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은 교회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어떤 분은 “빨간 벽돌의 건물”이라고 말하고, ‘일요일 마다 미사나 예배드리러 나가는 곳“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교회의 어원은 그리스어 에클레시아(Ekklesia입니다. ‘만남’이나 ‘모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하느님을 믿는 백성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가톨릭"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실천신학자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Saint Ignatius of Antiochia)는 왜 ‘가톨릭’이라 했을까요? 우리가 믿는 종교를 표현할 때 보통 ‘천주교’ ‘가톨릭’이라 부른다. 전에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에 대비해 ‘구교’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천주교의 영어 표기 "catholic"이니 아무 생각없이 ‘카톨릭’으로 불러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도 있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가톨릭’이라는 말은 ‘보편적’이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말 καθολικοs(catholicos)에서 유래한 라틴어입니다. "catholic"의 라틴어 발음에 가까운 ‘가톨릭’을 사용합니다. ‘보편’(普遍)은 ‘특수’(特殊)와 반대되는 말로 ‘모든 것에 두루 미침’을 뜻합니다. ‘보편적’이라는 뜻을 지닌 ‘가톨릭’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이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입니다. 안티오키아는 소아시아 남쪽, 오늘날 시리아 국경과 가까운 터키 남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입니다.
교회는 약자들의 장소였습니다. 고아, 과부, 이방인, 가난한 자, 병든 자, 어린이, 노인들의 친구인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닮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는 기득권자들의 장소가 됐습니다. 뭐든 예수님의 적이었던 바리사이적이고 율법학자적이고 권력지향적이고 부자위주입니다.
예수의 삶과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예수를 닮은 닮아있는 교회를 좀처럼 찾기 쉽지 않습니다. 교회를 안나가거나 믿음과 멀어지는 원인을 교회가 제공하고 있습니다. 교회 출석과 신앙생활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계속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데 고아, 과부, 이방인, 가난한 자, 병든 자, 어린이, 노인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가난한 사람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기반으로 한 교회를 찾기 힘들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은 정말 슬프고 속상한 일입니다.
복음을 통해 교회를 정의한다면 ‘예수님을 위한 잔칫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구원의 기쁨이 있고 사랑의 교제를 통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사는 제사이면서 하느님의 창조와 완성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잔칫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미사가 잔치가 되고 교회가 주님을 위한 잔칫집이 되려면 복음 말씀처럼 교회내 열정적 봉사자가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열정적 봉사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 속 봉사자들의 모습에 가만히 머물러봅니다.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 여전히 전쟁으로 신음하는 사람들, 단 한 번도 온전한 평화가 없던 부조리 가득한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질문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부조리 위에 새긴 발자국 같은 것입니다. 흔들리며 피지 않은 꽃이 없듯, 우리는 흔들리고 또 흔들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로 이어지는 그 순간을 체험할 것입니다. 피지 않았던 꽃이 어느새 만개하여 우리 삶을 달래주는 눈부신 빛으로 존재하고 있는 순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을 후원했던 요새로 말하면 성모회 같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같은 여성들입니다. 지금도 여성들이 주로 교회 봉사자들입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말없이 지원하고 후원하는 대부분은 여성들입니다.
둘째, 마르타 같은 헌신자.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었습니다. 얼마 전 베타니아에서 죽은 자가 살아난 사건으로 그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잔치에는 많은 사람이 왔으며 그들을 섬겨야 했습니다. 교회가 잔칫집이 되고 미사가 참된 잔치가 되기 위해 안보이는 곳곳에 마르타와 같은 봉사자의 열정적 헌신이 필요합니다.
셋째, 라자로 같은 헌신자. 라자로는 잔칫집에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라자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죽었으나 다시 살아난 자로 예수님 옆에만 있어도 예수님이 생명의 주님이시요, 하느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라자로는 잔칫집에 앉아 있기만 해도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잔칫집이 되려면 라자로처럼 하느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넷째, 마리아와 같은 헌신자. 마리아는 자기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 향유의 값이 가룟 유다에 의하면 삼백 데나리온의 값비싼 향유로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헌신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자 여러분! 주님을 위한 잔칫집의 말없이 열정적으로 봉사하는 마르타 같은 헌신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큰 은혜를 체험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라자로 같은 헌신자, 자신의 소중한 것을 주께 모든 것을 바치는 마리아 같은 봉사자가 필요합니다.
기타 사이트에서 나쁜 글을 올리고, 나쁜 일로 돈을 보는 인간들을 찾아 알려주고 신고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교회가 날마다 잔칫집이 되고 주일 예배가 기쁨이 넘치는 잔치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김흥순
천주교청년연합회 민주화 활동
민통련 민족학교 1기 아태 평화아카데미 1기
전 대한법률경제신문사 대표
사단법인 세계호신권법연맹 부회장
첫댓글 교회는 크게 전체는 하느님 백성의 모임, 작게 현실적 구체적으로는 각 개인이 교회.
'두루미치다. 보편되다 공변되다'가톨릭이란 우리 교회이름은 하느님 백성과 공동체의 성격을 너무 잘 이해한 참으로 탁월한 명칭이라는 생각입니다.
단 내가, 너가, 우리는 정말 가톨릭적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마리아 심신 헌신자일뿐 아니라 예수님 말씀 공부에도 올인하고 투신하 그래서 언니 마르타의 몰이해를 받는 통찰깊은 참 제자!
공부와 예배와 자선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여야 한다. 왜냐하면 왜 예배해야 하는지 왜 자선과 나눔을 해야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공부이기 때문이다. 이연학 신부님의 글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