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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9월 26일 목요일]
『대동야승』 제9권 [해동야언 Ⅲ] <김정과 박상의 상소>
○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은 어버이를 섬기기 위해 지방 수령이 되기를 원하여 순창(淳昌) 군수로 나갔는데, 을해년 (1515년 중종 10년) 가을에 담양(潭陽) 부사 눌재(訥齋) 박상(朴祥)과 상의하기를,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의 둘째 왕비 윤씨)가 승하하였고 원자(元子 뒤의 인종)께서 포대기 속에 있는데, 박 숙의(朴淑儀)가 후궁에서 사랑을 받으며 또 아들이 있으니, 만약 성종조의 폐비(廢妃)와 자순대비(慈順大妃)와 같이, 모두 후궁으로써 왕비에 오른 전례에 따라 정비(正妃)로 책봉(冊封)한다면, 원자(元子)의 지위를 위해 어려움이 있다.
신(愼)씨를 다시 세워 허물없이 폐비(廢妃)되어 있는 억울함을 펴고, 첩(妾)을 정처(正妻)로 삼지 못하는 의리를 밝혀서 옛 은혜를 온전히 하고, 후궁이 왕비의 자리를 엿보는 일을 막게 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지금 올바른 말을 구하시려는 하교를 받았으니, 침묵을 지킬 수 없다.” 하고, 함께 상소하여 항의하였다.
그 대략에, “부부(夫婦)의 도(道)가 정도(正道)에서 나오면, 큰 벼리[綱]와 큰 근원이 질서가 정연하며, 빛나고 밝음이 위에서 움직여서 모든 일과 말은 교화에 사무치는 것이 그림자가 형체에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호응하는 것과 같아서, 어디에서나 한결같이 바르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행하면서 성공을 구하면, 비유하건대, 그 근원을 흐리게 하면서 하류(下流)의 맑음을 바라는 것과 같으니,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옛날 주(周) 나라의 교화가 부도(婦道)에서 비롯되어 조정에 미치고, 왕성히 사방에 덮였습니다. 이때에는 부부는 부부의 도리를 다하고 부자(父子)는 부자의 도리를 다하며, 군신(君臣)은 군신의 도리를 각각 다하여, 조그만 요사스럽고 더러움도 그 사이에 없고 천지가 안정하고 만물이 육성함에 이르러서, 추우(騶虞 시경《詩經》의 편명으로 주 나라 왕후의 덕을 찬양하였음)와 인지(麟趾)의 아름다운 상서가 반드시 감응하여, 나라가 8백 년을 이어 전하였으니 어찌 관저(關雎)와 작소(鵲巢)의 교화가 아님이 있겠습니까.
그 나라가 쇠함에 이르러서는 내교(內敎 궁내의 교육)가 무너지고 풀어져서, 죄 없이 정후(正后)를 폐해 내쳐서, 마침내 융적(戎狄)의 화를 일으켰으며, 첩을 정처로 올려서 명분을 문란하게 하여, 마침내 쟁탈하는 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밖에, 당 고종(唐高宗)은 왕황후(王皇后)를 폐위하여 마침내 종사(宗社)가 넘어지고 자손이 끊어졌으며, 송 철종(宋哲宗)은 맹후(孟后)를 폐위하여 근본과 원류가 전도(顚倒)되었으므로, 음험하고 사특한 무리들이 재얼(災孼)을 빚어내어 정강(靖康)의 변을 초래하였는데, 더구나 또 첩을 부인으로 삼아서 그 떳떳한 예법을 어지럽게 하는 자는 그 화가 어찌 적겠습니까. 옛날부터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증거가 명료하여, 이와 같이 증험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제왕(帝王)의 배필을 중히 하여 교화의 근본을 바르게 하고자 하면 어찌 구차히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등은 삼가 보건대, 고비(故妃) 신(愼)씨는 내침을 당해 밖에 있으나 어떤 큰 사고가 있었으며, 어떤 명목을 들어서 이런 매우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까. 반정하던 초기에 박원종(朴元宗)ㆍ성희안(成希顔)ㆍ유순정(柳順汀) 등이 이미 신수근(愼守勤)을 없앴으므로, 왕비는 그의 딸이니 그 아비를 죽이고 그 조정에 있으면, 후일에 화가 있을까 염려되어 그릇되게 스스로 온전하게 할 사욕으로써, 비로소 폐위하여 내치는 꾀를 내었으니, 이는 진실로 사고가 없고 또 명분이 없는 것입니다.
신씨는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시던 처음에 혼인을 정하여 좋은 짝을 이루었으며,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시자 중궁의 자리에 앉아, 신민(臣民)들의 하례를 받고 모후(母后)의 높은 지위에 올랐으며, 자전(慈殿 대비)에게 잘못하는 꾸지람이 없었고 제조(第稠)에서 내칠 만한 실수가 없었는데, 전하께서 강한 신하들의 제압을 받아 부부의 중함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아니하겠습니까.
우리 조정의 심온(沈溫)은 헌릉(獻陵 세조)께 죄를 입었으나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조의 비로 심온의 딸)에게는 누(累)가 미치지 않았으니, 이전의 일을 밝게 징험할 수 있습니다. 더욱 신수근은 나라에 관계되는 죄가 아니고 지친(至親)을 구조하는 법으로써 용서하여 온전하게 하여도 괜찮은데 지금 이미 죄를 더하고 또 반드시 그 연루로써 왕후를 폐위시키고 내쳤으니, 이는 제 몸을 아껴서 임금을 업신여기는 까닭에 불과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화(和)한 기운은 상서로움을 이루고 어그러진 기운은 재이(災異)를 이룬다.” 하였고, 옛날, 서녀(庶女)가 원한을 품자 여름에 서리가 내려 연(燕) 나라를 쳤습니다. 더구나 종묘사직과 귀신과 사람, 상제(上帝)가 돌보는 이를 무고히 폐해 내쳐서, 단칸 방에 쓸쓸하게 지내면서 길이 그윽한 원한을 맺게 하였으니, 그렇게 함으로써 천지의 화한 기운을 상하게 하고, 여러 재변이 거듭 이르게 함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내정(內政)의 자리가 비었으니 마땅히 이때에 빨리 결단하시어, 다시 신(愼)씨에게 왕비의 자리를 회복해 바르게 하시면 천지의 마음이 좋아할 것이고, 조종(祖宗)의 영혼이 윤허할 것이며, 신민(臣民)의 소망에 맞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 자리를 장차 누구에게 붙이고자 하십니까. 이미 허물어진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세우고, 이미 어그러진 옛 은혜를 온전하게 하시면, 이는 바로 대의(大義)에 합치되는 일임이 분명하여 의심이 없습니다.
저 원종(元宗)의 무리는, 비록 왕실(王室)에 공이 있다 하나 당시에 천명(天命)과 인심이 모두 전하에게 귀의하였습니다. 마침 하늘과 사람의 마음이 합하는 기회를 타서 그 힘이 이루어진 것인데, 그 공을 믿고 방자하게도 기탄이 없이 군부(君父)를 제압하고 국모(國母)를 추방하여 천하 고금(古今)의 대의명분을 범하였기에 이는 바로 만세의 죄인이니, 공으로 그 죄를 덮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미 죽었더라도 마땅히 그 죄를 밝게 바로잡아 관작을 추탈(追奪)하고, 안팎에 효유하여 당시와 만세로 하여금 대의명분이 명확하여 범할 수 없음을 밝게 알도록 하면 인륜(人倫)의 근본, 교화의 근원과 정치를 바르게 하는 도(道)가 맑고 밝아서, 천지가 어둡고 막혔다가 다시 열리고 맑게 개여서 넓게 드러냄과 같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또 정일(精一)ㆍ근독(謹獨)하시어 성의(誠意)ㆍ정심(正心)에서부터 미루어가서 정치에 확충하시면, 주(周) 나라 왕실의 인지(麟趾)ㆍ추우(騶虞)의 교화가 이로부터 이루어질 것이며, 왕업(王業)이 8백 년을 지나서 만세에서 무궁토록 이를 것입니다.
신등이 가슴속에 울분을 품은 적이 오래었으나 전에 털어놓지 못한 것은, 바로 장경왕후가 곤위(壼位 왕후의 자리)에 계셨으므로, 만약 신씨를 복위하면 장경왕후께서 난처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장경왕후가 승하하여 곤위가 다시 비었으니, 다시 바로잡을 기회입니다. 또, 바른 말을 구하는 때를 당하였으므로, 이에 신등이 급급히 곡진하게 아뢰옵니다.” 하였다.
이때 양사(兩司)에서 모두 시장(試場)에 들어갔었는데, 방(榜)이 나와서 숙배(肅拜)한 뒤에 서빈청(西賓廳)에 모였다. 대사간 이행(李荇)이 주장하기를, “장경왕후께서 이미 원자(元子)를 탄생하고 승하하였는데, 다시 신씨를 세워서 만약 선후를 논한다면 신씨가 먼저인데, 왕자를 탄생하는 일이 있으면 세자(世子)의 지위가 혹 흔들릴 것이다.” 하니, 양사에서 휩쓸려 따라서 상소의 뜻을 요사스러운 논의라고 지적하여 잡아 추궁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육조 당상(堂上)과 홍문관에게 모두 의계(議啓)하기를 명하니, 모두 말하기를, “바른 말을 구하는 하교를 받아서 말한 것이니, 말이 비록 맞지 않을지라도 죄를 주어 언로(言路)를 막을 수 없다.” 하였다.
오직 대간에서 힘써 말하여 조옥(詔獄 임금이 친국하는 옥)에 붙잡아 국문하게 하였는데, 대신들의 구제하는 바가 되어 도배(徒配)에 그쳤다. 병자년 겨울에 조정에서 아뢴 바에 의하여 조정으로 돌아왔다.
<안로(安璐)의 《기묘당적보(己卯黨籍補)》>
○ 장경왕후는 을해년 2월 26일에 원자를 탄생하고 7일 만에 승하하였다. 이때 김충암(金沖庵)과 박눌재(朴訥齋)가 항소(抗疏)하여 신씨의 복위를 청하였는데, 대사간 이행과 대사헌 권민수(權敏手)가 사론(邪論)이라고 지목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준하여 문초해 치죄하기를 애써 청하여, 금부 낭관(禁府朗官)을 보내어 잡아오자 사태를 측량할 수 없었다. 좌의정 정 문익공(鄭文翼公 정광필)이 조정 신하를 거느리고 구하기를, “말이 비록 맞지 아니하나 죄를 주어 언로(言路)를 막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여, 8월 23일에 형장 1백 대와 도배(徒配)에 해당되었는데, 고신(告身 직첩(職牒))을 빼앗고 속장(贖杖)된 것은 대신의 힘이었다.
선대부(先大父 죽은 조부) 안당(安塘) 께서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항상 대신의 논의가 조정에 행하지 못하여 체통이 엄하지 못함을 분하게 여겼다. 8월 26일에 조회가 끝나자, 인하여 아뢰기를, “박상(朴祥)과 김정(金凈)은 바른말을 구하는 하교로 인하여 힘을 다해 말하였는데, 지금 한두 사람의 말로써 도리어 엄한 꾸지람을 더하면, 이는 실로 언로(言路)를 막고 선비의 사기를 꺾어서 만세에 비방을 받은 이유가 될 것입니다. 재상은 국론(國論)을 잡고 국사를 결단하나, 대간(臺諫)은 특히 허물을 다스리고 그릇됨을 규탄할 뿐입니다. 대신과 6경(卿)과 시종들이 모두 죄 주지 말라고 청하였으니, 국시(國是)가 여기에 있는데, 대간에서만 그르다고 하니 공론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또 용감하게 말하는 선비에게 죄를 준다면, 누가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를 따르겠습니까.” 하였다.
권민수와 이행이 선대부(先大夫) (안로의 조부 안당)를 반박하여 나라를 그르친다고 지목하였는데, 여론에 꺾여 정지하였다.
이로부터 조야(朝野)의 선비들이 기운을 잃고 두려워하여 바른 말 하기를 꺼렸으므로, 이를 모두 권민수와 이행에게 허물을 돌렸다.
9월 4일에, 응교 이언호(李彦浩)가 야대(夜對)로 인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근일에 시관(試官)이 되어 어떤 과거 본 사람의 대책문을 보니, 대간에서 박상(朴祥) 등에게 죄주기를 청한 것은 스스로 직분을 잃은 일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유생의 망령된 논의이므로 버려야 마땅한데, 도리어 취하였으니 매우 불가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우부승지 신상(申鏛)이 즉시 아뢰기를, “과거 보는 선비의 대책문은 각각 자신의 뜻을 말한 것인데, 만약 자기의 뜻과 다름을 혐의하여 취하지 아니하면 선비를 뽑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이언호가 원한을 품고 권민수(權敏手)에게 말하여, 권민수가 장차 신상을 탄핵하고자 하였는데, 공론이 합치하지 않아서 드디어 그쳤다.
그뒤 10월 18일에, 정암(靜庵)이 처음 정언(正言)에 임명되어, 곧 이행 등을 배척하기를, “대간의 직책은 언로를 열어 주는 것을 주장하는 데, 도리어 말하는 사람을 죄주어 먼저 스스로 길을 막아서, 임금에게 간언하는 말을 거부하는 징조를 이루었으니, 그 과실이 크니 구차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모두 파면하소서.” 하고, 계속 아뢰었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양사(兩司)를 모두 바꾸었다.
11월 1일에, 새 대사헌 이장곤(李長坤), 대사간 김안국(金安國)은, 정암(靜庵)이 언로(言路)를 옹호함을 옳다 하고, 장령(掌令) 유부(柳溥)와 김희수(金希壽)는 이언호의 논의에 미혹되어 이언호의 논의를 옳다고 하여, “언로는 나라의 하찮은 일이다.” 하니, 이장곤이 되풀이해 깨우쳤으나, 오히려 서로 용납되지 못하여 대궐에 나아가 각기 자신의 생각을 진달하였는데, 이장곤과 김안국에게는 체직하기를 명하고, 이어 유부 등에게는 직임을 수행하라고 명하였다.
직제학 김안로(金安老) 등이 유부 등을 논박해 체직하게 하였으나, 역시 분변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조광조는 언로(言路)를 위하여 옹호하고, 권민수와 이언호는 종사(宗社)를 위하여 죄주기를 청하였다.” 하였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서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였다.
박열(朴說)은 대사헌이 되어 폐(廢)하는 일을 칭탁하여 사직서를 올리고, 방유령(方有寧)은 대사간이 되어 논의가 정암(靜庵)과 같았는데 홍문관의 탄핵하는 대상이 되었다. 당시의 여론이, “김정과 박상은, 신(愼)씨의 죄없이 폐위된 억울함을 펴고 또 첩(妾)으로 처(妻)를 삼을 수 없는 논의를 밝히고자 하였는데, 권민수와 이행이 요사스러운 말이라고 지목하였으니, 실로 인재를 질투하고 착함을 미워함에서 나온 것이다. 이언호의 아부와 김안로(金安老)의 양시론은 모두 만세의 공론(公論)에 죄를 얻을 것이다.” 하였다.
한림(翰林) 이약수(李若水)가 공사로 인하여 좌의정 정 문익공(鄭文翼公)의 집에 찾아가 보니, 공이 말하기를, “대간의 직책은 언로(言路)를 주장하는 것인데, 유부(柳溥)와 김희수(金希壽) 등이 언로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니, 나는 심히 그르다고 여긴다. 홍문관에서는 양편이 다 옳다는 말을 내어 조정에서 분변해 밝히지 아니하므로 고집하는 무리로 하여금 깨우침이 없게 하여 한갓 임금의 뜻을 의혹하게 한다.” 하였다.
병자년 봄에 이르러 대신 및 대간과 시종들이 박상(朴祥)과 김정(金凈)을 석방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고 사간원에서 차자를 올려 힘써 아뢰었으나 역시 윤허하지 않았으니, 모두 말하기를, “양편이 다 옳다는 말에 끌려서 오래도록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하여, 공론이 홍문관 상소에 허물을 돌렸다.
3월 8일에, 정언 박세희(朴世憙)가 사직하기를, “신이 전에 부수찬이 되었을 때에, 직제학 김안로(金安老)가 양편이 다 옳다는 말을 꾸며내었는데, 당초에 신의 뜻은 그렇지 않았으나 남에게 끌림을 당하여 감히 별도로 제 자신의 뜻을 아뢰지 못하였으니,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음에 그르다고 여기면 그때 즉시 신의 뜻을 진술하는 것이 옳거늘, 이미 그렇지 못하고 이제야 말하기를, ‘내 뜻은 본래 이와 같지 않았다.’고 운운하면 옳으냐.” 하니, 박세희가 땀이 나서 등이 젖었다.
장령(掌令) 홍언필(洪彦弼)과 지평 윤지형(尹止衡)이 또 사직하기를, “홍언필은 응교로 있고 윤지형은 수찬으로 있을 때에 김안로의 교묘하게 꾸미는 말에 끌려서 같은 말로 아뢰었다.”고 인책하였다.
10일에, 홍문관 교리 신광한(申光漢), 부교리 이청(李淸), 부수찬 윤자임(尹自任), 저작(著作) 기준(奇遵) 등이 이에 이르러 후회하고 깨달아서 역시 사직을 청하였더니, 권민수와 이행이 정암을 매우 미워하였다.
이언호가 일찍이 모재(慕齋)와 더불어 이 일을 언급하자, 이언호가 발끈 성을 내며 소리치기를, “그때에 왜 김정과 박상을 없애지 아니하여 이와 같이 시끄럽도록 하였는가.” 하였다.
이해 11월 3일에 김정과 박상이 공론으로 인하여 조정에 나왔는데, 이언호는 전라 감사로 나가서 정축년에 죽었고, 권민수는 충청 감사로 있다가 무인년에 죽었다. 이행(李荇)은 수원 부사로써 파면되었는데, 이성언(李誠彦)이 상소하여 해명하여 구원하다가 또 탄핵을 입고 파면되었다. 김안로는 또 이조 참의에서 경주(慶州) 부윤이 되었다.
<안로(安璐)의 《기묘당적보(己卯黨籍補)》> [한국고전종합DB]
[팔경논주]
먼저 상소를 한 김정과 박상에 대한 daum백과 인물 검색은 다음과 같다.
「김정 金淨 (1486년(성종 17) ~ 1521년(중종 16)) 본관 경주.
1507년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고, 수찬(修撰)·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옮겨졌다. 이어 병조정랑·부교리(副校理)·헌납(獻納)·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 때 왕의 구언(求言: 정치에 도움이 되는 말이나 글)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때 권민수(權敏手)·이행(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히 다스릴 것을 주장한 반면,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이에 반대했고, 조광조(趙光祖)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간 사이에도 대립이 생겼고, 둘 다 옳다는 설까지 제기되었다.
1516년 석방되어 박상과 함께 다시 홍문관에 들고, 권민수와 이행의 파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곧 중앙 정계에서의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 뒤 응교(應敎)·전한(典翰)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司藝)·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 뒤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1545년(인종 1) 복관되었고,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일찍이 사림 세력을 중앙 정계에 추천했고,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다. 그 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세력 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 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 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추진하였다.
박상 朴祥 (1474년(성종 5) ~ 1530년(중종 25)) 본관 충주
1496년(연산군 2) 진사가 되고, 1501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보임받고, 박사를 역임하였다.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병조좌랑을 지내고, 1505년 외직으로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냈다.
1506년 중종 초, 사간원헌납이 되어 종친들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태학생(太學生)과 재신(宰臣)들의 상소로 풀려나왔다.
3년 만기가 되자 사직하고 광산으로 돌아가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1511년(중종 6) 수찬·응교를 거쳐 담양부사로 나아갔다.
1515년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상소해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또 박원종(朴元宗) 등 3훈신(勳臣)이 임금을 협박해 국모를 내쫓은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평(南平)의 오림역(烏林驛)으로 유배되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성현(成俔)·신광한(申光漢)·황정욱(黃廷彧) 등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 4가(四家)로 칭송된다. 또한 조광조(趙光祖)는 박상의 1515년 단경왕후 신씨 복위 상소가 강상(綱常)을 바로잡은 충언이었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때 김정은 포의였고 박상은 전라도사였다. 김정은 연산군의 학정을 밖에서 보았지만, 김정보다 12세 연상인 박상은 1501년 연산군 7년에 급제하여 1505년 외직으로 나가기 전까지 박사, 승문원교검, 시강원사서, 병조좌랑을 지내며 연산군을 직접 보필하며 보았다. 그런 그가 연산군이 왕위에 있을 적에는 말 한마다, 상소 한 장 올리지 않았다. 그런 그가 10년 세월이 지나 중종 치세의 안정기가 되자 새삼스럽게 김정과 함께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때는 1519년 기묘사회를 4년 앞두고 조광조의 도학정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다. 위훈삭제에서 보듯이 조광조당은 중종반정의 원훈들의 세력을 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일환으로 상기의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이 상소는 첫 논리에서부터 무리수와 궤변을 내놓고 있다.
상소의 명분으로 당시 대신인 조광조당의 안당의 손자인 안로(安璐)가 모두에서 설명한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의 둘째 왕비 윤씨)가 승하하였고 원자(元子 뒤의 인종)께서 포대기 속에 있는데, 박 숙의(朴淑儀)가 후궁에서 사랑을 받으며 또 아들이 있으니, 만약 성종조의 폐비(廢妃)와 자순대비(慈順大妃)와 같이, 모두 후궁으로써 왕비에 오른 전례에 따라 정비(正妃)로 책봉(冊封)한다면, 원자(元子)의 지위를 위해 어려움이 있다.
신(愼)씨를 다시 세워 허물없이 폐비(廢妃)되어 있는 억울함을 펴고, 첩(妾)을 정처(正妻)로 삼지 못하는 의리를 밝혀서 옛 은혜를 온전히 하고, 후궁이 왕비의 자리를 엿보는 일을 막게 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지금 올바른 말을 구하시려는 하교를 받았으니, 침묵을 지킬 수 없다.” 하고, 함께 상소하여 항의하였다.’에서 보듯이 왕비의 자리를 두고 벌어진 후계 왕위 싸움이었다.
중종에게는 장경왕후가 낳은 어린 아들(인종)이 있고, 또 박숙의가 낳은 좀 큰 아들이 있다. 그런데 장경왕후가 죽었다. 전례에 따라 박숙의를 왕비로 올린다면 장차 두 아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질 수 있다. 원자가 매우 어리기 때문에 자칫 박숙의의 아들에게 밀릴 수가 있다. 그러므로 어린 원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후궁을 왕비로 올리지 말고 폐비된 윤씨를 다시 왕비로 맞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럼 다시 왕비가 된 윤씨가 아들을 낳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여인들마다 자기가 낳은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거기에 또 얼마나 많은 신하가 저마다 줄을 잡아 이을 것인가. 후일에 벌어질 참화가 예측되고도 남음이 있다.
상소의 명분 자체가 이미 정당성과 타당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과 박상은 이하 장황한 미사려구를 쓰면서 자기들의 논리를 분식하고 있다. 또한 조광조를 위시한 일단의 신하들이 김정과 박상을 적극 변호하고 있다.
폐비 신씨는 친정아버지 신수근을 위시한 친척들이 연산군의 학정에 동조하여 부귀를 누리다가, 성희안과 박원종이 도모하고 양심적인 신하들과 군졸들이 동조하며 백성들이 옹호한 중종반정에서 참살된 원흉들의 집안 출신이다. 대신들도 역모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하면 남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여자들은 노비로 전락시킨다. 신씨가 폐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윤씨를 생각하는 중종의 마음을 현혹할 온갖 미사려구를 동원하여 상소하는 것은 선비로서의 올바른 도리가 아니다.
특히 ‘저 원종(元宗)의 무리는, 비록 왕실(王室)에 공이 있다 하나 당시에 천명(天命)과 인심이 모두 전하에게 귀의하였습니다. 마침 하늘과 사람의 마음이 합하는 기회를 타서 그 힘이 이루어진 것인데, 그 공을 믿고 방자하게도 기탄이 없이 군부(君父)를 제압하고 국모(國母)를 추방하여 천하 고금(古今)의 대의명분을 범하였기에 이는 바로 만세의 죄인이니, 공으로 그 죄를 덮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미 죽었더라도 마땅히 그 죄를 밝게 바로잡아 관작을 추탈(追奪)하고, 안팎에 효유하여 당시와 만세로 하여금 대의명분이 명확하여 범할 수 없음을 밝게 알도록 하면 인륜(人倫)의 근본, 교화의 근원과 정치를 바르게 하는 도(道)가 맑고 밝아서, 천지가 어둡고 막혔다가 다시 열리고 맑게 개여서 넓게 드러냄과 같을 것입니다.’는 군자가 가질 수 없는 機心의 극치이다.
‘천명(天命)과 인심이 모두 전하에게 귀의하였습니다. 마침 하늘과 사람의 마음이 합하는 기회를 타서 그 힘이 이루어진 것인데,’라니, 그 무슨 말인가. 성희안과 박원종이 거사를 하지 않았다면 능양군도 목숨을 보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더 많은 신하들과 선비들이 죽었을 것이다. 능양군은 의심이 많은 연산군에게 아부하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신세였다. 성종의 정비 출생은 연산군과 중종이지만 후궁 출생으로 군 칭호를 받은 아들이 13명이었다. 성희안과 박원종이 다른 왕손을 선택했더라면 왕이 되지 못했다.
성희안과 박원종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관작을 추탈하고“, ’부관참시하여 ‘효유’하고, ‘만세의 죄인’으로 낙인 찍는가. 난신적자의 딸인 국모를 폐한 게 ‘고금의 대의명분’을 범한 것인가. 성희안과 박원종이 그런 악독한 죄인이라면, 그들이 폐한 연산군은 피해자인가? 그렇다면 중종반정은 역모였고 반란이었다. 덕분에 왕이 된 중종은 만고역적이다.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 논리를 ‘언로(言路)를 막고 선비의 사기를 꺾어서’라고 변호한 자들은 참으로 편협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중종을 역도의 두목이라고 모는 논리라고 하며 크게 벌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곤장 정도의 가벼운 벌을 내린 것만 해도 중종과 훈구파 대신들의 너그러움이다. 그 너그러움을 간과하고 계속해서 무리수를 두다가 당한 사태가 바로 기묘사화이다.
옳은 신하들과 선비들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서 모두 죽고, 아류로서 침묵하거나 묵인한 자들, 산림에 깊이 숨어서 겨우 목숨을 보존한 자들이, 연산군이 한창 미쳐 날뛸 때는 끽소리 못하더니, 성희안과 박원종의 대업으로 밝은 세상이 되자 슬슬 기어 나와서 선비연, 군자연하는 게 당시 조광조당 인물상이었다. 그런 자들이 자기들 세상이 됐다고 반정의 공신들을 능멸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런 소인배의 심리는,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대첩 등으로 공을 세울 때는 잘한다잘한다 칭찬하다가, 왜적이 남동부로 물러가자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고 한 것에서, 정유재란이 벌어지자 다시 이순신 장군에게 의지하고,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자 칭찬해놓고는 전쟁이 끝나가니 슬슬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고 한 것과 똑같다.
역사는 기묘사화를 당한 조광조당의 인물들을 기묘 명현으로 대접하고 있다. 그들이 구태를 청산하고 혁신정치를 펴고자 노력했음은 한국사에서 칭송받고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상기의 상소에서 간파할 수 있듯이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서 간교한 술수를 미화함을 사양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세의 사가들은 조광조 사림파가 목적은 좋지만 독선적이고 조급하여 실패했다고 평한다.
이 글을 쓴 안로는 사림파를 옹호한 안당의 손자이기 때문에 권민수, 이행, 이성언, 김안로 등을 비판하고 김정과 박상을 변호함이 당연하다. 해동야언을 편집한 허봉, 대동야승을 편집한 무명씨도 조광조 사림파 편이다.
1045년 31세에 왕이 된 인종은 지병으로 1년 만에 죽고 계비인 문정왕후가 낳은 명종이 13세에 왕이 되었다. 명종이 후사가 없이 죽고,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의 둘째 아들 이조(李岹)의 세째 아들인 이연(李昖)이 왕위에 올라 선조가 되었다. 이때부터 왕비가 아니라 후궁 소생이 왕위를 자주 이었다. 이것도 말기에는 씨가 말라서 먼 손을 끌어올려 왕을 이었다.
장경왕후가 죽자 다시 왕비를 맞아들였고, 경빈박씨는 아들 복성군(중종의 서자이나 맏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가, 원자(인종)를 보호하는 김안로의 계략에 빠져 아들과 함께 죽고 말았다. 계비 문정왕후는 10여 년이 지나 낳은 아들(명종)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손에 많은 피를 묻혔다. 예측대로 되지 않았는가.
이 상소는 조광조 사림파를 대표하여 김정과 박상이 훈구파를 공격하기 위해 폐비 신씨 복위 논리를 원자(인종) 보호에 견합부회한 지극히 정치적인 글이다. 이후 문정왕후에게서 왕자(명종)이 태어났으니 왕위 계승전이 더욱 치열해지게 되었다. SBS드라마 <여인천하>에 아주 잘 나타나있다.
궁중 암투에 끼어든 김정과 박상이 크게 잘못했다. 그 후과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이다. 이어서 명종조의 당파 분열과 치열한 권력투쟁의 근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