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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수필/평론실 스크랩 김선규 산문집<지치지 않은 날도 있었네>-물결
제이알 추천 0 조회 42 09.03.22 03:4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김선규 산문집<지치지 않은 날도 있었네>1999,선우미디어===

물결

 

   열여섯 살까지는 많은 시간을 바다물결과 동무하며 지냈다. 서해안은 바닷물이 나가면서 뻘밭을 드러낸다. 서해가 거느린 ㄷ섬 언저리에도 뻘밭이 생겼다. 망둥이가 클 무렵이면 나는 집 근처 아이들과 그곳으로 바다낚시를 다녔다. 음력 초여드레와 스무사흘이 조금이다. 조수가 가장 낮은 시기인 것이다. 물의 흐름도 느린 이날을 전후해서 며칠간은 망둥이가 잘 잡혔다. 썰물 좇아 낚시를 담그고 밀물에 섞여 낚시를 담그고...... 한나절 그러면서 해면에 생기는 물결을 응시했다.

  조금 때의 바다는 순하다. 옷을 입은 채 물속에 몸을 담그고 서 있노라면 생겼다가 사라지고, 사라진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는 물결이 정다웠다. 저희들끼리 무슨 노래나 주고받는 것처럼 생각되곤 했다. 허리에 부딪친 물결은 부서지면서 살갗을 간지럽혔다. 잔바람이라도 자나가면 햇빛을 받은 물결은 은비늘 떨 듯 했다. 부드럽고 고왔다.

  섬끼리 옹기종기 사는 곳이 남해다. 그쪽만큼은 못하지만 서해도 여러 곳에 섬들을 거느리고 있다. ㄷ섬 북리 이웃에는 ㅅ섬과 ㅇ섬이 있다. 이웃이라 했지만 꽤 먼 거리이다. 조개잡이와 잡어잡이 때, ㄷ섬 사람들은 그곳의 그늘을 드나들었다. ㅅ섬과 ㅇ섬은

ㄷ섬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두 섬이 그런 위치에 있으므로 나는 한동안 두 섬 뒤에 숨어있는 큰 바다는 못 본 셈이었다. 섬과 섬 사이로 이따금 나타나는 연락선과 돛배를 멀리서 보고 그것들이 거쳐왔을 바다를 마음대로 상상했을 뿐이었다.

  중학교 일학년이었을까. 여름방학이었다. 나와 몇몇은 모험을 했다. 뻘밭을 멀리까지 걸어 ㅅ섬 뒤편으로 갔다. 거기서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큰 물결을 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너무 망망했고 낯설었다. 물결은 거칠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이상했다. 마을이 없는 방향이어선지 사람도 보이지 않고, 주변이 흐려지면서 바람까지 강해졌다. 몰려와 바위에 부딪친 물결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 엄청난 파도야!

   누군가 겁먹은 소리로 이렇게 말한 것 같다. 우리는 점점 무서워져 빈 낚시바구니 손잡이를 움켜쥐고 그곳을 도망쳐나왔다.

  그 얼마 후 나는 육지구경을 처음 했다. 돛배에 실려 항해하는 동안, 나는 ㄷ섬 언저리에서의 낚시질과는 다른 기분을 맞보았다. ㅅ섬 뒤편에서 느꼈던 기분이 아닌, 기대와 흥분에 젖어서 곧 나타날 육지를 기다렸다. 바다의 일기는 역시 예측할 수 없는가 보다. 처음엔 잠잠했던 물결이었는데 복판에 들어서면서 비와 바람을 동시에 만났다. 파고가 대단해서 선체를 엎을 듯 했다. 나는 배를 꼭 잡고, 여유 있게 키를 잡은 믿음직한 선주와 목적지의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너덧시간 걸려 육지에 닿았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경이로운 육지의  풍경을 잊을 수 없다.

    바다가 물결을 품고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물결이 있다. 물결은 바람의 강약에 따라 높낮이가 비례한다. 그리고 물결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열여섯까지의 나는 어떠했는가. 구체화되지 않은 동경과 막연한 두려움을 지닌 물결을 갖고 있었다. 바다보다 작은 것은 냇물과 강이다. 말하자면 나는 얕은 냇물처럼 속없이 흐르다가 강물결을 오랫동안 만들면서 바다에 섞일 준비를 한 셈이다. 바람이 강해 많이 힘들던 날은 병명도 모른 채 몸살을 했고, 그렇지 않은 날들은 은비늘같은 꿈을 꾸었다. 사람이 가진 물결의 감정 중에는 슬픔과 기쁨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내 경우 나이 들어가면서 이 두가지가 점점 선명하게 구별되었다. 제 이름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던 성장기와 청년기의 여러가지 감?들이 이곳에 모여들면서, 구분을 분명하게 하던 것이다.

   나는 서른 살에 바다에 나왔다. 그 나이에 겨우 살아갈 좌표를 확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서른 전까지는 정체 모를 강물같았다. 희로애락을 겪으면서도, 그것은 진짜 내것이 아니란 생각을 했다. 분명치 않은 목표를 가지고 살았더니 와 닿는 갖가지 느낌이 약했다. 내 강은 깊었으나 감정의 물결이 어수선했고 답답했다. 그런 후 바다에 나왔다고는 했지만 조타기술은 익숙하지 못했다. 아내가 생기고 아들이 생겼는데, 번번히 감당해야 할 키를 놓치곤 했다. 좌표가 생겨서 마음의 물결은 정상이었다. 그러나 바다가 만든 물결의 힘이 만만치 않았다. 궂은 비까지 몰고 온 바람과 맞설 때면 나는 심한 멀미를 했다.

 

   물멀미를 한 날엔

   아내도 따라서 구토를 했다

   목선에 구토가 닿으면

   아이는 구경을 했다

   놀래가지고

                   - 시 <뱃노래>

 

   ㄷ섬을 떠난 지 삼십 년이 다 돼간다. 섬을 떠났고, 동경하던 육지에 뿌리는 내렸으나, 나는 지금 또 다른 바다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어떤 때는 풍랑을 몰아오고, 어떤 때는 비를 몰아와서 앞길을 막기도 했다. 어렸을 때 동무삼았던 조금물결 같은 생활을 나는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ㅅ섬에서 있었던 경험은 앞으로도 수시로 겪게 될 것인가.

   아느 날 나는 양수리에 가서 강물결을 한참 보았다. 사람들이 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강물과 뱃놀이 하는 사람들을 번갈아 보다가 바다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육지구경을 처음 시켜준, 그 돛배의 믿음직한 선주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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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4.04 00:33

    첫댓글 댓글을 달았다가 너무 길어서... 본의 아니게 그걸 이용해서 <인생의 바다에서>로, 변형을 시켜 버렸습니다. 넘 좋은 글 잘 감상을 하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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