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생각나서 짤막하게 소감을 말 합니다.
가입인사 메뉴에 어느 종인이 우리 광주안씨가 고려초부터 있어 왔는데 그 후손 숫자가 너무 적다. 라는
한마디 소회를 하였으므로 평소 생각을 나름대로 말 합니다.
우리 시조께서는 후삼국(통일신라. 태봉(마진.후고구려) 후백제)이 한반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고 쟁패하는 시기에 광주지방( 당시에는 한산주 한주)에서 태어나 사시면서
지방의 세력자로 상당한 신망을 가지고 살아 오던중 같은 지방의 다른 사람들이 지방을 관할하는 관리를 죽이고
소란을 피우므로 이를 진압하여 바로잡았으며
마침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과 그 시기가 같아 고려의 통일에 도움이 되었지요.
이 당시에 우리 시조의 성과 이름이 지금처럼 분명치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즉 성(姓)이 없이 이름만 가지고 불리웠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고려 조정에서 그 지방의 유력자.또는 고려건국에 큰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성을 갖게 하고
이름도 어울리게 갖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한성화(漢姓化)이고 토성분정(土姓分定)이라는
고려초 나라안의 사회 정치적 변화입니다. 이런 역사해석은 모든 역사학자들이 고려초의 사회상을 정립한 것입니다.
우리 시조께서도 이같은 사회변동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姓)과 이름(한자로 된)을 갖게 되었으니
우리 시조의 휘는 安자 邦자 傑자 입니다.
나의 이런 설명은 조작한 것이 결코 아니고.
우리 선대어른들의 비석글에. 족보의 기록에. 선대어른의 글모음(문집)에.세종실록지리지에.
광주지방(서울 강동.송파.하남시.성남시)의 지리역사서에 광주에 토성으로 安씨가 있음을 말하고.
다른 옛사람의 글모음에. 하나같이 통일되게
"안방걸은 고려 태조 때에 광주의 반역세력을 평정(진압)하여 대장군이 되었고 광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라고
뚜렷하게 기록하여 내려왔습니다.
그 글 표현이 한자로 기록하였으므로 구구절절 설명없이 요약하여 짧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모든 성씨 대부분이 그 시조의 출발은 요약되고 애매한 기록입니다.
심지어 고려 태조 왕건. 조선 태조 이성계도 그 시조와 윗대는 애매하고 요약된 기록입니다.
그리고 보통의 일반사람들의 선조는 대대로 분명하게 그 기록이 없는 수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고려 중기(대략 서기 1200년대)까지는 가족단위 또는 친족간에도
일일이 계보(系譜)를 기록하여 자손에게 전해 주는 관습이 없고
일부 고관이 죽으면 선조의 내력을 돌에 새겨 무덤에 묻는 풍습이 있었을 뿐이지요.(지석.誌石)
고려도 조선조처럼 왕대별로 왕조실록이 있었다 하나 전해 오지않으니 그 실체를 모를뿐더러
조정에 관리로 일한 사람들의 행적을 소상히 알지는 못합니다.
역사학자들이 고려때의 이런 기록은 단편적이거나 다른기록에서 고증하여 체계를 잡은것이
성씨사회의 정의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광주안씨의 고려때 기록도 없을 정도로 빈약합니다.
이런 현실은 시조 아래 여러대의 선조기록이 뚜렷하게 문중에 전해 오지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이 우리 시조 아래 선대 2세부터 12대의 선대 기록은 저 처대(處大)공의 "12대결대등초"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이 매우 단순하고 너무나 소략(疎略.엉성한)하여 의문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옛분들의 입으로 전해오는 내력을 기록하다 보면 단순할 수도 있으나 그후에 다른 기록을 고찰해 보니
우리 선대중에 사간공의 기록으로 보아 그 대수(代數)가 합당하고
다른 정황을 두루 살피는 과정을 몇백년을 지나
지난 1983년 대동보(족보)를 간행할 때 이를 계대에 바로세운 것이지요.
그 아래대 13세부터는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고 후손이 많어져 우리 광주안씨의 집안 나뉨이 여러갈래가 되어
파(派)를 많이 나눌만큼 번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는데 같은 안씨(安氏)를 만나 본관을 물으면 같은 광주안가는 참 드물다 입니다.
지난 2000년까지는 인구조사를 하면서 본관을 물어 통계를 잡은 것을 보면 대략 5만명정도가 廣州안씨라는 통계입니다.
반면에 어느 안씨는 45만명이라니 이렇게 다른가?
우리는 고려 태조 때 부터 광주안가이므로 천년이 넘는 성씨역사 세월인데
우리보다 뒤에 출발한 동성은 열배 가까이 되니 잘 이해가 안되고
그보다 같은 동본동성을 만나기 어려우니 좀 그렇다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점을 조금은 이해합니다.
그것은 조선조때의 사회구조를 이해하면 가능합니다.
조선조는 처음 건국하면서 철저한 신분구분 사회를 구축하고 특히 관리 사족(士族)만이 독점적인 지배구조를 만들었지요.
사족양반의 핏줄을 받은자라도 서얼(庶孼.서자)이면 노비가 되거나 양인이 되어 양반집단에 끼지 못하였지요.
조선조 후기 1600년대 까지만도 양반은 인구의 15%를 넘지못했다는 역사연구가 있지요.
특히 족보는 일부 제한된 양반들이 기득권적인 독점수단으로 주로 지방관으로 나간 사람들이
재력을 동원하여 만든 사실은 다 아는 것이지요.
양반이라도 곤궁하게 살다보면 그런 족보에 포함되지 못하고(돈이 없거나 소식을 몰라)
3~4대를 지나면 족보를 모르는 그런 옛날 양반 후손이 되면
양인이나 노비로 전락하는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조선조 후기 대략 1700년이후 부터는 족보를 만드는 일이 좀 쉬워지고
세력있는 양반에게 끼어붙어 그 성씨족보에 들어가면 본래의 성씨 본관사람이 줄어들지요.
더구나 1894년 갑오경장후에는 반.상(班.常)이 타파되어 누구든지 성을 갖게 되면서
본래 어느 양반에 속하던 노비들도 다 그 성씨로 들어가 족보에 오르니 폭발적으로 그 성씨인구가 증가 되었답니다.
우리 광주안씨중에도 다른 안씨로 간 집안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니 예를 들면 제주도에서 수백년 다른 본관의 안씨로 살던
종인들이 본래의 선조의 기록문헌을 소중히 지녀오다가 그 근거문서를 고증하여 찾아온 일도 있습니다.
이같은 성씨역사의 성쇠는 몇개로 설명하기에는 어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 개인생각으로는 천년의 세월이나 그간에 살아온 그때그때의 환경을 보면
지금 살아있는 광주안씨가 5만명이라 하여 적은 수는 아니다 여깁니다.
약간 자손이 적게 늘어났다는 정도라 여깁니다.
추가: 나의 작은 문중은 1510년대에 장수오성에 자리잡고 살게 된 나의 14대조의 후손이
지금 살아있는 숫자는 5~600명에 지나지않습니다.500년의 세월에도.
오히려 정통 광주안씨 후손이다 라고 자긍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