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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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이 만든 작은 사진기에 미국 코닥 사의
흑백필름을 넣어 어깨에 둘러메고
1950년대 중반부터 이 땅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내가 카메라라는 도구를 눈에 들이댔을 때
망막을 통해 들어온 피사체는 바로 상처 입은 동족의 슬픈 얼굴이었다.
거리의 모퉁이에서 ‘호옥’ 숨 한 번 쉬고
국숫발을 빨아올리는 어린 여자아이,
단지 살아남기 위해 이중 삼중 뼈 휘는 노동을 해야 하는 여인,
제 나라의 번영을 말하는 선거 벽보 밑에서 막 잠이 든 가난뱅이,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당장 먹을 것도 없어
골목 어귀에 쪼그리고 앉아 그대로 죽고 싶을 따름인 가장,
하루 종일 일 나간 부모를 기다리다
해질녘 기어코 슬픔을 못 이겨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자선을 바라는 눈먼 걸인,
……
조악한 식사,
굵은 주름이 이마를 덮은 지친 노동자…….
이들의 슬픈 모습이 카메라 앵글을 통해
나의 머리에 읽히고
또 가슴을 두드리는 멍으로 전해져 왔다.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사람 담은 최민식의 사진 이야기>, 10쪽-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사람 담은 최민식의 사진 이야기_2004
◆ 1957년과 2004년 또는 1996년과 2004년, 하등 달라진 것 없는 ‘지금, 여기’의 기록
외길 사진에 미치고, 한길 사람속에 빠져 살아온 사진작가 최민식의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이 현문서가에서 나왔다. 1996년 나왔던 책에 글 12편을 새로 쓰고 사진 80여 장을 바꾸어 펴낸 것이다.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은 책을 찾는 독자들의 요구에 따라 1996년 절판된 같은 제목의 단순한 개정판이 아닌 새로운 ‘2004년판’이라 할 수 있다.
책은 요즘 한창 뜨고 있는 7080문화의 값싼 상업성이나 위험한 복고주의에 기댄 것이 아니다. 먼저 책이 나온 1996년의 세상이나 지금 세상, 아니 최민식이 처음 인간을 렌즈에 담아 온 1957년의 세상이나 지금의 세상이나 하등 달라진 것이 없기에, 이 책은 개정판이 아닌 ‘지금, 여기’의 의미를 갖는 ‘2004년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그것도 서럽도록 착한 인간이 거기에 있기에 나의 카메라는 눈물을 삼키며 진실의 셔터를 힘차게 휘둘러 왔고, 더욱 전진할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가난한 날의 행복’을 다루는 거짓 동화가 아닌, 이 땅의‘가난한 날의 진실’을 밝히는 참 기록
책은 또한 ‘가난한 날의 행복’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이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은 가난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해 놓고 있기에 ‘가난한 날의 진실’을 말할 뿐이다. 그 진실은 “내 사진은 밑바닥 삶에 동정이나 호기심을 보내는 게 아니라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고발”이어야 한다는 작가의 믿음에서 나오고 있기에 농도 짙은 진실이라 할 수 있다. “밑바닥 삶에 대한 동정이나 호기심”은 ‘가난한 날의 거짓 동화’를 만들어내지만,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고발”은 올곧은 ‘진실과 정의’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최민식이 그동안 추구해 온 진실과 정의는 그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에 충실하려는 작업이었다. 작가는 “나의 사진은 고난과 시련을 겪는 인간의 아픔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것은 인간이 누리고 있는 삶의 존엄성을 일깨워주는 아픔”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최민식의 사진은 “인간 정신과 사회비판을 표현하는 까닭에 그 중심에 진실성을 굳게 세운 ‘시대의 증인’”이라 할 수 있다.
◆ 사진 따로 글 따로가 아닌, 작가의 인생유전 고백록과 사진관까지 한데 담은 온전한 최민식의 이야기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은 ‘사진 찍은 사람 따로, 글 쓰는 사람 따로’가 아닌, ‘사진과 글이 한데 몸을 섞은’ 최민식의 인사동 人?寫?同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책은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뿐만이 아니라, 그 ‘슬픈 얼굴’들을 렌즈 속에 담을 수밖에 없었던 최민식의 인생유전 고백록과 사진관까지 한데 담은 온전한 최민식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쌀 사놓으면 연탄 떨이지고 연탄 들여놓으면 쌀 떨어지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이 땅에 빈자가 존재하는 한 나의 증언은 멈출 수가 없으며 나목이 혹한을 이겨내듯 어떤 불행도 쾌감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오기로 미소짓곤 했다.” 그 역시 가난했기에, 그의 얼굴 역시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이었기에, 그의 작업은 “산 체험에 의거한” 것이었기에, 최민식의 사진은 강한 호소력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1부 ‘서럽도록 착한 이웃’에서는 어린 시절 및 작가의 삶 이야기가 실려 있다.
2부 ‘뜨거운 진실을 찾아서’에서는 작가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스타이컨의 ‘인간가족’전과 유진 스미스, 도로시아 랑어 등 사진작가와 밀레, 톨스토이, 슈바이처 등 사진 작가에게 영향을 준 이야기가 실려 있다.
3부 ‘지혜롭게 살아가기’에는 그동안 작가가 틈틈이 써놓은 글 12편을 새롭게 실었다. 작가가 “요즘 학생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고, 자연환경의 소중함이나 아름다운 효의 마음을 잊고 사는 것 같아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에게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전하고자 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이번에 새로 실린 글들은 ‘일흔여섯의 작가가 젊은 세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3부 첫머리에 실린 ‘디지털 카메라의 도전’은 카메라나 사진이라고 하면 ‘디지털 카메라’와 ‘카메라 폰’만 아는 요즘의 ‘젊은 이미지세대’라면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글이다.
4부 ‘겨울날의 따뜻한 기억’은 작가가 뽑은 작품과 글이 실려 있다.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사람 담은 최민식의 사진 이야기_2004
◆ 마음으로 보는 흑백사진‘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햇살이 머무는 흑백사진, 최민식의 희망 사진관
“세상을 위해 나의 사진은 사랑을 담으려 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아름다움 그 자체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사랑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고
고통과 절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도 열어줍니다.
낯설고 황폐한 세상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발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갖도록 해주는 일입니다.”
최민식의 사진을 대하노라면 우리는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 ‘종이거울’ 속에는 분명 내 모습과 다른 ‘슬픈 얼굴’이 들어 있지만, 분명 어디선가 봤던 얼굴이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의 얼굴, 내 ‘가족사진첩’에 있는 얼굴들이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 모두 고향은 다르고 성(性 혹은 姓)은 다르지만 “인간가족”이기에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최민식이 1957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해온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고발”은 ‘시대와 불화하기’가 아닌 ‘시대와 화해하기’에 다름없었다.
우리는 최민식의 흑백사진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속에서 ‘희망의 눈부심’을 보게 될 것이다.
◆ 최민식, “나는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촬영해 왔다.”
사진작가 최민식을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가벼운 ‘충격’을 받는다. 그가 일흔여섯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기운이 넘치기 때문이다. 꼿꼿한 자세에 거침없는 말투, 듣는 이를 끌어들이는 목소리에 셔터를 누르는 한순간 한순간 또 글씨 받침 하나하나에까지 정성을 담는 믿음직한 손……. 20kg이나 되는 카메라 장비를 ‘가볍게’ 들고 젊은이보다 ‘날랜’ 걸음으로 성큼성큼 내딛는 일흔여섯의 ‘젊은 청년’ 최민식을 보면 그 에너지의 근원이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지난 50년 동안 최민식의 카메라는 항상 낮은 곳에 머무는 이들, 몸과 마음이 다친 이들, 외로움과 슬픔에 젖은 이들, 절망과 좌절에 빠진 이들을 위해 치열하게 움직여 왔다. 그렇기에 그의 사진은 때로 마주 대하기가 버겁다.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내 이웃의 아픔과 울음, 그것을 외면하며 내 울타리만 다져 온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져 차라리 눈을 돌리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식은 오로지 아프고 슬픈 현실만을 후벼 내듯 사진으로 드러내고 또 글로 외친다. 그리고 자신의 작업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모두에게 꿈과 사랑, 희망과 용기를 주는 데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한다.
최민식은 한 시대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행하는 것만이 예술의 존재 이유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사진이, 또한 예술이 배부른 사람들의 놀잇감이 되고 있음에 진실로 안타까워한다. 그는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으로,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소외된 마지막 한 사람까지 거두어 함께 걸어가고 싶을 뿐이다. 이 ‘젊은’ 사진작가는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갈 수 있는 건강에 고마워하고, 자신을 일깨워 주는 이웃들의 눈물과 웃음에 고마워하고, 다른 욕심 없이 사진에 미칠 수 있게 해준 자신의 가난에 고마워한다. 바로 이 이웃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오늘도 그를 이 땅에서 사진작가로 살아가게 하는 힘인 것이다.
차례 ● 다시 펴내며 ● 1. 서럽도록 착한 이웃 ○ 나의 삶 나의 길 / 어린 시절 / 그들이 거기 있기에 / 가난한 사람들은 또 하나의 나 / 자갈치 시장 / 인물 사진 / 시위 장면을 찍다 / 완행열차를 타고 / 거지 작가라고 해도 상관없소 / 평화로운 인도 / 네팔인의 너끈함 / 마더 테레사 수녀 / 사진의 길 ● 2. 뜨거운 진실을 찾아서 ○ 영원한 주제 '인간' /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인간 가족』전 / 밀레의 정신을 따라 / 나에게 영향을 준 사진작가 / 사진이란 무엇인가 / 얼굴을 통해 마음으로 / 인간 심포니 / 시각 언어의 힘 / 작가 정신 / 예술은 죽었다 / 사진을 통해 사람을 읽는다 / 나는 그 장소에 있었다 ● 3. 지혜롭게 살아가기 ○ 디지털 카메라의 도전 / 한국의 어머니상 / 유머는 우리 삶의 윤활유 / 책, 책, 책을 읽자 / 가슴으로 만나는 여성 / 브레히트의 시와 나의 사진 / 자연에 살고 싶다 / 마음의 힘을 키우는 교양 / 고전에 담긴 통찰, 「삼국지」 / 인간애 / 진리, 무엇인가? / 당신만의 개성은 무엇입니까? ● 4. 겨울날의 따뜻한 기억-작가가 뽑은 작품과 글 ○ 영혼의 시학, 그리고 고뇌의 기념비-김열규 / 작가연보
지은이 ● 최민식은 1928년 황해도 연안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 사진을 연구하면서 1957년부터 오직 인간을 소재로 한 사진을 찍어 왔다. 작가는 「사진연감(Photography Year Book)」에서 '스타 사진가'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사진집 『인간』열두 권과 에세이집, 사진 평론집 등을 출간했고, 놀라운 열정으로 오늘도 끊임없이 셔터를 누르며 글쓰기와 강연을 함께 하고 있다. (작가의 자세한 삶의 기록은 '작가 연보' 참조) ○ 나는 내 존재 전부를 사진에 쏟아 넣고 있습니다. 나의 사진은 곧 나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진 작업을 통해 인간의 삶을 밝히며 넓고 깊은 인생 경험을 전하고 싶습니다. 산 체험에 의거한 사진이라야만 강한 호소력과 설득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고통스러운 도전과 맞닥뜨리는 길고도 힘겨운 과정을 겪어야만 합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인도주의 입장이라는 것이 사진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것임을 나는 지금도 배워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