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x9Xm_nR4310
꽃이 아름답게 핀다거나 새가 구슬프게 우는 것이, 알고 보면 꽃이나 새의 뜻은 한 톨도 반영된 바 없고, 그 모든 것이 오로지 다 내 마음 내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눈치 채는 일은 무척 쉬운 일이었지만, 그 쉬운 것 진즉에 알아 놓고도 이렇게 세상 빙충맞게 산다는 것은, 평생을 두고도 매번 참 이해하기 곤란한 일입니다.
잠시 들여다보니 그렇긴 합디다. 꽃이나 새가 내게 다가와 저들이 저토록 끊임없이 피고 우는 것에 대하여 어떤 사연이 있어 그렇다는 징후 단 한 마디 내게 전언한 적 없었으며, 오히려 나와 전혀 무관하게 살다 간다는 것을. 나 또한 결정적으로 저들에게 내가 끊임없이 피고 우는 것에 대한 그 어떤 빌미도 그들에게 제공한 적 없었다는 것을
이거 다 생이라는 난수표의 속임수라고 치부하고 오랫동안 그걸 또 저자거리에 외고 다니느라 아까운 시간만 또 수월찮게 또 까먹었는데, 그러고도 내가 내 자의로 그 무엇을 속였다는 게 좀처럼 실감나지 않아, 요즘도 나는 인간이란 것은 그런 식으로 인지상정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핑계로 자기합리화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 그리 되었으니 그러면 이제 나는 나의 죄목에서 '인지상정'이라는 그 놈이 나를 속였다는 것으로 치부해도 될런가요? 어쩔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어차피 그 외침은 내 자신의 삶 속에서 내가 내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 누가 나를 내 죽음으로 끌고 갈 자 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없는 그것으로 나도 그들도 결국은 서로에게 아무 것도 아니므로,
그리고 이게 조물주의 입장에서는 자연과 내가 서로 조화로울지 몰라도 각개의 입장에서는 서로에게 조화로움을 주려고 작정하고 사는 것은 아니므로, 이즈음 나는 꽃이나 새들이 그들 주관적 측면으로는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사는지 몰라도, 내 방향으로는 결코 아름답게 피지도 않고 구슬프게 울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젠 없습니다. 꽃과 새와 나 사이에 관련된 서로의 교류를 그려 보일 것은 이제 내게는 없습니다. 그것의 실체는커녕 추상으로도 분명 나타낼 수 없어. 눈 부릅뜨고 자세히 보면 그것은 단지 오로지 그들과 내가 아무런 관련 없이 여기 이 세상에 왔다 가는 것만 보일 뿐, 다른 어떠한 생명론적 접근이나 철학적 담론도 이제 개입될 계제는 전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랬어도 이미 그 무수한 꽃잎과 새들의 음률로 중과부적 내 가슴을 숱하게 밟고 넘어간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어찌하고 살았는가를 되물으면, 할 말이 없는 이 일을 대체 어찌했으면 좋을지 참으로 난감하기만 합니다. 이게 해명되지 않으면 난 쓰레기에 불과하거든요. - 音 루이스 트라베셋 : 아르보 푈트 작곡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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