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은 우리와 마음이 잘 통합니다. 너그러운 마음, 따뜻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진짜 모범 감독님이세요”
2009년 9월, 다함께! 굳세게! 끝까지! 화합과 희망의 축제 한마당 제29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 여수에서 개막된 이 대회에서는 서울, 대전, 울산 등 16개 지역 7천여 명이 참가해 총 24개 종목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겨뤘다.
울산만민교회 박정웅 집사가 감독을 맡고 있는 울산광역시 육상팀 및 육상실업팀은 이 대회에 참가해 총 30명의 선수가 금메달 14개, 은메달 15개, 동메달 15개를 획득,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두었다. 전국 최초 장애인 육상실업팀 감독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는 그를 ‘만민뉴스’에서 만나보았다.
제26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 때 심판 선서를 한 박정웅 집사(우측에서 세 번째).
박정웅 집사는 고등학교 시절 체육 선생님의 권유로 육상에 몸을 담았다. 그는 특기생으로 경성대학교 체육학과에 입학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상 선수생활을 그만둬야 했다. 사무직, 운전직, 볼링 강사 등을 전전하며 생활을 꾸려갔다.
1995년, 당시 마산만민성결교회 주총봉 전도사의 전도로 마산만민성결교회에 등록했고, 아내 주영선 집사를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주일 성수에 대한 개념도 없이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했다. 2000년, 그의 가족은 울산으로 이사하여 울산만민교회에서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내는 나름대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과 짝하며 살았다. 어느 날, 스포츠센터 차량을 운행하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다. 이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면서 물질의 어려움을 겪게 됐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게 짜증을 내거나 세상을 비관하지 않았다. 가장의 역할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등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회개했다. 연단을 거치면서 낮고 낮은 마음이 되고, 다른 사람의 아픔도 느낄 줄 알게 되었다.
◈장애인들을 위한 자원봉사
2004년, 그는 울산동여자중학교 육상코치직을 맡았다. 또한 자원봉사로 장애인들을 주님 사랑으로 돌보며 훈련시켰다. 그들의 아픔이 곧 그의 아픔이었다. 밥도 먹이고 목욕도 시키며, 심지어 용변한 뒤 닦아주는 일 등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하는 삶 자체가 그에겐 천국생활과 다름없었다. 이런 그를 보고 주변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코치 봉급으로는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휴직 기간 중 진 신용카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는 아내와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사무실 청소하러 나가는 아내를 보며 그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아내 주영선 집사는 남편 대신 일을 다니고 빚 독촉에 시달리는 고단한 삶이었지만 인내하며 단 한 번도 불평불만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자고 오히려 남편을 격려했다.
“맞벌이를 해도 생활이 되지 않았어요. 카드 빚 등 부채가 많아 힘든 상황이었죠. 내 힘과 의지로는 아무래도 안되겠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내는 서울에 올라와 금요철야예배 전에 당회장 이재록 목사에게 남편의 믿음과 직장에 대한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를 받았다. 그 후 그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장애인 육상실업팀 최초 감독
2007년 10월, 평소 장애인을 사랑하는 그의 성실한 모습에 감동을 받은 체육계 인사들이 장애인체육회 육상실업팀 감독을 제의한 것이다. 그 당시 울산광역시에서는 장애인 복지 사업을 확대하면서 장애인체육회를 만들고 실업팀을 창단하려 했다. 팀 창단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창단 절차도 까다롭고 의견도 분분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게다가 이력서도 내지 않았는데 감독직을 맡아달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그는 처음엔 믿지 않았다. 아내가 직장문제를 놓고 당회장 이재록 목사에게 기도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감독을 맡은 후 그에게 어려움도, 마음 아픈 일도 많았다. 선수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많이 울었다. 손을 못 쓰는 사람이 식사를 대접한다며 손수 반찬을 만들 때 그는 눈물을 삼키며 밥을 먹었다.
비장애인 감독을 맡았다면 명예나 성취감이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장애인 감독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설령 메달을 따지 못하더라도, 명예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그들을 위해 헌신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울산광역시 종합운동장. 다리를 절단했거나 앞이 보이지 않거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각기 다른 장애를 갖고 있는 선수들을 지도하며, 그들의 손발이 되어 주는 그는 마냥 행복했다.
항상 선수들을 가족처럼 여기니 감독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쌓이고, 선수들 실력 또한 눈에 띄게 향상되어 갔다. 그가 하나님 말씀대로 섬기고 희생하는 만큼 선수들이 하나가 되어 구슬땀을 흘렸다.
예전에 아내는 주요 경기가 있을 때마다 당회장 이재록 목사에게 기도받고 출전하라고 권면했다. 하지만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가 기도받은 뒤부터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어찌하든 믿음으로 하려는 아내의 사랑이 진하게 느껴져 하나님께 의지해야겠다는 왠지 모를 강한 힘이 그를 이끌었다. 그는 경기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당회장 이재록 목사에게 기도받은 권능의 손수건(행 19:11~12)과 무안단물을 사용해야겠다는 믿음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