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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촌 대사헌 유공 신도비명병서
(龜村大司憲柳公神道碑銘幷序)
이상일(李尙逸)이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부임한 지 몇 달이 되어 공인(工人)에게 귀촌(龜村) 선생 유공(柳公)의 신도비 비석을 다듬으라 명하고, 일이 끝나자 바로 풍산(豐山) 김응조(金應祖)에게 말하기를 “귀촌의 덕과 공렬은 마땅히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있어야 합니다.
서애(西厓) 유 선생(柳先生)이 찬술한 행장(行狀)과 묘갈문(墓碣文) 및 묘지문(墓誌文)이 있어 달리 구할 것이 없습니다. 그대가 세 편의 글을 편집하여 한 편의 글을 지어 가져오십시오.”라고 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공은 이름이 경심(景深)이고 자가 태호(太浩)이며, 대대로 안동(安東) 풍산현(豐山縣)에서 살았다.
7대조 유백(柳栢)이 고려 말에 벼슬하였고, 아들 유난옥(柳蘭玉)은 도염서 영(都染署令)을 지냈다. 그의 아들 유보(柳葆)는 예빈경(禮賓卿)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봉(追封)되었고, 아들 유종혜(柳從惠)는 조선조에 들어와 공조 전서(工曹典書)가 되었다.
그의 아들 유홍(柳洪)은 좌군 사정(左軍司正)을 지냈고, 아들 유소(柳沼)는 호군(護軍)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는데 공에게 증조(曾祖)가 된다. 조부 유자온(柳子溫)은 진사(進士)로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아버지 유공권(柳公權)은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지내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영양 남씨(英陽南氏)는 이조 참판(吏曹參判) 남민생(南敏生)의 증손녀이자 진사(進士) 남팔준(南八俊)의 딸로, 정덕(正德) 병자년(1516, 중종11)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 서뛰어난 재능이 범상치 않았고, 성장하며 과거공부를 하여 정유년(1537, 중종 32)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니 재주와 명성이 대단하였다. 성균관에서 요승(妖僧)을 논박한 상소는 대부분 공의 손에서 나왔다.
기해년(1539, 중종 34)에 정랑공(正郞公)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서 임종하였고, 어머니 남부인(南夫人)도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몸이 약해져서 이미 삼 년의 상을 다하지 못하고 곡기를 끊고 세상을 떠났다. 공은 형제 중에 장남으로서 연약한 아우와 어린 누이가 집에 가득하였지만 고생스럽게 보살피고 양육하여 장성하게 하였다.
갑진년(1544, 중종 39)에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가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었다. 을사년(1545, 인종 1)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천거되어 제수되었다가 바로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배수되었다. 이때에 권세를 가진 간신이 옥사(獄事)를 얽어 공문서가 가득 쌓였지만 공은 물 흐르듯 문서를 처리하였고, 또한 사림(士林)을 보호한 공적이 있었다.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유 아무개가 아들을 잘 두었다.”라고 하였다.
병오년(1546, 명종 1)에 중시(重試)에 수석 합격하여 공조 좌랑(工曹佐郞)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배수 되었다. 정미년(1547, 명종 2)에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거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배수되었다. 이기(李芑)가 여러 차례 은근히 소통하려고 하였으나 공은 피하고 만나지 않았다. 한지원(韓智源)이 이기(李芑)의 앞잡이가 되었을 때 공이 면전에서 잘못을 지적하자 두 사람이 유감을 품고 공을 탄핵하여파직되었다.
신해년(1551, 명종 6)에 서용(敍用)되어 회인 현감(懷仁縣監)으로 나가 흩어진 유민(流民)을 불러 모아 고을이 마침내 온전해졌다. 계축년(1553, 명종 8)에 유신 현감(維新縣監)으로 이배되었는데, 고을이 넓고 송사(訟事)가 많았다. 공이 막 부임하여 좌우의 일을 판결함에 해가 기울지 않아서 빈객들과 더불어 음식을 먹고 활을 쏘며 즐기니 온 고을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병진년(1556, 명종 11) 사유(師儒)로 뽑혀서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이 되었다가 호조 정랑(戶曹正郞)ㆍ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옮겼다. 무오년(1558, 명종 13)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남쪽 지방을 순검(巡檢)하였는데 돌아오기 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종성 부사(鍾城府使)가 되었다. 공은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 곤욕을 당해 오랫동안 낮은 관직에 있었는데, 이것이 매우 애석하다는 공론이 일어나 정주 목사(定州牧使)가 되었다.
윤원형(尹元衡)이 사적인 부탁으로 백성들을 징발해서 바다를 막아 밭을 개간하려 하자 공이 말하기를 “공적인 일이 한창 많아서 힘이 닿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형이 얼굴빛을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수일 만에 대간(臺諫)들이 취승(驟陞)했다는 논의가 있었고 바로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강등되었다.
경신년(1560, 명종 15)에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어 백성을 사랑하고 호족들을 제어하니 온 관내가 숙연(肅然)해졌다. 임기가 끝났을 때 공이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부임한다고 잘못 전해지자 고을의 아전 중에서 법도를 벗어나는 집을 가진 자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바로 헐어버렸다.
계해년(1563, 명종 18)에 다시 정주 목사(定州牧使)가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이배되었다. 의주에는 예전부터 옹성(擁城)이 없었는데, 공이 창고를 풀어 역부(役夫)들에게 넉넉히 군량을 공급하니 몇 달 만에 공사를 마쳤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회령 부사(會寧府使)가 되었고, 바로 북도 절도사(北道節度使)가 되었다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어 돌아왔다.
정묘년(1567, 명종 22)에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를 겸하여 대왕의 상사(喪事)를 즉시 준비하여 다스리고, 9월에 명나라 연경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1)에 호조참판 겸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다. 경오년(1570, 선조 3)에 대사헌이 되어 개연히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았다.
신미년(1571, 선조 4)에 체직되어 병조 참판(兵曹參判)이 되었고, 3월에 서도(西道)의 방백(方伯)자리가 비자, 대신(大臣)들이 아뢰기를 “관서 지방은 국가의 문호이니 마땅히 감사(監司)를 잘 가려야 합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공을 제수하였다. 공은 예전부터비병(脾病)을 앓고 있어서 병든 몸을 이끌고 수레를 타고 부임하였다. 5월에 병이 심해지자 장계를 올려 체차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6월 2일에 행차가 장단부(長湍府) 초현리(招賢里)에 이르렀을 때 세상을 떠났다.
죽음에 미쳐 집안일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었다. 말과 행동, 정신과 식견이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아 환하였다. 죽음이 알려지자 임금께서 내관(內棺)을 하사하고 영구(靈柩)가 성 밖에 이르자 예관에게 조문하고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11월에 안동 천등산(天燈山) 선영(先塋) 곁으로반장(返葬)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호방하고 준일하여 문학(文學)으로 성취하고 예(藝)에도 모두 통달하였고, 어려운 일을 처리하는 능력도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세상에서 관리의 일로 자부하는 자들도 모두 미칠 수 없었다. 당시 간신들이 국정을 전횡하며 선비 중에서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처음에는 하찮은 죄로 뒤집어씌우다가 법으로 점점 심하게 하여 죽인 뒤에야 그만두었다.
공은 성품이 곧고 말이 방정하였는데, 대간들이 풍문을 듣고서 공을 탄핵하자 공은 바로 말을 타고 남쪽으로 돌아가며 집을 팔고서 돌아올 뜻이 없음을 보이자, 꺼리는 자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대마도(對馬島)의 사자(使者)가 와서 말하기를 “우리 섬은 국가가 되어 병비(兵備)를 많이 설치하여 외부의 업신여김을 막으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순변사(巡邊使) 김수문(金秀文)이 홀로 조정의 의논을 받들어 군관(軍官)과 역자(譯者)를 파견하여 가서 그들의 허실(虛實)을 살피려고 하였다. 공이 옳지 않다 여기고 말하기를 “오랑캐의 말은 믿기 어렵고 또 조정에서 이 오랑캐의 명을 제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벌을 내리면 복종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에게 상을 내려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김수문이 그의 식견에 탄복하고 마침내 공의 말로 아뢰고 그만두고 보내지 않았다.
명종이 승하하고 조사(詔使)가 입국할 때 조사를 맞이하는 복색(服色)을 의논하였는데, 공이 홀로 말하기를 “반조(頒詔)는 천하의 큰 경사로써 권도로 길례(吉禮)를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까 걱정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두씨(杜氏)의《통전(通典)》설을 얻어 보니 공의 말과 대략 같아서 의논이 마침내 정해졌다. 대개 국가적인 일을 만나면 일찍이 머뭇거리지 않고 반드시 자신이 담당하였고, 논의한 바가 모두 사의(事宜)에 합당하였으니, 쓰임에 알맞은 좋은 재주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이 수명을 늘려주지 않고 지위가 기량에 미치지 못하였다. 아아! 운명이다.
공은 교수 배관(裵寬)의 딸에게 장가들어 9녀 1남을 낳았다. 사위는 사인(士人) 전해(全海)와 윤대명(尹大鳴), 감역(監役) 양천우(梁天遇), 진사(進士) 장우(張遇), 사인(士人) 최확(崔確), 진사(進士) 이징(李懲), 군수(郡守) 여대로(呂大老), 사인(士人) 조당(趙塘), 충의위(忠義衛) 이의(李檥)이다.
아들 성귀(成龜)는 일찍 죽었다. 성귀의 아들 암(嵒)이 공의 묘소를 참판공(參判公)의 묘소 뒤편에 이장하고, 비석을 옮기다가 묘소 아래에 이르기도 전에 죽었다. 아들이 없어 참봉 원경(元慶)을 후사로 삼았다. 아들 세봉(世鳳)이 이후(李侯)에게 고하여 명문(銘文)을 새기려고 도모하였는데, 이후(李侯이상일)는 바로 이의(李檥) 공의 사위이다.
일찍이대성(臺省)을 두루 거치고 이제수령을 수행하는 여가에 이 일에 뜻을 두고능숙하게 칼을 놀리듯이 일을 여유 있게 처리하였다.
아아! 공이 돌아가시고 18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서애(西厓유성룡) 선생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만약에 공이 세상에 살아있었더라면 반드시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가 있었을 것인데, 우리 같은 무리가 대임(大任)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하늘이 세상에 없는 인재를 태어나게 하였지만 쓰기를 다하지 않았으니, 사람이 어찌할 수 없었던 바이다.
글을 지을 때에 붓을 대면 소나기가 오듯 글이 줄줄 나왔지만 천연스러워 꾸밈이 없었다. 저술한《귀촌집(龜村集)》2권이 세상에 전한다. 공의 외증손(外曾孫)인 전(前) 하양 현감(河陽縣監) 최제(崔濟) 공이 실로 간행하는 일을 주관하였다고 한다. 공은 일찍이 귀촌(龜村)이라 자호(自號)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어려운 일을 만나지 않았다면 / 不遇盤根
예리한 칼을 어디에 쓰겠는가/ 利器安用
국가가 기울어질 때에 / 大廈將傾
정말로 동량이 필요하네 / 正要樑棟
공은 이미 두터운 자질 받아 / 公旣稟厚
재주와 덕을 온전히 갖추었고 / 材全德備
은대와 옥서에서 / 銀臺玉署
처음으로 벼슬을 시작했네 / 發軔伊始
맑은 조정에서 명망이 높았지만 / 望重淸朝
도중에 간사하고 시기하는 자를 만나 / 道觸奸猜
공보가 산림에 물러나고 / 山林公輔
인재가자잘한 일을 맡았네 / 米鹽長材
웅대한 부와 주에 부임하여 / 大府雄州
황폐한 성을 요새로 만들었고/ 節鎭荒陴
번잡한 일들을 제거함에 / 剗劇剸繁
우레 치고 폭풍 치듯 하였네/ 雷厲風飛
옥절이 겨우 돌아왔지만 / 玉節纔還
나라에 큰 슬픔이 있었고/ 國有大慼
예를 논하고 사신을 맞이함에 / 議禮迎詔
밝음이귀촉과 나란했고 / 明竝龜燭
여러 논의를 결정하자 / 衆論隨定
백관들이 탄복하였네 / 百僚聳服
상대에서 법을 집행하여 / 持憲霜臺
무너진 기강이 진작되었고/ 頹綱振肅
평안도에서 교화를 펼쳐 / 宣化箕都
관서 관문을 방어하였네/ 西門鎖鑰
하늘이 큰 임무를 내렸건만 / 天將降大
귀신이 수명을 빼앗았고 / 鬼奪其壽
공의 재주 팔리지 않았지만 / 公才未售
공의 덕은 썩지 않으리니 / 公德不朽
내가 비석에 명을 새겨서 / 我銘貞之
후세에 길이 고하노라 / 用詔悠久
[주01] 이상일(李尙逸):
1611~1678.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림(汝林), 호는 용암(龍巖)이다. 이상일은 유경심(柳景深)의 아홉 번째 사위인 이의(李
檥)의 사위로 유경심에게는 외손서(外孫壻)가 된다. 1655년 안동 부사에 임명되고 여러 곳의 부사를 지낸 뒤 참의ㆍ승지ㆍ판결사
ㆍ황해도 도사ㆍ황해도 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삼인사적(三仁事蹟)》이 있다.
[주02] 뛰어난 재능:
원문의 ‘영탈(穎脫)’은 비상하게 뛰어난 재능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국 시대에 조(趙)나라가 진(秦)나라의 침략을 당하여 평원군(平
原君)이 초(楚)나라에 원조를 청하러 갈 때 수행원으로 문무겸전(文武兼全)한 인재 20인을 선발하였는데 1인이 부족하였다.
이때 평원군의 식객(食客) 모수(毛遂)가 자신이 가겠다고 자청하자, 평원군이 묻기를 “자네가 나의 문하(門下)에 있은 지 몇 해인
가?”라고 하니, 이에 모수가 “3년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평원군이 “훌륭한 인재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과 같아서 그 끝이 곧
밖으로 나오는 법인데 자네가 나의 문하에 있는 3년 동안에 내가 알지 못하였으니 자네에게 특별한 재능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
다.
이에 모수가 “제가 이제 주머니 속에 들어가겠습니다. 전날에 주머니에 들어갔더라면 끝만 나올 뿐이었겠습니까? 송곳 자루까지 다
나왔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주03] 요승(妖僧):
보우(普雨, 1509~1565)를 가리킨다. 호는 허응당(虛應堂)ㆍ나암(懶菴)이다.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키고 나라의 공인 정찰(淨刹)
을 지정하게 하며 과거에 승과(僧科)를 두게 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억불정책(抑佛政策)에 맞서 불교를 부흥시켜 전성기를 누
리게 하였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조야의 배불상소(排佛上疏)와 유림(儒林)의 성화에 밀려 승직이 박탈되고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제주 목
사 변협(邊協)에 의해 참형(斬刑)되었다. 보우가 죽은 뒤 불교는 종전의 억불정책(抑佛政策) 시대로 되돌아가 양종제도(兩宗制度)
와 승과 제도가 폐지되는 등 심한 억압을 받게 되었다. 저서에《허응당집(虛應堂集)》ㆍ《선게잡저(禪偈雜著)》ㆍ《불사문답(佛
事問答)》 등이 있다.
[주04]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
1478~1548. 본관은 안동,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ㆍ훤정(萱亭)ㆍ송정(松亭),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5년(인종 1) 5월 의정부 우찬성이 되었고,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죽었다.
1567년 신원(伸寃)되었고, 이듬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591년(선조 24)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충재집(冲齋集)》
이 있다.
[주05] 중시(重試):
문과(文科)에 급제한 당하관(堂下官)을 대상으로 치르는 과거로 10년에 한 차례씩 시행하였으며,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상관(堂上
官) 정3품으로 품계가 올랐다.
[주06] 이기(李芑):
1476~1552.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문중(文仲), 호는 경재(敬齋)이다. 150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1527년 정조사
(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윤임(尹任)의 세력을 제거한 공로로 보익 공신 1
등에 책록되고 풍성부원군(豊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549년(명종4) 영의정에 올랐다. 죽은 뒤 시호는 문경(文敬)이 내려졌지
만, 선조 초 훈작(勳爵)이 추삭(追削)되고 묘비도 제거되었다.
[주07] 한지원(韓智源):
1514~1561.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달(士達), 호는 청련(靑蓮)이다. 문장에 뛰어나 사가독서(賜暇讀書)하기도 하였으나 윤
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 등 권신에 아부하여 탐학을 일삼아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주08] 한지원(韓智源)이 …… 파직되었다:
1547년 9월에 이기(李芑), 한지원의 모함으로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파직 당하였다. 양재역 벽에 문
정왕후(文定王后)의 수렴청정(垂簾聽政)과 이기(李芑) 등의 비행을 비난하는 익명서(匿名書)가 나붙자, 이를 발견한 정언각(鄭彦
慤)이 이기ㆍ정순붕(鄭順朋) 등에게 알려 옥사(獄事)를 일으킨 사건이다. 이 옥사로 인해 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 등이
사사(賜死)되고, 이언적(李彦迪) 등 20여 명이 유배되었다.
[주09] 사유(師儒):
남에게 스승이 될 만한 유학자로, 성균관(成均館)의 대사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주10] 윤원형(尹元衡):
1503년(연산 9)~1565년(명종 20).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언평(彦平)이다. 소윤(小尹)의 영수이다.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
생으로, 1533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인종(仁宗)이 세자였을 때 세자의 외숙인 대윤(大尹)의 영수 윤임(尹任)과 다투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파직 당했다가 다음 해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득세했다.
을사사화의 공으로 서원군(瑞原君)에 봉해졌고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을 계기로 대윤의 잔당을 모두 숙청했으나 1565
년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되고 강음(江陰)에 귀양 가서 죽었다.
[주11] 취승(驟陞):
갑자기 높은 벼슬에 승진되는 것을 말한다.
[주12] 서도(西道)의 방백(方伯):
서도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평안도 관찰사를 가리킨다.
[주13] 비병(脾病):
비장(脾臟)이 아픈 병으로, 배가 아프고 소화가 잘 안 되며, 몸이 무겁고 뼈마디가 아프며, 가슴속에 기가 가득 차서 숨이 찬 증세를
보인다.
[주14] 반장(返葬):
외지(外地)에서 죽은 사람을 고향에 데려와 장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주15] 김수문(金秀文):
1506년(중종 1)~1568년(선조 1).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장(成章)이다. 진사 김임(金銋)의 아들이다.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
여 야인(野人)들, 곧 여진족이 함경도 종성에 침입하여 사람들을 납치해가자, 1535년(중종 30) 영건 만호(永建萬戶)로서 전투에
참가하여 끌려갔던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그 후 1555년(명종 10)의 을묘왜변(乙卯倭變)과 이듬해 왜적이 침입하자 큰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1565년(명종 20) 평안도 병
마절도사가 되어 여러 번 호인(胡人)의 침입을 격퇴하여 북변 방어에 공을 세웠다. 무인이지만, 평소 책 읽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주16] 조사(詔使):
중국에서 오던 사신으로, 중국 천자의 조칙(詔勅)을 가지고 온다 하여 이르던 말이다.
[주17] 반조(頒詔):
임금이 나라에 널리 알리는 조서를 말한다.
[주18] 두씨(杜氏)의 통전(通典):
당나라 두우(杜佑, 735~812)가 편찬한 책으로, 상고(上古)부터 당 현종(唐玄宗)까지의 제도를 식화(食貨)ㆍ선거(選擧)ㆍ직관(職
官)ㆍ예(禮)ㆍ악(樂)ㆍ병(兵)ㆍ형(刑)ㆍ주군(州郡)ㆍ변방(邊防)의 각 부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는데 모두 75책 200권이다.
[주19] 대성(臺省):
대간(臺諫)과 같은 말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벼슬을 통틀어 이른다. 이들 관직은 모두 청요직(淸要職)으로 일컬
어진다.
[주20] 수령을 수행하는 여가:
원문의 ‘명금(鳴琴)’은 수령이 되었다는 말인데,《여씨춘추(呂氏春秋)》〈찰현(察賢)〉에 “복자천이 선보를 다스릴 때 거문고만
뜯고 지내면서 당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으나 선보가 잘 다스려졌다.[宓子賤治單父, 彈鳴琴, 身不下堂, 而單父治.]”라고 하였는
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주21] 능숙하게 …… 처리하였다:
칼질을 여유 있게 놀리는 것처럼 어떤 일을 자유자재로 함을 말한다.《장자》양생주(養生主)에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을 위
해 소를 잡는데, 소 잡는 솜씨가 매우 뛰어나 문혜군을 감탄하게 하였다.
포정이 소 잡는 도(道)를 말하면서 “두께가 없는 칼을 두께가 있는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이는 데에 있어 반드시 여유
가 있습니다.[以無厚入有間, 恢恢乎其於遊刃, 必有餘地矣.]”라고 하였다.
[주22] 어려운 …… 쓰겠는가:
원문의 ‘반근(盤根)’은 반근착절(盤根錯節)의 줄임말로 뿌리가 뒤엉키고 가지가 어지러이 교차된 것인데 이런 경우를 만나야 칼이
제대로 드는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사태가 매우 복잡하여 처리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야 훌륭한 인재가 자신의 재능을 보일 수 있
는 기회를 얻게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후한(後漢)의 우후(虞詡)가 “반근착절의 상황을 만나지 않는다면, 칼이 예리한지 무딘지 분간할 수 없으니, 지금이야말로 내가 공
을 세울 기회이다.[不遇盤根錯節, 無以別利器, 此乃吾立功之秋.]”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後漢書 卷58 虞傅蓋臧列傳 虞詡》
[주23] 은대(銀臺)와 옥서(玉署):
은대는 승정원(承政院)의 별칭이고, 옥서는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다.
[주24] 공보(公輔):
대신이 될 것이 기대되는 인물을 이른다. 공보는 삼공(三公)과 사보(四輔)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삼공은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을
이르고, 사보는 전의(前疑)ㆍ후승(後丞)ㆍ좌보(左輔)ㆍ우필(右弼)로 군주의 좌우에서 보필하는 신하들이다.
[주25] 자잘한 일:
원문의 ‘미염(米鹽)’은 쌀과 소금이라는 뜻으로, 자잘하고 번거로운 일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26] 황폐한 …… 만들었고:
계해년(1563, 명종 18)에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되어 몇 달 만에 옹성(擁城)을 완공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주27] 우레 …… 하였네:
한유가〈조주자사사상표(潮洲刺史謝上表)〉에서 당 헌종(唐憲宗)의 무공(武功)을 찬양하여 “중요한 문제를 처리하시니 벼락이
치고 바람이 몰아치는 듯도 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비추는 듯도 하였습니다. 천자의 군대가 이르는 곳마다 조정에 귀순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關機闔開, 雷厲風飛, 日月淸照. 天戈所麾, 莫不寧順.]”라고 한 대목에 보인다.
[주28] 옥절(玉節):
옥으로 만든 부절(符節)인데, 천자의 사신을 옥절사(玉節使) 혹은 옥절랑(玉節郞)이라고 한다.
[주29] 나라에 …… 있었고:
명종의 승하를 말한다.
[주30] 귀촉(龜燭):
거북과 촛불을 말한다. 거북은 점을 쳐서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을 밝히는 것이고, 촛불은 어두운 곳을 환하게 비추는 것이다.
[주31] 상대(霜臺)에서 …… 진작되었고:
상대는 사헌부(司憲府)의 별칭이다. 유경심은 1570년에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이 되어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았다.
[주32] 평안도에서 …… 방어하였네:
원문의 기도(箕都)는 기자(箕子)의 도읍이었던 평안도를 말한다. 유경심은 1571년에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권영락 (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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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龜村先生大司憲柳公神道碑銘幷序。
李侯尙逸。刺安東之數月。命工治龜村先生柳公神道碑石。旣訖工。乃以敎豐山金應祖曰。龜村德烈宜銘。有西厓柳先生所撰行狀碣文及誌文在。不可以他求者也。子其湊合三篇爲一篇以來。謹按。公諱景深。字太浩。世居安東豐山縣。七代祖柏。仕麗季。子蘭玉。都染署令。子葆。禮賓卿。追封版圖判書。子從惠。入我朝爲工曹典書。子洪。左軍司正。子沼。護軍贈司僕寺正。於公爲曾祖。祖諱子溫。進士贈刑曹參議。考諱公權。文科工曹正郞贈禮曹參判。妣英陽南氏。吏曹參判敏生之曾孫。進士八俊之女。以正德丙子生公。幼穎脫不凡。稍長。治擧業。中丁酉生員進士。才名藉甚。館中論妖僧事疏。多出公手。己亥。正郞公以書狀官卒于燕京。南夫人摧殞毀慼。旣三年不免喪。絶食而歿。公於兄弟。序居長。弱弟幼妹滿室。辛勤鞠養。以至成立。甲辰。釋褐選補承文院。乙巳。薦授藝文檢閱。卽拜承政院注書。是時。權奸搆獄。案牘塡委。公筆翰如流。且有調護士林之功。權忠定公橃歎曰。柳某有子。丙午重試第一。拜工曹佐郞司諫院正言。丁未。由禮曹正郞。拜弘文館修撰。李芑屢通慇勤。公避不見。韓智源爲芑鷹犬。公面數之。兩憾交搆。劾公罷之。辛亥。敍爲懷仁縣監。招集流散。邑遂完。癸丑。移維新。邑廣詞訟煩。公始至。左右決遣。日未是。與客飮射。一邑盡驚。丙辰。以師儒選。入爲直講。遷戶曹正郞,軍器寺僉正。戊午。從事巡南邊。未還。陞通政爲鍾城府使。公論惜公尼秉權者久宂卑。改定州。尹元衡私囑發民堰海爲田。公曰。公事方殷。力不給也。元衡面色騂然數日。臺諫論驟陞。仍鍾城。庚申。爲光州。愛民制豪。一境肅然。期滿。有誤傳公爲羅州。州吏有家舍踰制者。懼甚卽毀。癸亥。再爲定州。尋移義州。州舊無擁城。公發廩剩餉役夫。數月而事完。陞嘉善爲會寧府使。卽爲北道節度使。還爲同知中樞府事。丁卯。兼殯殿都監。治大行喪事立辦。九月。如京師賀聖節。戊辰。爲戶曹參判兼副摠管。庚午。爲大司憲。慨然整頓頹綱。辛未。遞爲兵曹參判。三月。西道缺方伯。大臣啓曰。西方。國之門戶。宜擇其監司。遂授公。公舊患脾病。輿疾往赴。五月。疾甚。上狀乞遞。六月二日。行到長湍招賢里卒。臨絶。無一語及家事。言動神識。毫髮不爽。曠如也。事聞。上命賜內棺。喪至城外。禮官承命弔祭。十一月。返葬於安東天燈山先塋側。公爲人豪爽俊邁。濟之以文學。於藝皆通。尤長於理劇。世之以吏事自負者。皆以爲不可及。時奸臣專國。士之不愜於心者。始以微罪中之。致法漸深。誅戮乃已。公性直而言方。臺諫承風劾公。公卽一馬南下。賣家室示無還意。忌者快之。對馬島使者來言弊島爲國家。多設兵備。扞禦外侮。巡邊使金秀文。獨承廷議。欲遣軍官譯者。往驗其虛實。公不可曰。夷言難信。且朝廷能制此虜之命乎。罰之則不服。賞之則難繼。秀文服其見。遂以公言啓。寢不遣。明宗昇遐。詔使將入國。議迎詔服色。公獨曰。頒詔。天下大慶。當權吉。不然。恐爲華人笑。旣而。得杜氏通典說。與公言略同。議遂定。凡遇國事。未嘗遲徊。必以身當之。其所論。皆合事宜。可謂適用之良材。而天不假年。位不滿器。嗚呼其命也。娶敎授裵寬女。生九女一男。壻士人全海,尹大鳴,監役梁天遇,進士張遇,士人崔確,進士李懲,郡守呂大老,士人趙塘,忠義李檥。男成龜。早歿。子嵒始移公墓于參判公墓後。運碑石未及致墓下而歿。無子。以參奉元慶後。子世鳳。告李侯圖勒銘。侯卽李公檥之壻。嘗敭歷臺省。今乃於鳴琴之暇。留意此事。可見游刃有餘地也。嗚呼。公歿後十八年而南亂作。西厓先生歎曰。若使公在世。必能濟時艱。如我輩其能當大任乎。夫天生間世之才而用未究。其所不能者。人也。爲文章。下筆霶霈。天然去雕飾。所著龜村集二卷行于世。公之外曾孫前河陽倅崔公濟。實幹其刊役云。公嘗自號龜村。銘曰。
不遇盤根。利器安用。大廈將傾。正要樑棟。公旣稟厚。材全德備。銀臺玉署。發軔伊始。望重淸朝。道觸奸猜。山林公輔。
米鹽長材。大府雄州。節鎭荒陴。剗劇剸繁。雷厲風飛。玉節纔還。國有大慼。議禮迎詔。明竝龜燭。衆論隨定。百僚聳服。
持憲霜臺。頹綱振肅。宣化箕都。西門鎖鑰。天將降大。鬼奪其壽。公才未售。公德不朽。我銘貞之。用詔悠久。<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