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안성마춤이다. 생활유기 산업이 발전하여 무엇이든지 주문만 하면 뚝딱뚝딱 잘 만들어내니 지명을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보통명사로 된 것이다. 하지만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자본주의 시대(그것이 포스트포디즘의 다품종 소량생산이든 아니면 포드주의 양식의 단일품종 대량생산이든 지속적인 소비를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으므로 굳이 과학적으로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용어를 구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에 들어서서는 안성마춤이라는 말도 이젠 고어사전에서나 찾아야 하는 사어(死語)가 되어버렸다.
안성은 지리상으로 속리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한남정맥이 경기도와 충청남북도를 갈라 놓는 위치에 놓여있다. 삼도의 경계이지만 산이 높지 않고 낮은 구릉이 많아 안성평야와 죽산분지 등의 기름진 땅과 안성천, 청미천 등의 풍부한 물줄기를 갖추어서 품질이 우수한 경기미와 알이 굵고 맛이 있는 포도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또한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서 주인공 허생이 변부자에게 10만냥을 빌려 안성에 내려와서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제수용 과실들을 모두 매점매석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안성은 옛부터 교통이 발달하여 10개가 넘는 역원이 설치되기도 했었다.
안성에는 매산리 태평미륵을 비롯하여 대농리, 기솔리, 아양리, 동촌리 등 무수히 많은 미륵불이 하생(下生)해 있다. 그야말로 미륵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천년왕도 경주가 "공식문화"를 대표하는 불국토라고 한다면 안성은 남사당패와 미륵불이 어우러져 용화세계를 꿈꾸는 "대항문화"를 대표하는 불국토다.
송문주 장군을 모시는 할머니와의 만남
그럼, 지금부터 불국토로 여행을 떠나보자.
차는 수원을 뒤로하고 오산인터체인지를 통해서 고속도로로 들어가 경쾌하게 고속도로를 질주하다가 안성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안성읍을 우회하여 죽산리로 향한다. 안성읍을 거치지 않고 외곽도로를 따라 죽산으로 향하니 죽림리에 못미쳐 도로의 왼편에 봉업사지 당간지주와 5층 석탑이 보인다. 5층 석탑은 단층기단에 옥개받침이 5개로 위쪽에 비해 아래쪽이 너무 무거워 균형이 없어 보인다. 옥신의 면석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고 다만 면석보다 약간 올라온 우주(귀기둥)의 선만을 새김해 놓았다.
『명찰순례』의 저자 최완수 선생은 고구려에서 영향을 받은 북방양식이라는 의견을 제시하는데, 왜 고려시대에 옛 백제땅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북방양식의 탑이 들어서게 되는지 자못 궁금하다. 그러나, 폐사된 절은 풍경의 침묵으로만 대답할 뿐 전해오는 기록이 없으니 알 길이 없다. 봉업사는 엄청나게 큰 대가람이었던 모양으로 멀리 비봉산 아래의 밭과 맞닿은 곳에 3층 석탑이 서 있다. 논길을 따라 그곳까지 걸어가면서 길섶을 보니 개망초꽃, 달맞이꽃, 꿀풀, 쑥들이 빙그레 웃어준다. 멀리 산기슭에 무리지어 피어있는 밤꽃 의 이상야릇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鄕村의 고샅길을 걷는 기분은 길을 떠나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3층 석탑도 5층석탑과 거의 비슷하게 안정감이 없는데 다만 옥개받침이 4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 탑의 뒤쪽에는 석불이 1구 보이는데 몸통에 비해 머리와 손이 너무 크고 뭔가 굳은 결의를 다지는 무인상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석불은 양쪽 어께를 법의로 가린 통견의를 입고 있고, 법의의 무늬가 U자형의 곡선을 이루고 있다. 나는 춘헌님께 석불이 인자한 인상이 아니라 뭔가 쫓기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보아 변란 중이나 변란 후에 조성한 석불로 신라말 진성여왕 때 죽주를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죽주장군이라고 칭한 기훤의 모습을 미륵불로 형상화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우스개소리를 했다. 안내판을 보니 고려 중기쯤의 조성이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다. 그러나 9세기 전반에 석굴암 불상이 조성된 직후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석불입상 외에도 다른 석불입상(보물 983호)이 출토되었는데 지금은 칠장사 대웅전 옆에 옮겨 놓았다.
죽주산성이 어디쯤일까 두리번거리면서 석불 둘레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개망초꽃을 바라보는데 산길을 내려오는 할머니 한 분이 보였다. 할머니께 죽주산성터가 어디인지 여쭈어보니 할머니는 산성터는 잘 모르겠고 산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송문주 장군을 모시는 건물과 약수터가 있다고 하신다. 자신이 그곳을 지키는 사람이라 하면서 거기까지 올라갔다가 아래에 보이는 빨간 지붕집으로 내려오면 이곳 역사를 알리는 안내문을 주시겠단다. 산길을 올라가면서 보니 엉겅퀴꽃과 홀씨만 남은 민들레, 개망초꽃 같은 들꽃들이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마도 저 할머니는 송장군의 신이 내린 降神巫거나 토착신앙과 결합된 불교를 믿는 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약수터에서 물 한모금을 마시고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 집에 들어가니 할머니가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집안에 들어가보니 무당이나 점쟁이는 아닌가보다. 할머니는 원래 서울에 살았는데 전국을 기도하러 다니다가 이곳에 땅을 사서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 지금은 안성산업대학에 다니는 손자와 둘이 살고 있다고 하시면서 죽주산성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한 종이를 한 장 주신다. 집을 나서면서 집마당에 피어있는 접시꽃이며 난초를 너무 아름답다고 하니 할머니는 웃으시면서 난초 화분을 하나 선물로 가져가라신다. 이 할머니는 무상주보시를 하시는 것일까? 할머니의 웃음이 보살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바로 옆마을에 있는 태평미륵으로 향했다.
송문주- 김윤후 장군과 태평미륵
매산리의 석불입상은 일명 태평미륵이라고 불리는데 고려시대 몽고군을 물리친 송문주 장군과 김윤후 장군의 우국충정을 기리고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고려사』 권 103 "박서 송문주전"의 의하면 1236년(고려 고종 23년) 몽고군이 침략하여 죽주산성까지 도달하자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 이던 송문주 장군이 신출귀몰한 전술로 몽고군을 대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김윤후 장군이 몽고의 장수 살례탑을 사살하였다고 한다.
한편 석불입상이 있던 자리가 太平院의 북쪽이었으니 사람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자리에 국가사업으로 미륵을 세워 국가권력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세웠다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조선 영조때 최태평이란 사람이 인생무상을 깨닫고 無學修德의 極樂道를 열고자 조성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머리가 신체의 다른 부분에 비해서 거대하서 인체 비례가 어색하고, 조각자체도 서툴고 투박하며, 손과 얼굴의 양식도 충남 연산의 개태사 석불이나 은진 관촉사의 미륵불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전설과는 달리 고려 초기의 조성일 가능성이 많다.
미륵불상 앞에는 1층기단과 옥개받침이 3개인 5층 석탑이 있는데,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인지 원래 있었던 것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칠장사 부도와 철당간
매산리에서 다시 안성읍 방향으로 가다가 광혜원 진천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여 극락이라는 이름을 지닌 마을을 지나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보면 오른편 양지바른 언덕에 부도밭이 나타난다. 여기서부터가 칠장사다.(그러나 지금은 절입구까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부도는 모두 석종형으로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부도밭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사하촌이 나오는데 왼쪽 밭에 공장의 굴뚝같은 거대한 쇠기둥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철당간이다.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는 무쇠당간으로 원래는 30마디 였다고 하나 현재 15마디가 남아있다. 안내판에는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칠장사가 있는 지형이 배 모양의 형국이므로 돛대로써 이 당간지주를 세웠다고 하나 근거가 없다. 오히려 이러한 풍수지리설 때문에 조선시대에 욕심많고 몰지각한 세도가들이 자신들 조상의 묘를 쓰기 위해 여러 번에 걸쳐 칠장사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안내판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야 되리라.
"옛날에는 절집의 영역을 알리는 깃발(幢)을 높이 매달았는데, 그 깃발을 매단 깃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며, 당간을 받쳐주는 기둥돌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한다. 그리고 당간지주 사이에 당간을 꽃는 구멍을 원공(圓孔)이라 하고, 당간을 고정시키는 구멍을 간구(竿溝)라고 하는데 보통 당간지주의 맨 위와 맨 아래 조금 위에 만든다. 지금은 당을 매단 절집은 없고, 부석사 등의 절집과 보원사지, 봉업사지, 회암사지 등의 많은 폐사지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당간지주는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칠장사와 같이 철제 당간이 남아 있는 절집은 갑사, 법주사, 청주 용두사지 등 몇 안된다."
당간지주 옆에는 1671년(현종 12년)에 절을 중수하면서 세운 사적비인 "칠현산칠장산중수향화비"가 세워져 있는데, 여러번에 걸친 폐사로 책으로 된 사적기가 내려오지 않은 칠장사의 연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철제당간에 기대서서 칠장사 앞 마을을 내려다 보니 신경림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칠장사 부근
신 경 림
극락이라고 이보다 더할쏘냐
그래서 동네이름은 극락
짙은 녹음에 건조실 반쯤 보이는 곳
병든 늙은이 개울가에 앉아 졸고 있다
시애비 병수발도 지겹고 또
못난 농투성이 지애비도 미워
며느리 돈벌이 하겠다 집 나간 지 십 년
엊그제는 새 며느리도 도망갔지만
철모르는 손녀딸애는 마냥 즐겁다
새로 온 여선생이 언니 같대서
읍내에서 공장 다니는 사촌언니 같대서
공일날이라고 절에 올라가 하루를 보낸다
여선생한테 배운 사방치기로 하루를 보낸다
갈수록 궂은 일뿐인 마을을 굽어보면서
부처님이 웃으시는 까닭을 알겠다
칠장사의 내력
칠장사의 창건을 "경기도지"를 비롯한 몇몇 책에는 신라고승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연간에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전혀 근거가 없다. 다만 7명의 악당을 교화시켜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화가 전해내려오는 혜소국사의 중창사실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다. 혜소 정현(972~1054)은 이 고장에서 태어나 칠장사의 융철대사에게 유가교를 배우고 996년 승과에 급제하여 승통과 왕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명당 자리인 절터를 자신 조상의 묘자리로 쓰려는 여흥민씨를 비롯한 세도가들에 의해 여러차례 절이 불살라지고 중창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광해군에 의해 10년 세월동안 서궁에 유폐되는 수난을 당하고, 자신의 아버지인 김제남과 아들인 영창대군이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한 인목대비가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1623년(인조 1년)에 이 절을 집안의 원찰로 삼기도 했다. 인목대비는 자신의 심경을 피력한 한시를 적은 친필족자와『금강명최승왕경』친필필사본을 절집에 하사하였는데 현재 친필족자는 절집에서 보관하고 있고『금강명최승왕경』은 문화재 도굴꾼에 의해서 도난당하였다가 다시 찾아서 현재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한다.
소설『임꺽정』에서 조광조가 미복을 입고 자주 찾아가서 배움을 청하였다는 갖바치가 만년에 병해대사라는 이름으로 칠장사에 주석하고 있을 때, 임꺽정이 그를 만나기 위해 칠장사를 출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나 현재 그것을 고증할 만한 사적은 남아있지 않다.
무인풍의 부락부락한 눈을 가진 주지스님의 사자후
절집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사천왕문을 통해 절집을 들어갔다. 인조반정 이후에 조성된 사천왕상은 무인풍의 당당하면서도 만면에 미소를 띈 여유있는 모습이다. 요사채 앞을 지나 1726년(영조 2년)에 세워졌다는 명부전을 둘러보았다. 내부의 목조상들은 좀 뭉퉁하면서도 둔하게 생겼다. 개심사나 청룡사의 목조상들에 비해 조형성이 뒤떨어진다는 생각이다.
명부전 옆에는 관음보살 좌상과 남순동자와 해상용왕 입상을 좌우협시로 한 관음전이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된 주심포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건물의 구조와 건축양식으로 보아 나란히 서 있는 대웅전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건물인 것 같다.
대웅전은 다포계의 공포양식에 맞배지붕을 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언제 건축하였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후기에 원통전과 함께 지어졌을 것 같다. 관음전은 1725년(영조 1년)에 세워 졌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대웅전 앞의 괘불대도 관음전과 같은 해에 건립되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으니 대웅전의 건립시기도 그 즈음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대웅전 안을 보니 주불은 석가모니불로 문수, 보현 양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탱화와 1782년(정조 8년)에 조성했다는 범종, 천장의 양식등을 보려고 하는데 누가 뒤에서 큰소리로 호통을 친다.
내려가서 보니 이 절의 주지인데 당신들은 누구냐, 뭣하러 왔느냐, 누구에게 얘기하고 들어왔느냐 하면서 절이 떠내려 가도록 큰소리로 꾸짖는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문화유산답사를 온 사람들인데 칠장사의 문화유산을 보기 위해서 왔다고 얘기했다. 그런데도 그 주지스님은 남의 집에 들어가면 주인에게 얘기하고 들어가는 것이 예의인데 예의가 없다는 둥, 당신들같이 답사를 다닌다고 하면서 문화재를 도굴하는 사람이 많다는 둥, 이곳은 종교의 성전인데 멋대로 둘러 본다는 둥 하면서 입에 개거품을 물면서 계속 큰소리다.
우리는 어처구니가 없어 한동안 멍하니 있어야 했다. 한참동안 꾸지람을 들은 후 우리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무척이나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우리가 그렇게 무엇을 그리 크게 잘못했다는 것인가? 블교신자건 불교신자가 아니건 우리의 문화유산을 둘러볼 수 있는 것이고, 절집에 가서 마음으로 부처님께 존경의 표시를 하면 그만이지 신자도 아닌 사람이 꼭 절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도를 닦는 승려라면 좀 더 인자한 얼굴로 좀 더 부드러운 말로 타일러 보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게다가 도대체 절집의 주인이 어디 따로 있다는 말인가? 불교는 그야말로 철저히 무소유의 정신으로 마음의 깨달음을 얻는 종교라고 하거늘 주지가 절의 주인이라는 논리는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한참 동안 호통을 치다가 신도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분이 말을 걸자 절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 주지스님이 무서워 대웅전 앞의 괘불대를 보는둥 마는둥 하면서 대웅전 옆에 있는 봉업사지 석불입상을 둘러보곤 원통전 뒤쪽에 있는 혜소국사비로 올라갔다. 혜소국사비는 귀부와 탑신과 이수가 해체되어 각각 나뉘어서 놓여 있었다. 귀부는 크기에 비해 조각이 그렇게 섬세하거나 壯麗하지 않았다. 탑신은 재질이 충청도 남포에서 생산되는 남포오석(흑대리석)으로 혜소국사의 일대기가 적혀 있으며, 이수는 용과 구름무늬가 새겨졌으며 귀부에 비해서 화려했다.
혜소국사비 옆에는 9층으로 된 혜소국사부도가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과 주변 세도가들에 의해서 파괴되고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현재 세워져 있는 부도는 그 후에 다시 조성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혜소국사비 맞은편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는 조그마한 나한전이 있다. 이 소나무는 나옹선사가 심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수령이 그만큼은 되지 않을 듯싶다. 하지만『동국여지승람』권 8 죽산현 고적조에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이 태조왕건의 진영이 모셔진 죽산의 봉업사에 왕과 함께 들렀다가 서운면에 있는 청룡사를 충창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웃마을인 칠장사에 들렀을 가능성은 있다.
오던 길을 다시 내려와 연못가에 있는 부도 2기를 보면서 절집을 나서려는데 아까 그 무서운 주지스님이 사천왕상을 보고 가라면서 다시 부르신다. 우리는 들어올 때 사천왕상을 보았지만 다시 사천왕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주지스님은 지나가는 아주머니 신도 두명을 더 부르시더니 예의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사천왕상에 대해서 설명을 하신다.
그 사이 수녀님과 일행 한분이 주지스님의 설명을 듣기 위해서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사천왕은 사찰을 수호하는 외호신중으로 비파를 든 동방지국천왕, 용을 든 서방광목천왕, 칼을 든 남방증장천왕, 탑을 든 북방다문천왕이 있는데, 왼쪽에는 지국천왕과 다문천왕을 오른쪽에는 증장천왕과 광목천왕을 두는 것이 원칙이라 한다. 주지스님은 보관과 갑옷, 천의 등에 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하시며 칠장사 사천왕상의 세밀하고 뛰어난 표현은 조선후기의 사천왕상을 대표하는 우수한 문화재라는 자신의 견해도 밝혔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재 관람 수준과 문제점, 행정당국의 문화재 보호와 복원에 대한 무성의, 기독교 등의 타종교 신자들이 불교를 이교도라 하여 사찰의 문화재를 파손하는 몰지각한 행위 등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도 피력했다. 또한 칠장사의 역사와 혜소국사비와 철제당간지주에 대한 설명이며, 현재 사천왕상의 보관과 갑옷, 천의 중 단청을 다시 하면서 잘못된 부분 등 쉴새없이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중국 여행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서예를 하기 때문에 전시회도 열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칠장사 주지 스님이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면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자신을 알리기를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아마도 아까 대웅전 앞에서 우리를 호통친 이유도 자신에게 이렇게 사자후를 토할 기회를 주지 않은 섭섭함 때문이었나보다. 다음에 안성땅으로 답사를 올 때는 미리 칠장사에 연락을 해서 주지 스님께 답사안내를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절문을 나섰다.
칠장사에서 마지막으로 절집 뒤편에 있는 벽응대사(1576~1657)행적비를 찾아보았는데 거기서 발견한 새로운 사실은 비문의 사찰명이 七長寺가 아닌 漆長寺로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혜소국사의 일곱명의 악인 교화에서 이름붙여진 七賢山과 七長寺가 어떻게 漆長寺로 불리게 되었는지 하는 궁금함을 뒤로 한채 기솔리 미륵불이 있는 쌍미륵사로 향했다.
공식문화와 대항문화
칠장사로 들어왔던 길을 다시 나가서 안성읍으로 향하다가 기솔리에 이르니 "대한불교법상종 본산사찰 쌍미륵사"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을 따라 비포장의 산길을 한참 올라가지 지은지 얼마되지 않은 듯한 절집이 보인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폐사지에 불과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칠장사에서 호통을 당한 전력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젊은 스님께 이곳의 미륵불을 보러왔다는 것과 법상종이 조계종과 차이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쭸다.
법상종은 미륵신앙을 주된 신앙으로 하는 불교종파로 대처승을 허락하는 모양이다. 미륵신앙을 설하는『미륵대성불경』에 미륵신앙의 귀의자들을 "재난과 횡액, 가난과 외로움에 고통받는 사람들, 다른 사람에게 종이 된 사람, 여덟가지 재난의 업을 지어서 큰 고통을 받는 사람을 보고 그들의 고통을 구제하여 벗겨주는 사람, 서로 이별하고 패를 갈라 싸우고 송사를 일으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좋은 방편으로 화합시키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법상종이 조계종에 비하면 교세가 너무 미약하며, 미륵신앙을 신봉하다보니 참선을 통한 깨달음과 경전공부를 겸한 수행을 하는 조계종의 비구승들에 비해 여러면에서 수준도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조계종이 인텔리의 종교라면 법상종은 프롤레타리아의 종계라고나 할까?
절집의 총무라고 하는 그 젊은 승려는 조계종과 서의현 같은 승려들을 한참동안이나 비판하며 원효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대처승이 비구승보다 더 뛰어날 수도 있는데 이승만 정권시절 불교정화운동으로 조계종이라는 거대종단이 생기는 바람에 대처승이 곤란에 처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경전은 누구나 읽으면 깨칠 수 있으나 깨달음은 자신이 직접 느껴야 된다면서 道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또한 속리산 법주사, 김제 금산사 등이 법상종 계열의 사찰이었으나, 불교정화운동 때 뺏겨서 지금은 조계종 종단의 사찰로 되었다는 얘기를 들려주면서 법상종의 힘이 좀 더 세지면 재판을 통해서 되찾겠다고 한다.
미륵이 많은 땅, 안성에는 법상종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이 함흥지방의 구전무가인「창세가」를 이땅의 민중들을 희망 또는 좌절로 이끌었던 미륵사상을 점검하면서 현실과 이상의 갈등을 분석한 글이 떠올랐다.
김현은 석가와 미륵의 대립을 공식문화와 저항문화의 대립구조로 분석하면서, 도박으로 보기에는 놀이처럼 보이는 내기(또는 절제된 폭력)에 의해 승패를 결정짓는 의미를 "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창세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 불교의 교리는 이미 공식이념화하여 엄청난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았을까? 석가는 지배이념화하여 피지배계층의 원한 -나는 이 말을 한이 아니라 니체가 쓰는 르상티망의 뜻으로 쓴다-을 업으로 돌리려는 시도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이, 미륵을 석가 위에 놓게 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륵신앙이 형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륵하생의 이름을 빌린 민란이 자주 일어나고 있따는 불교사상 연구자들의 지적은 음미할 만하다. 피지배계층은 본능적으로 지배이념화한 석가적인 것을 미륵적인 것에 의해 극복하려고 한다. 석가적인 것은 그때 차라리 마성이고, 미륵적인 것이 그때는 불성이다.「창세가」의 미륵님이 석가님을 꼭, "축축하고 더러운 석가야"라고 부르고 있음을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석가적인 것은 더럽고 축축한 것이다. 아니 차라리 공식적인 것은 더럽고 축축하다. 공식적인 것은 맑고 깨끗한 것이 아니라 축축하고 더럽다. 공식적 질서 역시 그러하다. 석가님의 승리는 공식문화의 승리이지만, 그 공식문화의 질서는 가짜 질서이다. 그 질서를 깨뜨려 마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미륵불에 귀의할 수밖에 없다. 그 미래불의 이름으로, 반란의 의도를 감추고, 현재의 공식문화를 비판하고 비난하기 위해서는, 미륵불을 과거불로 바꿔놓고 석가님의 더럽고 축축한 면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라는 것이「창세가」를 만든 이들의 마음의 움직임이 아니었을까? "(김현,「폭력과 왜곡」『전체에 관한 통찰』pp 365~366)라고 얘기했다.
쌍미륵불
법상종계열 절집의 주존불은 미륵불로 용화전이 주불당이다.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의 교화로 중생을 제도하므로 미륵불을 봉안한 전각을 용화전 또는 미륵전이라 부르는 것이다. 쌍미륵불은 용화전 옆에 세워져 있는데 동쪽에 몸이 통통한 미륵을 남미륵, 서쪽에 몸이 날씬한 미륵을 여미륵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쌍미륵불이 있는 산을 국사봉이라고 하므로 이곳은 국사신앙터라고 할 수 있겠다. 국사봉 정상에도 미륵불이 3기가 더 있다고 한다. U자 형의 법의 처리나 머리와 손이 몸체에 비해서 너무 커서 비례에 맞지 않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안성지방의 미륵 중의 하나라고 보아야겠다.
절집을 내려오는데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눈에 띄어 마을 노인들에게 물어보니 "장독바위"라고 불리며 전해오는 얘기는 자신도 잘 모르겠단다. 자료를 찾아보니 선녀가 하강하여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와 "舞仙바위"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무선바위 보다는 장독바위가 더 친근하면서도 생활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안성읍으로 향했다.
종소리의 공명
안성읍에 있는 "안성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춘헌님과 안성유기점에 들러서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김근수 할아버지도 만나고 딸과 며느리들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안성마춤의 유기들도 구경을 했다. 안성에서는 주로 생활유기를 만들었다. 유기는 구리와 주석, 아연, 니켈을 넣은 합금인 놋쇠로 만든 생활도구다. 유기를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라고 한다. 얇은 판을 두드려서 만드는 방법(방짜제작법)과 주형을 만들어 쇳물을 부어 만드는 주물방식(주물제작법)이 있다고 한다. 안성은 주물제작법으로 유기를 만들고, 평북 정주의 납청지방에선 방짜제작법, 전남 순천지방에선 반방짜제작법으로 유기를 만든다.
안성 유기공장은 현재 안성공단으로 이주하였고, 할아버지의 아들이 대를 이어 공장을 경영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유기점의 옆건물에는 유기박물관을 건립할 예정이라고 한다. 춘헌님은 전시된 조그마한 종들을 여러번 쳐보시더니 종소리의 공명음을 빠져 들어 결국 조그마한 종을 하나 사 가신다.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서 열 번씩 쳐보시겠단다. 이제부터 춘헌님의 아파트는 바라밀(paramita : 到彼岸)의 세계가 될 것 같다.
남사당의 본거지 청룡사
늦은 점심을 먹고 짧은 휴식을 취하고 나니 뜨겁던 한낮의 태양도 어느덧 수그러들었다. 차는 안성읍을 빠져나가 청룡사가 있는 서운면으로 향한다. 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1265년) 명본대사가 창건하여 대장암으로 불리다가 공민왕 13년(1364년) 선각왕사라 불리는 나옹대사가 중창하여 푸른 빛을 띈 용 한마리가 다섯가지 색으로 빛나는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산이름을 서운산이라 하고 절이름을 청룡사로 고쳤다고 한다. 그 이후에 몇번의 보수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청룡사는 황석영의 소설『장길산』에 나오는 남사당패들의 근거지로 유명한데, 실제로 옛날에 남사당패들은 겨울을 청룡사에서 난 다음 봄부터 가을까지는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가지고 전국의 장터를 떠돌아 다니면서 춤과 줄타기에 재담과 소리를 곁들이고 악기를 동원하는 남사당 여섯마당놀이를 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들은 전국의 시장을 떠돌면서 가장 빨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하는 정보의 전파자였으며 청룡사는 그 정보가 집중되는 장소였다. 100년 전의 근세에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던 여장부 바우덕이는 지금도 안성지방에서 회자되는 유명한 인물이다.
사하촌과 절집의 경계에 중수사적비가 보이는데, 사하촌의 가게집을 지으면서 모래며 자갈을 사적비 옆에다 쌓아 놓았다.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한 관리수준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청룡사 절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사천왕문이라는데 사천왕상은 온데간데 없고, 조선시대 양반집의 행랑채처럼 양쪽에 방을 만들어 놓았다. 사천왕문을 지나 요사에 걸린 청룡사 현판은 눈에 익은 글씨로 지난번 수원답사 때 용주사에서 보았던 죽농 안순환의 글씨다.
청룡사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대웅전 건물이다. 다른 절집과는 달리 서향을 한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집으로 마치 서산 개심사의 심검당 건물처럼 울퉁불퉁 휘어진 자연목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여 지었다. 이러한 건축방식이 조선후기에 상당히 유행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대웅전 현판글씨도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 같은데 건물과 마찬가지로 "웅"자와 "전"자가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 법당 내부에 있는 삼존불은 주불인 석가불상을 흙으로 빚었으며 문수와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대웅전 왼편에 있는 금동 관음보살상은 고려후기의 불상이라고 하며, 반대편에 보이는 커다란 동종은 1614년(헌종 15년)에 주조되었다고 한다.
대웅전 앞 마당에는 명본스님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층 석탑이 서 있는데 대웅전과 비교했을 때 작은 탑이지만 당찬 모습을 하고 있다. 상륜부가 사라지고 기단부, 탑신부의 일부분이 깨어진 고려시대의 탑이다. 대웅전 앞 마당에는 또한 괘불대가 있는데, 일년 중 큰 행사 때 아마도 커다란 괘불탱화를 걸었을 것이다.
이 절집에는 하동 쌍계사의 감로왕탱보다 50년이나 앞선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감로왕탱 중에서 가장 오래된 감로왕탱이 걸려있다고 하나 찾지 못하였다.
청룡사의 느낌은 서산 개심사와 비슷한 점이 많은데 대웅전 오른편에 있는 명부전도 그렇다. 지장보살상과 좌우협시로 선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상을 비롯하여 시왕상, 판관, 녹사, 사자, 장군 등의 조각솜씨가 돋보인다. 원래는 흙으로 빚은 일곱동자상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잃어버리고 현재는 하나의 동자상만이 따로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절집 마당에 있는 함박꽃나무를 뒤로 하고 사천왕문을 나서니 어느덧 해는 서산마루에 걸쳐 있다. 절집 밖에 있는 부도밭에서 저물어 가는 석양을 보면서 침묵으로만 대답하는 안성의 풍경과 묵언의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마지막으로 미륵불과 남사당이 어우러진 용화세계를 꿈꾸는 불국토 안성의 답사를 마감했다.(1994년)
* 1994년에 안성을 답사하고 쓴 답사기입니다. 그 사이 안성에도 많은 변화가 있어서 봉업사지가 전면 발굴에 들어가기도 했고, 청룡사나 석남사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아마 지금 답사를 다녀온다면 이 글과 전혀 다른 답사기를 썼을 겝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안성 맞춤 뿐만이 아니라 안성탕면도 있던데용~~ 농심 안성공장이요!!
넘 좋아요 ...원더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