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태호 교수님이 건강한 모습으로 21일 귀국하셨습니다.
모든일들이 감사 또 감사합니다.
간접적이지만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28.개선문의 깃발과 콩코드광장의 오벨리스크
8월 18일 ,37일간의 영국체류를 마치고 문화와 예술의 도시인 파리에 왔습니다.
새벽 4시 20분에 미리 예약한 택시를 타고 런던의 루턴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하기 위하여 케임브리지 공원 옆에 있는 출발지로 향하였습니다. 런던의 공항이 여러 곳이어서 4시 35분에 히드로 공항으로 가는 버스가 먼저 출발하고 4시50분에 떠나는 루턴 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9시 10분에 파리 행 비행기가 있어서 약간 일찍 공항에 도착하여 첫 번째로 탑승티켓을 끊고 라운지에서 2시간 이상 기다렸지요. 9시 30분에 이륙한 비행기 안에서 20여 분간 영국남동부를 지나는 상공에서 작은 도시들과 넓은 들판 가지런히 정비된 해안선등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경관을 내려다보는 사이에 어느덧 바다위의 구름 위를 날고 있습니다 . 다시 프랑스의 넓은 들판이 나타나고 평화로운 전원도시들을 지나 한 시간 만에 비핼기가 파리 외곽에 있는 샤를드골 공항에 착륙하였습니다.
입국 심사 없이 여권만 확인한 후 공항을 빠져나와서 인근에 있는 호텔로 가는 교통편을 물으니 안내하는 직원이 공항순환버스 탑승지점을 알려 줍니다. 중년의 흑인기사에게 ibis호텔에 간다고 말하니 이를 기억하고 있다가 내릴 때 버스 밖으로 나와서 다른 승객에게 호텔로 가는 구내 전철 타는 곳을 알려주도록 당부하는 등 친절하게 안내하며 두 번째 역에서 내리라고 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두 번째 정류장에 내리니 바로 옆에 찾는 ibis호텔이 보이더군요.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오니 12시 반 (프랑스는 영국보다 한 시간 빠르다), 준비해 온 음식으로 간단히 점심을 들고 두 시간 가량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서 약간 피곤하였다)
오후 3시 넘어 바로 밑에 있는 지하철을 이용하여 파리 탐사에 나섰습니다. 공항에서 시내 중심가까지는 약 40분이 소요되는 꽤 먼 거리이더군요. 뤽상부르 역에서 내려 먼저 인근에 있는 공원을 둘러보노라니 1992년과 1995년에 이어 13년만에 다시 찾은 파리에 대한 감회가 새롭습니다. 1992년 2월에 학술 진흥재단이 주관한 전국대학교수연수 프로그램으로 모스크바, 바르샤바, 베를린을 거쳐 2박 3일간 파리에 머물렀고 1995년에는 우리대학 교수부부와 가족 등 18명이 15일간의 서유럽 패키지여행으로 2박 3일간 파리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3년 전, 둘째 아들이 한 학기를 대학원교환연수과정으로 파리에서 공부하는 기간에 아내가 보름동안 파리에 체류하며 여러 곳을 돌아보고 그 내용을 이메일로 지인들에게 보내주어서 큰 며느리가 이를 ‘단한권의 책’으로 편집하여 아내의 생일선물로 준 적이 있습니다.
모자가 다정한 2주일을 보낸 파리에서 부자가 삼일 간 머물게 되어 부부와 형제 4가족이 파리에 대하여 공통의 화제와 추억을 만들 수 있게 된 것도 뜻 깊은 일이라 여겨집니다. 조카(남동생의 딸)가 파리에 살고 있는데 20여일 후에 치르는 결혼식 준비로 서울에 가 있어서 이번에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북녘에 뿌리내린 둘째형님의 조카들에 이어 멀리 프랑스에 까지 지경을 넓히게(조카사위는 프랑스태생으로 집안이 훌륭한 전도 유망한 청년이다)되어 이래저래 감회가 큽니다.
공원에서 나와 인근에 있는 소르본 대학, 노트르담성당, 파리 고등법원, 센 강변 등을 돌아보고 다시 지하철을 이용하여 새로 조성된 신시가지 쪽으로 향하였습니다.(노트르담 대성당에 입장객이 줄을 이어 서 있고 베네딕도 교황이 9월 12일-13일에 방문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고전적인 건축물들이 늘어선 파리의 중심가와는 달리 세련된 현대 감각이 돋보이는 신시가지 건물들을 카메라에 담고 큰 아케이드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백화점 지하식품점보다 크고 번잡한 식품가게에서 과일 등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지하철을 이용하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개선문 쪽으로 향하였습니다. 개선문은 두 번이나 본 곳인데도 그 모습과 내용이 새롭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1806년 초에 나폴레옹의 명령에 의해 착공되었지만 그의 생전에 완성되지 못하고 30년 지난 1840년에 완공되었는데 1870년의 공화국탄생에 즈음하여 새겨놓은 바닥의 글씨를 보노라니 5공화국에 이르는 프랑스의 정치역정이 떠오릅니다.
오랜 왕정을 끝낸 다수의 지식인들이 인류역사상 가장 큰 획을 긋는 사건이라고 평가하는 1789년의 시민혁명으로 프랑스에 처음으로 공화국이 등장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1804년에 황제가 되면서 제1공화국이 사라졌다가 나폴레옹이 쫓겨나고 루이왕정으로 어이진 왕정이 1848년에 막을 내리고 두 번째 공화국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851년에 나폴레옹 3세가 다시 황제가 되면서 다시 왕정으로 돌아갔습니다. 1870년에 프랑스와 독일간의 전쟁에서 패한 후 왕정에서 다시 세 번째 공화국이 들어섰다가 1939년 2차 대전 때 독일의 침공으로 제 3공화국이 무너졌습니다. 그때 나중에 제 5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드골 장군이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연합국으로 싸워 이겨서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에 내각책임제 정부형태로 제4공화국이 들어섰으나 잦은 내각의 교체와 식민지인 알제리의 독립투쟁 등에 의하여 국정혼란상황이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1958년에 외교, 안보는 대통령, 내정은 총리가 챙기는 2원 집정부 형태의 제 5공화국이 탄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용한 공항과 함께 파리 시내에 같은 이름의 광장이 있는 등 프랑스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샤를드골 대통령은 재임 중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여 깨끗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조용히 은거하다가 사망한 후 고향에 묻혔는데 위대한 삶의 흔적을 묘비에 새기지 않고 단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다고만 적으라고 했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단출하게 묻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정사각의 2층으로 세워진 개선문의 중앙에는 1921년의 1차 대전부터 켜진 무명용사를 기리는 촛불이 계속 타오르고 있고 두 문사이게 삼색의 프랑스국기와 별들의 문양으로 이루어진 유럽연합(EU)의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이 인상 깊게 느껴집니다.
개선문에서 쭉 뻗어 내린 문화와 패션의 중심지인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걷다가 다시 지하철을 타고 콩코드광장에 내리니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오벨리스크 탑 위로 석양의 햇빛이 조용히 비치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찬란했던 위용을 상징하는 거대한 화강암으로 깎아 세운 이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의 남쪽에 있는 아스완에서 제작되어 룩소 지방에 세워져 있는 것을 1800년대에 프랑스가 뺏어 온 것이어서 미묘한 느낌을 줍니다. (그 당시 프랑스 황제는 이 오벨리스크를 가져온 신하에게 손목시계를 건네주며 노고를 치하하였는데 손목시계 백만 개 인들 이 값에 비할 수 있으랴) 오벨리스크가 세워진 견고하고 큼직한 돌판 위에는 원래 루이 15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가 시민혁명 후 철거되고 그 자리에서 루이 16세와 루이 앙트와네트 왕비 등 혁명 당시의 왕족과 정치지도자들 1300여명이 처형당한 역사의 증언대이기도 합니다.
광장에서 개선문 사이를 있는 직선도로가 곧게 뻗어 있고 파리의 명물 에펠탑이 시야에 들어오는 콩코드 광장을 끝으로 첫날의 파리탐사를 끝내고 호텔로 돌아오니 밤 10시가 지났습니다. TV를 켜니 베이징올림픽에서 프랑스선수들이 선전하는 화면들이 나옵니다. 이를 보며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개선문의 주인공이 장군이나 정치 지도자들인 시대에서 스포츠나 문화예술의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이들이 우상으로 떠오르는 시대에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우리 모두 승리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을 받기 원합니다. 나도 한때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디모데 후서 4장 7-8절)는 말씀처럼 모든 자에게 주는 면류관을 얻도록 힘써 살아가십시다.
2008년 8월 19일
파리의 개선문을 보고 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