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 1장 20-23절입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주변 상황이 다 무너진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제 2탄이 나옵니다.
2장 1절-3절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대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엄청난 난관에서도 변함이 없는 욥을 한번 봐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4절에 사단이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 말은 목숨이 붙어 있으니 소유가 없어도 버티잖아요. 이 말입니다.
그래서 5절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뼈와 살을 치소서는 육체의 병을 허락하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6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그래서 7절-10절에는 욥에게 질병이 오고 그의 아내가 9절에서 변절합니다.
9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욥의 반응은 좋은 것을 받았은즉 나쁜 것도 받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받는다는 말은 운명적인 것 아니냐 굉장히 옳은 말 같습니다.
욥1장 22절에는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므로
모든 일에 이 엄청난 주변 상황으로 인하여 욥이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2:10절 보세요.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그전에는 욥이 범죄치
않았다고 했는데 이제는 입술로만 범죄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2:11절에 드디어 세 친구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욥의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혀 칠일 칠야(7일)를 아무 말도 못합니다.
친한 친구의 급변한 상황에 얼마나 놀라고 안타까우면 그랬겠습니까?
13절 “밤낮 칠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 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칠일을 밤낮 함께 하면서도 도무지 유구무언입니다.
이 셋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좋은 욥의 친구들입니다.
그 다음 3장을 보세요. 욥이 드디어 무너집니다.
1절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여러분의 신앙을 한번 돌이켜 보세요. 마음에 원망이 있고, 불평이 있고
속이 엄청 상해도 사람들이 어느 정도 참는데 까지 참습니다. 왜 그럴까요?
차마 입으로 죄를 안 지으려고요. 참고 참다가 마음으로 갈등하고 속이 상하지만
입술로만 어찌하든지 원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버티고 버티다가
드디어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합니다. 입술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지금 누구 얘기입니까? 다 듣고 보니 내 말 같지 않아요?
많은 사람들의 속에는 여러 가지 갈등이 있어요. 과연 나의 신앙이 옳은가?
하나님이 과연 이런 분인가? 내가 가는 길이 정답인가? 갈등이 있고 번민이 있고
여러 가지 생각이 있지만 입술로는 언제나 하는 말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다.
반드시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실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목사의 사역에서 이런 것이 참 힘들어요. 분명히 속으로는 이 사람이 복의
길을 가지 않고 어둠의 길에 처해 있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서는 ‘권사님 하나님이 권사님의 억울함을 다 아십니다.
이 풍랑 인연하여서 주께 더 빨리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해 줘야만 목회를 하게 되는 고충입니다. 성도들의 자존심이 너무 셉니다.
자아가 너무 셉니다. 모든 일을 자아와 욕심으로 교회의 일을 하는 것 같아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측은하게 여겨야 복이 옵니다. 하나님이 얄밉게 보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얄밉게 보시면 천하에 어떤 인간도 복을 받을 길이 없어요.
하나님이 보시고 ‘내가 도와줘야지. 저 어린 것들을 내가 아니면 누가 돕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셔야지 서푼어치도 안 되는 걸 들고선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제발 꼴값하지 마세요. 이런 사람들 때문에 목사들의 사역이 참 힘들어요.
그 다음에 3장 20절 보세요.
“어찌하여 고난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절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22절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욥은 지금 죽음으로도 고통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겁니다.
자살은 실제로 생의 애착이 강한 사람이 하는 것이지 자살을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욥은 무슨 얘기냐 하면 ‘죽어도 내 고통이 끝날 것 같지 않아 죽지도 못하겠다’
이겁니다. 지금 욥은 그런 상태입니다.
23절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욥은 지금 죽으면 영 어디론가 빠져버릴 것 같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들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의인은 믿음에 살아진다고
말하는 바울의 신지식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아득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24절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난다는 말은 밥상을 받아놓고 아 이걸 먹고
내가 더 살아야 되나 하는 탄식입니다. 욥은 지금 죽을 용기도 없습니다.
죽고 나서도 이 고통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죽을 용기도 없고 밥상을
받아 놓고 탄식만 나오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이게 욥의 상태입니다.
사실은 사람이 죽을 용기만 있어도 그 용기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저도 옛날에 부산 영도의 자살 바위 위에서 내려다보고 뛰어 내리고 싶은
충동을 받았지만 뾰족 바위를 보니 너무 아플 것 같아 뛰어내리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영도다리를 건너다가 바다에 뛰어 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이번에는 너무 추울 것 같아서 뛰어 내리지 못한 용렬한 사람입니다.
그런 저를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부르시고 얼레시고 달래셔서 주의 보좌에
나아가는 비밀을 터득하게 하시고는 험한 세상 길 나 홀로 가도 외롭지 않으오
비바람 속을 나 홀로 가도 내 맘에 두려움 없어 하고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건 죄인이었던 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중생의 씻음을 받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진리를 따라 주의 보좌에 나아가서 뒤돌아보고 나의 좌표를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베푸신 은혜를 깨닫고 진리를 따라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앙앙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영광을!
아멘~~아멘~~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의와 평강의 왕께 찬양을!!