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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잘 있으니 나도 잘 있다.
살전 1장 2~10절
충청도 예산 광시에 오랜 된 이발소가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마을을 지나가던 미국 사람이
머리를 자르기 위해 이발소에 들어왔습니다.
이발소 의자에 앉자 주인이 말했습니다. "왔시유~"
미국 사람은 이 사람이 영어를 할 줄 아는 모양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왔시유(What see you?)"는 무엇을 보느냐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거울이기에 "미러"(mirror)라고 대답했습니다.
영어로 거울은 ‘미러’입니다.
여행으로 피곤한 미국 사람이 이발하는 동안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한참을 자다가 깨어나 보니 자기 머리가 깨끗이 밀어 있었습니다.
미국인이 미러 라고 해서 이발소 주인이 깨끗이 밀어 버린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재미있게 해주는 유머이기도 하지만
이 유머 속에 뼈 속 깊은 교훈이 있습니다.
같은 말도 듣는 사람마다 다르게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말이 나쁜 말이 될 수도 있고
나쁜 말이 좋은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서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념이나 생각이나 의도가 다를 수 있고
살아왔던 삶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말을 달리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 잘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는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들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면 그대로 흡수가 되는데
그렇지 않고 듣기 싫은 말을 하면 아예 듣지 않거나
듣더라도 그것을 자기 방식대로 다시 새겨서 듣습니다.
그러다보면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는 달라질 수 있고
그 말이 어떤 다른 의미와 해석으로 왜곡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을 할 때는 상대방의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히 갈파하고 말을 하거나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내가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무엇인지
그것을 잘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쁘다고 쏘아대고
기분이 좋으면 기분이 좋다고 쏟아내고
그렇다면 내 인생은 너무 얕다는 것 밖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너무 말을 조심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너무 답답해고 경직이 될 수 있습니다.
집에만 들어오면 남편이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집에 재미있을까요? 없을까요?
때론 농담도 할 줄 알아야 하고, 때론 푼수를 떠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시기적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할 말 다한 다고 산다 하면 그것 같이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너무 얕다는 것 밖에 보여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말의 지혜를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 따뜻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대화를 하든 간에
항상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를 감싸주고 상대를 이해해주고
상대를 덮어주고 상대를 지지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적 중에 가장 무서운 적은 친적이라고 합니다.
친적이라고 하는 것은 친하면서 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저 앞에서는 매우 상냥하고 친절하고 잘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만 만나면 저를 욕합니다.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높여 보려고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릴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모르는 비밀을 이야기 함으로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다른 사람을 안 좋게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의도적으로 친적인 사람도 있지만
의도적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친적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나라 치고 친적이 많으면 나라가 설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삼성을 이야기 해 봅시다.
삼성에서 근무하고 나간 사람이 삼성에 욕하고 돌아다닙니다.
특별히 임원을 하였던 분이 삼성 욕하고 돌아다니면 삼성이 잘 되겠습니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친적에 의해서 망할 수도 있습니다.
강하면에 가면 동태찜을 크게 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 동태찜이 얼마나 큰 지 한 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교인들을 모시고 가서 한 번 먹어보고 싶었는데
그곳에서 찜을 먹고 나온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음식값는 비싼데 왜 이렇게 맛이 없는지 못 먹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 말을 듣고 그 집에를 가겠습니까? 안 가겠습니까?
공짜로 준다면 갈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진짜 맛있다 하면 갈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친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친적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적보다 무서운 것이 친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친적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지역사회에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많이 애썼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좋은 목사님이고 좋은 사모님이고
좋은 교회 이미지를 쌓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교회를 다니신 분들에 의해서
많은 어려움을 당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그 분들에게 우리가 뭐라고 말을 했습니까.
피해를 준 적이 있습니까? 싸운 적이 있습니까?뒤에서 욕을 했습니까? 왕따를 시켰습니까? 미워했습니까?
정말 잘해준다고 했는데 결과는 안 좋게 되었습니다.
저는 용문교회에 있을 때 참 존경받았습니다.
저는 그곳에서부터 이런 목사님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성경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려고 했을 때에 저는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물론 칭찬을 받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내가 잘해야 성도들이 존경받는 다는 마음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조심스러울 뿐입니다.
이제는 조심 조심 모든 것을 조심 조심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즘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 있는데 그 책에서 파스칼은
인간의 위대함은 가장 비참한 곳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위대하게 쓰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지만
너무 자고하지 않고 인간이 무엇인지 깨달아
더 깊이 있고 더 넓이는 있는 목회를 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은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친적인가? 이것을 묻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것을 뼈져리고 경험하고 나서 보니까
내가 알게 모르고 친적이 될 수 있는데
내가 친적이 되지 않는 것이 너무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우리 아버지의 친적이 될 수 있고
내가 우리 직장의 친적이 될 수 있고
내가 우리 나라의 친적이 될 수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매사에 우리가 기도하면서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면 그것을 안할 수 있도록
내 자신을 주의시키고 경계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신복3리 마을회관 전광판에 있는 글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무엇이라고 쓰여 있었느냐 하면
“가서는 마을 자랑, 만나면 이웃 칭찬”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마을회관 앞에 전광판에 있는데
전광판에서 “가서는 마을 자랑, 만나면 이웃 칭찬”이라는 말이
번쩍 번쩍 빛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본 순간 은혜가 하늘에서 쭉 내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교회도 진작 이렇게 했어야 되었는데
이렇게 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사실상 교회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할 때마다
그렇게 말한 분들이 상처를 받을까 봐 그냥 지내 왔습니다.
또한 언젠가는 진실을 깨닫겠지 하고서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지내놓고 보니,
“가서는 마을 자랑, 만나면 이웃 칭찬‘이 명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교회도 이래야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가면 교회 자랑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만나면 교인들 칭찬해야 합니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할 필요는 없지만
있는 그대로, 본 그대로, 느낀 그대로 이야기 하면 됩니다.
우리 교회는 성도들이 몇 명 안되지만
어디를 가든지 우리 성도들 자랑을 하면 됩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고 저렇고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정덕화 장로님 자랑하고, 우리 이철준 집사님 자랑하고
우리 권사님 자랑하고, 우리 집사님 자랑합니다.
목사님에 대한 자랑도 놓치면 안됩니다.
어디를 가든지 “우리 목사님 같은 분은 없다!”고 자랑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목사님 자랑을 하면 결코 손해 보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사모님도 자랑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사모님입니까?
사모님 자랑하면 내 자신이 더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어디를 가든지
교회 자랑하시고 교인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얼굴이 더 섭니다.
어느 세미나에서 강사가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풍선을 분 뒤 거기에 각각 자기 이름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풍선을 다른 한 방에 집어넣은 후
자기 이름이 쓰인 풍선을 5분 안에 찾으라고 주문했습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풍선을 찾느라 서로 부딪히고 밀리며
방안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5분이 흘렀지만 흩어진 풍선 가운데
자신의 풍선을 찾은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강사는 이번에는 아무 풍선이나 집어
거기 적힌 이름을 보고 그 사람에게 주도록 했습니다.
김집사님, 이집사님, 박집사님 하면서 먼저 찾아주었습니다.
그러자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이 자기 풍선을 찾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타인을 생각할 때에 잘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것부터 챙기다 보면 자기 것도 챙기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남의 것부터 챙겨주면 자기 것도 쉽게 챙기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교회를 자랑하고, 성도들을 칭찬할 때에
자연히 자기가 칭찬을 받고 자기 믿음도 성장하고
자기가 하는 일도 더 잘 되는 것입니다.
라틴어 인사말 중에 이런 인사말이 있습니다.
"Si vales bene, Valeo"
이 말은 “당신이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이 너무나 실감합니다.
양평기쁨의교회는 저의 인생학교라 했습니다.
교회를 통해 배운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교인들이 잘 있어야 나도 잘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잘 있어야 상대가 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끔 시골에서 어머니의 전화가 옵니다.
전화를 오면, ‘무슨 일이 있었냐’ ‘잘 지내냐’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대답을 하면서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너희들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다’ 하시고 끊으십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사실상 맞는 말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이 잘 있어야 자신이 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잘 있어야 내가 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잘 있어야 내가 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성도들이 잘 있어야 제가 잘 있는 것이고
성도들은 교회가 잘 있어야 자신이 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잘 있으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가 잘 있어야 하고, 대통령이 잘 있어야 하고
이웃이 잘 있어야 하고, 교회가 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잘 있는 것입니다.
결코 상대가 잘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잘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여러 교회에 편지를 했습니다.
편지를 할 때에 여러분이 잘 있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도 그렇게 했고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에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말해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다고 한 것입니다.
왜 감사가 됩니까?
당신이 잘 있으니 내가 감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절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많은 환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받아
주를 본받은 교회가 된 것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그럼으로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펴진 것에 대해 너무 감격이 되어 할 말이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대한 소문이 너무 좋으니
내가 너무 좋아서 할 말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사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에서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직장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나라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이 먼저 평안하고, 당신이 먼저 잘되고
당신이 먼저 잘 있도록 먼저 돕는 자가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