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의 길은 여기에 있으매 두려워지고
나는 갑니다 하는 말도
다 못하고 가버렸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가지에 낳아 가지고
가는 것 모르누나
아아 미타찰에서 만나볼 나는
도를 닦아 기다리련다.
(양주동 해독)
삶과 죽음의 길은
이(이승)에 있음에 두려워하여
나는(죽은 누이를 이름) 간다고 말도
못 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같은 나뭇가지(한 어버이)에 나고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으 극락세계(저승)에서 만나 볼 나는
불도(佛道)를 닦아서 기다리겠다
---
아름다운 정토시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 신앙사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정토시가 태어났습니다. 저 옛날 시이지만, 지금 현대인의 정서에서도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불교시라고 하면, 선시만 있는 줄 알지만 --- 사실, 이렇게 아름다운 정토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21일 법련사에서 보조사상연구원의 월례학술발표회 토론시간에 이 "제망매가" 이야기가 나왔는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국문학 전공 교수님의 이야기였는데, 지금 국문학계에서는 이 시를 이렇게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누이를 추모하는 이 시에서,
제목 그대로 제문인 이 시에서
화자인 오빠가 미타찰, 아미타불의 극락국토에 먼저 간다.
그것은 스님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먼저 극락국토에 가서 도를 닦으면서
죽은 누이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누이는 윤회를 하다가 극락에 오게 되면, 그때 만나자
---- 이렇게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해석입니다. 그냥 옛날에 다 의미가 밝혀진 것인데 ---
뭔가 자꾸 뒤집어 엎어서, 제대로 전이 익지도 안 했거나 더 타버리는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합의가 된 것은 그냥 놓아두어도 좋은데, 뭔가 새로운 연구성과를 내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떤 추모시나 조시에서도, 망자가 육도윤회하다가 극락에 가기를 기원하지 않습니다.
극락에는 그렇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는 정토신앙의 기본에도 어긋납니다.
정토신앙에서 극락은 바로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돈오적으로 갑니다.
당연히 죽은 우리 누이는 극락에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시에서는 어떻게 표현되느냐 하면,
극락에 가있을 것으로 믿는다는 식으로 말하게 됩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추모시를 쓸 때도 그렇습니다.
미타찰에서 만나볼 나는
장차 미타찰에서 너를 만날 나는 지금 이 사바세계에서
인연이 다 해서 미타찰에 갈 때까지는
도를 닦으면서
그 날을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이렇게 배웠습니다. 다 ---
그런데 쓸데없이, 무슨 다 완성된 해석에서 새로운 해석을 내놓느라고
학자들이
천착한 결과, 불교의 정토교리에도 어긋나고
추모시 작자의 마음에도 어긋나고
추모시의 문법에도 어긋나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안타깝고도 놀라운 일입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