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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3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대림절 첫 번째 주일 설교
제목 : 오실 그 분이 당신이십니까?
본문 : 마태복음 11장 3절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 <공동번역>
가끔씩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고, 상상도 못한 이에게서 어이없는 행동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일어나지 않아야 될 일 같은데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함께 나눈 본문이 저에게는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성경에서 예언된 선지자였습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한 것과 같이, 침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선포하였다. <마가복음 1장 2~4절, 새번역>
세례(침례) 요한은 이사야서 40장 3절에서, 말라기 3장 1절에서부터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말씀에 맞게 사역을 잘 감당했고, 수많은 이들이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친히 세례(침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세례(침례) 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파송 받은 ‘하나님의 대사’ 임을 예수님도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왜 세례(침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의문을 품기 시작했을까요? 감옥에 갇히면서부터일까요? 감옥에 갇혀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둘러 덮은 것일까요? 왜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보내야 했을까요?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12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의 삶에 대해 충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지시를 마치시고는 다시 유대 사람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고 계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을 것 같은 접속사가 하나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은, <마태복음 11장 2절A, 새번역>
성경에서 긴장이 시작될 때 사용되는 접속사가 늘 ‘그런데’입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때 나타나는 접속사 ‘그런데’가 오늘도 우리를 긴장의 자리로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물어 보게 하였다. <마태복음 11장 2~3절A, 새번역>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낸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칭찬을 하기 위해 보냈을까요?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해 제자들을 보낸 것일까요? 아닙니다. 전혀 180도 다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의문이 아니었습니다. 의심이었던 것입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마태복음 11장 3절, 새번역>
다른 사람도 아닌 세례(침례)요한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침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3장 11절, 새번역>
이런 멋진 신앙 고백을 했던 세례(침례) 요한이 왜 이런 의심이 들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이 질문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까지 동일한 질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왜 의심이 찾아오는 것일까요? 잘 믿고 있다가도, 왜 마음이 변해가는 것일까요? 세례(침례) 요한을 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역시 그와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당시에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간절히 간절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해 12월에는 성탄절을 앞두고 4주간 동안 특별히 이 ‘기다림’에 대해 묵상하기 위해 교회력으로 ‘대림절’이란 절기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다 함께, 한 마음으로 다시금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고, 확정하고, 확신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대림절 첫 번째 주일에 바로 세례(침례) 요한과 같은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 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세례(침례) 요한이 저런 행동을 했을까? 왜 우리는 때때로 세례(침례) 요한과 같은 일을 하는가? 왜 의심하는가? 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변함없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것일까요?
첫째, 내가 만든 ‘메시아’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바라고, 내가 꿈꾸고, 내가 만들어 내고 싶은 메시아가 여전히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메시아’가 아닌, 나의 뜻과 상상 안에 존재하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기에 우리에게 의심이라고 하는 녀석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어쩌면 세례(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심판이 아닌 사랑을 외치는 것이 세례(침례) 요한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처럼 죄사함을 위한 ‘회개’를 외쳐야 하는데, 죄사함을 위한 ‘사랑’을 외치고 있으니 뭔가 잘 못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 먼 사람이 보게 되는 것, 다리 저는 사람이 걷는 것,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는 것,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는 것,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 것, 이런 일들을 상상한 게 아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면서 곳곳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엄청난 일은 자신의 생각 영역에 있던 일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각했던 일이 아니니 의문에서 시작하여 의심으로 확장되어진 것입니다.
내가 만든 메시아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그건 또 다른 ‘나’ 일뿐입니다. 내가 메시아가 되고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조종하는 A.I. 메시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저 내가 생각하는 방향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내 욕망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라도 나의 나라와 의를 통한 나의 메시아, 나의 하나님, 나의 구원자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를 위한 메시아,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구원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기도가 우리에게서 결코 떠나지 않는 기도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마태복음 26장 39절, 새번역>
예수님조차도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더욱 간절히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시길 기도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야만 내가 만든 메시아를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메시아를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고, 변함없이 믿을 수 있고, 끝까지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얇은 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욥기 42장 5절, 새번역>
하나님에 대해서 절대 소문으로만, 귀로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분명 믿음은 들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이지 사람들의 소리나 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과 소문을 듣는 것만으로 어떤 판단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듣는 것을 떠나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제자들로부터 전해 듣기만 했습니다.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대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지역에 퍼졌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 요한은 자기 제자 가운데서 두 사람을 불러, <누가복음 7장 17~18절, 새번역>
감옥에 갇힌 상황이 세례(침례) 요한의 시선을 좁게 만들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경험한 적이 있으면서도, 제자들의 이야기만 듣고 귀가 얇아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세례(침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도 했습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9장 14절, 새번역>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선생님, 세례(침례) 요한 선생님이 더욱 더 메시아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괜스레 트집을 잡고 싶은 마음이 많았던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보십시오. 요단 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곧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그분이 침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에게로 모여듭니다." <요한복음 3장 26절, 새번역>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그저 자신의 선생님보다 못한 그저 랍비로도 부르고 싶은 않은 ‘선생님’이지 구원자나 메시아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침례) 요한에게 전해오는 이야기들은 결코 기쁜 소식이나 복음이 아니었고, 질투에서 나오는 논쟁거리들뿐이었을 것입니다. 처음엔 세례(침례) 요한도 흔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그 상황이 요한에게 얇은 귀를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그는 제자들의 말만 듣고 의심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가 왜 우리 주변에 부정적인 것, 절망적인 것, 불평, 불만, 거짓 등을 방치해 놓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아무리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라도 이런 부정과 절망과 불평과 불만과 거짓이 결국 그 믿음을 야금야금 쓰러뜨려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조되어질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만 들어야 하는 존재로 창조 되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말을 듣기 시작하면 얇은 귀로 변해버리고 마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뱀은,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창세기 3장 1절, 새번역>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창세기 3장 4~5절, 새번역>
왜 뱀의 이런 말을 듣고 있었던 것일까요? 하와는 금방 얇은 귀가 되어 범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를 욕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모두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말씀을 보는 것, 직접 기도하는 것, 예배를 드리는 것, 전심으로 찬양하는 것, 사랑과 관심을 실천하는 것,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듣고 보고 경험해야만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아닌 확신이 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로마서 12장 2절, 새번역>
이 시대의 풍조로부터 들으면,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들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쓰러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기는커녕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얇은 귀를 갈아엎어 세상의 소리인지, 말씀인지 잘 분별하는 옥토 귀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감기어 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으며, 너희의 귀는 지금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 <마태복음 13장 15~16절, 새번역>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우리는 이 세례(침례) 요한의 질문을 통해 스스로에게 깊은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우리 안에 이런 의심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보내며 꼭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만든 메시아를 가지고 계시진 않습니까?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의심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아닌 세상의 소리만 듣고 있는 얇은 귀를 가지고 계시진 않습니까?
다시 말씀 앞에 나아가 말씀을 들어야 하는 순간입니다. 말씀이 아닌 다른 것들을 듣는 것만으로 판단할 때 의심의 첫 걸음을 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대림절 첫 번째 주일, 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마태복음 11장 6절, 새번역>
우리 모두 의심을 다 버리고 복이 있는 사람으로 주님의 오심을 묵상하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결단 찬양 - 다함없는 + 끝까지(어노인팅) 후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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