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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여호와께는 어울리지 않는, 오히려 경망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질척이다.”라는 표현을 굳이 쓴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지극히 작은 것 하나까지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시고, 아무리 힘겨운 어려움이 예상된다 할지라도 심지어 자신의 전부인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들어주시며, 마침내 창세전부터 품고 계셨던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거룩한 뜻 곧 작정을 완벽하게 이뤄주시는 분”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방패연은 하늘 높이 오르고 싶었습니다. 자유롭게 날아보고 싶었습니다. 하늘을 향해서 몸을 쭉 폈습니다. 동시에 땅의 실이 팽팽하게 잡아당겼습니다. 수없이 반복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여지餘地가 전혀 없었습니다. “실만 없으면 훨씬 더 높이 오를 수 있을 텐데, 실만 없으면 별에게도 가볼 수 있을 텐데, 실만 없으면 구름에게도 가볼 수 있을 텐데.” 등의 생각들이 수없이 많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집착하는, 질척거리는 실이 너무나 미워졌습니다. 언젠가 끊어버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마침내 자신을 붙잡고 있던 실을 끊어버렸습니다.
순간,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오르지 못했었던, 상상만 했었던 높은 곳까지 날아올랐습니다. 저절로 “자유다!”라는 외침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순간,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방패연은 정신없이 휘둘리기 시작했습니다. 도무지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아래를 향해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무기력하게 땅에 내팽개쳐지고 말았습니다. 비참한 몰골로 이리저리 뒹굴어 다녔습니다. 방패연은 그때 비로소 자신을 단단히 붙잡고 질척거리는 실 덕분에 강하게 불어오던 바람을 참고 견디며 이길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실 덕분에 하늘 높이 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방패연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그러면서도 전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여호와의 말씀이 자신의 삶을 제한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자신을 추구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세상에서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와 이해와 배려와 섬김은 손해를 자처하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주 드리는 예배가 너무나 소중한 시간을 빼앗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쉼, 자기 발전, 관계회복, 사업상의 만남 등의 기회들을 박탈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침내 죄, 불순종, 의심이라는 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었던 실을 가차 없이 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은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갇혀 있을 때 비로소 힘겨운 모든 환경과 상황과 조건들을 참고 견디게 하고 마침내 이기게 하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값없이, 일방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사랑에 구속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붙들려 있을 때 비로소 고해와 같은 힘겨운 인생 속에 쉬지 않고 불어오는 무수히 많은 강한 바람을 버틸 수가 있습니다. 훨씬 더 높이 날아오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여호와께서 저와 여러분을 가만히 놔주지 않으신, 가만히 둬주지 않으신, 오랫동안 진득하게 기다려주신,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찐득하게 질척여주신 결과입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크고도 놀라운 은혜입니다. 특히, 여호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를 총동원한다 할지라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십니다. 넓으십니다. 깊으십니다. 높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유일하게 배부르게 할 수 있으십니다.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을 누리게 할 수 있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삶의 필요를 채워주기보다 먼저 당신으로 충만케 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때 비로소, 아무리 수고하고 애를 쓰며 몸부림을 쳐도 도무지 해결되지 않았었던 영적인 허기짐과 갈급함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포만감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무수히 많이 부르짖어 기도하고 또 누구보다 희생적인 믿음생활을 해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던 무수히 많은 문제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덤으로 주실 것이다.”(마6:33)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끊이지 않고 다가오는 무수히 많은 문제들에 대한 답 또는 해결보다는 어떤 문제가 되었든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여호와를 먼저 구해야하는 이유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붙잡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놓지 않고 여전히 질척이고 계시는, 저와 여러분을 위한 당신의 창세전 작정을 완성하기 위해서 여전히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여호와를 구해야하는 이유입니다. 시인은 평소 가지고 놀던 돌을 있는 힘껏 던졌습니다.
왕은 물론 온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산천이 진동할 정도로 크게 호령하고 있었던 육척장수 골리앗을 단번에 고꾸라뜨리셨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평소 노구의 몸을 지탱하던 지팡이로 바다를 힘껏 내리쳤습니다. 코앞까지 바짝 뒤쫓아 온 바로의 최정예 부대를 바라보며 두려워 떨고 있었던,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자신들의 요구에 따라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돌을 집어서 던질 기세로 외치고 있었던 백성들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둑을 타고 넘쳐흐르고 있었던 바다를 갈라버리셨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평소의 습관대로 최선을 다해서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시기하다 못해서 완전히 제거해 버리기 위해서 모함하는 관료들과 자신을 누구보다 아낀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모략에 놀아나고 있었던 왕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오랫동안 굶주린 사자의 식욕을 끊어버리셨습니다. 아니 식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입을 완전히 틀어막아버리셨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두 번씩이나 주어진 여호와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한 순간도 놓지 않았습니다. 채색 옷이 벗겨지는 순간에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가는 순간에도, 보디발의 종으로 팔려가는 순간에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어두운 지하 감옥에 던져지는 순간에도, 오랫동안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 진 순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이집트는 물론 주변 국가들을 이제까지 없었던 혹독한 기근으로부터 구원하는 탁월한 사람으로 우뚝 세워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똑똑히 알아두어라. 네 자손이 이방인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종이 되어 얹혀살며 사백 년 동안 압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네 자손을 부리던 민족을 나는 심판하리라. 그런 다음, 네 자손에게 많은 재물을 들려주고 거기에서 나오게 하리라.”(창15:13b-14)라는 언약을 이룰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후, 성민 이스라엘은 지극히 작은 여유라도 생기기만 하면 가장 먼저 여호와께로부터 돌아섰습니다. 습관처럼 반역했습니다. 우상 숭배 놀이에 깊이 빠졌습니다. 허우적거렸습니다.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단 한 순간도 놓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질척거리셨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마침내, 당신의 때가 이르자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으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짐승에 불과했었던 당신 백성들이 치밀하게 짜놓은 각본대로 사면초가의 상황에 내몰리셨습니다. 아니 스스로 내몰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불구덩이를 산산조각으로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은 물론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유일한 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지극히 죄 친화적親和的인, 죄의 경향성傾向性이 너무나 농후한, 내면을 들여다보면 “죄 곧 나, 나 곧 죄”에 불과한, 지극히 작은 죄만 보여도 순식간에 이성을 잃어버린 채 눈에 쌍심지를 켜고 정신없이 달려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연약하기만한 저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계십니다.
완벽하게 구원하기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질척이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고 또 응답해 주시는 순종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힘겨운 현실과 칠흑같이 어두운 상황이 주어졌을 때, 절대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여 주저앉아 있지 말고 오직 자신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최선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실제로, 순종은 무기력한 포기가 아닙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욕심을 지극히 작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비워내는 것입니다. 주어진 여호와의 뜻을 조금도 가감하지 않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광야에 있다면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 한 가운데 버려지듯 놓여 있다면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누구도 동정하지 않는 사면초가 상황에 몰려 있다면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무려 십이 년 동안이나 혈루병을 앓으며 고생하던 여인처럼 자신의 힘과 능력과 수고와 노력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불치의 병에 붙들려 있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정사정 보지 말고 물맷돌을 던지든지, 손에 든 지팡이를 높이 들어 내려치든지, 쉬지 말고 기도하든지, 마음에 새겨진 여호와의 말씀을 붙들든지, 여호와께서 죽이시면 그대로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인파 사이를 뚫고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옷깃이라도 만지든지 오직 자신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면 됩니다. 외롭고, 고독하고, 서럽고, 눈물 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하다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주어져 있는 현실 상황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계획하신 일을 완벽하게 이루어주십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게 해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순종하고 있다면 여호와께서 창세전부터 품고 계셨던 저와 여러분을 위한 거룩한 작정 곧 뜻과 계획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복된 과정을 지나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이 전혀 없는 여호와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서 일하시게 하는 복된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아무리 둘러봐도) 아쉬울 것(이 조금도) 없어라.”(시23:1)라는 시인의 고백대로, 결핍이나 부족함이 전혀 없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충분히 배부르게 역사해 주시는 더할 나위 없이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자신의 전부를 모두 다 동원해서 여호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습니까? 영원 전부터 질척이셨고, 지금도 질척이고 계시며, 이후로도 영원까지 질척이실 여호와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서 일하시게 하는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여호와 때문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곧 더할 나위 없이 배부른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도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I am the worst.”(딤전1:15b)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과거에 괴수魁首였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죄인들 가운데 괴수라고 고백하지도 않았습니다. 죄인들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죄인들의 우두머리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단한 삶을 마무리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위대한 사도로 우뚝 설 수밖에 없었던 탁월한 자기인식입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다.”(롬5:12)라는 증거에 따르면, 저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라는 불치병에 감염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정체성은 죽어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허물과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음 외에는 무엇으로도 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해결할 마땅한 방법이 없습니다. 절대 절망입니다. 감사하게도 사도의 외침은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5:15b)라고 이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붙잡은 손을 절대로 놓지 않고 질척이시는 여호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는 죄를 충분히 덮고도 남을 만큼의 은혜를 값없이 베풀어주셨습니다. 죄를 덮고도 남을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은혜가 해결하지 못하는 죄는 없습니다. 그Max Lucado는 어린 시절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동네 연못이 고작이었습니다. 열 살이 되었을 때, 삼촌이 살고 있던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삼촌은 그를 데리고 태평양이 펼쳐지는 해변으로 갔습니다. 드넓은 백사장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처음 보게 된 그는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쉬지 않고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한참 동안이나 물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도대체 어디로부터 그 많은 물이 밀려오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삼촌에게 파도가 계속 밀려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삼촌은 그에게 “너 그거 아니?”라고 물었습니다. 계속해서 “오늘 밤에 와도 파도는 계속, 계속 밀려온단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농담하지 말아요. 어떻게 그렇게 많은 물이 있을 수가 있어요? 말도 안 돼요.”라고 외쳤습니다. 삼촌은 또 다시 “너 그거 아니?”라고 물었습니다. 상당히 흥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그에게 “이 파도는 천 년 전에도 똑같이 밀려왔단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삼촌은 또 한 가지 신기한 것이 있다며 “너 그거 아니?”라고 물었습니다. 이미 충분히 놀란 그는 삼촌을 바라보았습니다. 삼촌은 “우리가 다 죽고 난 천 년 후에도 이 파도는 계속 밀려올 거야.”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밀려오는 파도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불쑥 “들어가 봐도 돼요?”라고 물었습니다. 얼마든지 들어가도 된다는 삼촌의 대답을 들은 그는 신이 났습니다. 몸 구석구석에 모래를 묻혔습니다. 여전히 밀려오고 있던 파도를 향해서 뛰어들었습니다. 밀려오던 파도가 그를 덮치고 지나갔습니다.
온몸에 묻혔던 모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다시 모래사장으로 나왔습니다. 이전보다 더 많은 모래를 묻힌 다음 파도를 향해 뛰어 들었습니다. 파도는 더 큰 팔을 벌려 그를 덮치고 지나갔습니다. 천 번을 뛰어들어도 단 한 번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받아주었습니다. 그는 그날 하루 종일 멈추지 않고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함께 뛰어놀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는 이와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무려 천 번을 넘어져도 다시 밀려옵니다. “하나님, 제가 지난주에 또 넘어졌습니다.”라는 고백이 채 끝나기도 전에 풍성하게 밀려옵니다.
“하나님, 제가 지난주에 죄를 지었단 말입니다.”라는 고백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와 여러분을 씻기고 지나갑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라도 써주십시오”(눅15:18b-19a)라는 아들의 고백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던 아버지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얼마든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은혜 역시 은혜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이라고 한다면 은혜가 아닙니다. “다른 죄라면 몰라도 이번 죄만큼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죄까지도 용서할 수 있어야 은혜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머리와 지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를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죄는 더욱 더 구제불능 상태가 되었다.”라는 그Augustine의 고백에 따르면,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죄인들 중에서도 괴수라는 사도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은혜를 통해서 주어지는 치료를 거부합니다. 죄라는 불치병에 감염된 채 신음하고 있습니다. “남색, 여색,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거림, 비방, 미움, 능욕, 교만, 자랑, 악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롬1:29-31) 등 입에 담지 못할 온갖 더러운 열매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상상 이상의 더러운 짓을 하면서도 지극히 작고 사소한 일로 축소하거나 합리화합니다. 아예 묵살해 버리는 경우도 흔합니다. 심지어 공공연하게 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아는 가장 큰 죄인이 당신이 아니라면, 당신은 자신을 잘 모르는 것이다.”라는 그Jean Larroux의 외침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은혜는 죄를 용납하지 않는다. 은혜는 의를 향상시킨다. 은혜는 죄를 묵과하지 않는다. 은혜는 순종을 향상시킨다.”라는 그Bill Johnson의 외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작은 죄 하나까지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완벽하게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결코 현재보다 훨씬 나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십니다. 또 기억하십시오. 여호와께서는 영원 전부터 질척거리셨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질척거리고 계십니다. 이후로도 영원히 질척거리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제까지 지어왔고, 오늘도 여전히 짓고 있고, 이후로 짓게 될 모든 죄들을 충분히 덮고도 남을 은혜를 부어주고 계십니다. 그 은혜 안에서 저와 여러분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기억하십시오. 여호와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문제를 맡길 때, 기도를 들으십니다. 방법을 맡길 때, 부르짖어 외친 기도를 응답해주십니다. 결과를 맡길 때, 당신의 가장 선한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여호와께는 문제는 물론 방법과 결과까지도 모두 다 맡겨 드려야합니다.
한편, 부자의 진짜 무기는 돈이 아닙니다. 남들이 돈 걱정할 시간에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여유입니다. 대단히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의 무기도 경험이 아닙니다. 여유입니다. 삶의 승패는 넘쳐흐르는 재력과 능력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에서 결정 납니다. 가진 것이 거의 없어도, 지극히 작고 연약해도 여유를 갖출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온갖 종류의 위기를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마침내 이길 수 있습니다. 빼어나게 잘난 사람의 판단 기준 역시 여유입니다. 여유를 갖추는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가장 여유로우신 여호와 한 분만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발꿈치를 잡는 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가져야겠다고 작정한 것은 반드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취했습니다. 그의 강함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장자명분을 취하기 위해 아버지와 형을 속였습니다. 결국 형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진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곧 돌아오겠다는 생각으로 약속의 땅을 떠났습니다. 약속의 땅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토해냈습니다. 형의 눈을 피해서 죽기 직전까지 뛰었습니다. 이제 인생의 2/3가 훌쩍 지났습니다. 고향 땅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그는 여전히 강했습니다.
광야에서 본 영광스러운 환상도, 하란에서 오랫동안 겪은 쓰라린 아픔과 연단도 그의 강함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거기다 그는 응용 심리학에도 능통했습니다. 기민하고 똑똑했습니다. 무수히 많은 짐승을 거느린 부자였습니다. 당연히 자신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해질 무렵 얍복 강변에 섰을 때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오는 형 앞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떠날 때 가졌던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짐승들과 종들을 떼로 나눠서 앞서 보냈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을 앞세웠습니다. 혼자 뒤에 남았습니다.
밤새도록 여호와와 싸웠습니다. 결과는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그의 완벽한 패배였습니다. 굴욕스러웠습니다. 멀쩡했던 사람이 다리를 저는 절뚝발이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비로소 자신을 완벽하게 옭아매고 있었던 지극히 악한 강함으로부터 해방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여호와께 정복당하는 쾌감을 맛보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반항아에서 온유하고 기품 있는 여호와의 벗으로 거듭났습니다. 생전 처음 여호와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축복을 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받았습니다. 은혜였습니다.
강함이 아니라 약함을 통해서 주어진 은혜였습니다. 자신을 적나라하게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여전히 허물과 죄에 찌들어 있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죄인들 가운데 가장 흉악한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신의 절망을 고백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여전히 놓지 못한 채 질척이시는 여호와 한 분만 온전히 바라보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천 번씩이나 넘어져도 얼마든지 받아주시는 여호와의 품에 안기는 복된 삶, 죄의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복된 삶, 무엇보다 무시로 찾아와서는 괴롭히는 환난과 시험까지도 여호와 안에서 얼마든지 참고 견디며 마침내 이길 수 있는 여유를 누리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