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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 7. 16. 20:50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생졸년] 1629년(인조 7) ~ 1703년(숙종 29) / 壽 74歲
지하철 7호선을 타고 북쪽으로 향하면 장암역(長岩驛: 의정부시 장암동 160-8) 종점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수락산(水落山) 방향으로 10분 남짓을 걸으면 조선 후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유적지들을 만날 수 있다.
박세당은 송시열 등 서인 세력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말)으로까지 비판 받았지만, 이곳 수락산의 취승대(聚勝臺), 석천동(石泉洞) 일대에서 직접 생산 활동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였다. 박세당의 정치적 생애와 학문 활동, 그리고 그의 삶의 체취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유적지들을 찾아가 본다.
조선 후기 소론의 핵심 가문에서 태어나다.
1623년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들이 협력하여 이루어진 인조반정 이후 조선 후기 사상계는 주자성리학 중심으로 재편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주자학 이외의 사상이나, 주자의 주석을 따르지 않는 해석은 극렬하게 배척되었다. ‘사문난적’이라는 용어는 주자학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에서 나왔지만, 실제로는 반대 정파를 탄압하는 무기로 활용되었다.
박세당은 조선 후기 사상계가 점차 경직화되어가는 시기에 독자적인 학풍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정치적으로는 소론의 핵심으로 활약하면서, 윤증(尹拯), 박세채(朴世采),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 소론의 실세들과 두터운 교분을 유지하였다.
박세당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ㆍ잠수(潛叟)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손꼽히는 반남 박씨는 박세당의 10대조인 박상충(朴尙衷, 1332~1375)에 이르러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다.
박상충은 정몽주ㆍ이색 등과 더불어 고려말 신진 사대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9대조 박은(朴訔)은 태종의 즉위에 공을 세우고 좌의정에 올랐다. 박세당의 고조 박소(朴紹)는 초야에 은둔한 채 생을 마쳤으며, 증조 박응천은 사재감 정(司宰監正)을 지냈다.
조부 박동선(朴東善)은 좌참찬을 지냈으며, 부친 박정(朴炡)은 1623년의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훈되고 금주군(錦洲君)에 봉해졌다. 박정은 양주(楊州) 윤씨와의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세규(世圭)는 요절하였고, 세견(世堅)ㆍ세후(世垕)ㆍ세당이 뒤를 이었다. 세견과 세후는 후사가 없어서 박세당의 차남인 태보가 세후의 양자(養子)로 갔다. 박세당은 박정의 4남이었지만, 형들이 후사가 없었기에 가문의 실제적인 계승자가 되었다.
박세당은 1629년(인조 7) 8월 19일 남원(南原)에서 태어났으나, 4세 때 부친이 7세 때에는 큰형이 사망하면서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모와 모친을 모시고 피란길에 올라 원주ㆍ청풍ㆍ안동 등지를 전전했다.
17세에는 의령 남씨 남일성(南一星)의 딸과 혼인하여 관례대로 처가살이를 하였다. 의령 남씨를 위해 쓴 묘지명에도 “박씨는 아버지 잃고 집안이 가난하여 자립하지 못한 나머지 10여 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다가 벼슬길에 오르고 나서야 처가를 나와 따로 살림을 꾸렸다.”고 하여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처가살이 기간에 박세당은 처남인 남구만과, 처숙부 남이성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박세당은 의령 남씨와의 사이에서 태유(泰維)와 태보(泰輔)를 낳았는데, 박태유와 박태보는 소론의 핵심으로 활동하다가 정쟁으로 부친보다 일찍 사망하여 박세당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박세당의 집안은 서인에서 소론으로 이어지는 가문의 핵심이 되었고, 소론 인사들과의 혼맥도 두드러졌다. 박세채(朴世采)는 박세당의 8촌 아우였고, 박세당의 셋째 형인 박세후(朴世垕)는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尹宣擧)의 사위가 되었다.
박태보(朴泰輔)는 윤증의 대표적인 제자가 되면서 윤선거 집안과의 두터운 교분을 이어갔다. 조선 후기 소론의 핵심인 박세당, 박세채, 윤증은 혈연관계와 사제관계가 중첩되면서 소론의 정치적ㆍ사상적 입지를 굳혀 갔다. 윤증의 문집인 『명재유고』와 박세당의 문집인 『서계집』에는 윤증과 박세당이 서로에게 보낸 서신이 각각 22편, 26편이 수록되어 양인간의 친분을 확인할 수가 있다.
당쟁의 칼날, 박세당을 겨냥하다.
박세당은 32세가 되던 1660년(현종 1)에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11월에 전적(典籍. 성균관의 정6품)이 되었다.
박세당이 과거 급제를 한 때는 1659년부터 시작된 기해예송(己亥禮訟)으로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ㆍ사상적 대립이 치열했던 시기였다.
박세당은 “오늘날 전례(典禮)를 다툼으로 인하여 종통이 밝지 못하다는 설을 고집하는 자들은 아마도 불인(不仁)함이 심할 것이다.
아마도 상대를 공격하려고 고의로 빌린 설일 것이며, 상대를 배제하려고 고의로 빌린 명칭일 것이니, 그 마음씨가 아, 또한 험악하고도 위험하도다.”고 하여 예송논쟁이 정쟁으로 비화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박세당은 32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ㆍ홍문관 등을 거쳐 관직생활을 이어나갔지만 40세를 기점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수락산 남쪽 골짜기 석천동(石泉洞)으로 내려와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관직에 응하지 않았다.
직접 농사를 지은 경험을 바탕으로 1676년(숙종 2) 『색경(穡經)』을 저술하기도 했다. 박세당은 수락산 일대에서 학문 연구와 저술에 힘을 다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논어]ㆍ 『맹자』ㆍ『중용』ㆍ『대학』ㆍ『상서』ㆍ『시경]을 주해한 『사변록(思辨錄)』이었다.
『사변록』은 주자의 주석을 벗어나 독자적인 해석을 가했다는 이유로 사문난적으로 공격받는 대표적인 저술이 된다.
저술활동에 매진하는 기간에도 조정에서는 박세당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대사헌ㆍ예조판서ㆍ이조판서 등의 관직을 제수했지만 박세당은 모두 거부하였다.
관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사림(士林)에서 박세당의 위상은 날로 높아졌으며, 특히 소론의 구심점이 되었다.
박세당이 활동한 17세기 후반은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ㆍ사상적 대립이 특히 치열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 반남 박씨 가문은 소론의 중심이었고, 박세당은 그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당쟁의 칼날이 결코 그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1702년(숙종 28) 박세당은 이경석(李景奭,1595~1671)의 후손으로부터 신도비명 찬술(撰述: 책이나 글을 지음)을 부탁 받고 자신의 마지막 글을 지었다.
이경석은 삼전도비문을 지었다는 이유로 송시열로부터 가혹한 비난을 받았고, 노론 세력에게는 최고의 경계 대상이었다.
박세당이 이경석의 신도비명 찬자로 결정되자, 노론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박세당을 주시했다. 박세당은 이전부터 송시열과 악연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종대에 공의(公義)ㆍ사의(私義) 논쟁이 제기되었을 때 박세당은 송시열의 사의론을 비판하며 공의론을 앞세운 서필원을 옹호하였고, 이것은 송시열의 깊은 반감을 샀다. 송시열 일파는 박세당을 삼간오사(三奸五邪) 중 한 명으로 지목하였다. 이경석의 신도비명을 지을 당시 송시열은 이미 죽었지만, 그 문인들은 여전히 정계를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세당은 소신껏 이경석의 신도비명을 찬하였다. 박세당은 “서경에 이르기를, ‘노성(老成: 많은 경험을 쌓아 세상일에 익숙함)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하였으니, 노성한 사람의 중요함이 이와 같다. 노성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면 천하의 일 가운데 이보다 더 상서롭지 못한 것이 없고, 상서롭지 못한 일을 행하는 데에 과감한 자에게는 또한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하늘의 이치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글을 짓는 시작부터 송시열을 노성한 사람(이경석)을 업신여긴 자로 규정하였다.
이어서 비명 마지막에....라고 하여, 올빼미를 송시열에게, 봉황을 이경석에게 비유하면서 이경석을 군자라 칭송하였다.
노론은 박세당이 송시열을 모욕했다며 분노하였고, 1703년(숙종 29) 봄에 성균관 유생들은 박세당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유생들의 배후에는 박세당을 제거하려는 김창협ㆍ김창흡 등 노론의 핵심부가 있었다. 노론은 이경석의 비문뿐만 아니라 『사변록』의 저술에도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송시열의 주자 절대주의를 계승한 노론들은 주자학의 이론 체계에 도전하는 『사변록』의 간행을 좌시할 수 없었다.
1703년 노론 세력은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 대학·중용·논어·맹자·상서·시경을 해석한 주석서』 편찬 사실을 접하였고, 결국 박세당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이경석 신도비명에서 송시열을 모욕한 것에 더해져서, 노론은 박세당이 『사변록』 을 저술한 ‘불순한 인물’임을 크게 부각시킨 것이다.
이건창의 『당의통략(黨議通略: 붕당정치사에 관하여 저술한 역사서』에도 “이때 이르러 박세당이 이경석의 묘갈명을 찬술하여 말하길, 거짓을 행하고 그른 것을 따르는 세상이 그 사람을 도우려 하니 올빼미와 봉황은 종류가 달라서 성내기도 하고 화내기도 한다” 했다.
이에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 이덕수(李德壽,1673~1744)에게 편지를 주어 이경석과 박세당을 극력 비난하였다. 또 성균관 유생 홍계적(洪啓迪,1680~1722)으로 하여금 상소하여 변척하여 말하길 “지금 시열을 정사를 어지럽히는 소정묘(少正卯)로 삼는다면 이는 효종의 정치가 어지럽다고 하는 것입니다.고 했다.”고 기록하여, 노론들이 박세당에 대해 거당적인 대응을 했음이 나타난다.
노론은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서 처벌하고 『사변록』을 흉서(兇書)로 규정해 소각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상소를 올렸다. 결국 숙종은 『사변록』과 [이경석 신도비명을 불태우도록 지시하였고, 박세당은 ‘공인된’ 사문난적이 되었다. 노론이 정계와 사상계를 주도하는 정국에서 소신 있는 학자의 양심을 보인 박세당의 행동은 ‘불순’으로밖에 치부될 수 없었다.
▲박세당이 석천동(石泉洞)에서 소박한 삶을 살며 저술 활동을 하던 사랑채 건물.
사랑채는 동쪽의 수락산을 배경으로 하고 서향집에서 왼쪽을 향하고 있다.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소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1666년(현종 7) 5월 부인 남씨가 사망하자, 박세당은 이듬해 광주 정씨와 재혼하였다. 1668년 박세당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양주 수락산 석천동(石泉洞)으로 들어갔다. 수락산 일대에는 부친 박정이 인조반정의 공을 인정받아 정사공신이 되면서 받은 사패지(賜牌地: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벼슬아치에게 임금이 내려준 논밭)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세당은 수락산 기슭 서계(西溪)의 아름다운 풍광을 사랑했다. 아예 호를 서계초수(西溪樵叟)라 하고, 서계의 골짜기 이름을 석천동(石泉洞)이라 하였다. [석천동기(石泉洞記)]에는 석천동에 얽힌 사연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박세당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現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石泉洞: 조선시대) 산146-1에 궤산정(簣山亭)
이란 정자(亭子)가 있고, 정자앞 바위 왼쪽엔 석천동(石泉洞)이란 글자와 오른쪽엔 취승대(聚勝臺)란 글
자가 각자(刻字) 되어있다.
박세당의 집 가까이 흐르던 개울은 원래 동계(東溪)였지만, 그의 호가 서계(西溪)였기 때문에 서계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또한 은거의 뜻을 표방하여 잠수(潛水)라 했고, 개울가 언덕은 잠구(潛丘)라 불렀다. 그는 자신이 묻힐 곳은 낙구(樂丘)라 하였는데, 결국 박세당은 이곳에 묻혔다.
박세당이 석천동에서 가장 좋아한 곳은 취승대(聚勝臺)였다. 박세당은 『취승대기(聚勝臺記』에서, 사계절의 경치를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박세당의 묘표(墓表)에는 “물가에 집을 지을 때 울타리를 치지 않고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배나무, 밤나무를 집 주위에 둘러 심고, 오이를 심고 밭을 개간하고 땔감을 팔아 생활하였다.
농사철에는 늘 밭에서 지냈으며, 가래를 메고 쟁기를 짊어진 자들과 어울려 다녔다. 처음에는 간간이 조정의 명에 나가기도 했지만, 뒤에는 누차 불러도 나가지 않고 30여 년을 살다가 생을 마치니, 수(壽) 74세였다. 머물던 집 뒤쪽으로 백 수십 보 되는 곳에 안장하였다.
한때는 정계와 사상계를 주도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생산 활동에 종사하면서 말년의 생을 보낸 박세당은 이곳에서 색경(穡經)을 저술하며, 주자의 해석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학문 해석의 결과물을 발표하기도 했다. 노자와 장자의 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자유로운 학문세계를 추구한 곳도 이곳이었다.
17세기 후반 소론의 중심으로, 독자적인 사상을 지킨 고집스러운 선비였지만 박세당은 수락산 석천동에서 마음의 안식처를 찾았다. 야복(野服)을 하고 자연을 음미하며 신선처럼 나무꾼처럼 살아가고자 했던 박세당의 흔적들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락산 자락에서 유유자적하며 치열한 삶을 살아간 그의 자취를 독자들은 찾아보기 바란다.
[참고문헌]
김학수. <반남 박씨 서계 박세당 가문>. 『끝내 세상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삼우반, 2005: 이종묵, <수락산 서계의 나무꾼 박세당>, 『조선의 문화공간 3』 , 휴머니스트, 2006.
글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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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글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님의 글에서 일부 수정 편집되었음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