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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지방전출 발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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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렸건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마음을 열고 말았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기쁜 마음은 고향 가까이로 향하는 길이고, 오지지역으로 소문난 그곳의 단체장이 행정자치부장관에게 지역개발업무를 전공한 가장 능력 있는 부단체장 적격자 추천을 요청하였고, 그 요구에 내가 적격자로 해당되었다는 인사배경을 이미 알아서다.
새 임지로 부임하기 위해 차를 타고 광화문 청사를 빠져나가면서 종합청사를 다시한번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내 젊은 시절에 열정을 바쳐 일하던 곳이 아니던가. 만감이 교차하는데 잠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눈을 감고 생각하는 사이에 고향에서 공직을 시작하던 옛날 시간들이 거슬러 흐르면서 되감는 필름처럼 뇌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의 고향은 경북 동해안의 영덕이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꿈을 키우며 자라온 나는 비록 집은 가난하였지만 공부 잘하는 문학소년이었고 모범생으로 학창시절을 밝게 보냈다. 중학교 졸업 당시 담임을 맡았던 윤경용 선생님은 대구지역에서 가장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며 용기를 주고 권장했지만 집 사정이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듬해 고향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였고, 고 2가 되자 주변에서는 내 실력 정도면 괜찮은 대학을 갈 수 있을 거라 믿어주는 평판에 힘입어 미래를 위한 야무진 꿈을 마련했었다. 반장을 맡아 열심히 하던 중 그해 가을에 예순이 채 되지 않은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당시에 나는 실감 나지 않아 눈물조차 흘러보지도 못했다.
대학 진학을 꿈꾸던 차에 그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니 얼마간 슬픔에 잠겼다. 고3이 되어 대학에 진학할지, 공무원으로 진로를 바꾸어야 할지 결정을 못하고 있는 참에 공무원시험 기회가 먼저 찾아왔다. 그해 5월경 경상북도 인사위원회에서 제1회 5급을류 행정직시험을 6월 10일 실시한다는 공고가 있기에 응시하기로 결심하고 준비를 했다.
시험 결과 1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는데 그것도 제대군인이 받는 가점 5점 없이 2위를 하였으니 기뻤다. 그 후 발령문제로 교장선생님께 졸랐지만 ‘졸업 전에 취직하면 후회하게 된다’는 말씀을 되풀이하며 졸업 직전에 한번 생각해보자고 기대를 남겨 놓으셨다.
그리하여 1969년 11월 1일, 나는 고등학생 까까머리 상태에서 창수면사무소로 발령을 받았다. 창수는 영덕군에서 가장 오지면으로 위로 울진과 경계한 지역이었는데 아무 것도 모른 채 나는 그곳에서 흔히 말하는 면서기 생활을 시작하였고 난생 처음으로 받아본 봉급은 10,210원이었다.
그 때는 새마을운동도 없던 시절이라 사무실 일은 한가로웠고 근무시간이 끝나면 야근할 필요도 없었다. 퇴근 후에는 하숙집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주인 아들을 가르치면서 대학진학공부를 계속하곤 했었다. 그러한 틈 사이에서 내가 좋아하던 시를 쓰기도 하였으니 “비단깁 은빛하늘 노을이 피면 / 오십천 금띠 은어 못내 그립고…”로 시작되는 ‘고향저녁놀’이란 시가 그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면 직원에게는 담당부락이 있다. 젊었다고 하여 나에게는 보림동, 백청동이 맡겨졌는바 그곳은 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있는 산간벽지 마을이다. 버스가 있으나 하루 두 번 운행되었고, 밑 부락인 인천마을이 종점이기 때문에 출장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백청동에 올라가면 울릉도가 보인다 할 정도로 산중턱에 위치한 오지마을이었다.
어느 날 첫 출장을 가려는데 직원들이 나를 놀려줄 심사로 ‘백청 가는 산길 숲속에 가끔씩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나는 창수 인천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도보로 보림동을 지나 백청동으로 들어서는데 마을로 가는 길은 산 계곡 숲으로 이어져 길이 잘 보이지 않은 험로였다.
한참을 가도 민가는 나타나지 않고 좁은 길엔 온통 나무들과 넝쿨이 엉켜 있어 겁이 덜컥 났다. 직원들이 말해준 대로 호랑이라도 나타나면 어쩌나 긴장하고 마음 조아리며 벌벌 떨면서 한참을 가는데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서야 안심하고 둘러보니 산중턱에 집들이 보였다.
동장님이 도포를 입은 노인과 마을 사람 몇 명과 함께 앞으로 오더니만 정중히 인사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백청마을은 첩첩산중이고 그 당시만 해도 면 직원들이 가면 관리가 왔다고 대환영을 받는 시절이었다. 하룻밤을 동장 집에 머물면서 동네사람들이 꿩과 산토끼를 잡아와 요리한 음식으로 먹었는데 여하간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공직의 첫 근무지인 창수면에서 1년 남짓한 추억 가운데 가장 인상에 남는 일은 백청동 찾아가는 산길에서 호랑이가 나올까봐 벌벌 떨던 기억이다. 또한 시골사람들의 순박성과 넘쳐나는 인정을 그 때 경험하였으니 이는 두고두고 시골을 그리워하는 인연으로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봄날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고 있었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