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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절공 한확 묘비명(襄節公 韓確 墓碑銘) - 어세겸(魚世謙)
홍치(弘治) 7년인 갑인년(甲寅年, 1494년 성종 25년) 여름 4월 신미일(辛未日)에 임금께서 신(臣) 어세겸(魚世謙)을 명소(命召)하여 전교(傳敎)하시기를, “양절공(襄節公 : 한확을 말함)이 별세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아직도 묘비를 세우지 못하였다.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께서 일찍이 이를 안타깝게 여기시어 서릉군(西陵君) 한치례(韓致禮)에게 그 일을 돈독히 관장하도록 명하여 지시하고 규획(規劃)하였었는데, 국가의 재력을 소비하지 않고 자손들의 가문에서 재력을 모아 공인(工人)을 고용하여 돌을 캐내어 비석을 이미 마련해 두었으나, 문자(文字)가 아니면 그가 애쓴 것을 드러내어 후세에 알릴 수가 없다.
이런 까닭에 내가 외씨(外氏)를 삼가 받들어 자성(慈聖)의 선의(善意)를 이으려는 것이니, 그대가 비명(碑銘)을 지어라.”고 하셨다.
신은 어명을 받들고서 놀랍고 두려워 감히 글재주가 용졸함을 들어 사양하지 못하고 물러나 엎드려 삼가 생각건대, 공의 세계(世系)는 가보(家譜)에 실려 있고 공의 훈덕(勳德)은 국사(國史)에 기록되어 있으니, 어리석은 신이 다시 논열(論列)할 바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 신도(神道)를 아름답게 꾸미어 지금 세상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명(銘)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하겠는가.
삼가 살피건대, 공의 성(姓)은 한씨(韓氏)요 이름은 확(確)이며, 자(字)는 자유(子柔)이고 본관(本貫)은 청주(淸州) 사람이다. 원조(遠祖)는 한난(韓蘭)인데 고려 태조를 도와 공을 세워 삼한 공신(三韓功臣)에 봉해졌으며, 그 뒤로 잇달아 현달한 인물이 이어졌다.
7세조(世祖)는 한강(韓康)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고종(高宗)과 충렬왕(忠烈王)을 내리 섬기고 찬성사(贊成事)로 마쳤으며 시호(諡號)는 문혜(文惠)이다. 찬성공의 손자는 한악(韓渥)인데,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元)나라에 들어가서 곤란에 처한 왕을 능히 보호하여 공신에 책훈되고 삼한 삼중(三韓三重)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諡號)는 사숙(思肅)이다.
사숙공에게 한방신(韓方信)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로서 공민왕(恭愍王) 때에 세 원수(元帥)와 더불어 홍건적(紅巾賊)을 대파(大破)하고 경성(京城)을 수복(收復)하여 1등 공신에 책훈되고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으니, 이가 곧 공의 증조(曾祖)이다.
공의 조고(祖考)는 한영(韓寧)인데 벼슬살이에 뜻이 없었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선고(先考)는 한영정(韓永矴)인데 순창 군사(淳昌郡事)로 목숨을 마치고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정경 부인(貞敬夫人) 김씨(金氏)로 좌명 공신(佐命功臣) 승녕부사(承寧府事) 양소공(襄昭公) 김영렬(金英烈)의 딸인데, 2녀 3남을 낳았다.
딸들이 모두 덕용(德容)이 있어서 황조(皇朝, 중국 조정을 말함)의 간선(簡選)에 뽑혔는데, 장녀는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의 후궁(后宮)으로 들어가 여비(麗妃)에 봉해졌으며, 그때 마침 황후(皇后)가 붕(崩)하였으므로 중궁(中宮)의 정사를 여비가 모두 전담하였다. 작은딸은 선종 황제(宣宗皇帝)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영락(永樂) 무술년(戊戌年, 1418년 태종 18년)에 공의 나이가 19세였는데, 황제가 불러 경사(京師)에 나아가니, 황제가 공의 풍의(風儀)를 한번 보고는 보살핌과 대우를 융숭하고 남다르게 해주었고 봉의 대부(奉義大夫)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에 선수(宣授)하였다.
그 임명하는 제고(制誥)에 이르기를, “짐(朕)이 생각건대, 제경(諸卿)의 벼슬 중에 광록(光祿)이 매우 중요하니 덕행(德行)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자가 아니면 이 직임에 있을 수 없고, 친구로서 탁월하거나 특별한 자가 아니면 이 관직에 현달할 수 없으니, 어찌 명신(名臣)의 영광스러운 벼슬만 되겠는가.
또한 이로써 우대하고 총애하는 자를 발탁하기도 한다. 너 한확(韓確)은 돈실한 자질을 타고났고 성실한 뜻을 품어서 재유(才猷)가 무성히 드러났으며 실로 나의 내척(內戚)이기에 이 벼슬을 특별히 내려준다. 운운(云云). 더욱 성실하고 부지런히 힘써서 삼가 총명(寵命)을 받들어 공경할지어다.”고 하였으니, 이 제사(制詞)를 살펴보면 공의 덕량(德量)이 참으로 이미 황제의 마음에 들었고 다른 척리(戚里, 황실의 인척을 말함)들에게 으레 주는 은수(恩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우리 태종(太宗)께서 세종(世宗)에게 선위(禪位)하여 사신을 중국에 보내 명을 청하였는데, 황제가 가상히 여기고 허락하였으며, 공을 정사(正使)로 삼고 광록시 승(光祿寺丞) 유천(劉泉)을 부사(副使)로 삼아 사절(使節)을 지니고 예를 갖추어 우리나라에 와서 국왕(國王)을 책봉하게 하였다.
책서(冊書)를 내려주는 날에 황제가 정전(正殿)에 나오자 문무 백관(文武百官)이 배열(陪列)하였는데, 공이 단정하게 홀(笏)을 쥐고 황제의 명을 받으면서 나아가고 물러나는 동작이 차분하고 의젓하였으므로 황제가 크게 기뻐하였으며, 본조(本朝)를 영접하는 예절을 더욱 각별하게 해주었다.
대체로 봉국(封國)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거늘, 중국 조정에 벼슬하는 유악(帷幄)이나 시종(侍從)의 반열에서 선발하지 아니하고 특별히 공을 임명하였으니, 황제의 마음에 쏙 들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하였겠는가.
공은 이미 젊은 나이로 신분이 귀해졌고 또 욕례(縟禮)를 받들어 본국에 이르니,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그 풍채를 바라보려고 하였다. 부사인 유천은 일을 마친 뒤에 중국으로 돌아갔고 공은 황제의 분부로써 그대로 우리나라에 남았다.
그 뒤에 다시 황제의 부름을 받고 경사(京師)에 나아간 것이 두서너 번이나 되었으며, 심지어 (명(明)나라) 인종(仁宗)의 공주(公主)를 공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는데, 공이 모친이 노쇠하여 차마 멀리 떨어질 수가 없다고 사양하니, 황제가 의롭게 여기어 중지하였다.
세종께서는 공이 크게 임용할 만한 사람임을 알고서 선덕(宣德) 을묘년(乙卯年, 1435년 세종 17년)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임명하였고, 정통(正統) 기미년(己未年, 1439년 세종 21년)에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옮겼는데, 경조(京兆)를 다스린 자들이 전후(前後)로 공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이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소명을 받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임명되고 품계가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였다. 경신년(庚申年, 1440년 세종 22년) 가을에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옮겼는데, 얼마 뒤에 북문(北門)의 관약(管鑰)을 공이 아니면 내보낼 수 없다고 하여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었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였는데 마침 대신(大臣)과 시비(是非)를 쟁론(爭論)하다가 파직되었다.
계해년(癸亥年, 1443년 세종 25년)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제수되었고 한성 부윤(漢城府尹)으로 옮겼으며, 갑자년(甲子年, 1444년 세종 26년)에 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을축년(乙丑年, 1445년 세종 27년)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병조 판서를 겸임하였고, 곧이어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옮겨 오랫동안 문무 관원의 전선(銓選)을 관장하면서 인재를 평가하여 주의(注擬)하는 것을 반드시 공정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경우가 없었다.
병인년(丙寅年, 1446년 세종 28년)에 품계가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여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었는데, 세종이 공을 불러 면전에서 유시(諭示)하기를, “지금 평안도가 몹시 조폐(凋弊)한데 경(卿)이 아니고서는 무마하여 안정시킬 만한 사람이 없소.
이에 공을 번거롭게 하여 잠시 그곳에 내보내려니 경은 사양하지 마오.”라고 하고는 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 겸 평양 부윤(平壤府尹)에 임명하였으며 다시 본도의 도병마절제사(都兵馬節制使)를 겸임하니, 문무(文武)의 소임이 공의 한 몸에 모두 쏠리었다.
이에 공은 마음을 다해 조치(措置)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관서(關西) 지역을 돌아보는 우려가 없도록 하였고 군사와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관서 사람들이 공을 마치 부모처럼 사모하고 있다.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공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소환하였다. 경태(景泰) 임신년(壬申年, 1452년 문종 2년)에 의정부(議政府)에 들어가 좌찬성(左贊成)이 되었는데, 그 당시 나이 어린 임금(단종을 가리킴)이 왕위를 잇자 국정이 권세 있는 간신에게 있게 되어 나랏일이 나날이 잘못되고 몹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였다.
공이 이에 정색(正色)과 위언(危言)으로 우뚝하게 홀로 서서 마치 물길을 제어하듯이 막아내니, 사람들이 모두 공을 의지하여 중하게 여기었다. 세조께서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본디 공의 충량(忠亮)함을 알았었으며 이미 종묘사직을 구하려는 대계(大計)로써 분연히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고 일어나 난국(難局)을 바로잡았는데, 공이 그 일을 도와준 힘이 많았으므로 공훈을 매기어 1등 공신이 되었다.
계유년(癸酉年, 1453년 단종 원년)에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의 훈호(勳號)가 내려지고 이어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영경연사(領經筵事) 서성 부원군(西城府院君)으로 발탁되었다.
그 당시 세조가 대란(大難)을 막 바로잡고서 의정부를 거느려 내외(內外)의 크고 작은 사무를 모조리 총괄하였는데, 공을 끌어들여 함께 같은 부(府)에 있도록 하였으니, 그 의지하고 신임한 정도가 중한 것이 이와 같았다.
을해년(乙亥年, 1455년 단종 3년)에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하였다. 공이 의정부에 있을 때에는 무릇 몸가짐과 사물을 대함에 있어 한결같이 올바르게 처신하였고, 일에 시비(是非)가 있으면 논의함에 있어 소신을 이랬다저랬다 바꾸지 않았으며 결단력이 있게 처결하였다.
성품이 본래 인자(仁慈)하여 옥사(獄事)를 논의할 때에는 반드시 너그럽게 용서함을 위주로 하였고, 항상 부좌(府佐)들에게 이르기를,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국법을 따르지 않은 실수를 범할 것이고, 만약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으면 신구(伸救)하여 살려주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 마음가짐이 이와 같았다.
세조가 즉위함에 이르러 그 보좌(輔佐)하고 부익(扶翼)한 공로가 녹훈(錄勳)되어 또 동덕 좌익 공신(同德佐翼功臣)의 훈호(勳號)가 내려졌고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병자년(丙子年, 1456년 세조 2년) 여름에 명나라 황제가 태감(太監)인 윤봉(尹鳳) 등을 우리나라에 보내어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을 하사하니, 임금께서 공을 사은사(謝恩使)로 삼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준(權蹲)을 부사(副使)로 삼아 편전(便殿)에 불러 접견하고 공에게 이르기를, “공이 돌아올 때에는 내가 교외(郊外)에 나가 맞이하여 경(卿)과 더불어 한번 취하도록 마시겠다.”고 하니, 공이 사례(謝禮)하여 말하기를, “신(臣)이 노쇠(老衰)하여 다시 천일(天日, 임금을 가리킴)을 보지 못하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고 하였으므로 임금께서 매우 두텁게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경사에 나아감에 이르러 서리와 이슬을 무릅쓰며 고생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단주(端州)의 사하역(沙河驛)에 이르러 여사(旅舍)에서 졸하였으니, 그 당시 나이는 57세였다. 병이 한창 위독할 때에 부사(副使)가 관속(官屬)들을 데리고 방에 들어가 문병을 하고 뒷일에 대하여 청해 묻자, 공은 그와 악수(幄手)하며 영결(永訣)하였고 사적(私的)인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공이 처음 병이 들었을 때 임금께서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옷과 약을 가지고 급히 역말을 타고 가서 병을 구완하게 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께서 몹시 놀라고 애도하여 사흘 동안 조회를 중지하고 별도로 예관(禮官)을 보내어 영구(靈柩)를 맞아오게 하였으며 부의(賻儀)를 규정보다 후하게 내려주었다.
또 도승지(都承旨) 한명회(韓明澮)에게 명하여 그 장지(葬地)를 골라잡고 관청이 상사(喪事)를 도와주도록 하였다. 이듬해 정축년(丁丑年, 1457년 세조 3년) 정월 계유일(癸酉日)에 예전(禮典)에 따라 광주(廣州)의 치소(治所) 동쪽에 있는 두척리(斗尺里) 조곡산(早谷山)의 임좌 병향(壬坐丙向) 언덕에 장사지냈으며, 양절(襄節)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주었다.
공의 부인은 공보다 앞서 별세하여 묘소가 양주(楊州)의 치소 북쪽 소라산(所羅山) 기슭에 있다. 처음에 공의 영구(靈柩)가 광녕(廣寧)의 요양(遼陽) 지역을 지나올 때 일로(一路)의 곤얼(閫臬, 지방관을 말함)들이 제전(祭奠)을 장만하여 애도하는 뜻을 표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모두 탄식하기를, “한 광록(韓光祿)께서 돌아가셨구나.”라고 하였으며, 비록 마부(馬夫) 같이 미천한 하인들까지도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간엄(簡嚴)하고 정도(正道)를 지키어 사심(私心)이 없었다. 비록 부귀가 극도에 이르렀으나 겸손하게 몸을 더욱 낮추었고 남을 대하고 사물을 응접함에 있어 화기(和氣)가 물씬하였다. 일에 임하여 결단할 때에는 단호하여 범할 수가 없었으며, 집에서 지냄에 있어서는 청렴하고 결백하여 산업(産業)을 영위하지 않았다.
예전의 친구들에게 후덕(厚德)하였고 친척들에게 화목하였으며, 아우들인 한진(韓磌)과 한질(韓)이 일찍 죽자 공이 그 고자(孤子)들을 거두어 보살피면서 한결같이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여겼다. 오호(嗚呼)라, 공은 올바른 몸가짐으로 집안을 거느리고 왕실(王室)에 충성을 다하여 힘썼으니, 그 공명(功名)과 시종(始終)이 그야말로 고인(古人)에게 유감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공이 별세한 지 15년이 되는 경인년(庚寅年, 1470년 성종 원년)에 조정 신하들이 모두 논의하여 공을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살아서는 나라에 절의를 다바쳤고 죽어서는 묘정에 배식(配食)되었으니, 그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차이가 없게 되었는바, 이 또한 숭상할 일이다.
부인(夫人)의 성(姓)은 홍씨(洪氏)로 남양 부부인(南陽府夫人)에 봉해졌으며, 곧 남양군(南陽君) 홍길민(洪吉旼)의 손녀요, 이조 판서(吏曹判書)인 문양공(文良公) 홍여방(洪汝方)의 딸이다. 3남 6녀를 낳았는데, 장남인 한치인(韓致仁)은 숭정 대부(崇政大夫)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서성군(西城君)이고, 차남인 한치의(韓致義)는 자헌 대부(資憲大夫) 병조 판서(兵曹判書) 청양군(淸陽君)이고, 셋째인 한치례(韓致禮)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숭정 대부(崇政大夫)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겸 지훈련원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兼知訓鍊院事五衛都摠府都摠管) 서릉군(西陵君)으로, 모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이다.
장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계녕(李繼寧)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왕자(王子)인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에게 시집가서 군부인(郡夫人)에 봉해졌고, 셋째는 현령(縣令) 김자완(金自琓)에게 시집갔고, 넷째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최정(崔侹)에게 시집갔고, 다섯째는 사직(司直) 권집(權輯)에게 시집갔으며,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는 차례가 여섯째 딸이다.
측실(側室) 소생의 아들이 여섯 명이다. 왕대비(王大妃)는 2남 1녀를 낳으셨는데, 우리 전하(殿下, 성종을 말함)가 차남이고 장남은 월산 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이며, 딸은 명숙 공주(明淑公主)이다. 월산 대군은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仲善)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고 부실(副室)이 1남을 낳았다.
명숙 공주는 당양위(唐陽尉) 홍상(洪常)에게 하가(下嫁)하여 1남을 낳았다. 한치인은 중추원사(中樞院使) 조서안(趙瑞安)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고, 한치의는 군사(郡事) 이항전(李恒全)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고, 한치례는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이계녕은 아들이 없고, 계양군은 3남 3녀를 낳았고, 김자완은 3남 1녀를 낳았고, 최정은 2남 2녀를 낳았고, 권집은 3남 1녀를 낳았다. 내외의 손자들이 모두 약간 명인데 모두 음기(陰記)에 쓰여 있다. 아, 선(善)을 쌓은 것에 대한 보답은 과연 헛되지 않았다.
심지어 성녀(聖女)가 독생(篤生)하시어 한 나라의 국모(國母)가 되고 성궁(聖躬, 임금을 말함)을 탄육(誕育)하셨으니, 그 부(富)가 삼한(三韓)을 소유하여 우리 조선의 억만년 무강(無疆)한 사업을 견고하게 하였으니, 어찌 하늘이 열어 도와준 바이고 공이 복을 쌓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훌륭한 후손들이 번창한 길상(吉詳)으로 말하자면, 선원 보록(璿源寶錄)이 이에 있으므로 지금 내가 감히 외람되게 말하지 않겠다. 옛날에 임사(姙姒)는 주(周)나라의 국모가 되고 마후(馬后)와 등후(鄧后)는 한(漢)나라를 흥기시켰는데, 모두 방군(邦君)과 세주(世胄)가 덕을 쌓아 영광을 전해온 보응(報應)이었으니, 그 유래(由來)가 오래되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 양절공(襄節公)을 잊지 않고 깊이 마음을 두는 것이 어찌 괜히 그러는 것이겠는가. 이전의 공렬을 기리어 선양함으로써 대비(大妃)의 큰 근원을 환하게 드러내는 방도이니, 그 무럭무럭 솟아나는 성상의 효심(孝心)에 스스로 그만 둘 수 없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신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어 올리는 바이다.
훌륭하고 미더운 양절공이 신여(申呂, 주 선왕(周宣王) 때 명신(名臣) 신후(申侯)와 여후(呂侯))처럼 태어나셨네. 시조(始祖)는 아름다움 틈타서 고려 군사 도와 (견훤(甄萱)) 정벌하였도다. (사숙공(思肅公)은) 왕의 몸에 닥친 화 막아 험난함을 방비하였고, (서원군(西原君)은)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국난을 진정시켰네. 공훈과 작위가 몸에 있으니 정조(鼎俎)에 새기지 않았으랴.
공이 이에 더욱 떨쳐 일어나 대대로 이어 온 것보다 빛났네. 일찍 명(明)나라 조정에 들어가니 황제가 보배처럼 소중히 여겼네. 소경(少卿)으로 발탁하여 올려주고 광록시(光祿寺)에 소속되게 하였네. 사절(使節)을 지니고 와 국왕(세종)을 봉할 때 친히 황제의 말을 이어 받아, 손에 책명(冊命)을 받들어 황제가 있는 곳으로부터 왔네. 곤면(袞冕)과 개규(介圭)를 천자께서 하사하셨네.
세종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훌쩍 높은 벼슬에 올랐네. 공평하게 인재 뽑아 나라를 깨끗이 하며, 음률(音律) 불자 온란한 기운으로 곡식 생장하듯 했네. 세조를 부익(扶翼)하여 왕위에 오르자, 산하(山河)에 맹서하고 심려(心膂)로 의탁하였네. 재상의 자리에 올라 한서(寒暑)를 조절하였네.
음양이 순조로우니 만물이 어긋나지 않았네. 마땅히 장수를 누려야 하거늘 하늘은 어째서 내려주지 않았는가. 선인(善人)이 일찍 서거하니 누가 측은히 여기지 않으리오. 불후(不朽)한 것이 남아 있으니 환하게 드러냄을 허락하지 않았네. 그 복경(福慶)이 독실하여 이 성녀(聖女)를 낳으셨네.
신손(神孫)을 낳아 기르시니 이 왕위를 계승하였네. 자손이 수없이 많으니 (한 구(句)가 결락됨) 천년에 한번의 봄이라 우리 성서(聖緖)를 홍익(弘益)하였네. 광주의 언덕에 숙기(淑氣)가 쌓여 있는데, 공의 묘소 이곳에 있으니 다니는 자들이 멀리서 바라보네. 비석을 높이 세웠으나 글 짓는 재주 부끄럽네. 귀신이 부호(扶護)하여 천만세 후까지 전해지길 바라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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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韓確 碑銘[魚世謙]
弘治七年甲寅夏四月辛未, 上命召臣世謙, 傳曰: “襄節公卒有年矣, 至今墓碑闕焉。 仁粹王大妃嘗慨念, 命西陵君韓致禮敦掌其事, 指示規畫, 不費國家之力, 裒財於子孫之門, 雇工伐石, 碑今已辦。 顧非文字, 無以焯勤而昭後。 此予所以祗奉外氏, 以承聖善之意也。 爾其銘之。” 臣承命悸恐, 不敢以文拙辭。 退伏惟念, 公之世系存乎家譜, 公之勳德紀于國史, 非臣之愚所更論列。 顧其賁飾神道, 赫然昭人耳目于今之世者, 非銘曷爲. 謹按公姓韓, 名確, 字子柔, 淸州人。 遠祖諱蘭, 佐高麗太祖有功, 封三韓功臣, 奕世蟬聯。 七世祖諱康, 擢第, 歷事高宗、忠烈王, 終贊成事, 諡文惠。 贊成之孫諱渥, 從忠宣王入元朝, 能捍王于艱, 策功爲三韓三重、上黨府院君, 諡思肅。 思肅有子諱方信, 修文殿太學士, 恭愍朝與三元帥大破紅賊, 收復京城, 功第一, 封西原君, 乃公曾祖也。 祖諱寧, 無心仕宦, 贈兵曹判書。 考諱永矴, 卒官淳昌郡事, 贈領議政府事。 妣貞敬夫人金氏, 佐命功臣、承寧府事、襄昭公英烈之女, 生二女三男。 女俱有德容, 膺皇朝之選, 長入太宗文皇帝後宮, 封麗妃, 適皇后崩, 而中宮之政悉專焉。 次入宣宗皇帝後宮。 永樂戊戌, 公年十九, 皇帝召赴京師, 一見風儀, 顧遇隆異, 宣授奉議大夫、光祿寺少卿。 其制曰: “朕唯諸卿之職, 光祿爲重, 非德行茂著者, 弗居以是任; 非親舊卓特者, 弗顯以是官。 豈惟曰名位之榮? 亦以待優寵之擢。 爾韓確稟敦實之資, 懷誠愨之志, 茂著才猷, 實爲內戚, 玆特授以云云。 益務恪勤, 祗服寵命。 欽哉!” 觀此制詞, 公之德量固已協于帝心, 而非他戚里例及之數也。 時我太宗禪位于世宗, 遣使請命。 帝嘉而許之, 以公爲正使, 光祿寺丞劉泉爲副, 持節備禮來, 冊爲國王。 降冊日, 帝御正殿, 文武百官陪列, 公端笏受命, 進退詳雅。 帝大喜, 本朝迎迓之禮, 亦有加焉。 夫封國, 大事也。 不選於中朝搢紳帷幄侍從之列, 而特命公焉, 非簡在帝心, 烏可爾也? 公旣年少而貴, 又奉縟禮而至, 一國臣民莫不想望其風采。 泉旣事完回京, 公以帝旨仍留, 後復召赴京師者再四。 至欲尙以仁宗之女, 公辭以母老不忍遠離, 帝義之而止。 世宗知公可大任。 宣德乙卯, 拜資憲、中樞院副使。 正統己未, 遷判漢城府事, 治京兆者前後莫及。 出爲京畿道觀察使, 召拜知中樞院事, 階陞正憲。 庚申秋, 轉兵曹判書, 俄以北門管鑰非公不可, 出爲咸吉道都巡察使。 公性剛直, 適與大臣爭論是非罷。 癸亥, 授同知中樞院事, 遷漢城府尹。 甲子, 又拜兵曹判書。 乙丑, 以知中樞院事兼判兵曹, 尋遷吏曹判書, 久掌文武之選, 臧否人物, 注擬必公, 人無議焉。 丙寅, 進階崇政, 判中樞院事。 世宗召公面諭: “今平安道彫弊, 非卿莫可撫綏者。 煩卿暫出, 卿無辭焉。” 仍拜平安道都觀察使、兼尹平壤, 復兼本道都兵馬節制使, 文武之任萃得一身。 公盡心措置, 使朝廷無西顧之憂, 軍民獲濟, 至今西人慕之如父母焉。 文宗卽祚, 以判中樞院事召還。 景泰壬申, 入議政府爲左贊成。 時幼主嗣位, 政在權姦, 國事日非, 岌岌乎殆。 公乃正色危言, 屹然獨立, 若防之制水, 人皆倚以爲重。 世祖在潛邸, 固知公之忠亮, 旣以宗社大計奮不顧身, 起靖其難, 而公之協贊之力爲多, 疇功爲一等。 癸酉, 賜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之號, 仍擢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領經筵事、西城府院君。 時世祖初靖大難, 領議政府事, 內外大小之務悉摠焉, 而引公同在一府, 其倚任之重有如是者。 乙亥, 陞左議政。 公在政府, 凡持身應物, 一槪於正, 事有是非論議, 未嘗回互, 處之決然。 性本仁慈, 至於議獄, 必以寬恕爲主。 常謂府佐曰: “與其殺不辜, 寧失不經。 若稍有可疑之讞, 莫如申而活之。” 其操心乃如是。 至世祖御極, 錄其輔佐扶翼之功, 又賜同德佐翼功臣之號, 改封西原。 丙子夏, 皇帝遣太監尹鳳等賜誥命冠服。 上以公爲謝恩使, 戶曹判書權蹲爲副, 召見便殿, 謂公曰: “公之還也, 予當迎于郊外, 與卿一醉。” 公辭謝曰: “以臣衰老, 恐不復見天日。” 上慰藉良厚。 及赴京師, 蒙犯霜露, 迴至端州之沙河驛, 卒于旅舍, 時年五十七。 方疾革, 副使率官屬入問疾, 請後事。 公握手與訣, 無一言及私。 公始疾, 上聞其劇, 遣內醫齎衣藥, 馳驛往救之, 已無及矣。 訃聞, 上震悼, 輟朝三日, 別遣禮官迎柩, 贈賻有加, 命都承旨韓明澮相其葬地, 仍護喪事。 越丁丑正月癸酉, 以禮窆于廣州治東斗尺里早谷山壬坐丙向之原。 贈諡襄節。 夫人先公卒, 塋在楊州治北所羅山之麓。 初, 公柩過廣寧遼陽一路, 閫臬莫不設奠致意, 皆嘆曰: “韓光祿其逝矣乎。” 雖至馬夫之卒, 無不嘆惜焉。 公天資簡嚴, 守正無私。 雖富貴已極, 而謙遜逾下, 其待人接物藹如也。 及臨事斷決, 截然不可犯, 居家廉潔, 不治産業。 厚於舊故, 睦於親戚, 弟磌及𥑇早歿, 公收視其孤, 一如己出。 嗚呼! 公之正身御家, 忠勤王室, 其功名始終, 可謂無憾於古人者矣。 公卒之十有五年庚寅, 朝廷僉議, 以公配享世祖廟庭。 生能盡節於國, 死能與食於廟, 其君臣之義, 無間於存沒者, 又可尙已。夫人姓洪氏, 封南陽府夫人, 乃南陽君吉旼之孫, 吏曹判書文良公汝方之女。 寔生三男六女: 男長致仁, 崇政、判敦寧府事、西城君; 次致義, 資憲、兵曹判書、淸陽君; 次致禮, 中武科, 崇政、判敦寧府事、兼知訓鍊院事・五衛都摠府都摠管、西陵君, 皆純誠佐理功臣。 女長適僉知中樞府事李繼寧; 次適王子桂陽君璔, 封郡夫人; 次適縣令金自琓; 次適同知中樞府事崔侹; 次適司直權輯; 仁粹王大妃於次第六。 側室六男。 王大妃誕二男一女: 我殿下居次長, 月山大君婷。 女明淑公主。 月山娶平陽君朴仲善女, 無子。 副室生一男。 公主下嫁唐陽尉洪常, 生一男。 致仁娶中樞院事趙瑞安女, 生四男三女; 致義娶郡事李恒全女, 生二男一女; 致禮娶延昌尉安孟聃女, 生一男二女。 繼寧無子, 桂陽生三男三女, 自琓生三男一女, 崔侹生二男二女, 權輯生三男一女。 內外孫凡若干人, 俱錄于陰。噫! 積善之報, 果不虛矣。 至乃篤生聖女, 母儀一國, 誕育聖躬, 富有三韓, 以固我朝鮮億萬年無疆之業, 豈非天所啓佐而公之委祉者然耶? 若乃《螽斯》、《麟趾》之祥, 《璿源寶錄》斯在今, 不敢媟陳。 昔任、姒母周, 馬、鄧興漢, 皆邦君世胄積德流光之應, 其所由來者遠矣。 今我聖上眷眷致意於襄節者, 豈徒然哉? 所以褒揚前烈, 以丕顯大妃之洪源, 而其烝烝聖孝自有不能已者焉。 臣謹拜手稽首獻銘曰。
顯允襄節, 嶽降申、呂。 鼻祖垂休, 代有亞旅。 或捍王躬, 備嘗險阻。 或殲巨敵, 難是用沮。 勳爵在身, 非干鼎俎。 公乃益振, 光于繼序。 早入帝庭, 惟帝玉汝。 擢陞于卿, 光祿是處。 秉節封王, 親承天語。 手捧冊命, 來自帝所。 衮冕介圭, 天子賜予。 知遇世宗, 軒然霞擧。 提衡攬轡, 吹律生黍。 扶翼世祖, 龍飛當宁。 誓以山河, 托以心膂。 載登鼎鼐, 載調寒暑。 陰陽受職, 物無違拒。 宜享壽考, 天胡不與? 善人早逝, 誰非惻楚? 不朽者存, 昭哉來許。 則篤其慶, 生此聖女。 誕育神孫, 承玆天敍。 子孫千億, 【缺一句】。 千載一春, 弘我聖緖。 于廣之原, 淑氣斯貯。 公墓在此, 行者延佇。 貞石巍峨, 文慚機杼。 神扶鬼護, 期天倚杵。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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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의정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시호 양절(襄節) 한공(韓公) 묘지명(墓誌銘) 병서
左議政西原府院君諡襄節韓公墓誌銘 幷序 - 서거정(徐居正) 찬
공의 성(姓)은 한(韓)이고, 휘(諱)는 확(確)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증조 휘 방신(方信)은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를 지냈고, 조 휘 녕(寧)은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고, 고(考) 휘 영정(永矴)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 증직되었다. 비(妣) 김씨(金氏)는 우리 조선 태종(太宗)의 좌명 공신(佐命功臣)인 승녕부사(承寧府事) 양소공(襄昭公) 김영렬(金英烈)의 딸이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명문 대족(名門大族)이다.
영의정부사의 두 딸이 모두 황조(皇朝)의 간선(揀選)에 응하여 장녀가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의 후궁으로 들어가 여비(麗妃)에 봉해졌다. 공은 여비의 오빠로 처음에 우군 부사직(右軍副司直)에 제수되었다. 영락(永樂) 무술년(1418, 태종18)에 19세의 나이로 문황제의 부름을 받아 경사(京師)에 가서 각별한 대우를 받고 칙명으로 봉의대부(奉議大夫)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에 제수되었다.
이때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하고 사신을 보내 선위를 진청(陳請)하니, 황제가 책명(冊命)을 내리면서 공을 정사(正使)로 삼고 광록시 승(光祿寺丞) 유천(劉泉)을 부사(副使)로 삼아 보냈는데, 유천은 복명(復命)하고 공은 황제의 유지(有旨)로 그대로 머물렀다. 이후로 다시 부름을 받아 경사에 간 것이 여러 차례였으며, 심지어 인종(仁宗)의 딸과 혼인시키려고까지 하였으나 공이 노모를 이유로 사양하여 마침내 중지되었다.
세종은 공에게 재간이 있어 대사를 맡길 만하다는 것을 알았다. 선덕(宣德) 을묘년(1435, 세종17)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제수되고, 얼마 안 되어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옮겼는데, 번거롭고 복잡한 일을 잘 처리하였으며 결정하는 것이 모두 합당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경기 관찰사가 되고, 소환되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제수되었다. 품계가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오르고 병조 판서에 발탁되니, 세종이 더욱 깊이 신임하였다. 다시 외직으로 나가 함길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대신과 쟁론하여 뜻을 굽히지 않다가 파직되었다.
갑자년(1444)에 병조 판서에 복직되었다가 이조 판서로 옮겨 오랫동안 인사를 담당하였다. 인재를 주의(注擬)하는 것이 진실하고 공정하여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병인년(1446)에 품계가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올라 판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에 외직으로 나가 평안도안찰사 겸 평양윤(平安道按察使兼平壤尹)을 지냈는데, 문종이 불러들여 판중추원사에 복직되었다.
경태(景泰) 3년(1452)에 좌찬성으로 승진되었다. 상왕(上王)이 보위에 오르니, 나이는 어리고 겸손하였다. 권간(權奸)이 권력을 전횡하여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갔으나 공이 홀로 안색을 바르게 하고 말을 곧게 하여 우뚝이 서서 흔들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다.
계유년(1453, 단종1)에 금상(今上 세조)이 잠저(潛邸)의 신분으로 기미를 밝혀 변란을 평정하는 데에 공의 공훈이 많았다. 이에 수충위사협찬정난 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의 호를 하사받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 영경연사(議政府右議政領經筵事)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으로 발탁되었다. 을해년(1455)에 좌의정으로 승진되었다. 금상이 즉위하여 동덕좌익 공신(同德左翼功臣)의 호를 하사하고, 서원(西原)으로 고쳐 봉하였다.
7년(1456, 세조2) 여름에 황제가 태감(太監) 등을 파견하여 고명(誥命)과 관복을 하사하였다. 공이 사은사(謝恩使)로 경사에 갔다가 사행이 돌아올 때 단주(端州)의 사하역(沙河驛) 여사(旅舍)에 이르러 졸하니, 향년이 57세이다. 병세가 악화되자 속관(屬官)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가정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길에서 병환이 심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상은 내의(內醫)를 보내 약을 가지고 가서 구완하도록 하였으나 이미 졸하여 미치지 못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매우 슬퍼하였으며,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다. 예관(禮官)을 보내 영구(靈柩)를 맞이하고, 부의(賻儀)를 보냈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엄중하여 정도를 지키고 사사로움이 없었으니, 상부(相府)에 재직할 때에는 정무(政務)를 관대하고 간략하게 처리하여 대신의 체모를 얻었다. 부귀가 이미 극에 달했으나 겸손하고 공손하여 자신을 더욱 낮추었으며,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동안은 온화한 기운이 가득하였으나 일에 임해 과감히 결단하는 것은 칼로 자르듯 분명하여 범할 수 없었다. 집안에서의 생활이 청렴결백하였으니, 뇌물이 이르지 않아 실로 담박하였다.
여러 조정을 두루 섬기며 충성과 근면이 빠짐없이 드러났고 성대한 시절을 만나 두 번이나 훈맹(勳盟)의 앞자리에 들었다. 지위는 백관의 우두머리에 이르렀으며, 또한 사신의 명을 받들어 힘들고 험한 것을 피하지 않고 나랏일을 하다가 죽었으니, 가히 공성과 일생이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분이다.
공은 이조 판서 홍여방(洪汝方)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6녀를 낳았다. 장남은 치인(致仁)으로 행 사복시 윤(行司僕寺尹)이고, 다음은 치의(致義)로 좌군 사정(左軍司正)이고, 다음은 치례(致禮)이다. 딸 하나는 왕세자빈이니 여섯 번째 딸이다.
장녀는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 이계령(李繼寧)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 부인이고, 다음은 임피 현령(臨陂縣令) 김자완(金自浣)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감찰(監察) 최정(崔侹)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부사직(副司直) 권집(權緝)에게 시집갔다. 서얼(庶孼)로 6남을 낳으니, 유산(榴山), 유산(柚山), 감산(柑山), 시산(柿山), 이산(梨山), 도산(桃山)이다.
사복시 윤은 중추원사 조서안(趙瑞安)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고, 사정은 군수 이항전(李恒全)의 딸에게 장가들고, 치례는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왕세자빈은 원손(元孫)과 군주(郡主)를 탄생하고, 계양은 2남 1녀를 낳고, 통례는 자식이 없고, 현령은 3남 1녀를 낳고, 감찰은 1남 1녀를 낳고, 사직은 3남 1녀를 낳았다.
경태 8년(1457, 세조3) 모 갑자일에 광주(廣州) 모 마을의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아, 공이 뜻에 맞는 임금을 만난 융성함과 훈업의 성대함으로 보면 길고 길게 복을 누려 성스러운 임금의 오직 새롭게 하는 다스림을 도와 이루어야 마땅한데, 하늘이 수명을 연장해 주지 않아 마침내 이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그러나 공은 복을 쌓고 경사를 쌓아 어질고 고운 딸을 잘 낳았으니, 능히 저군(儲君)의 배필이 되어 〈종사(螽斯)〉의 상서에 이미 들어맞았고, 또 자식이 있고 손자가 있어 장차 대대로 이어 온 아름다움을 이어받아 가문을 빛낼 것이니, 공의 원훈(元勳)과 성덕(盛德)이 오래될수록 사라지지 않아 후손에게 더욱 복을 내려 줄 것이 분명하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유서 깊은 서원이여 / 有濬西原
발원이 깊고도 멀도다 / 發源深長
훌륭한 집안 대대로 이어지고 / 蟬聯赫世
공 또한 더욱 창성하였네 / 公又益昌
이른 나이에 황제 알현하여 / 早覲帝庭
특별한 은혜 크게 입었지 / 大被殊顧
역대 조정에 두루 벼슬하여 / 歷相累朝
뜻 맞는 임금 만나 이름 떨치고 / 蜚英際遇
붙들어 도울 시절 만나 / 遭時扶翊
빛나는 훈업 이루었지 / 有炳勳業
깊고 너른 의정부와 / 潭潭台府
찬란한 공신각에 / 烈烈麟閣
공이 바로 우뚝하여 / 公乃挺特
높기가 태산 같으니 / 屹然喬嶽
성대한 덕이며 / 維德之懋
탁월한 공이로다 / 維功之卓
시행한 일 크건만 / 所施者大
하늘이 앗아감 어찌 그리 빠른가 / 天奪何速
내려줌도 있고 인색함도 있지만 / 有畀有嗇
나이를 주지 않았으니 / 而不與齡
누가 이런 것을 주관하는가 / 孰主張是
조물주의 뜻 아득하구나 / 眞宰冥冥
초방에서 경사 길러 / 椒房毓慶
난초 밭에 상서 쌓았으니 / 蘭畹儲祥
공은 곧 떠나지 않은 것이라 / 公則不亡
지닌 덕 길이 보존되리라 / 所在者長
해진의 물가에 / 駭津之濆
울창한 옛 들이 있으니 / 有欝古坰
나의 명은 아첨이 아니오 / 我銘匪諛
양절공의 무덤이로다 / 襄節之塋
<끝>
[각주]
[주01] 인종(仁宗) : 명나라 태종의 장자로 태종 2년에 황태자에 책봉되고,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재위 1년 만에 승하하였다.
《明史 卷8 仁宗本紀》
[주02] 상왕(上王) : 단종(端宗)을 말한다. 단종이 문종을 이어 즉위한 지 4년 만에 세조에게 선위하고 물러나자 세조가 높여 상왕으로 삼
았다.
[주03] 기미를 …… 평정 : 안평대군(安平大君),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의 역모를 처단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말한다. 사실
상 이를 계기로 세조는 왕위에 오를 기반을 확보한 것이다.
[주04] 고명(誥命)과 관복 : 명나라 황제가 세조의 선위를 인정하는 고명과 왕과 왕비에게 하사하는 관복이다. 《세조실록》 2년 4월 20일
기사에 황제의 제서(制書), 조서(詔書), 칙서(勅書) 및 왕과 왕비에게 내린 관복 일습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주05] 상부(相府) : 한대(漢代)의 승상부(丞相府)에서 나온 말로, 의정부를 지칭한다.
[주06] 왕세자빈 : 추숭된 덕종(德宗)의 비인 인수왕비(仁粹王妃)이다. 처음에 수빈(粹嬪)으로 책봉되고, 후에 덕종이 추숭되면서 인수왕
비가 되었다. 덕종은 세조의 첫째 아들로 즉위하지 못하고 1456년(세조2)에 승하하여 후에 아들 성종이 추숭하였다. 《국역 연려실
기술 1 권5 덕종고사》
[주07] 종사(螽斯)의 상서 : 〈종사〉는 《시경》의 편명으로, 후비의 덕이 훌륭하여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는 내용이니, 곧 왕세자빈이 원손
(元孫)과 군주(郡主)를 낳은 것을 말한다.
[주08] 초방(椒房)에서 …… 쌓았으니 : 초방은 후비(后妃)의 궁이고, 대본의 육경(毓慶)은 자식을 많이 두는 것을 말하며, 저상(儲祥)은
왕위를 이을 자식을 둔 것을 뜻한다. 왕세자빈이 된 딸이 성종을 낳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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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左議政西原府院君諡襄節韓公墓誌銘 幷序
公姓韓。諱確。淸州人。曾祖諱方信。修文殿太學士。祖諱寧。贈兵曹判書。考諱永矴。贈領議政府事。妣金氏。我太宗佐命功臣承寧府事襄昭公英烈之女。內外皆名門大族。議政生二女。俱膺皇朝之選。長入太宗文皇帝後宮。封麗妃。公以妃之兄。初授右軍副司直。永樂戊戌。年十九。文皇帝召。赴京師。顧遇殊深。宣授奉議大夫光祿寺少卿。時太宗。禪位于世宗。遣使陳請。帝降冊命。以公爲正使。光祿寺丞劉泉爲副以遣。泉復命。公以帝旨仍留。其後復召。赴京師者再四。至以仁宗之女尙之。公辭以母老。乃止。世宗知公有器幹。可任大事。宣德乙卯。授資憲中樞院副使。俄遷判漢城府事。剸治煩劇。裁決悉當。出爲京畿觀察使。召還。拜知中樞院事。轉階正憲。擢兵曹判書。世宗深加倚任。又出爲咸吉道觀察使。與大臣爭論不屈。罷。甲子。復判兵曹。遷吏曹判書。久掌詮選。注擬實公。人無間言。丙寅。進階崇政。判中樞院事。明年。出按平安道。兼尹平壤。文宗召還。復判中樞。景泰三年。陞左贊成。上王嗣位。幼冲謙抑。權奸專權。國事日非。公獨正色直言。屹然不動。人皆倚以爲重。癸酉。今上在潛邸。炳幾靖難。公之勳。與有多焉。賜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之號。擢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領經筵事,西城府院君。乙亥。陞左議政。今上御極。賜同德佐翼功臣之號。改封西原。七年夏。帝遣太監等。賜誥命冠服。公以謝恩使如京師。使還。回至端州之沙河驛旅舍。卒。年五十七。方病革。屬僚佐以後事。無一言及於家。上聞在道病劇。遣內毉。賫之藥。往救之。已無及矣。訃聞。上慟悼。輟朝三日。遣禮官迎柩。賻贈有加。公天資嚴重。守正無私。其在相府。政務寬簡。得大臣體。雖富貴已極。而謙恭愈下。待人接物之間。和氣藹然。及臨事果决。截然不可犯。家居廉潔。關節不到。實淡如也。歷事累朝。忠勤備著。際會盛時。再列勳盟之首。位冠百僚之長。又奉使命。不避艱險。死於王事。功名終始。可無愧於古人者矣。公娶吏曹判書洪公汝方之女。生三男六女。男長致仁。行司僕寺尹。次致義。左軍司正。次致禮。女一。王世子嬪。於次居第六。長適副知通禮門事李繼寧。次桂陽君璔之夫人。次適臨陂縣令金自浣。次適監察崔侹。次適副司直權緝。庶孽生六男。曰榴山,柚山,柑山,柹山,梨山,桃山。司僕寺尹娶中樞院事趙瑞安之女。生男四女二。司正娶郡守李恒全之女。致禮娶延昌尉安孟耼之女。嬪誕元孫郡主。桂陽生男二女一。通禮無嗣。縣令生男三女一。監察生男一女一。司直生男三女一。景泰
八年某甲。以禮窆于廣州某村之原。嗚呼。以公遭遇之隆。勳業之盛。宜享遐福。以贊襄聖主維新之治。天不假年。乃至於斯。嗚呼惜哉。然公之積福積慶。篤生賢媛。克配儲宮。已叶螽斯之祥。又有子有孫。將襲世美。光大門戶。公之元勳盛德。愈久不朽。益委祉錫福於後嗣也無疑矣。銘曰。
有濬西原。發源深長。蟬聯赫世。公又益昌。早覲 帝庭。大被殊顧。歷相累朝。蜚英際遇。遭時扶翊。有炳勳業。潭潭台府。烈烈麟閣。公乃挺特。屹然喬嶽。維德之懋。維功之卓。所施者大。天奪何速。有畀有嗇。而不與齡。孰主張是。眞宰冥冥。椒房毓慶。蘭畹儲祥。公則不亡。所在者長。駭津之濆。有欝古坰。我銘匪諛。襄節之塋。<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