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디터백성호
#궁궁통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고(故) 차동엽 신부를 만나서
물은 적이 있습니다.
고(故) 차동엽 신부는 “가난한 마음은 곧 영적인 가난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가난한 마음이란
곧
‘영적인 가난’이라고 했다.
영적인 가난,
그게 왜 중요한가?”
차 신부는
안경테를 손으로 올리더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삶에서
안전장치를 마련하려고 한다.
돈을 통해,
직장을 통해,
가족을 통해,
명예를 통해 그것을 구축한다.
그리고
그 안전장치가
굳건하게 버텨주길 바란다.
그런데 이런 안전장치는
결국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 말 끝에 제가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거기에 큰 기대를 건다.
그런 안전장치가
왜 결국 무너지게 마련인가?”
“그건 궁극적 안전장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안전장치는
영원할 수가 없다.
언젠가 무너지게 돼 있다.
그래서 ‘영적인 가난’이 중요하다.
‘영적인 가난’의 바탕에는
무너지지 않는 안전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갈릴리 호수의 수면 위로 저녁 노을이 내리고 있다. 예수 역시 저 노을을 바라보며 영원한 평화를 설하지 않았을까. 백성호 기자
그 답을 듣고서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영적인 가난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우리는 구체적인 일상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영적으로 가난해진다는 건
실질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걸까요.
그걸 알아야
우리가 영적으로 가난해질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 물음에 차 신부의 답이
이어졌습니다.
“이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누리려고 하는 거다.
내게 주어진,
이미 주어진
이 하늘의 은혜, 자연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사는 거다.
그게
영적으로 가난한 거다.”
#궁궁통2
차 신부의 답을 듣고서
저는 한참이나
눈을 감았습니다.
우리는 다들
행복을 원합니다.
내게 없는 행복을 찾아서,
내가 그걸 소유해야
행복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순간은
나에게 오지 않습니다.
그런 소유의 행복은
늘 100m쯤,
내 앞에서 끊임없이
앞서 달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잡히지 않습니다.
소유를 통한
행복의 눈높이,
그게 자꾸만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나자렛의 수태고지 교회에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 빛과 어둠의 대조가 아름답다. 백성호 기자
차 신부는
그러한 삶의 태도를
바꾸어 보라고 권하더군요.
이 세상을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이 세상을
한번 누려보라고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쫓으며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 무언가의 대부분은
소유의 대상입니다.
아침에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
귓가를 스치는 바람,
붉게 쓰러지는 노을,
밤하늘에 돋아나는 별.
내게 이미 주어져 있는
자연의 신비,
자연의 은혜,
하늘의 은혜를
지금껏 제대로 누려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대신 늘 쫓거나,
아니면
쫓기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삶은 항상 피곤하고
우리는 늘 허덕입니다.
차 신부는
그런 삶의 태도를 바꾸면
달라질 거라고 하더군요.
행복의 밀도가
달라질 거라고 했습니다.
#궁궁통3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죽어서 천당 가는 걸 떠올립니다.
예수께서 설하신
산상수훈의 팔복이
과연
저 세상의 행복만
이야기하는 걸까요.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세상의 행복과는
상관이 없는 걸까요.
갈릴리 호숫가에 들풀이 피어 있다. 멀리 호숫가 도시 티베리아스가 보인다. 백성호 기자
물론
아닐 겁니다.
이 세상의 행복과
저 세상의 행복은
서로 연결돼 있을 테니
말입니다.
차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구리 두 마리가 있다.
우물 안 개구리와
우물 밖 개구리다.
그들이 보는 하늘은 다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집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보고
행복하려고 한다.
반면
우물 밖 개구리는
하늘에 달린 별을 보고
행복해한다.
그런데
우물 밖 하늘을 보면
다시 우물 속으로 들어가도
개구리의 삶은 달라진다.
여유 있고,
지혜롭고,
넉넉하고,
자~알 살 수 있게 된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개구리로 살 것인가의
문제더군요.
우물 안 개구리로 살 건가,
아니면
우물 밖 개구리로 살 건가.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면서 살 건가,
아니면
밤하늘의 광활한 별을
보면서 살 건가.
소유의 삶인가,
아니면
누리는 삶인가.
갈릴리 호수 위를 비행하는 새들이 자유로워 보인다. 소유의 삶과 누리는 삶, 어느쪽에 보다 자유로운 삶이 있을까. 백성호 기자
그에 따라 갈리더군요.
하늘나라가
우리의 것인지,
우리의 것이 아닌지
말입니다.
에디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