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5일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6년째다. 대한민국은 전쟁 후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도약하면서 전쟁의 상흔을 어느 정도 씻었다. 하지만 북한은 여전히 핵무장을 고집하며 적화통일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본보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의 기억을 더듬어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할 그날의 아픔을 되새겨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
“한국 사람으로 6.25를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 민족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미래는 어둡다.
캐나다 땅에 살고 있다지만 후세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교육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늘어야 한다.”
토론토 교민 박근실(85)씨는 19살 때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당시 그는 서울에서 중앙청 법무부 용도계 사환으로 일하고 있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터졌으나 박씨 가족들은 미처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다. 서울 인왕산 부근에 살던 박씨는
가족을 위해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 인민군에게 잡혀 끌려갔다.
그는 9월28일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휘문고등학교에 억류됐다. 인천 상륙작전 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인민군들은 퇴각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도망치는 포로들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총살을 하는 등 서울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그도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인민군들이 휘문고에 억류했던 포로들을 끌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유엔군의 폭격이 시작됐다. 포로들과 인민군 모두 혼비백산하는 사이 박씨는 학교 화장실로 뛰어가 숨었다. 잠시 소란이 잠잠해진 틈을 타 밖으로 나왔는데, 때마침 철수하던 인민군 보초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왜 여기서 머뭇거리고 있느냐”는 인민군의 호통에
화장실이 급해서 다녀왔다고 둘러댔으며, 창덕궁쪽으로 빨리 따라 가라는 인민군의 지시를 어기고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박씨는 “뒷날 들었는데, 그날 끌려간 포로 가운데 상당수가 북한산 기슭에서 총살 후 암매장 됐다고 한다”며 치를 떨었다.
인민군들은 사람을 무참하게 죽이며 포악하게 굴었지만 서울을 뺏기고 달아날 때는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고 박씨는
회고했다. 미군들이 잔당을 쫓아가며 소탕작전을 벌이자 뒤처진 인민군은 2~3명씩 짝을 지어 숨어 있다가 반항하기도 했다.
박씨는 "인민군들이 국군에게 사살되는 장면이 뚜렷이 기억난다"고 목격담을 전했다.
서울을 되찾고 잠시 평화가 오는가 했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세는 다시 역전됐다.
박씨는 국군이 후퇴하는 것을 보고 경찰의용군으로 자원 입대했다. 그는 203부대원으로 지리산 무장공비 토벌작전에도 참가했다.
이후 유성경찰서로 이동해 미군의 통신부대 경비를 맡았고, 전쟁 막바지인 22세에 육군으로 징집돼 논산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받고 통신병으로 참전했다. 1951년 1월 20살에 자원 입대 후 1958년 통신하사관으로 전역할 때까지 젊은 시절을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 보낸 셈이다.
그는 이때 배운 통신기술로 1968년 캐나다에 이민을 와 ‘벨캐나다’에서 25년간 근무하다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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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사랑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