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행기>
40일간의
남아메리카 여행 - 마지막
- 그리우면
그리운대로 -
이별이
시작되었다.
쿠스코의 전설을 안고 비 내리는 새벽
걸어서 오른 마추픽추에서의 감격도, 푸노에서의 권총 강도 소식에 몸을 사리다 라파스에서의 당한 불의의 일격도 생생했다. 긴 버스 여정 끝에 맛
본 우유니 사막의 경이로움과 고산에서의 잊을 수 없는 온천욕, 모레노 빙하와 엘찰텐의 피츠 로이, 이과수 폭포의 위대한 대자연에 감격했던 시간들
모두가 기억에 또렷했다. 빠르고 쉴새없이 진행되었지만 염려했던 고산증도, 먹고 자는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여행을 방해하지 않았다.
낯설고 물설은 남미의 페루 리마에 첫발을
디디면서부터 시작된 40일간의 여행이 어느덧 막바지에 다가와 있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을 정리하기 위해 들른
빠라찌는 리우에서 Private Van을 타고 아름다운 대서양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네 시간을 달려 도착한 아름다운 작은 해변의
도시였다.
여행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 도시는 우리에게는 낯선 곳이지만 브라질 사람들에게는 주로 정글 투어나 호핑 투어로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유명 휴양지였다. 그래서인지
유달리 남미의 배낭여행객들이 많이 비는 호스텔 'Che Lagarto'에 짐을 풀었다.
하지만 오래된 도시 빠라찌는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라 17세기 포르투갈 식민시대의 모습이 완벽하게 남아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도시이자 색채가 돋보이는 예술가의 도시였다. 파랗고, 노랗고, 빨간색들이 너무 진하지
않게 빛을 발하는 은은한 파스텔의 도시였다. 비가 내리면 돌로 된 도시의 골목들은 물에 잠겼고, 도시의 가운데를 흐르는 수로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누군가를 기다렸다. 오래된 성당이 있었고, 도시의 골목골목을 투어하는 관광마차가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해변의 노을이
있었다.
지나가는 여행자에게 기념품 하나쯤 사라고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 없어서 좋았다. 누구도 호객하지 않았고 누구도 자존심 굽히지 않았서 더욱 좋았다. 거대한 국토, 풍부한 자원을
지닌 신흥부국답게 문화적 자존심 또한 높았다.
멀리 수평선 아래로 해가 떨어지자 준비한
작은 것들을 하나씩 들고 백사장으로 나가 야자수 아래서 이별파티를 열었다.
까마득한 옛날, 흔들다리가
출렁이던 강촌의 모래밭에서 통기타에 맞춰 박인희의 '모닥불'을 부르며 삶과 인생을 얘기하던 젊은 날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시간들이 흘렀다. 술이 있었고 춤이 있었고 노래가 있었다. 그리고 젊은 청춘들의 남모를 고민들이 낯선 이국의 모래를 들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곧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들고 간 술병들이 다 비워지자 추억쌓기를
매듭지으려는 손들에 들려 하나 둘 바다물에 던져졌다. 저항하는 소리에 놀란 마실 나온 동네 강아지가 죽을듯이 짖어대며 바닷물에 던져지는 일행을
구하기라도 하려는 듯, 백마 탄 기사와도 같은 모습으로 바다에 뛰어 들었다. 주인이 급히 달려와 안아 들었지만 이미 바닷물에 흠뻑 젖어버린 그
작은 존재는 이후에도 몇번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 사이 일행 모두는 바닷물에 술기운를 씻어냈다.
바닷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거센
소나기가 쏟아졌다.
흠뻑 젖은 몸에 비옷을 걸치는데 아스라히
지난 날 '님'을 부르고 떠나버린 가수 김정호의 '빗속을 둘이서'가 떠올랐다.
딱 한 잔 한 술이 과했을까? 비옷 속에서 땀은 펄펄 솟구치는데 70년대를 휩쓸고 간 그의 노래가 왜 하필이면 그때 떠오른 것인지, 소설
같았다.
다음날 밤, 자정이 다된 시각 막차를
타고 SH가 떠났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매력있는, 카메라를
대면 언제나 두 손가락으로 V를 그리던 SH가 빠라찌의 어두운 터미널에서 마지막 버스를 타고 떠났다. 눈시울을 적시며 이별 하나를 가슴에
담았다. 그녀는 뉴욕으로 갔다.
그 이틑날 아침,
빗속에서 DR이 떠났다. 배낭여행이 서툰
우리에게 항상 길잡이가 되어주며 딸처럼 살갑게 대하던 DR이 혼자서 상 파울로 행 버스를 탔다. 그녀는 뉴욕, 쿠바를 더 돌아보고 한달 후에
귀국했다.
이제는 우리가 떠날
차례였다.
상 파울로까지는 먼 길이었다. 빠라찌에서
아침 9시 40분 출발, 상 파울로 공항에 오후 6시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또 이별이 있었다. 일행 몇몇이
일정을 바꿔 뉴욕으로, 쿠바로, 맥시코로 갔다. 여행은 늘 이런 예기치 않은 일들이 생기기에 더욱 매력이 있었다. 친구가 가자고 하니 따라
나서고, 누군가의 치명적인 여행담에 이끌려 발길을 돌렸다. 서울로 돌아온 일행은 반으로 줄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누구는 휴직했던
옛직장으로 돌아갔고, 또 누구는 새롭게 취업을 해 힘찬 젊은 날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한달 후, 춘천에서
몇몇이 만나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빠라찌에서 한 생명이 잉태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아기 갖는 것을 목적으로 여행을
나섰던 그 젊은 부부는 이제 내년 2월이면 엄마 아빠가 된다.
일행들은 지금도 가끔씩 단체 카톡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엊그제 크리스마스에도 카카오톡 메신저가
날아들었다. 메리크리스 마스! 그러자 줄줄이 답들이 달렸다. 멀리 남미에서도 "펠리스 나비닷" 하며 소식이 전해졌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더라도 늘 행복한 모습이기를 기대하며,
40일간의 남미여행을
매듭짓는다.
빠라지에 도착해 맨 처음 먹은 아싸이 베리. 리우에서 먹은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바닥이 돌로 된 빠라지의 골목길, 흰색의 건물들은 아치형 창틀로 멋을 냈고,
파스텔 톤의 색감으로 분위기를 맞추고 있다.
숙소인 Che Lagarto
숙소에는 아침 저녁으로 이 작은 원숭이 가족들이 나무를 타고 내려와 식사를
즐겼다.
여행의 막바지, 젊은 부부가 묵었던 이 방에서 축복의 새 생명이 잉태되었다.
오래된 성당에서 옛 포르투갈 식민시대의 모습이 느껴진다.
성당 옆 바닷가 그늘에서 평화로운 오후를 즐기는 여행자 부부
카페
우리 부부를 태우고 마을 골목을 돌던 관광마차의 말이 길에 서서 실례를 하자 마부가 흔적을 지우고 있다.
잠시 내린 비에 잠겼던 도로.
빠라찌의 골목들은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역삼각형 형태인데 이는 많은 비가 쏟아지거나
조수간만의 차이로 인해 바닷물이 밀려들어올 때 집안으로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다 골목길들은 배수시설이 워낙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비가 내려 도로가 잠기더라도 금방 빠져나갔다.
조금 전 내린 비로 잠겨던 도로가 골목을 한바퀴 돌고 나자 어느덧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아마도 이 조선소(?)에 있는 배는 수만 척쯤 될 듯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배 제작 공장이 있다.
브라질 현지 여행자들로 붐비는 골목들
도시 한 가운데를 흐르는 수로에 정박해 있는 투어용 선박들. 주로 호핑 투어에 이용된다고 한다.
작은 해변의 백사장. 인근에서 호핑 투어가 이루어지고 있다.
수로에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다.
빠라찌의 밤
어두운 해변에 앉아 석별을 나누었다.
하나 둘 바다물에 몸을 적시며 여행을 매듭짓고 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 여행을 마치고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쯤이야 지극히 자연스런 일상의 하나에 불과한 일이니 새로운 만남에
지나치게 흥분할 일도 아니고, 헤어지는 일을 죽을만큼 고통스러워 할 일도 아니었다. 담담하고 품위있게 맞이하면 되었다.
하지만,
이별 그놈에게는 면역도 없는 모양이었다.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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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호핑투어는 어디서나 멋지네요..
이별을 하는데 왜 제가슴도 이리 먹먹해지나요.
오랜시간 같이 했던 분들과 헤어지고 아쉬움을 나누고..
그뒤 뒷풀이라도 하셨는지요.
서울에 오면 참 바쁘고 서로 만나기 어렵다는게 여행인의 한사람으로 항상 아쉽네요.
전체메일을 시리즈로 보낼까 하는데...
다 복사금지로 되어있네요.
암튼 긴여행
긴 후기...
넘 감사드립니다.
한해 뜻깊게 보내셨고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여행에서 돌아와 몇몇이서 뒷풀이도 하고, 비록 가뭄에 콩나듯하지만 여전히 카톡도 나누고 합니다. 자주 만나기는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라서요. ^^
긴 여행기 묵묵히 지켜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또 새로운 여행지를 찾느라 고민 중입니다.
아프리카는 어떨까? 러시아 횡단은 괜찮을까? 아니면 중미로 갈까?
고민 중이지만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군요. 해가 바뀌어야 할 모양입니다.
우리 지기님,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멋지네요 언제나 가볼려지,
저도 이번 남미 여행을 어느날 갑자기 결정한 것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이번에 다녀오게 된 것입니다. 자료도 모으고 여행기도 읽으면서 하나둘 준비하다 보면 좋은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러면 꼭 가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