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은 실존 인물이었다.
소설 속 홍길동(吉童)과 실록의 홍길동(吉同)은 한자가 다르지만
같은 인물이다
생애
홍길동(洪吉同)은 1443(세종 25)년경 전라도 장성현 아차곡에서 경성절제사 홍상직(洪尙直)과 관기 옥영향(玉英香)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孼子)로 알려지고 있다.
조부는 밀직부사 홍징(洪徵)이며, 이복형은 홍귀동(洪貴童)·홍일동(洪逸童)이라 한다.
그는 조선 연산군때 도적떼의 우두머리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존 인물이며,
선조 때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실제 모델로 알려지고 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그를 임꺽정(林巪正)·장길산(張吉山)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으로 꼽기도 하였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탐관오리를 징치(懲治)하고, 핍박받는 서민들을 위해 싸운 의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출생
장성군(長城郡) 주장에 의하면 홍길동(洪吉同)은 1443년(세종 25)경 전라도 장성현 아곡리 아치실 마을에서 태어나,
1510년(중종 5)경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신빙성이 없는 이유는,
홍길동의 친아버지인 홍상직이 1424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문헌에 최초로 나타난 홍길동(洪吉同)은 조선왕조실록으로 1500년(연산군 6) 10월 22일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좌의정 성준(成俊)·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듣건대,
강도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확인 가능한 사실은 홍길동(洪吉同)이 실존 인물이며,
한자명은 ‘洪吉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그의 출생 및 처단에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라는 홍상직(洪尙直)의 죽음에 대해 실록에는 1424년경으로 죽은 것으로 나오는데,
조선 후기 학자인 황윤석의 《증보해동이적 해중서생》을 근거로 그의 출생을 추론하면 최소한
그의 아버지 홍상직(洪尙直)이 세상을 떠난 1424년경 보다 20여년 지난 1443년(세종 25)경
전라도 장성현 아곡리 아치실 마을에서 태어나 활동하다가 1500년(연산군 6) 잡힌 기록이 있으니,
대략 60세~70세까지 살다가 죽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장성군의 주장에 따르면 홍길동의 아버지 홍상직(洪尙直)이 1423년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고향 경기도 파주군 적성(積城)에서 요양하다 1424년경 죽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며,
이후에도 홍상직(洪尙直)은 20여년간 더 살다가 한동안 전라도 장성현에 머물면서 관기 '옥영향'(玉英香)을 취하여
1443년경 홍길동(洪吉同)을 얻었다고 볼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실록에 실려 있는 홍상직(洪尙直)의 거주지나 사망 기록은 잘못된 것이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이복형이라는 홍일동(洪逸童, ? ~ 1464년)도 절제사 홍상직(洪尙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는 세종·세조 연간의 문신으로 인물 또한 뛰어나 꽤 유명한 인사로 그의 딸은 조선 성종(1469~1494)의 후궁이 되었다.
그는 행상호군(行上護軍)으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홍주(洪州)에 갔다가 과음으로 1464년(세조 10) 3월 13일 죽었는데,
과연 홍일동(洪逸童)을 홍길동(洪吉同)의 이복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그 연대가 40여년 차이가 나아 서로 맞지 않아 회의적이다.
허균(許筠1569-1618)은 소설에서 하필 태평성대인 세종(世宗)대라고 배경을 설정했지만,
그를 모티브로 소설을 쓴 것이고, 도탄에 빠져 이상향(理想鄕)을 염원하는
백성들의 염원이 반영되어 조금씩 각색된 것이다.
▼홍길동 가계도
▼홍길동 생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치실(아치곡)
홍길동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1리 아치실에서는 몇 백년은 됨직한
아름드리 감나무와 시누대(山竹)에 둘러 쌓인 생가터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또 30여m 아래 계곡(암탉골)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는 '길동샘'이 있습니다.
생가터 30m 아래 암탉골에 있는 홍길동의 먹고 자란 길동샘 1970년대 새마을 운동사업으로
주변이 훼손되기 전까지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