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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 일요일. 2학기 들어 첫 자전거 여행을 하였습니다. 모두 8명이 참석을 하였습니다. 남학생 4명, 여학생 4명. 여학생들이 적은데도 참석률은 훨씬 높습니다. 9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하였지만 사정이 있어서 늦게 온 아이들과 함께 가느라 10시 30분이 되어서야 풍류마당을 출발했습니다.
↑북천 둔치에 내려서서 보문호로 올라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어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기에 불편하지 않습니다.
↑알천이라고도 불리는 북천은 과거에는 물길이 꽤나 사나웠습니다. 해방 이후에 보문호와 덕동호가 축조되고 제방이 정비되면서 지금은 순한 물길이 되었습니다.
↑물이 바닥을 드러내 약간 삭막한 편이지만 사람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어 느긋한 분위기입니다. 다만 지금도 보를 쌓고 바닥을 준설하고 하천 주변에 편의시설을 만드는 등 부산스러운 느낌은 지울 수 없습니다.
↑북천 둔치에는 보문호로 통하는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군데군데 시민들을 위한 운동시설과 축구장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저 멀리 보문관광단지가 보입니다.
↑날씨는 약간 더운 듯한 하지만 그래도 하늘이 맑아서 기분 좋은 날입니다. 북천둔치 자전거도로를 타고 보문호로 가다가 숲머리에서 방향을 꺽어 분황사로 내려옵니다. 이때는 벌써 11시가 넘어 햇살이 눈부십니다.
↑보문마을길로 들어서는 횡단보도에서 본 건너편 숲머리길 숲. 구황교 네거리 주변에 조성된 숲입니다. 과거에는 저보다 울창한 숲이 분황사에서 명활산까지 5 리가 넘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자전거에서 내려서 걷는 것이 좋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건너가다 사고가 나면 보행자가 아닌 차량으로 인정되므로 불이익이 당할 수 있습니다.
↑숲머리에 조성된 공원. 과거 경주는 북천의 범람으로 피해를 많이 보았습니다. 신라시대나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읍성이 침수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시대 북천은 유속이 빨라서 홍수가 나면 월성 아래까지 물이 밀려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홍수로 물이 불어 북천 너머 살던 상대등 김주원이 내를 건너지 못하는 사이에 김경신이 왕위에 올랐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압권입니다. 북천은 능히 역사를 바꿀 힘을 가진 물길이었습니다. 신라 건국의 실마리도 이곳 북천에서 시작됩니다. 6부 촌장이 이 알천 어느 언덕에 모여 회의를 시작하면서 신라는 태동하기 시작합니다.
↑숲머리 반대편 금강산 아래는 북천의 범람 피해가 더욱 심하였습니다. 봉덕사신종으로 유명한 봉덕사와 천림사 그리고 헌덕왕릉 등이 저 금강산 아래 숲 속에 있었는데 홍수로 유실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분황사에서 명활산 쪽으로 북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된 숲을 오리수(五里藪)라 하였습니다. 지금은 개발을 하느라 그 흔적이 모두 없어졌지만 과거에는 이 숲을 훼손하면 중벌을 받았습니다.
↑오렌지보이 윤석이. 옷을 입고 저전거를 타다 보니 오렌지 색 일색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빌린 선생님의 배낭까지도 오렌지색이었네요.
↑숲머리에서 분황사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경주 낭산. 그 뒤로 남산이 보입니다. 가운데 솟은 봉우리가 정상 금오봉입니다. 낭산은 경주의 진산으로 월성에서 본다면 남산과 명활산 사이에 위치하여 이들은 잇는 최후의 방어선과 같은 곳으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산입니다. 황복사며 사천왕사. 선덕여왕릉, 최치원의 독서당 등이 저곳에 있습니다.
↑산업도로 횡단보도를 건너서 분황사로 가는 길 오른편에 남씨창렬각이 있습니다.. 6·25 사변 때 남편이 총상을 입어 다 죽어갈 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붙여서 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분황사에 도착하였습니다. 정문은 보수 중이어서 출입할 수 없습니다. 분황사 정문은 삼문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서남산의 망월사도 삼문 형식인데 요즈음 사찰의 정문으로서는 보기 드문 형태입니다. 왜 삼문 형식으로 되어 있는지 자세한 이유는 알 수가 없지만 다만 과거 사찰이 도심에 위치하고 있었을 때 지금처럼 일주문을 건립하지 않고 바로 정문(중문)을 세워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일주문이 나타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라 생각됩니다.
↑분황사는 원효대사가 주석한 곳이어서 '원효학연구원'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매년 '원효 예술제'와 '원효학 연구 학술 발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원효학은 세계 불교학계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원효가 세운 교리는 법성종의 하나로 우리나라에서는 원효종, 혹은 해동종, 또는 분황종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원효가 창시하였다고 원효종, 우리나라에서 창시된 것이라고 하여 해동종, 분황사를 근본 도량으로 하니 분황종, 같은 것을 이렇게 달리 부릅니다.
원효가 한국 불교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여 원효와 관련되어 창건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사찰이 80여 곳, 그 중에서 원효사 · 원효암이란 이름의 사찰만도 모두 17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공사 전의 분황사 정문. 이 문은 1978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이 문은 석탑과 중심축이 맞지 않습니다. 탑에서 보아서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2008년의 제 8차 발굴 조사 결과에 의하면 창건 시의 중문은 석탑과 금당 중심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당시에도 중문은 세 칸으로 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지금보다 규모가 훨씬 컸습니다.
↑임시로 낸 분황사 출입문. 분황사 서편 주차장에서 바로 들어 갈 수 있도록 출입구를 내 놓았습니다. 일주문의 형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곳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은 모두 평등합니다. 사찰의 일주문은 모든 중생은 평등하다는 불교의 교리를 건축의 형식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궁궐이나 서원, 사당의 삼문은 그 신분에 따라 출입하는 문이 다릅니다. 궁궐의 경우는 가운데 문은 어도로 통하여 임금만이 출입 수 있고, 사당의 중문은 신도로 들어서는 문으로 신불만이 다닐 수 있습니다.
↑경내에 들어서면 바로 우람한 모습의 석탑이 보입니다. 현존하는 신라 최초의 석탑으로 국보 30호로 지정된 '분황사모전석탑'입니다. 모전석탑은 벽돌로 쌓은 전탑과는 달리 돌을 벽돌모양으로 가공하여 쌓은 탑을 말합니다. 분황사 석탑의 벽돌은 화성암의 일종인 안산암으로 만든 것으로 이 석재는 강도와 내구성이 뛰어나 가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돌을 일일이 깎고 갈아서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탑을 쌓는데 드는 공력은 실로 엄청났으리라 생각됩니다. 탑을 조성할 당시에는 7층이나 9층이었다고 추정하지만 현재는 3층만 남아 있습니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AD 634년)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은 전합니다. 분황사(芬皇寺)는 한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향기가 나는 황제의 절이라는 뜻입니다.
선덕여왕은 여자가 왕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아주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당나라 태종의 멸시였습니다. 당태종은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모란 그림을 보내는데 여기에 벌과 나비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당태종이 진평왕에게 보낸 모란 그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덕여왕은 당태종이 자신을 향기가 없는 꽃에 비유하였다고 생각하여 아주 불쾌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절을 짓고 이름을 분황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향기가 없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사찰의 이름을 빌어 선포한 셈입니다.
↑대구 부인사 숭모전에 봉안된 선덕여왕 영정.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다분히 호사가들의 세속적인 취향을 반영한 것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모란이 향기가 없는 꽃도 아니며, 또 당시의 그림 상징 체계상 모란에는 나비를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분(芬)은 높이 솟아 오른다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여왕 즉위 시의 국제정세와 연관지어 신라의 국운이 사방으로 높이 뻗어나가기를 기원하면서 지은 사찰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당시는 임금이 곧 나라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분황사는 황룡사구층목탑과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여하튼 선덕여왕과 관련지어 분황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게 나올수 있습니다.
↑2013년에 봉행된 대구 팔공산 부인사의 선덕여왕 숭모제.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이었습니다. 덕만은 부처의 법을 널리 펴기 위하여 일부러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 8만 4천 우바이(출가하지 않고 불법을 지키는 여자 신도)의 우두머리가 된 인물이라고 열반경은 말합니다. 진평왕은 자신의 이름도 정반왕을 본받아 백정으로 하고 왕비도 마야부인으로 칭하였습니다. 스스로 부처의 부모라 자처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지 못하여 후계자 문제로 매우 고심을 합니다.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준 전례도 있었지만 성골은 덕만공주가 유일하다는 논리로 후계자를 정합니다. 그러나 구귀족세력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은 칠숙의 난을 겪으면서 반대파가 숙청됩니다. 1 년 뒤에 덕만공주는 왕위에 오르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제천시 장락동 7층 모전석탑. 이 탑으로 분황사9층탑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보다 규모가 크고 층 수가 높았으니 훨씬 더 웅장하였을 것입니다.
신라는 23대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고 난 후 과히 열풍이라고 할 만큼 불교에 경도됩니다. 법흥왕 자신도 출가하여 법공이라는 법명으로 흥륜사에 머물었습니다. 24대 진흥왕 역시 말년에 출가하여 법운이라는 법명으로 영흥사에서 수도하였으며 왕비 사도왕후 박씨도 이를 본받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 묘법이라는 법명을 받고 진흥왕 사후에도 계속 영흥사에 머물렀습니다.
26대 진평왕과 왕비 역시 부처의 부모와 같은 이름을 가질 정도로 불심이 깊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라의 불교는 급속히 세력을 넓혀갔고 그 성장의 외형은 사찰 건립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팽창할수록 재래 종교인 신도(神道)를 신봉하던 구귀족들의 반발도 극심하여졌습니다. 자연히 왕권 대 귀족, 불교 대 신도라는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의 장려는 곧 왕권의 강화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사찰 건립은 왕실에서 주도하였고 그 규모가 귀족들의 재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입니다.
↑분황사는 당시 신라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황룡사 옆에 건립되었습니다. 황룡사라는 왕실의 사찰이 있었는데도 굳이 그 옆에 이 분황사를 지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여러 가지로 해석이 분분합니다. 창건 당시 분황사는 황룡사의 3분의 2 정도의 크기로 규모가 그리 적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선덕여왕이 왕에 올랐을 무렵 신라는 구귀족들과 새로이 등장하는 귀족들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이미 진평왕 때 칠숙의 난을 겪은 신라는 후계 여왕에 대하여 반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 때 분황사를 건립한 것은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은 불교를 전면에 세워 백성들과 승려들의 정치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선덕여왕 재위 시에 건립한 사찰이 20여 개가 넘었습니다.
↑북천 제방에서 찍은 분황사 모습. 또 하나 흥미있는 학설은 분황사의 건설이 북천의 범람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입니다. 타당성이 있는 견해라고 생각이 듭니다. 황룡사나 분황사가 건립되기 이전에는 이 지역이 거의 늪 지대였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지금은 경내가 많이 축소되었지만 당시에는 경계가 북천에 닿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중앙에 서 있는 작은 나무 부근의 우물에서 1964년 발굴 작업 시 20여 구의 목이 없는 불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모전석탑 감실에는 불상이 있습니다. 젊고 준수한 미남형의 석불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몸체와 머리 부분의 색이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불상은 머리 없는 불상으로 이곳에 서 있다가 최근에 불두(佛頭)를 얻었습니다. 2012년까지는 감실에 머리 없는 불상이 있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머리를 얹은 것은 이삼 년이 채 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런데 이 불상도 원래는 이 자리가 제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석탑을 보고 기도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근래 불상을 들여 놓았다고 합니다. 아마 1965년 첫 발굴 작업을 하면서 뒷편 담 북쪽 우물에서 출토된 불상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분황사탑 네 귀퉁이를 지키고 있는 사자상. 동쪽과 남쪽 모퉁이의 석상은 사자와 닮지 않았다고 물개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석상이 물개가 되어야 할 이유는 그리 선명치 않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불력으로 막기 위하여 동남쪽에 물개 2기를 세웠다고 합니다만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선 이 석상을 물개로 보기엔 다리가 너무 튼실하고 꼬리가 깁니다. 그래서 이 석수를 암사자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탑을 지키는 동물로 물개를 세운 전례가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탑의 북서쪽에 세워진 석조 사자상을 보면 앞의 조각과는 그 모습이 확연히 구분이 됩니다. 이런 것은 개개인이 보이는 대로 보면 될 것입니다. 자료를 찾으면서 읽은 글인데 답사하는 분이 '해설사에게 앞쪽(정문쪽)에 있는 것이 물개냐고 물었더니 화를 막 내시더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물개인지 암사자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이 사자상과 다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자와 물개를 떠나서 석탑 기단 네 귀퉁이에 서 있는 석수가 원래 저자리에 있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입니다. 탑을 축조할 당시는 기록이 없으니 원형을 짐작할 수 없고, 병란(특히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에 탑이 무너져서 보수하지 못 한 채 일제강점기까지 내려왔습니다. 1915년에 이 탑을 보수하는데 그 때는 탑 주위에 석상이 네 기가 아니고 여섯 기가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석상들이 삼국시대 작품이 아니라 훨씬 후대인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석수는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면 여기 석사자는 어디서 가지고 온 것일까요? 서두에서 잠깐 언급한 북천 건너편에 있는 헌덕왕릉이나 봉덕사 등지에서 가지고 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삼국시대에는 탑 주위에 사자상을 세운 예가 없고, 이곳에 있는 석사자의 조각 기법이 괘릉의 석사자와 유사하여 신라 하대에 조성될 것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1910년대의 분황사 모전석탑. 석사자는 기단 아래 내려 앉아 있고 인왕을 새긴 판석은 무너져 받침목으로 지탱하고 있습니다. 탑을 둘러보는 사람은 복색으로 보아 일본인 같습니다.
↑허물어지기 직전의 분황사를 1915년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때 같은 크기의 석상 네 기가 석탑의 기단의 네 모서리로 올라가고 조금 작은 크기의 석사자 두 기는 경주박물관으로 보냈습니다. 또 탑을 해체하던 중 2층 탑신에서 사리함을 찾았는데 여기에서 사리 뿐만 아니라 바늘과 바늘통. 가위. 족집게 같은 여성 장신구들이 같이 발견되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여성과 관련된 공양물이 나온 것으로 보아서 분황사와 선덕여왕이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네 기의 사자 석상을 모퉁이에 올려 놓은 것은 바로 탑 중앙 감실을 사방에서 지키는 인왕(금강역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생생한 근육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한 금강역사는 이 탑에 생기를 불어 넣어 줍니다. 이 인왕상은 삼국시대 조각의 걸작으로 평가됩니다.
↑생동하는 인왕상과 함께 이 탑에 생명력을 주는 것은 저 단단한 벽돌 모양의 돌입니다. 양질의 진흙을 구할 수 있는 중국과 달리 신라는 벽돌을 구울 수 있는 좋은 흙을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대신 구하기 쉬운 돌로 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중국처럼 벽돌 모양의 돌로 탑을 쌓다가 이윽고는 우리나라 특유의 석탑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됩니다. 분황사 석탑의 돌은 두께와 크기, 그리고 색깔이 천편일률적이지 않습니다. 쌓아 놓은 돌 그 자체가 리듬감을 주고 있습니다. 리듬은 곧 생명의 특성입니다. 다양한 것이 모여 리듬을 형성하고 그것이 생명력을 고양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탑 하나만 두고도 9층이었네 7층이었네, 사자가 원래부터 있었네 없었네, 물개네 암사자네 등등 이런 분분한 의견들이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좀더 정확하고 타당한 것을 찾으려는 지적 호기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저건 사자야', '저건 사자라고 생각해야 돼, 물개라고 생각하면 안돼.' 숨막히는 세상이 되겠지요. 답사를 다닐 필요도 없겠지요.
↑지금 분황사는 무너진 모전탑과 그리고 보광전 외에는 옛모습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사방에 이런 부재들이 남아 있습니다. 1965년에 발굴작업을 하면서 사찰 뒷담에 30미터 가량 떨어진 우물에서 20여 구의 불상을 발견하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분황사의 발굴 작업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08년까지 8차에 걸친 발굴 작업을 통하여 중문이 지금보다 동남쪽으로 더 나가서 있었다는 것과 금당이 品자 형 삼금당 체제에서 중앙 일금당체제로 바뀌었다가 다시 허물고 지금의 보광전을 건립하였다는 것을 밝혀 냈습니다. 동쪽 담장 바깥에 비닐 덮개로 덮어 놓은 돌과 흙이 것이 최근 발굴의 흔적입니다.
↑당시의 부재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남쪽과 동쪽 담장 아래 널려 있습니다. 복련이 새겨진 하대석이 많은 것으로 보아 석등이 많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석등이 많았다는 것은 사찰의 규모도 그만큼 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임시 출입문에서 본 분황사 보광전.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불당입니다. 조선 중기 이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광전에는 약사불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통상 보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으나 분황사에는 약사여래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고통과 재앙에서 구제한다는 부처가 바로 약사여래불입니다. 협시보살로는 일광보살·월광보살이 있습니다.
↑이 불상은 1609년 조선조 광해군 때 조성되었습니다. 원래 이 분황사에는 신라 경덕왕 때 30만 6700근으로 만든 금동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기록에 있지만 현재는 행방이 묘연합니다. 지금의 약사불은 좌상이 아니라 입상입니다. 동 5360근을 들여서 3.45 m의 크기로 조성하였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1998년 보광전 보수 작업 시 상량문이 발견되어 밝혀 낼 수가 있었습니다.
↑보광전 약사여래 오른편에 원효의 영정이 걸려 있습니다. 이 영정은 해방 전 어느 거사가 이곳에서 200일 기도를 하는데 꿈에 원효가 나타가 그 모습을 그렸다고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실내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바깥에서 찍어서 그리 선명하지는 않습니다.
원효는 이곳에서 화엄경소를 저술하다가 자리를 박차고 저자거리로 뛰어 나가 민중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합니다. 그는 스스로 소성거사라 칭하며 표주박을 두드리고 춤을 추면서 불교의 어려운 교리를 쉽게 풀어서 민중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이 원효의 춤을 무애무라고 부릅니다.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라는 화엄경의 구절에서 따 온 말입니다.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뜻입니다.
↑골굴사 원효성사 화엄종 타종식. 지난해 10월 16일 봉행되었습니다.(자료출처-템플스테이 골굴사)
이후 원효는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고, 자신의 깨달음을 중생에게 베풀면서 비승비속(非僧非俗 스님도 아니고 속인도 아님)으로 살아갔습니다. 말년에 그는 고선사에도 머물다가 70세에 혈사에서 입적을 하였습니다. 혈사는 지금 어딘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불교 무술로 이름이 높은 골굴사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골굴사에서는 1300년 전의 원효를 기리며 '원효성사 화엄종'을 만들어 범종각에 봉안하였습니다. 이 종에는 원효 사상의 핵심인 '일심', '화쟁', '원융무애'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어사에 봉안되어 있는 원효의 영정. 일본 고산사의 영정을 참조하여 제작한 듯합니다.
원효가 입적하자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골을 갈아서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고 지극히 모셨습니다.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면 소상이 고개를 그 쪽으로 돌렸다하여 고상(顧像)이라고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당시까지 분황사에 원효의 소상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소상은 없고 어느 거사가 그린 원효 영정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금당지와 모전 석탑 사이에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경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라 우물'이라는 별칭이 붙은 팔각석정으로 일명 호국삼룡변어정(護國三龍變魚井)이라고도 불립니다. '나라를 지키는 세 용이 물고기로 변한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신라의 호국룡이 중국 사신의 주문에 걸려 물고기로 변하여 잡혀가는 중에 원성왕이 꿈을 통해 이를 알고 다시 찾아 왔다는 전설이 깃들여 있는 우물입니다. 전설이라고 하더라도 좀 어리둥절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용을 오히려 국왕이 보호한다? 참으로 변변치 못한 호국룡인 듯합니다. 이쯤되면 호국룡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원성왕은 바로 앞서 이야기하였던 북천 범람과 관련이 있는 왕입니다. 원성왕 김경신은 상대등(혹은 시중이라고도 함) 김주원이 북천을 건너지 못하는 틈을 타서 왕위에 오릅니다. 결국 김주원은 경주에 살지 못하고 강릉으로 가서 명주군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물 바깥은 불교의 팔정도를 상징하는 팔각, 안은 원융무애를 상징하는 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호국룡 설화는 아무래도 원성왕의 왕권 강화를 노린 조작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호국룡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측이 강릉으로 도망간 김주원의 아들들로 설정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의심을 확신해도 무리가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설화의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이 우물은 신라 우물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물인지는 더 조사하여 보아야 하겠지만 그 원형이 보존된 가장 아름다운 우물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습니다. 이 우물물은 얼마전까지도 식수로 사용하였다 합니다.
↑모전석탑과 삼룡변어정 사이에 '대성화쟁국사비 받침'이 있습니다. '화쟁국사비부'라고도 합니다. 대성화쟁국사는 고려 숙종이 원효대사에게 내린 시호입니다. 원효는 자장에 이어 이곳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불교사에 길이 남은 '화엄경소'와 '금광명경소'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숙종은 원효에게 시호를 내려 이곳에다 비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는 숙종 당대에 세워지지 못하고 후에 명종 때 건립이 되었습니다.
↑현재 비는 없고 비부(비받침)만 있습니다. 이 비부는 조선시대 금석학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가 고증을 하고 여기에다 직접 글을 남겼습니다. 당시 추사는 경상도 관찰사인 아버지를 따라 대구에 와 있으면서 경주에 들러 이 비를 직접 고증하고 글을 남겼습니다. 차화정국사비부 김정희 此和靜國師之碑趺 金正喜(이것은 화쟁국사 비받침이다. 김정희)
그런데 이 비 안내문에는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적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신라라는 글자는 보이지 않고 쟁(諍)라는 글자도 비부에는 정(靜)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또 비적(碑蹟)이라고 하였는데 적(蹟)자로 보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습니다. 혹자는 적(蹟)은 적(跡)과 같이 통하니 跡을 蹟으로 표기하였다고도 하나 글씨를 자세히 보면 이 또한 타당성이 없습니다. 본문 마지막 글자는 부(趺)와 통하는 부(跗)로 보아 차화정국사지비부(此和靜國師之碑趺)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금석문의 대가이면서 불교 이론에도 밝은 추사가 화쟁(和諍)을 왜 화정(和靜)이라고 썼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전서를 보면 말씀 언(言)과 푸른 청(靑)이 비슷한 모양인데...... 그런 쪽으로 전문 지식이 없어서 무어라 말 할 수가 없습니다.
↑경내를 둘러보고 출입문으로 나오다가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대종각이 있습니다. 이 종각 건물이나 여기에 걸린 종이 문화재로서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새겨진 향가는 당시 신라의 신앙과 분황사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종각은 1980년대에 불국사에서 옮겨온 것이고 종은 1990년에 제작된 것입니다.
↑도천수관음가가 새겨져 있는 분황사 동종. 분황사에 대한 이야기는 후대에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왼편 금당 벽에 그려진 관세음보살이 영험하여 기도를 하면서 노래를 불렀더니 눈먼 아이가 눈을 떴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지어 부른 노래를 '도천수관음가'는 '천수대비가'라고도 하는데 삼국유사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당시 관음보살상은 왼쪽 법당의 뒷벽에 그려져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솔거가 그렸다는 '분황사 관세음보살상'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창건 당시 분황사는 품(品)자 형 금당 배치로 탑을 앞에 두고 금당 세 동이 중앙, 좌,우로 벌여 있었습니다.
↑분황사를 나와 황룡사지로 가는 길에 만나는 당간지주. 분황사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는데 최근 발굴 작업을 통하여 분황사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해 졌습니다.
↑이제 분황사의 영역을 벗어나 황룡사 구역으로 들어섭니다 이곳은 황룡사지 구층탑이 있던 자리입니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인 553년에 착공하여 17년만인 559년에 완공됩니다. 그러나 당시 신라 최대 규모의 사찰인 만큼 계속하여 보수를 하거나 증축을 그 완공 시점을 정확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진평왕 6년인 584년에 장육존상을 봉안할 금당을 개축하였고, 선덕 여왕 14년인 645년에 중국에서 유학 중이던 자장율사가 돌아와 구층탑을 쌓으면 주위 아홉 나라에서 고개를 숙일 것이라고 하여 여기에 거대한 탑을 조성하였습니다.
↑발굴 작업이 끝나고 정비된 황룡사지. 1976년부터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황룡사 부지는 공원 부지로 결정되고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 발굴에 참여한 조유전 박사는 처음에는 3년을 계획을 하였으나 사찰의 규모가 예상 외로 크고 넓어서 10년 가까이 발굴 작업이 이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진흥왕 때 궁궐을 짓기 위하여 이곳의 늪지를 메우던 중에 아홉 마리 용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은 궁성 건립을 포기하고 사찰을 조성하기로 하였습니다.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황룡사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후에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구황동이라고 하였습니다. 아홉 마리 황룡이 나타난 곳에 세운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일설에는 이곳에 황(皇)자가 들어간 사찰이 아홉이나 들어서 있어 구황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발굴 결과 황룡사는 동서 288 m, 남북 281 m 넓이 80,928㎡(25,000평)로 신라 최대의 사찰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 칸 중문을 들어서면 7칸 목탑이 있고, 목탑 뒤로 9칸 중앙 금당이 있으며 그 뒤로는 11칸 강당이 있습니다. 강당에서는 백고좌강회라고 하여 왕실에서 당대 최고의 고승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었습니다.
이곳에서 자장은 7일 밤낮으로 '보살계본'을 강론하였고 원효는 '금강삼매경'을 강론하였는데 이 원고가 유명한 '금강삼매경론'입니다. 원효가 이곳에서 강론을 할 때 법석에 올라 "지난 날 백 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는 내 비록 참여하지 못 했지만,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지름에 오직 나만이 가능하구나" 하고 모인 대중들에게 일갈을 하니 참석한 승려들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옵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한 황룡사 전경. 발굴 작업을 토대로 하여 황룡사를 컴퓨터그래픽으로 재현한 모습니다. 이 모습은 신라왕궁영상관에 자세히 볼 수가 있습니다. 신라왕궁영상관은 반월성 동편 입구에 있습니다. 옛 인왕파출소를 리모델링하여 2013년부터 상영하고 있습니다. 3 D 영상 제작에 5억 2천만원, 영상관 리모델링 비용에 3억 3천만원 모두 8억 5천만원이 투자되었습니다.
↑'황룡사구층탑 건립 아비지 기념탑'이 목탑지 옆에 서 있습니다. 신라는 구층 목탑을 세우기 위하여 백제의 목수인 아비지를 초청해 왔습니다. 아비지가 이 탑을 조영할 때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고는 공사를 중단하였는데, 그러자 웬 노승과 거대한 체구의 역사가 나타나 기둥을 세우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에 아비지는 이것이 신불의 뜻임을 알고 곧 뉘우치고 탑을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 삼국유사에 전해는 이야기입니다.
↑기념사진을 찍기 위하여 황룡사9층목탑 심초석 덮개돌 주위에 모였습니다. 목탑은 석탑과 달리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둥이 가운데 세워지게 되는데 이 기둥(심주)을 받치는 돌을 심초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심초석 덮개돌을 또 무엇일까요? 심초석 위에는 기둥이 서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덮개돌이 있을까요? 여기에는 사연이 많습니다. 찬찬히 그 사연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위의 사진 심초석과 덮개돌을 보면 덮개돌이 원래 이곳에 있을 자리가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목탑지에는 사방 64 개의 초석이 있고 그 중앙에 심초석이 놓여 있습니다. 다른 초석들은 덮개돌이 없는데 유독 심초석 위에만 10톤나 되는 무거운 돌이 놓여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덮개돌이 놓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탑을 조성할 때 심초석에 사리함을 넣을 수 있는 사리공을 만들고 그곳에 사리장엄구를 넣은 후 그 위에 기둥을 세웠습니다. 위에 무거운 기둥이 있어서 사리함은 안전합니다. 그런데 1238년 제 2차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구층목탑을 불타고 맙니다. 기둥이 불탔으나 사리는 심초석 안에 있었고 그 위에 돌로 만든 사리함덮개가 있으니 사리함은 안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둥이 없어졌으니 사리함덮개돌만 들면 안에 있는 사리함을 꺼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리함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거운 덮개돌을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곧 복원하리라는 생각을 당연히 하였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사리함을 다른 곳으로 옮겼을테니까요.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황룡사는 복원되지 못합니다. 워낙히 큰 공사인데다가 고려의 국력은 이미 쇠퇴하였고 이어 들어서는 조선은 반불교적인 왕조였습니다. 황룡사같은 큰 사찰을 개인이 복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적인 사업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연히 절터는 폐허가 되고 사리함은 사람들 머리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조선왕조로 접어들면서 이곳에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마을이 형성되면서 황룡사지에는 자연스럽게 농가가 들어서고 농가 주위는 전답으로 변하여 갑니다.
그러다가 1964년에 황룡사지구 정비사업이 시작되면서 이곳에 있는 민가가 철거되기 시작합니다. 민가의 담장을 철거하는 중에 그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심초석의 덮개돌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 무거운 돌을 들어 낼 수가 없으니 한 농가에서 담장의 일부분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담장이 철거되자 목탑지 중앙에 놓인 심초석과 덮개돌이 고스란히 드러나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위 사진은 문화유산TV '황룡사구층탑 심초석의 기구한 사연'방송 영사을 캡쳐한 것입니다.)
↑그런데 탑이 불탄 심초석 자리 위에 저리 무거운 돌을 옮겨 놓았다는 것은 문화재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만 생각해도 저 아래 귀중한 것이 들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터인데 정부는 그냥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여 두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해 12월 17일 밤. 도굴꾼들은 심초석 위의 덮개돌을 잭을 사용하여 옆으로 눕히고, 사리함덮개돌을 들어내고 사리공 속에 1300년 동안이나 안전하게 보존되어 오던 사리함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정부에서 민가를 헐어내지만 않았더라도 도굴될 리 없었던 귀중한 문화재가 일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습니다.
↑도굴꾼들은 2년 뒤 1966년 9월 5일 불국사 석가탑의 사리장엄구를 도굴하려다 붙잡힙니다. 다보탑 도굴꾼들을 잡아 다른 범죄를 조사하던 중 이들이 황룡사 목탑지의 사리함을 도굴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일당들을 추궁하여 사리장엄구 일부를 회수하였으나 사리와 사리내함은 영영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굴범을 지휘한 자는 30대 중반의 남자로 경주박물관에서 수위로 근무를 하다가 군복무미필자로 밝혀지면서 퇴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둑질도 알아야 해 먹는다고.......
↑황룡사찰주본기. 도굴범들에게 회수한 것으로 황룡사의 건립과, 탑이 기울어 경문왕 11년 871년에 수리한 내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찰의 건립 내역은 삼국유사의 내용과 대동소이합니다. 선덕여왕이 자장율사의 주청을 받아들여 백제 아비지를 불러 공사를 하게 하고 이간(伊干)용수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탑의 높이는 상륜부를 포함하여 80 m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이 찰주본기는 접으면 사각통의 모습이 됩니다. 사리를 담은 사리내함을 감싸는 사리외함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도굴범으로부터 찰주본기는 회수하였지만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은 사리와 사리내함은 회수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도굴에는 국내의 거대 재벌이 개입하여 있었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사리장엄구 일부를 되찾고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황룡사지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국내에서 단 세 대밖에 없는, 100톤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대형 크레인을 동원하여 심초석 아래를 발굴하였습니다. 발굴 작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리함은 이미 도굴꾼에 의하여 세상에 드러나 버린 다소 맥빠진 작업이었지만 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대형 크레인으로 심초석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이 아래서 여러 가지 지진구들이 발굴되었습니다. 지진구(地鎭具)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땅의 기운을 누르기 위한 물건'이라는 뜻인데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할 적에 토지신을 달래기 위하여 값진 물건을 땅에 묻는 것을 의미합니다. 칼, 가위, 청동그릇과 청동거울, 중국에서 수입한 백자 등의 생활용품과 팔찌, 귀고리, 허리띠 등의 장식품이 출토되었습니다. 여기서 나온 지진구는 7세기 초기 신라의 생활 수준이나 기술 수준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어서 가치가 높습니다.
↑이곳은 목탑지 맞은 편 북쪽에 있는 중앙 금당터로 뒷편 가운데 커다란 돌이 세 개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황룡사 장육존상을 비롯한 삼존불을 봉안안 대좌입니다. 부처는 보통사람의 체구보다 두 배가 크다고 하여 1장 6척의 크기로 조성하였는데 이를 장육존상이라고 합니다.
신라는 당척과 고구려척을 때에 따라 사용하였는데 1척이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당척은 1 척이 29.694 cm, 고구려척은 1 척이 35.6328 cm 입니다. 황룡사 건축은 고구려척을 사용하였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그렇다면 장육존상은 대좌까지 합산하면 6 미터에 가까운 크기입니다. 황룡사 장육존상은 구층목탑과 진평왕의 천사옥대와 더불어 신라 삼보라 일컬어졌습니다. 신라 삼보 중 두 점이 황룡사에 있었습니다. 장육존상은 조선시대까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나 현재는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일설에는 몽고 침입 때 구층목탑과 함께 소실되었다고도 합니다.
↑장육존상 좌우로 부처의 10대 제자들의 상을 세웠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리고 이 금당의 뒷벽에 유명한 솔거의 그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황룡사지에서 발굴된 유물은 약 4만 점에 이른다고 합니다.(귀중한 사료가 되는 유물은 경주박물관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 거대한 망새입니다. 높이가 1.8 미터에 이릅니다. 너무 커서 하나로 제작하지 못하고 상 하단으로 나누어 제작하여 나중에 둘을 합체하였습니다. 망새는 전통 건축에서 용마루 양쪽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를 말합니다. 치미라고도 하는데 치미(鸱尾)는 올빼미 꼬리라는 뜻으로 망새의 모양이 올빼미 꼬리와 비슷하여 붙인 이름입니다.
크기로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는 경덕왕 14년인 754년에 동 50만근으로 제작한 황룡사대종입니다. 대종은 몽골군이 약탈하여 가다가 강물에 빠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그래서 그 강을 대종천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대종천은 토함산에서 감포 앞바다로 흐르는 강입니다.
↑황룡사지 구층탑이 본격적으로 복원이 된다고 합니다. 복원이라고 해야할지 중건이라고 해야 할 지 애매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구층탑 원래의 모습을 추정할 뿐 이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무리한 사업이 아닌지. 문화재의 복원에 관심이 있는건지 아니면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인지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건축 공사가 목적인지. 좀더 신중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룡사를 돌아보고 다시 월성으로 출발합니다.
↑황룡사에서 월지(안압지)를 거쳐 월성으로 가는 길은 길이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원래의 도로의 인도가 폭이 좁아 바깥으로 나무 데크를 설치하였습니다.
↑나무데크 위를 달리니 감촉이 아주 좋습니다.
↑일제는 월성과 황룡사 사이를 가로지르는 철도를 놓았습니다. 동해남부선입니다. 이 철도가 놓이면서 일본에서 건너온 도굴범은 제 세상을 만난 듯 경주의 고분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이때 도굴되거나 암거래되어 국외로 유출된 문화재가 얼마인지 파악조차 어렵다고 합니다.
↑길 맞은편에서도 발굴조사가 한창입니다. 월지와 동궁의 부속건물에 해당하는 건물터로 추정됩니다. 이곳과 동궁 사이로 철로가 통과하고 있습니다. 이 동해남부선을 보고 있노라면 일제가 의도적으로 경주를 파헤쳐 놓았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서러운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까?
↑길을 건너기 전에 잠시 쉬고 있습니다.
첫댓글 와....!!...정말...많은 자료와 해설에 놀랍습니다..
도서관 에서 '길위의 인문학' 할때 들은 내용도 많이 있어서 다시 한번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