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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2a 울산강의-창세기 9장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창세기 9장 지금부터 하겠습니다.
창세기 9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무지개 언약이라는 게 나오는데, 언약이라 하는 것은 모든 걸 통합시키는 흡입, 잡아당겨서 전부다 한 구덩이에다 다 집어넣는 그런 힘이 쏟아지는 원천이 언약입니다. 휘휘 감아서 한 곳으로 확 낚아채는 그런 힘을 갖고 있는 게 언약. 모든 세상에 소소하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휘휘 감아서 결국은 언약이라는 그 구멍 속으로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도록 잡아당기는 그 힘을 갖고 있는 게 언약이죠.
그래 언약이 등장했다 하면, 이 세상은 중심없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에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의 무의미하게 뜻이 없다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소용돌이죠.
언약이란 뭐냐? 하나의 휙휙 돌아가는 모든 것을 늪 같이 여기 다 언약 안으로 빨려 들어오게 되어 있고, 언약으로부터 모든 게 능력이 나오게 되어 있고, 언약에서 나오는 능력이 주변에 있는 것들을 꽉 잡아서 일관성 있게 다 잡아당기는 그런 힘을 갖고 있는 걸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이 등장했다는 말은 이 세상에는 모든 힘을 갖고 있는 중심지가 따로 존재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활개 치는 중심지가 있다는 말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 중심 되는 하나님의 뜻, 언약을 모르면 그거는 심판받고 저주의 대상이라는 그런 뜻도 이렇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타나죠.
그 요한복음 5장을 보게 되면, 방금 제가 하는 말과 연관해서 이해가 됩니다. 5장에 2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심이라"
이 세상에 모든 심판의 기준이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확정된 체계. 그것은 뭐냐 하면, 심판은 예수님이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공경하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은 게 되고, 예수님을 공경하게 되면 그 사람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것은 처음 교회 나와서 처음 방금 이 강의를 처음 듣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사실은 복된 말씀입니다. 복음입니다. 축복입니다. 왜? 인생의 핵심을 알았으니까. 세상이 아무리 복잡다단하게 움직이고 북한의 김정일이 어떠니, 이라크에 테러가 터져서 병장 하나가 죽니 사니 이렇게, 벌써 죽었지만.
죽고 이렇게 났더라도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여기에 마음 빼앗기고 저기 지진이 일어나면 지진에 마음 빼앗기고, 무슨 세상에 어느 마음이, 그럴 필요 없이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딱 마음은 한 구석에만 두게 되면, 그건 이미 인생 성공한 겁니다. 예수님만 알면 더 이상 우리는 사망에 이르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변화산에서 하늘에서 구름, 하나님이 음성을 내린 경우가 별로 없는데, 그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을 내린 경우가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하고 같이 있는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만 들으라.” 예수님 말만 들으면 아무 탈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의 말을 들을 생각 안하고 자기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려고 하다보니까 이래 좌왕 저리 우왕좌왕하고 마음 흔들리고 요동치고 좌절하고 낙담하고 해결책이 뭐냐고 고민하고 우울증에 빠지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점검하려고 하니까 그런 오류에 빠져요.
배가 배를 잡아당기는 그 소용돌이를 알아야 하는데 자기가 스스로 배를 기관실을 절제하고 관리하려고 하면, 배는 파도에 따라서 올라가고 내려갈 때마다 한번씩, 한번씩 울어야 된다고.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성경의 이런 뜻을 볼 줄 모르고 성경을 가지고 자기 마음 다잡기 위해서 보는 경우가 제가 보기엔 거의 태반이에요. 자기 마음을 안정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시는데, 그건 자기가 중심이 아닌데 그래 보면 해석 잘못이죠. 그거는 해석 처음부터 잘못된 겁니다. 내 마음 다잡기 위해서 성경 보게 되면 그렇게 해석하는 당사자는 누굽니까? 마음 다잡지도 못하는 내가 또 해석을 내가 한다는 식이 되니까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말 어렵게 했어. 쉽게 해 봅시다. 내가 마음에 번민이 많다. 그런데 내가 성경을 보면서 번민 많은 마음 다잡아야겠다, 안정시켜야 되겠다. 라고 성경 말씀을 보면, 그 성경 말씀 해석을 누가 합니까? 요란스러운 불안정한 내가 해석하잖아요. 내가 해석하니까 해석하는 내가 그렇게 해석하는데 본인도 본인 정리 안 되어서 어쩔 줄 모르는 판국에. 어쩔 줄 모르는 그런 마음 가지고 성경해석을 하니 성경해석이 제대로 될 리가 있습니까? 엉터리죠.
그래서 아침 본 성경 다르고, 저녁에 본 성경 다르고 지 마음대로라. 아침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상관없이 모든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태들, 상황들, 사건들 그런 걸 획 잡아서 한 곳으로 이렇게 확 흡수하고 잡아당기는 그 힘이 뭐냐? 창세기 9장에 보면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무지개 언약.
이 언약에 의해서 여기 9장 2절에 보면, "땅과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모든, 모든 계속 나오죠. “그들은 너희를 두려워 할 것이며 산 동물도 이제는 너희들의 음식물이 될 것이며” 이래 죽 나오고, 다시 8절부터 보면, “내가 노아 언약을 세울 테니”, 10절에 보면, “너와 함께 한 모든 생물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이렇게 다 다시는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물로서는 너희들을 멸하지 않을 것이며”, 여기 15절에 봐도, “너희와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로서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지 홍수 되지 아니할지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스스로 언약 세워놓고 스스로 내가 이거 안 할게, 이거 안 할게, 이거 안 할게. 하는 식으로 스스로 자기 조건을 내세우는 거예요. 이걸 방금 제가 이야기를 하나의 그림으로 그리면, 언약에서 언약이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스스로 언약에서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해놓고 그런 요소들을 그냥 자유롭게 내팽겨 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요소들이 언약에서 비롯되어서 여러 요소들이 터져 나오더라도 모든 생물과 모든 육축과 뭔가 오더라도 그건 다시 어디에 통합됩니까? 언약에 일관된 법칙에 다시 붙잡혀서 하나로 굳혀진다 이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창세기 9장 이야기에요.
이렇게 하나로 모든 것이 네가 보기에 세상에 어떠한 변화가 있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언약에서부터 나왔던 일인 것을 기억하고, 그것이 다시 언약 안으로 다시 굳어지고 흡수 통합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다오, 그겁니다. 그게 창세기 9장이에요.
그리고 창세기 9장만 그런 게 아니고, 성경 전체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십니다. 성경 전체가 그렇게 일한다는 걸 제가 말씀드리기 위해서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를 공경하는 자만 다시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는 그 이야기를 제가 신약과 구약을 이렇게 연관시켜서 일관되었다는 것을 방금 제가 이야기해 드렸잖아요. 흔들리지 마세요.
‘흔들리지 마세요.’란 말은 마음에 안 흔들린다는 말이고, 흔들리면서 끌려가는 곳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안 흔들리면 나한테 모든 사태가 나 좋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 흔들리지만 흔들려도 좋아요. 흔들리는 것을 너무 안타깝게 여기지 말고 흔들리면서 따로 존재한다는 걸 가지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흔들리는 내 마음. 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어디 빨려 들어가는 수채 구멍 속에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어떤 여자애가 머리 약간 긴데 목욕탕에 수압에 못 이겨서 아이 머리카락 해서 죽을 뻔 한 적 있어요. 머리카락이 수채 구멍에 빨려 들어가서 빼지 못해서 물에 감겨 숨도 못 쉬어서 죽을 뻔 한 애 있거든요. 그처럼 우리는 지금 우리의 요구사항, 우리의 욕망과 희망사항이 어떠한지 관계없이 믿던지 안 믿던지 김정일든 노무현이든 누구 관계없이 인간이든 세상의 모든 생물과 모든 육축과 코끼리와 모든 것도 들국화도 결국은 한 수채 구멍으로 쫘악 쫙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게 신약의 구멍이 뭐냐? 구멍을 가지고 십자가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 십자가를 증거하지요. 십자가가 수채 구멍이지, 이렇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수채 구멍. 십자가가 수채 구멍, 다른 말로 하면 같은 말이 뭡니까? 이게 죽음이죠. 죽음인데 더 상세히 이야기하면 저주죠. 우리 성도는 수채 구멍을 미리 통과했기 때문에 이 십자가 뒤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는 예수 안의 세계에 들어오고, 불신자들은 십자가 가지고 계속 끌려가면서 이 십자가 뒤에 죽음의 세계 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요.
죽음의 세계 뒤에 비로소 생명이 있어요. 우리가 살고자 하는 것은 생명 아닙니다. 죽음의 또 다른 모습이에요. 우리가 살고자 하는 행동 이 자체는 힘차게 죽음이 우리를 목 죄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흔적들이에요.
그런데 정작 생명은 어디 있느냐? 사도 바울처럼 죽고 싶다. 난 죽어도 좋아. 나는 죽어도 내 운명과는 상관없어. 죽음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내 운명은 달라질 게 하나도 없어. 라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십자가를 통과하고 그 뒤에 있는 십자가 뒤에 있는 예수 정죄함이 없는 세계에 있는 사람은 십자가에 자신의 죽음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도 바울처럼, 나는 내 소원이 있는데 내가 지금 빨리 죽는 것이다.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거. 그것보다 더 좋은 희망사항은 없다 이 말입니다. Boys, be ambitious.가 아닙니다. 세상에 야망을 갖는 게 아니고, 사도 바울의 야망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빨리 죽는 거예요.
목사님들이 그런 식으로 목회하고 그런 자세로 설교한다면 참, 그 교회는 복음이 언약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그저 언약이라는 것은 빨려 잡아당기고 수채 구멍처럼 화악 흡수해서 잡아당기는 식으로 지금 이렇게 소용돌이치는 세계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약에서 나오는 게 뭐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축복과 저주가 나옵니다. 축복과 저주가 나오는데 이 이야기가 그 뒤에 노아 아들이야기입니다. 아들 가운데서 세 명 다 축복된 자가 아니라 그 중에 아들 하나와 손자 하나, 가나안과 함은 저주 받아야 될 그러한 운명으로서 이 언약이라는 수채 구멍에서 튀어나온 사람이고,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반드시 받아야 될 사람으로서 이 수채 구멍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 이 수채 구멍 된 언약 속에는 뭐가 들어있겠어요? 저주와 축복의 기준이 들어있겠지요. 근거지. 저주와 축복의 근거지. 기준들이라는 말도 되고, 더 보탠다면 근거지가 되는, 근거지. 저주 받을 근거지도 언약 안에 들어있고, 축복될 근거지도 언약 안에 들어있고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은 안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을 왜 망할 수밖에 없게 만드느냐 하는 망하기 위한 이유로 십자가고, 십자가는 믿는 사람에게는 왜 그 믿는 사람이 영생 얻을 수밖에 없느냐 하는 것을 알려주는 근거지로서 작용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같은 십자가 사건이 사람이 상대방이 확정된 운명에 따라서 적용이, 하나는 저주로 적용되고, 하나는 축복으로 용서로 사랑으로 적용되는 겁니다. 동일한 사건인데 동일한 사건이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창세전의 운명에 따라서 한 사람은 저주스런 십자가로 다가오고 한 사람은 고마운 십자가로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내가 뭐 했다, 내가 어떻게 했다, 자꾸 자기를 중심으로 삼지 말고, 그건 주변에 지나지 않고, 변두리 진짜 중앙 되는 십자가를 증거해야 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려면 자기 자신이 왜 십자가 아니었으면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인가를 알아야 돼요. 평생 살면서 우리는 내가 왜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될 수 없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이렇게 언약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 작용 가운데 하나가 창세기 9장에 나오는데 그거 좀 상세하게 봅시다. 약간 복잡한데요, 이렇습니다. 창세기 9장 5절에 보면,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여기 4절에 보면,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원래 창세기 9장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었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것은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 그 말씀을 그대로 되풀이 한 것처럼 보일 겁니다. 창세기 1장 28절 유명한 거잖아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렇게 똑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은 똑같은 말씀을 주지 않아요.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 창세기 1장 28절에서는 대상이 그때는 범죄하기 전이거든요. 범죄하기 전에는 인간은 완벽하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이 형상 자체에 문제점이 없어요. 문제점이 없고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세상 피조물에 대해서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느냐? 세상 피조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 창세기 1장 28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형상 자체가 어떤 문제점이 없어요. 하나님의 형상이 곧 하나님을 대변하는 겁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그런데 창세기 9장에 들어오면, 인간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라는 이 방식이 깨져버려요. 인간이라고 다 인간이 아니고, 추가된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을 모르면 나는 그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조건이 갖다 붙는 창세기 9장입니다. 아, 이거 좀 어렵다. 말이 좀 어렵지요.
창세기 1장 28절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범죄하기 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인간, 인간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에 대해서는 어떻게 문제점이 시비 걸 게 없어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이고 인간이 형상이기 때문에. 단지 하나님 형상과 인간이 세상 만물과 어떤 위치에 있느냐 그것만 이야기하면 되는데,
창세기 9장에서 똑같은 말씀, 똑같은 축복을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 형상과 인간이 동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 따로고 인간 따로 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형상이 갖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나는 인간이다. 만물을 다스리겠다. 이래 나온다면 그것은 주체파악이 안된 인간이에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이야기하면, 먼저 오신 분도 이야기하세요. 언약은 뭐라 했습니까, 언약은 네 자로 뭐라 했어요? 수채 구멍이에요. 확 모든 것을 사로잡아서 휘감아 흡입하는 능력이 나온다 하지요. 쫙 빨라 당기지요. 중심점이 언약 아닙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그 언약의 중심점에 있다면, 옛날에는 인간이 언약이고 언약이 인간이라면, 지금 창세기 9장에서는 하나님 형상 따로고 인간 따로 에요.
하나님 형상이 점점 더 인간과 괴리, 뭔가 균열이 일어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뭐냐? 피를 피에 대해서 인간이 범접하지 못하는 딴 거는 다 먹더라도 딴 거는 다 먹을 수 있으되 피를 못 먹는 그 바깥에는 인간은 그대로 있어야 돼요. 그리고 피에 관해서는 인간이 관여 못하고 하나님의 형상만이 피 가지고 뭔가 미래에 다루실 겁니다. 그것은 십자가 피죠. 언약의 피. 내 살과 내 피를 먹는 자만이 생명을 얻는다는 그 피를 말합니다. 그거는 신약 시대에나 구체화될 정체고 본질이고.
구약에서는 신약의 모형이기 때문에 뭔가 피를 머금은 채 인간과의 거리를 약간 띠우면서 좋다. 다 먹어라. 심지어 고기까지 먹어라. 줄게. 하지만 뭐는 손대지 마라? 피는 니가 인간이라도 손 못 댄다 이 말이에요. 인간이라 할지라도 손 못 대. 피는 너를 능가해. 뭔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써 세상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혜택을 준 것은 너가 잘나서가 아니라 너는 어려서부터 약함이라.
창세기 8장 그거 몇 절입니까? 8장 21절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그 다음에 다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너는 태어날 때부터 악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너로 인하여 이 땅을 저주 안 하겠다는 게 아니고, 너 말고 다른 하나님의 형상 되는 다른 어떤 원인 때문에 혜택을 누가 입는다? 어릴 때부터 악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형상의 혜택을 입는 조건 하에 너는 피라는 것에 대해서는 손을 떼라. 손을 떼야 된다 이 말이죠.
이걸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한 걸 축약하면 뭐냐? 피 때문에 사람은 날 때부터 악함이라도 피 때문에 은혜를 입는 그런 입장에 놓이게 되는 그런 시대를 이제 개시하는 거예요.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 시대를 개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피를 먹지 말라하는 거예요.
저는 대구 칠성시장 선짓국 오천 원 어치 사면 한 냄비 사서 세 식구 삼사일 동안 맛있게 먹습니다. 선짓국이 핏덩어리에요. 맛있게 먹거든요. 왜 먹느냐? 이미 죽은 놈이라서. 내가 먹고 안 먹고 상관없이 내가 그걸 핏국을 먹고 안 먹고 상관없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실체가 드러난 이상은,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한테 생명이 빼앗아가고 주고 그런 시대를 이미 날아가 버렸어요. 끝나버렸어요. 그건 지나가버렸어요. 내가 어떤 법을 지켜서 구원 얻고 구원 안 얻고는 그런 시대는 지나가버렸어요.
그런데 창세기 9장은 아직 그런 시대가 도래되지 않은 시대기 때문에 피를 먹지 말라 하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의 모형입니다. 실체의 피는 언젠가는 나타나실 거예요. 우리 행위와 관계없이.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참 죄송하지만 성도 맞지만, 성도라면 자기 행동 결정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악마의 시험에 빠지고 악마로 인하여 자칫하면 자살까지 일어나는 그런 떠밀림을 당합니다.
저도 학교 선생님해서 알지만 예수 믿고 난 뒤에 학교 선생하면, 애들한테 체벌하고 난 뒤에 후회 많이 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행동을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고, 거 담배 한번 피웠다고 아를 패서 벌겋게 만들고 요새 같으면 고소감인데 그때는 휴대폰 없어서 안 찍었기 망정이지, 막 했다고요. 그런데 복음을 알게 되면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잘했을까 못했을까? 연관 안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따진다는 자체가 그것은 지금 언약이 무슨 언약 시대인지 구분도 못하는 시대에요.
이건 노아시대가 아니에요. 노아언약을 대체할 언약이 나왔으면 그 대체시키는 하나님의 입장을 존중해 줘야지, 우리가 존중 안 하면 누가 존중하겠습니까? 아직도 자기를 자책하고 이렇게 하면, 우리를 거저 구원하신 주님의 손이 허전하잖아요. 주님의 사랑이.
지난 목요일 날, 가야산 등반하신 분 다 아시잖아요. 내가 참고 중간도 못 올라가서 초반에 앉아서 퍼졌는데 내가 지짐을 먹을 자격이 되나 안 되나 후회할 필요 없어요. 애는 중학생 하나 와서 지짐 들고 드실래요? 들고 있는데, 이거는 산에 몇 미터 올라갔나 관계없이 지짐 들고 잇는 것, 그냥 먹으면 되지, 맛있게. 먹으면 안 돼. 한 백 미터 올라갔나? 이거 먹어도 되나? 이렇게 자기가 스스로 자책해서 들고 있는 애 손이 미안스럽게 만들고, 그러지 말라 이 말이죠.
주님께서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하는 피를 흘렸는데 그 쟁반에 담긴 생명의 피는 들여다보지 않고, 자기 혼자 이 잡는 것도 아니고 빈대 잡는 것도 아니고 뭐 하고 있는 거예요? 킥킥 이카고. 그러면 깨끗해집니까, 지가? 이미 복음은 창세기 9장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내가 다 이루었다. 창세기 9장까지 다 이룬 거예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또 한번 합니다만 늦게 올 때마다 계속 반복하자. 하나님의 언약이란, 이미 오신 분도 중요하니까 또 자꾸 들어놓으세요. 언약이란 뭐냐? 우리가 여러 가지 무자격적으로 우발적으로 생긴 것, 그거는 원인도 결과도 없이 턱턱 생긴 것이 그게 다 듬성듬성 일어난 것이 한 쪽으로 휙 감아서 수채 구멍으로 쫙 빨아 당기는 중심이 있더라 이 말입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은 ‘우연’이 아니에요. 이 세상은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온 것이 하나에서 다시 회수하고 회귀 되는 모든 사건의 다발입니다. 그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이에요, 언약.
어떤 것도 언약의 밧줄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언약의 포로들이에요. 그런데 언약에서 뭐가 나온다 했어요? 언약에서? 두 가지 나오는데 하나는 뭐가 나온다? 축복이 나오고 하나는 저주가 나오지요. 그러면 언약은 무엇의 근거지다? 저 사람은 저주 받아야 될 근거지도 언약이고, 축복 받을 근거지도 언약에서 나오고.
언약을 탁 깨보면 그 안에 피를 머금고 있고. 그 언약에 대해서는 니가 피에 대해서는 손 터치, 손대지 접촉하지 마라. 이것은 하나님의 고유권한, 하나님의 고유적인 축복이요 하나님의 고유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저주하는 것도 하나님의 자기 고유권한으로 저주하는 건데, 교회에서 잘못 생각해서, 왜 우리 어머니는 예수도 안 믿고 돌아가셔서 지옥 가게 하십니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자꾸 울지 마세요.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가 구원받은 것도 내 고유권한인데. 너의 어머니 예수 안 믿고 죽은 것도 예수님 부인하고 죽은 것도 내 고유권한이라면, 너는 잘나서 구원받은 게 아니야. 너가 구원받은 것도 나의 고유권한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왜 그렇습니까? 나도 자유가 있고 자율이 있고 나도 인간이고 이성이 있고 나도 판단력이 있는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너는 하나의 주변이거든. 왜 주변이냐? 우리는 주변이고 변두리거든요. 우리는 핵심이 아니고 빨려 들어가야 될 하나의 머리카락에 지나지, 머리카락 한 가닥에 지나지 않거든요.
왜 우리는 주변이냐? 그거는 우리는 뭘 다룰 자격이 없기 때문에? 피를 다룰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는 안 그랬어요. 죄 짓기 전까지 우리는 모든 걸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다릴 수 있지만 창세기 9장부터는 모든 걸 다스리되 그 모든 걸 다스릴 수 있는 권한까지 어떤 조건 하에서 다스릴 수 있다? 피를 손대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걸 다루는 거예요.
신약시대에 의하면, 나는 예수님의 피를 믿습니다. 하는 사람에게만 천지를 천하 만물을 다스릴 열두 보좌에 앉아서 천하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있지, 세상에 예수님 피도 모르고 예수님 피의 의미도 모르고 나는 인간이니까 만물의 영장이다. 이거는 저주받을 인간입니다. 그거는 자기 주체파악도 안 된 인간이에요. 이런 복음적인 핵심이 이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창세기 9장에.
앞으로 여러분들이 주변에 인생을 살면서 저도 마찬가지고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몰라요. 그런데 제발, 크게 써야 돼. 말로 해서 안 들어. [자책하지 말라] 주님의 피 묻은 손이 부끄럽다. 제발 자책하지 말라. 아, 행동을 바르게 했으면, 그때는 이렇게 했으면. 스스로 자책하지 마세요. 우리를 구원한 주님의 손이 부끄럽습니다.
사람이 자책을 이렇게 하려고 치면 벌써 기준이 누구냐 하면, 자기가 기준이 돼버려요. 이거는 멋드러지게 잘한 짓. 자기가 스스로 나는 이거는 예쁜 짓, 이거는 미운 짓, 스스로 결정해 버려요. 자기가 피도 만지지 못하는 피 흘릴 자격도 없는 주변, 변두리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 마치 중심인 것처럼 착각하는 거예요. 주변이면서도 중심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바로 중보기도라는 그러한 이상한 미신이죠. 자기가 중보기도 할 자격이 못되는데 자기가 마치 중심이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자, 그렇게 창세기 9장 저물어 가지요. 그래서 창세기 9장 20절에 보면,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그러니까 창세기 9장 그걸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이미 확정된 책입니다. 이 세상은 이젠 빈틈이 없고 이 세상에 예외 규정 없습니다. 모든 게 언약 중심으로 팽팽 돌아갑니다. 소용돌이 치고 있는 세상, 이게 세상입니다. 모든 게.
세상에 착한 사람 농사짓는다고 비 더 오고, 나쁜 사람 농사짓는다고 비 덜 오는 경우 있습니까? 없지요.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착한 사람이 스스로 자책할 거 없어서 착한 사람이 아니란 뜻이지요.
그럼 제가 문제 낼게요. 욥기 나오는 것처럼. 광야에 비를 내리시는 이유는? 이거 여기서 연장된 문제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광야에 비를 내리시는 이유는 뭘까요?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광야에 불과하다 말이죠. 스스로 갖고 있을 어떤 스스로 챙길 의가 필요치 않아요.
하나의 우리는 광야의 비를 내리는 걸 보면서 그걸 자기 입장에서 같이 일치 시켜보면, 광야에 비 오듯이 내가 잘했다고 비 더 오고 못했다고 비 안 오는 게 아니고, 이거는 그냥 다른 출처에 의해서 언약에 의해서 그냥 고맙게 은혜로 쏟아지는 거다. 이렇게 이해하라고 광야에 비를 내리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하는 이야기가 그거에요.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니가 하마가 애기 낳을 때 새끼 낳을 때 어떻게 낳는지 알았느냐? 묻는 이유가, 고래가 새끼 낳을 때 니가 알았느냐? 당나귀 낳을 때 니가 아느냐 묻는 문제는 그거 알라는 말이 아니고, 그거 알든 모르든 우리는 혜택을 입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아시라 이 말입니다. 혜택을.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새삼스럽게 예수 내가 믿는다는 말이 어폐가 있어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주님이 끌어안고 있는 상황을 눈을 떠서 알게 된 상황이 믿어지는 거지요. 믿을 때 비로소 끌어안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팍하고 끌어안았는데 우리는 눈은 엉뚱한데 가 있는 거예요.
그래 나중에 성령이 와서 눈 떠보니까 우리가 믿기 전부터 이미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끌어안고 있는 거예요. 자기 품안에 있는 거예요. 우리는 철딱서니 없어서 이래 두리번 저리 두리번, 또 자기 자신 보면서 또 좌절하고 그래 왔다 이 말이죠. 나중에 믿어 보니까 믿음이 있어 보니까 아하, 내가 내 쪽에서 하기 이전부터 이미 주께서 모든 걸 해 오셨다 이 말이죠.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중에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구십 몇 장인가 이런 게 있잖아요. ‘주 예수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주 예수님을 내가 알기 전부터 주님은 나를 알고 있었다. 얼마나 좋아요. 제가 또 좋아하는 가사에, 하도 생각하면 잊어버리고, 생각하면 잊어버리고. 유행가는 잘 생각나는데 찬송가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이 쓸데없는 자에게 왜 은혜를 주셨는지. 은혜를 쓸데없는 자라는 것을 정확히 하는 것이 은혜를 주신 목적이죠.
은혜를 받고 난 뒤에 은혜 받았다고 까불락대는 게 은혜가 목적이 아니라 나는 쓸데없는 자였다. 은혜 받을 쓸데없는 자였다는 걸 새삼 깨닫는 거. 이거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최고 행복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 때 가장 큰 행복이죠. 그 약간 유사한 찬송가는 아니고, 대중가요인데 유사한 가사가 뭐냐 하면, 아무것도 해 준 것도 없는 나 같은 여자에게 왜 나를 사랑하는지. 나는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나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지. 그게 있어요. 왁스가 불렀던.
아무것도 해 준 것도 없어. 해 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했다. 가장 하나님의, 그래서 제가 방정식을 제공,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의 특징은 뭐냐? 항상 나로 하여금 내가 하나님 일에 쓸데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런 쪽으로 하나님이 움직이면 아하, 지금 하나님이 성령이 나를 충만케 하시는구나. 사람이 그렇게 충만하게 되면, 심지어 남이 나를 돌 들고 때려 죽여도 나는 맞아 죽으려고 기쁨으로 웃으면서 맞아 죽습니다. 스데반 집사처럼. 그게 성령충만이에요.
그런데 성령충만도 받지도 못하고 흉내 내면, 하나님이시여, 나 같은 인간을 왜 죽이십니까? 이래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거는 가짜였습니다. 그거는 잠시 흉내 내다 들통 난 겁니다, 그거는. 교회봉사하실 때 아하, 나 같은 쓸데없는 자를 이렇게 청소하게 하시느냐? 또 헌금하시면서 나 같은 인간에게 이 귀한 돈을 하나님께 바치게 이렇게 하시니 참 하나님, 얼마나 큰 은혜인지 이런 마음으로 헌금을 해야 되지, 장로 시켜 줄 게 돈 내라. 이래 가지고 도저히 안 되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창세기 9장에서 이미 확정된 책입니다. 이미 신약에 있던 모든 복음이 구약에 왕창 이렇게 들어있어요.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할 일은 뭡니까? 그 언약에서 무엇이 뽑아져 나오느냐 그것만 주목하면 되겠지요. 그것이 바로 뭐가 뽑아져 나오느냐 하면, 축복과 저주가 뽑아져 나와요. 축복과 저주가 뽑아져 나오는데, 그러면 사람이 아닙니까? 사람은 축복과 저주를 수레에 지게에 진 사람이 나오죠. 그러니까 우편배달부 같아요. 한 쪽은 저주를 전달, 전달, 전달하는 우편배달부. 한 쪽은 축복을 전달, 전달하는 우편배달부란 말이죠.
이번 주일날 제가 여자와 아이에 관한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뭐냐 하면, 남녀가 창세기 3장에 남자하고 여자가 나오잖아요. 죄짓고 난 뒤에 남녀 구분이 뚜렷하게 됩니다. 창세기 2장에서 남녀 구분이 뚜렷하게 되질 않아요. 그냥 한 몸이죠. 한 몸인데 죄짓고 난 뒤에 남자 따로 여자 따로 이렇게 됩니다.
남자 따로 여자 따로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은 사실은 이 자식이 하나님이 주신 자식이면서도 남자, 여자가 뚜렷하게 되는 상태에서 자식을 낳게 됨으로써 이 자식에 대해서 남자와 여자가 더욱더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다가 뚜렷하게 확연하게 계기를 줘버려요. 그러한 기회를 줘버립니다.
그렇다면 이게 부모와 자식간에 갈등이 계속 일어나고, 또는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 갈등이 계속 일어나고, 서로 소유권주장 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하나의 이건 이 땅이 살만한 세상이 못된다는 것을 일, 이, 남자 일, 여자 이, 삼, 자식, 세 가지의 구조를 가지고 계속해서 이걸 굴리는 거예요. 수레바퀴 굴리는 거예요. 자전거에다 촛불을 꽂아서 자전거 돌려버리면 다른 사람에게 불이 획획 돌지요. 원 운동하잖아요.
그처럼 이 축복과 저주, 저주와 축복이 자식을 통해서 계속해서 전달, 전달되는 겁니다. 이런 남녀, 이런 관계를 알지 못하고 그냥 축복과 저주가 전달된다고 한다면, 어거스틴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뭐냐 하면, 어거스틴은 영혼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육체는 사람이 줬다. 이렇게 본 거예요. 이거는 문제가 안 되지요. 이거는 참 문제가 되는 겁니다. 큰 문제가 되는 거예요.
심지어 어거스틴 이후 16세기에도 사람이 여자는 밭이고 남자는 씨인데, 사람의 그 정자 안에 작은 사람이 들어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사람이 정자가 이렇게 있다면, 정자 안에 새끼 아이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여기에 문제가 있지요. 새끼 아이가 갖고 있는 정자 안에는 또 뭐가 들어있어요? 또 새끼가 들어있지요. 이런 문제가 생겨요. 성경 말씀을 기계적으로 그냥 기계적으로 이렇게 축복, 저주가 이렇게 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렇게 담겨서 온다고 기계적으로 담겨서 온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축복과 저주는 남자 일, 여자 이, 자식 삼이라면, 삼이 자식을 낳음으로 말미암아 남자, 여자가 구분되는 자체가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이게 죄라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하는 거예요. 자식을 통해서 부모를 부끄럽게 만드는 식으로 전달되는 겁니다.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육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지요. 이삭의 출현은 엄마, 아빠의 생각이 아니에요. 엄마, 아빠의 생각은 이스마엘로 끝나는 겁니다.
이삭이라는 자식을 통해서 엄마, 아빠 아브라함과 사라가 얼마나 육적인 생각이며 그런데서 이삭이 나올 수도 없는데 나왔다는 겁니다. 이거는. 이것은 아까 제가 찬송가 부를 때 하나님의 하는 일은 어떻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뭐 되게 합니까? 우리로 하여금 죄인을 죄 되게 하는 하나님 일이에요.
우리가 예상한 것도 하나님의 예상한 것을 정면으로 부딪치게 해서 거기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우리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형식으로 피를 흘리는 순교를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성도는 부끄럽게 만듦으로 은혜라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와 용서로서 말미암아 주께서 구원하신 걸로 깨닫게 하는 식으로 주께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제가 왜 하느냐 하면, 축복과 저주할 때 그냥 쉽게 말하면, 어떤 자식은 축복을 전달하는 지게에 이고 축복을 전달하는 노선이 있는 반면에 가나안과 함은 저주에 지게에 이고 후대까지 전달한다. 지금 제가 쉽게 이야기하잖아요.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후대가 자손이 선조의 자칭 축복이고 자칭 저주라 여기는 것을 수정하는 식으로 계속 간다 이 말입니다.
말 어렵다. 예수님께서는 더 어렵게 이야기했어요. 뭐냐 하면, 다윗의 주가 누구라 했습니까? 예수님이 질문한 거예요. 다윗의 주가 누굽니까? 다윗의 주가 되려면 다윗의 조상이 돼야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하죠. 시편에 보면. 다윗의 주가 저 끝머리에 대대 선조의 할애비, 할애비에 주가 있는 게 아니고, 세상에 다윗의 새끼, 새끼, 자식에 주가 있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세상에. 우리 보고 성경해석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태어나지도 않은 분이 주가 되고, 우리는 그 주님의 후손이 돼버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선배와 후배는 시간이 과거에서 이렇게 오는 게 우리의 시간개념인데, 이건 거꾸로 돼서 나중에 오신 분이 먼저 된 자를 구원하는 식으로 잡아당기는 식으로 하더란 말이죠.
참, 그러니까 축복과 저주라 하는 것은 잠시 뭐 복 받았다, 병 나았다, 지금 우리교회 권사님 한 분은 당뇨 걸려서 오늘 아침에 동산병원에 가서 중환자실에 가서 투석한다고 지금 가서 권사님 고생하시는데.
그 뭐 병에서 나았다, 또는 돈 좀 벌었다, 이게 축복이 아니고, 진짜 축복은 십자가가 축복인데 그런 돈 벌고 건강한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하고 수정케 하는 그것이 죄로 인하여 세상 것을 바라보는데서 오는 그러한 거짓된 축복이라는 것을 수정케 하는 것이 뭔가 올 때 그게 축복이에요. 그 관계가 축복이다 말이죠.
내가 글도 그래 쓰고 이번에 사이트에 글 써놨습니다. [큰 사기]라고 써놨습니다만 MBC-TV에서 '디톡스'라고. '톡스'라 하는 것은 독초라는 뜻이고, '디'라 하는 것은 뺀다는 뜻이거든요. 영어로. 디톡스 기계를 해서 발만 쑥 담그면 발이 누렇게 되는 거예요. 그걸 독소 빠졌다고 해서 350만원에 팔아먹는 사기꾼으로 고발하는 프로가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거기다 썼는데 세상에 디톡스라 해서 350만원 날리면 그만이지, 한국교회의 사기는 영혼을 날려요. 영혼을. 350만원 정도가 아닙니다. 3500만원 정도가 아니고, 인간의 영혼을 파멸케 하는 사기를 한국교회가 치고 있습니다. 디톡스, 발 해서 색깔 보니까 당뇨군요. 색깔 보니까 위장이 안 좋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아이구, 사업이 안 됐습니까? 벌 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엉터리 같은 판단을 내리고 검진을 내리고 진단을 내리더란 말이죠. 십자가가 복인데 어디서 엉터리 같은 돈 번 거, 건강한 거, 애 공부 잘한 거, 이런 것 가지고 사기로 해서 축복 받았습니까, 저주 받았습니까? 이런 식으로 사람 윽박지르니, 세상에 그게 얼마나 큰 사기입니까? 그래서 [큰 사기]라고 이름을 했어요. 큰 사기라고. 작은 사기도 아니고, 최후의 큰 사기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 창세기 10장에 들어가 봅시다. 이제 어쨌든 간에 이 세상에는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중립이 없어요. 축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축복입니다. 염소 아니면 양, 양 아니면 염소. 오른편 아니면 왼편, 왼편 아니면 오른편이에요.
이게 그 중앙에 누가 서 있어요? 예수님께서 인간 세계 한 복판에 중앙에 '기준'하고 섰기 때문에 예수님 자리 빼놓고 나머진 전부다 왼편 아니면 오른편, 오른편 아니면 왼편. 예수님 때문에 세상은 이미 둘로 쫙 갈라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게 언약입니다. 여기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복습하면 하나님 형상이고, 이분만 뭘 다룬다? 거룩한 용서의 피만 다루고, 다른 사람은 못 다루죠. 다른 사람은 다룰 수 없고, 다른 사람은 피에 접근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창세기에 보면, 사람은 식물성 음식만 그러니까 미나리, 고사리, 어제 먹어봤지요. 산채나물. 그런 것만 먹게 되어 있다가 창세기 9장에서는 개고기, 무슨 땅개, 뭐 온갖 것 닭고기 다 먹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동물성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됩니까? 이게 하나님이 나한테 주셨기 때문에 전적으로 내 권한이라는 생각을 꺾어버리고 뭘 조심해야 돼요? 그래, 피는 피해 가야 돼.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생각해 보면, 인간은 이 세상 나머지 인간 이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언약의 주인 되시는 그분의 소관이지, 결코 내가 다스리고 정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분리되죠. 괴리가 벌어집니다. 하나님 형상과 인간의 괴리가.
창세기 10장에 보면,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 이렇게 되는데, 드디어 이 세상에는 세 아들이 분할되는 상태에 있는데, 사실은 세 아들이 분할되는 게 아니고, 결국은 둘로 나뉘죠. 하나는 가나안과 함, 한 쪽은 이게 저주죠. 이쪽은 뭡니까? 셈과 야벳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이것이 이런 게 어렵다. 하나의 공식을 제가 제공할게요.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는 공식은 뭐냐? 자연환경은 인간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같이 축복을 받을 환경인지, 저주를 받을 환경인지 결정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식이에요. 저주 받을 인간이 거주한 땅은 저주의 땅이 되고, 축복받을 인간이 거주한 땅은 축복의 땅이 되는 겁니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주변이 뭐가 받고? 복을 받고. 그래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하면 복을 받고. 자연환경은 이 축복에 따라 운명이 발생되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축복의 땅에 섰다하면 예수님은 더불어 온 것은 뭡니까? 새 하늘과 새 땅. 그럼 예수님 빼놓고 여기는 뭡니까? 이것은 저주받아야 될 유황불로 사라져야 될 유황불 받아야 될 저주받을 현재 보고 있는 하늘과 땅,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 재림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게 되고, 쉽게 말해서 땅은 어떤 인간이냐에 따라서 축복은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축복을 따내려고 하지 마시고 내가 어떤 인간만 되면, 복은 오지말래도 오게 되어 있어요.
다윗을 시므이가 저주했잖아요. 다윗은 신나는 거예요. 왜? 전부다 저주가 오는 도중에 뭐로 변하느냐 하면, 복으로 변해서 다 오니까. 세상에 그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마치 무식한 토인들이 백인 보고 백인을 공격한다고 길에 있는 다이아몬드 주워서 죽어라 던지고 금 던지고 다 던지는 거예요. 백인은 다이아몬드, 자기는 저주한다고, 다이아몬드 주워서 더 주세요. 하고 끌어 모은 거다 말이죠.
다니엘의 세 친구가 세상 사람이 보기에 가장 저주스런 곳에 갔어요. 그게 뭔가 하면, 풀무불. 다니엘서에 풀무불 속으로 들어갔지요. 가장 저주받은 곳인데 그곳이 뭡니까? 예수님이 기다리는 곳이잖아요. 예수님이 함께 있는 곳이잖아요. 환경을 별 문제 안 돼요. 거지 나사로가 환경은 거지였지만 인간만 똑바로 돼 있으니까 나중에 어디 갔어요? 아브라함 품에 안겼지 않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장에는 뭐냐 하면, 꼭 환경과 대조해요. 모세는 애굽의 바로의 아들인 것을 거절하고 하늘의 상을 바라보면서 고난 받기를 즐거워 기뻐했단 말이죠. 그리고 마태복음 5장에 봐서는 내 의와 내 복음에 의해서 즐거워하라. 억지로 미소 띠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기쁘고 즐거운 거예요. 자기는.
왜? 자기는 복음이 있으니까. 환경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환경은 뒤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가는 곳이 축복이니까. 복이 줄줄 따라 오게 되어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은 복을 따내는 사람이 아니고, 복이 따라 오게 되어 있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어린이 집을 하든지, 그냥 백수 같이 놀던지, 항상 가는 곳마다 복이 줄줄. 오지말래도 귀찮아 죽겠어. 그 사람이 대전, 서울, 대전, 부산 찍고 어디가도 그거는 복이 따라 오게 되어 있는 겁니다. 어는 곳에 가든지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복이 오게 되어 있어요. 구태여 축복을 안 원해도 본인 자체가 축복을 부르는 이름이에요. 본인 자체가 축복을 부르는 힘이 돼요. 언약의 소용돌이, 수채 구멍이에요.
아까 시작하기 전에 사람은, 우리 정 목사님이 이야기하셨듯이, 덕이 되는 사람이 있다 하거든요. 물론 정판옥 목사님 보고 했지만. 성도는 항상 어디가도 덕이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언약으로 확정된 체계입니다. 확정된 체계.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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