 왜곡된 행위로서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죄악을 범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일그러짐이며 왜곡이다. 나야말로 왜곡되어 있는 존재이다. “죄는” 과녁을 빗나가는 것이다. 목표에 미달 되는 것. 하나님과의 뜻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이다.
이어 회개의 단계 세 번째는 자신이 어떤 변명이나 구실도 내세울 수 없음을 발견하는 단계로서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다.”고 시인하는 것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회개의 네 번째 단계로는 자신의 본성이 날 때부터 악한 것임을 깨닫고 인식하는 단계이다. 나라는 인간 자체가 문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내게는 악을 행하는 능력이 있고 악을 즐기는 마음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제2장
제2장은 회개와 구원이 일어날 때마다의 몇 가지 특징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다. 첫 째로, 회개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직시하고 살피게 된다.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했으며, 자신의 본성이 부패할 대로 부패했음을 깨닫는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러한 깨달음을 “죄인의 각성” - 자신을 직시하고 자신에 관한 최초의 진실에 눈뜨는 것 - 이라고 이름 붙인다. 두 번째 특징은 자신의 상태와 처지를 살핀 후 절망에 빠져 그에 따른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특징은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알기에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다윗은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라고 탄원한다. 네 번째 특징은 자신이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라는 자각과 의식을 갖는다. 다윗은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깨달았으며, 더 나아가 자신이 전혀 손을 쓸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다섯 번째 특징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달라진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양심의 가책만을 느끼는 사람과 자신의 죄를 깨닫는 사람을 구분짖는데, 양심의 가책만을 느끼는 사람은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듯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을 알게 될 때에 그분을 멀리하게 된다. 반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깨닫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데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에도 그분만을 애타게 찾으며 “하나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탄원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피하지만, 회개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실 수 있다고 믿는 자이다.
-제3장
제3장은 거듭남의 교리에 대해 뿌리 깊은 반감을 갖는 이유와 거듭나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장이다. 먼저 거듭남의 교리에 대해 뿌리 깊은 반감을 갖는 첫 번째 이유는 중생의 교리가 인간의 힘으로 온전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을 마주 대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인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관심 대상이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타락했으며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5절에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자신의 실상에 대하여 표현하였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누구나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거듭나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반역과 위선을 일삼는 우리의 본성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은 부패로 가득 차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과 지혜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내 마음에 비추는 빛이 필요하다. 내 속내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 자신을 조명할 외부의 빛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깨달은 결과 이제 자신에게 정결한 마음이 필요하고 새로운 성품이 필요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제4장
제4장에서는 거듭났을 때 나타나는 결과가 무엇인지,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강해하고 있는 부분이다. 먼저 거듭났을 때에 나타나는 첫 번째 결과는 주께서 베푸신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이 생긴다는 것이다. 12절에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라며 간구한다. 다윗은 예전에 그 즐거움을 맛보았지만 그것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 즐거움을 되찾고 싶어한다. 회심 체험을 통해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이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그 주된 원인은 바로 “죄”이다. 죄는 다윗이 겪었던 고통의 주범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소서”라고 탄원한다. 그가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이유가 바로 죄인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구원의 길에 대한 이해 부족때문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나 수단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거나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서 그러한 일이 생길 때가 더러 있다. 자력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애쓰는 한, 구원의 즐거움은 영영 맛볼 수 없다. 구원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는 세 번째 이유는 주님이 아니라 자신만을 바라보는 일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완벽해지려 하면 할 수록 더욱 더 비참해진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여기서 자기 점검self-examination과 자기 반성introspection에 대하여 구분짓는다. 성경에 비추어 자신을 점검할 때 그는 그리스도를 지향하게 되나 자기 반성을 할 때는 끊임없이 자신을 바라보게 되므로 여기서 드러나는 자신의 더러움으로 인하여 그것을 제거하기 전에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비극이다!”이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에 대하여 열거하는데, 첫째로 그는 주님을 기뻐한다. 우리가 주님을 힘입어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비참하며 불쌍한 모습을 잊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두 번째 특징은 언제나 자아를 철저하게 불신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깨닫는 사람이다. 세 번째 특징은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기에 나를 붙드소서라고 간구한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나를 붙드소서.” 네 번째 특징은 자신과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악상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깨닫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원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게 되기를 바란다.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사람, 그가 곧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사탄에 의해 눈이 어두워져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리고 싶어한다.
제1장 죄인의 고백(시 51:1-5)
회개의 단계
¶ 첫 번째 단계(“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인하는 단계. 하던 일을 멈추고 사실을 직시하며 자신을 살피는 일이 있어야 한다.
¶ 두 번째 단계
자신의 죄악된 행동을 인식하고 그러한 행동이 세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임을 시인하는 단계 - 우리가 저지른 일의 성격이나 본질이 정확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는 단계이며 하나님의 목전에서 그분의 뜻을 거스르고 있음을 깨닫고 고백하게 된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그는 여러 사람에게 죄를 지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주님께 대한 범죄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고백한 것이다.
1) “죄과”(“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반역, 권위에 대한 의지적 반항. 죄과란 제멋대로 하려는 욕구, 자신이 원하는 일과 즐겨 하는 일만 하려는 욕구를 말한다. 거기에는 의도적 선택, 적극적 반항 행위가 수반된다. 죄과란 우리 양심을 거스르는 행위를 한다는 뜻이다.
2) “죄악”(“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소서!”)
일그러지거나 어긋난 행위, 왜곡된 행위이다.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죄악을 범하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일그러짐이며 왜곡이다. 나야말로 왜곡되어 있는 존재이다.
3) “죄”
과녁을 빗나가는 것. 목표에 미달 되는 것.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 하는 것.
¶ 세 번째 단계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자신이 어떤 변명이나 구실도 내세울 수 없음을 발견하는 단계로서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다”고 시인하는 것이다.
¶ 네 번째 단계(“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자신의 본성이 날 때부터 악한 것임을 깨닫고 인식하는 단계. 나라는 인간 자체가 문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내게는 악을 행하는 능력이 있고 악을 즐기는 마음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제2장 죄인의 무력함(시 51:1-2)
회개와 구원이 일어날 때마다의 몇 가지 특징
¶ 첫 번째
회개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직시하고 살핀다. 하던 일을 중단하고 자신을 살피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이미 성찰한 자들이다. 자신의 죄과 ․ 죄악 ․ 죄를 목도했으며, 그러한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했으며, 자신의 본성이 부패할 대로 부패했음을 깨닫는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러한 깨달음을 “죄인의 각성” - 자신을 직시하고 자신에 관한 최초의 진실에 눈뜨는 것 - 이라고 이름 붙인다.
¶ 두 번째
두 번째 특징은 자신의 상태와 처지를 살핀 후 절망에 빠져 그에 따른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고백한다. 다윗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자신의 상태와 처지를 생각하면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이 느꼈다. 그는 많은 재산 ․ 권력 ․ 지위가 다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여러분은 한번이라도 여러분 자신과 영혼의 상태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영혼의 상태에 대해 걱정하고 고민한 적이 있습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이 교회의 등록 신자가 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완전히 오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반론]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예배에도 참석했으며, 착한 일을 하기도 했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기도 했기에 굳이 그러한 걱정을 할 필요가 있는가?
[답변]
하나님만이 우리의 관심 대상이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간음죄나 살인죄를 저질렀느냐가 아니라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으며 또한 지금도 사랑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죄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시며, 또한 그렇게 요구할 권리도 갖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지으시되 자신을 위해 지으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으뜸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은 따라서 가장 큰 죄이다. 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베푸시는 선함과 자비 그리고 은혜에 감사드리는가? 나는 하나님께 찬양과 존경과 영광을 돌리는가? 나의 최대 관심사가 하나님께서 더욱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사역의 최대 목표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으며,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본질적인 죄란 특정한 행위의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셔서 하나님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거나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가장 본질적인 죄에 해당된다. 때문에 회개하는 자마다 언제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영혼을 걱정하며 자신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며 갈망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려 애쓰는 것이 우리의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 세 번째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세 번째 특징은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다.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알기에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는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라는 다윗의 탄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한다. 자신이 부정하다고 생각하기에 죄 씻음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회개하는 사람은 악과 죄 그리고 부정한 것으로 인해 자신이 더러워졌고 오염되었음을 알고 있다. 자신이 겉과 속이 부정하며 자신이 죄로 얼룩졌음을 알고 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지은 죄에서 씻음받고, 정결케 되고, 깨끗게 되기를 갈망한다.
¶ 네 번째
네 번째 특징은 자신이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라는 자각과 의식이다. 다윗의 문제는 자신의 양심을 진정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다윗의 양심은 그를 고발하고 있으며,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양심은 가만히 있지를 않고 죄를 폭로한다. 양심은 무서운 것이다. 다윗은 여기서 양심을 잠재우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부자인데다가 소와 양도 많이 있는 다윗은 양심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뭐든 포기할 심산인데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로이드 존스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바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특별한 느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 평안과 안식과 고요를 찾으려는 치열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위대한 성인 어거스틴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꽤 오랜 기간 동안 영혼의 불안을 느꼈던 그는 마침내 이렇게 울부짖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나는 과연 이런 불안을 느낀 적이 있는가? 나는 죄의식을 떨쳐 버리기 위해 어거스틴처럼 양심과 정신과 마음의 평안 그리고 안식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는가?
다윗은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나아가 자신이 전혀 손을 쓸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다윗은 양과 소가 많아 큰 재물을 바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기에 바칠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제물을 바쳐서 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지만,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심을 안 것이다.
또한 우리는 다짐을 해보기도 한다. “이제부터는 마음을 잡고 제대로 한번 살아 보자. 버릴 것은 버리고 새 출발을 시작하자.” 이런 다짐이 계속되지만 우리는 아직도 평안과 안식과 고요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런 일이 계속돼 마침내 자신의 다짐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완전히, 전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 다섯 번째
다섯 번째 특징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달라졌다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그런데도 그는 다른 그 무엇보다 하나님만을 애타게 찾는다. 여기서 우리는 양심의 가책과 회개가 다른 것임을 알게 된다.
[양심의 가책만을 느끼는 사람]
회개한 적이 없고 양심의 가책만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게 될 때 그분을 멀리한다.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든다. 아담과 하와는 그 시점에서 회개하지 않았다. 성령님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죄의 확신과 자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도망치려 하며 그분을 피하려고만 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살피지도, 성경을 읽지도, 기도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잊을 수만 있다면 뭐든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의 죄를 깨닫는 사람]
하지만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깨닫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에도 그분만을 애타게 찾으며 “하나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탄원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 곁에 있기를 원한다. 자신이 죄를 지은 대상을 간절히 찾는 것이야말로 회개의 특이한 역설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피하지만, 회개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실 수 있다고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회개하는 죄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요구할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분에게 기대어 뭔가 아뢰기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만이 자신의 도움이라고 믿으며, 번제나 희생제사도 소용이 없고 세상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어떻게 하면 죄의 흔적을 없앨 수 있을까? 하나님만이, 오직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다.
회개하는 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허물과 죄를 없앨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실 뿐 아니라 언제든 그렇게 하실 의향도 있으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이것이 바로 회심자의 역설이다. 다윗은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 하나님께서 인자하시며 크신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도 알고 있기에 그분의 자비에 몸을 맡기며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간구한다.
제3장 죄인의 간절한 욕구(시 51:10)
로이드 존스는 시편 51편으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시편이 회개의 교리 전체에 대한 탁월한 고전적 진술일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여러 단계와 과정들을 대단히 명료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 시대의 가장 커다란 비극은 무엇인가?
로이드 존스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모호한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이 가장 커다란 비극이라 말한다. “20세기 커다란 비극 중 하나는, 기독교를 구성하는 체계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대해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라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과와 죄악을 살핀다. 죄책감이 들면서 그 죄책 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에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울부짖는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이런 간음죄와 살인죄를 짓다니 나 자신이 끔찍하구나!”하고 탄식한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 그 자체이다. 그리스도인은 ‘용서만 받으면 되지 뭐’라고 생각하는 법이 결코 없다. 그리스도인은 죄악된 행동 그 자체보다는 그런 행동을 유발하는 내면의 그 무엇인가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고 걱정하며 언제나 자신을 고발하고 점검한다. 용서받고 못 받고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끊임없이 용서를 구하게 만드는 상황을 초래하는, 내면의 그 무엇이다.
다윗의 진짜 문제는 10절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라고 울부짖는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항상 이렇게 한다.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성품, 곧 거듭남 - 중생 - 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용서받고 보다 선한 삶을 살기로 작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새로 태어나야 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 깊은 곳을 만져 주시지 않으면 영영 버림받는 존재가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다시 태어나야 하며 새롭게 창조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거듭남의 교리에 대해 뿌리 깊은 반감을 갖는 이유
¶ 첫 번째
중생의 교리는 우리 스스로 온전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선언을 함축적이지만 매우 분명하게 전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교리에 반감을 갖는다. 만일 “이제부터는 여러분은 이런 식으로 사는 게 좋을 것입니다. 자, 힘을 냅시다”라고 권면한다면 천성적으로 그것을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을 듣는 자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가 넌지시 비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능력이 있음을 암시하는 교리라면 언제든 환영한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소득이 없으며, 마르틴 루터처럼 금식하고 땀 흘려 기도해도 헛될 뿐이라고 지적하는 교리를 육에 속한 사람은 탐탁지 않게 여긴다.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수도원의 독방에서 금식했고 기도했고 로마 순례여행을 다녀왔으며,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시도했지만 결국에는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천성적으로 거듭남의 교리를 싫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잠잠히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거듭남의 교리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다.
¶ 두 번째
거듭남의 교리에 대해 뿌리 깊은 반감을 갖는 두 번째 이유는 내가 하나님을 마주 대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일순간이라도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타락했으며 얼마나 무력한지를 즉시 깨닫게 될 것이다.
¶ 세 번째
세 번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상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윗은 5절에서 자신의 실상을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표현했다. 자신의 실상을 깨달은 사람은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복음을 뿌리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자신은 선하기 이를 데 없으며 어쩌다 보이는 성격상의 결함은 매우 손쉽게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 복음을 거부한다. 자신이 죄악 중에 출생했고 어머니가 죄 중에서 자신을 잉태했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이 부패했기 때문에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제 마음이 부패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거듭나야 하는 이유
¶ 첫 번째
거듭나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반역과 위선을 일삼는 우리의 본성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일그러지고 빗나갔으며 뒤틀려져 있다. 다윗은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신실함]을 원하시오니!”라고 시인한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안에, 내 마음속에 부패한 그 무엇이 있구나. 그런데도 나는 손을 쓸 수 없다니!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구나. 내 본성, 내 존재 깊은 곳에 진실함이 없구나”라고 탄식한다. 우리는 짐짓 다른 사람인 양 행동할 수 있으며 용서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뉘우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본심은 그와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곤경에서 벗어나며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뉘우친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그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우리가 만일 그저 죄책감과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일에만 골몰한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선적으로 자신의 중심이 신실해야 함을 절감한다. 그러나 그는 더 나아가, 스스로 신실해질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자신의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 보면 위선과 거짓이 가득한데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신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선과 거짓은 어쩔 수 없기에 그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울부짖는다. 마음속의 생각과 의도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데 그것들을 다스릴 수 없기에 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다.
¶ 두 번째
두 번째 이유는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자신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지혜라는 사실을. 나 자신을 조명할 빛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애를 써도 결국 막다른 벽에 부딪치고 마는 것을 솔직히 시인하여야 한다. 나로서는 바로잡을 수가 없다. 나에게는 외부의 빛이 필요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다윗은 영혼 깊은 곳에서 지혜를 달라고 탄식하고 있다. 바꾸어 말해, 인간의 지식 ․ 지혜 ․ 명철이 문제 해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블레이즈 파스칼이 그랬듯이, 이성의 최고 업적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성의 한계에 눈을 뜨게 해 계시를 달라고 탄원하게 만드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내게는 지혜가 필요하다. 내 마음을 비추는 빛이 필요하다. 내 속내를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하는 나는 순전히 엉터리 의사이다. 나 자신을 조명할 외부의 빛이 필요하다. 나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해 줄 보다 큰 지혜가 필요하다. 성결을 이루며 거룩한 삶을 살아 내는 법을 알려 주는 빛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빛과 나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지혜가 필요하다. “오 하나님, 제 상태가 어떤지 빛을 비춰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거듭나야 하는 필요를 깨닫게 하셨기에 다윗은 이제 자신에게 정결한 마음이 필요하고 새로운 성품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이 문제에 대하여 마가복음 7:14-23에서 포괄적이면서도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다. “너희는 ‘이 더러운 세상에 사느라 저 자신을 정결케 하기가 무척 힘듭니다’라고 핑계를 대는구나. 그렇지 않다.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너희 마음이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나오는 악의 ․ 살인 ․ 간음 ․ 탐욕과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다. 자신을 직시한 다윗은 이렇게 참회한다. “저는 살인자요, 간음자요, 부패한 자요, 무고한 사람의 피를 흘린 장본인입니다. 제가 어쩌다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밧세바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욕망의 포로가 된 것은 바로 제 마음이 더럽고 추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마음속의 그 무엇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마음이 더러운 원인은 다음과 같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인간을 욕망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양심은 경고하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저주받을 대상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이다. 우리에게는 정한 마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다윗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힘으로는 그런 마음을 창조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제아무리 굳은 결심을 하더라도 마음은 결코 변화될 수 없음을 다윗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 까닭에 다윗은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라는 위대한 고백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정한 마음을 창조하실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는가? 주님은 왜 그렇게 하셨는가? 우리가 용서받고 또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하고, 죄짓는 삶과 회개하는 삶을 되풀이하다가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형벌받는 것이 안쓰러운 나머지 천국으로 슬그머니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인가? 그런 생각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바울이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듯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딛 2:14). 복음의 영광스러운 메시지는 내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머무르지 않는다. 물론, 내가 용서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성에 차서는 않된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았으면 좋겠고, 이같이 중요한 문제와 씨름하고 싶고, 죄짓게 만들고 유혹에 빠뜨리는 내안의 세력을 없애 버렸으면 좋겠다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이 제시하는 해결책인데, 곧 거듭남과 새로운 창조, 다시 태어나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게 된다는 놀라운 교리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제4장 구원과 새 생명(시 51:10-15)
[거듭남의 교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영광스러운 교리 중 하나가 된다.]
로이드 존스는 회개에 따른 여러 단계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거론한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삶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의 참모습에 눈을 뜬다. 그는 제정신이 들면서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를 저질렀는지 깨닫는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용서가 절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이 죄를 지은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려 그분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긴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거듭나며 새로운 성품을 입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거듭남의 교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영광스러운 교리 중 하나가 된다.
[세 단계를 거치고 나면 반드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정한 결과들.]
죄의 자각, 용서의 필요성, 그리고 새로운 성품을 달라는 기도이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으며 거듭났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인가?]
주님이 베푸신 구원의 즐거움
먼저 즐거움과 기쁨이 생긴다는 것이다. 다윗은 그러한 즐거움과 기쁨을 8절에서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12절에도 이와 비슷한 간구가 나온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다윗은 예전에 그 즐거움을 맛보았지만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 즐거움을 되찾고 싶어한다. 이러한 회심 체험을 통해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이 즐거움과 기쁨을 누린다. 우리가 맛보는 “주의 구원의 즐거움”은 타고난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즐거움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즐거움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설령 누군가 기질적으로 음울하다고 할지라도 언제든 이러한 특별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고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이다. 벧전 1:8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예수를 너희가……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너희 가운데 성격이 밝고 쾌활한 몇 사람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모든 사람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뻐한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여기서 이 같은 즐거움 ․ 희열 ․ 기쁨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지 못하기도 한다. 분명 원인이 있는데 그중 첫째는 죄이다.
[구원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는 이유]
1. 죄
죄는 다윗이 겪었던 고통의 주범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소서”라고 탄원한다. 그는 어쩌다 그 즐거움을 잃어버렸는가? 간음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또한 그 밖의 여러 가지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깨지고 만다. 남는 것은 언제나 비참함과 괴로움뿐이다. 하나님의 축복에는 언제나 몇 가지 조건이 따른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라고 호소하신다. 하나님께 복종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놀라운 기쁨을 맛보았다. 우리라고 해서 그런 체험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사도 바울이라고 해서 우리와 특별히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였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그런 즐거움을 맛보았는가? 비결의 핵심은 그가 죄를 피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대로 살아 냈다는 것이다. 죄는 언제나 즐거움을 앗아간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다.
2. 구원의 길에 대한 이해 부족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구원의 길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나 수단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거나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서 그러한 일이 생길 때가 더러 있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을 믿거나 자신의 노력에 기대고 있다.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과 구원의 즐거움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자력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애쓰는 한, 구원의 즐거움은 영영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결코 죄를 없애거나 얼룩을 제거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뵙고 그분의 용서를 구하는 길이 있는가? 그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즉각적인 선물로 주신다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이 성취되었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기에 우리가 이 선물을 거저 받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해결이다. 현재 모습 그대로, 지금 있는 곳에서 그냥 그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선은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순서지”라고 여기는 자들이 있다. 이는 용서의 교리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 교리에 의하면 용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께서 단번에,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복종 외에 그 어느 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용서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그 선물을 언제든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 구원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야 하겠다.
루터는 자신의 노력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늘 그렇듯이 그 역시 좌절감을 맛보고 말았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 같은 부요함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며 인간은 믿음으로 그것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복된 진리가 퍼뜩 머리에 떠올랐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루터 자신을 의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모든 문제가 풀리면서 루터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왔다.
3. 주님이 아니라 자신만을 바라보는 일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는 세 번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이 아니라 자신만을 바라보는 일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완벽함의 기준을 설정한다. 자신을 들여다볼 때 비참한 심정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마음이 부패할 대로 부패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성인이라도 자신을 바라보면 실망하게 되어 있다. 있어서는 안될 것들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데 온통 시간을 쏟는다면 즐거움은 사라지고 괴로움만 남을 것이다. 자기 점검self-examination은 더없이 좋은 것이지만 자기 반성introspection은 좋지 않는 것이다. 성경에 비추어 자신을 점검할 때 그는 그리스도를 지향하게 된다. 하지만 자기 번성을 할 때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데, 여기서 드러나는 마음속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전에는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자유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비극이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 거짓말,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소서.” 다윗과 같은 사악한 죄인이 과연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은 절망의 깊은 구렁텅이에 빠졌던 인생에게 즐거움을 주되,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게 한다. 복음은 가장 악한 사람이라도 용서와 죄 사함의 확신을 주어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특징]
1. 주님을 기뻐한다.
우리가 주님을 힘입어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비참하며 불쌍한 모습을 잊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다.
2. 언제나 자아를 철저하게 불신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는다.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특징은, 언제나 자아를 철저하게 불신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깨닫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음이 악하고 본성이 연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그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흔들리지 않는 영을, 신뢰할 만한 영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스도인은 견고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3.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기에 나를 붙드소서라고 간구한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나를 붙드소서.” 다윗은 “나를 붙드소서.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자신은 유혹에 빠지기 쉬우며 연약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어둡고 죄로 물들었으며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나를 유혹하며 꼬드기며 죄에 빠지게 하는 세력뿐이기에 그는 넘어질까 두려워한다. 그러하기에 “주님. 저를 붙드소서.”라고 간구한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사람, 그가 곧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주셨다.이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주시며, 우리를 붙들어 주시며,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어디든 기꺼이 갈 수 있도록 해주신다.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결코 자신에게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성령의 능력에 있다.
4. 자신과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스도인의 네 번째 특징은, 자신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른 모든 사람도 그렇게 살기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13-15절에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자신의 죄를 사하시고, 죄과를 지워 주시고, 자신을 말갛게 씻으시며, 죄를 깨끗이 제하여 주셨음을 깨닫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얼마나 죄악된 삶을 살아 왔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생명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는 사람이 있다. 이 사름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이루어야 할 사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체험한 자로서 모든 이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이란 달리 표현하면,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직면한 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체험해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사람, 그가 곧 그리스도인이다. 죽음과 종말을 향해, 심판과 영원한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리스도인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그리스도인은 사탄에 의해 눈이 어두워져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리고 싶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