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곽자기가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육신이
해체되어 흡사 몸이라는 짝을 버린 듯했다.
안성자유가 앞에서 모시고 있다가 물었다.
"무슨 까닭입니까? 육신을 마른 장작 같게 하고 마음을 참으로 불꺼진 재와 같게 할 수
있습니까? 지금 책상에 기대어 계신 모습은 예전의 그 모습과는 아주 다릅니다."
남곽자기가 대답했다.
"언아, 어리석구나, 그런 질문을 하다니! 지금 나는 나를 잊었는데 자네가 이를 알겠는가!"
(불교의 무아론이...열반론이.)
2
남곽자기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자네는 사람의 피리 소리는 들었어도 땅의 피리 소리는 못 들었을 게야. 설령 땅의 피리
소리는 들었더라도 하늘이 내는 피리 소리는 못 들었을 것이네."
3
안성자유가 말했다.
"세 가지 피리 소리가 나는 까닭을 알고 싶습니다."
남곽자기가 대답했다.
"무릇 천지가 기운을 내뿜는데 이를 바람이라고 이름하네. 바람이 일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않지만, 한번 불면 온갖 땅 위의 구멍들이 성난 듯이 소리를 내지. 자네도 큰 바람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어 보았겠지. 산림이 요동함에 백 이름이나 되는 커다란 나무 구멍은 흡사사람의 코 같고 입 같고 귀같고 옥로 같고 바리때 같고 절구 같고 깊은 웅덩이 같고 얕은웅덩이 같기도 하다네. 바람이 불면 구멍들은 제각기 격렬하게 물 흐르는 듯한 소리, 화살이나는 듯한 소리, 꾸짖는 것 같은 소리, 숨을 가늘게 들이키는 듯한 소리, 크게 부르짖는듯한 소리, 낮게 부르는 것 같은 소리, 개가 가늘게 우는 듯한 소리, 개가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를 내기도 하지. 앞바람이 가볍게 소리를 내면 뒤따르는 바람은 보다더 무거운 소리를 낸다네. 바람이 살짝 불면 구멍들은 가볍게 응답하고, 바람이 사납게 불면 온갖 구멍들은 크게 화답하다가 사나운 바람이 그치면 구멍들은 고요해지지. 바람이 멈췄는데도 초목들이 여전히 요동하는 모습을 자네는 보지 못했는가?"
4
자유가 말했다.
"그렇다면 땅의 피리란 땅위에 있는 온갖 구멍이 내는 소리이고, 사람의 피리란 대나무의
그것이군요. 그런데 하늘의 피리란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대답했다.
"무릇 만가지의 것이 바람이 불어대어 각기 같지 않은 소리를 내게 되는데, 그러므로 저마다가 스스로 소리를 내는 것이라네. 모두 스스로 얻은 소리인데 성난 소리를 내게 하는 게 따로 누구이겠느냐!"
5
커다란 지혜는 아주 한가롭지만, 자그마한 지식은 몹시 바쁘다. 훌륭한 말은 담백하고 맑으나 하찮은 말은 따지고 헤아린다. 잠들어서도 쉴새없이 꿈을 꾸고 깨어나면 활동을 시작해 사물과 접촉하면서 나날이 서로 다툰다. 싸우는 사람 중에는 우유부단한 사람, 음흉한 사람, 치밀한 사람등 갖가지이다. 조금 두려운 일에도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크게 무서운 일에는 두렵지 않은 체한다. 그 말투는 화살을 쏘는 것같이 모질어 시비를 판결하는 재판관이라도 된 것 같다. 무언가를 감추는 경우 마치 목숨이라도 되는 듯 마음 속에 꼭 품어 어떻게 해서든지 고집으로 이기려 한다. 따라서 가을과 겨울의 차가운 기운과도 같이 그는 나날이 소진해 간다. 이런 인물은 자기 주장에 푹 빠져 다시는 참됨을 회복할 수 없으며 욕심에 억눌려 무언가에 꽉꽉 막히는데 늙을수록 더해진다. 이 같은 사람은 죽음에 이를지라도 원래대로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
6
세상 사람들은 기뻐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한다.
또한 걱정과 한탄을 하기고 하고 변덕을 부리거나 집착하기도 한다. 또 재앙을 당하기도
하고 교만을 부리기도 하며 솔직하기도 하고 꾸미기도 한다. 진정한 기쁨은 虛에서
나오지만 곰팡이느 습한 곳에서 생긴다. 아침과 저녁이 바뀌어도 왜 그런지 알지 못한다.
그만두자. 이제 그만두자. 아침과 저녁도 이를 얻어 생긴 것이다. 저것이 없으면 내 몸이
있을 수 없고,육신이 없으면 저것이 가탁할 곳이 없다. 이것을 얻으면 도에 가까우리라.
그렇지만 본래 그러하므로 따로 그 무엇이 부리는지는 모르겠다. 참된 자기가 있기는
있어도 다만 그 조짐은 알수가 없고, 참된 자기의 움직임은 일상에 있어 또렸하나
그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참된 자기는 실재하지만 형체가 없을 뿐이다.
7
100개가 넘는 뼈, 9개의 구멍, 6가지 장기가 갖추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어느 것을 나로
삼을까? 그대는 이 모든 것을 자기소 삼겠는가? 그러면 자기가 여럿이 되므로 하나인 몸에
여러 사람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주인은 없고 신하와 첩만 있는 것일까? 신하와 첩은
다투기만 할 뿐 서로 다스릴 수 없다. 교대로 왕이 되기도 하고 신하가 되기도 하는
것일까? 그러나 참된 왕은 존재한다. 구했다고 늘지도 않고 구하지 못했다고 줄지도
않은 채 참된 주인은 의연히 존재한다.
8
일단 몸을 받았으므로 잠시라도 이 육신에서 떠날 수 없으니 다 할 날을 기다리자. 사물과
서로 다투어 삶이 말을 달리듯 순식간에 지나가도 싸움을 그치지 않으므로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평생토록 애를 쓰지만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피로에 지쳐도 돌아갈
안식처가 없으므로 애달프지 아니한가! 세상 사람들은 이를 아직 살아 있다고 좋아하지만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겉모습이 늙어감에 따라 그 마음도 함께 찌들어 가므로 매우 가엾지 아니한가. 인간의
삶이란 이다지도 무지 몽매한 것일까! 아니면 나만 혼자 어리석고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지
않은 것일까!
9
본래 지니고 있는 참마음을 좇아 스승으로 섬긴다면 그 누가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육신이
거짓 자기임을 알고 자기 마음을 스스로 얻은 사람에게만 스승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자에게도 똑같이 있는 법이다.
자기 참마음을 얻지 못하고 시비 다툼을 벌이면, 이는 오늘 월나라로 떠나면서 어제
도착했다는 궤변처럼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이것은 실제로 있지 않은 일을 있다고 억지로
우기는 처사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고집하는 자는 성왕인 우왕이라 하더라도 어찌
알아 줄 수 있겠는가! 하물며 내가 어찌 알아 줄 수 있겠는가!
10
무릇 말이란 무심하게 불어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말이란 機心에서 나오므로 말한 내용은
아직 옳은지 그른지 정해져 있지 않다. 과연 말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사람의말은 새끼 새의 울음 소리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과연 시비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11
도는 왜 가리어져 참과 거짓이 발생하게 되고 참된 말은 어디에 가리어져 시비 다툼이 생기는것일까? 도는 어디 가서 오지 않고 참된 말은 어디에 있기에 시비 논란이 있는 것일까?
도는 자그마한 분별 지식에 가려지고 참된 말은 허황된 말에 가려진다. 따라서 유가와 묵가의 논쟁이 벌어져 상대가 주장하는 바를 비판하고 한쪽이 거부하는 것을 굳이 긍정한다. 상대가 틀리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한쪽이 옳다고 하는 것을 틀리다고 함은 대도에밝음만 같지 못하다.
12
사물을 저것 아니 것이 없으며 옳지 않은 것이 없다. 저것으로부터 보면 자기의 허물은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알면 모두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비롯되고 이것은 저것에서 비롯된다고 한 것이다.
13
저것과 이것은 상대적인 관계에 있다. 하지만 삶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서 삶이 있는 것이다. 옳음이 있으므로 옳지 않음이 있으므로 옳음이 있는 것이다. 옳음에 연유해서 틀림이 있고 틀림을 근거로 옳음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상대적인 시시비비를 떠나 홀로 도에 비추어 본다.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긍정이다.
14
이것이 또한 저것이며 저것 또한 이것이다. 저것에 또한 하나의 옳고 그름이 있고 이것에도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다. 과연 저것과 이것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저것과 이것은 없는
것일까?
저것과 이것의 대립이 그치는 것을 도추道樞하고 일컫는다. 도추라야 비로서 환중環中을 얻어 무궁한 변화를 제어할 수 있다. 옳음도 하나의 무궁한 변화이고 틀림도 또한 하나의 무궁한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大道에 밝음만 같지 못하다"고 한 것이다.
15
내 손가락으로 저 사람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내 손가락이 아닌 것으로 내 손가락이 저 사람의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저 말馬을 가지고 나의 말이 저 말이 아니라고 가리키는 것은 나의 말을 가지고 저 말이 나의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천지도 하나의 손가락에 불과하고 만물도 하나의 말일 따름이다.
16
옳으니까 옳은 것이고 옳지 않으니까 옳지 않은 것이다. 도에 따라 행함에 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사물은 그렇게 부르자 그렇게 된 것이다. 왜 그럴까?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어째서 그렇지 않은 것일까? 그렇지 않으므로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만물은 참으로 본래 그런 바가 있으며 사물마다 원래 쓰임새가 정해져 있다. 어떤 사물이건 본래 그런 바가 없지 않으며 어느 것이라도 옳지 않음이 없는 것은 없다. 따라서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예를 들면 커다란 대들보와 자그마한 집기둥, 문둥이와 서시라는 미인, 그리고 허풍쟁이나 사기꾼이나 궤변가 혹은 괴이한 것을 말하는 사람, 모두 道 가운데에서는 통하여 하나가 된다. 파괴는 곧 완성이며 완성은 곧 파괴이다. 하지만 만물은 본래 완성도 파괴도 없이 다 함께 하나이다.
17
오직 도에 능통한 사람이라야 만물과 하나됨을 알아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지 않고 일반 사람에게 맡겨 둔다. 일반인에 맡긴다함은 그들의 좋아함과 싫어함에 따른다는 뜻이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 따르면 일반인의 뜻에 통하게 되고, 통하게 되면 얻는 바가 있게 되어 도에 가까워지리라. 그는 그대로 맡길 뿐으로 이미 그러면서도 왜 그런지 모르는 것을 道라고 일컫는다.
18
정신을 수고롭게 하여 하나가 되려 해도 끝내 하나됨을 이루지 못한다.
이를 朝三이라 일컫는다. 朝三이란 무엇인가?
원숭이 사육사가 상수리를 원숭이에게 주면서 말했다.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벌컥 화를 냈으므로 사육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주겠다."
이에 원숭이들이 한결같이 기뻐했다.
명실名實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기쁨과 노여움이 교차됐다. 또한 그대로 맡겨야 할 따름인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시비를 조화시켜 "자연의 평등"에서 쉬게 하는데 이를 양행兩行이라 일컫는다.
<양행이란 옳다고 해도 맞고 틀리다고 해도 맞다는 뜻>.
19
옛사람은 지혜가 지극했다. 무엇을 지극하다고 하는가?
본래 한 물건도 없는 자리이므로 지극하고 극진하다고 한다. 아무것도 보탤 것이 없는 경지이다.
그 다음은 사물은 있으나 구분하지 않는 경지이다. 그 다음은 사물이 구분은 되지만 아직
시시비비가 없는 경계이다. 그러나 시비 분별이 횡행함에 도가 가리어졌고 도가 가려지자
애욕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완성과 파괴가 과연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20
완성과 파괴가 있는 것은 옛날 소씨소씨가 거문고를 연주했기 때문이다. 완성과 파괴가 없는 것은 소씨의 거문고 연주 이전이기 때문이다. 소씨가 거문고를 탄 행위, 사광이 북채로 박자를 짚었던 일, 혜자가 책상에 기댄 채 변론한 행위, 이 세 사람의 재주는 극치에 다다랐다. 따라서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 일에 종사했으나, 이 세 사람의 좋아하는 바가 세상 사람들과 달라 자신들이 즐기는 바로써 사람들을 계몽하려 했다.
혜자의 경우 자신도 진리에 밝지 않으면서 남을 가르치려 했으므로 견백론견백론이란 어리석은 궤변으로 시종한 것이다. 소씨의 경우도 아들로서 아버지의 손재주만 흉내냈을 뿐이므로 평생 동안 아무 것도 이룬 게 없다.
이를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면 나 역시 성공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혹은 성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만물과 나는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으리라. 따라서
자신의 빛을 감추는 일은 바로 성인이 도모하는 바이다. 성인은 자기 의견을 내세우는 대신
세상 사람들의 소견에 맡겨 둔다. 이를 본래의 밝음에 따른다고 일컫는다.
21
가령 여기에 한 변론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성인과 한 분류인가? 아니면 다른 분류에
속하는가? 같은 부류이든 아니든간에 그가 성인의 마음에 부합하면 그는 성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22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한번 말해 보기로 하자. 처음이 있고, 처음이 아직 태동하지 않은
때가 있고, 처음이 아지기 태동하지 않은 때마저도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가 있다.
있음이 있고, 없음이 있고, 없음이 아직 형성되지 않음이 있고, 없음이 아직 형성되지
않음도 태동되지 않음이 있다. 그런데 홀연히 있음과 없음이 생긴다. 세상 사람들은 있다
혹은 없다고 주장하지만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하겠다. 지금 나는 이미 말을
하였으나 나의 말이 과연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 모르겠다.
23
천하에 가을날 짐승털의 끝보다 큰 것은 없고 태산도 털 끝보다 작다. 일찍 죽은 갓난아이보다 장수한 이는 없고 팽조도 요절한 셈이다.
천지도 나와 함께 생긴 것이고, 만물도 나와 더불어 하나를 이룬다. 이미 하나가 되었는데
이 밖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미 하나를 이루었다고 말했을진대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이는 또한 말이 아니겠는가.
하나의 말이 둘이 되고 둘과 하나가 셋이 된다. 이렇게 나아가면 유능한 계산기라도 헤아릴 수없거늘 어찌 일반 사람이 셈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無에서 有로 나아가는 셋이 되는데 有에서 有로 진행하는 경우에 있어서랴! 상대적
세계로 나아가지 않고 그대로 맡길 따름이다.
24
무릇 도는 한계가 없는 것이고 말에는 정해진 내용이 없는 것이다. 자기 주장을 함으로써
다툼이 생기는 법이다. 한 번 대해 논쟁에 이야기해 보자. 왼쪽이 있으면 오른쪽이 있고,
倫이 있으면 義가 있고, 분별이 있으면 변론이 있고, 다툼이 있으면 경쟁이 있다.
이를 八德이라 일컫는다.
25
성인은 육합바깥을 그대로 놓아둘 뿐 말하지 않고, 육합 안에 대해서도 대강만 말할 뿐
자세하게 논의하지 않는다. [춘추]경전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선왕의 뜻이었으나,
성인은 이에 대해 명분과 품절만 밝힐 뿐 시비 곡절을 따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나눌 경우 나눌 수 없는게 있고 분별하더라도 분별할 수 없는게 있다. 왜 그럴까?
성인은 만유를 품어 주지만 세상 사람들은 분별함으로써 자기 소견을 과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론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는게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26
무릇 大道는 헤아릴 수 없고, 참된 변론은 말하지 않고, 지극한 인은 어질지 않고, 참다운
청렴은 가득 차지 않고, 진정한 용기는 해를 입히지 않는다.
도를 말로 분명하게 드러내면 도가 아니고, 말이 시비 다툼에 쓰이면 도에 미치지 못하게 되며仁이 어딘가에 고착되면 아무것도 아루지 못하고, 청렴해 맑기만 하면 미덥지 못하고, 청렴해 맑기만 하면 미덥지 못하고, 남을 해치는 용기는 참되지 못하다. 이 다섯 가지는 원래 참된實德이었으나 점차 한쪽에 치우쳐 모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데에 그칠 줄 알면 지극한 것이다. 어느 누가 말없는 변론과도 아닌
도를 아는가! 만일 이를 알면 天府라 이름하리라. 아무리 물을 거기에 퍼부어도 가득차지
않고 마구 퍼내도 마르지 않는다. 그러나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보광이라 일컫는다.
27
옛날에 요가 순에게 물었다.
"나는 종, 회, 서오 세 나라를 정벌하려 하네. 그러나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확연하지 않으니 왜 그런 것일까?"
순이 말했다.
"세 나라는 아직 쑥풀이 무성한 미개한 부족 국가입니다.
마음이 꺼림칙한 것은 어쩐 일이십니까? 옛적에 10개의 태양이 일시에 만물을 샅샅이 비춘
일이 있습니다. 하물며 마음의 덕이 태양보다 밝다면 무슨 꺼리낌이 있겠습니까?"
28
설결이 왕예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만물이 하나임을 아십니까?"
"내가 어찌 알겠나."
"선생님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내 어찌 알겠는가."
"그렇다면 아는 게 없으십니까?"
"어허, 어찌 알겠나.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어디 한번 말해 보기로 하지.
안다고 하는 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
또한 내가 모른다는 것이 아는 게 아닌 줄은 어떻게 알겠나!
이제 자네에게 한번 물어보겠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병으로 반신 불수가 되어 죽게
되지만 미꾸라지도 그렇던가? 사람은 나무 위에 있을 경우 벌벌 떨지만 원숭이도 무서워하던가?
셋 가운데 어느 쪽이 바른 거처를 알고 있는 건가? 사람은 초식 동물의 고기를 먹고 순록읕
풀을 뜯고 지네는 뱀을 맛있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즐겨 먹지. 넷 가운데 어느 누가 올바를
맛을 아는 것일까? 원숭이는 편저를 짝으로 하고 고라니는 사슴과 교배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함께 놀지. 모장과 여희는 세상 사람들이 미녀라고 칭송하지만, 그들을 보면
물고기는 물속 깊이 달아나고 새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순록과 사슴은 결사적으로 달아나지.
넷 가운데 누가 천하의 미인을 아는 것일까? 내가 보건대 사람들이 인의仁義와 시비를 어지럽게 주장하는데 나라고 어찌 그것들을 가려낼 수 있겠나!
설결이 물었다.
"선생님은 이해利害를 모르시는데 至人은 참으로 이해를 모르는 것입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至人은 심묘한 사람이라네. 커다란 연못을 다 태워도 그를 태울 수는 없으며, 黃河와 漢水를 꽁꽁얼려도 그를 얼릴 수는 없다네. 사나운 우뢰가 산을 부수고 태풍이 파도를 몰아쳐도 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지. 이런 인물은 구름을 타고 해와 달을 부리면서 四海바깥에서 노닌다네.
생사로도 그를 움직일 수 없거늘 어찌 이해 따위에 꿈쩍이나 하겠는가!
29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물었다.
"제가 공자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성인은 세상일을 좇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지도
해로움을 피하지도 않고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않고 도를 따르지도 않고 말은 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말하고 말을 해도 말하지 않은 것 같아 초연히 이 세상 밖에서 노닌다고 합니다.
공자는 이를 맹랑한 소리하고 일소에 붙였으나 저는 묘도妙道를 체득한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오자가 말했다.
"이는 황제가 들어도 믿지 않거늘 공구 따위가 어찌 이를 알겠는가! 자네도 지나치게 성급하네.
알을 보자마자 새벽 닭소리를 기다리고, 화살을 보자마자 올빼미 구이를 찾는 격이군. 이제
자네에게 헛소리를 할 터이니 자네도 그리 알고 망녕되게 듣는 게 어떻겠는가.
성인은 해와 달과 나란히하고, 우주를 손바닥에 든 채 두 입술을 합치듯 온갖 변화와 하나가되고, 혼탁한 속세를 그대로 놓아 버려 노예 상태로 서로 멸시하거나 존대하게 되지.
모든 사람들이 부림을 당해 외물에 얽매이게 되지. 성인만이 홀로 어리석고 우둔한 듯해서
천년 만년이 지나도 천연天然의 천진天眞을 그대로 보전하지만 만물이 다하도록 사람들은
자기 주장에 집착해 시비 다툼만 늘어 가지. 삶을 좋아함이 미혹한 게 아닌지 내 어찌 알겠는가.
죽음을 싫어하지만, 죽음이 어려서 떠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감이 아닌지 내 어찌 알겠나?
여희는 예라는 지방의 관리의 딸이었네. 진나라에서 강제로 끌고 갈 적에는 그녀는 눈물로
옷깃을 흠뻑 적셨지. 진나라 왕궁에 이르러 왕과 함께 화려한 생활을 하고 맛있는 고기 요리를 먹게 되자. 그녀는 눈물 흘린 일을 후회했다고 하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 살기를 고대했던 것을 나중에 후회할지 내 어찌 알겠나!
꿈속에서 유쾌하게 술을 마신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면 울게 되고, 꿈 속에서 구슬프게 운
사람은 사냥놀이 갈 일이 생긴다네. 한창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그것이 꿈인 줄도 모르고
또한 꿈을 이리저리 풀어 보다가 꿈에서 깨어난 뒤에야 꿈인 줄 알지. 우리네 삶은 이와
같아서 진정한 깨달음이 있어야 삶이 한바탕 꿈 속인 줄 알게 되지.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자처하여 짐짓 아는 체하면서, 왕입네, 재상입네 과시하려 들지. 참으로 어리석구나, 공자여! 자네도 또한 꿈구고 있는 사람이네. 자네더러 꿈꾼다고 지적하는 나의 말도 또한 꿈 속의 헛소리라네. 이런 이야기는 매우 기이하기는 하지만, 오랜 뒤에라도
성인이 한번 출현해 이 말의 의미를 알아 준다면 이는 아침 저녁으로 만난 것돠 다름없겠네.
30
"내가 자네와 논쟁한다고 해보세. 자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자네에게 지면, 진정 자네는 옳고 나는 틀린 것일까? 내가 자네를 이기고 자네가 내게 지면, 정녕 나는 옳고 자네는 그른 것일까?
한 쪽은 옳고 다른 쪽은 틀린 것일까? 아니면 둘 다 옳거나 둘 다 틀린 것은 아닐까?
나도 자네도 어떤지 알 수 없네.
그런데 사람마다 어둠속에 갇혀 있으므로 누구에게 물어 볼 수 있겠는가!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물어 보면, 이미 자네와 같은 생각이므로 어찌 바르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와 소견이 같은 사람에게 물어 볼 경우, 벌써 나와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으므로 어떻게 시비를 가려 줄 수 있겠는가! 나와도 자네와도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조회하면, 이미 두 사람 모두와 의견이 다르므로 어떻게 바르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나와도 자네와도 입장이 같은 사람에게 조회할 경우, 우리 둘 모두와 입장이 같으므로 어떻게 시비를 가려 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도 자네도 또 어느 누구도 누가 옳은지 알 수 없는데, 그 누구를 기다려야만 할까? 그러면 천연한 大道로 조화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다음과 같이 답하겠네.
옳다는 주장이 있으면 옳지 않다는 주장이 따르고, 그렇다는 입장이 있으면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 생기지. 만일 옳다는 주장이 참으로 옳다면, 옳다는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과 다르다고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네. 그렇다는 입장이 실제로 그렇다면 그렇다는 입장이 그렇지 않다는 입장과 다르다고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네. 빈 골짜기의 메아리 소리는 서로 기다리지.
만일 서로 기다리지 않으면 천연 대도로 조화시켜야 하네. 온갖 변화에 道로서 응하는 것이
바로 천수를 다하는 방법이라네. 나이도 義도 잊은 채 무궁한 경지에서 노닐게 되어 다함없는 경계에 깃들게 되는 것이지.
31
바깥 그림자의 그림자가 안쪽 그림자에게 물었다.
"조금 전 그대는 걷더니 이제는 멈추고, 전에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일어나는구나.
왜 그리도 지조가 없는 게야!"
안쪽 그림자가 대답했다.
"의지하는 게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또한 내가 의지하는 것도 기대는게 있어서 그러네.
혹시 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에 기대고 있는 건 아닐까? 어째서 그런 줄 알며
왜 그렇지 않은 줄 알겠는가. 언젠가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인간 장주인지도 몰랐지.
그러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이 분명히 누워 있는게 장주였다네. 그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그가 된 것인지 몰랐다네. 장주와 나비는 틀림없이 다른
존재일 것이므로 이를 물화物化라고 일컫는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