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의 문화유산 목록 및 해설
관련자료
경기도 양평군의 개관
경기도 양평군의 산업
경기도 양평군의 사회
경기도 양평군의 민속
경기도 양평군의 설화
경기도 양평군의 문화예술행사
경기도 양평군의 추천답사코스
경기도 양평군의 교통 및 지도
행정구역
양평읍楊平邑 강하면江下面 개군면介軍面 단월면丹月面 서종면西宗面 양동면楊東面 양서면楊西面 옥천면玉泉面 용문면龍門面 지제면砥堤面 청운면靑雲面
종교유적
용문사龍門寺
양평군의 역사
〔고 대〕
양평읍 회현리, 강상면 병산리, 양동면 단석리, 용문면 삼성리 등지에서 긁개찍개·사냥돌 등이 출토되어 한강변을 중심으로 하여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용문면 광탄리에서 빗살무늬토기와 석부가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강상면 병산리·대석리, 강하면 전수리, 양서면 대심리, 서종면 수릉리, 개운면 앙덕리 등지에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으며, 개군면 상자포리, 강하면 전수리·양수리에서 민무늬토기와 석기 등이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의 이 지역은 백제에 속했으나 475년(장수왕 65) 고구려의 남진으로 고구려의 양근현(楊根縣)이 되었다. 551년(진흥왕 12) 신라의 정예군단이 한강유역의 고구려 영토를 공략하여 그 세력이 지금의 충주·양평·여주·포천의 남한강과 북한강 유역에 미쳤을 때에는 신라의 지배권내에 들어갔다.
삼국통일 후 경덕왕 때는 빈양현(濱陽縣)으로 개명되어 기천군(沂川郡 : 지금의 여주군)의 영현이 되기도 하였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궁예가 이 지방을 공략하여 그들의 활동무대로 삼기도 하였다. 지평군은 고구려시대에는 지현현(砥峴縣)으로 불리다가 삼국통일 후 경덕왕 때 지평현(砥平縣)으로 개칭되어 삭주(朔州 : 지금의 춘천)의 영현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 옛 지명이 회복되어 양근현으로 되었다. 1018년(현종 9) 잠시 광주목(廣州牧) 영내에 소속되었다가 1175년(명종 5) 양근현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1257년(고종 44) 영화(永化)로 개칭되었으며 고종 연간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몽고병 침입 때에는 지금의 철원·춘천·충주와 함께 몽고병에 유린되는 참화를 겪었다.
1269년(원종 10) 익화현(益和縣)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는 권신 임연(林衍)·임유무(林惟茂) 부자의 반란사건을 진압하여 공을 세운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자정(金自廷)의 고향이므로 승격된 것이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다시 양근군으로 승격되었는데, 이것은 보우대사(普愚大師)와의 인연에 따른 은전이었다. 공민왕은 또 보우대사가 우거한 미원(迷原)고을을 현으로 승격하고 감무를 두었다가 얼마 뒤 다시 익화현의 속현으로 하였다.
지평현은 1018년 양근과 함께 광주 임내에 속하였다. 우왕이 즉위한 뒤 그의 유모 장씨의 고향이라 하여 따로 감무가 두어졌다가 1388년(우왕 14) 혁파되었다. 1391년(공양왕 3) 채철장(採鐵場)이 설치되어 철장감(鐵場監)을 겸무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양근군은 조선시대에도 별 다른 개혁 없이 그대로 존치되었으나, 지평현은 1413년(태종 13) 전례에 의해 현감이 두어졌다가 숙종 연간에 잠시 양근군에 합쳐진 뒤 곧 분리되어 현감이 배치되었다. 1594년(선조 27) 지평현에 운계서원(雲谿書院)이 건립되어 1714년(숙종 40) 사액되었다.
〔근 대〕
1895년 양근군과 지평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908년 양근군과 지평군이 병합되어 양평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종면을 광주군으로 이속하였다. 1938년 갈산면을 양평면으로 고쳤다. 1942년 군행정구역변경 때 설악면이 가평군으로 이속되었다.
1860년대 근세유림의 중망을 받던 이항로(李恒老)가 위정척사의 학문적 이론을 이룬 곳이 서종면 노문리 벽계이다. 이항로의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사상은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인석(柳麟錫) 등의 문인(門人)에 의해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의병항쟁으로 승화되었다.
을미의병운동의 효시를 이룬 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와 평민출신 의병장 김백선(金百先)이 모두 이 지방 지제면 출신이다. 임진강연합의병전선의 용장으로 활약한 의병장 이은찬(李殷瓚)과 기미독립운동의 33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한 박동완(朴東完)도 이 고장 출신이다.
3·1운동 때는 3월 10일 서종면 문호리에서 200명, 청운면에서 150명, 3월 23일 양근면에서 1,000명, 3월 30일 양평읍 도곡리에서 130명, 용문면에서 2,000명, 4월 3일 양근리에서 4,000명, 4월 4일 양동면에서 3,000명 등 1만3000여 명이 시위에 가담하여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였다.
〔현 대〕
6·25사변 때인 1951년 2월 지제면 지평리에서 중공군의 2월공세에 맞서 유엔군이 중공군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막아내었는데, 이 전투로 유엔군은 한국전 참전 이후 최초로 전세를 만회하여 재반격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1963년 1월 1일 여주군 개군면이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1일 서종면 삼회리와 노문리 일부가 가평군 외서면과 설악면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1일 양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9년 4월 6일에는 양서면 국수출장소가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