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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형제와 같은 띠섬 "대모도와 소모도"
대모도(大茅島)
전라남도 완도군의 청산도 서쪽에 위치한 도서이다. 대응지명으로
북쪽에 소모도가 있다. 남쪽에는 불근도(佛斤島)가 있다. 행정구역상
청산면 모도리에 속한다. 최고 고도는 242m로 남북으로 산줄기가
이어져 마을은 동서 해안에 형성되어 있다. 서쪽의 모서리에는
모서항이 축조되어 있으며, 동쪽의 모동리에는 청산면 모도
출장소가 있다. 『해동지도』(강진)에 대모도와 소모도가
별도로 그려져 있다. 북쪽의 소모도는 모도의 북쪽에 있다 하여
행정상 모북리라고 한다. 갈대가 많은 것에서 지명이 유래되었으며
,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에 산신당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출처:(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편 지명, 2010. 12., 국토지리정보원)
소모도(小茅島)
완도에서 남쪽 바다를 바라다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은 섬이 하나 있다. 완도에서 가까이 있으면서도 큰 바다에
위치해 물살이 높고 거칠어 완도 사람들은 가기를 꺼려 하는
섬이지만 한 번쯤 가 보고 싶었던 섬, ‘소모도(小茅島)’이다.
소모도는 면적 0.78km2, 해안선 길이 8km에 불과한 조그마한
섬이다. 마을은 북쪽 해안 만입부 고지대에 모여 있으며 주민
대부분이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다. 현재 23가구 31명만이
소모도에 남아 있고, 일흔이 넘은 고령의 노인이 대부분으로
생활이 어려운 섬이다. 인구가 많던 1971년경에는 42가구
275명이나 이 작은 섬에 거주하였다 한다. 주위 어장이 좋아
그나마 생활이 가능한데, 소득이라곤 밭에 치자나무를 심어서
치자를 생산하는 것이 고작이고, 농사라고 해 봐야 벼농사는
고사하고 밭농사도 집에서 먹을 수 있는 텃밭 수준에 불과하다.
주섬인 대모도와 달리 김 양식의 자리가 마땅치 않아 젊은이
들이 살 수 없는 것이다. 그 대신 특산물인 청정 해역에서 잡히는
은빛색의 멸치와 해조류 채취 등을 주업으로 살고 있으며,
돔·우럭·삼치 등의 낚시터로 유명하다.
소모도는 1620년경 황씨가 처음으로 입주하였다 전하고 있으며,
그 후 최씨, 서씨 등 여러 성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모도의 북쪽에 있는 섬이라 하여 ‘모북리’, 혹은 ‘소모도’라
칭하였다. 이곳에서도 정월 초하루에는 마을의 평온과 풍농,
풍어와 주민들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며, 효자 설화가 전해진다.
완도항에서 오후 두 시에 출항하며 여서도를 가는 여객선은 하루
한 차례 섬사랑7호가 소모도-대모도-장도-청산도를 경유해
여서도까지 운행하며, 소모도에서 완도항으로 나오는 여객선은
소모도에서 7시 30분에 출발하여 소모도에는 10시 30분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곳은 마을과 선착장이 상당히 거리가 있다. 높이도
해발이 제법 높은 고지대에 속한다. 거기에다 바깥에서는 보기
힘든 언덕배기 수풀 사이로 들어선 숨어 있는 집들이다. 대모도
처럼 주로 돌담으로 이곳의 강풍을 견뎌 내고 있기도 하다.
더불어 고지대이다 보니 이곳에서는 맑은 날에는 제주도 한라산,
대모도와 청산도, 여서도가 그림처럼 펼쳐지며 완도의
다도해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 전신주에 나타난 도로명
주소는 ‘소모도길’로 ‘1번에서 51번’까지 있다. 여기서부터 마을이
시작된다는 의미겠다. 여기서 마주 보이는 곳이 바로 완도 본섬이다.
소모도에서 완도까지는 그리 짧은 거리는 아니다. 게다가
대모도와 소모도 간은 보기에는 가깝게 보여도 2km에 이르는
거리다. 대모도는 일찍이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으나 소모도는
1.5km인 구간만 가능하던 전선을 잇는 철탑을 세울 수 없었던
상황. 전기 혜택을 받지 못해 자가 발전에 의존하다가 유류대
일부를 군에서 지원받아 하루 네 시간 정도의 제한적이고
불안정한 전기를 공급받아 불편한 생활을 해 왔다.
그렇지만 지금은 기술의 발달로 대모도에서 소모도로 전기
공급이 24시간 이루어진다. 1년여 난공사 끝에 24시간 전깃불을
밝힌 것이 지난 2004년 5월의 일이라고 한다. 수백 년의 어둠을
물리치기 위하여 완도군은 이날 오후 소모도 현지에서 군수와
주민, 출향 인사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농어촌 전화 사업
점등식’을 가졌다. 소모도가 생긴 이후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이를 축하하고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니 다행한 일이다.
마을 골목길. 이곳은 마을 골목뿐 넓은 공간은 없다. 집집마다
넓은 마당을 가진 곳이 없을 정도다. 그나마 곳곳에 우물터가
있어 이곳이 물이 많은 곳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무인 등대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언덕을 넘으면 바로 앞 물탱크
시설이 있는 부근에 하얀 등대가 외로이 섬을 지키고 있다.
남동쪽 마을 끝자락에 학교가 있다. 이 학교 역시 지금은
폐교된 학교다. 학교 이름은 ‘모북초등학교’. 역시 학교
건물은 지난 1966년에 만들어진 오래된 건물이다. ‘모북’은
행정 구역 이름으로 소모도를 가리킨다. 아치형 철문을
들어서면 아담한 크기의 운동장이 나타난다. 운동장 가운데에
시설물을 적치해 두고 있다. 한쪽에는 팔각정의 쉼터가 있는데
,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저 멀리 완도와 신지도가 보인다.
그 옆에 작은 교회가 있고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마을 회관
겸 경로당이 있다. 문화 공간이라고는 유일하게 마을 경로당
하나이다. 추운 겨울이면 집집마다 난방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모여서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며 살아간다.
나이든 노인 분들만 사는 섬으로 점점 낙도로
전락해 가고 있는 대표적인 섬이다.
2002년 12월 교회 설립과 함께 9년째 소모도에서 주민들과
더불어 때론 목회자와 친구로 때론 섬 노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편삼만 목사는 TV나 냉장고, 보일러 수리는 기본이고 고령
노인들을 대신해 여러 가지 허드렛일도 도맡아 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있어 소모도, 아니 우리 사회가 살맛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세상은 아직까지 살 만하다. 아직도 세상은
아름답고 따뜻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편목사님 앞으로도 소모도 사람들과 함께
평화로운 삶 영위하시길 바랍니다...
출처:(한국의 섬 - 전남 완도군, 2011. 7. 25., 아름다운사람들)
▼ 2008년 5월 28일 저녁 무렵, 한일고속 2호 선상에서 바라본 대모도와 소모도의 모습
(안개와 구름에 휩싸인 대모도의 모습)
(저녁 노을로 붉게 물든 소모도의 모습)
▲ 명사십리에서 바라본 대모도와 소모도
도착 !! 오분전 ..내릴준비를 합니다.버스에서 졸면 종점에서 기사님이 깨웁니다만...여기에선 누가 깨워줄까요?
▼ 소모도 풍경입니다.
완도항을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우리의 첫 여행지 소모도가 눈에 들어온다.
완도에서 남쪽으로 6마일 거리에 있는 작은섬. 섬이 작아 작은섬, 옛부터 띠가 많아 띠섬
또는 소모도로 불리웠다. 행정구역상 해방전에는 소모도리, 해방후에는 모북리가 되었다.
완도항을 출발한지 30여분만에 소모도 선착장에 도착한다.
우리는 노를 저어 고기잡이를 나가는 목선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50~60년대에나 볼 수 있는 신기하고 귀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소모도는 보통 해안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섬들과는 다르게 섬 중턱에 마을이 위치해 있었다.
백사장이 없고 조금만 바다로 나가면 수심이 깊어 지는 이 곳에 해일과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에 마을을 자리잡은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였다.
방파제에서 마을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리프트가 있었다. 사람은 타지 못하고 물건만 올릴 수 있는
리프트다. 울릉도, 여수 광도에도 비슷한 장치가 있지만 또다른 운반장치로 완도에서는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다. 섬에 들어가면 갈 수록 신기함이 가득한 섬이였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 마을속으로 들어가면... 예전에 사용하던 우물이며...
강풍을 견뎌내기 위해 쌓아올린 돌담과 넝쿨에 쌓인 마을은 개발의 흔적은 전혀 없고 60~70년대
시골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마치 여느 민속촌에 온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숲풀사이로 들어선 집들의 모습은 향수를 불러일으키에 충분한 정감어린 풍경이였다.
마을에 유일한 숙박시설인 마을회관에 짐을 풀어놓고 본격적인 소모도 탐방에 나섰다.
소모도 등대에 올라서니 멀리 완도, 신지도가 보이고 뒷편으로 대모도 사이에 바위섬이 보인다.
낚시가 취미인 분들은 저녁 횟감 준비를 위해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이장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고... 나머지 분들은 선착장 근처의 몽돌해수욕장으로 길을 나섰다.
석양을 보기 위해 소모도 서쪽지역에 도착하자 멀리 좌측부터 소안도(뒷편 보길도)
노화도, 횡간도, 동화도, 백일도, 흑일도와 희미하게 해남 땅끝마을까지 보인다.
해가 저물어가자 선착장으로 속속들이 배가 들어오고...
우리가 준비해온 지팡이, 주방용품, 비누샴푸세트, 수건, 할머니들이 좋아하시는 사탕까지
마을 이장님과 부녀회장님께 전달하는 행사를 갖었다. 작은 것이지만 이 곳 소모도 주민들과
정을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 오지섬 여행에서 얻는 경험을 바탕으로 십시일반 찬조한 물품들이다.
완도체도에서 바라본 아스라이 보이는 소모도와 대모도
완도 체도에서 수평선을 바라다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섬이 있다. 가장 가깝게 보이며 섬이 작아서 한번쯤 가보고
싶었던 소모도! 남쪽으로 6마일 거리에 위치하며
주변에 대모도, 청산도가 있다.
소모도는 1620년경 황씨가 처음으로 입주하였다 전하고
있으며, 그 후 최씨, 서씨 등 제성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모도의 북쪽에 있는 섬이라 하여 ‘모북리’,
혹은 ‘소모도’라 칭하였으며, 동으로 대령산, 남으로
불선봉, 서쪽에는 등대가 있는 섬이다.
섬이 작아 작은 섬이라 하였으며, 옛날부터 띠가 많아
띠 섬 또는 소모도라 칭하였다고 한다. 면적은 0.078
㎢에 불과한 조그마한 섬이다. 현재 23가구 31명만이
소모도에 남아있고, 70살이 넘은
고령의 노인이 대부분이다.
완도를 거쳐 소모도 대모도 장도를 거쳐 여서도를 거치는 섬사랑호 완행 여객선
목적지인 소모도와 대모도
소모도는 대부분 독거노인들이 많아 젊은사람들이 거의없어 지금도 어업수단은 옛날 목선이 많다
산속에 묻힌듯한 소모도 섬마을
소모도 와 대모도 사이의 여바위
마을뒷편에는 그냥 산으로 둘러쌓여있다
객지에서 자식과 친척들이 부모들의 위안잔치를 위해 소모도를 방문하고 있다
소모도 초입의 배를 대는 포구 모습
나무 터널을 이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모습
소모도에 가보면 예전 오래전 우물가 모습도 그대로 남아있다
소모도 우물가 풍경
이곳은 동네 사람들이 날씨가 덥거나 할때 바다를 바라보며 사랑방 역할을 소모도 휴게소다
마을길은 경운기 한대정도 들어갈 정도 소모도에서는 차량은 마을로 들어갈수가 없다
담도 돌이고 집과 집사이는 돌다리를 놓아 특수한 형태로 이루워져 있다
마을회관안에서 전복잔치위해 잡아온 자연산 전복
오래된 소모도 돌담풍경
▼지금은 폐교된 모북 국민학교
폐교된 학교 교실모습
겨우 한사람이 들어설수 있는 마을길
소모도 개방형 화장실 오다가다 똥누는 모습도 쳐다볼수있다
소모도 보물 보호수
리어커로 짐을 운반하는 모습
마을이 비탈로 지어진 관계로 마을곳곳마 이렇게 돌계단이 있다
비탈길과 소모드 마을
전형적인 제주도와 닮은 소모도 민가모습
소모도는 대문이 따로없고 풀로 이루워진 돌담이 대문역할을 한다
풀숲에 엄폐된 마을 모습
돌담과 소모도 마을 전경
이곳은 젊은사람은 살수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99% 떠나버려 빈집들이 절반이상을 차지한다
스레트 옛날 집들
완도사투리로 땟밤나무로 부르는 넘도 밤나무
소모도 농가풍경
길은 멀어도 안정애
강남풍 작사
김부해 작곡
안정애 노래
1절
멀어도 멀어도 길은멀어도
님게향한 내마음은 아주가까워요
수만리 이국땅 인기에 쌓여도
첫사랑 그대만이 그대만이
그리워 그리워 흐느껴 움니다
2절
멀어도 멀어도 길은 멀어도
순정어린 내맘속에 그대뿐이에요
지금도 그대를 잊이를 못하여
첫살랑 그대만이 그대만이
그리워 그리워 몸부림 침니다
대전부루스, 밤비의 부루스, 순정 부루스. 길은 멀어도 등 우리에게
친숙한 주옥같은 가요들을 세상에 발표하여 많은 팬들의 심금을 울렸던
여가수 안정애님의 인간미에 감동받아 소담카페
회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아래 글을 싣습니다..
안정애씨는 1936년 경남 하동에서 대의원까지 지낸 부친과 포목상을 하시던 모친 사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형제가 자그마치 열 두 남매로 그의 모친은 자식을 많이
낳았기 때문에 당시 하동군수로부터 표창까지 받았었다고.
안정애씨의 본명은 안순애.
유년 시절 안정애씨는 당시 작명가로부터 이름에서 달이 구름에 가린 형상이라
객지로 자리를 옮겨야 빛을 발한다는 말을 듣고 이 때부터 서울로 가서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키움. 실제로 그의 열 두 형제들은 모두 노래를 잘했기 때문에
오히려 나중에 큰 가수가 되는 안정애씨 자신이 집안에서 노래를
가장 못한 축에 들었다고.
또한 집이 하동시외버스터미널 앞에 위치한 커다란 집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연예인들이 지방공연을 오면 종종 그녀의 집에서
기거를 했다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들을 접하면서 더더욱 연예인의
꿈을 키웠고 특히 당시 신인무명가수였던 박재란씨와는 친구처럼 지냈는데
둘은 외모부터 목소리까지 닮아 주위로부터 쌍둥이라는 소리까지 들음.
고향 하동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마친 안정애씨는 스무 살 되던 해
드디어 화려한 가수에의 꿈을 안고 몰래 가출. 말 그대로 비로도치마에
삐찌꾸두를 신고... (삐찌꾸두란 뾰족구두를 그 당시는 그렇게 부름.)
그러한 멋쟁이 차림으로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으나 정작 가수에의 길은
전혀 찾을 길 없어 두 달 간 친구 언니집에서 일을 거들어주고 기거하다가
결국 헛수고로 끝난 채 고향으로 되돌아옴.
그러나 몇 개월 뒤 또다시 몰래 집을 빠져 나와 다시 서울로 도주해 레코드사의
특약점 등을 돌아다니며 가수 데뷔의 길을 찾아보았으나 역시 쉽지 않은 일.
그러던 중 우연히 가수 고복수씨가 설립해 운영하던 동화예술학원의
간판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는 이에 주저치 않고 가수과정에 등록.
허나 안정애씨는 차비가 없어 당시 청파동에서 학원이 있던 명동
까지 매일 걸어 다니며 노래를 배우기 시작, 학원에 등록한 지
1주일 만에 운 좋게도 꿈의 무대인 신인콘테스트 선발무대에 서게 됨.
이 신인콘테스트에서는 블루스, 트로트, 발라드를 각각 한곡씩 모두
세 곡을 부르게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그는 당시 히트 명곡이었던 ‘카츄샤의
노래’와 ‘봄날은 간다’, 그리고 ‘과거를 묻지 마세요’ 등을 불러 신인가수로 발탁,
작곡가 김부해선생(당시 신세기 문예부장)에게 픽업되어 드디어
첫 취입곡을 받아 음반을 내게 됨.
이 노래가 바로 그녀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인 ‘밤비의 블루스’.
이 노래를 NG 없이 단 한 번 만에 녹음을 끝냈다고 하는데 빅
히트하면서 말 그대로 신데렐라로 부상.
지금 이 노래 감상, 특히 단 한 번 만에 취입을 끝냈다는 바로
그 녹음 테이프에서 직접 준비. 김방아 작사, 김부해 작곡의 이
노래는 1958년에 취입된 그녀의 데뷔곡으로서 역시 ‘블루스의
여왕’답게 첫 곡부터 블루스곡.
특히 빼어난 미모와 허스키한 매력적인 목소리로
미8군 쇼 단체에 스카우트되어 미8군 무대에 설 것을 제의받기도 했으나
당시 신세기 강윤수 사장이 목을 많이 쓰게 되면 목소리를 쉬어버리고 또
가수로서의 수명이 짧아질 것을 우려해 반대,
미8군 무대에 서지 못했고 또한 영화 출연 역시 제의 받았으나
마찬가지로 사장이 허락하지 않아 역시 불발.
결국 가수 활동, 즉 음반 취입 외에 아무 일도 못하게 함으로서 가수로서의
목소리를 관리해주며 배려해준 것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역시 메이저회사
대표답게 가수들의 관리를 잘하셨다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고. 반면 늘 SP
음반의 앞뒤를 장식하던 신신레코드사의 대표적인 남녀 인기가수의
파트너격이었던 남자가수 윤일로씨는 '항구의 밤' '추억의 영도다리'
등의 히트와 더불어 지방, 특히 부산공연을 잦게 갖자 목을 버렸다고
도중하차시킨 일화 역시 유명.
이어 준비한 곡은 안정애씨가 발표한 또 하나의 부르스곡 ‘순정의 부르스’.
이 노래는 ‘미워도 다시 한번’의 작곡자 이재현씨의 작사, 작곡의 노래로
1961년도에 발표된 노래.
그는 가수생활을 접은 후 한때 매우 어려운 생활을 겪기도. 딸이 여섯 살 되던 해인
1978년 무렵에는 보증금 1만원에 월세 3천원 짜리 단칸방에 살며 야채가게를 시작,
직접 새벽마다 채소밭에 나가 배추나 오이 등을 따서 장사를 시작하고 또 숯을 봉지에
담아 팔기도 하면서 하루 종일 앉아 일하느라 허리병까지 앓았다고. 이어 79년부터는
다방 그리고 치킨센터를 차려 종업원 없이 혼자 도맡아 일을 했을 정도로 고된 생활 연속.
그러나 이러한 일로 생계를 이어 가면서 본인이 왕년의 인기가수였다는 사실만큼은
철저히 숨겼다고 하는데 그 것도 오래가지 않아 결국 모 여성지에 이러한 안정애씨의
생활에 대한 기사가 실리게 되고 이어 TV에 까지 소개되면서 결국 찾아오는 팬들로
인해 더 이상 장사를 순수하게 할 수 없어 모두 정리함.
이러한 고생 끝에 키운 그녀의 외동딸은 훌륭하게 자라 숙명여대 불문과를 나온 뒤
현재는 결혼해 무의탁 가장이나 어린 학생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안정애씨 역시 집에 있는 이불들을 모두 딸에게 보낼 정도로 딸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는 중.
주위 누구에게도 선생님, 선배라는 호칭 대신 언니, 누나라고
불러달라고 주문할 정도로 권위주의를 버리고 젊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 또한 손이나 몸에 보석 장신구를 두르기보다는 스스로
인간보석이 되어야한다는 지론으로 생활.
남대문시장 새벽 쇼핑을 자주 하는 편.
원로가수로써 그녀에게 바람이 있다면 늘 느끼는 것처럼 전국에는 외로운
노인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된다며 이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때까지
공연을 통해 이들과 함께 손뼉치며 눈물도 함께 흘리고 싶다고. 실제로
그녀는 경로위문공연단체인 한마음봉사단의 김영수 단장과 함께
18년간 공연을 하며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고 이러한 공로로
작년에는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즐겁게 사는 방법은 그들과 더불어 있는 곳이 늘 궁전이고 잔치라는
생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가수 안정애 선생은 아직도 롱드레스와
청바지, 부츠가 여전히 잘 어울리는 멋쟁이.
오늘 마지막으로 준비한 노래는 홍성기 감독의 영화 ‘길은 멀어도’의
주제가. 이 노래는 강남풍 작사, 김부해 작곡으로 1960년도에 발표.
2016-05-28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