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70년대 이야기인 것으로 안다. 김지하 시인이 무슨 일간지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뭐 이런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다고 들었다. 당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분신, 투신을 통해 민주화의 불꽃을 지피려고 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담은 글이었다고 대충 알고 있다. 민주화운동이라는 거대 담론 가운데 스러져가는 젊은이들의 넋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때가 있었단다.
그런데 양상은 다르지만 지금도 여전히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2014년도에도 말이다. 생활고를 비관하여 죽음을 선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물론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좌절감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젊은이들도 많다. 정권의 부정을 고발하며 분신하는 이들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국정원 불선선거개입 관련하여 조사를 받가가 자살을 시도하는 국정원 직원들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앞에 열거한 죽음들과 국정원 직원들의 자살시도가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 권력의 중심에서 권력을 누리던 이들의 자살은 생활고, 민주주의의 이유로 죽음을 선택한 서민들의 그것과 대등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벌써 두 명이나 되는 국정원 직원, 연루자가 자살을 시도했다. 그것을 보면서 생각이 복잡해진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나. 영원한 것은 없다요. 권력 역시 덧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권력의 한 가운데서 그것을 누리던 이들이 자살을 선택한다?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결국은 억압하는 자들이나 억압당하는 자들이나 같은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인간이 가진 당연한 권력욕을 좀 과다하게 발휘하게 된 이들, 몇 개의 당근을 주워 먹는 재미에 빠져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게 된 이들은 어느 시절에나 있어왔다. 친일파는 좀 그렇고 부일자들이 그렇다. 그리고 생존하는 일이 치열한 전쟁터였던 한반도에서 부일자들에 대한 동정심이 어느 정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에 합당한 죄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 맞다. 불행하게도 한반도에서는, 특히 남쪽에서는 이 문제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기에 용서를 쉽게 하는 부당한 연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한 미움은 있지만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 역시 지울 수가 없다.
국정원 직원들이 불쌍하다. 물론 그들이 이 국가와 민족, 국민에게 저지른 과오는 결코 몇 마디 말로 용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천박한 자본주의, 왜곡된 경쟁사회의 피해자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이 보이는 행태나 발언을 보면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자기들이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는 서운함이 분명 묻어 있다. 맞다, 그들은 생각이 없는 이들이었고 자신들의 욕심을 안보라는 이름으로 덮으려고 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볼 때 성숙하지 못한 이기적인 인생들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도 없는 야만인들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자들이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꼭뚜각시 놀음에 놀아난 불쌍한 동시대인이기도 하지 않을까? 단물만 쪽 빨린 채 자신을 내팽개치는 권력을 보며 그가 느낀 절망감과 두려움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을 모를 것이다. 여전히 국가안보에 일생을 바친 자신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일말의 양심이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세한 심경의 변화와 정황들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점점 확실해지는 것은 소수의 가진 자들이 우리 자신이기도 한 앞잡이들을 내세워 우리를 압박하게 하고 서로 다투고 싸우게 하면서 내부적 적개심을 고조시키고 공포정치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던가? 국정원 직원들이 줄줄이 자살시도를 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좇아서 인간성을 버리고 무한탐욕을 향한 경쟁에 뛰어들 때 최후는 그 자신의 파멸과 더불어 모두의 파멸이라는 것을 이제라도 이 백성이 깨달아 알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