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도 짧았던 윤동주의 일생
김동수(시인. 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
일제강점기 한국의 현대문학은 국내문학, 지하문학, 해외망명문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내문학은 조선총독부의 언론탄압과 감시에 의해 식민지 종속 친일문학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런 속에서도 윤동주와 그의 시가들은(광복 후 유고시집으로 발간) 순결과 자기희생의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식민지 현실을 누구보다도 괴로워하며 일제에 저항하다 순국한 항일민족시인이었다.
1. 어려서부터 고국에 대한 남다른 향수를 안고
윤동주의 증조부는 함경북도 종성에서 살다가 일대에 기근(식량이 모자라서 굶주리는 일)이 심해지자 1886년 북간도(현 중국 길림성 용정시)로 이주하였다. 이후 할아버지가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때 아버지 윤영석은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하여 1917년 12월 30일 윤동주를 낳았다.
할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동주는 1925년 8세의 나이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소학교 시절 그는 큰 기와집과 깊은 우물, 뽕나무밭과 과수원, 가랑나무가 우거진 기슭에 교회당이 있는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자랐다. 소학교 시절은 윤동주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의 생애 28년 중 14년,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소년시절을 이곳 명동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 속에서 자라면서 고국에 대한 남다른 향수를 안고 살았다. 그러기에 동주 시의 출발은 종교적 신앙에서 오는 순결한 동심과 거기에 비치는 동포들의 궁핍한 삶에 대한 연민의 정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
소학교 4학년 담임선생인 한명준 목사에 의하면 ‘동주는 어린 시절 공부도 잘하는 축이었고, 그래도 어쩌다 문답을 할 때 대답이 막히면 금방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동주 할아버지가 그 동네에서 제일 부자였고 밭이 많았거든요. 늘 말을 기르고 있어 나다닐 때 그걸 타고 다녔지요. 그리고 아들(윤동주의 아버지)을 동경 유학도 시켰다’고 한다.
소학교 때부터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서울에서 발간한 월간 『아이생활』과 『어린이』라는 잡지를 구독해 읽었다. 5학년이 되면서 몽규와 함께 원고를 모아 『새명동』이란 신문 형식의 등사판 문예지를 만들어 동요·동시 등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1932년 동주가 14세 되던 해 동주의 교육을 위해 가족들이 명동에서 다시 용정으로 이사하여 캐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미션스쿨인 은진중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때 그는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면서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만드느라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고, 손수 재봉질을 하여 옷을 고쳐 나팔바지를 만들어 입기도 하였다. 웅변대회에 나가 1등을 한 일이 있어 상으로 탄 예수 사진의 액자가 집에 늘 걸려 있었다고 한다.
2. 광명의 제단에 타오른- 촛불 하나
동주와 소학교·중학교 동기인 문익환 목사는 “은진중학교가 있는 언덕 일대는 일본 순경이나 중국 관원들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대여서 우리는 그곳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애국가를 마음껏 부를 수 있어 신났다”고 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17세) 때인 1934년 12월 고종사촌인 송몽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자로 발표되자, 이에 크게 자극된 윤동주가 ‘대기는 만성’이라는 각오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때 쓴 첫 작품이 「초 한 대」란 시였다.
‘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心志)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윤동주. 「초 한 대」, 1934. 12. 24
문익환에 의하면, 이때부터 그는 “일본군국주의의 마수가 아무리 드세어도∼,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1:15)는 복음서의 말씀으로 역사를 바로 보는 눈이 열렸다.”고 한다. 그러다 18세 되던 1935년 5년제 중학교로 편입학하고자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비록 두 학기(7개월) 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이때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에서의 외로움과 고뇌를 15편의 주옥같은 시에 담아냈다. 그러던 1936년 숭실중학교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고 자퇴하여 용정으로 다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이때 북간도 연길에서 발행하던 『카톨릭 소년』지에 용주(龍舟)라는 필명으로 「병아리」, 「빗자루」 등 30여 편의 동요·동시를 발표하였다.
1938년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을 졸업하고 4월에 송몽규와 함께 다시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이때 『조선일보』와 『소년』지에 산문과 동요를 발표하였다. 28년의 생애에서 이 4년간의 연희전문학교 시절이 윤동주의 일생에서 가장 풍요로우면서도 자유로웠던 시기였다. “연희전문학교가 민족적인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였다”고 동주는 술회했다.
장덕순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얌전하고 말이 적은 외유내강형의 성격이었으나 ‘지조’라든가 ‘의지’는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게 강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때 그 유명한 명시 「별 헤는 밤」과 「서시」가 탄생하였다. 연희전문 4년을 졸업하고 1942년(25세) 2월 동경의 립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한 학기를 마치고, 동년 가을 교토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다시 전학, 만 3년을 일본 땅에서 살았다. 그러던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송몽규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이름 모를 주사(생체실험?)를 맞다 1945년 2월 16일 28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 참고문헌: 박민 평운, 『윤동주를 찾아서』, 연변 대성중학교, 2006년 2월 1일,
김동수, 『일제침략기 민족시가 연구』, 인문당, 1988년 12월 30일
첫댓글 지리산님 긴 글 쓰시느라 수고 많으셨씁니다
새해도 시인님의 필력이 왕성하셔 좋은글 많이 주세요
좋은글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 합니다
추위 몸 조심 하세요 참 감사 수고 많으셨씁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이언 교수님!
지난 한 해 고생 많으셨습니다.
신축년에도 우리 덕화만발 가족들에게
문학이 무엇인지 큰 가르침을 내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올 해도 더욱 건강하시고
댁내 모두 평안 하시를 기도하겠습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