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방 우리는 계절적으로 한여름 더위 삼복 중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한 달이나 계속된 장마의 터널을 빠져나오니 35도를 넘나드는 무더위와 열대야가 우리를 지치게 하는군요.
우리교회이야기 식구들 모두 평안히 잘 지내고 계신지요? 코로나로 밀렸던 모임과 만남들이 우리를 들뜨게 하더니 계속되는 기후 이변이 발목을 잡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모쪼록 건강 잘 지키시길 바랍니다. 밖에 나가도 덥고 집에 있어도 더워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갑니다. 책을 읽는 일도, 산보 하는 일도, 사람들 만나는 일도 모두 어려워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는 중입니다. 이래서 여름에는 쉼이 필요하구나 생각하지만 집을 떠나는 일도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더위 중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습니다. 잡다한 물건들, 정리 못한 문서들, 사진들을 정리하는 일은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사할 때, 버리지는 못하고 정리를 못한 상자들을 꺼내어 보았습니다. 오래전에 지인들에게 받은 카드, 편지, 사진, 작은 선물들을 꺼내 놓고 보니 한 무더기가 됩니다. 하나씩 들어 보니 옛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하고, 아주 생뚱맞게 모르는 것도 있고, 그러다 어느 목사님이 이스라엘 여행에 다녀오셨다면서 주신 선물을 발견했습니다. 겨자씨를 넣어 만든 책갈피인데, 받은 지 20년도 훨씬 넘은 것 같은데 여전히 생생하게 박혀 있더군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겨자씨라고 했는데, 먼지만큼 작지는 않았구요.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겨자씨에 관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이 말씀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하신 비유 중 여러 사람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주어서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말씀이구나 생각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말 속에 살짝 섞어 넣으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 13:31-33)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참 쉽게 가르치셨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겨자는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 소스로 곁들이는 식재료이지요. 누구나 다 아는 것입니다. 음식 만들 때 주재료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를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뿐인가요.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고도 하셨습니다. 별로 존재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는 누룩이 하늘나라와 같다니요? 여러분은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어릴 적 목사님이 설명해 주신 하늘나라의 모습은 온통 보석으로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나라라고 하셨는데 ‘그 성벽은 벽옥으로 쌓았고, 도성은 맑은 수정과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습니다.’로 시작되어 사파이어, 옥수, 비취옥, 홍마노, 홍옥수, 황보석, 녹주석, 황옥, 녹옥수, 청옥, 자수정, 진주 등 제가 듣도 보도 못한 보석들로 가득한 곳(계 21:18-21)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하늘나라는 가고 싶지 않다고 혼자서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앉을 곳도 없는 곳이 무슨 하늘나라야.’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늘나라는 또 너무 시시해 보였습니다. 작은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은 하늘나라? 그게 뭐야!
그 말씀이 제 가슴 속에 하늘나라의 비밀로 이해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습니다.
겨자씨, 한 알의 겨자씨, 한 주먹의 누룩, 그것 자체가 하늘나라는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도 다 잘 알지요.
한 알의 겨자씨는 누군가에 의해 밭에 심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밭에 심어지면 어떤 것보다 더 작은 씨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커지고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씨가 가져온 변화. 그 씨는 흔적도 없어지고 대신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여 산다고 합니다.
누룩, 그 자체로는 모양도 없고, 존재가치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누룩을 어떤 여자가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살짝 섞어 넣으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고 합니다. 가루가 부풀어 올랐다는 것은 빵으로 구울 수 있게 되었다는 신호입니다. 사람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빵, 나누어 먹을 수 있는 빵으로 변화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어떤 정형화된 모양새와 공간으로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너희가 생각하는, 상상하는 하늘나라는 없다’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아주 작은 것,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것, 나도 가지고 있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있는 작은 겨자씨를 누군가 땅에 심는 행위로부터 하늘나라는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땅에서 키워내는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싹을 내고, 풀로 키우고 마침내 큰 나무가 되게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크게 자란 나뭇가지에 공중에 사는 새들, 생명이 깃들어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늘나라라고 하셨습니다.
누룩도 마찬가지입니다. 누룩은 혼자 있어서는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룩이 있어야 합니다. 그 누룩을 누군가 손에 들고 가루 서말 속에 넣는 행위가 하늘나라를 가능케 하는 시작점입니다. 가루 속에 넣어진 누룩은 형체도 없어집니다. 그 속에서 가루를 부풀게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온통 부풀어 오른 반죽은 생명을 살리는 빵이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 빵을 나누어 먹고 생명 살림이 일어나는 곳이 곧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하늘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아니 이미 만들어 놓은 하늘나라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재료를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움직여 땅에 심고, 가루 속에 넣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고 보면 하늘나라의 특징은 변화와 성장입니다. 땅에 심겨진 겨자씨는 땅과, 누룩은 가루와 섞여서 원래 존재는 흔적도 없이 변화되었습니다. 변화된 것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점점 성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생명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게 되는 하늘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하늘나라의 이 비밀을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실체 없는 하늘나라 공간을 머리 속에 그려 놓고 그곳이 어딘가 찾아가려고 헤맵니다. 하늘나라는 누군가 움직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야 그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가 깨달아 알아야 것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