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1)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2)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동안 사도행전을 통하여 바울사도가 예수님을 핍박하다가 오히려 예수님께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부터 로마서를 보겠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가기 전에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빠르게 읽으면 30분 정도면 로마서를 다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서 주석과 강해는 로마서 분량의 수천 배의 주석과 강해가 나와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경우에는 로마서 1장의 강해설교가 무려 5백여 페이지의 책 한권입니다. 로마서 9장까지만 이런 책 아홉 권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복음의 풍성함이 이렇게 엄청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 가운데 로마서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감당하였는지는 교회사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마틴 루터가 1515년 로마 카토릭의 신부요 신학교수로서 로마서를 강해하다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말씀으로 인하여 루터 자신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온갖 종교적인 선행이나 고행을 통하여서도 얻을 수 없었던 평안과 기쁨을 로마서를 통하여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종교개혁이 오늘에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이 로마서의 말씀을 통하여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기를 소원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살아계셔서 바울사도를 사로잡아 돌려놓았듯이 우리들도 말씀으로 사로잡아 돌려놓으시기를 기대하면서 이 말씀을 대하고자 합니다.
종, 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자신의 신분이 종이라고 합니다. 이 당시의 종이란 노예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스스럼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종이란 자기의 주도권이 없는 것입니다. 자유라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주인의 종이 된 것이 너무나 기쁘고 자랑스러워 말하는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이 스스로 누구의 종이 되려고 합니까? 모두가 종이 되지 않으려고, 또는 낮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살고 있는 세상에서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은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전에는 누구의 종이었습니까? 마귀의 종이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위하여 열심을 낸다고 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자기를 불러주시고 그의 은혜를 받고 나니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오늘 오후에 볼 출애굽기 21:1-6절에 보시면 어떤 종이 칠년을 봉사하고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고서 자녀를 낳았으면 아내와 자식을 상전에게 값을 주고서 데리고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값을 치르지 못하면 자기 혼자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이때 종이 상전에게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아니하겠노라고 합니다. 그러면 상전이 재판장 앞에 가서 그 종의 귀를 송곳으로 뚫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가 영영히 상전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종이 자기의 자유를 포기한 것은 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자기의 상정이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종에게 아내도 주시고 살게 하셔서 자식도 낳았는데 이제 자기가 자유 할 수 있다고 해서 혼자 나가는 것이 아니라 평생 상전의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통하여 자유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종교성에서 자유,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처럼 비 진리에서 자유 하는 것은 좋습니다. 바울도 이러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자기의 육체의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13-15절입니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ㄱ)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사도, 계속하여 1절을 봅니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고 이어서 사도라고 합니다. 사도라는 말이 보내심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종이라고 하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만 사도의 특별한 임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계시를 기록한 것입니다. 몰론 사도 중에 계시를 기록한 사도도 있고 그렇지 아니한 사도도 있지만 계시를 기록하는 것은 사도로 제한된다는 의미에서 사도의 특별한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사도성으로 인한 반대에 부딪히면 자신이 적극 사도임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친히 사도로 부름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바울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름을 받은 것은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이란 말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되고 기쁜 소식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취업, 승진, 합격, 소원성취 이런 것만 기쁜 소식으로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성경에 증거 하는 기쁜 소식에 대하여 시큰둥한 반응 같아 보입니다. 이런 저런 사소한 문제들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저 자신도 로마서를 통하여 다시 점검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함께 도대체 왜 복음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복음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런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위하여, 바울사도가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 부름을 입었다고 하면서 그 복음을 위하여 자신은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기에 자기의 목숨도 복음 앞에서는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로마서1:16절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능력이 어디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능력이 복음 안에 있는데 이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는 것만 있는 나라입니다. 언약의 핵심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떠나서 자기가 하나님처럼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어떤 종교나 선행이나 율법을 가지고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가 만들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구원이 없습니다. 오직 복음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기쁜 소식이요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린다고 하여도 이 복음을 모르고 복음을 믿지 아니하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록 거지 나사로처럼 살았다고 하여도, 강도였다고 하여도 복음을 알았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거지나 강도로 살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거지나 강도같이 실패한 인생으로 보이더라도 복음은 그들은 구원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세리와 창기라도 복음을 받은 자와 버린 자의 차이란 이만큼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복음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로마서 1:2절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하여금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여 두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약속은 결국 아들에 관한 약속입니다. 이 아들을 믿으라고 성경이 증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아들에 관하여 성경이 어떻게 증거 하고 있는지를 간략하게 정리하여 봅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후손이 누구인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아니하지만 분명히 약속의 후손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의 후손인 노아에게서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죄로 인하여 수고하는 자들에게 안위를 주리라는 노아입니다. 그래서 홍수의 심판에서도 노아의 방주에 탄 사람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아브라함과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 중에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습니다. 이삭이 약속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없는데서 있게 되었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모습입니다. 이런 식으로 요셉도 계시가 되고 있습니다. 유다도 다말도 결국 어떤 희생을 감당한 한 인물에 대하여 계시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시편 2편에서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고 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다고 하십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철장 권세로 깨뜨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면 그를 믿지 아니하면 진노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복, 믿지 않으면 그만 이라면 믿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에 입 맞추지 아니하며 망하는 것입니다.
이 아들로 오시는 분이 이사야 7:14절에서 구체적으로 명시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이미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이 아들로 오시는 분의 이름과 하실 일에 대하여는 이사야 9:6-7절에 "봉독" 한 아기, 한 아들이 왕으로 다윗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어 내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하신 대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이사야 53장에서 예언된 것처럼 너무나 볼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는 모습으로 오셨기에 아무도 그를 환영하거나 영접하지 아니한다는 예언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멸시와 천대는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대로 신실하게 이루어 내신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마태복음 1: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에 약속된 아들에 대한 성취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으로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들을 믿는 자는 의롭다 함을 받고 이 아들이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이 아들을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까?
로마서 1:3-4절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으나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되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약속대로 오신 분이시기 거룩한 영으로는 이미 아브라함과 다윗보다 먼저 계신 분으로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11절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살려내신다는 것입니다. 복음만이 죽음의 권세를 이겨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죽을 일들에 대하여 두려워도 마시고 염려도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 아들 안에서 다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이제 삶으로 꽃 피워지기를 소원합니다.
로마서 1:1-7 부르심 2003. 6. 15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1)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2)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지난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아니면 걱정과 염려로 한 주간을 지냈습니까? 대부분이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걱정과 염려 불안이 왜 생기는 것입니까? 분명하게 현실적으로 무언가 닥친 것이 없는데도 막연한 두려움, 장래에 대한 염려로 인하여 불안하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를 늘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소유를 안전하게 보존하고 더욱 늘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은 매일의 삶이 나의 노력과 실력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유지됨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도란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년, 십년, 백년, 자자손손의 양식까지 비축하여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불안이나 두려움을 없애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5:10-17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11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12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13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14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 것도 없느니라 15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16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17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이 세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얼마나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삶이 헛되고 헛되다고 솔로몬이 체험적으로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헛됨 속에 또다시 함몰되어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잘 못된 것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소유의 늘어남이 만족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근심이 더하여 지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넘어가지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저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사는 것은 그저 바람을 잡는 것과 같아서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야 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말씀을 매주 들으면서도 우리도 여전히 이러한 삶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왜 입니까? 이것이 해 아래 있다는 것이며, 아담아래 있다는 것이며,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재물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자신의 고유의 창조적인 활동-경제, 과학, 학문, 종교-에 스스로 도취하여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기 행한 일의 결과에 보람과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나를 위한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환경에 굴절된 생명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헛되고 저주스러운 삶에서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이 자기 의로 달려가던 바울을 부르시고 돌이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 삼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복음이란 성경에 약속된 대로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 아들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주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을 입은 자가 바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자기가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종이 되었습니다. 그 종이란 이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의도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까? 그로 말미암아 즉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았고 사도의 직분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분도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는 것은 그 이름을 위하여 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직분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여러 가지 직분이 있습니다.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고 집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직분이란 무엇을 위한 직분입니까? 자기 이름을 위한 직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한 직분인 것입니다. 자기의 이름을 과시하기 위한 직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게 하기 위한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비록 서리집사로 임명을 받았다고 하여도 그 직분이란 것이 내 마음대로 살기 위한 직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한 직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직분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받은 것이며,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자신이 이방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에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려고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바울이 전한 이 복음을 듣는 다는 것은 무엇이 따르는 것입니까? 믿어 순종케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이라는 말은 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이란 바른 순종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이 없는 사람을 보고서 왜 순종이 없느냐고 다그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순종이 없다는 것은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까?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생명의 관계이기에 반드시 그에 따른 순종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명의 현상이 잘 나오지 않으니 억지로 행함이라는 열매를 갖다 붙인다고 그것이 생명의 열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식의 열매요 육체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믿어 순종케 된 사실은 어떤 내용입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세상과의 분리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세상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가 되었으나 죄로 인하여 이탈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필요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육의 세계입니다. 인간들의 세상입니다. 인간들이 주인이고 왕 노릇하는 세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부름을 받으니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에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현실이란 주님의 약속하신 세상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 순종케 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의 부르심이란 바울과 동일합니다. 로마에 있든지 창원에 있든지 직분은 다를지라도 부르심은 동일합니다. 어떤 부르심입니까? 거대한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는 중에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영원한 멸망 길로 더욱 가속을 붙여가면서 달려가는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불러내심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유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내 인생을 나의 것으로 운전하고 가려니 얼마나 분노하고 염려하며 살았습니까? 이제 주인을 제대로 만났으면 그 주인에게 맡기고 시키는 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3:1-7절을 봅니다. “봉독”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너는 내 것이라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을 말씀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계시를 야곱의 생애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계시가 무엇입니까? 소유권 싸움입니다. 야곱이 태어나면서부터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만 태중에서도 서로 싸웠습니다. 서로 나오려고 싸운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서 태어난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차남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은 야곱에게 있습니다.
이 당시에는 장자가 되어야 아버지의 상속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야곱이 형의 배고픔을 기회로 장자 권을 가로채고, 아버지와 형을 속이면서 축복을 받아낸 사람입니다. 그리고 외삼촌의 집에 가서도 자기의 소유를 늘리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그러는 중에 아내가 네 명이나 되었고 그 아내들의 시샘과 질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꾀를 사용하여 결국 많은 소유를 가졌지만 그 소유가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한 야곱을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시 가나안땅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얍복강 가에서 불안하여 잠을 자지 못하는 밤에 주님께서 야곱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야곱, 발목 잡은 자, 사기꾼의 이름에서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평생이 험악한 나그네의 세월이었다고 노년에 고백합니다. 왜 그렇게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까?
자기가 지키려고 한 것들이 오히려 빼앗기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고 하다가 오히려 절름발이가 되어서 평생 자기 힘으로 도망도 가지 못할 신세가 됩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너는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줄 알고서 살았던 야곱이기에 험악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나의 소유 지키거나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주인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한 부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기더라도 결국 주님의 약속 하나 받는다면 이것이 복음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6절입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라는 말씀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름을 입는 것은 로마에서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하여 믿어 순종케 하는 것이란 결국 우리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를 믿는 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주인에게 돌려져야 할 것을 돌려주면 얼마나 홀 가분 하겠습니까?
얼마 전 드라마 ‘저 푸른 초원위에’라는 곳에서 주인이 사고로 쓰러질 때 그 집의 머슴이 가로 채서 부자가 되었지만 평생 그것으로 눌려 산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딸에게 이실직고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 안하고 숨기고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더 괴롭다는 것입니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빈손으로 와서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 살면서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참된 평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즉 주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무엇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7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인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평안이란 것이 불안이 되고, 불안이 오히려 평안이 되는 이러한 은혜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름을 입은 모든 자들에게 있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의 말씀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로마서 1:8-13 같은 믿음 2003. 6. 22
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가고자 하고 이루고자 하는 방향성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른 목적도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른 목적 없이 산다는 그것도 하나의 방향성입니다. 이러한 본능적인 방향성이란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가는 길입니다. 누구나 예외가 없습니다.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 올 자가 없음을 성경은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자로서-도저히 인간의 조건과 근거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기에-때가 되어 주님께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주님과 원수 된 길로 가다가 이제 주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것은 복음을 위하여 주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이 복음은 성경에 미리 약속이 된 것인데 곧 그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아들에 관한 증거입니다. 이 아들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좋게 봐준다고 하여도 그저 한때 잠간 반짝하면서 나타났다가 사라진 뛰어난 선생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아들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오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시요 장차 심판의 주로 재림하실 분이심을 믿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 미련하고 거리끼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를 구원의 능력으로 믿는 다는 것이 참으로 기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믿음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8절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에서 믿는 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아직 로마에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름 없는 누군가 로마에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미 사도행전 1:8절에서 약속하신 바대로 복음이 증거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일하신 결과로 믿는 자가 나왔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그렇게 기쁜 것입니다.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는 로마에 예수 믿는 자들이 있다는 소식이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었는지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여 왔으나 믿는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믿는다고 따라 나섰다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기도 하고, 바울을 버리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1:15절에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디모데 후서 4:16절에도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에서 믿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막혀서 가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꼭 만나보기를 기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출신도 지역도 성격도 취미도 다 다르지만 오직 하나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 하나 만으로 그렇게 보고 싶어 한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고난과 핍박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렇게도 싫어하던 복음을 듣고서 믿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마음이 있습니까? 일주일에 이렇게 한번씩 만나는 것이 기대가 되고 기다려집니까? 예수 믿는 그 형제를 만나고 싶고, 보고 싶고 그렇습니까? 분명히 같은 믿음이라면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데 우리가 그렇지 아니하다면 이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같은 부르심을 입었다면 분명히 같은 믿음이 나오게 될 것이고 그러면 서로 믿음 안에서 교제가 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도 그 안에서 바울을 반대하여 여러 파당이 생기게 되고 바울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바울을 버린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관심사가 말씀에 있지 아니하고 다른데 관심사가 있다면,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싫어서 떠나든지 하는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같은 믿음이라면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1-6절을 봅니다.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이 하나 됨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몸도, 성령도, 소망도, 주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직접 복음을 전하지는 아니하였지만 로마에 있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들을 그렇게 보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을 만나서 무엇을 하고자 한 것입니까?
첫째로, 11절입니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여기서 신령한 은사란 신비한 것을 말하는 것보다 영적인 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의 풍성함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더욱 진리 가운데 든든히 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에게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알게 되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믿음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믿는 다는 그 믿음이 얼마나 엄청난 선물이며 기적이며 축복인지를 알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속한 모든 하늘의 신령한 복들이 얼마나 대다한 것인지 바울은 이미 다 보고 온 사람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에 대하여 사람들은 무시하고 핍박하고 발로 밟아 버렸는데 로마에서도 믿음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얼마나 감격 하였겠습니까?
사도행전 20:29-30절을 봅니다.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사도가 로마로 가면서 에베소의 감독들에게 부탁을 하는 내용입니다.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능히 든든히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로마의 성도들을 만나 보고자 한 것도 무엇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든든히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보내는 것입니다.
성도란 남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나누어 줄 수가 있습니까? 무슨 신령한 것들을 나누어 줄 수가 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을 주었습니까?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만나면 무엇을 나누어 줄 것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 하실 수가 있습니까? 도대체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무슨 이야기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성경공부를 하고서 돌아서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벌써 가물가물하여 져 있습니다. 이러고서도 우리가 믿는 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지난주 목요일에 동아대학병원을 다녀왔습니다. 저의 국민 학교 중학교 동기였는데 암으로 입원하여 있습니다. 한달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금과 은은 없으니 줄 것이라고는 복음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수를 믿도록 권면하고 영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른 친구 소식도 들었습니다. 검사가 된 친구인데 서울에 가고서는 연락이 되지 않았는데 지금 창원지검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친구에게도 무엇을 제가 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으라는 이야기 외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지금 죽어 가는 사람에게도, 세상에서 권세와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도 어느 누구에게도 줄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나는 세상이 볼 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보이지만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에게 자기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한 것처럼 성도란 세상 사람들에 줄 것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린도후서 6:1-10절입니다.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가라사대 ㄱ)내가 은혜 1)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부요하게 하는 것입니까? 복음으로 부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복음의 풍성함을 나누기 위하여 그들을 만나 보고자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12절입니다. 너희의 믿음과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 이었기에 한번도 낙심이나 좌절이 없이, 사람들의 위로도 없이 복음을 힘 있게 증거 하였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두렵고 떨렸습니다. 약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자주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에게도 성도들의 위로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면 사도의 위로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었습니다. 나도 죄인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렀고 당신도 그러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이것이 안위입니다. 이들 안에서 서로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위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주고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피차 안위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13절입니다.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원한 열매는 결국 그 아들의 복음으로 인하여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기를 바란 것입니다. 한 믿음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인종과 신분의 지위고하를 무론하고 한 주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성도란 서로 교제할 수가 있으며 그 교제가 기쁜 것입니다.
오늘이 제가 창원에 온지 만 4년입니다. 제가 처음에 여러분을 만났을 때에 여러분이 말씀을 듣기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즈음도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는 반가운 마음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제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증거 하고자 하였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죄악의 뿌리 깊은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란 허공중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의 중심에서 일어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 복음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들이 나온다면 이것이 목사의 안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 4년이 지난 오늘 그동안의 모습을 돌아보면 과연 제대로 복음을 전하였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으로 주님 외에 소망이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사이니까 의례히 그러하여야 하고 여러분은 여러분 마음대로 산다면 어떻게 피차 위로가 되겠습니까? 한 믿음을 받았다면 한 소망을 받았다면 세상에 썩어지고 없어질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영원한 복음,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언제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로마서를 통하여 다시 복음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도가 말한, 복음 안에서 형제를 만나는 기쁨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14-17 왜 복음인가? 2003. 6. 29
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ㄱ)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이 6월 29일입니다. 군부독재에서 민주화를 하겠다고 선포한 날입니다. 지금 정치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구절을 외우기 위하여 예를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후에 주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고서 물었습니다. 영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29에서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 그저 인간의 가능성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손으로 무언가 만들어 내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하신 일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어준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로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기쁜 소식으로 들립니까? 기분 나쁜 소식으로 들립니까? 기쁜 소식으로 들리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줄 제대로 아는 사람에게는 기쁜 소식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가능성을 가지고 무언가 할 수 있다거나 무언가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기분 나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언제나 우리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배척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자존심을 채워주는 그런 복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인간이 부족하고 못났으면 하나님께서 대신 일을 다 하셔야 되는가 하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복음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비밀을 계시로 받은 바울 사도는 이 복음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고 그래서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모두 빚진 자라고 합니다. 자신이 복음을 받았고, 또 복음을 증거 하는 자로서 부름을 받았기에 복음에 빚진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다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표현으로 더 강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는 말씀과 같이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표현보다 더 강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기에 이 복음에 빚진 자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믿는 자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복음이 무엇인데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까?
먼저, 도대체 인간이 왜 구원되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복음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들은 구원을 여러 가지로 말하게 됩니다. 병이 든 사람은 병 고침, 가난한 사람은 부자 됨, 종은 자유자가 되는 것, 지배 받는 나라는 해방되는 것, 싸움이 있는 곳에는 평화를, 미움이 있는 곳에는 용서를 등등을 구원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서로 어울려 사이좋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꿈꾸는 것입니다. 물론 죽고 나서 내세에서 좋은 곳에 가는 것을 구원으로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구원이란 죄에서의 구원입니다. 죄란 윤리에 어긋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주체적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모든 인간이 이러한 죄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선하고 착하고 고상하고 아름답다고 하여도 결국 인간이란 자아를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남들이 몰라주어도 스스로의 자아에 도취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꿈을 물어보면 자아실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애를 쓰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종교 활동도 자아실현의 폭을 넓힌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우리가 피조물의 위치를 떠나서 자신이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이런 모습이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에서 구원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고 그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속하여 지고 의롭다 함을 주시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미 보았습니다만 이 복음이란 그 아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경에서 미리 약속하신 것인데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지만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입니다. 이 아들을 믿는 것이 곧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의 한 작은 마을에서 자라나시고 30세쯤에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3년간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사람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자 예수님께서 이것을 너에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을 한다면 이것이 바로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에 왜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까? 왜 다른 것으로는 안 되고 오직 복음 만이어야 하는 것입니까?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나 율법지킴들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의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죄인은 그 앞에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지 그래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의가 나올 수 없는 것임을 구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 계시하시는 방법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 율법을 지키면 의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더 크게 보면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을 율법으로 더욱 확정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행함으로 의를 이루지 못함을 율법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자기 가능성을 포기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투입되자 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율법을 주신 것은 다른 나라사람들은 자격도 능력도 없는 것이고, 오직 우리에게만 이러한 율법을 주셨기에 우리는 얼마든지 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백성, 의로운 나라로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율법을 통하여 얼마나 죄악 됨이 드러나는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여실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하자 말자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지만 가나안땅에 들어간 사람은 두 사람뿐입니다. 가나안땅에서 이제 여호와가 왕으로 다스리시는데도 이들은 계속하여 우상숭배를 하면서 자기들의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왕을 세워도, 제사장이 있어도, 선지자가 외쳐도 이들의 악함은 계속하여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이 의롭다면서 살았습니다. 율법의 조문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조문을 겉으로는 지키는데 마음으로는 먼 것입니다. 입술로는 존경하되 마음이 먼 것입니다. 강제적인 율법을 지키면 겉으로는 지키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안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무엇을 외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그들의 의가 어떤 상태인지 이사야 선지자는 누더기 옷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의라는 것이 냄새나는 누더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거듭 거듭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할 만큼 모든 율법을 지키는 열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율법을 열심히 지켜나갔는데 그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의를 가지고 있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율법을 다 지켜 스스로 의롭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에는 전혀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8절 이하에서 인간의 실상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우상의 모양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전부 자기를 위한 신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내어버린 결과 그 죄악의 모습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어 버려두시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 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그대로 버려두시니 온갖 죄악의 열매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하는 자, 비방하는 자, 하나님을 미워함,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이러한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고 하여도 과연 시기나 자랑이 없습니까?
결국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의를 이루고자 하였지만 의를 이루기는커녕 하나님의 진노만 가득 쌓아 놓은 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담의 범죄 이후로 저질러 놓은 일들이 이런 내용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불로 사 질러 버리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무언가 자기는 바르게 산다고 하는 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의를 몰랐던 것입니다. 로마서 10:1-15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그러나 바른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어서 결국 자기 의를 세우고자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따로 있는데 자기들이 의를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인간 안에 이것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이나 남과 비교하여 자기의 나은 점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여도, 전도를 하여도, 복음을 전하여도, 노래를 하여도, 무엇이나 간에 인간은 자기의 의를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는 결국 복음을 듣고서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는 다는 것은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 고백을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이해하고 입으로만 시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아실 일이지만 그러나 제대로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한 사람이라면 무엇이 무너지는 것입니까? 자기 의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기에 주님께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14절을 봅니다. “봉독”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함과 믿음을 대비시킵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면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저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자기가 부정되는 것입니다. 자기 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의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보지 아니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복음입니다.
로마서 1:17 의인의 삶 2003. 7. 6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ㄱ)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의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거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난 자들의 한결같은 고백이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부활승천하신 예수님도 인간이 직접 만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러하였고, 그 사랑받던 제자 요한도 계시록에서 주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그 앞에서 살아가려면 의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에게서 그 어떤 의도 나오지 아니함을 성경은 증거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한 것입니다. 사람들끼리 선한 것이라고 좋은 생각이라고 만들어 내어 놓아도 그것은 독사의 알을 품은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러한 의로 만들어 입는 옷이란 거미줄로 짜는 것처럼 불가능한 것입니다. 혹시 만들어 입었다고 하여도 누더기에 불과한 것이어서 주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우리는 한 주간사시면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몇 가지 질문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1)예수님을 믿고 거듭났으니 나는 의롭고 바르게 살았다. 2)완벽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였다. 3)어차피 죄인인데 내 마음대로 살았다. 4)정말 인간에게서 선한 것이 나오지 아니함을 절감하면서 오직 주님께서 주신 의가 아니고서는 달리 소망이 없다. 몇 번이 나왔습니까?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소망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아니한다는 것이 바울사도의 고백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바울의 고백이 이러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무엇이며, 그리고 그러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1:17절의 말씀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중세 천년의 카톨릭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말씀이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신부요 교수로서 로마서를 강해하다가 처음 이 로마서 1:17절의 말씀을 보고서 절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지키면 그것으로 살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이 말씀을 보고서 의를 하나님의 속성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론 의로우신 분이시지만 그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의가 갖추어 져야 하는데 그 의가 복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시니 구약보다 더 나은 의가 나와야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망 가운데서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의를 하나님께서 따로 마련하여 두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운 행실이나 율법 지킴이나 그 무엇으로도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그 아들에 관한 것인데 이 아들이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으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것은 여자에게서 나셨고 율법 아래 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나오는 그 의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홀로 율법을 다 완성하심으로 의가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오는 저주도 또한 대신 다 받으신 것입니다.
로마서 3:19-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3)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고린도전서 1장 26-31절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ㄴ)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이 두 곳의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주어지는가를 보게 됩니다. 인간은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율법 지킴이나 의롭고 선한 것이나 어떤 다른 사람보다 나은 조건 때문에 의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으로는 오히려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 그것은 의롭게 될 수가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 구약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러한 조건들이 없는, 지혜나 문벌이 없는 사람, 미련하고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을 택하신 것은 어떤 인간의 자랑도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진 자들에게는 자기의 육체를 자랑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1;17절을 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인간의 행위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믿음이란 어떤 믿음입니까? 인간이 행위로는 부족하지만 믿어 주는 것으로 말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그러한 믿음이란 또다시 인간의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믿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음식을 먹거나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불안하고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이라는 것은 확률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자동차고 비행기도 사고가 나고 음식도 배탈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인간의 의지적인 행위나 확률이 아니기에 믿음은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인이 되는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의인이 되었기에 예수님과 상관없이 내 스스로 의를 지키고 유지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주어지지 전에는 자기 의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선물로 주어지고 나서는 이제부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는 최초의 말씀이 하박국서에 있습니다. 하박국 2:1-4절입니다.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1)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 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2)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이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택한 나라가 세상의 악한 나라에 의하여 짓밟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나라 안에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학대하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고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더딜 찌라도 기다리라고 합니다. 지체되지 아니하고 정녕 응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의 야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속히 나타나지 않으니 율법이 해이하여지고 공의가 굽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과 대조되는 말이 교만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교만합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주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힘과 권력을 자기 힘으로 사는 자들을 교만한 자들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교만이란 자기들의 종교적인 열심과 그들의 율법 행함을 자기 의로 여기면 이것 역시 교만이 되어서 주님의 의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란 자기들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된 자들이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며 이들이 의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이란 주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살아가고 있더라고 그러나 주님의 약속을 믿는 의인들은 주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가 기도하는 내용이 3장입니다.
하박국 3: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그러므로 여기에서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여 달라는 내용입니다. 갈대아 사람일 수도 있고,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부흥이 심판의 말씀이기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면 이스라엘 가운데서라도 남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대답을 듣고서, 그 대답이란 눈에 보이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인들이 믿음으로 사는 자세는 하박국 3:16-19절입니다.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 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심판의 소식이 얼마나 두려운지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오고 몸이 처소에서 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이러한 상황에서라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 아무른 소유가 없다고 하여도 구원의 하나님, 즉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합니다. 자기의 좋은 이력과 경력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집안이나,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무언가 더 나은 점들을 자랑하지 아니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용지물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배설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삶, 이것이 의인의 삶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1:18 하나님의 진노 2003. 7. 13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지난 한 주간 믿음으로 사셨습니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17절의 말씀처럼 복음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복음에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행위로도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의를 만들어 낼 수 없는데(유대인들이 증거가 됨)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왔으니 그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이 세상을 보는 시각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낙관적으로 보는 시각과 비관적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낙관적으로 보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악하다고 하나 그러나 악한 자보다 선한 사람이 많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흉악한 일이 생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없이 착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 훨씬 많기에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곳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은 교육과 환경을 만들면 훨씬 범죄가 줄어들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환경운동도 하고 생명운동도 하고 민주화 운동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관론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인간의 역사를 보면서 도대체 인간 스스로 만들어 온 역사들이 어떤 꼴이 되었는가를 보면서 비관합니다. 그러한 비관이 강렬하여지면 자살을 하거나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기고 하는 것입니다. 모두 죽이고 나도 죽자는 식으로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특정 다수에 대하여 보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도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졌지만 이루지 못한 상실감이 커서 그런 것이지 세상자체를 포기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또 사람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말하게 되면 복음이 아닙니다. 반쪽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좋은 것만 좋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무엇을 준다고 합니까? 영생만 준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들을 다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주시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더 능력이 많으니 하나님께 빌어야지 더 잘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전도를 하여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서는 거의 숨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지옥이니 심판이니 하는 내용들을 좋아하지 아니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백화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고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온갖 문화상품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백화점에서 아주 실비로 문화교실을 왜 만드는 것입니까? 고객이 와야 장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롯데 백화점과 대동 백화점이 서로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처럼 지역민을 위한 문화교실, 독서실, 결혼식장등을 만들어 개방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유가 있고 남는 공간이 있으면 그렇게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한 호감을 주어서 예수 믿기 좋게 만들자는 생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아직도 복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창세기 3장 이후로부터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까?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았기에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죄악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가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불사르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편 7:8-17절을 봅니다. “8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10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2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13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14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15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16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17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없어서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까?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가 없는 상태라면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며 칼을 갈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은 죄악을 해산하고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러한 의 없음에 대한 심판과 진노를 아는 사람만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면 그저 예수 믿는다고 하여도 자기 편함, 자기 이익, 자기 행복, 자기 마음의 만족만 챙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도 힘들고 어렵고 귀찮은 일들을 모두가 피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 일을 하면 하는 대로 복을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면 아마 이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시편90:1-12절입니다.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1)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누가 주의 이러한 진노와 노를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인생의 평생이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일평생이 주님의 진노아래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무슨 희망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없는 곳에는 오직 하나님의 진노밖에 나타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복음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만으로 기뻐하고 감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꾸만 엉뚱한데 관심을 둡니다. 예수 믿는 것만으로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허기져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무언가 더 산뜻하고 새롭고 신선한 것은 없는가 하면서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에 나타나는 것입니까? 로마서 1: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죄라는 기준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종교를 가졌거나 또는 종교를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감옥에 가두거나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관계에서 법을 어길 경우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는 어디에 나타납니까?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입니다. 우선순위가 하나님께 대한 경건입니다. 두 번째가 불의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말씀을 요약하면 무엇이 됩니까?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경건함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불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경건치 못함과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 외에는 쏟아질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경건치 아니함에 대하여 19-25절에서 말씀하고 있고 불의에 대하여는 26-3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경건에 대한 죄는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아예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 속에서 불의한 일만 없으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불의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몇 가지만 봅니다. 시기, 수군수군 하는 것, 비방하는 것, 자랑하는 것도 다 불의에 속하는 것입니다. 강도나 살인 같은 범죄만이 아니라 사소한 것들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것들도 불의이며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불의의 근원이 경건하지 못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의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기에 나오는 사상과 행위들입니다. 이것이 경건하지 않음이며 이러한 불경이 불의를 생산하여 내는 것입니다. 불의가 나오지 않는다고 자신을 의롭다고 할지 모르나 경건치 아니함에 대하여는 생각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기가 불의한 행위가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경건치 못한 것입니다. 이로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진노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2:5절을 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진노를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주님께서 재림하시지 않으신 이유는 아직도 회개할 자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도하여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으로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은 결국 진노를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7-18절입니다.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1)서리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심판이 시작됩니다. 믿는 자에게 먼저 심판이 시행이 된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 마지막이 어떠하겠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복음입니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함이 심판입니다. 그러면 왜 복음을 순종치 아니함이 심판인 것입니까? 로마서 1:17절에서 복음에 무엇이 나타난 것입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지 아니함은 곧 하나님의 의가 없는 상태이기에 경건치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날 유일한 길이 복음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습니다. 진노 아래 있기에 인간의 어떠한 선행과 이성의 능력과 도덕으로 무장을 하여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불살라지기 위하여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시기 위하여 이렇게 오래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 3:8-18절을 봅니다. “봉독” 지금 보이는 하늘과 땅이 불에 타 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습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바라라고 합니다. 불타 없어질 것들을 목숨처럼 붙들지 말고 그 구원이 나타나도록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의의 나라입니다. 의가 없는 자는 결코 들어갈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 날마다 더 풍성하게 체험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18-25 하나님을 알되 2003. 7. 20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3)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어느 목사님의 세미나에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내가 성경을 읽으면 교만하여 지지만 성경이 나를 읽으면 회개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타당한 말이라고 봅니다. 내가 성경을 좀 보고서 구약도 알고 신약도 알고 언약이 무엇이니 율법이 무엇이니 복음이 무엇이니 하면서 이야기 하지만 그것으로 얼마든지 교만하여 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성경이 나를 읽어버리면 내가 말씀 앞에서 죄인임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4:12-13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인체의 신비 전을 알리는 메일을 받아 보았습니다. 사람의 신체를 화학 처리하여 플라스틱모양으로 만들어 전시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완전히 해체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경, 힘줄, 핏줄, 뼈 등을 분해하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신체는 몇 센티 정도의 두께로 전부 잘라 놓았습니다. 그리고서는 전시회를 한다는 선전이었습니다.
사람의 신체를 그렇게 해부하여 놓아도 그 마음의 생각과 뜻을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다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수술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제대로 진단을 받아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이 드러나게 되면 우리를 상관하시는 분 앞에서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였음을 오늘도 말씀으로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의에 대하여 나타나는데 그 불의한 모습 중에 경건치 아니함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모든 이방인에게 다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먼저 이방인의 죄악을 지적하고 나서 그 다음에 유대인의 죄악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죄 아래 갇혀 있다고 전개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모스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기 위하여 주변 국가들의 죄악을 먼저 공격하면서 들어오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도 모르고 우상을 섬기고 있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들려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돼지머리를 두고 고사를 지내고 피조물을 섬기는 그런 것을 우상 숭배라고 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미신이며 우상숭배라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아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교회 다니기 때문에 그러한 우상을 섬기지 아니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섬기고 경배하는 것이 다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18-20절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좇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기에 핑계치 못하는 것입니다.
김용옥씨가 세상의 신비란 들풀 하나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들풀 자체의 신비만 보았지 그 들풀을 만드신 창조주를 모르기에 그는 비록 어려서부터 요절을 외우면서 자라고 신학대학을 나왔지만 우상숭배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특별하게 형상물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인간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도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설 것이며 핑계하지 못할 것입니다.
21-22절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여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하는 이유는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나 어리석어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짐승들과 벌레를 형상화 하여 놓고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런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보십니까? 아닙니다. 썩어질 사람을 우상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우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사람의 형상을 동상으로 만들어 절하는 것만을 우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도 얼마든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는 사람의 생각과 사상들이 결국 우상숭배입니다. 인생의 사는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하는데 모든 인생들이 한결같이 자기 영광만 챙기고 있으니 어찌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방인들은 특별계시를 받지 않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제대로 돌렸습니까?
요한복음 5:44절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지금까지 자기들이 쌓아둔 의는 다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영광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인데 그 영광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에 나선 것이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께 불경건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나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24-25절을 봅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그대로 내어버려 두시니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보다 더 사랑하고 있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 피조물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주님보다 얼마다 더 사랑하고 있는지 인식이나 하고 사십니까?
예를 들어봅니다. 청년 때와 결혼하고 나서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결혼 전에는 그래도 주를 기쁘시게 하고자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헌금도 힘써 하고자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사람도 드물지만-그런데 결혼하고 나니 어떻게 마음이 달라집디까? 어서 빨리 내 집이라도 마련하자는 생각이 우선이지 아니합디까? 지난주일 학생회 시간에 학개서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은 황무하여 있는데 자기 집들 짓기에 바쁘다고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마침 그 시간에 모기가 한 마리 돌아다녀서 시선을 빼앗고 있었습니다. 방충망에 구멍이 나 있어서 모기가 들어온 것입니다. 예배당 건물이 성전이 아님을 이미 알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기 집에 방충망이 구멍이 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더 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홈페이지 복음칼럼 란에 교회와 집을 비교한 글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집을 싫어하여 나가는 경우를 여러 가지 말하였습니다. 보모의 지시를 따라야 하고, 가족을 배려하여야 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고, 아무의 간섭도 받기 싫다고 집을 떠나 독립하겠다는 생각을 교회와 비교하여 성도들의 눈치가 싫고, 목사의 운영방침이 싫고, 내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싫고 하는 것으로 비교를 하면서 그래서 교회를 옮긴다는 것을 잘못이라고 봅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사람들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기 시작하면 그곳이 우상숭배의 현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믿는 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자기들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의가 없는 곳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짐을 알아서 복음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복음입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의로는 저주와 진노 외에는 받을 것이 없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달리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모인 교회라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교회마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취미단체와 같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구들을 채워주겠다는 것입니다. 취미단체는 어떻습니까? 자기가 선호하는 취미를 따라 등록을 하고 회비를 내면 됩니다. 같은 취미그룹이라도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취미단체에 등록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취미와 기호는 너무나 다양하고 예민하기에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라도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이 교회는 기도가 부족해, 전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전도가 부족해, 구제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구제가 부족해, 이 교회는 사랑이 부족해 하면서 그러한 곳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러한 부족이 보이면 말없이 충성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은사라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자기만족과 자기 과시가 있는 것이라면 분명히 자기 잘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비판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보라 성경에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 잘하는 개인적인 취향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인양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것이 교회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내 마음에 맞는지를 좋은 교회의 기준으로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한번 와보고는 목사가 아버지처럼 나이도 지긋하고 기댈만한 그런 목사여야 좋다고 하면서 간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신칭의에 대한 설교를 듣고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해 놓고서 한 일년 정도 다니다가 나가면서는 대표 기도 한번 안 시켜주는가를 말하면서 나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5-6절입니다.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모든 이론과 생각까지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들을 다 부수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지금 주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목사든 집사든 자기의 이론과 생각으로 교회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교만하여진 인간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치 아니함에 대하여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감사치도 아니하는 우리의 모습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향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잡혀져 있기나 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나를 영화롭게 하고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서만 살아가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러면 과연 예수님의 그 공로를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믿고 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알기를 원하지도 않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도 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나는 죄인중의 괴수이지만 예수님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것을 가장 복된 소식을 믿고 사십니까?
로마서 1:24-32 버려두심 2003. 7. 27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 ○또한 저희가 4)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5)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지금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것을 계속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지 지난 시간에는 경건하지 못함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감사하지 아니하고 그 생각들이 허망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금수와 사람과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형상이란 꼭 어떤 개인의 숭배만이 아니라 인간의 인격, 자손, 아내, 가정, 민족, 국가. 교회 등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여 있다면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이란 신의 일반명칭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만이 참 신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계시는 분으로서 모든 만물의 창조자 시며, 말씀하신 바를 친히 이루어 내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예수님을 성령으로 고백하게 된 것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하신 일을 예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사도들이 구약의 여호와 호칭인 주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 주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아버지의 일을 보고서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고 있는 일입니다. 구약의 여호와만이 하실 수 있는 영생 주시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계시된 이러한 주님을 모르고서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가 자기의 상상에 의한 신이기에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경우를 봅시다. 그런 배는 무역선이기에 수 십 명에서 수 백 명이 타고서 바다를 항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나서 모두 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하며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물건을 다 버렸습니다. 그들이 믿는 모든 신들의 이름을 다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장이 보니 배 밑에서 누워 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네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선장은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풍랑을 잠잠케 하여줄 그런 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나가 이 풍랑이 자신을 인한 연고라고 하면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이렇게 되었으니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와 하나님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이 배에서처럼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의 하나님, 자기의 신들을 다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은 여호와라는 이름도 압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오직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구약의 여호와만이 참 신이시고 신약의 예수님은 피조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라고 이름을 부른다고 하여도 역시 사람들안에 자기들만의 우상이 다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무슨 이름을 부르더라도 자기를 위하여 부르고 있는 신이란 모두 우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우상숭배를 하는 대로 내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어 버려두신 결과가 어떠한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어버려두신 결과 모든 사람들이 다 우상숭배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이 우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나만 바라보아 달라는 것입니다. 나만 사랑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교회에서든 나를 위하여 주고 나를 알아주고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는 가정과 학교와 교회는 좋은 교회인 것입니다. 나를 무조건 사랑하여주는 부모, 선생, 친구, 목사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그대로 내어 버려두신 것입니다.
이대로 내어 버려두시면 이것의 계속된 연장이 그대로 지옥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두신 결과 우상숭배에 이어서 인간관계속에서 어떠한 불의들이 나오는지를 오늘 말씀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록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입니다.
목록들을 살펴봅니다. 24절에서 우상 숭배하는 인간들을 그대로 내어버려 두신 결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시니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은 26-27절에서 여자나 남자나 그 몸을 순리대로 쓰지 아니하고 역리로 쓰는 것입니다. 이러함으로 그에 합당한 보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성적인 타락은 이미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만연한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어 단어에 소도미라는 단어가 동성연애라는 뜻의 어원이 됩니다. 이러한 성적인 타락은 단지 육체적인 동성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모습으로도 변질이 되는 것입니다. 신전에서 신전창기와 미동들이 있어서 이방신의 제사와 함께 성적인 혼음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신 결과입니다.
28절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의 정욕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초적인 죄의 뿌리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 이후로 모든 자연적 출생의 인간은 죄 아래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 죄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신 것입니다. 그러자 합당치 못한 일이 인간에게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 목록들이 모든 불의라고 합니다. 모든 불의란 거론되는 모든 불의전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의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목록들이 나에게 해당된다면 나도 하나님의 진노아래 저주아래 있는 것이며 이미 버려진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목록을 봅니다.
이러한 목록들에 전혀 해당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몇 가지는 해당이 되고 몇 가지는 해당이 되지 않는 분이 있습니까? 전부 해당이 다 되는 것입니까? 살인은 하지 않았습니까? 이 중에 단 한 가지라도 해당이 된다면 우리는 다 범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죄인이면서도 자기 잘난 체를 하고 있습니까? 분명히 이러한 죄들이 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알고 있고 말하고 있으면서 자기도 행하고 그렇게 행하는 남도 옳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행함이 잘못인줄 모르기에 자기들이 하는 일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에서 무슨 일을 의논하고 계획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자기 말이 먹히지 아니하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순복하고 따릅니까? 뒤에서 딴소리 합니까? 자기의 뜻과는 다르더라도 순복하고 따르는 사람보다는 다른 소리 하는 사람이 훨씬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주장하는 바가 아무래도 내 생각이 더 옳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면 내 생각이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주장과 자기 합리화로 나가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도 행하면서 그렇게 하는 다른 사람들조차 옳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 우리 안에 여기의 목록 중에 단 하나라도 해당이 된다면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시기가 없습니까?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지 않습니까? 남이 잘되면 은근한 시샘이 나지 않습니까? 똑 같은 일을 하여도 자기가 한 일을 좋게 보면서 남이 한 일은 깎아내리지 않습니까? 비방하지 않습니까? 자랑하지 않습니까? 수군수군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대로 살다가 그대로 영원한 지옥형벌로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안에 가득하면서 천국 보내 달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천국가면 천국이 지옥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내어버려 두신 결과입니다.
케직 사경회에서 어느 교수님이 로마서 1장을 강해하던 중 사람이 쥐와 같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어떤 신사가 대단히 화가 나서 그 말을 취소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때 로마서를 설교하든 그 교수님이 그 사람에게 대답한 말입니다. “당신이 참 옳습니다. 사람을 쥐에다 비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공정합니다. 나는 정말 사과합니다. 나는 쥐에게 사과합니다. 쥐들은 쥐가 행동해야할 짓만 하는데 사람들은 사람이 행동해서는 아니 될 그러한 짓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물이 안하는 짓을 하며 동물보다 더 나쁜 짓고 하고 있습니다. 나는 쥐에게 사과합니다.” 라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 이를 알리요? 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지은 인간의 실상이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이 스스로 개선되거나 구원될 가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지난주 주일 저녁 11시에 부산에서 전화가 한통 왔습니다. 가끔씩 성경을 보다 전화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자기는 죄 밖에 나오는 것이 없고, 그래서 세상의 악함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죄를 보니 통곡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주님께서 성도의 눈물을 씻어주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어 왔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통 받아서 흘리는 눈물이라면 자기는 그런 고통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보고서 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누가 보아도 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오는 것이 죄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천국은 감히 바라 볼 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제가 오히려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어떠한 행위로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의논을 하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에 이미 하나님 안에서 성부와 성자의 약속 안에서 결정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를 믿고서 이러한 부분들이 많이 고쳐졌습니까? 아니면 가끔씩이라도 나오고 있습니까? 저는 늘 나오고 있습니다. 전에 컴퓨터 화면의 떨림에 대하여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화면의 떨림이 느리면 떨리는 것을 감지할 수 있지만 더 빠르게 되면 떨리는 지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형광등의 불빛도 파장으로 되는데 너무 빠르기에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죄악에 푹 젖어서 살고 있으니 죄 인줄도 모르고 서로 옳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길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습니다.
로마서 2:1-5 판단 2003. 8. 3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오랜 장마에도 불구하고 논에서는 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곧 이삭이 나오고 벼가 여물게 되면 고개를 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하면서 인간이 무언가 좀 배우고 알수록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여야 한다는 덕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속담도 알고 그 뜻도 알지만 과연 겸손하여 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이 많아지면 교만할 수도 있지만 성경의 지식이 많아지면 겸손하여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날마다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로마서를 보면서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이러한 죄를 보면서 자기의 죄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남의 죄만 보이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판단 외에는 나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판단을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심판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2:1절에서 “그러므로”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1:1절부터 지금까지의 말씀을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1-18절에서 복음을 요약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잇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19-3:20절까지는 왜 인간이 복음으로만 의롭게 되는지를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내용은 인간이 어느 정도의 죄인이기에 주님의 대신 죽으심 외에는 달리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2주간에 걸쳐서 인간의 불의가 무엇인가를 크게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님이란 우상이었으면 그 결과 인간은 모든 불의에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악의가 가득하기에 나오는 것이 악의뿐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의도로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을 죄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서로 옳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말씀을 인정하십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모든 사상들이 전부 죄임을 인정하십니까? 내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의에 결코 이를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순수하게 하는 것도 있는데 왜 그렇게 말하는가? 인간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가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2:1절에서는 그러한 사람들의 죄악을 또다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을 성경 해석하는 사람들이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가 이방인들로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고 온갖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을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주 고상한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생을 피하기 위하여 몸에 이도 잡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양심고운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난주에 보았던 수많은 목록들과 상관없다고 보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악한 죄를 짓는 사람들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유대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선택받았고, 율법을 받았고, 할례를 행하였기에 구원받은 것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구원이 필요 없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사람들이 이정도의 목록이 나와도 나는 그러한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죄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유대인 가운데서도 죄를 많이 지어서 저주를 받은 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자기들은 그런 죄도 없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축복만 받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메시야기 오기만 하면 온 세상을 심판하고 자기들만이 의롭고 축복받은 민족임을 드러내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싫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는 그들이기에 예수님이 얼마나 싫었으면 그 착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따라 흠이 없이 살려고 하였고 또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하였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해석이 옳다고 보여 집니까? 1장이 모든 이방인의 범죄라면 2장부터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선택도 없고, 율법을 받지도 못하고, 할례도 없기에 그들은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죄를 짓지만 자기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 가운데 그런 죄인들이 있다는 것은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과 불치의 병자들을 저주받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 무리들을 보고서 율법도 모르는 자들은 저주 받은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요7:49). 그러므로 이방인들에 비하여 자기들은 의롭다고 여기고 율법을 모르고 지키지도 아니하는 그러한 자가 죄인이지 자기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그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판단한다는 이 말씀이 바로 저 자신에게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나 흉악한 죄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복음이라고 전하면서 얼마나 많이 판단하여 왔습니까? 여러 교회와 여러 사람들을 판단하여 왔습니다. 물론 복음과 비 복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판단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념과 신앙을 구분하며, 종교성과 복음을 구별하기 위하여 판단하며,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면서 여러 가지 판단과 비판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판단을 하면서도 저도 동일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1-3절입니다. “봉독”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내 자신이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재판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정의를 위한다고, 교회를 위한다고, 예수님을 위한다고 소리치며 판단하였지만 그러나 자신도 같은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교활한지 그렇게 하고 있는 자신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은 성경적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목사들에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목사들의 고집이 대단한 것입니다. 자기의 뜻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목사들끼리 의견이 제대로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속이 시원하지요! 그렇습니다. 목사들이 문제라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렇게 하는 순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똑같이 판단을 하고 있고 재판을 하고 있으면서 남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저희 교회에 헌신예배 강사가 오시면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들었습니까? 그래 한번 두고 보자 무어라고 말하는지 하는 자세나 태도는 아니었습니까? 복음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는 복음도 모르면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상대방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판단으로 인하여 자기가 정죄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는 정당하고 옳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3-12절입니다. “3 너희에게나 1)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전서 5:12-13절입니다. “12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판단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고 판단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분명한 범죄에 대하여 교회에서 판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으로 판단을 하지만 얼마든지 정당성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2절입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어느새 우리가 재판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11-12절입니다. “ 11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가 다 판단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는 성경대로 바르게 판단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자기도 속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의에 나타나는데 우리의 판단의 삶에도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판단하지 말고 삽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배 후에 누가 어떤 말을 하다가 판단이 나오게 되면 바라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판단하지 말라고 했잖으냐 그러니 판단하지 말아야지 왜 판단하느냐하면서 자신이 이미 판단하고 있고 재판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4-5절입니다. “봉독” 자기 죄를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피하지 못할 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대로 주님께서 판단해 버리셨다면 우리는 벌써 끝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직 주님의 진노를 받지 않고 사는 것은 주님의 긍휼과 자비로 오래 참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판단을 많이 하며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 자기 눈에 들보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남의 눈에 티가 보이지 아니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 것입니다.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이것을 알게 되면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자신이 늘 판단하고 살면서 자기는 옳은 줄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그 인자하심이 지금 회개하도록 인도하고 계시기에 우리의 판단대로 판단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판단이 임하지 아니한다고 자신이 행하는 판단들이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면서 회개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멸시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여 있습니까? 자기가 옳다고 여기고 남을 판단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의 판단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를 알고 회개하든지 둘 중에 하나 일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그 판단과 비판으로 우리가 판단을 받을 것임을 아는 사람은 늘 회개할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주 교묘하게 판단하기에 자기도 속고 듣는 사람도 속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오늘도 오래 참으시면서 회개하도록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판단으로 인하여 죽임 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날마다 회개하며 주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2:6-11 행한대로 2003. 8. 10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은 보편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을 거두고,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무언가를 심고 거두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짧은 심음과 거둠이 있고, 긴 심음과 거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오늘 나는 무엇을 심고 있는가를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반드시 한번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8:22절에서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이 땅이 있을 동안에 계속될 일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동안 이 법칙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음과 거둠은 또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갈라디아 6:7-8절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렇게 심고 거두며 살게 되는데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육체를 위하여 심고 거두는 것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인 것 인줄 알고 심고 거두는 사람은 결국은 썩어진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존경할 만한 업적을 남긴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썩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다 쇠하여지고 낡아지고 더러워지고 썩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을 전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계속하여 썩어질 것만을 심고 거두기를 반복할 뿐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심고 거둠은 성령을 위하여 심고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위하여 심고 거두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알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원하지도 않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 두 가지의 원리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육체만을 위하여 심고 거두며 살았는지 아니면 성령을 위하여 심고 거두며 살았는지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기준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크나큰 충격입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조건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특권으로 여긴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받았고,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할례를 행하였고, 율법을 따라 온갖 것을 다 지켜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특권을 전혀 고려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을 행한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군에서 단체 기합을 받을 때에 억울하게 여기는 사람과 같은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하나님께 항의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 말씀을 보는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심고 있는 것입니까? 역시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2:7-9절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합니다. 영생이냐 분노냐 이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고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며 선이란 하나님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과 존귀란 세상의 썩어질 것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내용입니다. 썩지 아니하고 영원한 주님의 나라와 그 기업의 영광, 주님의 영광과 존귀, 주님이 하신 일의 영광과 존귀입니다. 날마다 이것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가 살고 있습니까? 날마다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직접 기도하여 구하지는 않더라고 우리의 몸의 움직임과 마음의 소원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썩어질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지 직접 구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마음이 어디로 쏠리고 있습니까? 주님을 아는 일과 그 영광을 구하는 일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돈 버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영생이나 천국이니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란 당을 지어서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 임할 것입니다. 당을 짓는다는 것은 불의를 행하는 일에 동참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불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행하는 불의도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당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당을 짓는 다는 것, 온통 당 짓은 것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학연 인연 지연으로 똘똘 뭉치는 것입니다. 유유상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 짓는 재미로, 편 가르는 재미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당을 만들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는 무소속이라고 하는 당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당 짓는 일이 어디에서 그 최종적인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면 예수님을 배척하는 일에 드러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로마인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고 민중들까지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이라고 몰아 부치는 것이 당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습을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영생은커녕 하나님의 분노를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방인의 죄악도 유대인들의 죄악도 우리에게는 다 나오는 것을 봅니다. 이방인의 죄악인 로마서 1장의 내용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죄악인 로마서 2:1-3:20절의 내용도 우리에게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경건하지 못함과 모든 인간관계속에서 불의만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사람으로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왜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고 전적으로 구원하시는 분에 의하여 구원이 이루어지는 가를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우리의 행한대로 갚으신다면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다윗은 복 있는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오히려 악만 행한 인간이 의롭다 함을 받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오래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어지지 아니할 것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행하는 자들은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모두가 썩어질 것을 구하고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썩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나라를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영생을 얻은 자가 이러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에게서 자기들의 의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일의 열매를 나타내게 하신 주님을 사랑할 뿐입니다.
고린도후서 5:8-10절입니다.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각각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심판대 앞에서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주와 함께 살리심을 입은 자라면 떠나든지 거하든지 간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쓰는 자들입니다.
디도서 3:1-10입니다. “1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2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1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3절에 보시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울 자신도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하고 속은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를 입은 자들은 더 이상 자기 의에 대하여 자기 행함에 대하여 기대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어지지 아니할 것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인간적으로는 결코 성취되지 아니하는 것이기에 오직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외적인 조건을 찾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서 어떠한 선행이 나오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자신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것은 자기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러한 열매가 나왔다는 것임을 고린도 전서 15:11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란 자기에게서 나온 선행을 가지고 남과 비교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다고 말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짐짓 겸손하여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안에서 주님의 은혜가 역사하고 있기에 나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행한대로 갚으시는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자기 의를 드러내면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죽기까지 충성하고서도 자기가 행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러한 열매가 나왔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기적들이 날마다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로마서 2:12-16 송사와 변명 2003. 8. 17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한 주간 영생을 위하여 사셨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쌓으면서 사셨습니까? 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며 사셨다면 영생을 얻을 것이요, 당을 짓고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스스로 썩지 아니할 영광을 구하는 자는 없는 것입니다. 모두 썩어질 영광을 구하고 있었다는 것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더렵혀지지 아니하는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어는 것이기에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외적인 조건이나 공로를 따라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하여 가장 큰 반발이 일어나는 사람은 유대인들입니다. 개와 같은 이방인들과 동일시 한다는 것에 대하여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우리는 율법을 받지 않았기에 우리는 심판도 받지 아니할 것이라는 생각도 하는 것입니다. 법이 없는데 어떻게 심판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하여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2-13절입니다. 먼저 유대인들부터 봅니다.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율법을 받은 자는 율법을 받고 들을 것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킨 자가 의롭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과연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게 될 자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왜 주신 것입니까? 율법은 범죄 함을 인하여 죄로 심히 죄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이방인들은 받은 자격도 없는 것이고 자기들은 특별하기에 주어졌고 그리고 지킬 능력이 있기에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전체에서 드러난 결론은 그들이 율법을 스스로 지킬 수 없다는 결론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야고보서 2:10절에서 율법을 다 지키다가 어느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다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인데 과연 네 이웃을 나의 몸처럼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아니하면서 아무리 율법의 조문을 외우고 다 지킨다고 하여도 그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야고보서의 말씀은 이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별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에서 차별을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서로 서로 차별을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를 알라고 주신 율법으로 자기들을 정당화하면서 남을 정죄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율법의 고발 기능이 있습니다. 율법이 송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받고 율법을 아는 사람일 경우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스스로 변명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율법을 제시하기고 하고 자기 정당화를 위하여 율법을 재해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해석과 적용이 얼마나 엄청난지 탈무드의 방대함을 보면 알 것입니다. 탈무드는 유대인들이 모세오경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책인데 율법의 해석과 적용과 삶의 모든 구체적인 행위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석에 따라 여러 가지 의견이 대립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랍비들이 해석을 함에 따라 어떤 것은 아주 강직한 율법적 해석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관용과 사랑의 해석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라 자기들에게 유리한대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즉 송사와 변명이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은 어떻습니까? 율법이 없으니 심판도 없는 것입니까? 율법이 있는 자는 율법을 범함으로 심판을 받고 율법이 없이 범죄 한 자는 율법 없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범죄 하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통하여 범죄를 알게 되지만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은 어떻게 범죄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본성과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14-15절을 봅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본성과 양심이 자신의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능으로 인하여 스스로 송사도 하고 변명도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송사 받고 변명을 하지만 이방인은 양심으로 송사를 받고 변명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이방인은 자기 본성에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고, 이방인은 양심을 곱게 쓰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 본문의 말씀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스스로 율법을 지키거나 양심을 지킨다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죄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하면 모두가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학생회 수련회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는 일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자기는 봉고에서 무거운 짐을 날라 왔기에 설거지를 안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학생은 자기는 시장을 봐 왔기에 안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설거지 하라는 송사에 대하여 각자가 변명과 변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정당성과 자기 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른들이라면 속으로 감추기도 하겠지만 아이들이니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내리는 결론이 제일로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하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의 행위에 대하여 끊임없이 송사와 변명을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있는 사람은 율법을 가지고 율법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양심을 가지고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언제나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송사도 하고, 변명도 하고, 재판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는 자는 율법으로 율법이 없는 자는 자기의 양심으로 송사도 하고 변명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살고 있습니까? 역시나 자기 자신이 스스로 율법이 되고 판단의 기준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에 빠지거나 헌금 하지 못하거나 하면 어떤 송사나 변명이 나오고 있습니까? 전에는 율법의 기준에서 송사를 하고 변명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을 가지고 송사도 변명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언가 속에서 송사를 하지요! 너 예배 빠지고 무얼 했느냐고 누가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스로 합당한 이유와 변명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하지 않을 만큼 정당한 근거를 스스로 변호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가난하다거나 더 급한 필요가 있다는 식입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율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여 송사도 변호도 판단도 하고 있으니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명 중에서 이제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또는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행동하면서 여전히 그 중심은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정당성으로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에서는 끊임없이 송사와 변명이 계속되고 있지만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또는 전혀 그러한 송사와 변명도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모스에 의하면 거짓된 종교적인 확신과 경제적인 안정을 인하여 스스로 든든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회개를 외쳐도 자기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마치 양심의 화인을 맞은 사람처럼 송사와 변명도 없이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 살면서도 모르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8-20입니다.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바울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였으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속받았음을 증거 하면서 디모데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파선한 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다음 말씀에서 봅니다.
딤전 4:1-5절입니다.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믿음에서 떠나는 자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 됩니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는 것처럼 여러 가지 새로운 이야기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의를 발로 밟은 행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자기들 안에서 진리다 아니다, 옳다 그러다 하는 송사와 변명이 끊임없이 나오지만 그러나 무엇으로 바른 판단이 나오게 됩니까? 16절입니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사람들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누가 옳은지 그런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판단하면 모든 것이 백일하게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옳다 그러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은밀한 것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복음은 그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자신이 율법을 지킨다는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모든 사람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지금 세우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자신의 정당성이 그래도 나오는지 아닌지를 복음을 통하여 지금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지금까지의 자기 송사와 변명이 다 무너지는 사람, 입이 백 개라도 할말이 없는 사람, 아무리 율법을 지키고 양심을 곱게 가지고 살았더라도 십자가 앞에서 지옥가야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성령이 임한 사람이며 복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의 모든 죄악의 지적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아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생기는 자기변명에서 이제는 모든 말씀이 다 자기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여러 가지 구체적인 목록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사람은 자기변명이나 자기변호를 위하여 말을 만들어 내거나 다른 행위로 대체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자기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 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에게도 로마서 7장처럼 죄냐 의냐 라는 싸움이 나오지만 그러나 자기 송사와 자기변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결코 정죄함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머무는 것입니다(롬8:1-2).
로마서 2:17-29 겉과 속 2003. 8. 24
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1)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ㄱ)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5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사람을 판단할 때 겉과 속이 같은지 다른 지를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늘 외모 중심으로 보기에 그 사람의 속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보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모를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왜 스스로의 의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가를 최종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내용은 유대인과 율법을 주제로 말씀하고 있지만 이미 이방인의 한계를 말씀하였습니다. 이방인 가운데 양심 바르게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에 대하여 정절을 지키고 나라의 임금을 섬기면 죽어도 한 임금을 섬기는 충성을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방인의 모습보다 더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늘 다짐하고 새롭게 하는 유대인들은 어떠하였는가를 오늘 말씀이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주제로 유대인과 율법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17-20절에 유대인들의 특권과 자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 있어서 율법이란 그들의 최고의 자랑거리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보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 하면 율법과 끊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자부심이 율법을 받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율법을 의지합니다. 율법을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기에 율법을 의지하며 그것을 보전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애를 써왔습니다. 율법을 필사하는 서기관들의 정성을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하고 철저하였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율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박영선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도를 주었는데 유대인들이 소경이라서 지도의 내용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둘둘 말아서 막대기로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율법을 모르는 자들을 패는 몽둥이로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신이 없다는 세상 속에서, 또는 우상을 섬기는 세상 속에서 그들은 그들에게 계시한 하나님을 목격하고 그들에게 말씀주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것이 무언인지를 알고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고, 어리석은 자를 훈도하고,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자부심을 가질만한 내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할례에 대하여서도 이들은 포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예수를 믿어도 할례는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율법과 할례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그들의 겉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름을 자신들이 모른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이들의 겉모습을 예수님께서 얼마나 신랄하게 공격하셨는지 모릅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저주를 퍼부으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율법을 자랑하고 지킨다고 믿고 있는 그들이 또 다른 세력에 붙잡혀 속고 있었음을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자랑하고 율법을 믿고 가르친다고 하였지만 그러나 율법의 제정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에서 율법을 받았다는 인간조차 어떠한 형편에 있는지를 밝히 보이신 것입니다.
율법을 자랑하고 믿는다는 그들이 율법을 가르친다는 그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죄를 그들이 동일하게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21-23절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도 도둑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도둑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도둑질이 되는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구약에 의하면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제대로 드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들도 간음하는 것입니다. 비록 행위로 나오지 않았더라도 이웃의 것을 탐내었으면 이미 도둑질 한 것이요. 마음에 음욕을 품었으면 간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겉모습으로 도둑질이나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안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마음의 할례였습니다. 신명기 10장 12-22절입니다. “봉독”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마음의 할례를 말씀하시면서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두 마음이었습니다. 입술로는 존경하나 마음은 멀다고 이사야 선지자가 탄식을 한 것입니다.
시편 62편 1-4절을 봅니다. “1 나의 1)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2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주만 의지하는 다윗을 공격하는 방법이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인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메시야의 고난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알려주어도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고 믿고 있으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의 할례를 얼마나 중요시 하였는지 난지 8일이 되면 할례를 하라는 할례의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안식일을 범하면서까지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할례에 대하여서도 바울사도는 율법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인 유대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한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표면적인 유대인인가 하는 것은 결국 십자가에서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는 이스라엘 백성조차 그 모습이 표면적인 것 밖에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율법이 할례가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을 율법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롬11:32).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율법을 받았고, 할례를 행한다는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한 것입니까? 이것이 육체의 한계인 것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육체에 한다고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할례는 사람이 할 수 있지만 마음의 할례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레미야 4:3-5절입니다. “3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말씀을 이미 할례를 받은 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은 자들이 또 무슨 할례를 받는 것입니까?
예레미야 33:31-34절입니다.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2)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돌판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람의 마음에 새긴다는 것이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한 의를 성령이 임하여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빌립보서 3:3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자랑이 빠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육체적인 행위도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주님 홀로 행하신 일에만 기대를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겉모양이 아니라 속이 바뀐 자들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오늘 예수 믿는 다는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무엇을 말할 수가 있습니까? 일요일에 예배당에 오는 것, 교회에서 봉사 하는 것, 직분 받은 것, 대문에 교패 다는 것, 차 뒤에 물고기 모양 붙이는 것입니까? 모두가 표면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면적인 그리스도인 속조차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로마서 2:29절입니다. 할례는 의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령에 있다는 것은 율법의 문자대로 몸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된 것은 사람의 일로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육체의 할례를 전하였다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라고 갈라디아 5:1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모든 봉사를 성령으로 봉사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자기의 육체의 행위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걸지 아니합니다. 동시에 남에게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3:1-8 거짓된 사람 참되신 하나님 2003. 8. 31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ㄱ)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복음이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의롭게 되는 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고, 이방인이 양심으로 의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을 로마서 1:18-2:29절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데 믿음이라는 것도 인간의 행위가 아닌 그저 주시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하여 유대인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을 예상하고 바울이 그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 의문이란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할례를 명하시고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이 그 언약대로 이루어 출애굽하고 율법을 주시고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살게 하신 그 모든 것들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는 이방인들과 우리가 어떻게 똑같이 죄인으로 취급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유익은 범사에 많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셋째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 안에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유익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인 것은 로마서 9:4-5절에 의하면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엄청난지를 신명기 4:32-40절을 봅니다. “32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피조물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한 죄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사는 존재가 이제는 들으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참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고 섬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신명기 8:1-4절입니다. “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40년간 광야생활을 통하여 알게 하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하는 것이 살길입니다.
이처럼 엄청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보다 무언가 나은 것이 있어서 받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말씀을 받은 것은 엄청난 일이지만 말씀을 받은 조건이 있어서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많거나 더 나은 민족이라서 말씀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명기7:7-8절입니다.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다른 민족보다 무언가 나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사랑과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자기 언약에 충실하심으로 구원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복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받기를 싫어하며 거부하였는가를 구약 성경 전체에서 증거 하고 있습니다. 수요일 보는 아모스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 땅이 견딜 수 없어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를 막고 돌로 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유대인들에게 의하여 일어난 것에 대하여 인간이 얼마나 거짓되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한 것인지가 오늘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3:3절입니다. 이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하리요하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였기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폐하여 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자들이라고 소수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절대 다수가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을 믿지 아니한 것이 구약의 역사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믿은 자는 아주 극소수입니다. 이들도 역시 자기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 절대 다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였으면 하나님은 실패한 것입니까? 거역하였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거부하면 이루어지지 않고 순종하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자기들이 없으면 하나님도 일하지지 못하시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이 일하시지 못하신다. 그러므로 준비된 그릇, 쓰임 받은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준비를 갖추어 쓰임 받을 수 있는 그릇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의로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그릇은 진노의 그릇으로 어떤 그릇은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하나님께서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에 대한 특권의식을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신실함에 의존하여 일하심이 아니라 자신의 신실함을 두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렇게 반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은 빈틈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핵심은 메시야 오심입니다. 이스라엘의 거역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홀로 신실하게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십니다.
로마서 3:3-4절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반역과 불신 때문에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서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일부 거짓 된 것이 아니라 ‘다’ 거짓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지 아니하고 반역할 지라도 참되신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논증하기 위하여 시편 51:4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의로운 줄 알았는데, 제대로 된 왕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범죄하고도 죄인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이 가서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비유로 다윗의 죄를 지적하여도 자기 인줄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네놈이라고 하자 그제야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시편 그대로 인용하지 않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시려 함이라고 하는 것은 다윗을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이 의롭다 함을 받고 판단 받을 때에 이기신다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25-26을 보시면 죄인을 의롭다 하심이 화목제로 인하여 주어지는데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간음자요 살인자인데 이런 자를 의롭다 한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대신 희생당한 꺾어진 뼈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야처럼 거룩한 전쟁에서 희생당하시는 분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방식입니다. 다윗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비록 불순종 하였더라도 하나님의 미쁘심은 실패가 없으시기에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언약을 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언약을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여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자기 의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승복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반응이 나옵니까? 5절입니다.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불의한 자들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정당하냐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예상하여 바울이 논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의함으로 하나님의 의가 더욱 드러난 것이라면 불의한 것이 공로가 되지 아니한가 하면서 자기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7-8절입니다. 율법을 받았고 율법을 지킨다는 유대인이나 율법도 없고 그래서 지키지도 못한 이방인이나 같다면 마음대로 죄 짓고 살면 되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니 그러면 죄를 더 많이 지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크게 드러내게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내가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인인가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사도에게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선을 이루기 위하여 죄를 짓자고 하는 놈들이 바울의 일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죄를 지어도 된다고 하더라. 죄를 짓거나 짓지 않거나 똑같이 죄인인데 내 기분대로 살라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결국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가 의를 행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적인 은혜가 싫은 것입니다. 자기의 공로가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랑이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보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전적인 죄인임을 모르기에 나오는 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 거짓됩니다. 율법 외에, 인간의 행함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이제는 자기를 믿지 않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짓되나 오직 하나님만이 참되시고 의로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그 원인과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자들은 정죄 받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8). 거짓 된 사람(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을 믿지 말고 참되신 주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3:9-18 인간의 실상 2003. 9. 7
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1)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한바 ㄴ)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ㄷ)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ㄹ)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ㅁ)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ㅂ)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ㅅ)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함과 같으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통하여 계시를 말씀하시는데 계시의 말씀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이야기가 됩니까? 건강한 자는 의인으로 비유하고 병든 자는 죄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은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근원적인 고침을 받아야 하는 병든 자, 즉 죄인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는 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원한다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지금까지의 논증을 통하여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다 죄인이라는 논증을 해 왔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그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과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은 유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받은 것은 인간이 율법을 받았을 때 어떤 반응과 태도가 나오는지를 이스라엘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보이심으로 인간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이 반발하여 그러면 자신들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 것이라면 자신들이 진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자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향하여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자기들이 죄를 짓고 안 짓고 할 능력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보고 있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도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듣는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서는 어차피 죄인인데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는데 마음대로 살자고 하거나, 밖에서는 저 사람들은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 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을 모르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스스로 죄를 짓고 안 짓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죄 아래 있다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오늘 말씀이 증거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모습을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구약의 성경을 인용하여 결론을 내리는데 시14:1이하, 시53:1이하, 시5:9, 시140:3, 시10:7절, 사59:7절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짧은 본문 속에서 인간의 실상을 말하기 위하여 구약의 시편과 이사야에서 인용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입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은 성경을 가지고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논증함으로 인간의 실상에 대한 최종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헌법에 문제가 있으면 헌법 재판소에서 최종 결론을 내리듯이 오늘 말씀은 인간의 실상에 대하여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9절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 똑 같음이란 모두가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았다고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다 지켜야 의인이 되는데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다 지켜서 의인이 될 수 없기에 율법을 처음부터 받지 않았던 이방인이나 똑 같다는 것입니다. 울산 어느 중학교에서 전교 1등하는 아이를 서울에 보냈더니 서울의 특별고등학교 들어가기 위한 학원의 시험에서도 떨어졌다는 것은 울산이나 다른 지방의 아이들은 그런 곳에 꿈도 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택받았다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그들이 불합격 하였다면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합격 한 정도가 아니라 시험출제자를 불의하다고 죽여 버렸다는 것이 성경이 증거 하고 있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10-12절입니다. 기록한바 즉 성경을 인용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14편과 53편의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살펴보시는데 의인이 있는가 하고 보시니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의인이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깨닫는 자도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기에 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자도 없는 것입니다. 깨닫기라도 하면 의를 달라고 구하기라도 할 텐데 율법이 없는 자는 아무것도 몰라서 의를 구하지도 않고 율법을 받은 자들은 표면적 유대인임을 가지고 의롭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깨닫지를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은 결국 자기들의 소원이나 들어주는 우상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치우쳐 전부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바울자신이 유익하다고 여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대인중의 유대인이요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였으며 누구 못지않은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무익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것을 모두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무익한 자 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자신이 무익한 줄을 아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그래도 자신이 무언가 유익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유대인들이 이미 착각한 그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착각을 하게 되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 예수님을 믿고 났으니 우리의 착한 행실로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란 자기의 모든 것이 자기 행함의 결과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제대로 나타났다면 그것이 결코 자신의 경건과 권능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된 것임을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예수 믿는 다는 사람들끼리 서로 서로 경쟁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성령의 열매가 많은가 너희가 더 많은가 하면서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을 자랑하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자기들이 얼마나 괜찮은 인간 되었는가를 말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러한 교회가 교회완전주의를 말하는 지방교회입니다. 자기들 외에는 교회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방 교회 외에는 다 가짜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다는 인간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또 다른 자기 의를 만들어 내는 사람, 단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러한 올무에 빠져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자신이 무익한 줄을 아는 것이 은혜가 임한 자의 모습입니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아담이 범죄하고서 후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아래 모두 죽을 운명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과도 통합니다. 우리가 다 해아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무엇이 새로운 것이나 선한 것이 나오겠습니까? 그저 세상에서 살다가 악취만 풍기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가고 있는 인간입니다. 겉으로 아무리 치장을 하고, 인류의 평화를 위하고, 종교적 행위를 하여도 죄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보시기에 죄 뿐인 것입니다. 그 실상을 오늘 말씀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13-14절입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무덤은 땅을 파고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굴 같은 곳에 시체를 둡니다. 그래서 살이 다 썩어 내리면 뼈를 추려서 조상들의 뼈를 모아두는 곳에 넣는 것입니다. 그런 무덤이 열려지면 무슨 냄새가 나겠습니까? 그러한 실상이 우리의 목구멍이라는 것입니다. 목구멍에 무엇이 있습니까? 혀가 있습니다. 이 혀로 속임을 베풀고 입으로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인정하십니까?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이러한 자임을 인정하십니까? 이런 모습은 예수 믿기 이전에 그렇고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까?
야고보서3:1-10절입니다.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예수 믿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마땅치 아니하지만 이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혀로 속임을 베풀고 그 입에 악독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그 입에 독이 가득한 짐승이 무엇입니까? 뱀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던 뱀입니다. 그러면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이 뱀의 권세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는 그 특성이 그대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곧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입을 통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율법을 지켜 의인이라고 하는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면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요8:44).
마태복음 23:27에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바울사도가 인간의 실상을 말하는 것이 누구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마23:3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고 그 율법을 지킨다는 그래서 가장 의롭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인간의 실상에 대하여 예수님의 평가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십니다.
로마서3:15절입니다. 입만이 아닙니다. 입에는 나오는 것은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은 죄가 권세로서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장악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악을 실행하는 것은 발입니다. 이 발이 얼마나 빠르게 악을 행하는 일에 빠른지 우리의 발이 빨리 움직이는 곳이 어느 곳에 빨리 움직이고 있습니까? 결국 마음과 행동이 다 악한뿐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16-18절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이러한 인간은 고생과 파멸만 그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자기는 마음으로도 행위로도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바울사도는 한명도 없다고 합니다. 모두다 죄 아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영원한 멸망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 스스로는 죄의 권세를 이겨낼 방법이 없습니다. 양심으로 안 됩니다. 율법도 안 됩니다. 그 어떤 인간의 행위로도 죄를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죄 아래 있기에 하나님의 진노만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5:8-11절입니다. “봉독” 죄 아래 있을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으로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고 장차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입은 자는 그 어느 것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완벽하게 일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로마서 3:19-22 율법과 의 2003. 9. 14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율법과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분기점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1:1-17절까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요점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1:18-3:19절까지 유대인의 율법 지킴이나 이방인의 양심과 도덕률에 의하거나 간에 어떠한 노력을 하여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이 죄의 권세아래 있기에 스스로 그 권세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자신이 죄를 조종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스스로 이길 수 없으면서도 이길 수 있다는 착각을 어떻게 하는가 하면 스스로의 기준을 정하고 목록을 만들고 양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 아래 있는 결과가 어떤 모습으로 나옵니까?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할 뿐입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가득하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일에 빠른 것입니다.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기에 수에 칠 가치도 없으며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벼운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율법의 기능과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하는지 율법의 기능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율법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입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아래 있는 자들이 율법을 지켰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할말이 없는 자라면 율법이 없는 자들은 더더욱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모든 입을 막아 버리는 것은 율법을 통하여 인간의 죄가 드러나기에 그런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 버리는 것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입니다. 율법의 문자적이고 외면적인 적용과 지킴이 아니라 그 깊이와 내면적인 적용 앞에서는 그 어느 인간이라도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후에 제일 먼저 기록된 사건이 문둥병자의 치료사건입니다. 레위기에서 문둥병자가 되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입술을 가려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제정자가 친히 율법의 깊이와 내면을 말씀하시면 모두가 입을 가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은 입술이 부정한 자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아는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입술이 부정한 것을 알게 됩니다. 부정한 입술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그 입이 열린 무덤인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주님을 만나고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입술이 제단의 숯불에 지져져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만 입을 막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고 나서도 입을 닫게 됩니다. 에스겔 16:60-63절입니다. “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61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62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니 63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태어나자 말자 탯줄도 자르지 않고 버려진 계집아이를 불쌍히 여겨 씻기고 입히고 공주처럼 키워 놓았더니 온갖 음행을 행한다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인하여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용서는 네 언약이 아니라 내 언약이라고 하심으로 이루어 내시고 그렇게 하심으로 여호와를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용서를 받고 나서는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용서를 받은 사람은 입이 열개가 아니라 백 개라도 할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용서를 받은 사람은 결코 자기 자랑이나 자기 의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고소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45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유대인들이 믿고 바란 모세가 무엇을 한다는 것입니까? 고소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고소를 합니까? 율법으로 고소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로 받아 전한 모든 명령과 규례를 단 하나라도 지키지 아니하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단 하나를 어기면 모두를 어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저주와 심판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심판에서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지니 죄가 무엇인지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7:7-8절입니다.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ㄱ)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율법이 도둑질 하지 말라 하면 오히려 도둑질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죄가 계명을 가지고 인간을 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가입함으로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짐을 인하여 왜 인간이 저주 아래 있는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가를 알게 하시어 입을 닫게 하시는 조치입니다. 재판정 앞에서 너는 죄인이냐 입 닫아 그러는 것입니다. 입 닫으라고 하는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도 자신이 죄가 무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하시는 분은 몇 번이나 확인을 한 내용입니다. 죄란 윤리에 어긋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주체적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는 삶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죄임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항변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에 내 자아하나 위하여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언제 주님을 먼저 생각이나 해 보았습니까? 주님을 말한다고 하여도 결국은 자기의 자아를 위한 들러리로 주님을 이용은 하였지만 제대로 주님의 뜻에 복종한 적이 과연 있기나 한 것입니까?
이제 우리 자신에게 적용을 합니다. 율법이라고 좁혀 말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넓혀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당당하게 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 어느 한 말씀인들 제대로 순종한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을 제대로 준행하였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조용히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입을 닫고 조용히 지옥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중요합니다. 그러나가 없다면 모든 인간은 전부 심판에 이르러야 마땅한 것입니다. 로마서 3:21절에 그러나가 빠져있습니다만 제대로 느낌을 살리자면 “그러나 이제는”입니다. 로마서 1:18절에서 지금까지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죄의 지배아래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죄의 권세를 모르고 자기들이 무슨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의 목표는 율법 외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들이 모르게 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인간의 가능성을 붙들게 함으로 주님의 의를 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전에는 죄가 왕 노릇하였는데 이제는 의가 왕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죽음이 왕 노릇 하였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이제 두 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죄 아래 있든지 은혜 아래 있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중간 지대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되심을 믿으신다면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 주어도 살 수 없는 생명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된 것이 어떻게 일어난 것입니까?
로마서 3:21절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증거 하고 선지자가 증거 한 것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그 의가 드디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율법 외에 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신약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 한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이라고 하면 모세오경을 말합니다. 그러면 창세기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증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나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때로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전쟁을 벌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벨 대신 셋을 주시고 에녹과 노아를 부르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더욱 구체적인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땅과 자녀에 대한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심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였고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선지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한 것입니다. 이사야 61:1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2)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지만 주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은 신랑 신부가 단장한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33:14-16절입니다. “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모든 선지자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의는 우리의 어떠한 조건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것은 율법 외에 주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 외에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준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행하신 결과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자기의 의에 대하여 자기의 자랑에 대하여는 입을 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그의 하신 일만 증거 할 뿐입니다. 여기에 그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로마서 3:23-26 구속으로 말미암아 2003. 9. 21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3)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사야 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외치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사야 40:6-8절의 말씀입니다.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이 말씀을 베드로 사도가 인용한 말씀이 베드로전서1:23-25절입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ㄴ)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아름다움을 영광으로 말씀을 복음을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문자대로 인용을 하지 않았지만 성경에서 증거 하는 인생에 대하여 야고보 1:9-10절에서 말씀합니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이 세 곳의 말씀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영광이 얼마나 순간적이며 부질없는 것인지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적으로 아름답게 표현이 되어 있지만 인생이란 것이 한 포기의 풀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이 아무리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순간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풀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풀이 시들어 버리면 그 꽃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광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 인간의 선함, 인간의 진리라는 것이 풀의 꽃 정도이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라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지 이사야 선지자는 더러운 옷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죄 아래 갇혀 있는 것이며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악취만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야 가장 아름답다 고상하다고 하지만, 화장실의 구더기들이 자기들은 좋은 환경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냄새나는 것과 다름없이 인간의 영광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악취일 뿐입니다.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할 뿐임이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증거 하고 있으며 그러한 구약의 증거들을 로마서 3:10-18절에서 이미 밝히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치우쳐서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며 그 발은 피 흘리는 일에 빠르다고 합니다. 이런 인간이 하는 말과 행동이 어떤 결과과 나오겠습니까? 인간의 말과 행위들이 만들어낸 인간의 영광이라든가 위대한 문명이라고 스스로 찬양하지만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속히 철거되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내 자신임을 인정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직도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인간의 이러한 실상에 대하여 인정하는 자라면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데, 그러나 등으로 자기를 변호하고 옹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증거 하는 인간의 실상에 대하여 아멘 할뿐이지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말하는 자들은 율법아래 있는 모든 자들의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그 어떤 가능성도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교육도, 환경의 개선도, 도덕도 인간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는 스스로 의에 이를 수가 없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이러한 인식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므로 우리가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주의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면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무엇이겠습니까?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미 죄 아래 있기에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까?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여 인간이 그 대가를 지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의에 이르는 값을 요구한다면 단 한 사람도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값없이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가 되지만 하나님 쪽에서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 사망의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회란 예수 믿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피와 땀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와 땀을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흘리신 피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25절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을 삼았다고 말씀합니다. 화목제물이란 구약에서 제물을 드릴 때 그 제물 되는 짐승의 머리에 죄인이 안수를 함으로 죄를 전가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짐승이 대신 희생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죄제인데 속죄제를 지내고 나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에 화목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속죄와 화목제물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인하여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시는 것이 목표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단지 죄 사함을 받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구원은 은혜로 상급은 행함으로 그런 말을 합니다. 구원과 속죄는 예수님의 피로 성화는 우리의 힘으로 그렇게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이미 단번에 의롭다 함을 얻고 거룩함을 얻었고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또 다른 의를 이루거나, 또 다른 성화를 이루거나, 또 다른 영광을 이루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구속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속으로 말미암아’ 입니다.
구속으로 말미암는 다는 것은 구속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여 놓았고 나머지 거룩하여 지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너희들이 알아서 이루어 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 안에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영광이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구속 곧 그 피로 인하여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 어떻게 영광까지 주어지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7:22절과 24절을 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지신 영광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이 왜 영광이 됩니까?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얼마나 철저하게 심판하시는지를 보이시면서 동시에 자기 택한 백성을 의롭다 하시기 위한 십자가였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로마서 3:26절의 말씀처럼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시면서 동시에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4절에서 무어라고 증거 합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증거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후에 사도가 성령을 받고서 기록한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나니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 의롭다 하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모든 것이 어떻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구속은 은혜로 주어지고 나머지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8:30절에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고, 우리의 거룩이 되시고, 우리의 영광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모든 은혜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구속으로 말미암는 은혜가 계속하여 증거 되지가 않고 구원은 은혜로 상급이나 성화는 인간의 행함이라는 구호가 끊어지지 않을까요? 인간의 죄인 됨의 근원이 하나님을 떠나 독립적인 인간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존적인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가 주인이 되고 싶어 하지 종이 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지시를 받고 살지만 때만 되면, 능력만 되면,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독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처 끝까지 은혜에서 은혜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간다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무시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도대체 무어냐는 반문이 자꾸만 일어나서 인간으로 하여금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과 환경 속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거룩함을 얻고 영화롭게 된 자들은 참으로 은혜로 된 자들이며, 이들은 이제 소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광의 날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 영광이 아니라 온 세계에 다 알려지는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는 것은 그 날에 우리의 낮은 몸도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3:17-21절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아멘.
로마서 3:27-30 자랑 2003. 9. 28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있습니다. 자기 자랑거리를 말하고 또 만들어 내는 재미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랑거리가 없어지고 수치가 드러나면 살 마음이 없어지게 됩니다. 부끄럽게 살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수치를 당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자살도 결국 자기 사랑의 일종입니다.
토요일 뉴스에 또 일가족이 승용차 안에서 자살한 내용이 나왔습니다. 남편을 회사의 부도로 실직하고, 아내는 학습지 교사를 하고, 자녀는 9,7,4살의 세 자녀를 두었습니다. 친척에게 빚을 지기도 하였답니다. 왜 자살하였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았지만 생활고를 비관하여 자살하였다고 봅니다. 이런 자살이 종종보도가 됩니다. 그러면 왜 자살하는 것입니까? 멋있고 자랑스럽게 살고 싶은데 상황이 그렇게 되지 않으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아니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도 얼마든지 이런 상황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끄러워 죽겠으니 차라리 죽자고 하시겠습니까? 지난주에 인생이 무엇과 같다고 하였습니까. 풀과 같고 그 아름다움이 풀의 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이 한포기 풀과 같다면 무엇이 잘난 것이 있고 자랑스러운 것이 있어서 죽기까지 하겠습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인줄 모르니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자기 자랑하는 재미로 살고 있는 것이지 죄인 인줄 안다면 수치를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드러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인이다. 모든 것이 다 죄라고 하니 어떤 오해하는 분들은 그래 그렇다면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이니 내 마음대로 살자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는 죄인이야 하면서 주눅 들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언가 잘나고 멋있고 아름답고 고상한 것들이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자기 포장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임을 아는 자에게서 오는 자유입니다. 그동안 자기를 치장하고 포장하느라고 얼마나 힘이 드셨습니까? 그런 헛수고 하지 마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랑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자랑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예수를 바르게 믿는지 아니 믿는지 테스트를 해볼 수 있습니다. 내가 믿고, 믿음으로 무엇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자랑이 나오느냐 감사가 나오느냐로 테스트 해보시면 구별이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교회로 모여서 예배도 드리고 여러 가지 봉사도 합니다. 이것이 자랑인가 감사인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지 않아도 나는 온다는 것, 다른 사람들은 봉사하지 않아도 나는 잘 한다는 것, 다른 사람들은 복음을 잘 모르는데 나는 잘 안다는 것, 이런 것들이 자기의 자랑으로 나옵니까 아니면 감사로 나옵니까? 자랑으로 나온다면 아직도 자신의 죄인 됨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러면 감사로 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여기서 목사가 여러분 교회의 모든 일은 감사로 해야 합니다. 하면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그렇지 교회 일을 자기 자랑하기 위하여, 또는 복 받기 위하여 하는 것은 아니지 감사로 해야지 하면서 자기 마음을 의지로 굳혀나가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여도 자랑으로 하지 말고 감사로 해야지 하면서 스스로 자기 마음에 다짐에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역시 인간의 행함입니다.
지난 금요일 낮 반에서 두 시간을 넘게 이 문제로 교제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들의 의지를 동원하여 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의 의지로 굳혀서 “믿습니다.”를 반복하거나 “사랑합니다.”를 반복하고 세뇌시켜서 믿음이나 사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오는 믿음과 사랑이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게 나올 수는 있어도 그것은 육체의 열매이지 성령의 열매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자원하는 영이 임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심령을 주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는 것이라면 어느 누구의 지시나 간섭이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란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할 것 같으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나오기 싫은데 체면상, 눈치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면 그만 나오시기 바랍니다. 연보도 아까우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강권하여 네 집을 채우라는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그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이 텅 비었기에 채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성전은 제물과 사람들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채찍을 만들어 좇아내어 버린 것입니다. 새로운 성전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새로운 성전은 성령이 임함으로 자원하는 심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원하는 영이 임하여 감사함으로 되지 않으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되겠습니까? 교회 유지가 되겠습니까? 되지 않으면 문 닫으면 될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곳이 교회입니다. 목사가 있어야 교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원하는 영이 임한 두 세람이 모여도 완전한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로 모였다면 그곳에서는 무엇이 없는 곳입니까? 사람의 자랑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만약 두 세람이 모인 곳에서 우리는 기존의 교회와 다르다. 우리는 정말 성경대로 모인 교회이다. 우리는 사람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예수다. 그러므로 우리처럼 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한다면 그곳이 또다시 인간의 자랑이 나오는 곳이 되어 버립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 27절을 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라고 합니다. ‘그런즉’ 이런 앞의 모든 내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앞의 모든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무슨 내용입니까? 인간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증거 하고 있습니다. 죄의 권세아래 있는 인간이 어떤 형편인지를 두 가지로 보여 줍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입니다. 이방인이 본성상 하나님을 찾는다고 찾았는데 그것이 우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를 위한 신이었기에 자신이 신보다 높고 신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있어야 하는 그런 꼴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을 믿는다고 하여도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당연히 생각하기를 사람이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합니다. 지키지도 못할 것을 주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키지도 못할 것을 주시고 지키지 못하였다고 벌을 준다면 하나님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율법을 받기 전에 죄 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율법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는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아 죽인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죄인으로 죄 짓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죄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이 의롭다고 하면서 살아간 것입니다. 그렇게 의롭다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뱀 그러면 유대인들이 얼마나 싫어하겠습니까? 자기들의 조상을 타락시킨 뱀의 자손이라고 하고 있으니 얼마나 화가 났으면, 얼마나 자기들이 자존심에 상처가 되었으면 예수님을 죽였겠습니까?
그러나 율법이 가입한 것은 그들의 죄 아래 가두심으로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우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자랑거리로 여긴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것, 할례를 행한 것, 성전이 있는 것, 안식일을 지키는 등등의 일들이 얼마나 자기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다른 이방인들을 개같이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자랑거리 만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자랑거리는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십일조를 하지 않고 연보를 한다. 연보하는 사람 주보에 싣지 않는다. 억지로 하는 일은 없다. 일체의 경쟁이 없다. 건축헌금도 돌려주었다. 선교도 한다는 등등의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것을 자랑거리로 삼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또 다른 모습으로 자기 자랑거리를 다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교회란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께서 관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 인간의 소리, 인간의 행정들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만 그런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란 예수그리스도 몸이 교회입니다.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신 자기의 몸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교회들을 보고 교회가 이래서 되느니 안 되느니 하실 일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생사를 건 교회개혁이라고 하는 책을 누가 주어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생사를 건다는 것이 위임목사 하지 않고 몇 년에 한번씩 시무투표를 하는 것이 생사를 건 것입니까? 그런 생사를 건다면 임시목사는 매년 생사를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개혁될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개혁되어야 합니까? 그 피의 완정성이 부족합니까? 구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거룩함을 얻고, 영광스럽게까지 하신 주님의 구속의 능력에 흠이 있습니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금도 놓지 아니하시고 철저하고 완벽하게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늘 푸른 교회라고 여러분들이 돈을 내어서 세를 얻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것을 교회로 보지 않습니다. 이런 교회란 태풍에 날아갑니다. 간판 중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늘 푸른’은 남아 있는데 ‘교회’라는 간판은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 교회라는 간판이 날아가면서 만약 사람을 쳤다면 흉기가 될 얇은 철판으로 된 간판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날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산 백성들만 교회입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만 그런 사람은 일체의 인간적인 자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잘남도 없고, 다른 사람의 잘남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자랑이 죄 임을 아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죄의 목록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30절에서 보시면 자랑이 무엇과 함께 나오는가 하면 교만과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랑이란 인간의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그 교만이 자기 자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신 모든 것들을 은혜로 받아 사는 것이 싫다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교만이며 그 결과가 자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대단한가? 나도 대단하다는 것이 인간의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을 유형으로든 무형으로든 만들고 있으면서 스스로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의 솜씨와 행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신 일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3:21-24절을 보시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로서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인간의 믿음이 조건이 아닙니다. 그 믿음이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담겨있는 것이 믿음이지 자기의 믿어주었다는 행위가 담겨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믿습니다. 는 의지적 결단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피로 화목제물을 삼으시고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선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이 우선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시고 믿는 자를 또한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27절을 봅니다. 왜 자랑할 수가 없습니까? 자기의 행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무엇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 믿음의 실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실 분은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이러한 믿음을 인간이 의지적 결단이나 마음을 굳히거나 반복 학습하여 받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혹시 지식으로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들은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핍박이나 내일의 대한 염려나 재리의 유혹에 다 날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기 자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라는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멸하시는 악인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시편 28편에서 다윗이 악인을 멸하시고 주를 의뢰하는 자를 구원하소서! 하는 시편가운데서 저희를 심판하시고 파괴하고 건설치 마소서라고 하는 악한 자들이 누구인가하면 5절에서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파괴하시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는 것은 여호와께서 친히 행하시고 자기 손으로 지으신 것이 아닌 것, 즉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모든 것들을 다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을 이루어 내어서 하나님께 보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해 내었나이다. 라고 말할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은 시편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의만 말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6-31절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ㄴ)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은 세상에서 자랑 할 것들이 별로 없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혹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이 오더라도 교회에서는 자랑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 왜 그리 자랑이 많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랑하면 별로 알아주지도 않고 먹히지도 않으니 교회 안에 와서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까?
에베소서 2:8-9절입니다.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왜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 것입니까? 여기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자기의 행함이 아님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자기 자랑하지 맙시다하는 결론이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계속 자기 자랑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구나하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세상의 자랑들은 다 쓰레기요 배설물입니다(빌립보서 3:1-9).
로마서 3:30-31 율법을 세움 2003. 10. 5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가을 들판에서 추수를 하고 있습니다. 탈곡을 하면서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합니다.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웁니다. 올해는 유난히도 쭉정이가 많습니다. 어떤 논에서는 아예 추수를 하지도 아니하고 갈아 엎어버리는 곳도 있습니다. 교회의 10월 달력에도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 하면서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시는 작업을 하시는 분으로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알곡은 곡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3:12).
예수님께서도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시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알곡은 천국창고에 들이고 가라지는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던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인간은 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당장 어떤 생각을 합니까?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방법을 가르쳐 주면 그대로 지켜 순종하여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거듭남과 죄 사함의 비밀을 알려 주겠다고 텔레비전에서 광고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죄 아래 갇혀 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행함으로 의에 이를 수가 없는 형편에 처하여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인간의 행함으로는 하나님 앞에 살아갈 자격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로마서 1장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계속하여 보아 왔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반발이 나오지 않습니까? 아니 인간을 어떻게 보고 그렇게 무시하는가 하는 반발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반발을 가장 강력하게 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을 받고 율법을 지킨다는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은 의롭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율법을 다 지킨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어라고 반발을 하겠습니까? 율법을 지킨다는데 무엇이 잘 못되었는가?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셨는가?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우리를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너는 율법을 모독하는 자라고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말을 하자 유대인들이 바울도 죽이려고 드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의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 그 의로움과 특권이란 다 날아가 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율법이 폐하여 졌는가 하는 말을 바울사도가 미리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폐하여 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율법이 세워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요구가 무엇입니까? 신명기 30:19절을 봅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신명기 28장에서 복이란 여호와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명령과 규례를 다 지켜 행하면 생명과 복이 되지만, 하나라도 어기면 사망과 화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망과 저주를 받지 아니하고 생명과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지켜 행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생명을 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인간은 생명과 사망을 두고서 선택하라고 하여도 생명을 택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미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10절입니다.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ㄴ)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만 어기면 다 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0절입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ㄷ)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 왜 저주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까?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해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이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고 하나님의 심판아래 가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불 순종아래 가두는 것입니다. 스스로 순종하여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율법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율법의 성취란 모든 인간이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을 다 드러냄과 동시에 율법을 어겼기에 저주가 임하는 것까지 이루어 져야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7-20절을 봅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기존의 율법을 지킨다는 유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지켜 행함으로 율법을 지키지 못함에서 오는 저주까지 해결이 되어야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존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사랑하고 지키는 수준이란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율법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목숨처럼 지키는 율법의 의라는 것도 율법의 완성을 이루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20절 이하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형제에 대하여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고, 형제에 대하여 욕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사화하고 와서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간음도 마음으로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입니다. 도적질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마음에 탐심은 어떻게 합니까? 구제를 하기는 하는데 어떻게 왼손이 모르게 할 수가 있습니까? 결국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로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가 없는 의의 기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나은 의가 나와야 하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실격하였는데 어느 누가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 주님 앞에 나설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자기는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씀이 통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가 하면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무슨 재미로 산다고 지난주에 보았습니까? 자기 자랑하는 재미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 의 축적에 대한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아십니까?
로마서 10:3절에 보시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이를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피조물로서 창조주로부터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그대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무익한 종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무엇을 행하면 행하는 것만큼 그것을 자기 의로 축적시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9-14절입니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기도란 자기의 부족을 아뢰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마저 자기 과시가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도 사람들이 내 기도를 사람들이 어떻게 들을까를 생각하니 어려운 것입니다. 저도 대표기도를 많이 해보았습니다만 하나님께 대한 간구보다는 사람들을 의식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입니다. 설교인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찬양인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런 우리들이 도대체 무엇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의 문자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그 깊이와 뜻에 이르기까지의 순종이란 인간으로는 참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마음 굳힘으로 지킬 수가 없는 내용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 앞에서 무엇이 드러나는 것입니까? 죄인임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6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제일 우선이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기도도 하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는데 무엇이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율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끌리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기도회 때에 고린도전서 12:1-3절을 보았습니다. 이방인 때에는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대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우상이 끄는 대로 끌리는 것입니다. 우상이란 헛것입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끌리는데 어떻게 합니까? 거부하지 못하고 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에게 속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저주 할 자라 하지 않고, 주 예수라고 하면서 끌리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 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마음이 예수님께로 끌리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될 일이 아닙니다. 찬송가 135장 2절 가사에 “멸시함을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라고 찬송합니다. 멸시함을 받고 저주를 받은 십자가에 무엇이 있다고 마음이 끌리겠습니까? 이것이 율법의 완성으로 이루어진 기적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완벽하게 다 지키면 생명과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라도 어기면 사망과 저주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성취되어야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완성을 누가 이루어 내신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3:10-14절입니다. “봉독”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을 다 완성하심으로 의를 이루셨고, 또한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의롭다 하시고,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믿는 자의 복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로 인하여 이제 믿는 자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도망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과 저주를 해결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를 인하여 주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나고 또한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