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9층목탑 복원도 |
황룡사 금당 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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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2018년쯤이면 아파트 21층 높이인 72.9m의 거대한 황룡사지 9층 목탑이 경주에 세워지게 될 것 같다. 경주시는 2000년 12월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에 힘입어 2006년부터 2035년까지 30년 동안 4단계로 나눠서 신라의 최대의 사찰 황룡사의 복원계획을 발표했다(사적 제6호).
황룡사는 신라의 융성기이던 진흥왕 14년(553)에 착공하여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까지 4대 83년간에 걸쳐 중창한 사찰로서 신라의 불교수용 초기에 지은 흥륜사와 함께 신라의 대표적인 왕실 사찰로서 왕궁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용궁남 황룡사'라고도 불렀던 절집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황룡사는 이차돈의 순교 후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의 아들 진흥왕이 화랑도를 만들어서 군사력을 기르는 한편, 왕권강화의 상징으로 삼으려고, 진흥왕 14년(553) 월성 동쪽의 늪을 메우고 궁궐 공사를 시작할 때 황룡이 나타나 하늘로 올라가자 궁궐대신 절을 짓도록 하여 16년만인 569년에 준공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건물이 단층이고 궁궐이나 관아건물이 기껏 2층 정도이던 1500여 년 전에 아파트 21층 높이의 72.9m에 이르는 거대한 9충 탑을 나무로만 만든 황룡사 9층 목탑이 얼마나 신라의 자존심과 임금의 권위를 높였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골의 6차 침입 때 소실된 이후 복원되지 못한 채 황량한 공터로 남아있다.
국립경주박물관 길 건너로 보이는 들판이자 분황사와 붙어있는 황룡사지는 그동안 여러 차례 발굴조사 결과 동서 288m, 남북 281m로서 약2만평의 넓이로서 불국사보다 8배나 큰 절집으로서 그동안 수차 개축과정에서 1탑3금당식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강당의 좌우에도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고, 동서남북으로 마련된 회랑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황룡사가 1, 2차에 걸쳐 형성되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일치하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인 높이 182cm, 폭 105cm에 이르는 거대한 황룡사지 금당 치미(망새 기와)조각에서 어렴풋이나마 금당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또, 금당은 솔거가 벽에 소나무를 그린 그림에 새가 날아와서 앉으려다 벽에 부딪혀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오기도 하는 바로 그 절집이다.
황룡사에 사용된 석자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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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는 남에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상에 있고, 구당과 중문을 연결하여 동서로 회랑을 돌린 주춧돌과 금당의 초심석만 있는 공터를 1963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했다가 복원을 하게 된 것인데, 경주시에서는 복원센터와 기념관을 짓는 이외에 2016년에 담장과 회랑을, 그리고 2018년에는 9층 목탑, 금당, 강당 등을 복원하는데 총2900억 원의 예산 중 절반이 넘는 1500여억 원을 9층 목탑 복원에 쓴다고 한다.
황룡사에는 574년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만들었으며, 584년(진평왕 6년)에는 장육존상을 안치할 금당을 짓고, 645년 선덕여왕 때에는 9층 목탑을 완성했는데, 삼국유사는 고려가 신라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세 가지 보배를 갖고 있어서 침범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3보(三寶)는 황룡사 장육존상, 황룡사 9층탑, 진평왕의 옥대(玉帶)로서 신라의 3보 중 2보를 간직할 만큼 나라의 보호를 받던 절집 황룡사를 과연 복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황룡사라는 옛 이름을 근거로 새로운 관광코스로 삼을 절집을 짓는다는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장육이란 16자 높이로 약5m 정도의 거대한 불상으로서 삼국유사는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소카왕(阿育王)은 철 5만 7000근과 황금 3만분으로 금동불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하자, 인연이 없음을 알고 금동과 불상의 모형을 배에 띄어 보내며 인연 있는 나라에 닿아서 불상이 완성되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 배가 500여 년 동안 바다를 떠다니다가 경주에 도착했다는 것인데, 삼존불상 중 장육존상은 금 1만 198분·철 3만 5007근이, 두 협시보살상은 각각 철 1만 2000근·금 1만 136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황룡사 9층목탑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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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삼국유사의 기록은 신라가 불교와 인연이 깊다는 불국사상과 삼국통일의 꿈을 나타낸 것으로 보지만, 장육존상은 1238년 몽골의 6차 침입 때 황룡사와 함께 소실되고 현재는 부처의 두 다리와 신광을 꽂았던 구멍이 있는 3개의 자연석 대좌만 남아 있다. 그래서 장육존상은 삼존불 입상으로 짐작되고 있다.
진평왕 6년(584)에는 장육존상을 모시기 위하여 크고 아름다운 금당을 지었다.
황룡사를 지은 지 74년 후인 제27대 선덕왕 12년(서기 636년)에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해서 9층 목탑을 세웠는데, 삼국유사와 황룡사 9층 목탑에 들어있던 찰주본기(刹柱本記)에 의하면 황룡사는 당에서 귀국한 자장 대사의 발원으로 643년 이간 김용춘과 아비지가 200여 명을 거느리고 2년만인 645년(선덕여왕 14)에 완성했다고 한다.
9층탑은 당시의 당척(唐尺)으로 약53.45m이고, 상륜부까지 합하면 약72.9m나 되는 초대형 건축물인데, 3국 중 가장 약소국이던 신라가 주변의 9개 국가를 제압하려는 염원으로 1층 일본, 2층 중화, 3층 오월, 4층 탁라(제주도), 5층 응유(백제), 6층 말갈, 7층 거란, 8층 여진, 9층 예맥을 상징한다.
한 변이 22.2m에 이르는 약490㎡(150평 규모)나 되는 넓은 9층 목탑 터에는 1개의 심초석과 64개의 초석, 정면 7칸, 측면 7칸의 9층 목탑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데, 몽고 난으로 소실되기 전이던 고려 명종 때 문인 김극기(金克己; 1150~1204)가 황룡사 9층 목탑에 올라서 느낀 감상을 쓴 시는 아래와 같다.
層層梯繞欲飛空
萬水千山一望通
俯視東都何限戶
蜂穴果蟻穴轉溟
층계로 된 사다리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일만 강과 일천 산이 한눈에 보이네.
굽어보니 경주의 수없이 많은 집들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히 보이네.
황룡사 9층목탑의 모습이 새겨진 신인사지 암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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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황룡사가 층이 있는 누각으로 지어졌으며, 사다리를 만들었다는 점 등을 알 수 있으며, 실제로도 황룡사지 남쪽에서 계단 3개소, 북동쪽에서 1개소가 확인되기도 했다.
한편, 경덕왕 13년(754) 구리 49만 7581근으로서 길이 1장 3촌, 두께 9촌의 황룡사종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12만근인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큰 국내 최대의 종으로서 몽고란 때 몽고군이 배로 싣고 가다가 바다에 빠뜨렸다고 한다.
감포 바닷가 주민들은 지금도 큰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일면 간혹 종소리가 들린다고 하고, 경주에서 추령재 너머 감포까지 흐르는 강 이름이 큰 종을 옮겨갔다고 해서 '대종천'이라고 부르지만, 해군이 감포 앞바다를 수색했으나 종은 찾지 못했다.
경주시는 황룡사 복원 후 스님들의 요사체, 템플스테이, 명상센터, 불교미술공예관 등을 짓는 이외에 공연 및 전시공간, 쇼핑거리, 숙박·음식을 판매하는 신라촌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만들어서 현재 연간 100만 명 수준의 관광객을 300만 명 이상이 찾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나, 황룡사 금당이나 9층 목탑을 복원할 자료가 거의 없어서 결국 '상상 속의 복원'이 될 것이라느니, 현재 건축기술로는 복원이 불가능하다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다.
다만, 일본 법륭사 탑과 경주 남산에 통일신라시대의 사찰 신인사지(神印寺址) 암벽에는 좌측에 9층탑, 우측에 7층탑을 새긴 마애탑에서 9층 목탑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