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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자신의 목숨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한 사람들 |
김 영 장 신부
수원가톨릭대학교
<목차>
<글을 시작하며>
1.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다
2.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신 하느님
2.1 “무군무부”(無君無父)
2.2 “대군대부”(大君大父)에 관한 글들
2.2.1 <천주실의>에서
2.2.2 정약종의 <주교요지>(主敎要旨)에서
2.2.3 정하상의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2.2.4 순교자들의 증언에서
2.3 천주교는 가장 귀한 것
2.4 소결론
3.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3.1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셨으니, 그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오.
3.2 십자가와 오상(五傷)을 바라보며 고통에 동참하였다
3.3 잔혹한 형벌
3.4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예수의 수난과 오상을 묵상하다.
3.5 매일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3.6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3.7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데 얼마나 많은 지식이 필요할까
4. 순교에 대한 열망: 순교의 은총을 청하며
4.1 순교에 대한 열망이 꿈에서도 나타나다
4.2 순교를 기쁘게 받아들이다
4.3 자신들의 나약함을 인정하다
4.4 “예수, 마리아!” : 화살기도
4.5 항상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5. 이웃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
5.1 감옥에서의 생활
5.2 옥바라지
5.3 자선: 이웃사랑
5.4 배교자 전지수도 사랑한 분들
6.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6.1 한국 초기 교회 신자들의 하느님 체험
6.2 오늘날의 우리들이 찾아야 할 것은
6.3 순교자들과 어두운 밤
<글을 마치며>
<순교자 성월에>
자신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한 사람들
- 103위 성인들을 중심으로 -
김영장 신부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글을 시작하며>
한국 천주교회는 자랑스럽게도 103위 성인을 모시고 있다. 9월 순교자의 성월이 되면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고, 순교자들의 영성을 본받자고 말한다. 필자뿐만 아니라 신자들도 순교자들을 대하면 늘 두 가지 화두가 떠오른다.1)
첫째는, 어떻게 순교가 가능했을까? 또 순교를 가능하게 했던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신앙의 선조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교리서를 읽고 마침내 참 진리를 발견하기는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교회의 창시자들 몇 사람이 순교할 수는 있어도 그토록 많은 분들이 순교하기는 어렵다. 순교는 목숨을 바치는 것이기에 하느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면 해답은 간단하지만,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정말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천주교 신자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그 용기는 어디에 뿌리를 둔 것일까? 특히 초기 한국교회 때에는 주문모 신부를 제외하고 선교사들이 거의 없었던 상황이어서 교리나 성사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순교에까지 이르게 된 요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둘째는, 한국 순교자들의 특성 중에 하나는 내세지향적이라는 점이다. 비천한 신분으로서 이 세상 살기가 지겹고 힘들었는가?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목숨을 버리고 신분의 차이가 없는 저 세상에서 살려고 하였던 것은 아닌가? 누군가는 피는 피를 부르기 때문에 처음 몇 순교자들의 피를 보고 더 많은 순교자들이 생겼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피를 보면 사람은 흥분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열정에 타올라 순교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2) 이 두 화두를 염두에 두고 한국 103위 성인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찾아보고자 한다.3)
1.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다
“천주께서는 당신 무한하신 인자로 우리를 위해 당신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천주 성자는 사람이 되사 33년간 만 가지 괴로움을 당하시고 만대만민(萬代萬民)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성혈을 마지막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불쌍하게도 내 일생을 통해 도무지 천주를 찬미하고 그분께 사례할 줄을 몰랐으며 천주를 위해 털끝만한 덕행을 닦을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내 마음 변하는 대로 천주를 거스르고 배반하지 않은 날이 없어 오직 때를 허송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어찌 이다지도 미련하고 배은망덕할 수가 있었겠습니까?”4)
이 글은 이문우 요한(1809-1840)이 1840년 1월 순교하기 엿새 전에 양친께 쓴 편지에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내용의 일부이다. 신앙의 선조들은 하느님을 믿기 전에는 세상의 지도 체계가 임금과 아버지에 의해서 구성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천주교를 믿게 되면서부터 세상과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가 계시고, 그분은 우주를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가장 높은 임금이시며,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인간을 죽음과 인생의 고해에서 구해 주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스스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고, 많은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진리의 말씀은 유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유교의 핵심인 충효를 지상의 유일한 철학으로 알고,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실천해야하는 것으로 살아가던 선조들에게 대부모이신 하느님께는 가장 큰 충효를 바쳐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천주실의>에 쓰인 천주교의 교리(敎理)가 아니라 실천해야 할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또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였다. 이 커다란 진리를 신앙의 선조들이 단지 믿어야 할 교리로만 받아들였다면 이 땅에 결코 피흘림은 없었을 것이다.
참 진리의 말씀을 깨달은 신앙의 선조들은 어떻게 하면 대부모이신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효도할 수 있을 것인지를 찾았다. 나를 위해 피땀을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스승 예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하여 보답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정말 큰 문제였다.
내가 살기 위해서 진리를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참 아버지를 버리라는 말인가? 유가(儒家)에서 목숨을 바쳐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치면서, 진정 대 임금이시고 대부모이신 하느님을 공경하지 말라는 것을 신앙의 선조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해야만 하는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신앙의 선조들은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였는가! 어떻게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였는가? 그 모습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드러난 순교자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에게서 무엇을 본받을 것인가!
2. 대군대부(大君大父)5)이신 하느님
“어찌하여 미신에 빠지는 거냐.”
“저는 결코 미신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천주교라는 종교가 미신이 아니란 말이냐.”
“천주는 가장 높으신 아버지시오,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과 만물의 창조주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미신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6) … “천주를 내 아버지로 일단 알아본 뒤에는, 그 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7)
포도대장과 나눈 이 대화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박해를 당한 윤지충 바오로(1759-1791)가 1791년 감영에 불려나가 포장의 신문에 대해 고백한 내용이다. 이 대화에서처럼 윤지충을 비롯하여 많은 신앙의 선조들은 감영이나 포청에서 취조를 당하던 중에 하느님은 천지의 창조주이므로 가장 높은 임금(大君)이며, 인류의 아버지이므로 가장 높은 아버지라는 뜻으로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시라고 신앙고백 한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大君大父”라는 이 표현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신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이와 비슷한 용어로써 “만물의 대부”(大父), “만인의 아버지”(公父), “대부모”(大父母)라는 표현도 함께 사용하였다. 이 단어들은 신앙의 선조들의 신앙고백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중요한 단어이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의미를 이해할 때에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공경하였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大君大父의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이와 대립개념인 無君無父의 의미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1 “무군무부”(無君無父)
안타깝게도 한국천주교회는 전래 초기부터 천주교를 대표하는 서양문화와 동양을 대표하는 유교와의 문화적인 충돌 사이에서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천주교와 유교의 커다란 차이점은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느님(上帝)과 내세에 중점을 두는 천주교의 종교적인 입장과, 현세에 중점을 두고 임금에게 충성과 부모에게 효도를 강조하던 유교의 윤리적인 입장의 차이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조상제사를 미신으로 파악하고 천주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강조한 천주교의 입장과 부모의 효를 강조하여 조상제사를 중시한 유교의 입장사이에는 서로 상반된 교의(敎義)체계를 형성하고 있었기에 이 두 개념사이에는 전혀 타협점이 자리할 여지가 없었다. 유가(儒家)는 천주교를 더 이상 보유론적 입장이 아니라, 유교를 말살하려는 종교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천주교는 유교사회 윤리와 정부 지도체제에 대한 엄청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상제사 금지는 혈연과 가족공동체를 중시한 한국에서는 참으로 가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님만을 믿고 따르고 의지하기 위해서는 ‘피의 순교’가 예견된 것이었다.
“無君無父”, 이 용어는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용어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유교의 윤리질서를 어지럽히던 사람들이나 금수만도 못한 사람들에게 쓰였던 일반적인 용어였다. 그러면 “無君無父”의 단어가 천주교를 힐난하는 용어로 등장하였던 것은 언제부터일까? 천주교를 공격하는 첫 통문은 1785년에 태학생 정숙에 의해서 작성되었으며8), 1785년에 쓴 안정복(1712~1791)의 <천학문답>(天學問答)에도 나타나는 것을 보면 천주교회 초창기부터 이 용어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안정복은 천학문답(天學問答)에서 “노자(奴子), 불타(佛陀), 양주(陽朱), 묵적(墨翟)이 모두 신성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말초에 가서는 모두 허무나 적멸 또는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無父無君) 가르침으로 귀결된다”9)고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이 용어는 다른 종교들을 힐난하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결국은 천주교도 이와 같은 이단에 속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또한 1788년 채제공(당시 우의정)은 ‘무군무부함’(無君無父)이라고 표현을 하였고, 1791년 진산사건 때 신기(당시 대동헌)는 상소문에도 ‘무군무부지학’(無君無父之學)이라고 표현하였으며, 또한 1839년 ‘척사윤음’에도 ‘무부함’10) 등으로 사용된 예를 볼 수 있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커진 계기가 된 사건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제사를 거부(廢祭焚主)하여 발단이 된 신해진산사건(辛亥珍山事件, 1791)과 외세에 힘입어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한 황사영의 백서(帛書, 1801) 사건을 들 수 있다. 정부 당국자들은 임금보다 더 높은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부모의 조상제사를 거부(無父)하는 사건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무군무부’11)가 패륜적인 것 중의 가장 큰 골격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금수(禽獸)만도 못한 짓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처럼 정부 당국자들은 신자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천주교를 “無君無父”의 종교라고 비난하였으며, 초기 한국천주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욕설’이 되었으며, 신자들을 박해하거나 그들을 처단할 때의 죄목으로 ‘무부무군의 부도죄’(不道罪)라는 단죄용어로도 사용하였다.12)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大君大父”의 사상은 언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無君無父”라는 비난에 대응하여 “대군대부”의 개념을 신자들이 만든 것인가? 아니면 이미 교회 안에 이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초기의 저술들 안에서 이점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2.2 “大君大父”에 관한 글들
2.2.1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大君大父” 사상은 우선적으로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천주실의>에서 하느님을 상제(上帝), 상존(上尊), 천제(天帝), 후제(后帝), 천주(天主), 조물자(造物者, 造物主), 지존자(至尊者), 참된 주재자(眞主)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하느님을 임금 중의 임금이시오, 아버지 중의 아버지이신 “대부”(大父)13)이시며, 더 나아가 “만인의 아버지”(公父)이시라고 표현하고 있다. 동양적 윤리관에 입각한 천주 존재의 속성이 이 대부(大父)의 개념에서 더욱 강조되어 나타난다.
“무릇 사람은 세상 안에서 세 아버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천주를 말하며, 둘째는 나라의 임금을 말하며, 셋째는 가장을 말합니다. 세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불효한 자식이 됩니다. 천하에 도리가 있으면 세 아버지의 뜻은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낮은 아버지가 자기 자식에게 높은 아버지를 받들어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자식된 사람이 〔아버지〕 한 분에 순명하게 되면 곧 세 분 〔아버지〕 다에게 효도를 한 셈입니다. … 그 자식된 이가 자기의 높은 〔아버지〕의 계명을 듣게 되면, 비록 자기의 낮은 〔아버지〕에게 잘못을 범하더라도 그가 효도를 하는 데에 지장이 없습니다. 만약 낮은 〔아버지〕를 따르며 높은 〔아버지〕를 거역하게 되면, 진실로 크게 불효하는 사람이 됩니다.… 만일 하느님이 ‘만인의 아버지’〔公父〕인 점에 비견하면, 세상 사람들은 -비록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이라는 〔차별이〕 있지만- 평등하게 〔모두〕 형제가 될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관계를 〔명백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14)
<천주실의>를 통해서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아버지가 세 아버지가 계시며, 이 가운데 ‘만인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임금을 공경하기 위해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을 가장 커다란 불효라고 간주하였고, 또한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모두가 형제임을 마음깊이 받아들였다.
2.2.2 정약종의 <주교요지>(主敎要旨)에서
하느님에 대한 大君大父의 사상은 대략적으로 1786년에서 1801년 사이에 언문으로 기록된 첫 교리서인 정약종(1760-1801)의 <주교요지>에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천주실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책에서 정약종은 <천주실의>에서와 같은 사상적 맥락에서 하느님을 임자(主), 조작인, 뿌리, 대부모(大父母)로 호칭하고 있으며, “천주는 천지의 큰 임금이시고 큰 아비(大君大父)”이시라고 기록하였다. “천주는 천지의 큰 임금 되시고 큰 아비 되시고, 만 가지 선의 근본이 되시니, 세상에서 누가 그 임금과 아비를 모르고 무슨 착한 일이 있으며, 무슨 도라 하리오?”15) 여기에서 그는 하느님을 인격자로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대부모(大父母)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자식은 부모께 대한 효도를 미룰 수 없듯이 하느님께 대해서도 마땅히 섬겨야 한다고 말하였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려 함에, 어찌 오늘은 못하고 내일부터 하겠노라 하리오? 이제 천주께서 세상 사람의 공번된 부모가 되시니, 이미 부모 되시는 줄을 알고, 어찌 그 자리에서 섬기지 아니하리오?”16) 이렇게 정약종은 <주교요지>에서 창조주 하느님은 유교에서 말하는 임금과 부모보다도 한 단계 더 상위의 忠孝를 드려야 마땅한 ‘大君大父’이시며, ‘大父母’이시라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정약종은 인간은 大君大父이신 하느님께 대한 진실된 효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며, 세상 끝 날에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영원한 복락에 대한 약속을 보장받는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영혼이 일찌기 천주의 얼굴을 뵈옵고 무궁한 영광을 받고, 만 가지 즐거움을 누리며, 천주를 뵈올수록 더욱 사랑하고 복락을 누릴수록 더욱 새로와, 그 마음에 가득히 차고, 또 천주의 친애(親愛)하는 자식이 되어, 천신과 성인으로 더불어 서로 동생(同生)이 되고 서로 벗이 되어, 이렇듯이 무궁히 즐기니, 그 존귀하고 영화로움을 어디 다시 비하리오?”17)
1801년 이전에 작성된 <주교요지>에 “大君大父”의 개념이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이 용어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초기 교회 신자들 사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신유박해 때에 여러 순교자들은 천주는 大君大父이시라는 것을 명백하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개념은 정약종 개인의 독특한 신관이 아니라 <천주실의>에 영향을 받아 이미 초기 한국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신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더 나아가 인간은 대부모이신 “천주의 친애(親愛)하는 자식”(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이 되므로 반드시 효를 드려야 하며, 하느님 안에서 인간은 서로 형제가 되고 벗이 된다고 하였다. 바로 이 인간평등과 남녀평등 사상은 당시 유교관습에 젖은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새로운 개념이었다.
2.2.3 정하상의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은 <천주실의>의 사상을 이어받아 세 아버지, 즉 가장 큰 임금(大君)이신 하느님 아버지, 나라의 아버지이신 임금, 집안의 아버지의 위계질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위에는 높고 낮음이 있고 일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으니,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제일 높으나 한 집안의 아버지보다 높은 것은 나라의 임금이며, 한 나라 안에서는 임금이 가장 높으나 임금보다 높은 것은 천지의 큰 임금이십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듣고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 죄가 무겁습니다. 하지만 임금의 명령을 듣고 천지의 큰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 죄는 더욱 커서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주를 받들어 섬기는 것은 임금의 명령을 일부러 어기려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은 어쩔 수 없는 이치 때문에 하는 것인데, 이 한 가지 때문에 아버지를 업신여기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까?”18)
또한 정하상은 하느님을 “만물을 만드신 대부”이시라고 정의를 내리며,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쳐서 천주의 참된 가르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 인간이 해야 할 본분”19)이기 때문에 결코 배반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정하상은 <상재상서>를 통해서 천주교는 결코 임금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임금이신 하느님(大君)의 명령을 따르는 종교이므로 “無君無父”의 종교가 아니라고 호교론적인 입장에서 설파하였다. 아울러 이 책을 통해서 국가의 탄압에 대하여 선처를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강화된 탄압을 하였다.
2.2.4 순교자들의 증언에서
순교자들이 하느님은 大君大父시오, 대부모이시라고 고백한 부분을 많은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천지와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은 대군대부이시오, 대부모이시기에, 결코 그분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는 신앙고백의 틀을 형성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 고백의 글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 정약종(1760-1801)은 문초를 받으면서 “천주님을 높이 받들고 섬기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 천주님은 천지의 큰 임금이요 큰 아버지(大君大父) 입니다. 천주님을 섬기는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이는 천지의 죄인이며,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20)라고 고백하였다. 정약종은 大君大父에게 ‘대효’(大孝)를 드러내기 위해 형장에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21)며 하늘을 보면서 목에 칼을 맞고 순교하였다.
- 김광옥 안드레아( ?-1801)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사또의 모든 언약도 모든 위협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는 제게 물어보지 마십시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烈女는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습니다. 사또께서는 임금님의 명령을 어길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또는 감히 임금님을 배반하시겠습니까. 저도 천주의 명령을 거역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제 大君大父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만 번 안 됩니다.”22)
-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는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더러 먹지 않고 살라고 하시면 비록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천주를 배반한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도 자기가 섬기는 주인과 대감을 배반할 수 없거늘 하물며 천지와 만물의 대군 대주를 어떻게 배반하라 하십니까? 나는 결단코 배반하지 않겠습니다.”23)
- 이문우 요한(1809-1840)의 대답은 이러했다.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함은 인지상정이거늘 어찌 즐거운 마음으로 죽기를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국법에 복종하려면 우리의 대군 대부시요, 하늘과 땅과 천사와 사람과 만물을 만드신 무상의 창조주를 배반해야 할 것이니 죽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24)
- 또한 이영희 막달레나(1809-1839), 이매임 데레사(1788-1839), 김성임 마르타(1790-1839), 김 루시아(1818-1839)25) 등 여교우 네 명과 김루시아(1769- 1839), 전경협 아가타(1787-1839), 김효주 아녜스(1816-1839), 이경천 요한(?) 등이 한 신앙고백에서도 대군대부에 관한 증언을 찾아 볼 수 있다.
2.3 천주교는 가장 귀한 것
순교자들은 대군대부의 사상을 통해서 비로소 참 진리를 찾았고, 이를 신앙으로 발전시켜갔다. 순교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들이 천주교에 대하여 커다란 긍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취조과정에서 나온 몇 가지 사례들을 살펴보면 신자들은 대군대부이신 하느님을 받드는 천주교가 가장 귀중한 종교라고 고백하며(이광헌),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라고 고백하였다(박후재).
- 이광헌 아우구스티노(1787-1839): 1839년 기해박해 초 어떤 예비 교우가 체포된 자기 아내를 석방시키는 조건으로 이광헌을 포함한 53명의 교우 명단을 포졸에게 건네주었다. 이로 인해 이광헌은 4월 7일 전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형조는 이광헌에게 배교하면 가족들과 함께 석방시켜 주겠다고 유혹하였다. “한마디만 하면 너와 처자와 동생을 모두 놓아주고 재산도 도로 찾게 해주마.” 그러나 이광헌은 다음과 같이 확고하게 말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이 제 종교니 차라리 모든 것을 잃을지언정 교는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너는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구나. 그러나 아내와 아이들이 불쌍하지 않느냐?” “저는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마음 약한 표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26)
- 재판관이 박후재 요한(1799-1839)에게 물었다. “국왕이 이 교를 금하시니 너는 그 금령을 어긴 것이다.” “천주는 저의 창조주시고 당신을 사랑하기를 명하십니다. 저는 국왕께보다도 천주께 더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살고 싶거든 네 교를 배반해라.” “제 교는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니 배교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27)
2.4 소결론
초기 신앙의 선조들이 大君大父이신 천주에 대하여 내린 신앙을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겠다. 더 깊은 연구를 해야겠지만, 추측하건대 박해가 있기 이전인 초창기에는 <천주실의>의 영향을 받아 하느님은 큰 임금(大君)이시라는 의미를 교회 안에서 사용하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그렇게 깊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다가 대략 1785년 초기부터 정부 관리들과 유학자들이 천주교를 “無君無父”의 사학(邪學)의 무리라고 욕을 하였을 때, 이에 대응하여 신자들은 천주교는 결코 “無君無父”의 종교가 아니라, “大君大父”의 종교라고 주장하며, 오히려 지상의 임금만 알고 하늘의 큰 임금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야말로 “無君無父”라고 항변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비난에 대응하여 천주교 신자들은 “무군무부”와 상관개념으로써 “大君大父” 개념을 발전시켜 하느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대략 다음과 같이 증거 하였던 것이다.
인간에게는 세 아버지가 계시며, 하느님은 大君大父이시고 대부모이시므로 마땅히 열성과 효성을 다하여 섬겨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세 아버지의 서로 다른 명령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위계질서에 대한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만일에 위계질서를 따르는데 충돌이 생긴다면 사람은 마땅히 아버지보다는 임금을, 임금보다는 대군이신 하느님을 섬겨야 마땅하다고 결론을 지었다. 이러한 大君大父에 대한 논쟁 속에서 신자들은 어느 것이 진정한 효(孝)이며 충(忠)인지를 깨달았으며, 오히려 신자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다지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기에 신자들은 “大君大父이신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하느님을 배반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독특한 형식의 신앙고백이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확고부동하게 신앙의 선조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大君大父” 이 단어는 천주교 전래 초기부터, 추측하건대 대략 1785년 이후부터 한국교회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형태로 확고하게 자리 잡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그 이유로써 이미 <천주실의>에 “만물의 대부”(大父), “만인의 아버지”(公父), “대부모”(大父母), “大君大父” 등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으며, 또한 1791년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도 하느님은 “대군배부”이시라고 신앙고백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기 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大君大父”에 대한 신학사상은 한국교회 초기 저술인 <주교요지>에도 <상재상서>에도 확고하게 중요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오늘날에 와서 본다면 ‘무부무군’이라는 욕설의 이면에서 오히려 가톨릭교도가 ‘大君大父’를 공경하는 근본교리임을 역으로 인식할 수 있게”28) 해주었다.
3.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3.1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셨으니, 그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오.
온 인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본받고자 하였으며, 그분의 수난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성 폴리카르포는 순교자들을 일컬어 “참된 사랑의 원형들”이라 했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순교는 사랑의 완성”이라고 하였다. 순교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행위라고 할 때 그것은 순교자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유사한 점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순교자의 자세가 그분의 자세, 즉 사랑을 닮았기 때문이다.29)
인간에게 있어서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을 것이다. 순교자들은 어떤 것을 근거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하느님은 大君大父이시고 대부모이시기에 공경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 때문에 죽음을 당한다면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순교자들은 순교는 하느님의 부르심이며, 고통도 은총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그 고통에 털끝만큼이나마 동참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그들은 순교로의 초대를 통해서 하느님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고 하였다. 순교자 박종원은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며, 하느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하느님을 위해 괴로움을 받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였다.
- 정정혜 엘리사벳(1797-1839): “천주와 성모의 특별한 안배로 나같이 가난하고 하찮은 것이 오늘까지 무사히 살아 온 것은 오주 예수의 수고하심의 만분의 일 가닥이라도 이해하게 하시려 함이니 적어도 즐거운 마음으로 내 괴로움을 참아 받아야 한다.”30)
- 김대권 베드로( ?-1839)는 고문을 당하는 중에도 전과 다름없이 꿋꿋한 의지와 평온한 기색을 잃지 않고, 주(主)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며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은혜를 다만 머리털 한 가닥만큼이라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31)
- 박종원 아우구스티노(1792-1840)는 교우와 외교인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면서 이웃에게 늘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가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말하였다.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불쌍한 죄인인 나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죽으셨으니, 나도 그분을 위하여 괴로움을 받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32) 그리고 순교하고 싶은 욕망이 그의 마음에 불길같이 일어났다.
- 고순이 바르바라(1798-1839)는 남편 박종원 아우구스티노(1792-1840)가 체포되어 갔을 때 남편과 괴로움을 같이 당하기 위해 포청에 자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박해자들은 바로 이튿날인 10월 27일에 그녀를 체포하였다. “이러한 은혜를 어떻게 갚을꼬? 나는 천주를 위해 치명함으로써 그분께 감사하련다.”33) 이 부부는 옥에서 만나 자기네 처지를 서로 축하하며 끝까지 서로 격려했다.
- 권득인 베드로(1805-1839)도 백절불굴의 용기를 드러냈다. “어찌하여 천주교를 믿느냐?” 포장이 물었다. “천주는 천사와 사람과 만물의 왕이시요,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며 이 모든 물건을 사용하고 천주께 무한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니 천주께 감사할 생각을 두지 않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습니까?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다 천주를 공경하고 섬길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34) 이에 성이 난 포장은 혹독하게 매질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3.2 십자가와 오상(五傷)을 바라보며 고통에 동참하였다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 (The Passion of the Christ)은 관람자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그 중에 하나는 예수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사실화하여 관람자로 하여금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필자도 영화를 보면서 참혹한 모습에 몇 번 얼굴을 찡그리게 되었지만 “영화니까”, 또는 “어떻게 저렇게 촬영을 하였지” 하며 감정에 몰입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던 중 막상 예수의 손에 커다란 쇠못을 박을 때는 필자의 가슴에도 커다란 못이 박히게 되었다. 사실 고통은 실제로 당해보지 않으면 그 고통이 얼마나 아프고 참아내기 어려운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머리로만 느낄 뿐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함께 마음 아파할 수는 있지만, 그 고통을 나도 함께 온전히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순교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의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려고 하였던 부분을 여러 곳에서 읽어볼 수 있다.
“세속괴롬 어떠하냐 지옥고통 그림자라
예수수난 생각하면 만분지일 다못되네…
열심사주(事主) 예비하여 엄형고초 달게받소
예수고상 성교도리 많이많이 생각하소
죽기까지 매맞아도 오천사백 다못맞네35)
전능천주 대부모를 한사(限死)하고 공경하소.
이런때는 열심신공 많을수록 힘이나네
성경도리 못들으면 냉담하기 쉬우리라…
보배세월 허송말고 좋은기회 잃지말게
수고없이 복을받나 예수고상 본을받소.
군난중에 더욱열심 주모인자 사랑하리
열심열심 열심하면 성신은총 도우시리…”
이 천주가사는 순교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한 노래인 <옥중제성가>(獄中提醒歌)36)의 일부분이다. 저자는 1840년 순교한 이문우 요한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혹독한 고통을 받았고 순교에 이른 만큼 이 가사의 내용은 그의 장렬한 신앙 고백이기도 하며, 마음이 약해져 가는 자신과 다른 교우들을 각성시키고자 부른 노래이다. 그는 여기에서 자신의 고통을 예수의 수난과 비교해 보면 만분의 일도 안 될 정도로 미미하며, 아무리 매를 맞아도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맞으신 오천사백 대 만큼은 맞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예수의 고통을 생각하며 견디어 내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 이문우 요한(1809-1840)은 순교하기 엿새 전에 쓴 옥중서한37)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예수의 오상을 여러분 마음에 깊이 새기십시오. 천주께 사랑을 사랑으로 갚고 목숨을 목숨으로 갚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여러분의 본분을 온전히 다 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오주께서는 온전히 당신 자의로 우리 죄를 위해 천 가지 괴로움과 만 가지 근심을 참아 받으셨으니 어떻게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있겠습니까?”38)
- 박희순 루치아(1801-1839)는 형조에서 재판관들 앞에 세 번 출두해 그 때마다 곤장 30도씩 도합 90대를 맞았다. 그리하여 한 쪽 다리뼈가 부러져서 골수가 나오는 것을 머리채로 닦아 내며 말했다. “이제야 오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괴로움이 어떠했는지를 조금 깨닫게 되었다.”39)
- 박아기 안나(1783-1839)는 기억력이 둔해서 교리 문답(敎理問答)과 경문을 배우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천주를 내가 원하는 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마음껏 사랑하기로 힘을 쓰겠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위로했다. 박아기는 오주 예수의 수난에 대해서 특별한 신심으로 구세주의 오상(五傷)을 생각하고는 눈물을 흘리곤 했다. 박해가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의 눈은 빛났고 순교하기를 열렬히 원하는 빛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녀는 남편과 맏아들과 함께 체포되었다.40)
3.3 잔혹한 형벌
곤장이나 태장41) 등 매를 얼마나 맞으면 살이 터지고 흐트러지기 시작할까? 곤장(치도곤)에 대하여 달레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 곤장은 길이가 너댓 자(120-150cm), 너비가 예닐곱 치(18-21cm), 두께가 한 치 가웃(5cm)이고, 한 쪽 끝은 다듬어서 손잡이로 만들었다. 몇 대만 때리면 피가 솟아오르고 살점이 떨어져 산산이 나르며, 열두어 대 때리면 곤장은 드러난 뼈에 부딪쳐 울린다. 단 한 차례의 신문에서 곤장을 60대까지 맞은 천주교인들이 여럿 있다.”42)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곤장 대 여섯 대에 살이 떨어져 나가고 열두어 대를 맞으면 벌써 뼈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순교자들은 법에 정해진 매 60대만 맞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매를 맞았다. 또한 압슬(壓膝), 불에 단 쇠로 몸을 지지는 단근질, 장딴지 위쪽 뼈를 퉁그러지게 하는 등의 고문은 이미 1776년 영종 때 금지 되었지만,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천주교인들에게 사용되었다.43)
<한국 순교자 103위전>에 기록된 103위 한국 성인들 가운데 곤장, 태장 등 매를 맞으신 분들과 매의 대수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기록상의 숫자에 불과한 것이지, 순교자들이 맞은 정확한 숫자가 아니다. 우선적으로 많은 순교자들은 형조와 포청에서 여러 번 잔혹한 형벌과 잔인한 고문을 당했으며, 얼마나 매를 많이 맞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정국보 프로타시오(1799-1839)는 기록된 숫자상으로는 “곤장 25도를 맞아 거의 죽게 되어 옥으로 돌아온 지 몇 시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44)고 기록 되어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전에 형조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은 후 배교를 하였으나 곧 뉘우치고 자수를 하였다. 따라서 그는 곤장 25도만 맞고 죽은 것이 아니라, 이전에 형조에서 받은 잔혹한 형벌과 고문의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놀라운 것은 이 아가타, 정정혜 엘리사벳, 또 79세로 나이가 가장 많았던 유소사 체칠리아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혹독한 매를 맞았다.
<성녀>45)
김 데레사 (1796-1840, 45세, 과부) 태장 280도,
박희순 루치아 (1801-1839, 39세, 동정 궁녀) 곤장 90도,
유소사 체칠리아 (1761-1839, 79세, 부인) 태장 230대,
이 아가타 (1823-1840, 18세, 동정녀) 곤장 300도, 대곤 90도
정정혜 엘리사벳 (1797-1839, 43세, 동정녀) 곤장 320도,
조증이 바르바라 (1782-1839, 58세, 부인) 곤장 180도, 곤장 세차례,
최영이 바르바라 (1818-1840, 23세, 부인) 태장 260도,
현경련 베네딕타 (1794-1839, 46세, 여회장) 주뢰 2차례, 300여 대의 장.
<성인>
김성우 안토니오 (1795-1841, 47세, 회장) 치도곤 60도,
유대철 베드로 (1827-1839, 13세, 소년) 100여대 매, 치도곤 40대,
유정률 베드로 (1837-1866, 30세, 회장) 300여 대의 매, 장사(杖死).
임치백 요셉 (1804-1846, 43세, 사공) 정오부터 해 질 때까지 맞음
정국보 프로타시오 (1799-1839, 41세) 곤장 25도, 장사(杖死)
조윤호 요셉 (1848-1866, 19세, 농부) 곤장 200여도, 장사(杖死)46)
최경환 프란치스코 (1805-1839, 35세, 회장) 태장 365도, 곤장 135도, 옥사(獄死)
최창흡 베드로 (1787-1839, 53세, 회장) 주장 외 태장 150도,
한이형 라우렌시오 (1799-1846, 48세, 회장) 곤장 70도, 교수형
허협(임) 바오로 (1795-1840, 46세, 군인) 치도곤 130도,
103위 성인들 가운데는 정국보 프로다시오, 유정률 베드로, 조윤호 요셉 세분은 장사(杖死), 즉 포청옥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신 분들이시다. 또한 옥에서 순교하신 분들은 최경환 프란치스코를 비롯하여 모두 9분47)은 매의 여독과 힘든 옥중 생활 때문에 옥사(獄死)하셨다. 다음은 순교자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옥살이를 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이호영 베드로는 3년 9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옥살이>
권희 바르바라 (1794-1839, 46세, 부인) (5개월)(
김 바르바라 (1805-1839, 35세, 과부) (3개월, 굶주림, 기갈, 염병, 옥사)
김성우 안토니오 (1795-1841, 47세, 회장) (15개월, 포청옥,)
김아기 아가타 (1787-1839, 53세, 과부) (2년 8개월)
김업이 막달레나 (1774-1839, 66세, 과부) (2년 8개월)
박후재 요한 (1799-1839, 41세, 상인) (4개월)
유 체칠리아 (1761-1839, 79세, 부인) (5개월, 포청옥사)
이 아가타 (1823-1840, 18세, 동정녀) (3개월, 염병, 포청옥사)
이호영 베드로 (1803-1838, 36세, 회장) (3년 9개월, 병, 옥사)
전경협 아가타 (1787-1839, 53세, 동정 궁녀) (5개월)
조 막달레나 (1807-1839, 33세, 동정녀) (3개월, 염병, 옥사)
한아기 바르바라 (1792-1839, 48세, 과부) (2년 8개월)
허협 /허임 바오로 (1795-1840, 46세, 군인) (6개월, 포청옥사)
홍금주 페르페투아 (1804-1839, 36세, 과부) (6개월)
선교사들은 한국 순교자들이 혹독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굳건하게 지킨 신앙과 용기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면서도 선교사들은 한국인을 포함하여 극동인들은 서양인들처럼 신경이 무디고 감수성이 없기 때문에 그토록 참혹한 고문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고 상당히 오해하였다. 로네가 오해한 부분을 읽어보자. “여러 번 문초를 당하는 동안에 태장을 230도나 맞았으나 그녀(유세실리아)는 태연자약 하였다. 이런 말은 한국사기(韓國史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이니 보통 우리(필자주: 서양인)와 같은 감수성이 없고 우리와 같이 신경이 과민하지도 않은 극동인들의 성격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증거한 이들의 신앙과 용기에도 그 원인의 대부분을 돌려야 할 것이다.”48)
달레는 천주교 신자들이 받는 고문이 어느 정도로 심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종교사건으로 투옥된 천주교인인 경우에는, 재판관들이 지나치게 맹렬해져서 몸이 오싹해지는 갖은 야만적인 짓을 생각해낸다. 신문을 받고 이런 고문을 당한 뒤에는 수형자가 다리를 질질 끌면서라도 걸을 수 있는 일이 드물고, 집행인들이 몽둥이 두개 위에 그를 얹어 가지고 팔다리가 축 늘어진 수형자를 감방으로 운반한다.”49)
순교자들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용맹하였는지 그 일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형리들은 순교자들의 굽히지 않는 신앙고백과 형리들의 질문에 지지 않고 끝까지 대답하는 것에 대하여 “저항을 꺾으려고 더욱 극도로 잔학무도한 형벌을 가했다.”50) 그래도 순교자들을 결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취조 중에 또 배교를 강요하는 고문 중에 나오는 고통의 신음소리조차도 배교로 간주한다고 했을 때에도 그들은 결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임치백, 이호영).
- 정정혜 엘리사벳(1797-1839)은 1839년 7월 11일에 어머니 유소사 세실리아(1761-1839)와 오라비 정하상과 같이 체포되었다. 두 모녀는 정하상의 출처를 밝혀내려는 형리들에 의하여 더욱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형리는 그녀의 저항을 꺾으려고 극도로 잔학무도한 형벌을 가했으니 그녀는 문초당할 때마다 곤장을 맞아 일곱 번 문초에 도합 320도를 맞아 결국 옥사(獄死)하셨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천주와 성모의 특별한 안배로 나같이 가난하고 하찮은 것이 오늘까지 무사히 살아 온 것은 오주 예수의 수고하심의 만분의 일 가닥이라도 이해하게 하시려 함이니 적어도 즐거운 마음으로 내 괴로움을 참아 받아야 한다.” 11월 7일에 형조로 이송되어 여섯 차례나 법정에 출두해 문초를 당하고 곤장을 세 차례나 맞았으나 그녀는 안색조차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녀가 무감각한 것을 이상히 생각해 그 연유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장하(校下)의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래서 구세주께서 받으신 괴로움이 얼마나 컸던가를 다소간 깨달았습니다.”51)
- 박희순 루치아(1801-1839) : 형조에서 재판관들 앞에 세 번 출두해 그 때마다 곤장 30도씩을 맞았다. 그리하여 한 쪽 다리뼈가 부러져서 골수가 나오는 것을 머리채로 닦아 내며 말했다. “이제야 오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괴로움이 어떠했는지를 조금 깨닫게 되었다.”52)
- 조증이 바르바라(1782-1839)는 7월에 체포되었는데 포장이 남편의 잠복소를 대고 배교하라고 했으나 단연 거절하였다. “만 번 죽어도 나의 천주를 배반할 수 없고 또 내 남편이 어디 숨어 있는지 알지를 못합니다.” 몇 주일 동안에 조증이는 다섯 번이나 같은 문초를 당했다. “죽든지 그렇지 않으면 네 교를 배반하고 교우들을 대든지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해야 할 터이니 잘 생각해 보아라.” “잘 생각해 보았습니다. 차라리 만 번 죽을지언정 죄를 하나라도 범할 수는 없습니다.”53)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비밀을 지킨 것 때문에 그녀는 주뢰를 틀리고 곤장을 180도나 맞았으며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세 차례나 곤장을 맞았다.
- 임치백 요셉(1804-1846)은 형벌을 받고 주뢰를 당했다. 그리고 형리는 임치백이 신음소리를 한두 마디 내는 것을 보고 말했다. “다만 한두 마디라도 소리를 내면 배교한 것으로 여기겠다.” 이에 임치백은 신음소리를 그쳤다. 자세히 보니 까무러친 것 같았으므로 밖으로 끌어냈다. 옥으로 돌아와서는 그는 마치 유쾌히 산보하고 돌아온 것같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형벌을 당했는지 모르리만큼 아무렇지도 않습니다.”54) 그리고 그는 태연하게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 이호영 베드로(1803-1838)는 “만일 네가 말로 천주를 배반하기 싫거든 커다란 글자 하나를 써 줄 터이니 거기에다 점 하나만 찍든지 침을 뱉든지 하라. 그러면 그것을 배교하는 표로 인정하고 너를 놓아주겠다.” “만 번 죽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재판관이 말했다. “조금이라도 신음한다면 그것을 배교하는 것으로 인정하겠다.”55) 이호영의 살점이 헤어져 떨어지고 뼈가 드러나고 팔이 부러질 때까지 매질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신음도 하지 않았다.
- 허임 바오로(1795-1840)는 주뢰를 틀리고 치도곤 70도를 맞는 혹형을 당하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곧 뉘우치고 그 즉시 재판관을 찾아가서 배교를 취소한다고 말하였다. 옥쇄장들이 그를 괴롭히며 말했다. “말로 취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네가 뉘우친다는 표를 우리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대소변이 가득한 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참으로 뉘우친다면 여기 사발이 있으니 저 통에 있는 걸 퍼서 먹고 마셔라.” 허임은 서슴없이 그것을 한 사발 듬뿍 퍼서 단숨에 삼켜 버리고 다시 뜨려고 하니 옥쇄장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만둬라, 그만둬. 그렇지만 여기 십자가가 있으니 네 교를 배반하기 싫거든 십자가 앞에 엎드려라.”56) 허임은 꿇어서 이마를 땅에 조아리며 잠시 배반했던 예수를 온 마음으로 경배하였다.
- 김효임 골롬바(1814-1839)와 김유리대 율리에타(1787-1839) 두 여교우는 옥으로 끌려가 옷을 벗기고 매를 몹시 맞는 등 모욕을 당했다. 김효임은 붉게 단 숯으로 열두 번이나 몸을 지지는 혹독한 형벌을 당했으나 안색조차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형리들이 지쳐서 물러났다.57)
- 손자선 토마스(1844-1866)에게서 관장은 배교라고 간주할 수 있을 만한 어떤 표도 얻어내지 못하자 독특한 술책을 썼다. “말만 가지고는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기에 불충분하다. 만일 네가 네 이빨로 네 살을 한 점 물어서 뜯어내지 않으면 네가 배교한 것으로 치고 돌려보내 주겠다.” 손토마스는 양팔에서 살을 한 점씩 물어서 뜯어냈다. 그러자 관장이 말했다. “그만 됐다. 사형에 처하게 너를 감사께로 보내겠다.”58)
- 박아기 안나(1783-1839)는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나고 살이 쇠눈 만큼씩이나 구멍이 나도록 혹독히 맞았다.” 이보다 견디기 어려운 형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들은 매일같이 찾아와서 한마디만 하면 풀려 나오게 되니 배교하라고 적극적으로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 기막힌 유혹을 용감히 대적해 나갔으며, 여러 벗들의 나약함을 책하기까지 했다. “아니! 며칠 더 살려고 영원한 죽음을 당할 위험을 무릅쓴단 말이오? 나보고 배교하라고 권하기보다는 끝까지 항구하라고 격려해야 옳지 않겠소? 당신들이야말로 어서 천주께 회두하시오. 그리고 내 행복을 부러워하시오.”59)
3.4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예수의 수난과 오상을 묵상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순교자들의 원형이며 모범이시다. 그래서 순교자들은 예수의 말씀과 행동 모두를 본받으려고 노력하였다. 한국의 순교자들이 주님을 본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하였는지 다음의 글들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정약종의 경우 물을 청하는 행동은 조금 우스꽝스럽기는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행동을 모방하고 따르려는 불굴의 의지에 대하여 우리는 입을 다물게 된다. 손자선 토마스는 몇 번씩이나 거꾸로 매달고 오물을 얼굴에 붓고 입에 넣는 혹형을 받기도 하였다. 그때 그는 예수께서 받으신 초와 쓸개를 생각하였다. 이러한 혹형과 고통을 통해서 순교자들은 예수의 수난에 조금이나마 동참할 수 있었고 예수의 고통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겸손되이 말하였다.
-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760-1801)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리스도를 닮으려 하였다. 처형장으로 향하면서 수레를 끄는 사람을 불러 ‘목마르다’고 하였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나무라자 그는 “내가 물을 청한 것은 나의 위대하신 분(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기 위함이오”60) 라고 대답하였다. … 그리고 그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당신들이 수치와 모욕으로 생각하는 것이 내게는 곧 영원한 영광이 될 것이오.”61)
- 손자선 토마스(1844-1866)는 매일 곤장을 맞았고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포박을 당했다. 몇 번씩이나 거꾸로 매달고 오물을 얼굴에 붓고 입에 넣었다. 이런 더러운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는 다만 “잘됐다”라는 한마디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무엇이 잘됐단 말이냐?” “며칠째 세수를 못했는데 당신들이 이렇게 세수시켜 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피땀을 흘리게 해드린 죄인에게는 잘된 일이고, 게다가 목이 말랐는데 당신들이 제 입에 넣어 준 것은 제가 지은 죄 때문에 예수께서 마시신 쓸개와 초 대신이 되는 것이니 꽤 잘됐단 말입니다.”62)
3.5 매일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의 목표가 될 것이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그래서 순교자들은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먼발치로라도 뒤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순교자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극심한 고통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해주기 위해서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 이경언 바오로(이순이 루갈다의 남동생 1792-1827)는 마음속으로 항상 천주를 위하여 순교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순교라도 하면 내 모든 죄가 만족하게 보상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품었습니다.”63) 그래서 올리브 동산에서 당하신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묵상자료로 삼았으며, 고통 중에 큰 용기를 얻었다고 증언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고 길을 가셨는데 내가 왜 이 길을 걷기를 두려워한단 말인가. 아니, 나는 예수를 한발 한발 따라 가겠다.’ 이렇게 결심하니 기운이 솟아났습니다.”64)
-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를 비롯하여 어린아이들까지 포함하여 40여명의 신자들은 1839년 7월 31일 뜨거운 뙤약볕아래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찌는 더위 때문에 일행은 빨리 걷지도 못했고 어린아이들은 울부짖기까지 하였다. 도중에는 이들의 행진을 보고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었고 불쌍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최경환은 큰 목소리로 외치며 일행을 격려했다. “형제들, 용기를 내시오. 주의 천사가 손에 금으로 된 자를 쥐고 당신들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세고 하는 것을 보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들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로 나아가시는 것을 보시오.”65)
- 한이형 라우렌시오(1799-1846)는 1846년 7월 말 포졸들이 은이 마을을 습격하리라는 소문을 듣고 가족들을 피신시킨 후 혼자 집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심한 매를 맞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압송될 때 이미 상처투성이의 몸이어서 포졸들은 한이형을 말에 태워 가려 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또 상처 때문에 신발을 신을 수가 없었으므로 100리가 넘는 길을 맨발로 걸어갔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였다.66)
- 조신철 가롤로(1795-1839)는 평상시 순교를 염원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목숨을 바치고 갖은 고통을 당해서 오주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야 한다.”67)
3.6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순교자들은 여러 차례의 혹독한 형벌로 인해 나약해지는 마음을 끊임없이 채찍질해 가면서 배교의 유혹을 극복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마다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매 맞으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신 것을 묵상하였다. 순교자들은 이러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 때문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리하여 순교의 순간에 이르러서는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5)하고 기도하신 스승 예수의 마지막 기도처럼, 또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주 예수여,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사도 7,19)하고 기도한 것처럼, 순교자 이경언과 박보록은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였다.
- 이경언 바오로(1792-1827)는 1827년 정해박해 중 전주 옥중에서 쓴 편지에서 혹독한 고문 중에도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아아, 나는 도무지 열심도 없고 체질도 약합니다. 그러나 비상한 특은으로 이 형틀 위에 놓여 있는 동안 구세주의 매 맞으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매질 할 때마다 나는 ‘예수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20여 차례 매를 맞고 나서 정신이 아득하여지는 것을 깨닫고 나는, ‘천주여,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하였습니다.”68)
- 박보록 바오로(?- 1839)는 71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혹독하고 끔찍스런 고문을 여러 번 받아 기운이 빠지자 “내 육신은 관장의 손에 맡기고, 영혼은 주의 손에 맡기나이다”하고 기도하였다. 형리들은 그의 뺨을 치고 수염을 잡아 뽑고 천만가지 욕설을 퍼부었다. 그래도 박바오로는 “이 고통은 은혜이니 천주께 감사한다”고 말하며 항구심을 보여 주었다. 아마도 이러한 행동은 감옥에 갇힌 동료 신자들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는가 보다. 그래서 감사는 “이 수많은 죄수들이 너로 인해 현혹되었으니 너는 마땅히 더 중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69)고 말하며 훨씬 더 무거운 고문을 시켰다.
3.7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데 얼마나 많은 지식이 필요할까
하느님을 믿고 공경하고 따르는데 과연 얼마나 많은 지식이 필요한가? 결코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예들을 볼 수 있다. 포장은 임치백에게 천주십계도 다 외우지 못하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임치백은 비록 자식이 무식하다고 해도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듯이 무식해도 하느님을 공경할 수 있다고 비유를 들어 말하였다.70) 이렇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는 교리보다도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임치백 요셉, 박아기 안나, 김업이 막달레나와 같은 순교자들은 보여 주었다.
-임치백 요셉(1804-1846)은 친지였던 천주교 신자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스스로 포졸이 되었으며, 감옥에서 김대건 신부에게 직접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기는 하였지만 결코 신앙생활에 있어서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다. 관원들이 그를 불러내어 문초를 시작했다. “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니 참말이냐?” “과연 옥에 갇힌 후부터 경문을 배우는 중입니다.” “천주십계(天主十誠)를 외 보아라” “아직 다 외지 못합니다.” “천주십계도 외지 못하면서 어떻게 천국엘 갈 수 있단 말이냐? 천국에 가려면 여기 있는 이 마리아처럼 유식해야 하느니라.” 이 말을 들은 임치백은 머리를 흔들며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그러면 자식이 무식하다고 해서 부모에게 효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무식한 자식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부모께 본분을 다할 수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나는 비록 무식하지만 천주께서 우리 아버지시라는 것은 잘 압니다. 이만하면 족한 것입니다.”71)
- 박아기 안나(1783-1839)는 기억력이 둔하여 요리문답과 기도문 배우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안나는 “나는 천주를 내가 원하는 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마음껏 사랑하기로 힘을 쓰겠다”고 말하며 스스로 자신의 둔함을 달랬다. 박안나는 오주 예수의 수난에 대하여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오상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박해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들려주었다.72)
- 김업이 막달레나(1774-1839)는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오랫동안 남편을 따라 미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교우인 언니가 그녀에게 우상의 헛됨과 우상에게 드리는 제사의 무익함에 대해서 “그 귀신들은 모두 헛된 물건이니 믿지 말라”고 자주 일러 주었다. 김 막달레나는 이 가르침을 따라 남편의 책망도 상관하지 않고 집에 꾸며 놓았던 우상과 그림을 불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열심히 하느님을 믿으려고 노력했지만 기억력이 약한 그녀는 끝내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문을 외우지 못했다.73)
4. 순교에 대한 열망: 순교의 은총을 청하며
4.1 순교에 대한 열망이 꿈에서도 나타나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가장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순교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늘 순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부 순교자들은 꿈속에서도 십자가를 보았으며, 십자가를 순교의 의미로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 조신철 가롤로(1795-1839)는 늘 “‘나는 목숨을 바치고 갖은 고통을 당해서 오주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839년 봄 어느 날 북경에서 돌아오는 중에 꿈을 꾸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와 함께 타볼산 위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본 것 같았고, 또 ‘올해에 순교의 큰 은혜를 네게 주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들은 듯도 해서 땅에 엎디어 감사했다.”74)
- 이호영 베드로(1803-1838)는 이런 꿈을 꾸었다. 어떤 친구가 그에게 과거보러 가라고 해서 가 보니 황홀한 음악이 들려왔다. 이호영은 잠에서 깨어나 꿈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충동을 받아 ‘내가 아마 치명하려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의 예감은 어그러지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난 1835년 2월 어느 날 저녁 때 집으로 돌아오니 포졸 한 떼가 문 앞에 지키고 있다가 그를 체포했다.75)
- 유소사 세실리아(1761-1839)는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남편 정약종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나는 천국에 방 여덟이 있는 집을 하나 지었는데 다섯은 벌써 차고 셋만 남아 있었소. 그러니 생활의 곤궁함을 잘 참아 받으시오. 그리고 꼭 우리를 만나러 오도록 하시오.”76) 과연 그녀의 가족 여덟 명 중에서 다섯 명이 죽었다. 이 꿈은 후에 꼭 들어맞았지만, 그 때 유소사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박아 주고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 이 외에도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77), 조화서 베드로(1815 -1866)78)의 예도 있다.
4.2 순교를 기쁘게 받아들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에 속하는 것이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겼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인간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죽음에 붙이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순교를 더 없는 영광이요 기쁨으로 알았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순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순교자들은 순교를 하느님의 큰 은총이며 초대로 받아들였다. 고문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그 고통에서 탈피하기보다는 오히려 순교를 통한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기를 고대하였다. 하느님을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가 다 순교의 영광을 누렸던 것은 아니다. 최경환 성인은 순교를 간절히 원하였지만 옥사를 하게 되었어도 이를 하느님의 뜻으로 순수히 받아들였다.
- 최영이 바르바라(1818-1840) 편지의 일절은 아래와 같다. “부모와 남편과 베네딕타가 모두 순교했으니 내 마음이 어찌 안온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천국을 생각하면 스스로 위로를 받고 이 은혜를 천주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나는 기쁨이 넘쳐흐르고 마음이 흔희 작약합니다.”79)
- 고순이 바르바라(1798-1839)는 남편 박종원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형조에 끌려가 몹시 매를 맞아 살이 헤어져 떨어져 나가기까지 했다. 그녀는 순교하기를 간절히 원해 죽을 임시에 함께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했다. “그전에는 형벌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벌벌 떨었는데 성령께서 나와 같은 죄인에게도 많은 은혜를 주셔서 이제는 도무지 무섭지 않고 도리어 기쁩니다. 나는 죽는 것이 이다지도 쉬운 일인 줄을 몰랐습니다.”80)
- 박종원 아우구스티노(1792-1840)는 늘 이렇게 말했다. “오주 예수께서 나같이 불쌍한 죄인을 사랑하셨으니 나도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옳고, 또 예수께서는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으니 나도 그분을 위해 괴로움을 당하고 죽는 것이 옳다.”81) 그리하여 그는 순교하고자 하는 원의가 불타올랐다.
- 이문우 요한(1809-1840)은 순교하기 엿새 전에 쓴 편지에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하였다. “섣달 열흘날 재판관은 나를 불러내 보통 이상으로 곤장을 때리게 했습니다. 내 힘 만으로야 어떻게 그것을 견딜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천주의 도우심에 힘입고, 성모 마리아와 천사, 성인과 우리 모든 순교자의 전달하심에 힘입어 거의 괴로운 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으며 따라서 내 목숨을 바쳐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행동은 이렇게도 규율이 없고 내 힘은 이다지도 약하므로 나는 부끄럽고 두려움을 금치 못했습니다.”82)
- 임치백 요셉(1804-1846)은 옥에 갇힌 지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재판관이 그를 법정으로 불러 사형을 선고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너무나 기뻐서 같이 있던 교우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했다. “오늘 법정에서 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고 하오. 나는 아무 공도 없으나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당신들보다 먼저 죽어 천국에 가게 되면 돌아와서 당신들 손을 이끌고 우리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해 드릴 테요. 그러니 무엇보다도 용맹히 싸우시오.”83)
- 유대철 베드로(1827-1839)는 “문초당하기를 열네 번, 고문당하기를 열네 번, 매 100여 대와 치도곤 40도로 온 몸이 상처투성이요, 뼈가 부러지고 살이 헤어져 떨어졌으나 늘 기쁜 낯빛을 잃지 않았다.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요, 기적이라고도 할 만한 것이며 적어도 그 용기만은 기적적이라 할 것이다. 어느 날 저녁에 한 옥쇄장이 담배통으로 그의 넓적다리를 사뭇 내리쳐 살 한 점을 떼어 내며 소리쳤다. 이에 옥쇄장은 부젓가락으로 벌건 숯덩이를 집어 입을 벌리라고 했다.”84)
- 이 외에 권득인 베드로(1805-1839),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 정하상 바오로(1795-1839), 유진길 아우구스티노(1791-1839)의 사례도 있다.
4.3 자신들의 나약함을 인정하다
순교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주뢰를 틀고, 매를 맞아 살이 터지고 뼈까지 부러졌을 때의 고통을 어떻게 참아낼 수 있었을까? 순교자들은 이러한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였다. 자신들은 체질도 약하고, 작은 벌레에 물렸어도 고통을 겪는 무한히 나약한 존재임을 고백하였다. 자신들이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와 마리아께서 곁에서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예수께서 받으신 고통을 깊이 묵상하면서, 자신이 가는 십자가의 길에 예수께서 함께 십자가를 져주시고, 매를 맞는 동안에도 예수께서 함께 매를 맞아주셨기 때문에, 고통을 참아 받을 수 있는 힘을 주셨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고통은 예수께서 받으신 것에 비교하면 만분의 일도 안 되는 미약한 것이라고 겸손되이 말하였다.
- 이 누갈다의 남동생인 이경언 바오로(1792-1827)는 순교하기 전에 신앙 고백서이기도 한 귀중한 옥중수기85)에 글을 남겼다. “상처의 괴로움으로 말하자면, 나의 너무나 연약한 육체만으로는 그것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천주의 은총과 성모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찌 한시인들 이를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천주께서 지금까지 내게 무수한 은혜를 내려주신 것으로 볼 때, 분명히 나를 저버리려고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먼저 천국에 올라가게 되면, 누구든지 이 큰집에 올라오실 때에 내가 마중 나가 우리의 공번된 아버지에게로 함께 가서 그분을 찬미할 것입니다.”86) 또한 그는 “한편으로 내 죄가 무수하다면 또 한편으로는 천주의 자비도 끝이 없으니 이것이 내 오직 하나의 희망이오. 내 힘만 가지고는 한 순간이라도 꿋꿋이 견디지 못했을 거요. 참말이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 힘은 아무것도 아니고 천주의 보호하심이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을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 보다도 인정하오.”87)
- 이문우 요한(1809-1840)은 순교하기 엿새 전에 쓴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섣달 열흘날 재판관은 나를 불러내 보통 이상으로 곤장을 때리게 했습니다. 내 힘 만으로야 어떻게 그것을 견딜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천주의 도우심에 힘입고, 성모 마리아와 천사, 성인과 우리 모든 순교자의 전달하심에 힘입어 거의 괴로운 줄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으며 따라서 내 목숨을 바쳐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행동은 이렇게도 규율이 없고 내 힘은 이다지도 약하므로 나는 부끄럽고 두려움을 금치 못했습니다.”88)
- 손소벽 막달레나(1801-1840)는 “만일 천주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내 힘만 가지고는 다만 일각이라도 벼룩이나 이가 나를 뜯어먹는 것만이라도 참아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천주께서는 참아 받을 힘을 내게 주시는 것입니다.”89)
4.4 “예수, 마리아!” : 화살기도90)
“예수, 마리아!”하고 바치는 이 짧막한 기도는 한국 교회 초기 때부터 신앙의 선조들이 즐겨 바쳤던 화살기도이다. 순교자들은 박해 중에 형조에서 고문을 받을 때에 주님으로부터 용기와 힘을 얻으며 고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 화살기도를 자주 바쳤다. 이처럼 순교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공로를 잊지 않도록 하기위해 기도”91)하였다. 그래서 이도기 바오로는 “만일 내가 나약한 대로 버려진다면 굳세게 있을 수가 없겠지마는, 예수 마리아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니 아무 것도 무섭지 않소”92)라고 고백하였다.
- 윤지충 바오로(1759-1791)는 권상연보다 몸이 튼튼하여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을 하였으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하였다. 사형장에 도착하여 윤지충은 사형선고문을 큰소리로 당당하게 읽었다. 그리고나서 머리를 자르는 목침 위에 머리를 고이고는 여러 번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침착한 태도로 망나니에게 준비가 다 되었으니 치라는 신호를 하였다. 망나니는 단칼에 목을 쳤다.93) 한편 권상연 야고버(1750-1791)는 모진 태형으로 몸이 허물어져 초죽음 상태로 “예수 마리아”만 부르며 걸어갔다. 권상연도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윤지충처럼 목이 잘렸다.94)
- 유 바오로는 “박춘오에게 자기가 임종을 당하는 것을 보거든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일러 달라고 간청하였다. … 그런 다음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세 번 부르고 나서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은 뒤 곧 바싹 마른 그의 얼굴엔 다시 생기가 돌았고 그를 파묻은 외교인들은 장례식 동안 환한 빛이 그의 시체를 둘러싸고 있었다고 말했다.”95)
- 김아기 아가타(1787-1839)와 포장이 주고받은 문답은 다음과 같다. “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니 사실이냐?” “저는 예수 마리아 외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리하여 혹형을 당했으나 그녀의 대답은 여전했으므로 포장은 그녀를 형조 옥으로 이송했다. 김아기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교우들은 웃으며 말했다. “예수 마리아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가다가 왔군.”96)
- 김대권(金大權) 베드로( ?-1839)는 고문을 당하는 중에도 전과 다름없이 꿋꿋한 의지와 평온한 기색을 잃지 않고, 主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며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은혜를 다만 머리털 한 가닥만큼이라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97)
- 또한 은혜갚음에 대하여 유소사 세실리아98), 김 루시아99)의 예도 있으며, “예수 마리아”의 화살기도를 바친 예로써 박상근 마티아(1837-1867)100), 김노사 로사(1784-1839)101), 최해성 요한(1811-1839)102)의 사례도 볼 수 있다.
4.5 “항상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순교자들은 순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또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 항상 기도하며 생활하였다. 유중철 이순이 부부와 이윤일 요한은 ‘용기는 기도에서 얻은 것’이었으며 “항상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103)고 고백하였다. 그랬다. 순교자들은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고문에 의해서 초죽음이 되었다가도 다시 힘을 회복하면 기도하였다. 그들은 기도가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옥에서도, 처형장으로 가면서도, 처형장에서도 “항상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도기 바오로는 때로 자신의 나약함을 없애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를 청하기도 하였지만, 순교자 자신의 육체적인 편안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부탁하였다.104) 박희순 루치아105)와 남명혁 다미아노106)는 마지막 휘광이의 칼에 목이 떨어질 때까지 기도하였다. 처형장으로 가는 길은 그들에게는 오히려 기쁨의 길이었다. 그 날은 “천국의 과거를 보거 가는 날”이었으며 “천주 곁으로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 정문호 바르톨로메오(1801-1866)는 12월 13일 처형되던 날 순교하러 가기 위해 옥에서 나올 때에도 열심히 기도문을 외고 있었다. 군사들은 그런 그를 조롱했다. “아니, 죽으러 가는데 그렇게도 좋으냐?” “오늘 우리는 천국의 과거를 보는 걸세. 기쁜 날 아닌가?” 이 말에 한결같은 용맹을 지니고 있던 조화서가 대답했다. “그래, 우리는 대단히 행복하다네. 우리는 풍성한 행복을 추수하게 될 걸세.”107)
- 이윤일 요한(1823-1867)은 대구에서 처형한다는 선고를 듣고 기뻐했다. 떠나면서 그는 아들들에게 말했다. “나는 순교하러 간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서 열심히 천주 계명을 지키고, 후에 나를 따르거라” 이러한 태도에서 볼 수 있는 이윤일의 용기는 기도에서 얻은 것이었으니 “그는 항상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108)라고 같이 잡혀 있던 일행이 증언하였다.
5. 이웃사랑을 실천한 사람들
신앙의 선조들의 삶을 보면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자주 다녀야만 하였다.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는 산골 교우촌에서 살았기에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 거기에다가 주위 사람들과 포졸들에게 약탈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없는 가운데에서도 자신들보다 더 가난한 이웃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이것을 보면 당시 신자들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 못지않게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대단히 중요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1 감옥에서의 생활
선교사들은 감옥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전교 신부들의 서술에 의하면 한국의 감옥은 겉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담에 붙여서 죄수를 가두는 움막은 널빤지로 지은 것이었다. 복판에 남은 자리가 마당이 되고 움막에는 빛이 겨우 새어 들어갈 만한 작은 문 이외에는 뚫린 데라고는 도무지 없고 겨울에는 몹시 춥고 여름에는 무척이나 더웠다. 땅바닥에는 거칠고 다 떨어진 자리가 깔려 있을 뿐이었다. 교우들은 도둑 모양으로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끼씩 반찬 없는 쌀밥이나 조밥을 한 공기 받아먹을 따름이었다. 이렇게 몇 주일이 지나면 아무리 건강하던 사람이라도 가죽과 뼈밖에 남지 않았다. 50년 전 서울 옥에 갇힌 일이 있었던 리델(Ridel, Félix Clair, 1830-1884) 주교가 저들의 이런 불행한 모습을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하루는 기아에 희생된 사람들을 보았다. 아! 이 얼마나 참혹한 광경이냐! 나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고통과 주림과 옴과 나창(癩瘡)으로 얼굴 모습이 완전히 변해 버린 송장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109)
이처럼 감옥에서의 생활이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일이다. 다블뤼(Daveluy, Marie Antoine Nicolas, 1818-1866) 주교는 “벌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주림이요, 그보다도 심한 것은 목마름”이라고 말하였다. 군에서 죄수들을 위하여 쌀이 배급되지만 포졸들을 비롯하여 관리들이 횡령하는 바람에 죄수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거의 없었다.110) 그래서 “감옥에서 생활하는 것은 이교도나 천주교인을 막론하고 모든 피고인이 감옥을 고문보다 더 두려워 한다”111)고 달레는 기록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1839년 대 박해 때에 신자들이 받은 감옥생활의 어려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리 교우들은 이런 옥중에 어떻게나 빽빽이 갇혀 있었던지 잘 때는 다리도 뻗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들이 한결같이 말한 것은 이 참혹한 옥중의 괴로움에 비하면 고문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고름으로 자리는 곧 썩어 버려 견딜 수 없는 악취를 풍겼으며 염병이 발생해 며칠 동안에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러나 벌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주림이요, 그보다도 심한 것은 목마름이었다. 다른 형벌을 받으면서는 용맹히 신앙을 증거한 이들도 주림과 목마름에는 넘어가는 이들이 많았다. 하루에 두 번씩 주먹만한 조밥 한 공기밖에는 얻어먹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 후에는 자기들이 누워 자는 더러운 볏짚으로 만든 자리를 뜯어먹고 심지어는 옥 안을 기어 다니는 이를 잡아먹기까지 했다.”112)
그래서 많은 경우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굶주림과 추위에 옥사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안타깝게도 목마름과 굶주림, 염병, 고문의 여독 등으로 103위 성인들 가운데 9분이, 시복시성을 위해 추서된 124위 가운데에서는 11분이 옥사하셨다.113)
5.2 옥바라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 중에 중요한 것은 가장의 순교로 경제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에 처한 순교자 집안을 돌보는 일과, 형벌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감옥에 갇힌 이들과, 병자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감옥에서의 생활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주림이요, 그보다도 심한 것은 목마름”114)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신자들은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옥바라지를 해주기 위해서 돈을 모으거나, 교회의 돈을 사용하였다.
- 1839년 순교당시 22세였던 김 루시아(1818-1839)는 길고 아름다운 머리채를 하고 있었다. 감옥에 함께 갇혀있던 4여인들은 사형 선고를 받은 후에도 여러 주일 동안 옥중의 간고와 주림과 목마름을 겪었다. 김 루시아는 아름다운 머리채를 잘라 팔아 그 돈으로 죽을 사서 함께 갇혀 있는 이들과 나누어 먹었다.115) 극심한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머리채를 잘라 팔아야 할 정도로 감옥에서의 생활은 극단적인 것이었다. 당시 젊은 여인에게 있어서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옥에 갇혀있는 동안 정정혜 엘리사벳(1797-1839)은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의 돈으로 함께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대주었으며116), 꼽추 할머니 김 루치아(1769-1839)는 일흔한 살의 노령이었지만 옥중의 병자들을 도와주며 얼마 안 되는 자기 돈을 그들에게 나눠 주었다.117) 또한 최경환 프란치스코118)와 이문우 요한119)은 박해가 심했던 1839년에 헌신적으로 의연금을 거두어 옥에 갇힌 교우들에게 보내 주었다.
5.3 자선: 이웃사랑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매우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병든 자들을 돌보았다는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자주 읽어볼 수 있다. 초기 신자들이 가성직제도를 실시하여 고백성사를 베풀었을 때에 희사(喜捨)를 보속으로 주었던 것으로 보면120), (그 이후 선교사들이 들어와서도 계속 보속으로 희사를 주었다는 보장은 없지만) 신자들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르 12,31)는 성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 이웃에 대한 사랑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열심히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해시대 중 교회에서는 길에 버려진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서도 힘썼으며, 길에서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매장하는 데에 힘썼다. 이웃사랑에 있어서 빼어 놓을 수 없는 활동은 영해회의 활동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1855년 메스트르 신부에 의하여 영해회(嬰孩會)121)를 결성하였다. 이 회의 주요활동은 버림받은 아동들이나 죽을 위험에 처한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이 살아나면 신자 가정에서 맡아 키우는 어린이 구호사업을 폈다. 1859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신자로서 대세(代洗)를 받고 죽은 아이가 701명, 프랑스의 고아원본부에서 보내온 경비로 양육하는 고아가 43명에 달하였다.122) 고아들을 돌보아주거나 대세를 준 분으로 김아기 아가타,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정의배 마르코, 조 막달레나, 한아기 바르바라, 현경련 베네딕타 등의 예가 있다.
- 한이형 라우렌시오(1799-1846)는 빈궁한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기꺼이 받아 들여 대접했고 혹 옷이 남루한 사람을 만나면 자기 옷을 주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애긍을 과도히 한다고 말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헐벗은 이를 입히고 굶주린 이를 먹이는 것은 거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이르면 천주께서 이자를 듬뿍 붙여서 모든 것을 갚아 주실 테니까요.”123)
-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는 애긍시사를 위해 힘쓴 대표적인 분으로서 “비록 자신이 몹시 가난하면서도 곤궁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애긍시사를 베풀 방법을 찾았던”124)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돈 문제로 격렬히 성을 내며 싸우는 것을 보고 그들을 말리려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자, 당신이 지니고 있는 돈을 채권자에게 주어 채무자와 화해시켰다. 또한 그는 박애심이 가득하여 사방으로 두루 다니며 불쌍한 사람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었다. 과일이나 추수할 때에는 그는 가장 좋은 것을 골라 가난한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 놓았다.125)
- 민극기 스테파노(1787-1840)는 “이리 저리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격려하고 가르치고 자선사업에 힘쓰며 외교인들에게 포교하여 많은 사람을 입교시켰다. 그는 종교 서적을 베낌으로써 자기의 생활비와 애긍에 충당하였다.”126)
- 임치백 요셉(1804-1846)은 교우들을 형제와 같이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들 구제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즐겁게 여겼으며, 의지할 곳도 없고 재산도 없는 사람 4-5명을 끊임없이 먹여 살리고 있었다.127)
- 유소사 세실리아(1761-1839)의 박애심은 대단해서 어떤 때에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식사를 궐하기까지 했다.128)
이 외에도 이웃사랑을 실천한 분들로 김희성 프란치스코, 허인백 야고보, 정하상 바오로의 예도 있다.
순교자들의 이웃 사랑은 자신을 붙잡으러 온 포졸들을 냉대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옷도 내준데서 더욱 빛난다.
-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 : 1839년 7월 31일 밤 서울에서 온 포졸들이 안양 수리산 최경환의 집을 덮쳤다. 그러나 최경환은 포졸들을 가장 친한 친구들을 맞이하기나 하듯 기쁜 어조로 말했다. “어째 이렇게 늦으셨소? 우리는 오랜 전부터 당신들을 고대하고 있었소이다. 우리는 준비가 다 되었으나 아직 날이 어두우니 좀 쉬고 요기를 해서 기운을 돋우도록 하시오.” … 해뜰 무렵 최경환은 포졸들을 깨워 음식을 대접하고 옷차림이 남루한 한 포졸에게 옷을 한 벌 내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교우 40여 명과 함께 무슨 잔치에 나가는 것처럼 즐겁게 길을 떠났다.129)
- 박희순 루치아(1801-1839)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전경협과 둘이서 박해를 피할 방도를 의논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그녀는 태연하게 “천주의 명령 없이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130)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너무 소리 지르지 말라고 청하고 엽전 몇 꾸러미와 술과 음식을 갖다 준 후 언니 박큰아기와 다른 여교우들과 함께 기쁜 얼굴로 법정으로 끌려갔다.
5.4 배교자 전지수도 사랑한 분들
자신을 붙잡으러 온 포졸들을 대접하는 일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만, 교우들을 관가에 고발한 배교자를 도와주는 것은 일반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1814년에는 전국적으로 무서운 기근이 들어 모두가 어렵게 생활을 하였다. 전지수(전지손, 전지순)라는 배교자가 있었다. 그는 교우들의 등을 쳐 먹을 생각을 하였다. 그는 경상도의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돈과 옷가지와 양식을 구걸하였을 때, 교우들은 할 수 있는 대로 그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전지수는 구걸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교우들을 밀고할 생각을 하였다. 그것은 신자들의 재산을 약탈하여 빼앗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1815년 강원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을해박해가 일어났다. 이 박해는 경상도 청송 고을 노래산에서 시작하여, 진보 고을 머루산 등 산속에 형성된 교우촌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131)
그러다가 배교자 전지수도 어떤 큰 잘못을 저질러 감옥에 투옥되었다. 감사는 그를 굶겨 죽이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나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이 매일 매일 자신들의 얼마 안 되는 배급을 그에게 주어서 목숨을 건져 주었다. 그 후 그가 석방되어 거의 알몸뚱이로 옥 밖으로 쫓겨났을 때에도 신자들은 그에게 몸을 가릴 옷을 주어, 참다운 애덕이 원수를 어떻게 갚는지를 모든 외교인들에게 보여 주었다.132) 이것은 순교자들이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1)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며,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마태 5,44)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6.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6.1 한국 초기 교회 신자들의 하느님 체험
신앙의 선조들은 유교의 엄격한 신분계급의 상황 속에서도 만인의 아버지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며, 하느님 앞에 똑같은 형제자매임을 깊이 이해하고, 서로 “교우”(敎友)라고 부르며 살았다. 그래서 신자들은 당시에 “사회 윤리를 어지럽히는 자들”(邪慾變世子)이란 욕을 들었다. 실제로 유군명 시메온을 비롯하여 몇 몇 신자들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노비들에게 자유를 주었는데, 이는 1894년 조선말기 신분제도의 붕괴가 있기 전에 이미 교회 안에서는 100여년 앞서 실천되고 있었던 것이다.133)
백정 출신인 황일광 알렉시스(1756-1802)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교우들은 그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를 나무라기는 고사하고 애덕으로 형제 대우를 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나 양반 집에서까지도 그는 다른 교우들과 똑같이 집안에 받아들여졌는데, 그로 말미암아 그는 농담조로 자기에게는 자기 신분으로 보아, 사람들이 그를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 또 후세에 하나, 이렇게 천당 두개가 있다고 말하였다.”134)
당시 풍속에 의하면 백정(白丁)은 가장 천한 신분계급에 속하기 때문에 동네에서도 같이 살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서 살아야만 했다.135)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하느님 앞에 평등한 자녀라는 체험은 (특별히 신분의 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시 사회에서는 너무나도 강렬한 것이어서 그 어느 것과도 대치 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신자들은 이미 현세에서부터 자신들이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진 기쁨을,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이 지상에서부터 누릴 수 있었다.136)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졌다는 확신! 이러한 체험은 대단한 힘을 지닌 것이었다. 그 어느 것도 이 하느님 나라의 체험과는 바꿀 수 없는 참으로 고귀한 것이었다. 이것은 나 혼자만 천국에 가자는 이기주의가 결코 아니다. 당시의 순교자들은 개인주의나 이기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당시 유교사회는 가족이나, 가문을 중요시한 사회였다. 그래서 당시 사회의 풍토 안에 개인주의가 설 수 있는 자리는 결코 없었다. 이들이 받은 영향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가르쳐준 내세 지향적인 성향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대한 염세주의적인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커다란 것이었으며, 죽음에 이르는 참혹한 박해의 어려움들을 극복해 낼 수 있었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서 순교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죽음을 당해야만 한다면, 순교로밖에는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면, 그들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깊은 체험,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졌다는 확신은 죽음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이었다.
6.2 오늘날의 우리들이 찾아야 할 것은
대략 1890년 이후 근대에 들어와서 노비제도가 사라지고 신분평등이 이루어짐에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게 되는 깊은 체험은 점차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유교의 관습에 젖은 한국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자녀로서의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해야 할 의무와 지켜야만 하는 계명을 먼저 배우고 가르쳐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세례를 받으면 새 신자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기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해야만 하는 의무들137)을 가르쳐 왔던 것이다. 이것은 커다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을 믿는 것이 기쁨과 희망,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기보다는 의무와 책임을 이행해야하는 부담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초기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기쁨을 마음 가득히 누렸다. 하느님 자녀로서의 깊은 사랑은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잃어버렸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초기 한국 교회의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이 “하느님의 자녀성”이다.
6.3 순교자들과 어두운 밤
순교자들은 순교에 귀신이라도 들린 사람들인가? 죽지 못해 환장을 한 사람들인가? 왜 그렇게 죽으려고만 했는가? 내세지향적인 사상을 나쁘게만 바라볼 것인가? 우리는 때때로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통해서 “어두운 밤”을 경험한다. 성서에는 언급이 없지만 필자는 아브라함은 적어도 두 번의 어두운 밤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정든 고향 하란을 떠나 야훼가 일러준 낯선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창세 12,1).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두 번째는 오랜만에 얻은 혈육인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도 아브라함은 무척 고민을 하였을 것이다(창세 22,2). 차라리 다 늙은 자신을 제물로 바치라면 더 쉽게 바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 밖에 없는, 100살이나 되어서 얻은 너무나도 귀중한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가혹한 말씀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무척 많은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을 것이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기는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낙방해도 상관이 없는 그런 시험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어두운 밤이 있었다.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사랑하는 제자들만을 따로 데리고 게쎄마니로 올라가 기도하셨다. 예수는 피땀을 흘려가며 수난의 고통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 하셨다. “아버지,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함께 깨어 기도하는 제자가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 홀로 깨어 있는 밤이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이 겪었을 1839년 7월 31일의 “어두운 밤”을 상상해 보았다. 포졸들은 밤늦게 안양 수리산 담배골로 쳐들어 왔다. 평소 최경환은 가족들에게 항상 치명할 준비를 하라고 하였지만, 막상 포졸들이 들이 닥쳤을 때는 참으로 놀란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포졸들은 죄인을 붙잡은 마음에 편안히 잠이 들었다. 새벽 세시. 홀로 깨어 이 밤을 지새고 있다.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다. 내일이면 굴비를 엮듯 모두 오랏줄에 묶어 서울로 압송되어 갈 것이다. 평소 순교를 원하기는 하였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두려움이 앞선다. 앞으로 받아야 할 수많은 고통과 고문, 부모들이 죽고 나면 고아가 되어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 아이들! 외국에 있는 큰 아들 양업은 언제 돌아올까?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밤이다. 아! 이 밤은 왜 이다지도 길기만 한 것인가? 차라리 밤이 얼른 지나가고 새벽이 왔으면 좋겠다.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어두운 밤이었다.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낮에 더 먼 곳을 볼 수 있습니까? 아니면 밤에 더 먼 곳을 볼 수 있습니까?
사실 사람은 빛이 있어야 무엇인가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낮에만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캄캄해져야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낮에는 기껏해야 저 멀리 있는 산, 푸르른 하늘의 태양을 볼 수 있지만,
실은 밤에는 무진장 넓은 우주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낮에는 볼 수 없는 것,
캄캄해져야 비로소 잘 보이는 것,
캄캄해질수록 자신의 존재를 더욱 확연히 드러내 보여주는 것,
바로 그것은 어두운 밤의 별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어두운 밤”을 겪어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인생에서의 어두운 밤은 무조건 떨쳐버려야만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밤에 더 먼 곳을, 저 우주의 드넓은 곳까지 볼 수 있는 것처럼,
삶에서 맞이하게 되는 인생의 밤도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인생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한세계에 대한 시야를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성서를 묵상하다보면 밤이 인간을 위해,
신앙의 심화를 위해 얼마나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낮에는 우리가 모든 사물을 볼 수 있지만,
밤은 우리에게 표징만을 가리켜줍니다.
낮은 우리에게 태양빛의 밝음 속에서 현실을 보여주지만,
밤은 별빛의 가녀림 속에서 우주속에 있는 무한과 영원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낮은 우리에게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만,
밤은 순수와 성실로써 인내심을 가지고 표징을 해석하라고 초대합니다.
낮이 인간이 말하는 시간이라면
밤은 하느님과 천사가 말하는 시간입니다.138)
제자들은 모두 잠에 빠져들었어도 (루가 22,39-46)
주님은 밤에 홀로 깨어 기도하고 계십니다.
모두가 평화 속에 곤히 잠들은 고요한 밤이지만
주님은 깨에 나와 함께 기도하십니다.
나 홀로 깨어 고통을 안고 가슴아파하는 밤이지만
주님은 깨어 당신과 함께 기도하자고 하십니다.
그 속에서 주님은 고통과 사랑의 신비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이른 새벽, 최경환 성인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묵상에 잠겼다. 밤! 저 하늘의 무수한 별빛만이 반짝이는 밤. 그런데 그 별들이 나를 오라고 손짓을 한다. 영원으로 올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칠흑같이 어두움 밤에 두려움을 갖지 말고, 더 큰 우주의 세계, 더 넓은 영원의 세계로 오라고 손짓을 한다. 밤의 별빛을 보고 최경환 성인은 스승이신 예수께서 겪으셨던 게쎄마니 동산의 어두운 밤을 체험하였고, 예수를 따라 나설 수 있었다. 이제는 결코 두렵지 않게 되었다. 스승이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현실보다는 영원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 “어두운 밤”의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영원과 무한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기는 하였지만 “영원에 고향을 둔 사람들”139)이었다.
<글을 마치며>
조상제사 금지와 이로 인해 발생한 1791년 신해진산사건은 한국교회 구성원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체면을 더 중시했던 양반들은 가문의 명예를 선택한 반면, 가진 것 없는 평민들은 하느님을 선택하였다. 그것은 죽음을 요구하는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을 선택하였다. 오늘날 돌이켜보건대 조상제사 금지는 교회에 박해라는 커다란 시련을 가져다주었지만, 다른 한편 교회 안에는 오롯이 하느님을 사랑할 사람들만이 남아 있게 되었고, 한국교회는 참으로 순수한 믿음으로 하느님을 공경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그들의 신앙은 믿기만 하면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천당에 가기 때문에 선택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참 진리이며 대군대부이신 하느님을 선택하였으며, 기꺼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상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만일 보답하기 위해서 죽음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를 결코 굽히지 않았다. 그곳에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군대부이신 하느님을 결코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배반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신앙고백의 정형을 이루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로마 8,35).
성인들의 삶을 살펴볼 때,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혹독한 시련이 뒤따른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 인간으로서 자신들의 나약함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겼다. 또 그들은 스승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하였다. 스승 예수의 말씀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태 16,24) 예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먼발치로나마 따라가려고 하였다. 고문과 형벌 중에서, 또 혹독한 감옥생활 중에서 끊임없이 예수의 십자가와 수난을 묵상하는 가운데, 또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가운데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현존하심을 체험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한국 순교자들의 특성 가운데 기복적이고, 내세지향적인 성향이 전혀 없었다고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맹목적이거나 맹신적인 성향을 띤 내세지향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에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깊은 믿음과 실천적인 사랑이 굳건하게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신앙의 선조들의 삶을 본받고 싶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사랑을 보여주신 순교자들께, 오늘의 깨달음을 주신 순교자들께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첫댓글 오늘은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글귀를 마음에 담아 갑니다~ 고통을 은총으로 기꺼이 받아드린 순교자들의 주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을 묵상해보며,두고 두고 공부해 보고 싶은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난초님~ 감기 조심하세요~~^^*!!
저도 두고 두고 공부하려고 얼른 가져왔어요. 우리 함께 공부합시다.^*^
어제 인쇄하였는데요.글이 반 쪽만 나왔어요.그래서 시간 날때 옮겨 적을꺼예요.감사합니다.
코코님~ 항상 열심이신 모습이 보기 좋아요~ ^*^
좋은 글 감사 합니다..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군요.
신앙 선조들의 순수하고 굳건한 믿음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저의 부끄러운 신앙을 되볼아 보게 합니다. guijing님의 많은 생각들이 하느님께로 일보전진하는 밑거름이 되셨음 합니다. 늘 따뜻한 격려가 힘이 됩니다. 감사드려요~ ^^ 23:25 답글 수정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