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봉 박여흥(朴汝興)
[본관] 함양(咸陽)
[생졸년] 1653(효종 4)~1710년(숙종 36) / 향년 5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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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참봉 박공 묘지(參奉朴公墓誌)
우리 중부 귀락공[歸樂公, 이만성(李晩成)]과 계부 관찰공[觀察公, 이만견(李晩堅)]은 기사사화(己巳士禍)를 겪은 이후로 포의(包衣)의 신분으로 가솔을 데리고 고양(高陽)의 화전(花田)으로 돌아갔다. 당시 박여흥(朴汝興) 공이 강변의 정자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서로의 거리가 10리가 되지 않았기에 한가한 날이면 공을 초청하여 매번 신선한 고기를 마련하여 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중부(仲父)와 계부(繼父)가 또 중흥(中興)의 산수에 노닐기를 좋아하여 한 해에 두서너 번 이르렀는데 공이 그때마다 함께 갔고, 나는 어린나이로 따라다녔으니 이렇게 지낸 지 4, 5년이었다. 공의 아들 서규(叙揆) 또한 나의 벗으로 함께 공부한 사이였는데, 공이 세상을 떠나고 1년 뒤에 공의 아들도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십여 년이 흘러 나는 행호(幸湖)를 지나게 되었는데 공의 정자는 이미 폐허가 되었다. 우리 중부와 계부의 정자가 공의 정자 좌우에 있었는데 또한 이미 주인이 세상을 떠났고 혹은 주인이 바뀌었다. 생각건대 나만 혼자 세상에 남아 수염과 머리털이 이미 하얗게 세었으니, 성쇠존망이 이처럼 무상하다. 슬프구나!
공은 자가 기부(起夫)이다.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대대로 명문가였으니 소요당(逍遙堂) 휘 세무(世茂)와 잠야(潛冶) 휘 지계(知誡)는 유학(儒學)으로 명성이 있었다. 잠야의 아들 휘 유동(由東)은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지냈는데 이분이 공의 조부이고, 부친 휘 팽조(彭祖)는 요절하였다. 모친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사예 만길(晩吉)의 딸이다.
공은 19세에 어버이를 여의고 자력으로 집안을 건사하였으니 시집장가를 가지 못한 아우와 누이가 모두 혼기를 놓치지 않았다. 젊어서 과거공부를 하다가 중년에는 강호를 떠돌아다녔는데 기상이 호방하여 얽매이지 않았기에 세상과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다.
남의 죄악을 말함에 조금도 꺼리는 법이 없었기에 공을 미워하는 이가 많아 일찍이 흉당들의 무함을 당해 남쪽 변방에 유배되었다. 만년에 음보(蔭補)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보임되었으나 또 탄핵을 받아 면직되었다. 경인년(庚寅年,1710, 숙종 36) 10월 28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58세였다. 양주(楊州) 신혈리(神穴里) 선영의 사향(巳向)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부친은 선교랑 상직(尙稷)이다. 온화하고 공손하며 총명하여 자못 부녀자의 덕이 있었다. 기축년(己丑年,1649, 인조 27)에 태어나 신축년(辛丑年,1721, 경종 1)에 세상을 떠났고 공과 합장하였다.
공의 1남은 서규(叙揆)이고 두 사위는 이익량(李益亮), 이양원(李陽元)이다. 서규의 세 아들은 진사를 지낸 봉양(鳳陽), 그리고 경양(景陽)과 정양(挺陽)이며, 사위는 조한식(趙漢寔), 신명삼(辛命三), 이관적(李觀迪), 이경장(李慶章)으로 모두 사인이다.
봉양(鳳陽)이 나에게 묘지문을 부탁하였는데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봉양 또한 세상을 떠났으니, 한유(韓愈)의 이른바 할아버지, 아들, 손자 3대를 곡한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슬픈 말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겠다. 젊은 날 종유했던 즐거움과 인사(人事)가 순식간에 변화함을 대략 서술하여 경양(景陽) 형제에게 주어 무덤에 들이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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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참봉 박공 묘지 :
저자가 박여흥(朴汝興, 1653~1710)을 위해 쓴 묘지명이다.
[주02] 행호(幸湖) :
행주대교와 방화대교 사이의 한강을 지칭한다. 한강은 이 부근에 이르러 호수와 같이 넓어져 행주로 이어지는데, 이곳을 흔히 소동정
호 또는 행호(杏湖)로 부르기도 했다.
[주03] 한유(韓愈)의 …… 곡한다 :
한유의〈전중소감마군의 묘지명[殿中少監馬君墓誌銘]〉에 “내가 40년이 채 되지도 않은 사이에 할아버지, 아들 손자 3대를 곡하였
으니, 인간 세상에 있어서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未四十年, 而哭其祖子孫三世, 於人世何如也?]”라고 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