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카페 게시글
[뿌리아름]대고구려 인물 고구려 시조의 이름과 동명왕에 대한 소고(1차 수정)
아름다운 청년 추천 0 조회 214 09.04.02 12:05 댓글 24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09.04.02 12:14

    첫댓글 머리말과 맺음말 부분 쓰는 게 본문 보다 훨씬 어렵네요.ㅠㅠ 주석 중 위서를 인용한 부분이 비었는데, 이상하게 위서 전문만 받아지지 않아서이고, 지은이 이름만 있는 부분은 참고한 책이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이니, 양해 바랍니다.^^;; 한문 표기는 아직 귀찮아서...;;;;;;;;; 차차 채우겠습니다.^^;

  • 09.04.03 09:33

    象解는 추모왕의 어릴때 이름이죠. 衆解는 象解의 오기로 봅니다. 亞名, 추모경에 의하면, 금와왕이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 09.04.03 09:36

    주몽이라 부르는 것은 한나라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이해합니다. 추모경에도 주몽으로 언급되더군요.

  • 09.04.05 17:23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중해와 상해 중에서 다른 이름과 연관성이 부족한 상해가 아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중해는 박규호님 말씀대로 비슷한 글자인 상해의 오기로 보이고요.『추모경』은 읽어보진 않았지만, 만약 아명이 있었다면 금와왕이 지어줬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런데 혹시 왜 상해로 지었는지 그 이유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름을 지을때 이유없이 짓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몽도 한나라 사람들이 불렀다면 그 이유 역시 있었으리라 봅니다. ^^

  • 09.04.03 09:50

    신찬성씨록과 속일본기 원문을 봐야겠어요. 누락된 백제왕 4명정도의 이름을 알아내야 하기에.. 님이 글이 좋지만, 퍼 갈려니까.. 복사-붙여넣기가 안 되니.. 제 홈피, http://cafe.daum.radoproject 오셔서..글을 올려 주시면 고맙겠군요. 등업제도가 없습니다. 막바로 글쓰기가 되고.. 대신 말투가 거친 곳입니다.

  • 작성자 09.04.03 10:53

    아직 보충할 부분도 있고, 미완성이라 다른 곳에 올리기가 곤란해요.^^;; 지금 글도 자폭 예정입니다.^^;;

  • 09.04.03 10:21

    '2, 도모왕 아닌 동명왕'이란 글은 시각이 많이 벗어난 글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됩니다. 백제는 자신의 시조에 대해 고민을 했던 나라입니다. 온조와 비류를 백제는 우태의 자식이라 주장하지만, 고구려에서는 추모왕의 아들로 주장합니다. 소서노의 자식들인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의 왕위를 이어받았다면, 백제란 나라 자체가 없었습니다. 유리가 오자, 온조와 비류는 왕위계승도 못 하고 밀려 나지요. 남의 아들도 자신의 아들로 입적을 시키며, 모자혼인도 하는 고구려인들이기 때문에, 강단 사학자들의 시각으로는 파악하기 힘들죠. 이것을 더 파악할려면 추모경 후비열전과 추모경연의를 봐야 합니다.

  • 09.04.03 10:11

    선왕, 즉, 죽은 왕의 왕비를 다음왕이 다시 왕후로 맞아 들여서 데리고 삽니다. 이것은 어떤 고구려의 전통식으로 되어 있는거죠. 소서노를 유리왕이 왕비로 맞아 들여 같이 살았다는 사실은 강단교수들은 상상치 못 합니다.

  • 09.04.05 17:30

    고구려뿐만 아니라 유목세계에서 부왕의 부인들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는 결혼풍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만 아니면 법적으로도, 관습적으로도 큰 상관은 없었죠. 그렇기에 유리가 소서노를 부인으로 맞이했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단, 관련 기록이 없을 뿐이지요. 그런데 소서노를 유리가 왕비로 맞았다면 백제 건국시 문제가 생길 듯 합니다. 왜냐하면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의 백제 건국시 비류의 편에 섰다가 온조측에 의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즉, 소서노는 유리의 왕비로 재혼했다기 보다는 고구려를 떠나서 백제를 건국했다고 보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관련 자료 있음 한번 얘기해주세요^^

  • 09.04.05 20:38

    온조측에 의해 죽었다는 건 그건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온조측이 아니라, 유리왕의 지시에 의해 죽었다고 파악합니다.

  • 09.04.05 21:21

    『삼국사기』「백제본기」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요. 실제 온조 세력은 비류 세력보다 열등했으며, 해양국가를 건국한 비류백제와 달리 내륙으로 들어갑니다. 소서노의 죽음과 관련하여 백제가 둘로 갈라져 온조백제는 한강 일대에서 정착하게 됩니다. 그 초기 정착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성산성이 그 초기 중심지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암튼 소서노가 유리왕의 지시에 의해죽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 합니다. 일단 그녀는 고구려에서 떠났고, 백제 건국에 지대한 공이 있었으며 유리왕의 일방적인 정치적 입김이 작용하긴 어려웠다고 보입니다.

  • 09.04.03 10:05

    김기흥 교수와 임기환 교수가 그래도 맞추었군요. 亞名이란 걸 알아 내기 힘들거든요.

  • 작성자 09.04.03 12:35

    작년에 역사문에 추모왕 아명을 추론하는 글 썼었는데, 그 때는 중해라고 했다가 두 선학 분들의 글을 보고 상해로 수정을^^;;;

  • 작성자 09.04.05 22:57

    지금 보니 임기환 교수는 거론치 않고 김기흥 교수님만 거론했네요.^^;; 죄송합니다.^^;;

  • 09.04.04 21:08

    진짜 2번 '도모왕은 추모왕이 아닌 동명왕' 이 글은 제목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큰 주제가 추모왕에 대한 이야기와 추모왕의 명칭에 관한 주제인데.. 동명왕이 나온다는 건 좋은 글을 훼손하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추모왕은 부여의 시조로 알려진 동명왕과 비교한다거나..추모왕의 출자와 비류,온조와 비교하는 건 따로 글을 써야 할만큼 내용이 많은 주제입니다. 추모왕의 출자에 대해서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반드시 거론해야 할만큼 풍부한 재료를 갖고 있습니다. 동명왕편을 약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게다가 추모경에서는 斗切太子라는 이름도 나오고 있어.. 연구할 사항이 많습니다. 좀 아쉽군요.

  • 작성자 09.04.04 21:09

    원래 글의 제목이 '고구려 시조의 이름과 동명왕에 대한 소고'였습니다. 목차도 있었는데, 지금 보니, 올릴 때 제목과 목차를 까먹고 올리지 않았네요.^^;;

  • 09.04.05 17:34

    좋은 글을 훼손하는 정도까지는 아닐 듯 합니다. 어차피 추모왕에 대해 거론할때 부여 동명왕에 대한 언급이 없을 수는 없을테니깐요. 전 오히려 좋은 시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 하지만 박규호님 말씀대로 그 주제는 내용이 더 많은 주제라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나중에 '아름다운 청년'님께서 그 주제에 대해서 한번 더 글을 써 주셔도 좋을 것 같네요. 암튼 박규호님도 관련된 자료들을 소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 09.04.05 20:34

    초기고구려역사연구- 동북아역사재단 출판, 내용중, 고구려 주몽 신화 연구-양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보았는데, 역시나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분석해 놓앗는데, 추모경을 읽어야 파악할 수 잇는 내용을 분석을 통해, 언급해 놧더군요. 조금 놀랫습니다.

  • 09.04.05 20:39

    이 책에서 언급하길, 추모가 동부여를 떠날 때, 어머니 유화부인의 비호를 받아, 엄리대수를 건너갈 수 잇엇다고 파악해 놧더군요. 그러니까, 추모의 신변보호를 유화쪽에서 해 줄만큼 유화부인은 큰 세력을 형성했다는거죠. 예리한 시각입니다.

  • 09.04.05 21:18

    추모가 떠난 이후 동부여에서 유화부인 사후 왕후의 예에 따라 장례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는 걸 보면, 유화부인의 세력이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환단고기』에서는 당시 고구려측에서 군대를 동반한 사신을 보내 그 시신을 받아왔다고 하지만 그럴 개연성은 적을 듯 하구요. 암튼 유화부인의 세력이 부여에서 적지 않은 세력이었다는 것은 추모가 부여에서 왕자로서 지냈고, 왕위다툼에서 패한 것만 봐도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암튼 박규호님이 말씀하신 책은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

  • 작성자 09.04.06 01:48

    양쥔 교수님의 설은 그닥 새로운 게 아닙니다.^^; 저도 그 책 있는데, 양쥔 교수님의 일월지자 부분은 자의적인 해석의 끝을 달리더군요. 에... 아무튼 추모경을 꼭 읽어보지 않더라도 추모왕이 도하할 때와 치수법을 행하고 송양 세력을 제압할 때 하백족을 위시한 강상세력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론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관련 문제에 대하여 이미 몇 10년 전에도 윤명철 교수님과 김용만 선생님 등 여러 선학분들께서도 언급한 바 있으십니다.^^;;

  • 09.04.06 20:04

    유화부인은 책성을 떠나지 않았다고 보아 지고.. 책성에 죽었지요.

  • 작성자 09.04.06 23:16

    유화부인은 부여에서 죽었다고 삼국사기에도 나옵니다.^^ 유화부인의 동생들인 훤화와 위화 세력 등이 추모왕이 도하할 때 도움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 작성자 09.04.05 23:40

    본문에서 동명왕을 논한 것도 추모왕을 동명(성)왕이라고 부르고 추모왕과 도모왕을 동일 시하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쓴 것 인지라 아직은 부여 시조 동명왕을 따로 독립된 주제로 논할 만큼의 내공이 되지 않네요.ㅠㅠ 이 글도 미완성인데다가 부족한 점이 많아서 수 일 내로 자폭 할 예정인지라...^^;; 아무튼 노력하겠습니다. 다른 부분들도 지적해주세요.^^;;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