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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始祖의 이름과 東明王에 대한 小考
明治好太王(역사문 정회원)
목차
Ⅰ. 머리말
Ⅱ. 각 사료에 나타난 고구려 시조의 이름
1.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鄒牟라고 기록한 사료
2.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中牟(혹은 仲牟)라고 기록한 사료
3.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朱蒙(혹은 鄒蒙)이라고 기록한 사료
4.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象解라고 기록한 사료
Ⅲ. 東明王 = 鄒牟王설 비판
1. 東明王과 鄒牟王에 대한 고구려와 주변국의 인식
2. 都慕王은 鄒牟王이 아닌 東明王
Ⅳ. 요약 및 맺음말
Ⅰ.머리말
북위(北魏)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魏書)』 이래로 중국 사료들은 물론 이에 영향을 크게 받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여러 한국 사료들 그리고 현대의 한, 중, 일 사학계에서는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주몽(朱蒙)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음 표는 동북아의 고대부터 중세시대까지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기록한 사료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작성한 것이다.
사료 |
제작 연대 |
이름 |
비고 |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 |
414년 |
추모(鄒牟) |
추모왕(鄒牟王) |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 |
5세기 중엽 |
추모(鄒牟) |
추모성왕(鄒牟聖王) |
위서(魏書) |
551~554년 |
주몽(朱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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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서(周書) |
618~628년 |
주몽(朱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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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사(北史) |
627~659년 |
주몽(朱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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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隋書) |
629~636년 |
주몽(朱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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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翰苑) |
660년 이전 |
주몽(朱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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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비(文武大王碑) |
682년 |
주몽(朱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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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묘지명(高慈墓誌銘) |
700년 |
주몽(朱蒙) |
주몽왕(朱蒙王) |
천헌성묘지명(泉獻誠墓誌銘) |
701년 |
주몽(朱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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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 |
702년 |
주몽(朱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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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日本書紀) |
720년 |
중모(仲牟) |
중모왕(仲牟王) |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
788~830년 |
추모(鄒牟) |
추모왕(鄒牟王) |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
788~830년 |
추모(鄒牟) 일명 주몽(朱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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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 본기(三國史記 新羅 本紀) |
1122~1146년 |
동명(東明), 중모(中牟) |
중모왕(中牟王)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三國史記 高句麗 本紀) |
1122~1146년 |
주몽(朱蒙) 일명 추모(鄒牟), 상해(象解) |
동명성왕(東明聖王), 동명왕(東明王) |
삼국사기 백제 본기(三國史記 百濟 本紀) |
1122~1146년 |
추모(鄒牟) 일명 주몽(朱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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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高麗圖經) |
1123년 |
주몽(朱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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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1251년 |
주몽(朱蒙) |
동명왕(東明王) |
삼국유사(三國遺事) |
1281~1283년 |
주몽(朱蒙) 일명 추몽(鄒蒙) |
동명왕(東明王), 동명성제(東明聖帝), 동명제(東明帝) |
제왕운기(帝王韻紀) |
1287년 |
주몽(朱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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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몽이라는 표현은 현대의 사학계 논문과 중, 고등학교 교과서, 백과사전은 물론 위인전 같은 아동서적 그리고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대중매체에서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되어지고 있다.
특히 시청률 50%이상을 넘게 기록한 MBC의 주몽1)이나 30%를 웃도는 KBS의 바람의 나라2) 같은 드라마에서도 고구려 시조를 주몽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거대 대중매체가 대중에게 미치는 파급력은 어머 어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주몽이라는 표현이 고구려인들의 인식이 아니라 고구려 시조를 의도적으로 폄하한 고대 중원 인들의 인식이라는 것이다.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과 『모두루 묘지명(牟頭婁墓誌銘)』 그리고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시조를 주몽이 아닌 추모왕(鄒牟王) 혹은 추모성왕(鄒牟聖王)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여전히 추모 보다 왜곡된 표현인 주몽이 절대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인의 관점에서 고구려사를 연구해야 하는 학자들의 태도치고는 결코 옳은 태도라고 볼 수 없다. 물론 일부 학자들이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여 추모라고 쓰자고 주장은 하지만, 그 수는 소수에 불과하며 비록 SBS의 연개소문3)이나 MBC의 태왕사신기4) 같은 드라마에서 추모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매우 단편적이므로 고구려 시조의 이름인 추모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에는 파급력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시청률 50%를 넘게 기록한 드라마 주몽에서 추모를 주몽의 별칭(別稱)이라고 한 것은 주객이 전도된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흔히들 고구려 시조 하면 동명왕(東明王) 혹은 동명성왕(東明聖王) 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부여의 동명 신화(東明 神話)와 고구려의 추모 신화(鄒牟 神話)5)가 비슷하다는 것에서 나온 고려 시대 사가들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일찍이 조선의 실학자들6)과 현대의 많은 선학들이 지적한 바 있으나, 여전히 일부 학자들의 논문이나 저서 백과사전, 교과서 등에서도 고구려의 시조로 기재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각 사료(혹은 국가)별로 다르게 기록된 고구려 시조의 이름들의 특징을 파악하여 이를 비판 하는 방향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Ⅱ. 각 사료에 나타난 고구려 시조의 이름
1.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鄒牟라고 기록한 사료
현존하는 사료 중에서 고구려 시조를 가장 먼저 기록한 사료는 장수태왕(長壽太王) 3년(414년)에 세워진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이다.
1)“시조 추모왕(鄒牟王)께서 나라를 세우셨다.”7)
2)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딸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8)
위의 『광개토태왕비』에 나온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인들은 고구려의 시조의 이름을 추모(鄒牟)라고 하였다.
다음은 5세기경에 만들어진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과 장수태왕 치세에 북부여 수사(北夫餘 守事)를 지낸 모두루(牟頭婁)의 묘지에 적힌 묵서의 내용 중 일부이다.
“하백의 손자이며 해와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은 북부여 출신이다.”9)
『모두루 묘지명(牟頭婁墓誌銘)』에 적힌 묵서에서도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추모라고 하였다.
다음은 일본 환무천황(桓武天皇)의 아들인 만다친왕(萬多親王)이 815년에 유력씨족을 조사하여 기록한 책인 『신찬성씨록』이다.
1) “고려(高麗) 군주 추모(일명 주몽)”10)
2) “출신은 고려국 군주 추모왕 20세손 여안기왕(汝安祁王)이다.”11)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의 관한 씨족 조사도 했었는데, 고구려인 후예들은 조사 당시 자신들의 시조를 어김없이 추모라고 하였다. 서길수 교수의 말을 일부 인용하자면, 씨족 조사 당시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이 자신의 시조 이름을 틀리게 제출할리 없기 때문에 『신찬성씨록』의 기록은 고구려인들의 인식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12)
이처럼 고구려인들의 인식이 반영된 『광개토태왕비』, 『모두루 묘지명』, 『신찬성씨록』에는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일관되게 추모라고 하였다.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틀리게 기록할리 없으므로 고구려 시조의 추모라는 이름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김용만 소장(우리역사문화연구소)은 추모는 본명이고 주몽은 활을 잘 쏘기에 얻은 호칭에 불과하므로 고구려인의 인식에 따라 추모왕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13)한 바 있다. 고구려 시조를 주몽이 아닌 추모왕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견해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나 주몽은 추모왕의 별명에 불과하다는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아무리 별명이고 음차라지만,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많고 많은 한자 중 하필이면 좋지 않은 뜻으로 풀이될 수 있는 주몽(朱蒙)이라 기록했을까하는 의문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주몽이 별명이었다면 별명을 뜻하는 雅號, 號, 外號 등의 표현을 썼을 것이나. 기록들에는 분명 활을 잘 쏘기에 名을 주몽이라 하였다14)고 되어 있으므로 주몽은 별명이 아닌 이름으로 봐야 한다. 즉 추모야 말로 부여어(夫餘語)로 ‘활을 잘 쏘는 사람(善射者)’을 일컫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뒤에 별도로 거론하겠지만, 주몽은 중원의 사가들이 추모를 악의적인 의도로 임의로 고친 것에 불과하다고 여겨진다.
2.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中牟(혹은 仲牟)라고 기록한 사료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본기 문무왕(文武王) 10년조에는
“공의 태조 중모왕(中牟王)이 북쪽 땅에 덕을 쌓고, 남해에 공을 세워, 위풍을 청구에 떨쳤고, 어진 교화가 현도를 덮었다.”15)
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는 고구려의 시조의 이름을 중모(中牟)라 하였는데, 삼국의 언어차이는 크게 없고 악의적인 뜻이 담긴 한자도 없으므로 중모는 단순히 추모(鄒牟)에 대한 신라식 발음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신라는 문무왕이 고구려왕족인 안승(安勝)을 보덕국 왕(報德國王)으로 책봉 하는 절차를 밟고 있는 상황으로 굳이 보덕국인들의 눈치를 봐가면서 추모 그대로 쓸 필요가 없었고, 그렇다고 깎아내릴 필요도 없었기에 추모에 대한 자국의 발음인 중모라고 한 것이라 봐야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천지천황(天智天皇) 7년조에는
“고려(고구려)의 중모왕(仲牟王)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에 천년동안 다스리려고 하였다.”16)
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는 고구려의 시조의 이름을 중모라 하였는데, 당시 일본도 약광(若光)을 비롯한 고구려 왕실의 일부를 제후로 받아들인 상황으로 신라와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다.
3.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朱蒙(혹은 鄒蒙)이라고 기록한 사료
주몽(朱蒙)이라고 제일 먼저 기록한 사료는 북위(北魏)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魏書)』 이래로 중국 측 사료는 물론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 측 사료에서는 추모왕(鄒牟王)을 일관되게 주몽이라고 기록하였다.
주몽이라는 뜻은 서길수 교수(서경대)의 글을 인용하자면 북위 사서에 추모의 음을 따서 한자로 옮기면서 ‘주몽(朱蒙)’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비슷한 음만 딴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좋지 않은 글자를 선택했다. ‘주(朱)’자는 주로 난쟁이(侏)라는 뜻이 있고, ‘몽’자는 ‘속이다’, ‘어리석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지몽매(無知蒙昧)하다고 할 때의 몽매(蒙昧)는 ‘어리석고 사리에 어둡다’는 뜻이다. 결국은 ‘난쟁이 같이 어리석다.’, ‘어리석은 난쟁이’라는 아주 나쁜 뜻이다.17) 북위의 고조(高祖)는 491년에 장수태왕이 죽자, 동쪽 교외로 나가 애도 의식을 거행했으며 세종(世宗)은 508년에 청주(淸州 -산동성)에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을 제사 지내는 고려묘(高麗廟)를 따로 만들어 제사를 올렸고, 그의 부인이자, 숙종(肅宗)의 어머니인 영태후(靈太后)는 문자명태왕(文咨明太王)이 죽었을 때 동쪽 사당에서 애도를 표하며 조문사절을 보냈을 정도로18) 대체적으로 고구려와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굳이 의도적으로 폄하할 의도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와 북위가 항상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니며19) 고구려가 북위의 변경을 공격한 적도 있고20), 고구려와 유연(柔然)은 공모하여 지두우(地豆于)족을 분할함에 따라 북위 황실의 선조의 발상지와 북위 사이를 차단21)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노태돈 교수가 지적했듯이 북위에게 있어 고구려는 항상 경계해야 할 잠재적 적대 국가로 인식22)되었다는 것을 염두 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북위가 고구려 시조 추모왕을 폄하한들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주몽 외에도 일찍이 선학들이 지적했듯이 이 같이 중원의 사가들이 주변의 타민족의 국명이나 부족 명, 인명 등을 폄하하는 사례는 많다.23)
한국 측 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도 이에 영향을 크게 받아 지금까지도 주몽을 중심적으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 문무왕(文武王) 10년조에서 중모(中牟)라고 기록한 것과 달리 신문왕(神文王) 2년에 세워진 『문무대왕비(文武大王碑)』에는 중국식 표현인 주몽이라고 표기24)하였다. 이는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무왕 10년 이후에 당(唐)의 영향으로 인해 중모에서 주몽으로 바꾼 것이라 여겨진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주몽 혹은 추몽이라고 한다.25)
라는 기록이 있는데, 추몽(鄒蒙)은 서길수 교수의 의견26)대로 추모(鄒牟)와 주몽(朱蒙)을 절충하는 의미에서 추모와 주몽을 합쳐서 쓴 것으로 이해된다.
덧붙여서 『삼국사기』 등의 편찬자들이 고의적으로 추모가 아닌 주몽을 중심적으로 표기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의미 없는 가정을 해보자면 한국 측 기록과 중국 측의 기록이 상충할 경우 한국 측 기록을 우선적으로 기록한 『삼국사기』의 성격상27) 편찬자들이 고구려인들의 인식이 반영된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 등을 보았다면 주몽이 아닌 추모를 중심적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4.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象解라고 기록한 사료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의 나이 7세에 보통 사람과 크게 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夫餘)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로써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28)
라는 기록이 있고 『위서(魏書)』에는
“장성(長成)하자 주몽이라 하였다. 주몽은 그 나라의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이르는 이름이다.”29)
라는 기록이 있다.
이 두 기사에서는 추모왕(鄒牟王)이 추모(鄒牟-주몽)라는 이름을 얻는 배경과 시기를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추모왕이 7세 이후에야 주몽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위서에서는 추모왕이 장성한 즉 당대 고구려의 성인 인식 기준으로 15, 16세가 된 이후에 주몽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 시조는 7살(혹은 15~16세) 이전 까지는 이름이 없었다는 말이 되는데,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7살(혹은 15~16세) 이후에나 이름을 얻을 리가 없으므로 추모라는 이름을 얻기 이전에는 분명 아명(兒名)이 존재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주몽, 추모, 상해(象解), 중모(中牟), 동명(東明)으로 여러 가지를 전하고 있는데, 이중 중모는 추모에 대한 신라 식 발음을 표현한 것이고, 주몽은 추모를 악의적으로 폄하한 중원 사가들의 표현이라는 것은 앞서 밝혔으며 동명은 후술하겠다. 이들은 모두 추모와 유사한 발음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30)이 있으나, 유독 상해라는 이름은 추모와 자음(字音)과 자형(字形)이 전혀 비슷하지 않으므로 오각(誤刻)이나 오전(誤傳)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31) 상해가 추모왕의 아명일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전에 김기흥 교수(건국대)도 상해를 추모왕의 원래 이름으로 보인다고 간단히 언급32)한 바 있었고, 그는 최근에 들어 보다 구체적으로 상해의 뜻을 ‘해를 본받은 자’라고 해석33)하였는데, 탁견이라고 생각한다.
Ⅳ. 東明王 = 鄒牟王설 비판
1. 東明王과 鄒牟王에 대한 고구려인들의 인식
동명왕(東明王)과 추모왕(鄒牟王)을 동일인물로 취급한 현존하는 최고의 사료는 고구려 멸망 후 5백여 년이 뒤에야 편찬 된 『삼국사기(三國史記)』이다. 여기서 조금 무리를 하면 『삼국사기』에서 인용된 『해동고기(海東古記)』와 이규보(李奎報)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편에서 인용된 『구삼국사(舊三國史)』까지 갈 수 있으나 『구삼국사』는 아무리 빨라도 대신라, 늦어도 고려 국초에 편찬된 것34)으로 추정되는 만큼 이 이상 올라가지는 않는다.
일부에서는 고구려가 평양 천도 이후 왕계정리를 하면서 추모왕의 시호를 동명왕으로 바꿨기 때문에 『구삼국사』에서 추모왕을 동명왕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라는 견해35)와 부여인(夫餘人)을 의식하여 추모왕과 동명왕을 동일인물로 취급하였을 것이라는 견해36)가 있고, 김기흥 교수는 음운변동 현상의 예를 들어 추모(鄒牟)나 동명(東明)이나 같은 음(音)을 다른 한자(漢字)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37)
그러나 위의 두 가지 견해들은 고구려인들의 입장이 반영된 『천남산 묘지명(泉男産墓誌銘)』과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등의 기록들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여겨진다.
우선 현존하는 고구려인이 기록한 금석문(金石文)에는 동명왕은 거론 되지 않았고, 중국 정사 중에서 고구려 건국 신화를 기록한 『위서(魏書)』, 『주서(周書)』, 『북사(北史)』, 『수서(隋書)』와 『한원(翰苑)』「고려기」에도 동명왕은 거론되지 않았다. 『위서』를 비롯한 이들 중국사서는 고구려가 한창 건재할 때 만들어진 사서들이다. 그나마 중국 25사의 고구려 열전 중 동명왕이 나온 사서는 『양서(梁書)』하나인데, 여기서도 동명왕은 부여(夫餘)를 건국한 시조로 그 후손이 고구려를 세웠다고 하여 동명왕을 고구려 시조로 보지 않았다.38) 특히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에 당에 항복한『천남산 묘지명』에서는 추모왕과 동명왕을 분명 다른 인물로 보았으며39), 『신찬성씨록』과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도 고구려 시조를 각기 추모왕 혹은 추모왕의 일본식으로 표현인 중모왕(仲牟王)이라고 했을 뿐 동명왕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특히 『신찬성씨록』에 나온 여안기왕(汝安祁王)은 추모왕의 20세손으로 그는 고구려 왕실의 친왕(親王) 정도의 위치라 할 수 있는데, 고구려 멸망 후 일본에 거주하던 여안기왕의 후예인 고정조(高井造)는 자신의 시조를 추모왕이라고 하였다.
고정조 같은 왕실의 후예가 시조를 추모왕이라고 한 것으로 볼 때 여전히 추모왕이 국가의 공식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평양천도 이후 왕계정리를 하면서 추모왕이 동명왕과 동일시되었다면 최소한 왕실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삼국사기』 등의 고려시대 사서들처럼 동명왕과 추모왕을 한 명으로 보는 인식이 점차 일반화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양 천도 이후 수 백 년의 시간이 흐르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 태어난 세대인 고정조의 인식 속에서조차 자신의 시조는 동명왕이 아니라 여전히 추모왕이라는 것은 고구려 후기는 물론 멸망한 뒤에도 추모왕의 시호가 동명왕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강력히 입증한다.40)
즉 고구려가 건재할 때 만들어진 고구려 금석문이나 중국 사서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 후 2백년이 지난 시점에 만들어진 사료에도 고구려 시조는 추모왕(주몽, 중모)으로 불렸을 뿐이다. 고구려가 후기에 들어 추모왕을 동명왕과 동일하게 취급하였을 것이라는 견해와 왕계 정리를 하면서 추모왕의 시호를 동명왕으로 바꿨다는 근거는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와 『삼국사기』의 인용서적 중 하나인 『해동고기』 그리고 『삼국사기』 이후에 만들어진 사료 이외에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추모왕을 동명왕이라고 기록한 『구삼국사』가 고려 초가 아니라 대신라(大新羅) 시대 때 편찬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대신라인들의 인식일 뿐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 살았던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시조를 여전히 추모왕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분명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고구려가 후기에 부여 인들을 의식하여 추모왕과 동명왕을 동일인물화 작업을 했다는 견해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부여의 동명 신화는 최소 1세기경부터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에게 알려졌는데, 이웃나라인 부여 시조의 이름을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시조와 동일인물화 했다는 것은 주변국들의 비웃음을 살 행동이다. 또한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와 『모두루 묘지명(牟頭婁墓誌銘)』에서 분명히 시조인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공인했는데, 갑자기 시각을 달리하여 부여 시조 동명왕과 고구려 시조 추모왕을 동일인물로 본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앞서 간략히 거론한 것과 같이 고구려 후기 인물인 『천남산 묘지명』에 보면 주몽(추모왕)과 동명은 각기 다른 존재로 구분되어 있다. 물론 『천남산 묘지명』은 당인(唐人)이 만들었고 주몽이라는 표현이 있는 등 중원인의 인식이 강하게 반영 돼있으므로 그것이 추모왕과 동명왕에 대한 고구려 후기의 입장을 정확히 대변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후 일본에 도래(渡來)한 고구려인들과 백제인들의 인식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신찬성씨록』에는 고구려 시조를 『광개토태왕비』나 『모두루 묘지명』에 나온 것처럼 분명히 추모왕이라고 하였고 동명왕은 도모왕(都慕王)41)이라고 하여 분명히 따로 구분을 하였다.
앞서 밝혔듯이 『신찬성씨록』의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 후기는 물론 멸망한 후에도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시조를 여전히 추모왕이라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천남산 묘지명』에서 추모왕과 동명왕을 구분한 것은 고구려 후기의 인식을 상당 부분 반영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고구려는 후기에 이르러서도 자신들의 시조를 분명히 추모왕이라 불렀으며 부여 시조 동명왕과는 동일인물로 여겨진 것이 아니며 비록 동명과 추모의 음이 비슷하다 할지라도 분명 각기 다른 존재로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이도학 교수(한국 전통 문화 학교)는 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이 세운 시조묘(始祖廟)인 동명왕묘(東明王廟)42)를 부여 시조 동명왕을 모신 것으로 보았지만43), 대주류왕이 만든 시조묘는 동명왕묘가 아니라 추모왕묘(鄒牟王廟)일 가능성이 크며 고려시대 사가들이 고쳤을 것이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서영대 교수(인하대)의 지적44)대로 당시 고구려와 부여는 적대관계였는데, 고구려가 적국인 부여의 시조 동명을 자신들의 시조로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광개토태왕비』에 나와 있듯이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시조를 추모왕45)이라고 분명히 못 박은 이상 고구려 역대 군주들이 제사를 올린 시조묘의 주인공은 당연히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일 수밖에 없다.
동명왕과 추모왕이 정확히 언제부터 동일인물로 취급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구삼국사』의 편찬된 시기가 아무리 빨라도 대신라 시대, 늦어도 고려 국초인 만큼 대신라와 고려초 사이에 그러한 인식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은 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2. 都慕王은 鄒牟王이 아닌 東明王
비류왕(沸流王)과 온조왕(溫祚王)의 아버지인 우태(優台)가 부여의 왕인 해부루왕(解夫婁王)의 서손(庶孫)46)이라는 것과 백제의 왕성(王姓)이 부여씨(扶餘氏)라는 것47) 그리고 개로왕(蓋鹵王)이 북위(北緯)에 보낸 국서48), 성왕(聖王)이 국호(國號)를 남부여(南夫餘)로 고친 것49)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는 줄곧 부여의 적통임을 자처하였다. 일부에서는 온조왕이 국초(國初)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는 기록50)을 가지고 추모왕(鄒牟王)에게 제사를 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보는 견해51)도 있으나,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여겨진다. 물론 비류왕과 온조왕이 한 때 추모왕의 양자(養子)였기에 한 때는 고구려 왕실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52)
비류왕과 온조왕이 추모왕의 양자라는 견해에 잠시 보충 설명을 하자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동명왕편에는 추모왕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고구려를 건국했다53)는 기록이 있으나, 부여의 도망 세력인 추모왕 세력이 토착세력의 반발도 없고 별다른 도움 없이 국가를 세웠다는 것은 정황상 믿기 힘들다. 이 기록은 고구려가 추모왕을 유일영웅(唯一英雄)으로 만들고 그가 자수성가(自手成家)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고구려인들의 왜곡으로 보인다.
한편 이 두 기록 외의 기록들에는 추모왕이 고구려를 세울 때 현지 토착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하였다. 우선 추모왕이 홀본 부여(忽本 夫餘- 졸본 부여)에 도착했을 때 홀본 부여 왕의 딸과 혼인하였다54)는 기록이 있고, 추모왕이 홀본에 도착하자, 건너 고을의 여인 즉 월군녀(越郡女)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두 명을 낳았다는 기록55)과 마지막으로 소서노(召西奴)56)가 등장한다. 서길수 교수는 추모왕과 관련한 이 세 명의 여인들을 졸본부여의 왕녀, 월군녀, 소서노로 각기 다른 인물들로 파악57)하나, 필자가 보기에는 모두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소서노는 해부루왕의 서손58)으로 부여의 왕족인 우태와 혼인했던 사이59)이기 때문에 소서노의 신분도 왕족에 버금가는 신분의 소유자라 할 수 있으므로 졸본부여의 왕녀는 곧 소서노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월군녀라는 표현도 소서노를 두고 폄하한 표현일 가능성이 있다, 백제와 사이가 좋지 않던 고구려 측에서 졸본 부여 왕녀인 소서노를 월군녀라고 폄하한 이유는 추모왕이 소서노 세력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축소, 왜곡, 은폐하기 위해 기록한 것일 수도 있다.
온조왕을 추모왕의 친자(親子)라고 한 기록60) 역시 고구려 측에서 백제는 예부터 고구려 추모왕의 아들들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고구려 천하에 속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명분에 입각하여 조작한 것일 수도 있다. 비류왕과 온조왕의 친부(親父)는 정황상 추모왕이 아니라 해부루왕의 서손이자, 소서노의 전남편인 우태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 이는 실제로 백제 왕실이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자처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오히려 백제 왕실은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를 자국과 함께 부여의 지파(支派)로 대등하게 보았으며 해부루왕과 우태의 선조라 할 수 있는 부여 시조 동명왕의 후손이라는 것을 대외에 알렸다. 예외적으로 『수서(隋書)』「백제전」에는 백제가 고려 즉 고구려부터 나왔다는 기록이 있으나61), 본문에는 고려국(高麗國) 왕이 동명(東明)을 시기하여 죽이려 하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부여국(夫餘國)을 세웠다는 내용이 나오므로 여기서 나온 고려국은 고리국(藁離國-橐離國, 索離國 등)과 음(音)이 비슷한데서 나온 고리국의 오기(誤記)로 보는 것이 당연한 순리이다. 혹자는 『수서』 백제전의 기록을 동명과 주몽(추모)을 그리고 부여와 고려를 혼동하여 기록한 것이라는 견해를 펼쳐서 백제왕실의 출자를 고구려로 보려 할 수도 있으나, 이러한 해석은 백제 왕실의 출자를 부여로 보았던 수서가 편찬되기 이전의 사서들과도 상충되므로 개연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수서 백제전의 내용을 미리 내려놓은 결론에 맞추기 위해 자의적으로 본문의 기사를 두 번씩이나 바꾸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논리적 비약이 매우 심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비류왕과 온조왕은 고구려에서 마한(馬韓)으로 좋게 남하한 것도 아니라 추모왕의 친아들인 유류왕(儒留王)과의 권력 쟁탈전에서 밀려나서 어쩔 수 없이 남하한 것이었다. 비류왕의 발언62)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머니인 소서노와 자신들을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버린 고구려나 추모왕에게 결코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수가 없기에 추모왕을 위해 제사지내거나 추모왕의 후손을 자처할 이유가 없다. 온조왕과 비류왕은 고구려에서 마한으로 남하하는 순간부터 고구려 왕실과의 인연을 끊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사가들이 비류왕과 온조왕을 추모왕의 아들이라는 설을 우선적으로 삼은 이유는 이도학 교수가 거론한 바 있는데 이를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고려 조정은 백제를 부활시킨 후백제 정권의 정치적 명분과 입지를 축소시킬 목적으로, 백제 건국자의 계통을 고구려와 연결시킬 수는 없었을까? 즉,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작은 집’혹은 ‘곁가지’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宗家格인 고려에 후백제가 대적한 것에 대한 윤리적 부당성을 심어주어 정치적 우세와 후삼국 통합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한 데 있지 않았을까? 부연 설명한다면 궁예가 부활시켜 왕건이 계승한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아들로 온조를 설정해 놓음으로써 백제는 고구려 시조 아들이 세운 나라가 된다. 백제에게 고구려는 아버지의 나라가 되는 셈이다. 고구려에서 볼 때 백제는 아들의 나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고려가 후백제를 제압하고 통일을 해야 하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 아들의 나라를 계승한 후백제가 宗家를 잇는 고려에 不服하는 것은 순리에 대한 역행이라는 명분상의 우위를 장악할 수 있는 것이다.63)
덧붙여서 김병곤 강사(충남대백제연구소)의 지적대로 고려시대 유교주의적(儒敎主義的) 합리적인 사관(史觀)을 가진 사가들에 의해 설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64)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속일본기(續日本記)』에 기록된 도모왕65) 기사에는 기존의 동명 신화(東明 神話)에서는 볼 수 없었고 추모 신화(鄒牟 神話)에서나 보이던 하백(河伯)의 존재가 나오고 도모(都慕)는 일본 발음으로 쓰모(つも)로 추모(鄒牟)와 발음상 매우 유사하여 추모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 왕실은 그동안 줄곧 부여 시조 동명왕의 후예를 자처했으며, 고국원태왕(故國原太王)이 백제를 침공한 이래 7세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고구려와 첨예한 대립관계에 있었다. 정재윤 교수는 백제의 계통을 고려(고구려)로 인식할만한 무언가의 근거를 고-수 전쟁(高-隋 戰爭) 때 고구려와 백제가 밀통(密通)을 했다는 것을 들었지만66), 이러한 견해는 고구려와 백제가 밀통을 하게 된 배경을 면밀히 살펴보지 못한 것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겨진다. 고-수 전쟁 때 고구려와 백제가 밀통을 한67) 이유는 2차 고수 전쟁 발발하기 4년 전인 607년 3월에 백제가 수(隋)에게 고구려를 쳐달라고 사신을 보내자, 그로부터 두 달 뒤 고구려는 그에 대한 경고로 송산성을 공격하나 실패하고, 대신 석두성을 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사로잡아 백제를 압박한 것68)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밀통인 만큼 밀통 시 맺은 밀약(密約)의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당시의 국제 정세로 볼 때 어느 정도의 추론은 가능하다. 아마도 이 때 고구려는 밀약 조건으로 백제에게 사로잡은 포로들을 돌려주고 백제를 공격치 않는 대신 고수 전쟁 때 적극적으로 수의 편에 가담하지 말라는 것과 자국이 수와 전쟁하는 틈을 타서 신라가 북진해오는 것을 방해해달라는 조건을 제시했을 수도 있으며 백제는 수에 편에 서지 않고 고구려를 공격치 않는 대신에 고구려에게 포로를 돌려받고 자국이 신라를 치는 틈을 타서 자국을 공격치 말라는 조건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수 전쟁 때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에 밀약을 맺은 것으로 매우 한시적이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수가 멸망함에 따라 서방(西方)의 위협이 없어진 고구려는 다시 백제에게 위협을 줌으로써 무왕(武王)이 당고조에게 고구려가 당(唐)으로 가는 자국 사신의 길을 막는다고 하여 당고조(唐高祖)가 중재를 나서야 할 정도69)였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의 밀통은 백제 왕실이 그간 자처했던 동명왕의 후예에서 갑자기 추모왕의 후예라고 태도를 바꿀 정도의 우호관계는 결코 아니었으며 불안한 국제정세가 만든 상호불가침 정도의 관계70)였다. 즉 도모왕을 추모왕으로 볼 개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결정적으로 『속일본기』의 도모왕 기사에는 도모대왕은 고구려가 아니라 분명히 부여에서 개국했다71)고 하였다. 이것은 중국 측 사서들에서 동명왕이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는 기록들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며 백제 왕실이 부여 시조 동명왕의 후예를 자처한 것과도 연결이 될 수 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신찬성씨록』에는 고구려의 시조를 추모왕으로 백제의 시조를 도모왕으로 양자(兩者)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으므로 『속일본기』에 기록된 도모왕은 고구려 시조 추모왕이 아니라 부여 시조 동명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속일본기』의 도모왕(동명왕) 신화에 하백의 존재가 나온 이유는 도모왕을 보다 신성시하기 위해 후대인 백제 왕실에서 덧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원래 동명 신화에서 동명왕의 어머니는 시비(侍婢)이므로 모계혈통 면에서 하백의 딸 유화부인(柳花婦人)의 아들인 고구려 시조 추모왕 보다 낮아 보이기 때문에 경쟁 관계에 있던 고구려와 대등한 위치에 있기 위하여 임의로 시비를 하백의 딸로 바꾼 것이라 여겨진다. 의자왕(義子王)의 아들인 『부여융묘지명(扶餘隆墓誌銘)』72)에도 하백의 자손이라는 표현과 사수(㴲水)가 나오는데, 이 사수는 『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에서 동명이 건넌 강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단군 신화(檀君 神話)와 추모 신화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화는 후대에 갈수록 그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면서 윤색되고 첨삭되는 것이 흔한 일인 만큼 비교적 후대의 동명왕 신화에 하백과 하백의 딸이 나온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여겨진다.
조금 논외사항이지만, 동명은 도모의 중원인들의 표기라고 여겨진다. 도모는 부여의 적통일 자처한 백제인들의 인식이 들어갔기 때문에 부여시조의 이름으로서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동명왕의 뜻을 풀이하면 ‘동쪽을 밝힌 임금’이라는 뜻으로 세련되고 상당히 좋은 의미의 한자로 이루어져있다. 이것은 후한(後漢) 이래로 역대 중원의 왕조들과 부여가 대체적으로 친선한 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와 반대로 중원의 역대 통일 왕조들과, 분열기 때의 화북의 국가들과 거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고구려를 세운 추모왕의 중원식 표기인 주몽이 좋지 않은 의미를 가진 한자로 이루어졌던 것과 비교했을 때 크게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Ⅴ. 요약 및 맺음말
본고에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을 비판하였는데, 첫 번째로는 고구려 시조의 이름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로는 동명왕(東明王)과 추모왕(鄒牟王)에 대한 것이었다. 우선 고구려, 신라, 일본 중원 각국이 각기 다른 한자로 기록한 고구려 시조의 이름에 대한 특징을 분석하였는데, 중원의 표현인 주몽은 중원의 사가들이 추모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담긴 지극히 주관적이고 악의적으로 고친 표현에 불과할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에 당대 고구려인들의 인식을 충분히 반영했다 할 수 없다.
그리고 『천남산 묘지명(泉男産墓誌銘)』과 『신찬성씨록(牟頭婁墓誌銘)』 같이 당대인들의 인식이 강하게 반영된 사료에서는 동명왕(-都慕王)과 추모왕을 분명 각기 다른 인물들로 보았으므로 동명왕과 추모왕은 분명 다른 인물이며 추모왕은 고구려 후기에 이르러서도 시호가 동명왕으로 바뀐 적도 없고 부여 시조 동명왕과 동일인물화 된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그리고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편에 인용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구삼국사(舊三國史)』와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해동고기(海東古記)』에서 고구려 시조를 동명(성)왕, 동명(성)제라고 한 것은 동명 신화와 추모 신화가 상당히 유사한 것에서 비롯된 고려인(혹은 대신라인)들의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필자의 종합적인 견해를 피력하자면 앞으로는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쓸 때는 주몽 대신에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와 『모두루 묘지명(牟頭婁墓誌銘)』 그리고 『신찬성씨록』 같은 고구려인들의 인식이 반영된 사료에 나온 표현인 추모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주몽은 폄하된 표현이라는 서길수 교수의 주장이 단순한 음모론이라고 여길지 모르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인들이 시조의 이름을 추모라고 하였으니, 추모라고 쓰는 것이 지극히 옳다. 그리고 부여 시조 동명왕의 본 위치를 찾아주어야 하며 고구려 시조를 추모왕이 아닌 동명(성)왕이라 부르는 것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동명왕과 추모왕에 대한 고려인(혹은 대신라인)들의 인식과 추모왕의 이름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에 관한 연구로는 가치가 있을 수 있으나, 이는 엄연히 별개사안으로 두어야 한다. 다행히 근래에 들어 주몽 대신 추모, 동명(성)왕 대신 추모왕이라고 표기하고 부여 동명 신화를 독립적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아져서 매우 다행스러우나, 아직은 대중들에게 있어 부여 시조 동명은 낯설고 학계에서도 고구려 시조를 주몽이나 동명(성)왕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는 고구려 시조를 표현할 때 원문을 인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주몽이나 동명(성)왕 등을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추모나 추모(성)왕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 2006.05.15~2007.03.06 종영
4) 2007.09.11~2007.12.05 종영
5) 일각에는 추모 신화를 설화라고 부르기도 하나, 추모신화는 분명 여러 가지 신화적인 요소를 담고 있으므로 설화가 아니라 신화라 해야 옳다.
8) 『廣開土太王碑』“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郞”
9) 『牟頭婁墓誌銘』“河泊之孫日月之子鄒牟聖王元出北夫餘”
10)『新撰姓氏錄』右京諸蕃下 高麗 條.“長背連, 高麗國王鄒牟[一名 朱蒙]之後也”
11)『新撰姓氏錄』山城國諸蕃 高麗 條.“高井造, 高麗國主鄒牟王二十世孫汝安祁王之後也”
12) 서길수, 「역사와 고구려 드라마‘주몽’」,2007
13)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바다출판사, 1998, P.083
―――, 『고구려 7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김영사주니어, 2006, P.025
―――, 『고구려 소년 담덕 유목민 소년 테무친을 만나다』, 스콜라, 2007, P.077
14) 『三國史記』 高句麗 本紀 東明聖王 원년 “扶餘俗語善射爲朱蒙”
15) 『三國史記』 新羅 本紀 文武王 10년 “公太祖中牟王, 積德北山, 立功南海, 威風振於靑丘, 仁敎被於玄菟”
16) 『日本書紀』 天智天皇 7년 “高麗仲牟王初建國時欲治千歲也”
17) 서길수, 「역사와 고구려 드라마 ‘주몽’」, 2007
18)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바다출판사, 1998, P.288~289
19)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2004, P.335~336
20)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2004, P.348
21)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2004, P.314
22)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2004, P.313~315
23) 공봉진, 실크로드 창간 97년
서길수, 「역사와 고구려 드라마‘주몽’」, 2007
東潮, 田中俊明. 옮김 박천수, 이근우, 『고구려와 역사와 유적』, 동북아 역사재단 번역총서 P.045
26) 서길수, 「역사와 고구려 드라마‘주몽’」, 2007
27) 강종훈,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사료 계통과 그 성격」-(2006,한국고대사연구42,한국고대사학회)
임기환, 「고구려본기 전거 자료의 계통과 성격」(2006,한국고대사연구42,한국고대사학회)
정구복, 「『삼국사기』의 원전 자료와 사료비판」, (2006,한국고대사연구42,한국고대사학회)
조인성, 「『三國史記』의 史料的 性格에 대한 綜合的 檢討」(1998,한국사학보3·4,고려사학회)
28) 『三國史記』 高句麗 本紀 東明聖王 원년 “年甫七歲嶷然異常自作弓矢射之百發百中扶餘俗語善射爲朱蒙故以名云.”
29) 『魏書』高句麗“及其長也字之曰朱蒙其俗言朱蒙者善射也.”
30) 장재웅, 2006, 중국어 역사음운론을 통한 고구려신화에 반영된 언어자료 분석 -동명(東明),주몽(朱蒙) 동음설 및 동맹(東盟),동명(東明) 동음설을 중심으로-, 한국중국언어학회, 중국언어연구 23
31) 판본에 따라서는 象解 대신 衆解라고 표기된 것도 있는데, 이는 象과 衆의 자형이 비슷한데서 나온 혼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衆解 역시 象解와 마찬가지로 鄒牟의 오각이나 오전이라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衆이 비록 鄒, 朱, 中, 仲과 자음이 비슷하지만, 牟와 解자는 자음도 자형도 전혀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다.
32) 김기흥, 『고구려 건국사』, 창작과 비평, 2002, P.021
33) 김기흥, 「고구려 건국신화에 보이는 주몽의 출자 계보 구조-단군 및 박혁거세의 경우와 비교하여」,『초기 고구려역사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34) 이강래,「舊三國史論에 대한 제문제-특히 ≪三國史記≫와 관련하여-」, (1992,한국고대사연구5,한국고대사학회)
이정훈,「『舊三國史』의 편찬시기와 편찬배경」, (2006,실학사상연구31,역사실학회)
37) 김기흥. 『고구려 건국사』, 창작과 비평, 2002. P.042
38) 『梁書』 高句驪者, 其先出自東明. 東明本北夷櫜離王之子. 離王出行, 其侍兒於後任娠, 離王還, 欲殺之. 侍兒曰:「前見天上有氣如大雞子, 來降我, 因以有娠.」王囚之, 後遂生男. 王置之豕牢, 豕以口氣噓之, 不死, 王以為神, 乃聽收養. 長而善射, 王忌其猛, 復欲殺之, 東明乃奔走, 南至淹滯水, 以弓擊水, 魚鱉皆浮為橋, 東明乘之得渡, 至夫餘而王焉. 其後支別為句驪種也.
39) 『泉男産墓誌銘』“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朱蒙孕日臨浿水”
40) 이와 반대되는 견해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고자묘지명(高慈墓誌銘)』에는 고구려 존속연대가 3년 정도 차이 나게 적혀 있는데, 역시 동일한
이유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것이 고구려 국가의 공식 입장인지 아닌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고자(高慈)의 경우, 일급 귀족으로서 그가 남긴 비문에서 고구려의 건국년도가 3년 정도 빠르다는 것
은 분명 여러 가지로 의미 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3년의 차이는 고구려 건국 이전의 기간
이 어느 정도 반영된 시각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고구려 왕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르
다. 고구려 왕실에서는 그 이전의 역사(卒本夫餘의 왕통을 찬탈했다고도 볼 수 있는)를 쉽게 인정하
기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 고구려 자체 기록으로 보이는「고구려 본기」를 보면 추모왕은 초막을 짓
고 살다가 힘들게 자수성가하여 고구려를 세운 것으로 나와 있지, 누구의 도움을 받아 건국했다고 쓰
지 않고 있다. 즉, 고구려 왕실의 공식입장으로 보면 고구려의 역사는 705년이지만 고자의 입장에서
보면 708년인 것이다. 이는 북한이 고구려의 역사를 200년가량 올려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
다. 졸본부여의 역사, 혹은 졸본부여의 시원적 부족의 역사까지 합하면 고구려의 역사 역시 그렇게
올려볼 수 있다고 여겨진다. 즉, 이런 시간적인 부분은 보는 이의 시각차이라고 여겨진다. 고자가 이
렇게 묘지명에 쓴 이유는 고자의 선조가 추모왕(鄒牟王) 휘하에서 대단한 위명을 남겼을지, 아니면
이름은 없지만 실제 활약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고자의 1대 선조가 추모왕 당대 사람이었
던 것만은 사실이므로 고자의 1대 선조의 활약시기와 고구려 건국시기를 동일선상에 놓고 이해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선조가 건국시조를 수행했다는 사실은 고자 가문이 명예를 얻는 데에 있어 그
보다 큰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 집안 대대로 배웠거나, 그의 후손들이 보기에 고구려의 역사가 708
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태왕이 공표한 국가 공인된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개인차에 따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물며 고자와 같은 일급 귀족도 이러한데, 다른 사람들
중 과연 얼마나 그것을 믿고, 또 그것을 안 믿었을지는 알 수 없다.
국가 공식 입장과 개인 입장(개인이 누가 됐든)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설사 고정조(高井造)의 가문이 고구려 왕실 내에서 권위가 있던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인만큼 반
드시 국가 공식 입장과 같은 것을 고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장수태왕(長壽太王)이나
문자명태왕(文咨明太王)이 추모왕과 동명왕을 동일시하는 공표를 했다고 해서 그들도 그렇게 생각할
지도 의문이다.
즉 그만큼 공식적인 정책과 그 정책을 수립하는 사람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렇기에 고정조가 왕실의 후예이므로 그가 말하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은 높지만(당시 상황을
잘 반영한,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지 못할 정보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국가 정책과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볼 수만은 없다.’
일리 있는 견해이기는 하나, 현재로써는 추모왕과 동명왕(東明王)과 동일인물로 여긴 기록이 있는 사
료는 아무리 올라가도 나말여초(羅末麗初)이기 때문에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 견해를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단, 훗날에 『구삼국사(舊三國史)』 이전의 고구려인의 인식이 강하게
반영된 사료에서 추모왕과 동명왕을 동일인물로 여긴 기록이 나온다면 충분히 검토한 후 본고의 내용
41) 『新撰姓氏錄』右京諸蕃下 百濟 條,“菅野朝臣, 同國 都慕王十世孫貴首王之後也”
『新撰姓氏錄』左京諸蕃下 百濟 條.“和朝臣, 百濟國都慕王十八世孫武寧王之後也”
42) 『三國史記』 高句麗 本紀 大武神王 3년, “春三月, 立東明王廟”
44) 서영대, 「李道學 교수의 <高句麗와 百濟의 出系 認識 檢討>를 읽고」
46) 『三國史記』 百濟 本紀 溫祚王 원년,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47) 『三國史記』 百濟 本紀 溫祚王 원년,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
48) 『魏書』“臣與高句麗源出夫餘,先世之時,篤崇舊款.”
49) 『三國史記』 百濟 本紀 聖王 26년, “國號南扶餘”
50) 『三國史記』 百濟 本紀 溫祚王 원년, “夏五月, 立東明王廟.”
51) 김두진, 「백제시조 온조신화의 형성과 그 전승」-김두진(1990,한국학논총13,국민대한국학연구소)
강현모, 「백제 건국신화의 전승 양상과 의미」-(2003,비교민속학24,비교민속학회)
52) 『三國史記』 百濟 本紀 溫祚王 원년, “其於問基創業,蝢有內助故朱蒙寵接之特厚待沸流等如己子.”
53) 『三國史記』 高句麗 本紀 東明聖王 원년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 居之.”
54) 『三國史記』 高句麗 本紀 東明聖王 원년,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55) 『三國史記』 高句麗 本紀 東明聖王 원년, "朱蒙, 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56) 『三國史記』 百濟 本紀 溫祚王 원년, “母召西奴, 卒本人延陁溴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57) 서길수, 「역사와 고구려 드라마‘주몽’」, 2007
58) 우태가 해부루왕의 서손이라는 기록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첫 번째로는 우태가 해부루왕의 서손 즉 여러 명의 손자 중 하나라는 해석과 두 번째로는 우태가 금와왕의 서자이기 때문에 해부루왕의 서손이라는 해석이다.
59) 『三國史記』 百濟 本紀 溫祚王 원년, “始祖 沸流王, 其父 優台, 北扶餘王解扶婁 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陁溴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60) 『三國史記』 百濟 本紀 溫祚王 원년, "百濟始祖溫祚王, 其父, 鄒牟"
『三國遺事』 王曆
61) 『隋書』“百濟之先, 出自高麗國. 其國王有一侍婢, 忽懷孕, 王欲殺之, 婢雲:“有物狀如雞子, 來感於我, 故有娠也.”王舍之. 後遂生一男, 棄之廁溷, 久而不死, 以為神, 命養之, 名曰東明. 及長, 高麗王忌之, 東明懼, 逃至淹水, 夫餘人共奉之.“
62) 『三國史記』 百濟 本紀 溫祚王 원년, “沸流謂弟溫祚曰: “始, 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疣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63) 이도학,『진훤이라 불러다오』, 푸른역사, 1998, 309쪽.
64) 김병곤, 「기록에 나타난 백제 시조 및 건국자의 사적 위상과 실태」(2008,백제연구47,충남대백제연구소)
65) 『續日本紀』 桓武天皇 8년 “其百濟遠祖都慕王者 河伯之女 感日精而所生.”
66) 정재윤, 「구태 시조설의 성립 배경과 그 의미」(2008,한국고대사연구51,한국고대사학회)
67) 『隋書』“大業三年, 璋遣使者燕文進朝貢. 其年, 又遣使者王孝鄰入獻, 請討高麗. 煬帝許之, 令覘高麗動靜. 然璋內與高麗通和, 挾詐以窺中國.”
68) 『三國史記』 百濟 本紀 武王 8년, “春三月, 遣杵率燕文進, 入<隋>朝貢. 又遣佐平王孝隣入貢, 兼請討高句麗. 煬帝許之, 令覘高句麗動靜. 夏五月, 高句麗來攻松山城, 不下, 移襲石頭城, 虜男女三千而歸.”
69) 『三國史記』 百濟 本紀 武王 27년, “遣使入唐, 獻明光鎧, 因訟高句麗梗道路, 不許來朝上國. 高祖遣散騎常侍朱子奢來, 詔諭我及高句麗, 平其怨.”
70) 고구려 입장에서는 자국이 수(隋)와의 전쟁에 전력을 다하는 동안 1차 고-수 전쟁(高-隋 戰爭) 때(필자)처럼 신라가 고구려의 남방(南方)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게 신라 보다 국력이 강했던 백제가 신라의 발목을 잡아줌으로써 고구려의 남방을 안정시켜 주면 되는 것이었고, 백제 입장에서는 자국이 신라를 칠 때 고구려가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즉 고-백 동맹(高-百 同盟)은 철저히 자국의 이해관계 하에 성립 된 거의 상호불가침 정도의 수준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관계는 수가 망하고 당(唐)이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로 비록 중간에 마찰이 있긴 했었지만, 기본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 물론 백제가 신당 연합군에게 멸망한 뒤에는 고구려와 백제 부흥 세력의 관계는 전에 없이 훨씬 긴밀해 졌다.
71) 『續日本紀』 桓武天皇 9년 “百濟大祖都慕大王者 日神降靈 奄扶餘而開國.”
72) 『扶餘隆墓誌銘』“海隅開族河孫效祥崇基峻峙遠派靈長家聲克嗣代業逾昌澤流 㴲水威稜帶方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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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머리말과 맺음말 부분 쓰는 게 본문 보다 훨씬 어렵네요.ㅠㅠ 주석 중 위서를 인용한 부분이 비었는데, 이상하게 위서 전문만 받아지지 않아서이고, 지은이 이름만 있는 부분은 참고한 책이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이니, 양해 바랍니다.^^;; 한문 표기는 아직 귀찮아서...;;;;;;;;; 차차 채우겠습니다.^^;
象解는 추모왕의 어릴때 이름이죠. 衆解는 象解의 오기로 봅니다. 亞名, 추모경에 의하면, 금와왕이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주몽이라 부르는 것은 한나라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이해합니다. 추모경에도 주몽으로 언급되더군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중해와 상해 중에서 다른 이름과 연관성이 부족한 상해가 아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중해는 박규호님 말씀대로 비슷한 글자인 상해의 오기로 보이고요.『추모경』은 읽어보진 않았지만, 만약 아명이 있었다면 금와왕이 지어줬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런데 혹시 왜 상해로 지었는지 그 이유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름을 지을때 이유없이 짓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몽도 한나라 사람들이 불렀다면 그 이유 역시 있었으리라 봅니다. ^^
신찬성씨록과 속일본기 원문을 봐야겠어요. 누락된 백제왕 4명정도의 이름을 알아내야 하기에.. 님이 글이 좋지만, 퍼 갈려니까.. 복사-붙여넣기가 안 되니.. 제 홈피, http://cafe.daum.radoproject 오셔서..글을 올려 주시면 고맙겠군요. 등업제도가 없습니다. 막바로 글쓰기가 되고.. 대신 말투가 거친 곳입니다.
아직 보충할 부분도 있고, 미완성이라 다른 곳에 올리기가 곤란해요.^^;; 지금 글도 자폭 예정입니다.^^;;
'2, 도모왕 아닌 동명왕'이란 글은 시각이 많이 벗어난 글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됩니다. 백제는 자신의 시조에 대해 고민을 했던 나라입니다. 온조와 비류를 백제는 우태의 자식이라 주장하지만, 고구려에서는 추모왕의 아들로 주장합니다. 소서노의 자식들인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의 왕위를 이어받았다면, 백제란 나라 자체가 없었습니다. 유리가 오자, 온조와 비류는 왕위계승도 못 하고 밀려 나지요. 남의 아들도 자신의 아들로 입적을 시키며, 모자혼인도 하는 고구려인들이기 때문에, 강단 사학자들의 시각으로는 파악하기 힘들죠. 이것을 더 파악할려면 추모경 후비열전과 추모경연의를 봐야 합니다.
선왕, 즉, 죽은 왕의 왕비를 다음왕이 다시 왕후로 맞아 들여서 데리고 삽니다. 이것은 어떤 고구려의 전통식으로 되어 있는거죠. 소서노를 유리왕이 왕비로 맞아 들여 같이 살았다는 사실은 강단교수들은 상상치 못 합니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유목세계에서 부왕의 부인들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는 결혼풍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만 아니면 법적으로도, 관습적으로도 큰 상관은 없었죠. 그렇기에 유리가 소서노를 부인으로 맞이했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단, 관련 기록이 없을 뿐이지요. 그런데 소서노를 유리가 왕비로 맞았다면 백제 건국시 문제가 생길 듯 합니다. 왜냐하면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의 백제 건국시 비류의 편에 섰다가 온조측에 의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즉, 소서노는 유리의 왕비로 재혼했다기 보다는 고구려를 떠나서 백제를 건국했다고 보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관련 자료 있음 한번 얘기해주세요^^
온조측에 의해 죽었다는 건 그건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온조측이 아니라, 유리왕의 지시에 의해 죽었다고 파악합니다.
『삼국사기』「백제본기」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요. 실제 온조 세력은 비류 세력보다 열등했으며, 해양국가를 건국한 비류백제와 달리 내륙으로 들어갑니다. 소서노의 죽음과 관련하여 백제가 둘로 갈라져 온조백제는 한강 일대에서 정착하게 됩니다. 그 초기 정착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성산성이 그 초기 중심지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암튼 소서노가 유리왕의 지시에 의해죽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 합니다. 일단 그녀는 고구려에서 떠났고, 백제 건국에 지대한 공이 있었으며 유리왕의 일방적인 정치적 입김이 작용하긴 어려웠다고 보입니다.
김기흥 교수와 임기환 교수가 그래도 맞추었군요. 亞名이란 걸 알아 내기 힘들거든요.
작년에 역사문에 추모왕 아명을 추론하는 글 썼었는데, 그 때는 중해라고 했다가 두 선학 분들의 글을 보고 상해로 수정을^^;;;
지금 보니 임기환 교수는 거론치 않고 김기흥 교수님만 거론했네요.^^;; 죄송합니다.^^;;
진짜 2번 '도모왕은 추모왕이 아닌 동명왕' 이 글은 제목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큰 주제가 추모왕에 대한 이야기와 추모왕의 명칭에 관한 주제인데.. 동명왕이 나온다는 건 좋은 글을 훼손하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추모왕은 부여의 시조로 알려진 동명왕과 비교한다거나..추모왕의 출자와 비류,온조와 비교하는 건 따로 글을 써야 할만큼 내용이 많은 주제입니다. 추모왕의 출자에 대해서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반드시 거론해야 할만큼 풍부한 재료를 갖고 있습니다. 동명왕편을 약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게다가 추모경에서는 斗切太子라는 이름도 나오고 있어.. 연구할 사항이 많습니다. 좀 아쉽군요.
원래 글의 제목이 '고구려 시조의 이름과 동명왕에 대한 소고'였습니다. 목차도 있었는데, 지금 보니, 올릴 때 제목과 목차를 까먹고 올리지 않았네요.^^;;
좋은 글을 훼손하는 정도까지는 아닐 듯 합니다. 어차피 추모왕에 대해 거론할때 부여 동명왕에 대한 언급이 없을 수는 없을테니깐요. 전 오히려 좋은 시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 하지만 박규호님 말씀대로 그 주제는 내용이 더 많은 주제라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나중에 '아름다운 청년'님께서 그 주제에 대해서 한번 더 글을 써 주셔도 좋을 것 같네요. 암튼 박규호님도 관련된 자료들을 소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초기고구려역사연구- 동북아역사재단 출판, 내용중, 고구려 주몽 신화 연구-양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보았는데, 역시나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분석해 놓앗는데, 추모경을 읽어야 파악할 수 잇는 내용을 분석을 통해, 언급해 놧더군요. 조금 놀랫습니다.
이 책에서 언급하길, 추모가 동부여를 떠날 때, 어머니 유화부인의 비호를 받아, 엄리대수를 건너갈 수 잇엇다고 파악해 놧더군요. 그러니까, 추모의 신변보호를 유화쪽에서 해 줄만큼 유화부인은 큰 세력을 형성했다는거죠. 예리한 시각입니다.
추모가 떠난 이후 동부여에서 유화부인 사후 왕후의 예에 따라 장례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는 걸 보면, 유화부인의 세력이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환단고기』에서는 당시 고구려측에서 군대를 동반한 사신을 보내 그 시신을 받아왔다고 하지만 그럴 개연성은 적을 듯 하구요. 암튼 유화부인의 세력이 부여에서 적지 않은 세력이었다는 것은 추모가 부여에서 왕자로서 지냈고, 왕위다툼에서 패한 것만 봐도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암튼 박규호님이 말씀하신 책은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
양쥔 교수님의 설은 그닥 새로운 게 아닙니다.^^; 저도 그 책 있는데, 양쥔 교수님의 일월지자 부분은 자의적인 해석의 끝을 달리더군요. 에... 아무튼 추모경을 꼭 읽어보지 않더라도 추모왕이 도하할 때와 치수법을 행하고 송양 세력을 제압할 때 하백족을 위시한 강상세력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론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관련 문제에 대하여 이미 몇 10년 전에도 윤명철 교수님과 김용만 선생님 등 여러 선학분들께서도 언급한 바 있으십니다.^^;;
유화부인은 책성을 떠나지 않았다고 보아 지고.. 책성에 죽었지요.
유화부인은 부여에서 죽었다고 삼국사기에도 나옵니다.^^ 유화부인의 동생들인 훤화와 위화 세력 등이 추모왕이 도하할 때 도움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본문에서 동명왕을 논한 것도 추모왕을 동명(성)왕이라고 부르고 추모왕과 도모왕을 동일 시하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쓴 것 인지라 아직은 부여 시조 동명왕을 따로 독립된 주제로 논할 만큼의 내공이 되지 않네요.ㅠㅠ 이 글도 미완성인데다가 부족한 점이 많아서 수 일 내로 자폭 할 예정인지라...^^;; 아무튼 노력하겠습니다. 다른 부분들도 지적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