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북한의 아리랑 실상과 인식
Ⅲ. 강성부흥아리랑
Ⅳ.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
Ⅴ 맺음말
Ⅰ머리말
‘북한의 아리랑’이란 명제는 ‘북한’과 ‘아리랑’이 복합됨으로 해서 보편적인 아리랑이 아닌 특수한 아리랑이 되고 만다. 이는 특수자이자 개별자로서의 북한 아리랑이 되어 분단 이전부터 공유했던 아리랑이 북한의 문예이론에 의해 개변케 된 것과 또 다른 갈래로 창작(재형상)된 아리랑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북한의 아리랑”이라고 할 때는 분단 이전의 아리랑과 그것이 북한화한 아리랑, 거기에 북한에서 창작된 아리랑 까지를 포함하는 다의적인 말이 된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의 아리랑은 우리의 일반적인 개념 즉 민요의 하나로 여러 장르로 확산되어 형성된 층위 또는 문화기호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일종의 문화현상으로 보게 된다. 그러니까 음악 이외의 다른 구조에 의해 형성된 층위라는 것이다. 이로서 우리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차이를 놓고 옳고 그름을 떠나 먼저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는 각각의 차이에 대한 가치판단을 놓고 많은 소모전을 벌여 왔음이 사실이다.
그래서 아리랑을 대상으로 하여 그 차이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고 본
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각각의 차이를 강조하다보면 서로의 사정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그래서 결국은 그 차이의 극복 의지를 둔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차이의 가치’를 따지는 것은 유보하고 차이를 넘어서는 ‘차이의 대화’를 전제로 해야 이번의 북한 <아리랑>을 의미 있게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오늘의 이 논의가 유익한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무었보다도 먼저 북
한 아리랑의 현상이나 양식의 독자성과 이것을 보편적 문화담론으로 가져
와 논점인 북한의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이하 대공연으로 약함) <아리랑>과 우리의 인식간의 간극을 좁혀야 할 것이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민요론이나 사회학적 이론으로 ‘차이’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기보다는 양식과 현상의 제시에 비중을 두어 살피기로 한다.
그래서 먼저 북한의 아리랑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살펴보고 최근 북한이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창작가요 강성부흥아리랑과 오늘의 논점인 대공연 <아리랑>을 살펴보기로 한다.*
*주:다음 제2장 부분의 인용문은 북의 관점에서 서술된 것을 인용한 것임.
Ⅱ 북한의 아리랑 실상과 인식
분단이후 본격적으로 음악 문제를 제기 했던 1954년 7월의 <인민음악 유
산 계승과 현대성> 그리고 음악에 있어서 탁성의 문제와 남여 성부의 분리확립 문제등을 논의 했던 10월의 대토론회 <고전음악발전을 위하여>가 있던 전후 시기까지도 아리랑은 민요가 음악의 복판에 있다는 원칙하의 한 개별자였다. 그러다 1962년 나운규의 전기 《나운규와 그의 예술》의 발간으로 영화<아리랑>과 민요의 대표성을 인정받는다.
이로부터 70년대 들어 김일성의 ‘간삼봉전투’*의 아리랑이야기가 일반화** 되면서 71년 혁명가극<피바다>나 72년 <밀림아 이야기 하라>와 76년 배합관현악의 상징인 관현악곡<아리랑> 등으로 형상화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8~90년대에는 남북 교류상의 한 단서(단일팀 단가)로 또는 김정일 인물 형상화(소설<아리랑>)의 필요성에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후 고난의 행군을 끝낸 강성부흥의 상징과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성사로 아리랑이 민족화해의 멧세지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김대통령의 평양방문시 공식 음악회 첫 레파토리가 관현악곡<아리랑>이었고, 곳곳의 환영음악중에 경상도아리랑· 영천아리랑· 통일경축아리랑이 강조되었음에서 짐작할 수가 있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2001년 들어 강성부흥아리랑을 있게 했고 금년의 대공연 <아리랑>에 주제로 까지 연결된 것이다.
이상이 북한에서의 대략적인 아리랑의 중심이동 상황이다. 이는 북한이 견지한 아리랑에대한 기본 시각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아리랑에 대한 인식이 2000년 이전과 이후가 분명하게 구분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90년대 까지만 해도 저항성·투쟁성·통속성에 가치 중심을 두었는데 2000년 들어서서는 그것을 전제로 하긴 하되 그것을 극복한 결과로서의 부흥· 화해협력의 멧세지로 형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변화는 분명한 발상의 전환이라고 본다.***왜냐하면 이는 아리랑에 대한 인식의 변화라고 보기 보다는 미미하지만 북한 사회의 사고의 틀, 자체의 변화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변화에 대한 가치판단은 아직은 유보되어야 하지만 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이번 대공연<아리랑>은 분명히 기존의 대집단체조들과는 다르다고 보게 되고 또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이제 살피게 될 강성부흥아리랑의 실상에서 어느 정도는 확인케 된다. 다음의 인용문에서도 변화의 배경을 짐작할 수가 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으로 도치되는 북한 어법의 특징을 감안하면 이 짧은 문장 속에서 많은 것을 시사 받을 수가 있다.
“음악은 빈 바탕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지난 날 눈물 속에 불리운 <아리랑>은 당대사회의 비참하고 락후한 현실의 산물이다.”****
*주:《세기와 더불어》 제6권, 장백현 간삼봉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1937
년 6월 30일 오전8시, 일본 위만군혼성여단을 격파했고 이 과정에서 아리랑이 불렸다고 한다.
**주: 김일성의 “역사적 사건들을 줄거리로 하여 조선혁명의 발전과 함께 투쟁 속에서 자라나는 주인공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려낸다면 과연 하나의 대작이 되지않겠습니까”·에서 비롯되었다. 《사회주의문학예술론》·《북한의공연예술》·고려원· 서연호외·1990, 에서 재인용 하였음
***주: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 부정적인 측면을 강하게 드러냄으로서 증오심을 일게하여 군중 동원력을 얻었던 방식에서 긍정적인 것을 강하게 긍정하여 군중을 동원하려는 방식의 변화라고 볼 때 이를 의미있는 변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변화가 북한의 전면에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아리랑을 단서로 한 일부 문화현상에서는 보여 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주: <로동신문>· 2001· 8· 26· 4면, 이 글은 고 은 선생의 지론
인 “아리랑은 고난의 꽃”과 비교가 된다.
Ⅲ 강성부흥아리랑
1) 작사· 작곡 배경
2001년 8월 26일자 《로동신문》2면에는 <온 나라 인민이 즐겨 부르는 새로 나온 노래 강성부흥 아리랑>이란 제하(題下)에 악보와 함께 노랫말 3절이 발표되었다.* 작사 조선인민군협주단 작사가 윤두균, 작곡에 보천보전자악단 소속 작곡가 안정호 이다. 그리고 4면에는 <위대한 장군님시대의 명곡, 민족의 긍지 넘치는 기념비적 작품 -노래 강성부흥아리랑에 대하여>란 해설기사가 나와 있다. 필자는 박 철 김영철 최창일 공동으로 되어있다.
이어 같은 신문 이튼 날 8월 27일자 3면에 <노래 강성부흥아리랑에 접한 기쁨과 감격의 목소리>란 제하에 감상 보고문이 투고형식으로 게재했다. 기고자는 조선인민군관 문성락, 만수대예술단 지휘자 조정림, 검덕광산 책임비서 석덕현이다. 그리고 4면에서는 <민족음악사 발정의 큰 경사-21세기 조선의 모습을 반영한 걸작>이란 난에서 보통강 전기공장 현장의 아코디온 연주장면과 악보쾌도 사진이 게재 됐다. 그리고 이틀 후인 8월 29일자 4면에는 <민족적 흥취와 락관을 안겨주는 강성부흥아리랑>이란 해설기사가 있다. 이같이 동일 신문에 3일에 걸쳐 5회의 기사가 집중적으로 보도된 후, 한 달 뒤인 10월 《조선예술》에서 역시 악보와 가사, 평론, 수기, 반향 까지를 집중보도 하는 등 계속해서 각종 매체에 관련 기사를 내 보내고 있다.
이것으로 본다면 이 노래는 일반적인 가요 창작 발표와는 다른 형태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반듯이 김정일의 지시가 있었다고 보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으로는 확인된 바가 없다. 다만 간접적으로는 확인이 되는데 하나는 위의《조선예술》 기사와 총련기관지 《조선신보》2001년 10월 5일자 기사 내용에서다. 전자는 작사자가 쓴 수기 <새 세기에 첫 아리랑은 이렇게 나래를 폈다>인데 여기에서 발표 직전의 상황을 전하며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 때 자신께서 우리도 새 아리랑을 지어야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였는데 우리 창작가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에 꼭 드는 아리랑을 창작하였다고, 노동당 시대에 대 걸작이 나왔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리고 최고 사령관께서는 그날 자신께서 4월 초에 우리나라에 아리랑이 몇 개나 되는가 알아보라고 하시였단 말씀을 하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우리나라 아리랑이 모두 37개였는데 이번에 38번째의 아리랑이 나왔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습니다.”
이 글은 2001년 4월 30일 김정일이 “전선시찰 길”에서 녹음을 통해 이 노래를 듣고 한 말을 전한 것이다. 그러니 김정일이 아리랑의 종류를 묻는 등 아리랑에 관심을 보인 것은 4월 초가 되고 그 때는 구체적으로 강성부흥아리랑을 만들라고 한 것이 아닌 또 다른 자리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4월초 전에 아리랑에 대해 말을 할 만한 상황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 시점은 《조선어문》2001년 4월호에 김영철이 쓴 글 <아리랑 민요군의 형성과 계보적 발전>에서 다음 내용이 인용된 시점에서도 알 수 가있다. 요지는 조선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는 아리랑의 통속성을 지적한 것이다.
“민요 <아리랑>은 지난날 우리인민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입니다. 민요<아리랑>이 나온 지는 오래 되였지만 오늘도 우리 이민들 속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사람 치고 <아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발언이 있었던 시점은 분명 4월 이전이 되는 것이다. 어떻든 이어지는 작사자의 증언에서는 김정일이 러시아로 떠나기 직전인 7월 16일 이 노래에 대한 평가를 했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그의 관심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노래 강성부흥아리랑은 현시대의 요구를 잘 반영한 가사에 민요풍의 음조를 붙이였기 때문에 누구나 들으면 저절로 흥취가 날 것이라고 하시였다.
(중략) 자신께서는 이 노래를 8. 15를 계기로 의의 있게 내 보내려고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시여 사령관 동지께서는 노래 `강성부흥아리랑`을 노동신문에 낼 때 관평도 크게 내며 노래가 소개되면 인민군군인들이 먼저 부르도록 하여야 한다고 힘 있게 말씀하시였습니다.”
이상의 글에서는 김정일로 부터 발표 시기와 방법에 대한 지시를 받는 과정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증언만으로는 4월 이전 어느 시점에 아리랑을 언급했는지 알 수가 없다.
후자는 북한 민족음악위원회 이학범**단장의 유네스코 산하 국제음악평의
회 제29차 총회 참석차 방일한 계기로 마련된 인터뷰 내용이다. 여기에 의하면 2000년 가을, 음악가들과의 모임에서 관련된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김정일이 음악가들에게 “<소나타>는 베토벤만이 작곡한 것이 아니고 <녹턴>*도 쇼팽만이 지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우리나라 민요에 대하여 전문가들보다 더 깊이 연구를 하고 계시다. 전문가 보다 조예가 깊으신 장군께서는 다른 민족들은 대중음악을 통해 나온 곡들이 전문작곡가들에 의해 보편화되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아리랑을 그렇게 못하겠는가고 하셨다. 그러면서 작년 가을에 작곡가들이 아리랑을 짓도록 지도하시였다.”
이러한 지시가 있은 후 “작곡가들은 뉘우쳐 21세기 첫해에 맞는, 앞으로 우리가 부강하고 행복한 나라에서 살게 된다는 희망과 념원에 흘러 넘치는 밝은 감정의 아리랑을 많이 창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확인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그 이면에는 6 15 남북정상회담 이후에 널리 불렸던 `통일아리랑`의 영향이 있었다고 본다. 그것은 앞에서 살폈듯이 2000년 중반 이후부터 2001년까지 집중적으로 불렸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아리랑과 이를 주제로 한 지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00년 가을- 아리랑에 대한 언급 또는 아리랑 주제 가요, 창작 지시
2001년 4월 초-어떤 모임에서 아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종류를 묻
고, 이 때 37종이 있다고 듣다
2001년 4월 30일- 전선 시찰 중 강성부흥아리랑을 듣다
2001년 7월 16일-강성부흥아리랑 발표 시기, 방법 지시하다
2001년 8월 26일-《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을 통해 지시대로 관평등
과 함께 발표 함
일반적으로 보통의 가요는 1년에 전국적으로 5백 여편 정도가 창작되어
중앙에 보고 되고 이 중에 <국가심의위원회> (위원장 작곡가 김문규 )가
년 간 10여 곡 정도를 선정, 발표한다고 한다. 그러니 이 강성부흥아리랑
은 이미 작사, 작곡가가 내정된 상태에서 지시에 따라 발표되고 장려되었으니 따진다면 강성부흥아리랑은 일종의 ‘제정’인 셈이 된다.
*주: 이것을 첫 발표로 본다. 왜냐하면 이 기사가 첫 보도 일 뿐만 아니
라 8· 15 민족통일대축전 행사에서 불려지지 않았고 , 7월 17일 가요 집계자료에 통일아리랑은 있어도 강성부흥아리랑은 없었다는 사실에서다.
**주:1964년 조선예술여화 촬영소 작곡가·1982년 김일성상계관인·인민예술가.2000년 12월 13일에서 16일 까지 동평양대극장에서 <리학범음악회>를 개최했다.
***주:야상곡
2) 작곡과 작사
작사는 조선인민군협주단 소속 작가 윤두균이고, 작곡은 보천보전자악단
소속 작곡가 안정호이다. 모두 이미 성과작들을 창작한 이들이다. 특히 윤두균은1968년 현상공모에 입상한 이후 총 2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한바 있고 이런 성과로 김일성상 계관인이 되었다. 여기서 작사가 이뤄지는 과정을 살펴 보기로 한다. 이에 대해서는 윤두균의 수기 <새 세기에 첫 아리랑은 이렇게 나래를 폈다>에 비교적 자세하게 피력되었다. 먼저 동기를 언급한 대목을 들어 보면, 1999년 어느 날 21세기에 맞는 노래를 창작해야 하는 과업을 모색하던 중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운명>을 관람하게 된다.
“ 서경에 나오는 관현악 아리랑을 듣고 <아! 아리랑>하고 소리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여 나왔습니다. 우리 민족음악의 얼굴이고 상징이며 우리 민족에게만 고유한 <아리랑>! (중략) 조선인민군창작사 한 친구(오광호)가 하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 창작가(오은별 아버지)는 외국에서 진행된 어린이 미술전시회에서 자기 딸이 특등상을 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 전시장에 <아리랑>의 선율이 흘러나왔는데 이국에서 들으니 어딘가 쓸쓸한 감정을 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 나라 없던 시절의 아리랑이 아닌 강성대국, 강성부흥 아리랑이 아닌가.> 관람 도중 흥분하여 창작실로 가 단숨에 가사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작사가 되어 며칠 후 합평회를 가졌고, 여기서 수정이 제기되었
다. 이어 민족음악연구소 “머리 희수한 교수에게” 보였는데, 노(老) 교수는 결정을 할 권한은 없지만 “만일 완성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음악사 발전에 하나의 혁명이 됩니다. 왜냐하면 새 세기의 첫 아리랑으로 김정일 아리랑의 시대가 펼쳐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작곡이 되었고, 다시 1년 후 지난 2001년 4월 30일 드디어 <보천보전자악단>의 노래로 전선시찰 중인 김정일에게 전해 졌다.
이상이 작사자의 수기를 통해 정리한 과정이다. 이번에는 가사문제를 다
룬 평론 <노래 강성부흥아리랑의 가사 형성에 대하여>를 살펴 보는데, 우
선 `강성부국`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어 가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즉 강성부국 또는 강성부흥이란 첫째 6. 15 남북공동성명 채택, 둘째 남북 지도자 상봉, 셋째 러시아 공화국방문과 조로공동선언 채택, 이렇게 세 가지를 포함한 의미라고 했다. 그리고 가사가 담고 있는 내용을 다음 세 가지로 제시했다.
하나는 철학적으로 심오한 종자,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사상 주체적 내용
둘은 민요풍의 형식으로 시대감이 있다
셋은 민족의 대 국상(大國喪)을 극복한 `고난의 길` 역사
이 같은 내용은 각 절의 가사에 담겼다고 했다.
제1절-주체강국의 트임 없는 신념과 의지
제2절-사회주의 수호자로서의 영광과 확신
제3절-태양조선과 태양민족의 영광과 자부심 분출
그리고 맺음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가사는 특별히 선택된 정황이나 계기가 아니라 일반화된 현실을 놓고 서정전개를 하고 있다. (중약) 가사에서는 시적계기나 시적상황이 따로 마련됨이 없이 현실 그대로 계기와 정황으로 되고 있다. (중략) 그 어떤 미사려구나 수식도 없이 전개된 가요의 서정은 우리조국 현실 그대로이다.”
이러한 짜임새에 의해 이 강성부흥아리랑은 “군대가 부르면 무적의 힘
이, 인민이 부르면 승리의 신심이 넘치다.”고했다.
그런데 이런 발언 속에는 바로 과거의 아리랑이 어두운 내용과 곡조를 지
녔기 때문에 새 시대에 새로운 창작을 하게 되었다는 논리적 근거를 제시
한 것이다. 그래서 이 강성부흥아리랑은 ‘명곡’(名曲)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여기서 말하는 `명곡`은 일반적인 우리의 의미와는 다르다. 말하자면 현실의 논리성, 예술의 순수성, 일시적 유행 상황 등을 그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주적 인간의 미감과 욕구, 그들의 창조적 활동에서의 역할로부터 출발”하여 선동성에 기여하는 노래를 명곡이라고 하는 것이다. 실제 북한은 심의를 거처 선정된 곡을 선전매체를 통해 관제로 “일시적인 유행”을 유도하기는 하나 일정기간이 지나면 또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구조이다. 그러니까 우리와 같은 유통구조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먼저 가사를 살펴본다. 전 3절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이 가사에 대해서 김정일의 평가가 있었다. “특색 있게 잘 만들어졌다고 하시면서 특히 이 노래의 2절이 현 시대의 요구에 맞게 잘 된데 대하여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멧세지라고 보는데 김일성 사후의 고난을 넘겼다는 안도와 그것을 지켜나가자는 다짐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3절에서는 약간의 자만심 까지도 내 비치고 있다.
그런데 이 가사는 앞에서 여러 면을 들어 내세웠지만 기존의 신민요나 가요 아리랑들과 비교할 때 그렇게 까지 내세울 수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단적으로‘아리랑’이란 3음절의 시어를 극히 단순화시켜 조흥(助興)의 역할로만을 축소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조흥의 효과는 ‘아리랑’이란 어의와 상징성을 극소화 시켜서 얻어진 의외의 효과인 것이지 특별한 작곡상의 기법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아리랑은 의미 없는 조흥어 일 뿐이고 단지 어감만이 동일할 뿐이지 아리랑의 의미나 멋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극단적으로는 ‘아리랑’을 삭제하고 조흥의 음감(音感)이 있는 다른 3음보 시어(詩語)로 대치해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음악적인 면에서도 자만심을 드러내고 있다. 아리랑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작곡에 임했다는 말에서도 그런 태도를 읽을 수가 있는데 다음 글에서 그렇다.
“작곡가는 이미 나온 <아리랑>들을 연구한 기초 우에서 정서적 색감을 이전과 다른 양상의 색깔로 훌륭히 재현시킴으로서 선군 시대가 안아올 찬란한 내일을 그려보는 기쁨의 아리랑으로 정서를 펼쳤다. (중략) 노래의 음조는 평조의 전형적인 도 레 미 솔 라로 된 5음계적 조식으로서 순차적인 오르내림을 잘 배합한 것으로 하여 선율의 유순성과 부드러움을 보장하면서도 노래의 감정정서를 승화시켰다.”
이 같은 주장의 배경에는 과거의 아리랑들이 어두운 음조로 되어있는데
이 노래에서는 “밝고 낭만적이며 미래지향성이 강한 혁신적”인 기법으로 형상화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덧붙였다.
“양상을 독특하게 살리기 위하여 구성을 단순 3부분 형식으로 하면서
매 악절들이 노래의 감정을 정서적으로 승화시키도록 하였다.
첫 악절에서는 린접들로 선율의 유순성과 부드러움을 보장하면서 순차적
인 감정의 오르내림을 원만하게 해 주었다.
둘째 악전에서는 리듬을 확대하고 조직적으로 폭을 넓히면서 감정을 승화 시켰다. 셋째 악전에서는 빠른 리듬 구성으로 둘째 구절에서 축적된 감정을 고조시켜 터쳐 놓았다.”
이러한 기법상의 요소들로 해서 이 노래를 부르고 나면 누구나 “강성부흥하는 거창한 시대의 한 복판에서 가슴 후련히 시대찬가를 부르고 난 기쁨"에 휩싸이게 된다고 했다.
*주:《조선예술》 2001년 10월호 <새 세기에 첫 아리랑은 이렇게 태어났다>
**주:《한국음악사학보》19집? 오금덕? 1997년 ?<북한 주체음악 개황>
중에서
3) 현상과 평가
그동안 각종 매체에 발표된 평가들을 그들의 직접적인 표현을 통해 살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상투적인 “위대한 김정일 시대의 아리랑”과 같은 직접적인 표현은 제외한다.
① 주체음악예술의 또 하나의 성과
②민족의 긍지 높이는 기념비적 작품
③ 노동당 시대의 새 아리랑
④ 민족음악사 발전의 크나큰 경사
⑤ 우리 음악 발전의 획
⑥ 새 세기의 가장 훌륭한 민족 아리랑
이 같은 표현에서 이 노래가 단순한 일개 음악 작품이 아님을 알 수 있
다. 전통 민요 아리랑과 동격의 위상으로 주장한 다음 기록에서도 그런 태도를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조선민요의 조식과 음조들을 적극 살려 주면서도 우리시대의 인민들의 사상감정과 정서적 미감에 맞게 창작됨으로서 우리 나라의 오랜 민족음악인 <아리랑>의 새로운 대표작으로 되었다.”*
이 같은 평가에서 이 노래는 이미 음악 작품 그 이상의 한 사회현상임
을 알게 한다.
이번에는 이 노래가 어떻게 유통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지금 북한에서는 “온 나라 인민들의 심금을 틀어잡으며” 널리 불리고 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언제, 어디서나, 그곳에 맞게 불린다. 즉, 학교에서는 물론 일터의 쉼터에서, 보통강 전기공장 로동계급에서, 퇴근 길 전차 안에서(가두 인민반), 금골 광산 갱 안에서 까지 가사 괘도(掛圖)와 아코디언이나 기타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고 있다. 말 그대로 “항일유격대식”공연이다.
그리고 부르고 듣는 이들은 아리랑에 대해 나름의 전문가들이다. 다음은
한 광산 책임자가 기고한 기사 일부이다.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돌이켜 보면 나라 없던 그 세월 눈물 속에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죽음의 막장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검덕의 광부들이었다. 슬품 속에 이 노래를 부르며 살곳을 찻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들의 운명이었다. 그 원한의 <아리랑>, 피눈물의 <아리랑>이 오늘은 행복은 < 아리랑>, 신념의 <아리랑>이 되어 신심과 락관의 <아리랑>이 되였다.
일터로 향하면서 어깨춤 절로나니
아리 아리 아리랑
기계를 돌리면서 흥에겨워
스리 스리 스리랑
광물생산 날로 높아가니
강성부흥 아리랑”
검덕광산의 책임비서 석덕현 의 글 일부였는데 오히려 진솔한 창작 아리랑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이 가요 아리랑을 부르는 것은 물론 아리랑에 대해 학습도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각 소조활동과 현장공연이 활발함도 알 수 있다. 최근 평양철도국과 인민보안성의 여성취주악단의 활동을 보도한 기사에 의하면 “장군님의 보폭에 발걸음을 맞춰 활동하는 여성취주악단”이라고 하여 김정일의 현지지도 동행 활동 연주도 활발함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이 얼마나 힘 있게 전개되고, 역시 힘을 발휘하는 지는 “선
군 혁명의 노래 ”로 “붓대포, 북대포”로 “천만 총검보다 위력한 힘이
다”라는 표현에서 알게 된다. 이런 노래들은 간편한 손풍금이나 기타 같
은 악기로 때와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전투적으로 기동성 있게 공연활동을 진행하며 군중의 장끼를 적극 개발하여 구수한 맛이 나게 하는” 예술소조활동에 적합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학범 단장은 인터뷰에서 “선률에서 민족적인 것을 계승하면서 가사 속
에 장군님께서 령도하시고 강성부흥하는 조국과 인민의 행복을 형상한 새로운 아리랑으로 창작되었다.”고 하며 앞으로 군민아리랑? 내고향아리랑? 행복의아리랑? 천지개벽아리랑? 승리의아리랑이 더 작곡되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이들은 이번의 대공연<아리랑>에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주:《조선예술》· 2001· 10· <새 세기에 첫 아리랑은 이렇게 태어났다>
**주:《노동신문》 2001년 12월 20일자
***주:그러나 이들 아리랑이 과연 남북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온정이 담긴 노래인가는 의문이 든다.
Ⅳ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
‘집단체조’란 “기백있는 체조와 체육적 기교를 대규모화한 행위예술”이고 2000년부터 쓰기 시작한 ‘예술공연’이란 “우아하고 아름다운 무용과 음악으로 주체적 내용을 담아낸 예술공연 양식이다. 이 두 가지를 복합한 것이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이고 금년의 행사 명칭과 주제를 <아리랑>으로 한 것이다. “10만명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펼치는 대규모 군무와 카드 -쌕션은 도저히 인간의 그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정도” 라고 하는 행사이다.*
2001년 8월부터 연습에 들어간 《아리랑》행사 개최는 그 시기나 명칭에 있어서 많은 관심을 갖게 한다. 그것은 북한 스스로가 “올해 국제정세의 흐름 속에 문화예술 행사의 차원을 초월한 일대 국가행사”라고 규정했듯이 국제 정치적으로 미묘한 시점에서 개최된다는 데에서 그렇다.** 또한 지금까지의 명칭 예(例)와도 다르다는 것도 그렇다. 보도에 의하면 2002년 2월 16일 김정일 60회 생일날***1만 명 규모로 축약한 <아리랑> 행사를 치루고, 3월말 총 연습에 들어가 4월 말에서 6월 말까지 2개월에 걸쳐 치룬다고 한다. 일요일을 제외한 주 6일 공연, 2개월여 간의 기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행사가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각종 매체에서 언급한 관련 사항들을 정리, 전체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그 대책에 참고 자료로 삼고자 한다.
*주: 《조선일보》· 2002· 1· 11·<만물상>
**주: 《조선신보》 김지영 기자의 대담 기사
***주:연합통신 2002년 1월 27일치에 의하면 이번행사 명칭을 종합공연 <2월은 봄임니다.>라고 한바있다.
1) 명칭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고 영어로는 “100,000 strong
mass gymnastic and artistic performance arirang”이다. 행사를 기획할 당시인 2001년 4월 15일(태양절)에는 창작가들이 행사명을 <첫 태양의 노래>로 계획했다. 이는 기존의 행사 개념으로서는 당연한 것이다. 김일성 생일인 `태양절`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고, “ xx의 노래”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그 동안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일 김정일이 “작품 창작의 원천인 종자의 핵을 아리랑정신에서 찾을 것”을 “직접적인 지시”를 하여 《아리랑》으로 정해졌다.* 이로부터 창작가들은 “조선민족의 정서와 넋이 담겨있는 노래 <아리랑>을 주제해명의 기본 수단으로 하여 민족의 문명사와 세태풍속을 서사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종자의핵’ 이론을 들어 이를 철저히 관철하고 있다. (이 ‘종자의핵’ 이론은 1973년에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이론이지만 최근 다시 김정일의 예술적 영도력을 칭송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다음 인용 자료에서 알 수가 가있다.
“우리민족의 운명사를 담은 대집단체조 예술공연 <아리랑> 이라는 제명을 단 것부터가 민족의 얼이 있고 흥취가 있는 걸작으로 될 수 있는 귀중한 종자이다. 우리 창작집단은 종자를 활짝 꽃 피워 긍지 높은 조선민족의 모습을 세계만방에 떨치기 위해 창조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이번처럼 대집단체조가 민족적 색채가 전면에 내 세워져
창작되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북한도 연대(連帶)와 대동성(大
同性)이 아리랑의 속성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번 행사에 이를 배려한 것으로 본다. 특히 이 번 행사를 관광 상품화 하고자하는 의도에서 분명하게 보여지는데 주목하는 변화이다. 다음의 인용문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우리 당은 언제나 국제무대에 민요를 비롯한 민족적 성격이 강한 음악을 들고나가도록 하여왔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아리랑>을 비롯한 우리의 민요들을 잘 알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훌륭한 우리 민요들은 국제적 친선과 련대성을 위한 힘 있는 수단들로 되고 있다.”***
남북의 교착상태를 감안해서도 아리랑이 적격이고 외국인을 대상으로한 관광상품으로 하기위해서도 아리랑을 내세울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본다.
*주:재일 총련 도쿄도 본부 김학권 선생 제공 자료 및 공연 기획자 이철우
선생의 증언
**주:《통일신보》· 2002년· 1월· 13면, 문화성 송석환 부상과 정순회기
자의 대담기사
***주:《민족음악의 계승발전》· 남영일· 문예출판사· 1991년· 44쪽
2). 일정
조선국가관광총국이 밝힌 일정은 2002년 4월 29일부터 6월 29일까지 2개
월 간이다. 이런 사실은 지난해 11월 7일 중앙TV를 통해 일제히 보도되고 12월 들어 관광객 모집 광고가 해외 보도를 통해 나오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북한이 일정을 이렇게 정한 것에 대해 그 이유를 공식 표명한 바는 없으나 다음 사항에 대해 고려했다고 본다.
하나는 관광객 유치에 목적을 두어 “평양의 년 중 제일 아름다운 계절은 봄임으로 관광 씨즌(season)을 염두에 두었다고 보는 것이고 둘째는 가장 큰 기념일인 김일성 생일 , 특히 90 주년이라는 데에 역점을 두었고 춘사 나운규 탄생 백년기념 등의 다른 큰 행사들을 감안하여 통합, 확대 했다고 본다.*
셋째는 긍정적으로는 <월드컵> 경기를 이 행사와 상호 연계시킨다는 발상에서 정했을 수 도 있다. 이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과거와는 다르게 사업적 측면에서 적극성을 띠고 있다는 점과 아리랑에대한 다양한 해석을 내어놓고 있다는 점에서도 어느 정도는 긍정적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월드컵> 대회(5월31일~6월30일)를 겨냥, 그 대응 차원에서 정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갖게 한다. 그렇게 보는 데는 `태양절`이 4월 15일인데 굳이 2주 정도를 늦춰 행할 이유가 어디 있으며 2개월 정도로 장기간에 걸처 치룰 이유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지난 1989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무리하게 유치한 것이
바로 서울올림픽에 대응한 것이었다고 보면 그렇게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주:《연합뉴스》· 2001년· 12월· 23일치
3). 주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민족의 슬픔과 기쁨의 력사가 비껴있는 노래<아리랑>을 주제해명의 기본 수단”으로 "우리 겨레의 구슬픈 노래로 사람들의 가슴을 저리게 했던 <아리랑>을, 오늘 떨치는 랑만과 긍지에 넘친 행복의 <아리랑>으로 세상”에 제시하려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전체적인 주제 형상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동방조선이 어떻게 파란 많은 수난의 력사를 거쳐 자기운명의 주인이 되었으며 오늘을 어떻게 존엄 있는 민족으로 출현하게 되었는가를 <아리랑> 노래에서 생활적이면서도 생동한 예술적 장면들로 서사적으로 펼쳐 보이려 한다.”*
위의 주장대로라면 이 행사는 분명히 아리랑의 현재적 해석(재형상)인 셈
이다. 이는 아리랑의 역사에서나 공연문화사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아리랑이 1926년 영화<아리랑>으로 그 위상의 대 전환점을 맞은 이
후, 지금까지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갖지 못했음이 사실이다. 그동안 유현목 감독의 영화 <아리랑>을 전후한 5편의 영화로, ’86 아세안 게임과 '88올림픽 경기를 전후하여 뮤지컬과 연극과 창극 같은 무대작품으로, 대하소설 《아리랑》 같은 출판물로 그리고 10여녀 간 이어온 <아리랑축제> 같은 이벤트 형식으로도 그 계기를 갖으려했다. 또한 비록 외국인 이지만 《SONG OF ARIRAN》의 공동저자 님 웨일즈여사가 오페라로 준비하려 했던 것도 그런 의도에서였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것도 80여년 전 그 엄동의 시절에 민족혼을 일깨운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시대정신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의 월드컵 경기와 대공연 <아리랑>에서 새로운 아리랑의 모습을 크게 기대하는 이유이다.**
*주: 《통일신보》 2002년 1월 1일 3면, <희망찬 새해 2002년 세상을 들썩하게 놀래울 `아리랑`>
**주:이 시대의 민족혼이란 바로 오늘의 분단현실을 극복시켜 줄 수 있는 그 어떤 힘을 말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아리랑>은 영화나 보고 행세깨나 한다는 이들이 거들먹 거리고 볼 때는 그저 그런 영화였다. 그래서 개봉관 단성사(團成社)에서의 상영은 예정보다도 앞당겨져 간판을 내리게 하고 3류 극장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시대의 아픔에 눌려있던 일반 민중들이 3
류 극장에서 만난 <아리랑>은 영화 그 이상이었다. 그래서 <아리랑>은 3
류 극장을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 단성사로 오게 하는 믿기 어려운 기적
을 낳았던 것이다. 이로서 <아리랑>은 전국을 돌고 일본· 만주까지 돌게 되었다.
1926년이란 3·1운동 이후 일제의 치밀한 동화책으로 인해 말 그대로 엄동의 시절이었다. 그 때 한편의 영화 <아리랑>이 언 가슴에 뜨거운 혼을 불어 넣어 주었던 것이다.
바로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의 월드컵과 대공연 <아리랑>이 한갓 특수한 이벤트이거나 정치집회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가슴에 뜨거움으로 채워줄 것을 기대한다. 따라서 반드시 두 행사에 우리의 절대적인 관심이 모아지고 그 관심이 서로에게 전달되어 함께 공감할 수 있게 수정·보완이 된다면, 그래서 진정한 시대적 필요성으로서의 문화행사 또는 아리랑에 대한 재해석이라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이 시대의 민족혼을 담은 아리랑일 것이다.
4). 장소
대동강 능라도 < 5.1경기장>이다. 현재 옥외 경기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1985년 15만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건설한 것이다. 지난 2000년 10월의 노동당 창당 55돐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5). 공연내용
전체 서장과 종장을 포함 총 4개장, 각 장별 10경으로 구성된 ‘주체예술의 총화’라는 이 대공연의 총연출은 지난 2000년 노동당 창건 55돐 행사를 연출해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은 인민예술가 김수조(70) <피바다가극단> 총장이 맡았다. 그는 다른 대공연과는 다르다며 이번에는 민족의 얼이 깃든 명곡들, 민족적 색채가 짖은 우아하고 화려한 무용들, 기교 높은 체조와 교예로 꾸며진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의 내용에다 여러 수단과 장치를 더하여 호화롭게 한다고 했
다. 제시한 수단과 장치는 다음과 같다.
1.인민의 기상과 기백을 담은 체조(대형 구도와 체조수법 채현)
2.금강산의 선남선녀들의 춤을 담은 무용 률동
3.기교스런 배우들이 펼치는 공중 교예
4. 황홀한 배경의 미술(카드-색션)
5. 만화천변의 배경대(90여개 장면의 그림)
6. 특대형 영사화면
7. 현대적인 레이져 조명장치
북한 국영통신 보도에서는 세계 45개국에 전문가들을 파견, 기술을 습득해와 지원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지난 2000년 <백전백승 조선노동당> 대공연을 마친 후 연출가 김수조가 자평한 대목이 있다. 이 내용은 이번 행사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리라고 본다. 네 분야에 대한 역점 사항인데 다음과 같다.
음악편성에서 다양화, 집약화
배경대에서 대형화, 집체화
춤동작에서의 체조와 무용의 동시 결합
무대미술에서의 직관성과 신명성
*주:《조선신보》 2001년 11월 26일자
6). 공연자
“최상의 예술성 구현”과 “최대한 관람조건 및 편의제공”을 중점 목표로 한 이번 행사의 출연진은 전체 10만명이다. 이 인원에는 국내외 콩쿨 수상자, 예술인, 재능 있는 청년학생, 귀여운 어린이가 포함된다. 바로 이 출연자들이 “보는 사람들을 무아지경에 빠지게 할 것이고 인간의 예술능력과 정신력, 육체적 능력에 대한 상상을 뛰어 넘게 하여 이 행성에 더는 없는 대 걸작”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한다. (이 같은 대공연을“탁월한 연출력과 역동적인 구성”으로 자평하고 있지만 인권을 중시하는 서방국가나 우리는 평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중석에서 대형 카드- 색션
이 이뤄진다.
7). 목적
내부적으로는 김일성의 90회 생일과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 20주년, 6.15 정상회담 2주년, 그 외 소위 “꺽어지는 주기” 정주년을 맞는 여러 기념일을 통합, 기념키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외부적으로는 “조선에서 <아리랑> 공연이 진행되면 단순한 행사의 테두리를 벗어나 국제사회를 향한 평화의 멧세이지로 서의 의미가 부여 될 수 있다.”고하여 또 하나의 목적을 내 세웠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리 일부에서는 행사 목적을 나름대로 해석 하고 있
다. 그것은 외화벌이, 체제강화. 김주석 생일기념, 통일 필요성 부각, 이렇게 1석4조를 거두려한다는 것이다.*
*주:《조선신보》2001년 11월 26일
8) ‘대공연’(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의 등장시기
집단체조는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대중동원 및 참여를 위한 집체예술의 초고봉으로 주체예술의 총화라고 하는데 북한은 “청소년들과 근로자들을 추체사상으로 무장시키며 조직성·규율성·집단주의 정신으로 교양하는 동시에 그들의 몸을 튼튼히 단련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이 대공연의 시원(始原)은 항일무장투쟁기의 정점인 1930년 항일 예술로 창작, 공연된 <꽃체조>라고 한다. 이로부터 체조가 중심이 되었으며 오늘날의 대집단체조 형태로 확대된 것은 1971년 <집단체조창작단>이 창립되면서부터이고, 80년대 들어서 국내 주요 기념일을 계기로 약 80편이 창작 되어 총 900여회 정도가 공연되었다. “최근에는 대내외 정책과 관련된 주요정치 행사의 양상을 띠고” 진행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쿠바·수단·잠비아·탄자니아 등 40여개 국에 기술을 지원하기도 했다.
북한의 이 같은 대공연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것은 제 13차 <세계청년학생
축전> 개폐막식에서의 공연이고, 이를 계기로 더욱 발전시켜 오늘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북한이 그동안 창작한 80여 편 중에서 내세우는 기념비적인 대공연은 다음과 같이 10편이라고 한다.
1930년 -<꽃체조>
1958년 -음악무용서사시 <영광스런 우리조국>
1961년 - <노동당 시대>
1964년 -< 천리마 조선>
1970년 -<노동당의 기치따라>
1982년 - 무용서사시 <영광의 노래>
1988년 - <수령님 모신 내 나라>
1992년 - “ <행복의 노래>
1989년- 집단체조 <세계청년학생축전>
2000년 -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조선노동당>
58년의 행사는 광복13주년의 행사로 당시로서도 대규모인 1만명을 동원했
고, 61년의 행사는 조선 노동당 제4차 대회기념으로 2만7천명이 동원되었
고, 88년의 행사에서는 5만 명을 동원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바있다.**
*《조선예술》? 2001? 10월 호 <대 공연형식의 발생과 그 발전> 김혜영
**주:한편 이상의 행사들의 명칭에서 보면 모두 정치적이었음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보면 이번의 <아리랑>이라는 명칭은 어떻든 비 정치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9). 반응과 대책
북한이 이 번 행사를 관광상품화 하는데는 많은 나라가 축제나 이벤트
수익을 올리는 것을 전향적으로 받아드린 결과이다. 사실 이 같은 시각에
서 본다면 이 행사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품목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나라도 내용과 규모를 따라할 수 없는 대형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이 이번 행사를 우리나 서방세계로 부터 “파시즘적 정치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게 한다면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최근 일본과 중국은 물론 유럽에까지도 조선국가관광총국 ·조선국제여행사·조선국제청소년여행사 명의의 사절단을 보내는 등 관광객 유치에 적극적이다. 또한 비록 중국을 통해서이지만 관련 홈 페이지
(www.korean.dprkorea.com과 www.koryogroup)를 개설하여 네티즌들을 대상
으로 홍보를 하고 있으며* 만수대창작사 등에서 제작한 선전화(포스타) 6종과 상징마크 4종의 도안까지를 각종매체를 통해 알리고 있다.**
홈페이지에서 선전화와 마크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인용해 보면 기존의 대공연과는 다른 내용으로 준비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선전화들에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10만명 대집
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라는 글자가 있다. 5월1일경기장을 배경으로 화려한 민족옷을 입은 예술인들의 아름다운 률동과 기백 있는 체조동작을 펼쳐 보이는 출연자들의 모습도 형상되여 있다. 평양으로 달려 오는 관람자들의 모습과 <아리랑>의 노래와 함께 전해 오는 남녀의 눈물겨운 리별장면을 반영한 것들도 있다. 창작된 마크들도 다양하다. 마크에는 공화국 국기의 3색바탕 원형안에 <아리랑>글자와 5월1일경기장에 펼쳐 진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장면이 그려 져 있다. 선전화,마크들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에 대한 내외인민들의 관심을 더욱 높여주게 될 것이다.”
이상의 설명대로라면 이번 행사는 지난 2000년의 노동당 창당 55돐 행사와는 다른 내용으로 준비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행사, 특히 90년대의 행사들이 명칭과 내용에서 체제선전 일색이었던 것에 비해 이번 행사는 민족정서가 강조 된 것으로 보아 ‘예술공연’에 더 역점을 두었음을 알게 한다.
한편 북한이 북경에 설치한 <범태평양조선민족경제개발촉진협회>를 통해
서는 해외 관광 대행사를 모집하고, 일본의 경우는 이미 평양과 나고야간
의 민항기 운항 계획 등을 마련해 놓았다고 한다. 이는 지난 해 11월 말 “수많은 나라와 지역에서 조선의 유명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을 보려는 의사를 계속 표시해오고 있다”고 그 성과를 과시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광고에는 “남조선”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어 주목하게 된다. 이런 실상은( 2001년 12월 5일, 평양방송에서) “남조선 동포 여러분은 아리랑을 볼 기회를 놓치면 일생을 두고 후회할 것”이라고 한 것이나 각국에 홍보한 내용에서도 알 수가 있다. 역시 이들 자료에서도 이번 행사에 남측의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월간지《금수강산》 2001년 12월 호에는 장면 사진을 원색으로 싣고 “오
시라 ,민족도 하나” 라고 참관을 유도하고 있다.
또한 “올해의 <아리랑> 공연에는 남측에서 더 많은 관람자들이 묻혀 올
것이 예상된다. 북과 남이 한 목소리로 부르는 아리랑의 노래는 6. 15 공동선언의 생활력을 증명하고 조선민족의 통일의지를 호소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2000년 창당 55돐 때 보다 더 많은 남쪽 참관객을 유도하는 내용이다. 그
런데 “오시라 평양으로! 보시라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 못 보면 평생 후회, 남조선도 와서 보고 함께 아리랑도 부르고 비판도 하시라.
볼 기회를 놓친다면 일생을 두고 후회할 것”이라는 문안도 있다. 이는 분명하게 상업성 광고로 보게 된다. 다음 기사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
"세계 여러나라 손님들, 남조선과 해외동포들 평양을 처음 찾게 될 남조
선과 해외 동포들은 반세기가 넘도록 싸이고 쌓인 그리움을 다 풀고 조국
에 대한 사랑과 정을 일생 아름다운 향기로 고이 간직할 것이다.”
아마도 이 같은 기사는 이번이 처음으로 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북측
은 아직 우리와 미국과 기자들에게는 일본이나 중국 관광회사에 보내는 광고와 같이 요금이나 관광코스나 일정 같은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는 남측의 참관객이 다른 나라의 관광객과는 입장이 다르다는 점을 현실적으로 인정한 결과라고 본다.
어떻든 이러한 북한의 태도에 대해 우선은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고 있
다. 당연히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인데 전자는, 평양 매스게임 `아리랑`, 남 월드컵 축구에 맞불”(<조선일보>)
이란 식이고 후자는,“남 월드컵- 북 아리랑 축제 상호 협력 방안 모색 할만” 또는 “월드컵 구경하시고 아리랑도 보러 오시라요”(<한계레신문>)“아리랑 월드컵 모두 민족의 축제로”(<민족21>)
“남 월드컵과 북 아리랑축제”(<경향신문>)
라는 식이다.
이러한 반응은 일정 시기까지는 견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남측 인식의 변화에 부응하여 북한도 손님맞이 꺼리마련에 적극적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것은 아리랑의 본령이 분명 저항성과 투쟁성이 근간이긴 하지만 그것은 연대와 대동정신을 지향한 것임과 종국에는 해원상생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이러함에 북한은 당연히 아리랑의 일부 성향만을 극대화시켜 이번 행사를 외세배격과 계급투쟁적인 선전선동으로 비치거나 체제선전행사로 혹평 받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특수한 ‘북한아리랑’에 의한 해석이 아니라 남한도 세계인들도 모두 공감하는 보편적인 해석에 의한 아리랑 잔치로 꾸며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북한이 유념해야할 사안이다.
*주:일본어 웹사이트는 www.dprknta)
**주:《조선신보》 11월 26일
***주:2001년 11월 29일· <평양방송>
****주:재일 총련 김학권 선생 제공, 신문 전송자료
Ⅴ 맺음말
그동안 각각의 내부적 저해요인으로 악순환 관계가 되어 남북관계가 교착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으로 오늘의 남북관계에서 현실적으로 이 두 행사를 계기로 교류를 터야하는 또 다른 대안이 없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일정한 거부가 있겠지만 가시적이고 현실적인 성과를 축척해가는 것으로서 극복해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의 양측 두 행사는 교류에 있어서 너무나 적절한 계기가 아
닐 수 없다. 두말할 나위 없이 아리랑을 주제화 소재화 하고 있어 속된 말로 “깔아 놓은 멍석”에서 잔치판을 벌이는 것이니 오고가는데 명분에서 이의가 있을 수 없고, 월드컵과 대공연<아리랑>이 상호보완 되어 평화행사가 된다면 세계적인 이목을 받을 수 있을 것임은 물론 관광 수익도 극대화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의 잔치문화 본래의 뜻이 하잘것없는 계기를 빌미로 해서 그동안 격조하고 소원했던 이들과 해후하여 벌이는 판으로서의 미풍양속이 아닌가.
감상적인 해석일런지는 모르지만 이번의 두 잔치판은 아리랑의 “보이지 않는 손”(unviserble hand)이 남북 간에 무언의 교감을 이루게 한 것이다. 사실 북한이 “아리랑”을 행사명과 주제로 했다는 것은 의외이다.
그만큼 북한은 변화된 인식으로 이번 행사에 민족 ‘동질성’ 공유를 주제화 한 것으로 보여 진다.
따진다면 우리는 이미 1990년 남북단일 팀 단가(團歌)를 <아리랑>으로 합
의, 아리랑이 민족동질성의 구체적인 인자(因子)임을 공인한바있다. 비록 체육 분야만의 정치적인 합의였지만 동일안(同一案) ? 동시제의(同時提議) ? 합의(合意)라는 남북 회담 사상 유일의 예(例)를 거둔 것이다. 음악(민요)으로서의 아리랑뿐만 아니라 <민족의노래>로서 담고 있는 정신(불복종저항정신· 연대와 대동정신· 해원상생정신) 까지도 공인한 것이다.
우리는 이번 월드컵 경기에서 `아리랑응원가`와 전야제에서의 2002명 합
창 ‘아리랑환타지` 그리고 개막식 공연에서 북(鼓)에 의한 <아리랑> 연주로 아리랑을 소재화 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은 6 .15 정상회담의 “민족단합과 평화의 염원을 아리랑을 주제해명 수단”으로 하여 형상화 한다고 했다.
이처럼 아리랑은 우리를 연대와 대동정신으로 묶어 준다는 것이고, 교류가 없으면 어떤 것도 얻을 수 없고, 교류가 있으면 그 끝에는 쾌거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아리랑은 이 민족의 화해를 위해 남겨진 거의 마지막의 실마리라는 것이다.
*주: 응원가로는 `ole ole`와 ‘아 대한민국’과 함께 아리랑 주제가 두 가지 더 있다.
첫댓글 수고 하십니다. 우리 문화에 대해서 공부 하고 갑니다. 부탁드릴것이 있습니다. 이 논문은 본 단체에 저작권이 있습니다. 삭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리랑연합회 사무국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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